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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동구 옥수동 달맞이봉 아래 위치해 있는 미타사다.
조선시대 이래 청량사(현재 동대문구 청량리동) 보문사(현재 성북구 보문동) 청룡사(현재 종로구 숭인동) 등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비구니사찰로도 유명한 곳이다. 미타사는 남산에서 응봉으로 이어지는 남산 끝자락인 종남산에 위치하고 있어서
종남산 미타사라 하며, 두뭇개에 있어서 예로부터 두무개승방이라고도 불렸다.
조계종에 소속된 사찰이면서 독립된 암자가 모여서 절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에는 천불전을 건립하였다. 미타사를 구성하는 8개의 암자는 대승암 · 칠성암 · 금보암 · 금수암 · 정수암의 다섯 암자와
용운암 · 관음암 · 토굴암의 셋이다. 앞의 다섯 암자는 각기 법당을 가지고 있으며, 뒤의 셋은 극락전과 천불전 등의 공동법당을
사용하고 있다. 성보문화재는 목조 아미타불상과 괘불도, 아미타불도, 관음보살도, 지장시왕도 등 불화 23점이 소장되어 있다.
8개의 암자가 있는데 4년마다 8개의 암자에서 투표하여 대표 주지스님을 선출하며 각 암자는 그 암자의 스님이 독립적인 경영을 하고 있다.
암자마다 대웅전을 갖고 있으며, 다만 절 입구에 있는 천불전과 극락전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고,
개개의 암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통합 종무소가 별도로 있는 등 매우 특이한 절이다.
절 뒤의 산봉우리가 1백명의 과부가 나타날 형국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비구니 사찰을 확장할 적절한 곳이라 여기고
조선 중기에 암자들을 합쳐 미타사라 했다는 설화도 전해내려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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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사는 바로 왕실에서 후원하는 사찰이었다.
철종 13년(1862) 당시의 세도가였던 풍양 조씨 일문을 대표하고 나라의 최고 실세였던 대왕대비인 조대비가 거금을 하사하고,
풍양 조씨 가문의 부지 기부로 극락전을 중수하고 당우를 수리하였다.
조대비가 어떤 의도로 미타사의 중수를 도왔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왕실에서 후원한 것은 사실이다.
고종 연간 개금단청불사를 하고 대방을 새로 지었으며 칠성각과 천태각을 보수하는 등 일련의 중창 불사를 단행하였다.
조선 후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도 꾸준하게 새로운 건물을 짓거나 옛 건물을 고쳐 지어왔다.
특히 개화기 이후 경기도 일원에 있는 많은 토지를 매입하거나 기부 받아
1940년대 초반 절의 택지가 39필지 2만 7,000여 평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1940년대 미타사는 대단히 번성하였던 시절로 일제 말기 부유한 사찰이었으며,
이 시기 미타사는 봉은사의 말사로 역할을 하였다.
미타사는 신라 진성여왕 2년(888)에 세워졌다고 절의 안내자료는 설명한다.
이의 사료와 기록이 미흡하거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순조 27년(1827)에 쓰인 『종남산미타사무량수전초창기』와 1943년 안진호가 편찬한 『종남산미타사약지』 등의
자료에서 조선시대 후기에 절을 중창하였다는 기사를 만날 수 있다.
대략적으로 조선시대 초기에 현 금호동 남산 기슭의 조그마한 암자로 시작하지 않았겠나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한 추정의 단서로는 일반적인 절의 안내 자료에 현 옥수동에 있었던 왕실경영의 메주가마를 자하문 밖으로 옮기고 나서
가마가 있던 자리로 이전했다든지 또는 조선시대 중기 무렵 조그마한 암자를 합쳐 가람을 형성하였다는 내용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를 증명할만한 사료가 없어 확인할 길은 곤란하지만 터무니없는 사실을 적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순조 24년(1824) 현재의 이곳에 무량수전을 비구니 대원스님이 중창하여 1827년에 완료하였다.
기록에서 처음 보이는 미타사의 모습이다. 고지도에서도 미타사의 모습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비교적 한양도성과 도성 밖 성저십리의 모습을 자세히 그린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도성대지도」에는
지금의 옥수동인 한성부 남부 두모방(豆毛坊) 두모포(豆毛浦)에 미타사를 지칭하는 표기가 없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에 간행된 「도성도」와 「경조5부도」, 「수선전도」 에는
한결같이 두모포에 니사(尼舍)가 표기되어 있다.
니사는 비구니가 거주하는 집, 즉 비구니사찰로 현재의 미타사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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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사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함께 자주 다닌 곳으로 유명하다.
이주영의 책 <이승만과 그의 시대>는 이승만과 미타사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어머니는 당시의 보통 아낙네들처럼 어린 아들을 데리고 절에 다녔다. 그 절들은 북한산 대남문 밑의 문수사와 옥수동의 미타사였다.
나중에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1957년에 82세의 나이로 문수사까지 걸어 올라갔고, 그 때 써 준 현판이 그 절에 아직 보존되어 있다."
이승만은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다녔던 미타사를 대통령이 되고나서 자주 찾은 것이다.
당시 경내에는 위장병에 특효였다는 옥정수골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그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옥수동사무소 부근의 박샘 물맛이 그 옛날 옥정수골물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지하암반층에서 분출되는 이곳의 물은 임금 수라상에 올라갈 정도로 단맛과 신맛이 섞인 천연수였다.
앞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뒤로는 종남산이 병풍처럼 휘둘려 있어 마을이 형성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옥수동이 물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집성촌이 되기까지는 여주·광주지역의 보부상들과 도성을 오고가는 물장수들이 정착하면서
이뤄졌다. 여기에 터줏대감인 뱃사공과 한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가세해 마을 규모가 더욱 커졌다.
미타사를 중심으로 사하촌이 형성된 시기도 이즈음이다.
약수동 버티고개 길과 금호동 길을 넘어가는 양옆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미타사 사하촌은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대부분 스레트집으로 양철을 두른 담장이 특이했다.
굴뚝을 앞쪽으로 낸 것도 볼거리지만 담장에 걸친 어망이 마치 어촌을 상상할 정도였다.
대부분 가난에 벗어나기 위해 생업에 뛰어든 사하촌 사람들은 미타사에 큰 법회가 있으면 온 동네잔치가 될 정도로 인정이 넘쳐났다.
미타사 주변 하늘높이 서 있는 옥수현대아파트와 대우아파트 자리는 그 옛날 사하촌 1세대들이 기거한 곳으로
인근 너른바위가 이들의 술자리가 되곤 했다. 지금은 아파트군에 가려 그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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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입구에는 동빙고(東氷庫) 터와 사한단(司寒壇) 터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빙고는 얼음을 얼리고 보관하는 관서이고 사한단은 빙고와 관련이 있는 제사시설이다.
사한단은 조선시대 빙고에 얼음을 저장할 때와 꺼낼 때 수우신(水雨神)인 현명(玄冥)씨에게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서,
얼음이 잘 얼게 해달라고 동빙제(凍氷祭)와 기한제(祁寒祭)를 지냈다. 이는 1908년에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