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회 삼척문학상 대상작품
장편소설 『토렴』요약
김 익 하
*
이 소설은 사람이 인간을 멀리하고 반려동물과 사는 세상에서 가족과 해체의 아픔 겪고 세상살이에서 상처받은 사람끼리 서로 보듬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아낸 장편소설이다. 즉 가해자에게 모든 것을 박탈당한 피탈자被奪者끼리 보듬는 그런 소외 층위疏外層位의 호환적인 삶을 463쪽에 15장으로 나눠 세밀히 그려냈다.
소설 제목으로 채택된 『토렴』은 식은 밥덩이나 국수 따위에 따뜻한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며 끼니를 때우는 음식을 말함인데, 이 소설에서는 삶을 영위하느라 상처받고 인정마저 싸느랗게 식어진 사람끼리 새로이 서로 정을 나누며 사랑하고 안유함으로써 인간성 회복 과정을 은유하는 의미로 붙였다. 작의作意는 인간이 사람에게 한없이 위악적인 존재 만일까, 그런 물음에서 발단되었다고 작가는 밝혔다.
이 소설의 주요 모티브는 가족을 타의에 따라 모두 떠나보내고 강원도 외적 한 벽촌에서 생의 끝자락에 홀로된 합죽할미와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파란만장 기구한 삶을 살다 맥진한 이동우[서성표→이희구]가 서로 입은 상처를 보듬으며 현실에 닥쳐드는 어려운 일들을 합심해 극복하면서 정을 두터이 하는 과정을 그려낸 이야기다.
*
할죽할미의 젊었을 때 택호는 안이실집이다. 행세깨나 하는 굴우물 훈장집 셋째로 태어나 맏딸로 자란 그녀는, 조상 재물인 유기그릇을 일본 전쟁 군수물자로 빼앗기지 않으려다 일본도에 찔려, 그 쇳독으로 죽은 아버지 때문에 가세가 기울자 어린 나이로 벽촌 농투성이인 안지상에게 어렵게 시집 와 2남 2녀를 출산한다.
맏이인 아들 안경수는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척박한 고향을 떠날 결심을 하지만, 아버지 안지상은 대를 물려받아 집안을 지킬 장남이라면서 한사코 탈향을 반대하자 반거들충이로 생활하면서도 어느 때나 도시로 향하는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그런 일로 갈등이 최대로 치달을 무렵 마침 목상木商 방호식이 마을로 찾아들어 산판을 벌인다. 당장 가까운 곳에서 일거리가 벌어져 안경수에게 돈 벌 기회가 온 셈이다. 산판 일로 가난한 안이실집의 궁박한 살림살이도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인부들의 끼니를 제공하는 함바 일을 맡아 수고비를 받으며 목재 운반로 가까이 있는 용지를 빌려준 대가로 대여비를 받고, 또한 안경수까지 산판에서 허드렛일로 노임을 받게 된다. 마을 사람들 질시에도 불구하고 돈벌이가 생긴 안경수는 신이 나서 목재 운반 트럭 기사와 어울리면서 도시로 나가 화물운전사가 되는 꿈을 키우게 된다.
산판이 끝나자 안경수는 화물차 조수가 되어 운전기사를 따라 마을에서 떠난다. 안경수는 운전기술을 습득해 면허를 딴 다음 운수회사에 들어가 8톤 트럭을 운전하며 열심히 일해 제 차를 소유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물론 생활에 집중하느라 고향에서 떠난 뒤 한 번도 찾지 않은 채다. 그리고 돈을 모을 때까지 결혼식마저 뒤로 미룬 채 여자와 혼전 동거를 한다. 경비를 아끼자고 전국을 떠돌며 아내 될 여자와 운전석에서 침식을 같이 하며 절약 생활을 이어간다. 밤낮없이 일한 덕분에 헌 트럭을 팔고 새 트럭을 장만할 무렵, 화물을 운송하다 충북 천등산 고갯길에서 빙판 전복사고로 아내와 같이 목숨을 잃는다.
안지상이 맏이인 안경수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날 무렵, 맏딸 안경순이 임신한 몸으로 고향집으로 찾아든다. ‘더 너른 바닥에서 여럿 남잘 만나본 뒤 제 맘에 꼭 맞는 남자와 결혼했으면 했지, 부모가 골라주는 이 촌구석 꾀죄죄한 남자애에겐 죽을지언정 시집가지 않겠다면 출정 군사처럼 출사표를 던지고 고향에서 의기양양하게 떠난 딸이다. 처녀 몸으로 임신해 귀향한 딸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안지상은 차마 아비로서 감당키 어려운 내막을 바로 캐묻지 못한 채 냉가슴으로 밤잠마저 설치는데, 딸은 어미에게만 사연을 털어놓고 새벽같이 마을에서 떠난다. 딸이 떠난 다음에야 안지상은 아내에게서 딸의 처지를 전해 듣는다.
“걔가 미군에 근무하는 코쟁이를 따라 미국으로 간답디다.”
“뭣이? 누가 누굴 따라 어디로 간다고?”
“당신 큰딸이 미국 코쟁이와 눈이 맞아 내일모레 미국으로 아예 간답디다. 새끼까지 배고서…….”
안이실댁이 맏딸 일로 팔자타령이 최고조에 이를 때, 셋째인 안경미가 멀쩡하게 잘 사는 남의 남자를 가로채서 교도소밥을 먹는다는 연락을 받는다. 편지를 먼저 손에 쥔 그녀는 그 사실을 남편 안지상에게 감춘 채 무턱대고 불쑥 내뱉는다.
“내일 서울 좀 다녀올라우.”
“생뚱맞게 느닷없이 시방 뭔 소리야? 왜, 무슨 일로 서울에?”
“이것이 뭘 제대로 챙겨 먹고 있기나 하는지. 또 죽었는지, 살았는지…….”
“시방 누굴 말하는 게여? 경순이여, 경미여?”
“하난 미국 갔는지 안 갔는지 모르겠고, 또 하나는 어떻게 사는지 모르니 둘 다지요. 아 어느 것은 딴 뱃속에서 뽑았나요? 새끼면 다 같은 새끼지.”
그렇게 둘러대고 서둘러 떠난 안이실댁은 묻고 물어서 찾아간 교도소에서 어미의 안타까운 마음도 전하지 못한 채 딸 경미에게 퉁바리만 잔뜩 듣고 허탈하게 돌아오자 정황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안지상이 비아냥거린다.
“왜, 눈 빠지도록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듯 허둥대고 가더니만 하룻밤만 묵어 왔는고? 마른 대추처럼 쪼그라든 이 서방이 그리 그립든가?”
“갔더니만, 경미가 이살 갔다네요.”
“이살 했다고? 그것도 모르고 무작정 갔더란 말이야? 사람이 어찌 그리 준비성도 없이 덤벙대고……. 그래서 찾긴 찾았어?”
“아. 예-, 예-. 아주 근사한 데로 이살 갔습디다. 공짜로 재워주고 공짜로 먹여주고, 옷가지도 입혀주고. 하참 내 원 기가 차서…….”
“하, 세상에 그렇게 공짜로 베푸는 데가 어디 있다고 그렇게 딴죽 걸며 깐죽깐죽 치대는가?”
“그곳이 어디인지나 아시우? 바로 감옥소라우. 감옥소.”
“이건 또 뭔 해괴한 소리야? 누구 숨통을 끊어놓을 일이라도 있는 게야? 그래 무슨 일을 저지르고 감방에 갔단 말이야?”
“글쎄 지가 다니던 회사 사장과 바람이 나 지금 감옥에 가 있다오.”
“아. 누가?!”
“누군, 누구요. 그 잘난 당신 막내딸, 경미지 누군 누구겠소.”
그런 안경미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자 사장이 ‘이제 이혼했으니 우리 죽기 전에 한번 제대로 살아보자’고 달려들자, 안경미가 냉정하게 화답한다.
“나도 가슴이 불같이 탔던 첫정인 사장님을 쉽사리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랑은 놀이공원 입장권처럼 일일이 간섭받고 싶지 않다. 비 오는 날이나 술 취하면 사장님에게 걸려오는 아기 엄마 전화는 나를 슬프게 한다. 찾아오는 발걸음은 채권자 얼굴보다 더욱 보기 싫어 두 번이면 충분하다. 간섭받지 않고 온전하게 사장님 사랑을 통째로 받고 싶다. 그러니 아기 엄마 발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 산다는 약속을 먼저 해라. 그러면 사장님 말씀대로 죽기 전에 서로 뼈까지 녹도록 한번 제대로 얽히며 살아보자. 나도 진정한 사랑을 목숨만큼 소중히 여기는 그런 유형의 한 명 여자일 따름이다.”
안경미는 사장과 소원대로 남쪽 외딴섬으로 숨어들어 바깥세상은 물론 부모와 인연마저 끊는다.
안지상은 자식들 일로 가슴앓이를 하다 심장판막증으로 세상을 하직한다. 안이실댁은 아이들이 떠나고 남편마저 잃은 그 집터에서 살기가 싫어 골짜기 더 깊은 곳으로 나앉는다. 인적이 외적한 곳, 이제 막내만 남았다. 막내는 외양으로 보면 사내로 흠잡을 데 없이 멀쩡한데 선본 여자마다 어김없이 퇴짜를 놓는다. 그럴 때마다 아들 나이는 회전 기기의 계수기 숫자처럼 덜컥덜컥 자동으로 올라간다. 그러다 군청에서 추진한 ‘농촌 총각 배필 맺어주기’ 행사에 참가했다가 덜컥 필리핀 처녀를 만나 결혼까지 한다. 고집이 센 필리핀 며느리는 안이실댁과 갈등 문제를 언어 소통 장애로 풀지 못한 채 읍내로 나가는 버스에 올라타 종적을 감춘다. 붙잡으며 죽이겠다는 오기가 돋쳐 그녀의 행방을 찾아 나선 막내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안이실댁은 자식들 변고 때마다 이빨을 악물어서 그런지 큰 어금니들이 뒤로부터 차례로 빠지고 뿌리가 깊은 작은 어금니만 남는다. 비용 탓으로 틀니를 박지 않으니 빠진 이 자리로 양 볼이 폭삭 함몰되어 이웃에서 합죽할미라 부를 지경에 이른다. 이희구(이동우)가 집 안으로 찾아들 때까지 외로움을 톺아내며 합죽할미는 막내아들에 가는 그리움과 기다림에 시달리며 홀로 산불과 마주쳐 곤욕을 치러내 혼이 반쯤 나간 상태다.
또 다른 주인공 이희구李希求란 사내.
본명은 이동우로 스물다섯에 옥천에서 영동으로 시집온 정순임(어려서 오빠와 고아원에서 자랐다.)과 최 영감네 정미소에서 일하는, 전쟁고아인 이종식 사이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다. 술을 좋아하는 이종식이 정미기 피댓줄에 걸려 아내와 다섯 살배기 이동우를 남기고 저세상으로 떠난다. 주인집 최 영감의 권유에 따라 그의 소유 임야에다 무덤을 마련해서 장례를 치른 다음 정순임은 호구 때문에 지인의 소개로 영동시장 부근 식당에 거처를 정하고 식당 일을 도우며 동우와 생계를 이어간다.
식당에 드나들던 술꾼 서봉태는 정순임의 젊은 미모에 빠져 혼자 능력으로 이동우를 공부시키지 못하니 자기가 고등학교까지 교육시켜 주는 조건으로 집안에 들어와 사내아이 하나만 낳아달라고 꼬드긴다. 정순임은 서봉태의 제안에 고민도 많이 하지만 이동우를 공부시키는 방법이 그뿐이므로 병든 본처가 있는 농갓집에 첩실로 들어가길 결심한다. 그렇게 결심을 한 날, 정순임은 마음의 부담을 벗어버리려 동우를 데리고 남편 이종식의 무덤을 아이와 함께 찾아간다. 아직은 정이 남아 있는 남편이고 아이의 아버지인 이종식과 마지막으로 정을 떼는 결별을 고하고자 함이다. 정순임은 남편 무덤 앞에서 결심을 밝힌다.
“혼자 몸뚱이라면 독헌 마음먼 먹으면야 사내 없이도 혼자 살 수 있겄지유. 이것만은 알어줘야 헐 것 같네유. 젊음이 아까워 재혼허려는 게 아니유. 동울 남맨큼 공불 시키자면 지금에서는 지를 버리는 길을 택헐 수밖에 없네유. 나쁜 여자라 욕해도 워쩔 수 없구먼유. 훗날 동우가 성공허믄 지 대신 용서를 빌것지유. 지야 살다가 늙어 저승길에 오르기 직전에 반드시 한 번은 찾아올 생각은 있긴 있구먼유. 그때 지가 용서를 빌 테니 이젠 그만 날 놔주유.”
서봉태 집으로 들어간 정순임은 온갖 농사일에서 헤어나지 못할 만큼 가사에 혹사를 당한다. 한편 서봉태의 일손 욕심으로 농사일과 소치는 일 때문에 학교 숙제마저 못할 지경으로 이동우를 일터로 내몬다. 서봉태는 이동우의 이름조차 아예 ‘서성표’로 호적에다 제 자식이라 등재하고 일꾼으로 만들려고 획책한다. 그러면서 소꼴 부족과 농사일 서툶을 핑계 삼아 인정사정없이 매질까지 한다. 이웃에 말로만 공부시킨다고 자랑질 하지만, 학교 담임교사의 권유에도 끝내 서성표를 중학교로 진학시키지 않는다.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켜주겠다는 정순임과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셈이다. 그러면서도 소꼴을 트집 잡아 술만 마셨다면 폭력을 사정없이 휘두른다. 본처 몸에서 태어난 딸 서재숙은 누나뻘인데 서성표의 처지를 걱정하는 편이지만 아버지 서슬에 아무 도움도 못 주지만 동정적으로 정을 준다. 소치는 일, 소꼴 베어 오는 일, 배추밭 벌레 잡는 일. 온갖 잡일을 시키며 밥값을 따져 가며 또 공부시킨다는 우세로 무자비하게 폭력을 일삼는다.
“니넘이 사람 도릴 알기나 허는 겨?”
“…….”
“웨 대답을 못 혀? 귀먹쟁이여?”
“지가 그걸 워찌 알것시유.”
“내가 니넘을 공부시키는 거시 절대로 돈이 남어돌아서 그런 줄 알믄 그건 오산이여. 무슨 일을 헤서라도 갚는 거시 니넘이 네게 헤여 헐 도리인 겨.”
“그럼 아부지 도린 먼디유?”
“뭐시라 이넘이? 아비한테…….”
“아부지가 도리, 도리허니까유.”
서성표를 중학교조차 보내지 않고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키며 매질하자 정순임은 서봉태 꼬임에 빠진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영등포에 사는 오빠 정영남에게 서성표를 보내길 결심한다. 폭력을 당하는 자식에게 원인을 제공한 죗값 때문에 같이 떠나려 하지만, 그녀의 품에는 서봉태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서성남이 자라고 있다. 다 같이 제 몸에서 태어난 아이들, 그녀는 고민하다가 끝내 더 어린 자식을 선택하고 서성표를 내치기로 작심한다.
“이제 어린 니 동생 때문에 니먼 보낼 수밖에 없는 겨.”
그러면서 서성표란 이름을 버리고 이동우로 살라고 간곡히 부탁까지 한다.
“니 친아부지 이름은 이종식인 겨. 정미소 기술자였는디 그 망할 염색 군복 땜에 그만 피댓줄에 말려서 목숨을 잃은 겨. 그러니 니는 당연히 서성표가 아니라 이동우여. 이곳을 떠난 뒤부터 넌 이동우여.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러달라고 헤여 혀. 서성표는 니가 가질 이름이 아니고 버릴 이름이여. 능력이 닿으면 법원에 가서 이름을 되찾아야 허는 겨.”
새벽바람으로 영동에서 떠나 영등포에 도착한 서성표. 이제 이름마저 버린 이동우. 파출소에서 만난 외삼촌인 정영남의 집은 단칸방인데 두 딸을 데리고 사는지라 이동우가 거처하기에는 비좁았다. 또한 정영남은 플라스틱 사출공장에 다니지만, 설비공으로 현장을 떠도는 형편이라 낯선 사촌 누나들과 지내야 하는 불편함도 견디기 힘든 상황에 어려움을 더한다. 더구나 가정 형편으로 이동우의 학업을 잇게 할 수조차 없는 처지다. 궁리 끝에 정영남은 회사 생산부문 품질관리부장 백상호에게 아이의 도울 방법을 부탁한다. 청탁을 받은 그는 이동우를 공장에서 숙식하며 일을 배우도록 배려하고 야간학교에도 다니도록 환경을 만든다.
제품 출하 부문에서 일하던 이동우는 비슷한 처지인 강길구의 모함에 빠져 제품 하자 문제를 일으켜 공장에서 쫓겨나 공사현장으로 떠돌게 된다. 공사현장 함바집 홍은희집에서 그 집 업동이인 수양딸 남현숙을 만나 결혼식을 올린다. 그날 이동우는 청첩장을 보낸 정순임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으나 끝내 얼굴도 볼 수 없음에 의붓아버지였던 서봉태의 짓임을 짐작하고 모성애를 그리는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이동우는 저학력자로 진급에 실패하자 정영남에게 부탁하여 다시 생산파트로 옮긴다. 극렬 노조 지부장 안보웅 권유로 노조에 가입한다. 안보웅은 이동우를 파업 현장의 불쏘시개로 쓸 작정으로 이리저리 부추긴다. 노동쟁의로 파업이 벌어지자 이동우는 노조 간부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스스로 사출기에다 모래를 집어넣다 발각되어 구속된 뒤 종래 회사에서 쫓겨난다. 도움을 주었던 백상호를 찾아가 사죄하지만 백상호는 불같이 화를 내며 질책하나 다시 소규모 공장을 차려 자영업자로 재기하도록 도움을 준다. 백상호에게 도움을 받는 남만준의 설비 일을 맡아 하도급 일을 한다. 이때 남현숙은 딸 이미주를 낳는다. 한창 사업이 번창할 때 백상호의 사망으로 든든한 후원자를 잃고 슬픔에 잠긴다. 백상호는 이동우가 태어나 처음 인간적인 도움을 주던 사람이다. 남만준의 도산에 이어 이내 부도가 닥치고 그에게서 받은 어음이 휴지 쪽이 되자 이동우는 빚더미에 올라선다. 종래 수금 해결사의 언어폭력과 협박에 시달리다 못해 옥천까지 트럭을 몰아 야반도주한다. 신용불량자로 낙인이 찍혀 국가 지원 시스템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처지인 이동우는 일거리를 얻지 못해 굶다시피 생활하는 극한상황까지 내몰린다.
피신 길 옥천에 온 이동우는 마지막 걸음이라 생각하며 내친김에 영동으로 어머니 정순임을 찾아 나선다. 씨 다른 동생 서성남을 만나 본처만 생존하고 서봉태와 정순임이 사망했음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동우는 뜻밖의 사실에 놀란다. 서성남은 정순임의 시신이 서봉태 무덤 옆에 묻힌 게 아니라 유언대로 첫 남편인 이종식의 무덤 옆에 묻었다고 알린다. 정순임의 유언 때문이다.
“…내가 니 아부질 만나기 전에 니 성 성표 아부지 무덤에 가서 이미 그런 약졸 혔는 겨. 죽어서 돌아와 옆에 묻힐 것이니 놓아달라구 말여. 니 아부지도 나헌테 그런 약졸 현 겨. 사내아일 낳아주면 가고 싶을 땐 언제든 곁에서 떠나도 좋다고 그렇게 이미 허락한 겨.”
이튿날 정순임의 무덤을 찾아간 이동우에게 서성남은 어머니 유품이라면서 봉투를 내민다.
“이게 무엇인디?”
“성님이 직접 한번 꺼내보시우. 뭔지를…….”
눈물이 배어든 흔적이 있는 청첩장과 염색된 낡은 군복 쪼가리를 두고 서성남이 입을 연다.
“그날 아부지가 성님 결혼식에 참석하러 나서는 엄니를 끌어들이는 소동까지 벌였시유.”
비로소 이동우는 자기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어머니의 사연을 알게 된다.
“웬 헝겊 쪼가리여. 이건 또 뭔 겨?”
“성님은 그걸 모르지유? 성님 아부지가 피댓줄에 감겨 돌아가실 때 입었던 유품이지유. 엄니가 그랬시유. 첨엔 수절하려고, 나중엔 성님을 어찌하든 잘 기르고자 증표로 그걸 끊어 품에다 간직했다네유.”
생활고에 견딜 수 없어 끝내 이동우의 가족은 아내 동의하에 동해안으로 자살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결심하자 옥죄임에서 풀려난 기분으로 동해 바닷가 민박집 심영달 내외에게서 비로소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대접을 받는다. 이동우에겐 백상호 다음으로 인간적인 대접을 해주는 사람으로 인하여 자살을 앞둔 사람으로서 처지를 잃은 듯 아내와 행복하게 하룻밤을 보낸다. 인생의 오랜 여행을 마친 기분으로 이동우 가족은 정선 땅으로 향한다. 이동우의 외할머니의 고향이다. 이동우 가족은 정선 아우라지 강가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을 시도했으나, 이동우만 살아남고 아내와 딸은 목숨을 잃는다.
이 일로 이동우는 비속 살인죄로 7년의 수형 생활을 끝내고 풀려났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다. 생각난 김에 동사무소 민원실에 들려 개명절차를 물어보기도 한다. 호적의 서성표를 교도소 교화위원 윤대현 목사의 제안으로 ‘이희구’로 바꾸기 위해서다. 윤대현 목사에게 제 몸을 기탁하려다 포기한다. 제 생활을 갖기 위해서다. 이동우는 생계 때문에 새벽 인력시장으로 떠돌다 간이주점에서 삼척 출신 양미자를 만나 동거한다. 양미자의 아버지는 어부였고 집에는 감포 출신 어부와 함께 기거하고 있다. 술주정이 심한 아버지와 싸우던 어머니는 감포 어부와 눈이 맞아 달아나자 양미자는 모성애에 목말라하면서도 아침이면 바다로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자란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양미자는 이동우와 결혼생활에서 아이를 갖기를 원한다. ‘그녀의 소망은 이랬다. 달덩이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양손으로 떠받치고 석조 계단을 모걸음으로 내려가며 이웃에게서 기능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여자로 부러움을 사고 싶어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입덧으로 신 포도를 게 눈 감추듯 삼키고 젓갈 냄새에 왝왝 게워내며 가지만 봐도 헛구역질하는, 또 슈퍼에서 ’보솜이를 담은 장바구니를 흔들며 귀가하는-그런 여자만의 특권인 행복을 누려보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동우는 부모의 잘못에 생명을 잃은 딸 이미주에게 지은 죄 때문에 양미자의 임신 요구를 냉정히 거절하며 기구 사용을 고집한다. 유일한 소원인 임신의 꿈을 잃자 양미자는 심적 갈등을 견디다 못해 이동우를 졸라 삼척으로 여행을 가지만 자기가 자라던 곳에서 회임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스스로 수면제를 먹고 생명을 마감한다.
“모두 변했네. 알 수 없도록 모두……. 개복숭아꽃이 피는 봄날 저 언덕에 앉아 초록빛 바다를 보면서 색색 수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그렇게 알록달록한 꿈을 꾸기도 했는데…….”
마음과 몸이 피폐해진 이동우는 서성표의 마지막 흔적인 주민등록증마저 썰어서 하수구에다 버린다. 이제 이희구로 살아갈 결심을 한다. 모든 걸 잃어버린 이동우는 여러 날 방황하다가 교도소 교화위원으로 그곳에 드나들던 민간 갱생 보호시설을 갖춘 윤대현 목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그들의 인연은 교도소에서 부지런히 독서를 한 이동우가 수기 공모에서 당선되고, 그 수기를 읽고 이동우의 과거를 알게 된 윤대현이 상담에 응함으로써 비롯된다. 출소를 앞둔 이동우와 윤대현은 대화를 나눈다.
“내일이면 이곳에서 나가네요.”
“예 목사님, 그런데 사회에 어떻게 적응할는지…….”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그러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이 있지요.”
“그게 뭔데유?”
“수형생활을 마쳤다 해서 지은 죄가 용서된 건 아닙니다. 형량만큼 자유를 빼앗기고 신체를 구속당한 채 활동에 제약받은 건 오직 죄의 대가를 본인 처지에서 치른 것에 불과할 뿐이오. 그러니 죄를 지은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할 하나는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 한 가지가 뭐지유?”
“동우 씨는 가족의 삶을 훼손하지 않았어요?”
“이를테면 그렇다고 봐야지유.”
“맞아요. 그런 피해당한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보상받아야 하나요? 가해자가 수형생활을 마쳤다 해서 그것이 과연 피해자에게 보상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야 별개겠지유.”
“그래요. 분명 손해를 입은 이상, 그와 대등한 보상을 타인에게서 받아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그것이 마땅하지만, 지금은…….”
“그렇지요? 이 세상에는 그렇게 피핼 보고도 아무런 보상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지요.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감방에서 죗값을 치르고 나왔다고 해서 피해자가 보상받았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제부터라도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선 안 돼요.”
“당사자가 세상에 생존하지 않는데,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해유?”
“제 생각에는 당사자에게 이루어지는 게 가장 합당하지만, 그게 불가능한 상황일 때는 세상살이하는 동안 자신도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서 피해 본 사람, 그런 사람 누구에게나 그런 베풂이 이루어져도 무방하다고 생각해요.”
이동우가 아니라 이희구로 살기로 작정한 그는 서울을 벗어날 생각으로 이리저리 생각하다 시외버스 터미널을 연상했고 이내 그곳으로 향한다. 머문 자리에서 어디든 떠나려는 사람이 모여드는 곳, 버스들이 들고나는 그곳에서 갈 길을 찾으려 한다. 강원권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눈에 띄자 남현숙과 양미자가 목숨을 던진 곳으로 마치 그녀들 영혼을 실어 오려고 떠나는 듯 보인다. 아니 그곳에서 출발한 버스에서 사람이 내릴 때마다 남현숙이나 양미자 얼굴이 끼어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한다. 두 여자의 육신은 떠났어도 정의 자취는 뚜렷이 마음에 남아 있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눈길이 티브이 수상기에서 멎는다. 현지 르포로 방영되는 이미지가 화면에 흐르고 있다. 강원도 산불 피해당한 현장을 보인다. 검게 그은 땅 위에 겨우 돋아난 풀들의 강인한 생명이 기적처럼 다가든다. 그건 죽음의 땅에서 돋아난 희망이다. 비로소 이희구는 갈 방향을 정하고 매표소로 걸음을 바삐 옮긴다.
한편 산불 피해를 간신히 면한 합죽할미는 산중에 홀로 사는 외로움과 무서움을 새삼 느끼며 떠나간 막내를 오래도록 생각한다. 그때 삶에 파리하게 지친 이동우가 자기 이름을 이희구라 불러달라며 찾아든다. 이희구는 무턱대고 머물게 해달라고 매달린다.
“할머니유. 머물 자릴 찾아 여기까지 왔구만유.”
“그건 안 돼지다. 저쪽 마을 어귀에 깨끗하고 너른 집도 하고많은데 왜 해필 그곳을 그냥 스쳐 여기까지 와서 나 많은 사람 처지를 곤란하게 하시오? 아이고 참네 별일일세.”
“할머니. 저기 보세유. 저렇게 모두 타 버린 땅에서도 풀들이 퍼렇게 피어나고 있지유?”
“그래서요? 나무에 잎 뜨고 뜰에 풀 패는 기가 뭐가 그리 괴변이라고 그래 쌌소?. 내 참 괴덕스럽게 을팍 떨긴…….”
“할머니는 저런 것이 살길을 찾아 막막하게 떠도는 사람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아시기나 하세유? 할머니, 나는 저걸 희망이라 부르지유.”
“지금 희망이라 했소?!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릴세. 아마도 내 속을 뒤집어보면 반은 저 땅보다 더 새카맣게 탔을 거구먼. 몽지리 탄 땅을 희망이라고? 참네, 망령 같은 소릴 하네.”
“저걸 보면 나는 한없이 살고 싶구먼유. 그러니 제가 할머니에게 부탁 한 가지만 하겠시유.”
“늙어 힘없는 이에게 부탁할 게 뭐가 있다고 이러시와?”
“할머니. 할머니에게 부담 드리지 않을 테니 여기에 머물도록 부디 허락해 주세유. 마치 아들이나 손자처럼 여기시면서유. 그리고 저를 부를 때 이희구, 아니 그저 희구라 불러주세유. 제가 너무나 지쳐있어 더 움직일 수 없시유. 머물다 기운 차리면 잡아도 뿌리치고 미련 없이 여기서 떠날 거유. 그때까지만…….”
“질래[끝내] 떠날 사람인데 내가 뭘 덕 보겠다고 속절없이 잡긴 뭐 하려 잡아요. 아이고 내겐 당최 일없소.”
티격태격 끝에 조심스럽게 동거를 시작하지만 어머니와 아들 같은 차이라도 남녀이므로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나 같이 밭일을 하면서 또 약초를 다듬으며 차차 서로 처지를 생각하며 마음의 벽을 하나하나 열어젖힌다. 결정적인 계기는 홍수로 합죽할미가 위독해지자 이희구는 구출하여 젖은 옷을 벗긴 뒤 장작개비처럼 삐쩍 마른 육체에다 마른 옷가지를 입히고 밤새워가며 간호하면서 서로 곁에 있어야 할 존재임을 비로소 확인한다. 이제 서로 헤어져서는 안 될 긍정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그래. 내가 조금 물러서야지. 그래도 내가 나이도 한낱 위고 주인인데 지를 탓하면 내가 옹춘마니로 못났다고 욕먹을 일이지. 내가 뭐든 먼저 속내를 풀어 보이면 지 또한 언제든 마음 밑바닥에 파묻힌 얘길 끄집어내겠지. 그게 피를 섞진 않았으나 한집에 사니 그렇게 가족이 되는 거지. 그래, 같이 살지 않은 건 가족이랄 수 없지. 먼 데선 죽어 자빠져도 모르는 시대니. 그래 이리 사는 것도 참으로 나쁘지 않지. 암 혼자 사는 것보다 백 배 더 낫고말고…….”
이희구가 산으로 약초를 캐러 간 사이 폭설이 쏟아진다. 산으로 간 이희구를 기다리는 장면이 이 소설의 도입부인데 소제목이 바로 ‘기다림’이다. 이 기다림은 인간의 정에 대한 기다림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오늘따라 저녁나절 흐름은 속탈만큼 빨랐다.
‘에이고 그놈 정이란 뭔지…….’
정이란 서로 퍼준 마음일 터. 합죽할미는 타 마른 입술을 더듬어 핥았다. 튼살 촉감이 혀끝을 거칠게 쓸었다. 물로도 해갈할 수 없는 소갈증. 그런 갈증을 부추기듯 가슴 밑에서 가쁜 숨이 맥없이 무시로 치올랐다. 기다림의 무게는 어림할 수 없지만 분명 힘에 부칠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기다림도 끝이 있는 일, 사내가 돌아오면 멀쩡하게 끝날 일이다.
그런데 오늘도 사내가 오지 않으니 합죽할미는 이쯤에서 에둘러 기다림을 접고 싶기도 했다. 접는다는 건 혼자 남음을 뜻한다. 겪어 본 기다림이란 눈을 감는다 해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꿈과 달리 머릿속에서 삐져나와 눈가에 매달렸다. 혼자서는 몰랐으나 사내가 떠나서야 외로움과 함께 그에 무한한 깊이를 체득했다. 주변 또한, 이희구란 사내가 비운 공간이 워낙 널찍해서 마치 방 한 벽면이 무너진 듯 휑한 채 소 나간 외양간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기다림을 접을 수 없었다. 기다림을 접으면 떠난 사내를 곧 단념해야 하고, 그 끝은 바로 그를 버리는 일로 귀착하기에 차마 마음을 닫을 수 없어 맥 놓고 눈길만 열어놓았다. 또한, 기다림을 접는 일. 그녀에겐 그건 해야 할 짓이 아니고 마음에도 없는 일로 판단했다. 사람이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그랬다. 풍선에 바람 넣듯 나날이 부풀어 올라 기대감을 턱없이 높여놓기는 하나 살갗이 뼈에 닿게 할 만큼 애간장 태울 일이다. 눈길 끝이 문드러져 내릴 만큼 지루하여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바도 모르지 않으나, 그녀는 사내와 인연을 가벼이 놓아버릴 수 없다는 미련에서 여태 기다림을 끌어 앉은 채 돌미륵처럼 앙버티는 참이다. 비록 몸은 쇠약해도 그런 힘은 뼛속 골을 말리는 초조함 때문인지 절로 우러나오는 듯싶었다.
산으로 가다가 폭설로 길이 막힌 이희구는 약초 캐기를 포기하고 귀가하는 길에 약재상에 들려 미수금을 받아 가기로 맘먹고 읍내로 향한다. 약재상을 찾은 이희구는 약재상이 문을 닫고 달아난 상황과 맞닥뜨린다. 합죽할미의 손끝이 아프도록 다듬어진 약초의 값, 결국 포기해서는 안 될 돈이므로 끝장을 볼 작정한다. 그는 약재상을 잡으러 제천로 간다. 가는 길이 폭설에 막혀 지체하면서 제천 약재시장에 도착했으나 잡지 못한다. 이동우에게는 합죽할미의 바깥까지 나와 기다리라곤 상상도 못한다. 이희구는 다시 풍문에 따라 금산으로 가려 했으나 여비가 거들 나 제천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 여비를 마련한 뒤 다시 금산까지 쫓아가는 집념을 보인다. 그러다 보니 이럭저럭 날짜는 보름을 넘긴다.
지쳐 돌아오는 길, 집 부근에 이르자 자기를 찾아 나섰다가 쓰러진 합죽할미를 발견한다. 이희구는 그제야 떠난 시간이 지체되었음을 알고 후회한다. 맥박을 확인하고 이희구는 정성껏 간호해 정신이 돌아오게 한다.
이희구는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든 합죽할미 곁에서 벗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이제 정신을 차린 합죽할미가 잠에서 깨어나면 입 다실 거리를 찾아봐야 했다. 군불로 아직 식지 않는 솥을 열었다. 얕게 담긴 밥솥 물 위로 나무 얼개가 걸쳐있고 그 위로 양푼이 놓여 있었다. 양푼 뚜껑을 열자 열기를 잃으며 식어 가는 밥이 담겨 있었다. 돌아올 이희구 때문에 남긴 끼니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이희구는 냄비에다 급히 장국을 끓였다. 냄비에서 토장국이 굽이쳐 끓어오르자 찬밥 그릇에다 부어 토렴했다. 그는 그릇과 수저를 챙겨 쥐코밥상에다 차려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놀라지 않을 만큼 합죽할미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할머니! 정신을 차려 보세유.”
이희구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합죽할미에게 바투 다가갔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켜 세워 왼쪽 팔에 기대게 했다. L 문자에 & 부호가 한 방향으로 바짝 붙은 모양새였다. 젖어미가 새끼를 보듬어 안듯. 그녀는 그제야 이희구 품에서 가까스로 두 눈을 밝게 떴다.
“이걸 드시고 정신 차리셔야 해유, 할머니-.”
숟가락으로 토렴한 음식을 천천히 떠먹이기 시작했다. 이웃에 온기를 건넬 수 없도록 마치 찬 밥 덩이같이 식을 대로 식었던 두 사람이 뜨거운 정을 안은 채 이승과 저승에서, 한 사람은 눈 감고 다른 한 사람은 눈 뜨고 마주하지 않는 것만도 사람이 받을 지복이었다. 그게 하늘의 뜻일지도 몰랐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위탁한 곳이고, 그리 서원誓願해왔으므로…….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석 달 뒤 소리소문없이 봄비가 내렸다.
겨우내 마른 가지에서 연둣빛 잎도 피어났다. 꽃 필 나무순에도 꽃눈까지 맺혔다. 불어온 봄바람이 그 짓을 했다. 벚나무빗자루병이 아니면 꽃 필 꽃눈이 분명할 테다. 그로부터 봄이 더욱 깊어져서 비에 젖은 나뭇잎보다 개복숭아 꽃잎이 가슴을 더욱 때릴 듯 그리 화사한 날, 나뭇가지 사이로 합죽할미네 집 툇마루가 멀찍이 보였다. 등 굽은 그녀가 서툰 가위질로 낡은 재봉틀 의자에 앉은 이희구 웃자란 옆머리를 더듬더듬 치고 있었다. 목소리는 먼 곳까지 들리지 않지만, 무슨 얘기 뒤끝인지 둘은 마주 보고 엇비슷한 표정으로 키득거렸다. 그 모습이 합죽할미와 막내아들 같기도 하고, 정순임과 이동우 같게 보이기도 했다. [삼척문단 제31집 2022년간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