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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 브라질 월드컵축구 사상 5번째 우승 - 2002 한일월드컵 폐막
브라질이 2002년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경기장서 열린 제17회 2002 FIFA 한·일 월드컵축구 결승에서 호나우두가 혼자 두 골을 터뜨리는 활약에 힘입어 독일을 2대0으로 꺾고 FIFA컵에 입맞춤했다.
1958·1962·1970·1994년에 이어 통산 다섯 번째 우승이었다. 21세기 처음이자,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린 월드컵의 패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것도 대회 1회전부터 결승까지 7전 전승이라는 완벽한 성적으로 거둔 영예였다. 1930년 1회 대회 이후 72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과 벌인 월드컵 맞대결에서 승리하는 기쁨도 누렸다. 대회 8골을 넣은 브라질의 호나우두는 득점왕에게 주어지는 "골든 슈"를 차지했다.
15억명 이상이 TV로 시청한 결승전은 FIFA랭킹 2위 브라질의 화려한 공격과 11위 독일의 수비가 충돌하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주도권은 3대회 연속 결승에 오른 강호 브라질이 쥐었다. 결승골은 후반 22분 터졌다. 히바우두가 상대진영 왼쪽에서 강하게 때린 중거리슛을 독일 골키퍼 올리버 칸이 잡다 놓치자 호나우두가 달려들며 가볍게 차 넣었다. 호나우두는 12분 뒤 클레베르손의 패스를 받아 페널티지역 정면에서 땅볼슛, 쐐기골을 성공시켰다.
한편 5월 31일 개막되어 한 달간 전세계를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월드컵도 결승전과 함께 폐막됐다. 이번 대회는 우려했던 축구장 난동꾼(훌리건) 관련 사고가 한 건도 없었고, 금지약물 복용 케이스도 나오지 않았으며, 경기 배분, 선수단과 관중의 이동, 교통, 숙박, 미디어 서비스 등 공동개최에 따른 문제점들도 거의 불거지지 않아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기력 측면에선 한국이 4강, 일본이 16강까지 오르면서 아시아축구의 약진을 주도했으며, 터키·세네갈·미국 등도 선전해 "축구 평준화"에 이바지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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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시작
그해 여름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KBS의 "특별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1983년 6월 30일부터 방송이 시작돼 장장 138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처음 방송할 때 만해도 90분 길이 단발성 특집이었다. 이산가족 150명을 초청한 방청석에 1000명이 넘게 몰려왔다. 방송도중 방송사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가 쏟아졌다. 진행을 맡은 유철종 이미연씨는 이날 새벽 3시까지 연장방송을 해야했다. 방송은 연장에 연장을 거듭 결국 138일간 계속됐다. 진행자로 김동건 신은경 황인용 강부자씨 등이 합세했고 잠도 잊은 채 마이크를 잡았다. 방송과는 별도로 여의도 KBS 본관 벽과 그 앞 광장에는 이산가족을 애타게 찾는 이들이 붙인 벽보가 어지러이 등장했다. 한국전쟁후 생사를 모른채 33년을 애태우던 남북이산가족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방송이벤트였다. 방송중 10만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참여해 애탄 절규를 했고 1만189가족이 상봉의 기쁨을 맛보았다. 독일의 공영 ZDF를 비롯, 일본 NHK, 미국 CBS 등 해외 미디어 취재도 뜨거웠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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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 중국, 실용주의 체제 선언
덩샤오핑은 류사오치[劉少奇] 등과 함께 경제발전을 위하여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노선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마오쩌둥과 노선갈등을 빚어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紅衛兵)으로부터 반모주자파(反毛走資派)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였다.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으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죽자 마오쩌둥의 추종자인 4인방(四人幇)에 의하여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죽고 화궈펑[華國鋒]이 저우언라이 계열의 노간부인 예젠잉[葉劍英], 특무부대장인 왕둥싱[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화궈펑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어려웠으므로 예젠잉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복직되었다.
그후 화궈펑과 5년간의 권력투쟁 끝에 1981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단행하였다. 그의 집권 후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보장, 지방분권적 경제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경제가 크게 성장하였다. 1989년 4월 톈안먼[天安門]사건으로 그의 정치적 거취가 불안해 보였으나 위기를 수습하고,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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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 전투예비군 부대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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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 아일랜드 공화국 독립
청교도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크롬웰은 구교도인 아일랜드인을 철저하게 진압해서 토지를 몰수하여 영국인에게 분배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인이 지주가 되고 아일랜드인은 소작농(小作農)으로서 비참한 처지로 전락되어 유명한 ‘아일랜드의 빈곤’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영국의 압박에 대한 아일랜드인의 민족주의적 저항은 19세기에 들어와서 갑자기 고조되어 아일랜드 문제는 영국정부를 괴롭히는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즉 1801년에는 영국과의 합병이 실현되어 영국의회에 아일랜드 의원(議員)이 참가하고, 1829년에는 구교도 해방법이 성립되어 구교도에 대한 차별 대우가 없어졌다. 그러나 민족운동은 역시 자치권과 토지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면서 계속되고 D.오코늘의 청년아일랜드당(黨)과 아일랜드 민족주의 비밀결사인 페니언단(團) 등이 활약하였다. 한편, 영국 본국에서도 1886년과 1893년에 아일랜드 자치법안이 상정(上程)되었으나 성립하지 못하고 1914년에 성립되었으나 영국계 신교도가 많은 얼스터지방의 주민들은 이에 반대하여 해결되지 못한 채 제1차 세계대전에 들어가 1916년 4월 신페인당(黨) 등을 주축으로 한 더블린의 무장봉기(부활절봉기)도 진압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아일랜드 문제가 재연되었으나 영국 본국이 제안한 얼스터지방을 분리하고 아일랜드를 자치령으로 한다는 요지의 타협안이 승인되어 1922년 12월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자치령이라고는 하지만 외교, 군사, 경제 등의 실권을 영국 본국 정부가 장악하였기 때문에 1932년 총리가 된 데 발레라는 완전독립을 위해서 영국 본국 정부와 항쟁을 계속한 끝에 1937년 신헌법을 제정하고 국호(國號)를 "에이레"로 정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영국 본국도 제2차 세계대전 전야(前夜)의 절박한 국제정세 때문에 사실상 이것을 인정하였다. 그후에도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영국연방 내의 한 나라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8년 헌법을 개정하고 다음해인 1949년 부활절봉기 33주년을 기념해서 국명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개칭하고 연방에서도 이탈하여 완전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얼스터지방은 현재도 영국 본국의 일부로 남아 있으며, 신교도와 구교도 간의 무혈투쟁이 계속 일어나 정치문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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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 미국의 소설가 미첼(Margaret Mitchell),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출간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1936년 6월 30일 처음 출판됐다. 신문사기자였던 작가 마가렛 미첼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옛 남부의 분위기와 남북전쟁의 일화에 기초해 10년 동안의 조사와 집필 끝에 이 소설을 완성했다.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바람"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종래의 연애소설 여주인공과 전혀 다른 당당한 캐릭터로 불황에 빠져있던 사람들의 공감을 샀고, 금새 베스트셀러가 됐다.
작가 마가렛 미첼이 1037쪽 분량의 이 소설에 붙이려 했던 제목은 "내일은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른다"였다. 이것은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라고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타라 농장에서 불타는 노을을 배경으로 외치는 마지막 대사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나 맥밀런 출판사의 종용에 따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결정됐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기였고 이에 미국인들은 황량한 마음을 달래줄 소설을 원했다. 이 소설은 당시 뉴욕타임즈지의 서평란에서 "미국작가에 의해 쓰여진 최초로 주목할만한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6개월 만에 100만 부가 팔렸고, 미첼은 이 소설로 1937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1939년에는 클라크 게이블, 비비안 리 주연의 상영시간 3시간 40분짜리 영화로 제작되어 1년 간 관객 2500만명을 동원했고, 1989년까지 관람 총인원 12억 이상을 돌파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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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 폴란드 태생 미국의 작가, 비평가 미우오슈(Czesław Miłosz, 1911 ) 태어남
198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토목기사의 아들로 당시 폴란드 영토였던 빌노(빌니우스)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쳤다. 21세 때 첫 시집 〈얼어붙은 시간의 시 Poemat o czasie zastyg
ym〉를 발표했다. 그는 이 무렵 21세의 나이에 사회주의자이자 시인 단체의 지도자였는데 그 단체는 절박한 세계의 재앙을 예견한다는 뜻에서 " 격변설지지자"(Catastrophist)라는 이름을 지녔다.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한 시기에는 저항운동에 가담했으며, 〈정복할 수 없는 노래 Piesn niepodlegla〉(1942)와 같은 수많은 작품을 비밀리에 쓰고 편집·번역했다. 시집 〈구원 Ocalenie〉(1945)은 공산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발행된 책에 속했다. 새 정부는 그를 외교관직에 임명하는 보상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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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특수상대성이론 완성
1879년 3월 14일 독일 울름에서 출생하였다. 스위스 국립공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베른 특허국의 관리 자리를 얻어 5년간 근무하였다. 광양자설, 브라운운동의 이론, 특수상대성이론을 연구, 이를 1905년 발표하였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갈릴레이나 뉴턴의 역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종래의 시간·공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으며, 철학사상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몇 가지 뜻밖의 이론, 특히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等價性)의 발견은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예언한 것이었다.
브라운운동에 관한 기체론적 연구는 분자물리학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고, 플랑크의 복사법칙을 검토하여 광양자설에 도달, 그 예로서 광전효과를 설명하였다. 1913년 베를린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나, 그 동안 자신의 특수상대성이론을 중력(重力)이론이 포함된 이론으로 확대하고자, 1916년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 이 이론에서 유도되는 하나의 결론으로서 강한 중력장(重力場) 속에서는 빛은 구부러진다는 현상을 예언하였다. 이것이 영국의 일식관측대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광전효과 연구와 이론물리학에 기여한 업적으로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으며, 그 후 중력장이론으로서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중력장과 전자장의 이론으로서의 통일장이론으로 확대할 것을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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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 동독의 공산당 지도자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 1893~1973) 태어남
라이프치히 출생. 1910년 독일 목공(木工)노동조합에 가입, 이후 노동운동을 하였다. 1912년 독일사회민주당(SPD)에 입당, 1919년 독일공산당(KPD)을 조직하고, 중부독일지구 지도부의 요원이 되었다. 1928∼1933년 연방의회 하원의원으로 있었으나 나치스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중 모스크바에서 독일인민전선 설립위원회의 발기인이 되고, 독일사회민주당과의 통일전선을 꾀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귀국, 1946년 O.그로테볼과 함께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통합하여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을 결성하고, 그 부위원장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사회민주당 ·공산당의 합동공작, 대외적으로는 친소(親蘇)정책에 의하여 전후(戰後) 동독 부흥의 길을 열었다.
1949년 동독정권 수립과 함께 부수상이 되고, 1950년 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53년 제1서기가 되었다. 1960~1971년 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을 역임하고, 1971년 5월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였다. 울브리히트 체제는 국내의 정치통제와 친소정책을 바탕으로 기술관료들을 양성, 경제수준 향상에 기여하였다. 저서에 《독일노동운동사》(1953∼1958)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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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 프랑스의 작가 뒤아멜(Georges Duhamel, 1884~1966) 태어남
의사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09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러나 그전부터 문학에 더욱 흥미를 가져, 1906년 빌드라크, 쥘로맹 등과 함께 마른 하반(河畔)의 크레테일 수도원에 들어가 인쇄업을 하면서 공동생활을 영위, 인간적 가치의 존중을 표방하는 아베이파(수도원派)를 형성하였다. 이 무렵부터 휴머니스트로서의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났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군의관으로 종군하였다. 비인간적인 전쟁을 비판한 소설 《수난자 열전 Vie des martyrs》(1917) 《문명 Civilisation 1914~1917》(1918, 공쿠르상 수상)을 발표하였다. 개인을 압살하고, 인간에 대한 물질의 우위를 암암리에 승인하고 있는 근대문명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인도주의적 사회주의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뒤이어 연작소설 《살라뱅의 생애와 모험 Vie et aventures de Salavin》(5권, 1920∼1932)으로 한 범용(凡庸)한 남자의 모습을 포착하여 근대인간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하였고, 대하소설 《파스키에가(家)의 기록 Chronique des Pasquier》(10권, 1933∼1944)에서는 한 가족의 역사를 통하여 20세기 초두의 수십 년에 걸친 프랑스 사회를 묘사하였다. 이런 작품을 집필하는 사이에도 자기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즐거움과 유희》(1922), 물질문명을 비판한 《미래생활 풍경》(1930) 등 많은 작품을 썼다. 193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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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 - 영국의 식물학자 후커(Joseph Dalton Hooker, 1817~1911) 태어남
서퍽주 헤일즈워스 출생. 아버지는 글래스고대학 식물학 교수 W.J.후커이다. 글래스고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1839년부터 4년간 J.C.로스의 남극탐험대 외과의사 조수로 참가, 남태평양 제도, 뉴질랜드, 태즈메이니아 등지에 들러서 식물을 조사하며 식물 지리학상의 견식을 넓혔다. 1847년 인도로 가서, 네팔 ·벵골 등지를 탐험 ·조사하였다. 1865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큐 가든 원장(園長)이 되었는데, 1871년에는 북아프리카의 아틀라스산맥을, 1877년에는 북아메리카의 로키산맥 지방을 여행하여 많은 식물종자를 가지고 돌아와 큐 가든에 기증하였다. 1872∼1877년 영국 학사원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C.다윈과 친교가 있었고, 그를 깊이 이해하여 《종(種)의 기원(起源)》의 출판을 원조하기도 하였다. 후커의 학문상 업적은 식물분류학과 식물지리학에 있다. 주요저서로는 《Flora Antarctica》(1844∼1847) 《Himalayan Journal》(1854) 《Genera Plantarum》(1862∼1883) 《Flora of British India》(1874) 등이 있다.
- 'Battle of Friedland'
1789 - 프랑스의 화가 베르네(Horace Vernet, 1789~1863) 태어남
사냥 장면과 대형 전쟁화를 주로 그렸으며, 베르사유 궁전의 전쟁미술관에 있는 그림들이 특히 유명하다. 유명한 화가인 카를 베르네의 아들이자 역시 유명한 화가인 조제프 베르네의 손자인 그는 규모가 큰 그림을 그리는 데 특히 뛰어난 솜씨를 보였고 그결과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보나파르트주의자인 그는 나폴레옹 시대를 예찬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1815년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뒤 그의 화실은 사냥꾼과 예술가 및 작가들의 회합 장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음모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알제리에서 프랑스군과 함께 지낼 때(1833)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아랍 세계에 대한 그림을 몇 점 그렸다. 그후 그는 루이 필리프와 나폴레옹 3세로부터 베르사유 궁전에 전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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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 - 프랑스의 시인 데보르드 발모르(Marceline Desbordes-Valmore, 1786~1859) 태어남
노르현(縣) 두에 출생. 프랑스혁명으로 몰락한 귀족가문에서 출생하였다. 배우와 극작에 뜻을 두고 남편 프로스페르 랑샹탱(일명 발모르)을 명배우로 키우려고 애썼으나 두 가지 모두 실패하고, 비평가 상트 브브와 알게 되어 비로소 시작(詩作)의 자기 재능을 발견하였다. 그녀의 시는 여성의 사랑의 비애와 실의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 많고, 낭만파의 격정에 상징파의 정관(靜觀)을 곁들인 경향을 띠고 있다. 여성다운 섬세하고 화려한 감정과 우아한 표현력은 훗날의 베를렌과 비교되었다. 작품에 《엘레지와 로망스》(1819) 《눈물 Les Pleurs》(1833) 《가엾은 꽃 Pauvres Fleurs》(1839) 《꽃다발과 기도 Bouquets et Pri
res》(1843) 등이 있다.
- 'Stucco column, detail'
1685 - 독일의 건축가 치머만(Dominikus Zimmermann, 1685~1766) 태어남
독일 건축가·화가. 베소브룬 출생. 궁정화가 J.B. 치머만의 동생이다. 처음에는 프레스코 화가·벽토치장가(stuccoist)로 활동하다가 30세 무렵부터 건축을 시작하였다. 1727년 건설이 시작된 슈타인하우젠의 순례성당과 46년 시작하여 54년 완성된 비스의 순례성당은 건축에서부터 장식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부를 전담하였던 그의 대표적 종합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바이에른풍의 로코코건축의 완성자로서, 간결·우아하고 환상적인 작풍을 지녔으며 곡선을 구사하여 유동적인 공간을 창출하는 데 뛰어났다.
- 'Venus in the Clouds'
1649 - 프랑스의 바로크 화가 부에(Simon Vouet, 1590~1649) 세상 떠남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1611년 프랑스대사를 따라 콘스탄티노플에 있었고, 1612∼1627년에는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 후 루이 13세의 명으로 귀국하여 궁정 수석화가로서 왕궁의 장식화를 그렸다. 작풍은 이탈리아의 바로크회화, 특히 카라비조와 L.카라치의 영향을 크게 받아 투시도법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환상을 일으키게 하는 대담한 구도를 전개하였다. 대표작에 《성모의 탄생》(1615∼1620) 등이 있다.
자료출처/cafe.daum.net/philthema, 수정/왕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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