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와소금 2024년 봄호 시인조명 - 나기철 시인
시인조명 ①
나기철 시인
나기철 신작시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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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 외 9편
나기철
며칠 전 모임 끝나고 얼굴 모르는 다른 팀들과 식사를 하는데, 여자들 얼굴이 각양각색이다. 콧등이 들어가거나 너무 늙어 보이거나 남자다운 얼굴이거나 마른 참새 같거나. 여자들도 다 그렇구나.
집에 와 생각하니 아내는 괜찮은 얼굴이다. 코도 오똑하고, 피부도 곱고, 통통해 건강미도 있고. 그래서 만났을 게다. 그땐 날씬했지만. 그래 스물여섯 살 가을 서귀포 ‘소라의 성’ 밖에서 파도 소리 들으며, 1년 후 결혼하자! 했을 것이다.
아내는 예쁘다.
구제주
바닷물 와 다 삼킬 듯
정민당약국
빛바랜 슬라브집 1층
닫혀 있다
약사와 그 아내
오십여 년
자그마니
앉아있던
오늘
버스 타고 가다 보니
닫혀 있다!
그 위
칼호텔도 팔려
다 비어 있다
눈발 스치는
악력 ․ 2
서정춘
시집 <죽편>
1941년 전남 순천 출생.
순천 매산고등학교(야간부) 졸업.
오규원
<현대시작법>
1941년 경남 밀양 삼랑진에서
출생하였고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세룡
시집 <채플리의 마을>
1947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으며
서울공업고등학교 인쇄과를 졸업했
다.
송일영
<제주도 올레와 정낭>
1962년 제주 생
한림공업고등학교 졸
제주전문대학 졸
건축사
악력들이 세다!
빗방울
아들이 사는 집에
처음 와
손수 해준
짜장면
탕수육
만둣국
맛나게 먹으면서도
말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먹고 바로 일어섰습니다
오랫동안,
먹으면
씹는 근육
뭉쳐서
여기
제주동초등학교 앞 ‘가곡교실’ 가려고 어둑해진 시청에서 내려 갈아타고 중앙로에서 내려 동문 로터리로 가려 신호등 앞에 서 있으니,
아, 내가 여기 학교를 다 나와 직장을 끝내고 또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가 살고 있구나. 여기 섬에 살다 여기 묻히겠구나, 했다.
괜찮다!
김포공항에서 단팥빵을 하나 사서
2번 탑승구 부근에 앉아
이걸 어떻게 먹을까
이번에도 왼쪽으로만 씹을까
조심조심 오가는 사이
오른 쪽 이 아래 근육이
불편해진다
오래전부터
그래 한번 양쪽으로 번갈아
생각 없이 먹자 하고
양쪽으로 오가며
우적우적 먹으니
괜찮다!
얼마만인가
또 하나 먹어도
여자의 버스
6시쯤 연삼로에서 버스를 탔는데 자리가 꽉 찼다. 세 보니 남자 8명, 여자가 16명, 비율이 1:2다.
두 정거장 지나니 남 4명, 여 12명, 1:3으로 더 벌어졌다. 거의 직장인인 듯하다.
젊은 여자가 아이에게 전화를 한다.
30년이 화들짝! 지나갔다.
말은 안 해도
새벽에 오줌 누러 거실 쪽으로 가다 보니
컴컴한데 아내가 누워 폼롤러를 하고 있다
아침에 아내가 상자에 서울 딸에게 보낼
당근, 대파, 무김치, 감자를 담는다
수년째 마시는 인삼을 달여 놨으니
오늘부터 마시라 한다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아침 반찬을 준비하고 있다
“말은 안 해도,
어딘가 늘 아프지?”
하니,
그렇다 한다
그 집
서울에 가려고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시집을 꺼내 읽다가 그 집을 지나쳤다. 고개를 젖히니 회색 건물만 한 그이가 거기 맑게 웃고 있었다. 하이얀 구름을 뒤로 하고.
팬티들
마을 끝에서 두 번째
우리집은 베란다에
내가 빨래를 너는데
오늘도 아내의 팬티는
잘 안 보이게 넌다
옆 끝 집은 초로의 여자가 넌
빨래들 사이
여자 팬티가
마당 귀퉁이 건조대에서
우리 집 쪽으로 걸려 있다
끝에서 세 번째 옆집도
초로의 여자가
마당 빨랫줄에 넌
빨래들 사이
여자 팬티가
안세미오름보다 더 높이
나부낀다
나기철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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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
나기철
결국 나는 중2 이래, 활자가 주는 아름다움, 그 감동에 빠져 감성의 글, 시와 산문에 빠져….
문창반 개강을 위해 김종삼을 다시 보니 나는 박용래적이기보다 김종삼 쪽이다. 용래의 서정은 맞되 내 디아스포라적 정서 등은 종삼에 가깝다. 이숭원의 그에 대한 글은 탁월하다. 백석, 영랑, 미당, 목월 시에 대한 해석들. 위대하다! 종삼과는 다르게 그를 잘 계승 발전해야겠다. 따스한 인정, 평화에의 갈구, 가난한 자세 등 그의 시 정신을 늘 간직해야겠다.
며칠 전 만나 식사를 한, 자전적 에세이 『만각과 자탄』을 낸 제주신문 강정만 편집국장이 자기는 유종호 교수의 전작 독자라고. 문학 전공이 아닌 분인데 좀 놀랐다. 또 함께 한 정영자 수필가는 자기는 김훈, 이어령의 애독자라 했고, 아내는 장석주라고.
애독자를 가진 작가는 행복하다. 그의 책을 다 읽고 또 책이 나오는 대로 구입해 읽거나 그의 글을 때때로 읽는. 나도 이런 몇 시인이 있었다. 나의 시를 이렇게 좋아하는 이가 과연 있을까. 늘 두고 읽는. 그런 이가 단 열 명만이라도 있다면.
강정만 국장이 내 시집 세 권을 읽고 내 애독자가 됐다고 얼마 전 그 신문에 쓴 글을 생각한다.
김사인 시인 소식이 뜸한 것 같아 그의 시집 두 권을 꺼내 읽는다. 뒤에 임우기, 최현식의 글이 있다. 그는 지금까지 시집을 세 권만 냈다. 2015년에 세 번째를 냈으니 9년이 됐다. 2~3년에 한 번씩 시집을 내는 시인도 많은데 그는 10년에 한 번쯤 낸다. 정희성 시인도 비슷하다. 시를 마구 쓰고 발표하는 게 아니라 절절해야 쓰는 것이다. 그래야 읽는 이도 절절히 읽는다. 우리가 살면서 절절한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도 시들은 참 많이 쓴다. 나도 많이는 못 쓴다. 한 달에 두어 편이면 많다. 시집을 준비 중인 요즘은 그래서인지 시가 잘 안 나온다. 나중에, 떨어지는 시를 마구 써 대어 그전에 쌓은 이미지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안 쓸지언정.
서정춘 선생과의 카톡에서, 『호서문학』 여름호의 초대시 3편 중 처음 것은 신작, 나머지 두 편(‘도서관에서 만난 여자’, ‘사랑 노래’)은 대표작이라 하니, ‘알다마다, 대표작 관리를 잘하시네’라고 쓰셨다. ‘대표작 관리’라는 말. 시인의 ‘竹篇’처럼 회자 되는 작품이 한 편이라도 있다면 성공한 거 아닐까. 그래 선생 말씀처럼 대표작 관리도 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여기서는 ‘서귀포에는 내가’?
시집을 냈지만 성급하게 개인에게서든 어디에든 좋은 반응을 기대하지 말 것. 쏟아지는 시집들 속에서.
좋은 것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드러날 수 있는 것. 아니어도 어쩔 수 없는 것. 내 존재 증명으로 만족할 것.
성악을 하는 여성, 또 미술을 하는 여성. 시집을 보내려 하니 선뜻 보내길 주저하게 되는. 그들이 시를 좋아하지 않을 듯해.
인접 예술에 대한 관심이 적은 예술한다는 이들!
시집을 늘 가지고 다닌다는 싱어송라이터 최성수의 얘기를 들으러 ‘연백시사’에 가며.
제주의 음악인 오승직이 신문 칼럼에 제주의 음악도 밝고 아름다운 것이 많아져야 한다는 글을 보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다.
오늘 신문에 제주에 와 30여 년이 된 이왈종 화가에 대해 화려하고 밝은 이미지로 제주 생활을 즐거움을 표현한다는 기사.
4·3의 슬픔은 슬픔대로, 삶의 기쁨은 기쁨대로!
나기철羅基喆 문학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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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성천군 영천면 대자파리가 고향인 아버지 나윤섭(羅允燮)과 평남 안주군 신안주면 원흥리가 고향인 어머니 김복석(金福錫), 1951년 한국전쟁 1.4후퇴 때 각각 월남.
아버지는 평양에서 사업, 어머니는 평양간호조산전문학교에 재학 중이었음. 1952년 서울에서 결혼.
1953 :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72-7 출생.
1958 : 가족이 강원도 원주로 이주. 1군사령부가 멀리 보이는 원주 시내 외곽 학성동에서 삶. 어머니가 집에서 양계 를 했고, 학성국민학교에 다님. 아버지 군납업체 동흥실업사 운영.
1964 : 가세가 점점 기울어지고 아버지 지인이 있는 부산으로 가족이 이주. 영도의 영선국민학교 6학년 전학. 남항 동 시장에서 식료품 가게. 장사가 잘 안 돼 영선동 산으로 이사. 8월 가족이 제주로 이주. 제주동국민학교 전학. 가 족 제주항 동부두 창고 2층에서 몇 달 살고 지인이 있는 조천읍 신촌리로 감.
1965 : 오현중학교 입학. 제주시 화북동 원명사에서 살게 됨. 환속한 고은 시인이 있었음. 방 청소 등을 하며 2년 간 시인의 행적을 옆에서 봄. 절 부설 베나레스도서관 서고에 드나들며 책 읽음. 『대학국어』에 나온 한국 현대시에 크게 매료됨. 매우 내성적이었음.
1966 : 12월 원명사 나옴.
1967 : 이후 학원문학상 입선 2회.
1968 : 3월 제주신문사 주최 제1회 3월학생문예(현 제주학생문예) 중등부 산문 당선. 오현고등학교 문예장학생 입 학. 5월 정영택 선생 댁에서 시내 고교 문학동인 〈湖心〉 결성. 짝사랑하는 여학생 어머니가 갑자기 타계한 여름날 밤, 그 집 앞에서 재수 중인 고교 3년 선배 문무병(시인, 민속학자)과 운명적인 듯 만남. 아버지 뇌졸중으로 쓰러 짐. 반신불수.
1969 : 제2회 3월학생문예 고등부 시 가작. 오현고등학교 학생회 부회장. 2학년 2학기에 선배들의 3선개헌 반대 교 내집회로 촉발된 재단분규로 졸업 시까지 어수선한 학교 생활을 보냄.
1970 : 제3회 3월학생문예 고등부 시 당선(「수선화」). 화제가 되었고 크게 고무됨.
1971 : 제4회 3월학생문예 고등부 시 당선. 이후 내내 제주문단에 등단한 느낌을 가짐.
1972 : 제주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고교 때 작품을 뽑아준 문학평론가 김시태 교수와 가까이 지냄. 소라가(소라다방 이 있던 거리) 입구의 회심다방에서 문무병과 ‘2인시화전’ 엶(이후 한 번 더).
1975 : 제3회 제대문학상 시 당선. 제대문학회 회장.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최종심. 여름, 시내 옥림여관에 든 소 설가 황석영을 친구 김용훈과 수소문하여 만남. 이후 현재까지 관계가 이어짐.
1976 : 미당 서정주 시인 화갑 기념 전국 순회 시화전 제주관광호텔. 안내하며 서정주 시인 만남.
1977 : 곤혹스러운 대학 시절을 보낸 후 제주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78 : 한림공업고등학교 임시교사. 안덕중학교 교사로 간 후에는 왠지 적응이 잘 안 되었고, 가정교사 오인순(吳仁 順) 만남. 밤에 허니문하우스가 보이는 서귀포 ‘소라의 성’ 밖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1년 후 결혼하자고 함.
1979 : 오인순과 결혼. 아버지 별세.
1980 : 신성여자고등학교로 옮김. 준비 안 된 결혼, 직장으로 혼미한 나날이 이어짐. 다음 해 제5회 3월 학생문예 고 등부 시 당선을 했던 김광렬(시인)이 춘천 성수고에서 옮겨옴. 시 얘기를 많이 하게 됨. 문예부 조직. ‘신성문학의 밤’ 시작. 딸 혜미(惠美) 출생.
1982 : 김시태 교수(한양대)에 의해 모르는 사이 『시문학』 5월호에 시 「悲願」, 「山 위에 누워」 초회 추천(심사 김광림, 유경환). 제주시 수눌음소극장에서 ‘5인시 발표회’(문무병, 김광렬, 김승립, 김수열, 나기철).
1983 : 송상일, 오경훈, 고시홍, 장일홍, 문무병, 김광렬, 김승립과 〈경작지대〉 동인 시작. 1989년 해체 시까지 동인 지 4호 냄.
1985 : 아들 민형(民炯) 출생.
1987 : 『시문학』 2월호에 시 「원주」, 「제주해협」으로 추천 완료(문덕수, 이원섭, 권일송 선). 제주문인협회 사무국장(회장 한기팔). 이후 한기팔 시인과 각별하게 지내옴.
1988 : 제주시인 10인 신작시집 『탐라, 우리 바다의 영광』(박덕규, 정한용 엮음, 청맥)에 시 수록.
1989 : 『세계의문학』으로 등단한 서귀포의 윤주상을 만나고, 문무병 김광렬, 윤주상과 〈깨어있음의 시〉 동인 결성. 1991년 창간호. 이후 김수열, 김석교 참여. 2007년까지 띄엄띄엄 동인지 12호 냄.
1991 : 문충성, 김승립 시인과 『문학과지역』 지역 책임편집위원.
1992 : 후배 고원정 소설가의 주선으로 첫 시집 『섬들의 오랜 꿈』(둥지) 발간. 화가 강요배 귀향 후 고교 동기들 10 명 조배기 모임 결성, 제주 오름 등 다니기 시작함.
1994 : 한기팔 시인 소개로 한국시인협회 가입.
1996 : 제2대 제주민예총 회장 강요배 화가의 사퇴로 각 위원회 대표의 공동대표 체제가 됐는데, 연장자라 하여 지 회장을 맡음.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 전공 수료.
1997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몇몇과 제주작가회의를 만들기로 뜻을 모으고 준비에 들어감.
1999 : 제주작가회의 창립. 초대 회장 문충성 시인. 제2시집 『남양여인숙』(현대시) 발간. 한기팔 시인과 아시아시인 대회(울란바토르) 참가.
2001 : 『21세기 한·일 신예시인 100인 시선집』(다층) 수록.
2002 : 귤림문학회 회장. 제주대 평생교육원 시창작반 담당(~2003). 제주시사랑회(제주시낭송협회 전신) 자문위원 (~현재).
2003 : 『좋은 시 2003』(삶과꿈)에 시 수록. 이후 5회 수록 후 발간 중단.
2004 : 제3시집 『뭉게구름을 뭉개고』(문학의 전당) 발간. 제5회 오현문학상 수상. 제주작가회의 제주문학관건립특 별위원회 위원장.
2005 :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삷과문화』 편집인.
2007 : 복효근, 오인태, 윤효, 이지엽, 정일근, 함순례와 짧은 시를 추구하는 〈작은詩앗·채송화〉 동인 결성. 현재까지 동인지 30호 냄. 『블로거들이 읽은 우리 시대 좋은 시- 아침에 시를 줍다』(북인)에 시 「사랑 노래」 소개. 딸 혜미 결혼.
2009 : 제주문학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
2010 : 제4시집 『올레 끝』(서정시학) 발간. 조금씩 환해지기 시작함.
2012 :‘권영민의 문학콘서트 6 -사투리와 함께 읽는 팔도 시 이야기’(공주문화원) 참여. 고재종, 정일근, 최명길, 구 재기, 나기철.
2013 : 신성여자고등학교 교사 명예퇴직. 시인으로만 살기로 함. 19년 살던 아라동 천일아파트에서 봉개동 명도암 은혜마을로 이사. 서정시학사에서 최동호 교수 만남.
2014 : 제5시집 『젤라의 꽃』(서정시학) 발간. 제주신문에 ‘시로 여는 제주아침’ 게재(200회). 제주철학사랑방 회장.
2016 : 서울 인문학 공부 모임 〈연백시사〉(월 2회) 가입. 공간시낭독회 명예회원.
2017 : 아들 민형 결혼.
2018 : 제6시집 『지금도 낭낭히』(서정시학) 발간. 공주시가 지원하는 제5회 풀꽃문학상 본상 수상. 제1회 서정시학 상(이후 서정시학 작품상과 통합)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도서 선정. 제주문화원 문화학교 문예창작 반 전담 강사(~현재까지).
2020 : 만해축전 한국시인협회 세미나 〈‘대학국어’에서 ‘채송화’까지〉 발표.
2021 : 창원시김달진문학관 ‘시야, 놀자!’ 초청 대담.
2023 : 제7시집 『담록빛 물방울』(서정시학)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