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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페르가몬 (Pergamon : 버가모)
권준부 추천 0 조회 205 13.03.04 01: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페르가몬 (Pergamon : 버가모) 

 

소아시아(터키)의 초기 7대 교회중 하나인 버가모(Pergamon) 교회

기원전(B.C : Before Christ 主前) 4~3세기(B.C 400~B.C300) 경의

헬레니즘(그리) 시대  

1. 페르가몬(Pergamon : 버가모 , Bergama)의 위치

 

페르가몬 (Pergamon) 현재 터키(Turkey) 서부의 이즈미르(Izmir)주 북쪽에 있던

도시로, 기원전(BC) 4세기 경 알렉산더(정식 명칭은 알렉산드로스 3) 대왕 시절의 헬레니즘(그리스=헬라)시대의 고대도시 였으며, 터키의 아나톨리아의 북서쪽

미시아(시대에 따라서 리디아(성경에는 그리이스식 발음인 루디아라고 명명)

라고도 불린 고대 그리스 도시였고, 그곳은 에게 해에서 16마일 정도 떨어져 있으며, 카이우스 강 북쪽에 외따로 평지에서 불쑥 400미터 정도 솟아있는 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터키 베르가마(Bergama) 시 주택가 뒤편 저 멀리로 보이는 아크로폴리스 산 400미터 꼭대기(정상)에 희미하게 왕궁터와 트라야누스 신전 잔해가 보인다. 저 높은 산 정상에 있는 왕궁에 기원전(B.C) 4세기에 어떻게 물을 댈 수 있었을까?

 

 

 좀 더 가까이서 본 페르가몬(Pergamon : 현재의 베르가마)의 아크로폴리스 동산 : 산 정상에 트라야누스 신전의 대리석 기둥 잔해가 보인다.

 

 

아크로폴리스 산 정상에 있는 트라야누스 신전 : 로마의 트라얀 황제 때 세운 신전이다. 당시에 페르가몬 왕국과 로마 사이의 긴밀하고 끈끈한 했던 유대관계를 보여 주는 건물인데, 이곳은 제우스(그리스 최고의 신)를 숭배하는 신전으로 쓰였다.

 

 

아스클레피온(고대 좋합병원) 비아 텍타의 대리석 열주들과 평지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 산 :

저 멀리 사진 뒷 배경으로 보이는 산이 바로 페르가몬 왕궁터가  있는 아크로폴리스 산이다.

산 정상에 희미하게 트라야누스 신전의 흰색 유적과 대극장과 성벽이 보인다.

아스클레피온 고대 종합병원은 산 아래 일반 거주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페르가몬의 아크로 폴리스 산은 평지에서 400 미터나 불쑥 돌출되어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아크로폴리스 산 정상의 트라야누스 신전의 또 다른 사진과 신전 지하의 석조 아치형 통로

 

 

2. 페르가몬(Pergamon)의 신화 속 기원

 

페르가몬 도시의 설립(형성)에 대하여 역사기록 이전의 그리스 신화를

소개하면, 트로이(Troy) 전쟁이 끝나고 헥토르(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태자로 트로이 연합군의 총대장 이었으며맹장이었는데, 결국에는 아킬레스에게 죽음) 아내였던 안드로마케아킬레우스(아킬레스 건(발 뒤꿈치가 약점)이라고 말할 적에 그 아킬레스를 말하며, 트로이 전쟁 중 파리스에게 암살 당함)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전리품(포로)이 되어 에페이로스로 끌려가 몰로소스피엘로스, 페르가모스

세 아들을(말하자면, 죽은 아킬레스의 세 손자임) 낳았다.

네오프톨레모스가 죽은 뒤(또는 그녀가 헤르미오네와 정식으로 결혼한 뒤), 안드로마케는 시동생이던 헬레노스의 아내가 되었으며(우리나라 고구려,부여 시대의 형사취수제와 같음), 헬레노스마저 죽자 몰로소스만 에페이로스에 남아 왕국을 다스리고 두 형제는 그곳을 떠났다.

그 뒤 에페이로스 사람들을 몰로소스 사람이라 부르게 되었다.

페르가모스는 어머니 안드로마케와 함께 소아시아 북서부의 미시아로 가서 카이코스 강변에 있는 테우트라니아 왕국을 정복하고 새로운 도시를 세운 뒤 자신의 이름을

따서 페르가몬이라고 불렀다.

 

3. 성경(Bible) 속의 페르가몬(Pergamon : 버가모)

 

페르가몬 (Pergamon) 그리스어(헬라어)로는 페르가뭄(Π?ργαμο?), 터키어로는 베르가마(Bergama) 라고 부르는데, 성경에는 버가모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소아시아 초기 7대 교회 중의 하나인 버가모 교회있었던 곳이다. 페르가몬 (Pergamon) 기원전 3세기에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로 기원전 2세기에 로마령(속주)이 되었는데, 헬레니즘(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교육(대형 도서관)과 의학(대형 종합병원)중심지였는데, 당시 종합병원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유적 아스클레피온을 아래에 사진으로 소개한다. 아스클레피온 고대 종합병원 입구 로비 자리에 있는 대리석 조각에도 지금과 같이 병원(의학)의 표시는 지팡이(모세의 지팡이)에 뱀이 감겨있는 모습이다 

 

아스클레피온(고대 좋합병원) 비아 텍타의 열주들 : 바닥에도 돌이 깔려 있고, 지하에 상수도와

하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다(고대 종합병원 아스클레피온으로 들어가는 길).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에 그런 상하수도 시설을 건설했다는 것이 경이롭기만 하다.

 

아스클레피온(고대 좋합병원) 내의 야외 원형 대극장

  

아스클레피온(고대 좋합병원)의 회랑 : 병원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의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에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언급이 되어 있는데, <요한계시록> 2 6절에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니골라당은 '니콜라이테스'(Nicolaites)로서 에베소(에페수스)와 버가모 (페르가몬)에 나타난 이단단체 였는데,

그들은 우상제물을 먹는 것과 성도덕의 문란으로 이교적 단체로 알려져 있음.)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편 버가모 교인 중에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요한계시록 2:15)”

나타나 있다.

또한 버가모는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의 전도 경유 여행지로 언급이 되어 있고,

이곳의 초기교회 신도들에게 보냈던 사도 바울의 서신도 있다.

 

그리고, 페르가몬 왕궁터의 가파른 언덕배기에 계단식 대형극장이 있는데,

극장 바로 아래 부분에 긴 회랑(복도)식의 디오니소스(Dionysos/Dionysus) 신전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디오니소스는 술과 연극의 신라고 불리는데, 다른 이름으로는

바쿠스(박카스: 酒神)로도 불리며, 이 신을 모시는 도시는 북부 아프리카 리비아에

있는 퀴레네와(성경에서는 구레네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현재의 지명은 알 베이다) 마찬가지로 쾌락과 향락의 도시였다.

(:)신을 주신(主神)으로 모셨으니, 관료들과 백성들이 얼마나 방탕한 생활을

했겠는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제자 중에 한 명이 설립한 학파 중에는 ()레네 학파있었는데, 그들이 표방하고 추구하는 철학이 쾌락주의였던 것이다.

그러니, 가히 사도 바울과 요한의 눈에는 타락하고 사악한 무리로 보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대극장과 아테나 신전 : 아크로폴리스 산의 가파른 언덕에 계단식으로 대형 극장을 세웠고,

극장 바로 윗 편에 탑처럼 솟아 있는 것이 아테나 여신을 모시는 신전이다.

산 너머 저 아래로 평지에 희미하게 현재 터키의 베라가모(Beragamo) 시가지가 보인다.

 

 

내 증명 사진 : 내 사진 바로 뒤로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돌계단으로 된 대극장과, 탑처럼 솟아 있는 아테나 여신 신전이 보이며, 산 아래 평지에 현재인구 8만의 베라가모(Beragamo) 시가 보인다. 페라가몬 왕국 전성기에는 인구가 약 20만에 달했다고 하니, 고대 도시의 규모로는 엄청 큰 도시였다.

 

 페르가몬(Pergamon) 왕궁의 복원도 : 대극장과 바로 그 아래 쪽에 옆으로 길게 늘어선 회랑 형태의 디오니소스 신전이 있고, 대극장 바로 우측에 누워있는 자 모양으로 제우스 대제단이 있는데, 이 제우스 대제단을 오스만 투르크 시절에 독일이 통째로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옮겨다 놓았다. 대극장과 제우스신 제단 사이에 조그맣게 보이는 건물이 아테나 신전이다. 주신(酒神)인 디오니소스의 신전이 이처럼 어마어마하게 큰 걸로 봐서 페로가몬 왕국이 얼마나 부유하였으며, 쾌락과 향락의 도시였는가를 짐작을 할 수 있다.

  

4. 역사 속의 페르가몬(Pergamon )

 

역사상에 기록으로 나타나는 페르가몬의 도시국가 형성에 대하여 살펴보면,

역사기록 이전의 히타이트(성경에는 으로 나오는데 세계 최초로 철기사용)

통치시기 및 기원전(B.C) 6세기에는 항구도시 에페수스(성경에는 에베소로 표기)와 함께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로 표기)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대왕(Cyrus : 성경 구약에는 고레스왕으로 표기)과 다리우스 대왕(Darius : 성경 구약에는 다리오왕으로 표기) 통치 시절에는 페르시아의 서부 소아시아의 주요 도시였고, 기원전 4 세기에 마케도니아(그리스) 알렉산더(헬라어 원어로는 알렉산드로스라고 부름)대왕의 장수였던 리시마코스(Lysimakhos),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원정 후에 32살의 젊디

젊은 나이에 아깝게도 열병(말라리아)으로 바빌로니아에서(현재의 이라크) 서거하자, 서부 소아시아 지방에 페르가몬 왕국을 세우는데, 그의 사후 페르가몬을 차지한 필레타이로스는 에우메네스(원래 에우메네스 알렉산더 대왕의 서기관이었는데, 알렉산더 사후에 장수들간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정적에게 희생당함)후손이었으며, 그는 페르가몬에 아탈리드 왕조를 세웠다.

페라가몬은 BC 3세기 전반에 트라키아 왕에게 복속하고 있었으나 필레타이로스가 헬레니즘 제국의 분열기에 새롭게 떠 오르는 지중해의 강자 로마 편에 붙어서

독립을 쟁취하고, 아탈로스 1 이르러 사실상의 왕국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에우메네스 2세 때에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하여

도시의 인구가 20여 만 명에 달하였고, 이집트 프톨레마이우스 왕조의 파피루스

수출 금지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운 기록 방법을 연구하게 되고, 그에 의해서 발명된

것이 '양피지'.

또한 이 양피지를 네모 반듯하게 잘라 여러 장 겹쳐 가죽 끈으로 묶는 새로운 제본

방법 '코덱스(Codex : 똑같은 크기의 종이를 쌓아 끈이나 아교 등으로 붙인 뒤

겉 표지를 씌우는 제본 방법. 현대적인 의미의 ''의 제조 방법이다.)'를 발명하게 된다. 에우메네스 2세는 책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였던 왕인데 그가 만든 도서관은

당시 유럽 전역에서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도서관에는 20만권 이상의 책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선조인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서기관으로 세계 최초로 도서관을

만든 사람이지만 그의 후손인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왕은 고대 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만든 사람이자 양피지와 제본술의 발명자이다.

 

현재 터키의 베르가마(Bergama)는 도시 곳곳에 분수와 공원이 있는 인구 8만명의

아담하고 쾌적한 도시다. 중심부에 전형적인 터키풍 시장이 있고 미로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과 아라베스크 문양의 창틀로 장식된 집들이 이슬람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마을 뒤로 우뚝 솟은 산에 펼쳐져 있는

고대 도시 페르가몬의 폐허다.

해발 396.2m의 산에 자리잡은 페르가몬은 생겨난 이야기부터가 가히 전설적이다.

페르가몬의 아탈리드 왕국은 트라키아 왕국의 붕괴 후 남은 나라이다.

아탈리드는 아탈루스의 후손인데 그는 필레타에루스의 아버지로 키아 왕국이

기원전 281년 붕괴할 때 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새로운 지중해의 강자 로마 제국의 충실한 지지자 였다.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그의 장군들은 제각기 자신의 관할지에서

왕국을 세우고 서로 치열하게 싸웠는데, 리시마코스(Lysimakhos 기원전 360~281)는 트라키아 지방과(현재의 그리스 동부,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지역) 에게해 건너편

터키 쪽 소아시아 지역의 에페수스(성경에는 에베소로 표기), 페르가몬(성경에는

버가모로 표기)과 트로이 등 서부 소아시아 지방을 차지했고, 알렉산더 대왕의 ]

오른팔 격인 프톨레마이우스는 이집트와 퀴()레네(성경에는 구레네로 표기되어

있으며 현재의 북아프리카 동부 리비아)를 통치했으며, 시리아와 가나안 지방을

비롯한 중동(오리엔트)과 옛 페르시아 영토와 인도 북부와 중앙아시아는

셀레우코스가 통치를 하였다.

구약성경 예레미아에 남방왕과 북방왕에 대한 예언이 나와 있는데, 그 남방왕이

프톨레마이우스 이고 북방왕이 셀레우코스이다.

 

리시마코스(Lysimakhos : 알렉산더 사후에 벌어진 그리스 장수들 간의 권력투쟁에서

동방의 통치자인 셀레우코스에 의하여 제일 먼저 제거됨) 9,000달란트(Talent : 성경에도 달란트로 표기)의 거금을 천혜의 요새인 이곳 페르가몬에 숨겨놓았다. 1달란트가

300마리의 가치에 해당했으므로 이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리시마코스가 시리아(같은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장수였던 셀레우코스)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자 보물 관리를 맡았던 필레타이로스(Philetairos 기원전 343~263)

이 돈으로 페르가몬에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리시마코스가 믿고 맡겼던 그 어마어마한 돈을 그가 전사하자 필레타이로스의

차지가 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은 페르가몬 왕국은 항상 새로운 강자인 로마의 편에 서서

싸웠기 때문에 번영을 거듭했다.

페르가몬 왕국이 원래 그리스 인이(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장수 리시마코스) 세운

나라이지만, 페르가몬의 필레타이로스는 경쟁자이며 적국이 된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우스 왕조와의 대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는 새롭게

떠 오르는 지중해의 강자인 로마와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자기 선조인 에우메네스가 그리스(=마케도니아) 장수 간의 권력투쟁에서

초기에 희생이 되었기 때문에, 모국인 그리스에 대하여는 반감을 가졌을 것이고,

또한 자기(필레타이로스)의 주군(主君)이었던 리시마코스가 동방의 같은 그리스

장군 출신인 셀레우코스에게 죽었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남기 위하여는 오히려 

경쟁국이며 적국인 로마와 친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기원전 190년에 로마(Roma)는 아시아의 마지막 그리스 왕국인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왕국(셀레우코스 왕조)을 멸망시킨 뒤 아시아 영토 전부를 페르가몬에

양도했다.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의 마지막 왕 아탈로스 3(Attalos III 기원전 170~133)

왕국을 마에 넘긴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로써 150년 동안의 페르가몬 왕국 역사는 끝났다.

그리고 곧 사람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시작도 끝도 모두 전설 같은 왕국이었다.

로마가 몰락한 뒤 페르가몬은 비잔틴 제국의(동로마 제국) 통치를 받다가 14세기 초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투르크의 손으로 넘어 갔으며, 현재는 터키 이즈미르(Izmir)

베르가마(Bergana) 시에 속하고 있다.

 

5. 페르가몬(Pergamon ) 왕국의 역사적 업적


이 왕국은 양피지를 뜻하는 영어 'Parchment'에 영원히 흔적을 남겼다.

이 낱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Charta Pergamenum(페르가몬의 종이)'이다.

역대 페르가몬의 왕들은 책 수집광들이었다.

특히 페르가몬 왕국 전성기 때의 왕 에우메네스 2(Eumenes II 기원전 197~159)는 책에 대해 광적인 애착을 가지고 있어 왕국 안의 모든 책을 뒤져 왕궁의 도서관으로

모아 들였다.

그 효과는 금방 나타나서 도서관의 장서 수는 20만권에 달해 당시 세계 최대 도서관이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과 맞먹는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집트의 파라오(=성경에는 바로로 표기) 프톨레마이오스 5(Ptolemaios V 기원전 210~180)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는 파피루스의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페르가몬 왕국이 책을 더 이상 새로 만들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갈대과 식물인 파피루스는 나일강 삼각주에서만 자랐다.

당시의 책은 30㎝ 정도 너비의 파피루스 양 끝에 둥근 나무막대를 댄 두루마리로 'Volume'이라 불렸다. '말다'
뜻하는 라틴어 동사 'Volvere'에서 파생된 말이다.

가장 오래 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기원전 3500년까지 올라 가지만 보통은 기원전

2500년부터 일반화됐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650년에 와서야 이집트에서 파피루스를 수입해 책을 만들었다.

파피루스를 구할 수 없었던 민족들은 얇게 말린 짐승 가죽에 기록을 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가죽을 다루는 기술이 조잡해 필기 도구로는 파피루스와

경쟁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집트의 파피루스 수출 금지는 페르가몬 왕국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기록을 하지 못하고 또 책을 만들 수 없게 되면 지식과 정보에서 경쟁국인 이집트(프톨레마이우스 왕조)에 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그 시대에는 책이 지식과 정보의 귀중한 매체이자 책 한 권의 값이 도시의

집 한 채와 맞먹을 정도로 귀중품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가전제품과 정보기기에 들어가는 칩을 얻을 수 없게 된 셈이니, 페르가몬이 느낀
위기의식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에우메네스 2세는 파피루스를 대신할 수 있는 서사자료를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페르가몬의 학자들과 기술자들은 가죽을 석회 물에 2주 동안 담갔다가 틀에

팽팽하게 잡아 말리면 파피루스에 버금갈 정도로 얇은 가죽을 만들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이렇게 해서 양피지가 발명되었다.

파피루스에 비해 가죽은 부피가 크고 만드는 과정이 복잡해 값이 비쌌다.

성경 내용을 전부 기록하려면 양 5000 마리의 가죽이 필요했다.

그러나 양면에 글을 쓸 수 있어 어느 정도 경제성도 맞출 수 있었고 또 보전성은 파피루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래도 문제가 남아 있었다. 양피지를 아무리 얇게 만들어도 파피루스보다

몇 배 두꺼워 두루마리를 만들 경우 지나치게 부피가 컸다.

이에 대한 페르가몬 사람들의 대응 방법도 상식적인 것이었다.

페르가몬 사람들은 양피지를 둘둘 마는 방법 대신 네모 반듯하게 잘라 한쪽

귀퉁이를 끈으로 묶었다.

이로써 현대 책 모양의 '코덱스(Codex)'가 출현했다.

두루마리에서 코덱스 형태의 책으로 발전한 것은 단순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엄청났다.

코덱스는 두루마리에 비해 정보 검색과 인용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우선 책은 자신이 원하는 부분까지 돌려야 하는 두루마리와 달리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단번에 옮길 수 있었다.

또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는 인용이나 검색을 쉽게 하기 위해 장과 절로 나누는

방법을 썼지만 코덱스는 각 쪽에 번호를 매겨 훨씬 쉽게 이 문제를 해결했다.

더구나 책 끝에 찾아보기를 붙여 정보의 이용도를 더 한층 높일 수 있는 것은

코덱스(Codex)에서만 가능했다.

파피루스와 코덱스의 이런 차이는 가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만큼이나

큰 것이었다.

이런 코덱스(Codex)의 장점에 힘입어 결국 양피지가 파피루스를 몰아냈다.

코덱스 형태의 책이 발명된 지 400년이 지난 기원후 4세기부터 동양에서 종이가

전해져 일반화되는 13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양피지만 사용했다.

파피루스는 시실리 섬과 같은 곳에서 기원후 14세기까지 명맥을 이어갔을 뿐이다.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정보 전쟁은 이렇게 페르가몬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페르가몬 도서관 폐허에 서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오늘날 페르가몬의 유적(제우스의 대제단(大祭壇))은 그 곳 유적을 발굴한 독일인이 자기조국 독일로 가져가서 현재 서(西) 베를린의 달렘미술관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옮겨져 일부가 보존돼 있다.

아무리 독일이 베를린 박물관의 후원으로 페르가몬 유적을 발굴했다고 하지마는, 헬레니즘 시대의 제우스 대제단(大祭壇))의 유적을 통째로 독일 자기네 나라로

옮겨간 것은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페르가몬 왕궁터에서 원래 제우스 대제단(大祭壇))이 있던 자리는 현재 휑한 공터로

남아 있는데, 찬란한 유적을 원래에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으면 더 좋을텐데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든다.

물론, 자기네 나라의 찬란한 역사유적을 돈 몇 푼 받고 국외반출을 허가해 준 당시의 무식하고 무지(無知)한 이슬람 국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도 문제가 많았지만 말이다.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통째로 옮겨다 놓은 페르가몬의 제우스신 대제단(大祭壇) : 19세기에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의 소위 서방 강대국들은 약소국에 침입하여 문화재를 약탈하여갔다.

이집트로부터는 오벨리스크(현재 파리 콩코드 광장에 있는 대형 돌기둥)와 미이라와 기타 다량의 유물들을 약탈하여다가 루브르 박물관에 진열하여 놓고 비싼 입장료를 받아 챙기고 있다.

영국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벽의 부조와 고대 앗시리아(현재의 이라크 북부) 왕국의 유적과 이집트로부터 오벨리스크와 미이라와 기타 다량의 유물들을 약탈하여다가 대영 박물관에 전시를 하고 있는데,

일년에도 세계 각지로부터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비싼 입장료를 내고 길게 줄을 서서 방문을 하고 있다.

 

 

맨 아래에 좌우로 대칭으로 있는 이상하게 뿔달린 동물은 바빌론의 수호신인 마르두크인데용(龍)이다.

성경에는 마르두크를 우상인 '벨'로 표기를 하고 있는데, 몸통은 동양의 용과는 다르지만, 머리 모양을

보면 분명 용(龍)이다.  

대개 서양에서는 용을 나쁜 동물로 묘사를 하고 있는데, 중국과 오리엔트(중동)에서는 신성스러운

동물로 취급하고 있다.

 

유색 벽돌(Brick) 유물 : 유색 벽돌(청금석과 유색 옥과 대리석) 유적 : 이러한 동물 모양의 유색 벽돌(Brick)은 분명히 헬레니즘(그리스) 식이 아닌 페르시아 양식이다이러한 동물과 사자가 나오는 유색 벽돌은 분명히 그리스 이전에 소아시아의 리디아를 정복하여 통치했던 페르시아의(키루스와 다리우스 대왕) 유적이다. 유색 벽돌은 위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코발트 빛의 벽돌(Brick)그 비싼 터키석을 직접 잘라서 만든 것이고, 청색 벽돌은 청금석을(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장신구로 많이 사용) 잘라서 만든 것이다. 또한, 페르시아에서는 사자는 왕을 상징하였고, 사자를 페르시아어로는 시르’(Sir)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페르시아의 고대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 가면 많은 사자 부조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 인들과 로마 인들은 주로 조각의 재료로 흰색 돌(대리석)많이 사용 하였던 반면에, 페르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은 주로 색갈이 있는 돌(보석과 옥)과 구운 벽돌을 많이 사용하였다 

 

 

제우스 대제단 벽면의 대리석 부조 :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나이키(Nike)상이 보인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Nike상은 두상이 없이 몸통만 있는데,

이곳의 Nike 상은 두상이 보인다

 

 

다른 대리석 부조 조각상의 모습 : 대리석 조각상의 얼굴부분이 대부분 많이 파괴되어 있는데,

이는 14세기에 비잔틴 제국을 정복한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인(회교도)들이 우상이라고 간주하여

파괴한 것으로 추정된다. 옷의 주름이나 근육까지 섬세하게 조각을 하였는데, 특히 페르가몬 출토

유물 중에 빈사(瀕死)의 갈리아 인이라는 유명한 걸작의 대리석 조각품이 있다.

 

 

어라? 근데? 단언컨데, 이건 헬레니즘(그리스) 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 병모양에(꽃을 꽂아 두었던 꽃병으로 추) 선명하게 아랍어로 라쑤룰라라고 양각이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무함마드는) 최후의 사도 이시다이다. 그 외에 은판에 청색의 청금석으로 양각되어 있는 아랍어 글씨들은 쿠란의(이슬람교 경전) 구절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색의 당초문은 터키석으로 양각이 되어 있다. 따라서 본 유물은 15세기에 비잔틴(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하여 완전히 정복 당하고 이슬람(회교)화 한 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6. 페르가몬(Pergamon ) 불가사의

 

페르가몬 (Pergamon)에는 한 가지 경이로운 것이 있다.

페르가몬 왕궁 터는 평지가 아니라 약 400 미터 높이의 가파른 산 위에 세워져 있는데, 평지에서 불쑥 가파르게 돌출이 되어 있고, 사면에 돌로 축성을 하여서 천혜의 요새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이 전동모터 펌프가 없던 기원전(B.C) 400년 전 시절에 그 산 정상에 있던 왕궁에 물을 공급하여 생활을 했던 것을 보면 진짜 경이로움을 금할 수 없다. 아크로폴리스 산 정상에는 물이 나는 샘이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곳에 살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산 정상에 위치해 있는 왕궁에 물을 대기 위하여 근처에 있는 더 높은 산에 저수지를 만들고, 거기서부터 돌로 수로교를 건설하고 도기(옹기)로 된 관을 땅에 묻어서 평지를 거쳐서 건너편 산 정상의 왕궁 성내로 연결을 하고 자연낙차를 이용한 수압을 이용하여 이쪽 산에서 저쪽 산 정상으로 물을 공급을 하였던 것이다. 소위 이것을 토목에서 순수 싸이폰(Siphon)식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 시절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정말 경이롭기만 하다.

 

현대의 또 다른 싸이폰(Siphon)식은 양수발전이다.

양수발전은 물을 양수장에서 산 꼭대기로 펌프로 끌어 올리고, 그 물을 낮은 곳으로 흘려 보내면서 낙차를 이용하여 발전도 하고 동시에 농업용수로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농업토목에 있어서 흄(Hume)관을 묻거나 암거(Box Culvert)를 설치하여 자연 수압으로 이쪽 산의 물 줄기를 건너 편 고지대로 보내거나, 또한 농업 관개수로에 있어서 이편 물줄기를 하천() 밑바닥에 관을 묻어서 하천() 밑바닥을 통과하여 건너 편의 들()로 보내는 데에 이용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수로교 : 사진 속의 수로교 뒷 편의 높은 산에 저수지를 만들고,

그 곳으로부터 땅 속으로 도기(옹기)로 된 관을 묻어서 지하로 물을 수로교까지 끌어오고,

 그 관(Pipe)사진 속의 수로교를 타고 건너서 앞 쪽에 불뚝 솟아 있는 400 미터 고지의 아크로폴리스

산 정상까지 물의 자연압에(Siphon) 의하여 물을 품어 올렸으니, 어떻게 헬라(그리스)인은 기원전(B.C)

4세기에 그런 생각을 하였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P.S : 인명에 대한 추가 설명

 

알렉산드로스 대왕(그리스어: Αλ?ξανδρο? 'ο Μ?γα? 또는 Μ?γα? Aλ?ξανδρο?, Alexander the Great, Alexander the Macedonian) : 기원전 356 7월 말~기원전 323 6월 10)은 필리포스의 왕위를 계승한 후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들 가운데 하나인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세운 마케도니아 왕국(그리스어: 'ο Μακεδ?ν 호 마케돈) 왕으로서 그의 업적을 기려 마케돈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 받들며, 때로는 계승 서열에 따라 알렉산드로스 3(그리스어: Alexandros tritos 알렉산드로스 트리토스,Alexander III)라 일컫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영어의 영향으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또한 이슬람식 이름으로 이스칸달(Iskandari) 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오늘날 이집트에서는 현지 주민들이 알렉산드리아이스칸다리아로 더 잘 이해를 하고 있으며, 현재도 이란과 중동 사람들 중에는 성이 이스칸다리( Iskandari)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그 조상이 바로 그리스(헬라) 인이다. 이는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는 동방의 피 정복지에 자기네 본국민의 이주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나는 가끔가다가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에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32살의 나이에 요절을 하지 않았다면, 그 타고난 선천적 호전성으로 인하여 세계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알렉산더가 동방(오리엔트)을 평정한 후에 서방(유럽대륙)으로 진출을 하였다면(알렉산더 대왕이 오래 살았다면 분명히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아마 역사상에 로마는 나타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역사에 있어서 소위 3대 영웅(정복왕)이라고 일컬어지는 알렉산더, 징기스칸, 나폴레옹을 나는 결코 존경을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같이 호전적인 전쟁광(미치광이)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리로 자국민들에게 승리의 기쁨과 전리(약탈한 물품과 여자)과 영토의 확장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그 피해 당사국 국민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다알렉산더가 요절을 했던 것처럼그리고, 우리나라의 북쪽에서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만 노리고 있는 호전적인 북한의 개정일이의 광신집단도 하루 빨리 지구상에서 지도가 없어져야 할 나라이다. 그런데, 현재의 이란 대통령 아하마디네자드는 공공연하게 공식석상에서 이스라엘을 지구상에서 지도가 없어져야 할 나라라고 공언하고 있으니, 현재 이곳 이란에 살고 있는 나와 대다수의 이란국민들만 미국의 강도 높은 경제제재 조치 핍박으로 인하여 삶이 매우 고단하다.       

 

또한, 알렉산드로스3(알렉산더 대왕)는 죽기 전까지 그의 부친  필리포스2세를 그의 어머니와 공모하여 살해하였다는 의혹과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부왕이 죽고서 불과 약관의 20세의 나이에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승계하여 먼저 주변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차례로 통합을 하고, 동방으로 진격하여 대제국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이집트를 정복하고, 인도의 북부와 중앙아시아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니 실로 대단한 왕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사인에 대하여 정사에서는 열병(말라리아)이라고 하고 있지만, 야사에서는 끝없는 알렉산더의 정복전쟁에 신물이 난(평화와 안정된 삶을 원하는) 신하들이 독살을 하였다는 소수의 설이 있는데, 허구헌날 십 수년간 신하들과 장수들을 전쟁터로만 끌고 돌아다녔으니, 그런 야사가 나올 만도 하다. ㅎㅎ

 

디오니소스(Dionysos/Dionysus) [그리스] 포도나무, 포도주의 신. 뜻은 "불완전한 신".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 아리아드네의 남편. 케라노스, 토아스, 오이노피온, 타투로폴리스 등의 아들이 있다. 풍작과 식물의 성장을 관장하기도 한다. 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연극의 신이기도 하다. 리베르, 브로미오스, 리아이오스, 디티람보스, 프실라스, 바쿠스, 레나이아, 히메타이오스 등의 별칭이 있으며 벌거벗은 노인 또는 포도잎을 머리에 쓴 젊은이로 묘사된다. 그의 어머니 세멜레가 헤라의 계략에 속아 화염에 싸여 죽을 때 제우스가 그녀의 태에서 디오니소스를 꺼내 자신의 다리에 넣어 양육하였다. 다른 설에 따르면 카드모스 왕이 미혼모가 된 딸을 아기와 함께 궤에 넣어 바다로 띄워 보냈는데, 그 궤는 브라시아이 해안에 닿았으나 세멜레는 그 안에서 죽어 있었고 아기만 살아남아 그 곳에서 정중하게 어머니의 장례를 치러 주었다고 한다. 제우스는 디오니소스를 세멜레의 동생 이노와 그 남편 아타모스에게 맡겨 기르게 했으나 헤라의 분노로 양부모가 미쳐버렸다. 이에 다시 헤르메스를 시켜 헬리콘 산 두메에 사는 님프 니사에게 데려가 키우게 했다. 헤르메스는 헤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어린 디오니소스를 어린 양 또는 송아지로 변장시켰다 한다. 젊었을 때 디오니소스는 신으로 존경받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곤 했다. 성인이 된 디오니소스는 이집트·시리아·아시아 전역을 편력하면서 포도주 양조법을 가르쳤다. 델포이로 돌아오는 길에 해적의 공격을 받았으나 그들을 모두 돌고래로 바꾸었다. 또 테세우스가 낙소스 섬에 버린 아리아드네를 만나 결혼하였다. 그는 명계에 내려가 어머니를 데리고 나왔다. 제우스는 그녀를 여신으로 승격시키고 티오네라고 불렀다. 이 술의 신에 대한 의식(儀式)열광적인 입신상태(入神狀態)를 수반하는데, 특히 여성들이 담쟁이덩굴을 감은 지팡이를 흔들면서 난무하고, 야수를 때려죽이는 등 매우 거칠었으나, 그리스에서는 이 신의 제례에서 연극이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 페르가몬 유적에서는 대극장 바로 아래에 거대한 디오니소스(연극의 신) 신전이 위치해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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