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안조씨 21원파 / 76지파 의 종류 - 장흠종원님- (원파 14번/ 지파 1번 참고바람)
@ 21원파 / 76지파<원파표기=1. 2. 3.~/ 지파표기= 1) 2) 3)~ 표기하였습니다>
* 원파 : 1. 통판공파(通判公派) 파조: 13대 휘(諱) 덕(德)
* 지파 : 1) 통판공파(通判公派) 파조: 17대 휘(諱) 영도(榮道)
* 원파 : 2. 충순공파(忠順公派) 파조: 13대 휘(諱) 세생(世生)
* 지파 : 1) 충순공파(忠順公派) 파조:
* 원파 : 3. 사인공파(舍人公派) 파조: 11대 휘(諱) 성길(成吉)
* 지파 : 1) 사온령공파(司온令公派) 파조: 13대: 휘(諱) 숙분(菽芬)
2) 암정공파(巖汀公派) 파조: 17대: 휘(諱) 가동(嘉東)
3) 가선공파(嘉善公派) 파조: 19대: 휘(諱)
* 원파 : 4. 고죽제공파(孤竹齊公派) 파조: 10대: 휘(諱) 안경(安卿)
* 지파 : 1) 고죽제공파(孤竹齊公派) 파조:
* 원파 : 5. 산원공파(散員公派) 파조: 11대: 휘(諱) 이(彛)
* 지파 : 1) 율원공파(栗園公派) 파조: 17대: 휘(諱) 덕면(德勉)
2) 농포공파(農浦公派) 파조: 17대: 휘(諱) 수도(壽道)
* 원파 : 6. 참지공파(參知公派) 파조: 12대: 휘(諱) 욱(昱)
* 지파 : 1) 장령공파(掌令公派) 파조: 17대; 휘(諱)효도(孝道)
2) 주부공파(主簿公派) 파조: 17대: 휘(諱)병도(丙道)
3) 동추공파(同樞公派) 파조: 17대: 휘(諱)휴도(休道)
4) 봉사공파(奉事公派) 파조: 17대: 휘(諱)계도(繼道)
5) 처사공파(處士公派) 파조: 17대: 휘(諱)경도(敬道)
6) 별제공파(別提公派) 파조: 17대: 휘(諱) 성도(成道)
7) 직장공파(直長公派) 파조: 17대: 휘(諱) 건도(建道)
8) 학생공파(學生公派) 파조: 17대: 휘(諱) 세도(世道)
9) 참의공파(參議公派) 파조: 17대: 휘(諱) 천도(天道)
* 원파 : 7. 참판공파(參判公派) 파조: 14대: 휘(諱) 순(舜)
* 지파 : 1) 참판공파(參判公派) 파조:
* 원파 : 8. 어모공파(禦侮公派) 파조: 14대: 휘(諱) 창(昌)
* 지파 : 1) 어모공파(禦侮公派) 파조: 17대: 휘(諱) 진도(振道)
2) 영천공파(永川公派) 파조: 17대: 휘(諱) 춘도(春道)
3) 삼송공파(三松公派) 파조: 17대: 휘(諱) 하도(夏道)
* 원파 : 9. 집의공파(執義公派) 파조: 14대: 휘(諱) 삼(參)
* 지파 : 1) 승지공파(承旨公派) 파조: 17대: 휘(諱) 준남(俊男)
2) 낙천공파(樂川公派) 파조: 17대: 휘(諱) 영남(英男)
3)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파조: 17대; 휘(諱) 귀상(貴祥)
4) 방호공파(方壺公派) 파조: 17대: 휘(諱) 준도(遵道)
5) 무과공파(武科公派) 파조: 17대: 휘(諱) 검개(儉凱)
* 원파 : 10.판결공파(判決公派) 파조: 14대: 휘(諱) 적(績)
* 지파 : 1) 처사공파(處士公派) 파조: 17대: 휘(諱) 난수(蘭秀)
2) 통정공파(통정공파) 파조: 17대: 휘(휘) 일도(逸道)
3) 참봉공파(參奉公派) 파조: 17대: 휘(諱) 득도(得道)
4) 봉사공파(奉事公派) 파조: 17대: 휘(諱) 입도(입道)
* 원파 : 11.사과공파(司果公派) 파조: 14대: 휘(諱) 발(發)
* 지파 : 1) 송헌공파(松軒公派) 파조: 17대: 휘(諱) 완벽(完璧)
2) 가선공파(嘉善公派) 파조: 17대: 휘(諱) 응도(應道)
* 원파 : 12.우후공파(虞侯公派) 파조 : 14대: 휘(諱) 건(騫)
* 지파 : 1) 통정공파(通政公派) 파조: 17대: 휘(諱) 서도(瑞道)
2) 고성공파(固城公派) 파조: 17대: 휘(諱) 응도(凝道)
3) 통훈공파(通訓公派) 파조: 17대: 휘(諱) 정도(靜道)
4) 부사공파(府使公派) 파조: 17대; 휘(諱) 경(儆)
5) 참의공파(參議公派) 파조: 17대: 휘(諱) 익도(益道)
* 원파 : 13.내헌공파(耐軒公派) 파조: 14대: 휘(諱) 연(淵)
* 지파 : 1) 동계공파(東溪公派) 파조: 17대: 휘(諱) 형도(亨道)
2) 송포공파(松浦公派) 파조: 17대: 휘(諱) 종악(宗岳)
3) 신당공파(新堂公派) 파조: 17대: 휘(諱) 수도(守道)
4) 남포공파(南浦公派) 파조: 17대: 휘(諱) 순도(純道)
5) 지악공파(芝嶽公派) 파조: 17대: 휘(諱) 동도(東道)
6) 처사공파(處士公派) 파조: 17대: 휘(諱) 희도(熙道)
7) 동지공파(同知公派) 파조: 17대: 휘(諱) 면도(勉道)
8) 간송당공파(澗松堂公派) 파조: 17대: 휘(諱) 임도(任道)
9) 덕천공파(德川公派) 파조: 17대: 휘(諱) 유도(由道)
* 16대파조: 諱 탄(坦) 도암공파/통칭
10)우제공파(愚齊公派) 파조: 17대: 휘(諱) 위도(衛道)
*16대파조: 諱 방(방)두암공파/통칭
11)동추공파(同樞公派) 파조: 17대: 휘(諱) 미도(味道)
* 원파 : 14.남계공파(南溪公派) 파조: 14대: 휘(諱) 수만(壽萬)
* 지파 : 1) 대소헌공파(大笑軒公派) 파조: 17대: 휘(諱) 종도(宗道)
2) 함경공파(咸鏡公派) 파조: 17대: 휘(諱) 기년(己年)
3) 호암공파(호巖公派) 파조: 18대: 휘(諱) ㅇㅇ(ㅇㅇ)
4) 판서공파(判書公派) 파조: 17대: 휘(諱) 신도(信道)
5) 감찰공파(監察公派) 파조: 17대: 휘(諱) 민도(敏道)
6) 동은공파(東隱公派) 파조: 17대: 휘(諱) 원도(元道)
7) 어모공파(禦侮公派) 파조: 17대: 휘(諱) 사도(思道)
* 원파 : 15. 절도공파(節度公派) 파조: 14대: 휘(諱) 수천(壽千)
* 지파 : 1) 도사공파(都事公派) 파조: 17대: 휘(諱) 현도(顯道)
2) 통정공파(通政公派) 파조: 17대; 휘(諱) 천도(川道)
3) 충절공파(忠節公派) 파조: 17대: 휘(諱) 산도(山道)
4) 첨정공파(僉正公派) 파조: 17대: 휘(諱) 영도(詠道)
5) 사미당공파(四味堂公派) 파조: 17대: 휘(諱) 중립(中立)
6) 부윤공파(府尹公派) 파조: 17대: 휘(諱) 의탁(義卓)
7) 도정공파(都正公派) 파조: 17대: 휘(諱) 영도(英道)
8) 승의공파(承義公派) 파조: 17대: 휘(諱) 석문(碩文)
9) 인계공파(仁溪公派) 파조: 17대: 휘(諱) 광벽(光璧)
* 원파 : 16. 현감공파(縣監公派) 파조: 14대: 휘(諱) 수억(壽億)
* 지파 : 1) 현감공파(縣監公派) 파조:
* 원파 : 17. 참봉공파(參奉公派) 파조: 13대: 휘(諱) 야호(野虎)
* 지파 : 1) 참봉공파(參奉公派) 파조:
* 원파 : 18. 소윤공파(少尹公派) 파조: 10대: 휘(諱) 충(忠)
* 지파 : 1)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파조: 17대: 휘(諱) 령(齡)
2) 동지공파(同知公派) 파조: 17대: 휘(諱) 웅도(雄道)
3) 천계공파(泉溪公派) 파조: 17대: 휘(諱) 근도(根道)
* 원파 : 19. 제학공파(提學公派) 파조: 11대: 휘(諱) 강(講)
* 지파 : 1) 제학공파(提學公派) 파조:
2) 교위공파(校尉公派) 파조: 17대: 휘(諱) 택도(澤道)
3) 참봉공파(參奉公派) 파조: 17대: 휘(諱) 충도(충道)
* 원파 : 20. 덕공공파(德谷公派) 파조: 11대: 휘(諱) 승숙(承肅)
* 지파 : 1) 현감공파(縣監公派) 파조: 12대: 휘(諱) 종의(從義)
2) 제학공파(提學公派) 파조: 12대: 휘(諱) 종례(從禮)
* 원파 : 21. 전서공파(典書公派) 파조: 10대: 휘(諱) 거(거= 王+居)
* 지파 : 1) 전서공파(典書公派) 파조:
(보기)
상기(上記) 원파(原派)1~21번/원파(原派)갈래1)~2)~3)등은 지파(支派) 표시입니다.
원파 밑 지파표시란의 같은 명칭은 대문중 중론시/소문중에서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
* 충의공 대소헌선생 휘(諱) 종도(宗道) 자료
@ 자료 1.
황석산성(黃石山城) 전투(戰鬪) 1597년 정유년(선조 30년) 8월 16일.
1. 관계 장령 및 피아 교전 병력.
* 아군측 - 안음 현감 곽 준, 전(前) 함양군수 조 종도(趙宗道) * 병력 미상 *
도별장전(前) 김해부사 백사림, 경상도 조방장 곽 재우
* 적군측 _ 서생포성-加藤淸正(1 만명) 기장성-黑田長政(5 천명) 中川秀成, 吉川廣家
김해성-鍋島直茂, 鍋島勝茂 (1 만 2 천명) 長曾我部盛親,야田秀氏
* 병력 합계: 2 만 7 천명 *
2. 전투전(戰鬪前) 의 일반개황(一般槪況)
황석산성은
현재 경남 함양군 안의면/서하면 봉성리 황석산(1190m) 에 위치하며,
남강 상류의 북쪽에 있는 삼국시대에 쌓았다고 하는 고성(古城) 의 일부로,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산성(山城) 으로 쓰다가,
이후 폐하여, 수리도 아니하였던 석성(石城) 인데,
석축의 주위가 2924척(885.972m)의 자그만한 성(城) 이다.
거창에서 소백산맥을 가로 지르는
육십령(六十嶺:도적이 많아서 60명 이상이 같이 넘어야 한다는
옛날 이야기에서 명명(命名) 하였다 한다) 을 넘어서 전주로 빠지는 요충 지점이어서,
정유재란 당시 안음현(安陰縣)의 사인(士人) 정유영이 수성지책을 먼저 강조하였으며,
체찰사 이원익이 이에 동의하고 안음현, 거창현, 함양군 세 읍(邑)의백성들과 군사들을 모아
안음현감 곽준으로 하여금 여기를 지키도록 명령(命令)을 하였다.
곽준은 몸소 돌과 흙을 나르면서 성(城)을 수리하고 병기와 기재(器材)를 정비하였다.
전(前) 함양군수 조종도는 비록 현직의 관(官)은 아니지만
가족들을 데리고, 성(城)안에 들어와서 하는 말이
"나도 또한 왕신(王臣) 이니 어찌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 하지 않을 손가 ! " 하였다.
이때 이 성(城)의 수장(首將) 이였던 곽준은 자(字)가 양정(養正) 이고
호(號)가 존재(存齋)였는데, 천자(天資)가 명순하고, 효우순지 하여,
중년에 이르러, 과거의 일을 폐하고, 마음을 성현의 학(學)에 두고 의리를 구궁(究窮)하였다.
사람을 을 만나면, 순순유액(詢詢誘掖)하여 그소업(所業)에 따라 힘쓰게 하였으므로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모두 애모(愛慕) 하는바 되었었다.
이 때에 천거(薦擧)를 받아 현정(縣政)을 다스리게 되니 일경(一境)이 대치(大治)하게 되고
사민(士民)이 모두 그를 따라 같이 성(城)안에 들어가게 되였다.
여기에 김해부사 백사림도 도별장(都別將)으로서 성(城)에 들어와 같이 지키게 되었다.
이때 서생포성에 있던 적장 가등청정과 기장성에 있던 흑전장정,
그리고 김해성에 있던 鍋島父子의 군(軍)은 2 만여명으로서 10만 대군이라 칭하고,
서진(西進)하여 창녕현에 들어 왔는데,
전(前) 의병장인 곽재우는 낙동강 양안(兩岸)의 4 군(郡)의 병력을 이끌고
화왕산성(火旺山城:창녕군 동북 약 2리 소재)에 들어가 사수(死守) 키로 하였다.
가등청정의 군사가 성(城) 밑에 들어와 장차 공위(攻圍) 하려고 하니,
성중의 장사(將士) 들이 무서워 하는 기색이 있는지라,
곽재우는 이들을 타일러 가로되 " 두려워 하지 말라.
적도 또한 병법을 아는 자들이니 어찌 나를 감히 엽수이 여길손가." 하였다.
이때 성중에는 맹사(猛士) 이진남과 그의 2제인 흥남과 경남,
두 사람을 비롯하여 김사형과 그의 제(弟) 사정등이 같이 지키고 있던 터였다.
가등청정이 성을 우러러 보니 형세가 심히 험준고현(險峻高懸) 하고
성중이 고요하면서도 살기(殺氣)가 등등하여 하늘을 덮은지라
일주야(一晝夜) 동안이나 서로 맞대고 있다가 마침내 공위(攻圍)하기를 단념하고,
그대로 옆을 통과 하여 초계군과 합천군을 지나 안음현에 진출하니
황석산성(黃石山城)의 수병(守兵)들이 산성을 견수(堅守)하면서
불굴의 태세로 적의 진로를 3면으로 가로 막고 있었다.
3. 전투경과(戰鬪經過)의 개요(槪要)
적(敵) 우군(右軍)의 총 지휘인 모리수원은 양산성에서 흑전장정을 비롯하여 鍋島父子,
그리고 야田秀氏와 中川秀成및 長曾我部元親 드의 군사를 집결케 하였는데,
이때에 선봉이될 가등청정의 병력은 7월 25일에 서생포를 출발하여 양산에서
주력군과 합친다음 전기(前記)와 같이 전진하여
8일 중순에 황석산성을 할수없이 돌파키로 결심하고, 다음과 같이 공격부서를 정하였다.
남면 공격대장-가등청정, 서면공격대장-과도직무, 동면 공격대장-흑전장정,
이와같이 포위 태세를 갖춘 적은 죽책을 결하여 산성에 근접한 다음
16 일밤의 중추명월을 이용하여, 일제히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성안에서는 곽준, 조종도를 비롯한 여러 장사(將士)들이
활을 쏘아 적을 꺼꾸러트리고, 돌을 던져 적의 근접을 막았으며,
부녀자들까지 화살을 수리하고, 돌을 날랐으니
국민 총동원의 전투와 같은 정경(情景)으로 치열한 싸움을 되 풀이 하였다.
성중에 개산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비는 김해 사람으로서 일찍부터 적에 붙어서 적의 함성(陷城)에 협력하고 있었는바
이날밤 성밖에서 통변하는 사람이 와서 크게 소리 치기를
"개산아, 너의 아버지가 여기 와 있다. 곧 문을 열고 나와서 너의 아버지를 만나보라" 하매
도별장 백사림은 개산을 잡아서 성밖으로 던져 죽였다.
적이 말하되 "개산은 너의 사람이니 비록 백사람의 개산을 죽인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 하였다. 이때에 도별장인 백사림은 두마음을 갖고 있던 터인지라
자기의 가족을 먼저 도망치게 한뒤에
북쪽 성문을 열어서 적을 성안으로 끌인 다음 자기는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다.
적은 성안으로 일시에 물밀듯이 쳐들어 왔으며,
성중의 군사들은 칼과 창으로서 맞아싸워, 피아간에 서로 사상자를 내게되고,
만월의 달빛이 고요한 가운데 인간들의 추악한 살육전은 계속 되어 갔는데,
중과부족으로 궁박하게된 수성의 장병들은 궁현이 끊어지면 칼을 빼어싸우고,
창이 부러지면 곤봉을 들어서 적을 쳤는데 ,
맨 마지막에는 돌과 맨주먹으로 필사를 기하여 끝까지 싸우는 것이었으나
드디어 죽는자가 500명에 달 하였다.,
전 함양군수 조종도는 부조전래(父祖傳來)의 갑옷으로 몸을 무장한후 일장검을 빼어들고,
닥아오는 검은 그림자를 향하여.한번 휘두려니 하나의 적을 죽이고 또 한번 휘두려니,
또 다른 인마가 쓰러지는데, 아군의 수는 점점 줄어들지만,
흑영(黑影)은 더욱 많아지기만 하는 것이었다.
곽이상과 곽이후는 같은 형제로서 안음현감 곽준의 아들이였는데,
형제가 서로같이 창과 칼로서, 형이 말을베면 동생은 말위의 적을 쏘았으며,
동생이 적장을 쏘면 형이 그 목을 잘라, 감히 그 앞에 다가서는 적이 없었다.
이때에 그의 아버지 곽준 역시 용전한 결과 그의 앞을 막아서던 적은 모두 그자리에 쓰러져
죽어서 한 언덕을 이루니 가등청정의 맹사(猛士)들도 감히 덤비지 못하고,
패색마저 감추지 못 했다. 가등청정의 부하인 森本儀太夫 등은 결사의 힘을 다하여,
남쪽 성문에 선등한 다음 모든 공격력을
그의 한 사람에게만 결집시켜서 급히 공격하게 되었다.
북문(北門) 쪽의 적을 막고있던 조 종도(趙宗道)는 만신혈귀(滿身血鬼)가 되어서도
오히려 태연한 모습으로 곽준 켵에 다가와서,
서로 명월(明月) 아래 마주회심의 미소를 띄우면서 <使道 --->하고 부르니
이심전심으로 칼을 짚고 북향재배(北向再拜) 하였는데,
적(敵)은 감히 근접 하지 못 하고 지켜 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이때 적의 부장인 神田對馬 라는 자가 곽준을 베려 함에 곽이상과 곽이후가 칼과 창으로써,
그를 물리치고 여기에 다시 월하(月下)의 격전(激戰0 은 되 풀이 되었다.
전운(戰雲)이 사라지자 조종도(趙宗道)와 곽준 이 종용(從容)히 죽은 켵에
곽이상과 곽이후 두 형제가 같이 죽어 있었고,
조종도(趙宗道)의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도
또한 품에 지녔던 장도를 꺼내어 장렬히 자결하였다.
나라의 영창(永昌)과 겨례의 영광(永光) 을 위해 고요히 잠든
이들 장병과 남녀 사민들의 머리 위에는 월색(月色)만이 교교(皎皎)할 뿐이었다.
4. 전투후(戰鬪後) 의 개황(槪況)
적(敵) 은 뜻 하지않게 고전하던끝에 마침내 이 성을 함락시키게 되자,
산곡(山谷) 을 모조리 뒤지면서 닥치는 대로 수없이 참살(斬殺) 을 하였고,
뒤이어 육십령을 넘어서 진안현을 거쳐 전주 평야에 진출하여,
좌군 주력과 합친 후 여기에서 몇일간 유진(留陣) 하다가
25 일에는 전주성을 파괴하기에 이르럿다.
이싸움에서 부사의 최고직을 지니고 도별장으로 있으면서 가장 먼저 도망치게된
백사림(白士霖) 에 대하여 안음의사(安陰義士)인 유우순(劉禹淳)이
조정에 참(斬)하기를 상소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
소재(所在)에서 베어 죽이려다가 선조 31년 1월 7일 에 장췌 한 다음
그대로 놓아주었으니 매우 진기(珍奇) 한 일이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안음현감인 곽준에게 병조참판을,
그의 아들인 곽이상과 곽이후 에게는 각각 공조정랑을,
또 전(前) 함양군수인 조종도(趙宗道) 에게는 이조참판을 추증(追贈) 하였다.
곽이상의 처 신씨(愼氏)는
그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임하(林下)에 자진하여 죽었다.
조종도(趙宗道)는 뒤에 누증(累贈)되어 이조판서가 되고,
향인이 충현사(忠賢祠) 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그의 묘(墓)는 처음에 황석산성 부근에 있었다가, 뒤에 진주로 옮겼으며,
비명(碑銘)에[許友不辭死는 義也라. 殺身而殉國은節也라. 惟義惟節은 忠臣之節也라]하였다
적은 전주에서 회의를 하고 금후의 방침을 정한다음 우군인 모리수원, 가등청정, 흑전장정의
3대 약 4만명은 여기에서 더욱 북진하여, 공주방면으로 향하고,
장정아부원친 부자와 과도직무 부자 그리고 길천광가, 지전수씨, 중천수성 등은
좌군에 편입되엇는데 이때 좌군은 충청, 전라 양도의 침략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 일 화 (逸 話) #
* 유문호(柳文虎)의 처(妻) 곽씨(郭氏) 의 죽음
곽씨는 안음현감 곽준의 딸인데,
그의 남편인 유문호와 같이 산성에서 싸우다가 성(城) 이 함락 되매
그의 아버지와 동생들의 죽음을 본 다음 죽지않고 도망쳐 나와서 이 보다 먼저 탈출 하였던
그의 남편을 찾아 산성밖을 헤매게 되었다.
뒤에 그의 남편이 이미 적에 잡혀갓다는 말을 듣고
그의 몸종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버지와 동생들이 죽었어도 같이 죽지 못 한것은
내 낭군이 살아계시기 때문이였는데, 이제 낭군마저 적에게 잡혀갔으니
내 또 무엇을 믿고 산다 말인고, " 하고 스스로 장도로 목을 찔러 죽었다.
* 전(前)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의 시(詩)
조 종도는 산성에 들어가기에 앞서 하는말이
" 내가 오랫동안 사대부의 뒤를 따랐던 사람으로서 어찌 도망쳐 다니는 무리들과 같이
초간(草間) 에 숨어서 살수 있으랴 ! 죽어서 마땅하면 죽어야 할 것이로다." 하고
그의 처자들을 데리고 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성안에서 다음과 같은 시(詩) 를 지었다.
공동山 外生猶喜 巡遠城 中死赤榮
공동山 (黃帝가 갔다는 山이니 宣祖의 西狩를 말하는 것) 밖의 사는것도 즐거웠지만
巡遠城(唐나라현종때에 사절한 장순과 허원이 사수한 (애陽城)을 지키다 죽는것 또한
영광 일세 ! <典據: 宣祖 寶鑑 9권>
* 조종도(趙宗道)의 처(妻) 전의이씨(全義李氏)의 순절(殉節)
이씨는 참찬 이준민의 따님이였는데,
성중에서 같이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게 되니
그의 남편인 조종도(趙宗道)가 죽음을 이미 각오하고,
그의 처에게 두아들을 데리고 성밖으로 탈출하라 권하거늘,
이씨는 대답하되 " 마땅히 의(義)를 쫓아 죽을 것이옵기에 떠날수가 없사옵니다. " 하고
그의 두아들만을 탈출 시키기로 하고, 아들에게 타 이르기를
"너희들은 살아서 이 원수를 갚은뒤에 조씨가문(趙氏家門) 을 이어 나가되,
춘추 제사(春秋祭祀) 를 끊지 말아다오" 하고
남편과 같이 종용(從容)히 순절(殉節) 하시었다.<영남지, 진주읍지, 대소헌선생 신도비>
* 곽재우의 위풍
가등청정등이 황석산성을 함락시키고, 승승장구로 전주에 향하니,
호남과 영남의 여러 읍성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도원수 이하 모두 망풍(望風)하여 퇴병(退兵)하고,
군사들이 도산(逃散)하나 홀로 곽재우만은 부동자약(不動自若)하거늘,
관찰사 이원익은 곽재우의 성(화왕산성)이 고립되고 지키기 힘들것을 염려한 나머지
그에게 군사를 풀것을 명령 하였는데, 곽재우는 대답하기를
"제나라의 70성이 모두 무너졌으되卽黑城 만은 홀로 남아 있었으며,
당나라 군사 100만이 쳐들어 왔으나 안시성 만은 능히 항전 할수 있었사오니
열군(列郡)이 비록 패주한다 할지라도
홀로 이성을 보전하지 못할바 없으리이까."라고 하였다.
(연나라 악의가 제나라를 칠때 전단이 즉흑성을 끝내 막아내었고,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칠때 양만춘장군이 안시성을 지켜서 끝내 이겼다)
<宣祖中興誌 5 券 丁酉>
* 사화(私貨) 로써 기민(饑民:굶주린 백성) 을 구한 현감(縣監)
조 종도(趙宗道)는 본역초(本役初)에 초유사 김성일과 같이 근왕한 공상(功賞)으로
장약원 첨정에 이어 단성현감이 되었는데,
이때에 국내가 대기(大饑:크게 굶주림) 하였으므로, 관창(官倉)을 폐하여 진휼하였으나
아직도 모자랐으므로 사화(私貨:개인 재물) 를 내어서 까지 굶주리는 백성을 위하여
구휼(救恤) 하는데 힘썼다.<진주읍誌, 대소헌선생 신도비>
# 소 평 (小 評)
이 전투는 야간에 있어서의 산성공방의 일례인데,
유성룡은 그의 산성론(論0에서 이싸움에서 아군이 패한 원인이
산성에 숲이 우거지고 시계가 불편한 탓이라고, 간단하게 말하고 있으나,
그것이 원인의 전부라 할수없다. 백사림등 일부 비겁한 분자들의 탈주로 말미암아
거성일심(擧城一心)을 이룩하지 못한 것을 도외시 할수없다.
여기에서 야전(夜戰)의 특색이 무엇인가를 살펴 본다면,
공방을 막론하고 야전의 가장 불리점이[우수한 장병의 손실이 많다]는
전사적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고,/야음은 비겁한 사람에게는 도망치는 기회를 주고,
용감한사람에게는 손상하는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야전의 공통적인 해점(害點)에는 여러가지가 있을것이니 운동의 불편으로 신속한 행동이
곤란하고, 연락의 불편으로 협동이 힘들고, 지휘의 통일이 곤란할뿐 아니라,
암흑으로 말미암아 착오가 생기기 쉬울 것이지만
우수한 장병의 손실이 많다는 것은 숨기지 못할 사실로서 가장먼저 지적하고,
역설한다면 우수한 군사가 아니고서는 야전의 승리가 힘들다는 것이다.
조총의 힘보다도 백병 무기의 힘이 더욱 유효하다는 야전의 특성을 놓칠수 없는 것이다.
* 조종도 선생의 약력 *
함안 인 이시며, 함조(咸趙) 13충의 한분 으로서
자(字)는 백유(伯由) 요, 호(號) 는 대소헌(大笑軒)이시다.
부친은 諱 안 이시며, 중종 32년 정유(1537년) 2월 5일에 출생 하시였다.
소시(少時)에 남명 조식(曺植)선생에게 사사(師事) 하시였으며,
생원시에 합격한뒤 천거로 안기찰방, 사도시직장, 상서원직장, 통례원인의, 장례원사평,등을
역임하시고, 선조 16년(1583년) 양지현감으로 나아가 목민관의 선정을 다하시며,
사재를 털어 백성의 기근을 구휼 하시어 선정을 베푸시니,
임금께서 표리(임금이신하에게 내리거나,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었던 옷의 컽감과 안감)를
하사 받았으며, 선조 20년(1587년) 금구(金溝: 지금의 전북 김제)현령을 지내시고
병신년에 함양군수를 역임하셨다. 정유재란때 열읍(列邑)이 모두 망풍분주 하였는데,
홀로 황석산성만은 안의현감 곽준이 사수하기를 굳게 작정하니
곽준과의 임진란 결의를 지키기위하여,
조종도선생께서는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성중에들어가,
합심 방수(防守)하시다가 성이 드디어 함락되니 같이 북향재배하고 전사하시어 순절하셨다.
때는 8 월 16 일이고, 연세 61세였다. 충의라 시호가 내려지셨으며,
뒤에 사복사 첨정을 추정하셨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가증(加贈)하셨으며,
향인들이 충현사를 세우고 배향하였다.-끝-
@ 자료 2.
조 종도(趙宗道) 는 김성일 , 류성룡, 김우옹 등과 교유한 동격(同格) 의 명현으로서,
항상 해학으로 주변을 웃겼다. 잦은 감옥 나들이에 우는 가족이나 심각한 옥중 사람들을
항상 웃겨놓는 그런 일화를 많이 남기신 분이다. 호도 대소헌(大笑軒) 이다.
감정 을 도발하거나 감정적인 행위를 배제하는 성리학의 상류사회 에서
그 반사적인 감정적 인물이 영합된 것은 그의 학행이 크기 때문인 것이다.
그의 장인 이준민(판서) 이 '동국에 인물을 들라면 조 종도 밖에 없다" 할 많큼
출충한 그릇이였던가 보다 !
정유재란때 황석산성을 고수 하다가 수성의 주장인 백사림이 도망치는 바람에
성이 함락하여 곽준과함께 조종도는 그의 부인 이씨와 더불어 순절 하였던 것이다.
그 심각한 상황에서도 산다는 장난을, 크게 3 번 웃었다 한다.-인상적인 큰 그릇이다.
<전거: 한국인의맥/경상도편, 이규태著(1987년 3월15일)/한국출판사>
첫댓글 제적등본에는 함양 조씨라고 기재되어있는데 대소헌 공후손이라고 부진한테들었늣데 본이잘못기재된거지알고싶습니다
함양조씨는 함안조씨 의 표기를 잘 못한것 같예요 족보를 찾아 법원에 신청하여 정정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함안조씨 역사연구회 밴드가 개설되어 있으니 질문사항 가입하셔서 해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