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역사 46억 년을 1년 열두 달로 압축하여 이런저런 계산을 해본 결과 최초 원시생명은 대략 5월 쯤 생성되었고, 포유동물의 출현은 12월 마지막 주이며, 인간 탄생은 12월 31일 저녁 여덟 시 무렵이라고 한다. 이 계산대로라면 인류문명의 역사는 1년의 마지막 몇 시간에 불과하고, 司馬遷사마천의 일생은 1초도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 一瞬間일순간을 살고 갈 뿐이다. 찰나를 영원으로 인식하게 한 당대의 司馬遷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치욕의 고통을 견뎌내야 했으며, 저주받은 걸작이자 비운의 세계사가 그가 남긴 史記사기이다. - 絶地 絶處逢生 劫殺 -
司馬遷은 전설의 시대부터 그 당시까지 약 3천년이 넘는 역사를 하나로 꿰었다. 이후 사람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그 역사를 통해 과거를 돌이켜 볼 수 있었고, 미래의 진로를 결정하는 유용한 도구로 의식하기에 이르렀다. 민중은 생존으로 역사를 창조했고, 司馬遷 개인은 붓으로 역사를 창조했으니, 치욕의 체험(宮刑궁형)과 고통스런 결산(史記)은 비극적 결합이면서 또한 위대한 결합이었다. 司馬遷은 시간과 공간적 배경을 객관화하는 동시에 주관화했으니, 史記를 가리켜 그의 분신이자 영혼이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漢武帝한무제 劉徹유철(高祖劉邦의 曾孫子)과 司馬遷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 것은 필연적 우연이었고, 두 사람 모두 시대적 요구에 따라 등장했다가 서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간 운명이었다. 史記를 만든 것은 시대정신이었고, 그들이 처했던 시간과 공간이야말로 史記 탄생의 모태였으니 결코 우연일 수 없었다. 命理로 볼 때 司馬遷도 武帝도 시간과 공간의 錯綜착종인 天機천기라는 올가미에 불가항력적으로 걸려들어 허우적거리다 갔지만, 위대한 연기자의 삶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명리학자가 볼 때 운명이란 누구나 다 그런 것이며, 生과 死의 치열한 삶일 뿐이다. 다만 비극적 삶일지라도 위대한 승화가 있는가 하면, 나약한 존재로 자연물만 축내다가 부질없이 왔다 가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위대한 죽음은 위대한 삶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司馬遷의 출생년도는 그 어디에도 근거를 남기지 않았다. - 長生 地殺 -
史記 마지막 自序자서에 “나 司馬遷은 용문에서 태어나 황하의 서쪽과 용문산 남쪽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치며 살았다.”가 전부이다. 그리고 “열 살 무렵에 古文을 배웠다.”고 했을 뿐이다. 출생년도에 대해 이런 저런 주장과 시비가 많지만, 기원전 145년으로 보는 다수의 의견이 정설이다.
아버지 司馬談사마담은 天文과 曆法역법을 주관하고 황실의 전적을 관장하는 太史公태사공이었고, 아들 司馬遷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 沐浴 年殺 -
武帝는 자신이 죽어서 묻힐 무덤인 武陵무릉을 기원전 139년 즉위하면서부터 조성하기 시작했고, 陵 주변을 도시화하기 위해 인구 대이동을 단행했다. 나라 안의 호걸들과 재산 300만 전 이상의 부유한 집안을 강제로 이주시킨 것이다. 이때 司馬遷은 고향인 용문을 떠나 武陵이 있는 관중으로 이주했으니 그의 나이 19세였다. 武帝와 司馬遷은 이렇게 간접적으로 만나게 된다. 武帝는 직접 능의 터를 고르고 국가 세금 3분의 1을 쏟아 부으며 기원전 87년까지 장장 53년 동안 공사를 거듭했다. 그런데 정작 죽고 난 다음 부장품을 무덤 속에 다 넣지 못했다고 하며, 서한 말기 농민 봉기군인 赤眉軍적미군이 武陵의 부장품을 약탈했는데 수십 일 동안 쉬지 않고 날랐음에도 불구하고 능 안의 물건은 반도 줄지 않았다고 한다. 武陵의 부장품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데 이주 자격이 전혀 없는 두 집안이 이주하게 되었으니, 司馬遷과 遊俠유협으로 명성이 자자한 郭解곽해의 집안이었다. 아마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라는 이유인 것 같은데, 司馬遷과 郭解는 이렇게 만나게 되었고, 史記 권124 ‘유협열전’에 郭解의 이야기가 있다.
司馬遷은 나이 스무 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남쪽 장강과 회하를 떠돌았다. 회계산에 올라 우임금이 묻혔다는 우혈을 탐방했고, 순임금이 묻혔다는 구의산도 살폈다고 한다. 북쪽으로는 문수와 사수를 건너 제나라와 노나라의 수도를 찾아 학술을 강론하고 공자의 유풍을 관찰했다. 추와 역 지방에서 향사를 참관했고, 파 설 팽성 등지에서 한동안 곤경에 빠졌지만, 양 초를 거쳐 돌아왔다. 3년 걸린 이 여행에서 司馬遷은 현장감과 함께 얻은 많은 정보와 자료로 史記 저술의 밑거름을 삼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冠帶 月殺 -
司馬遷 나이 28세 때 조정에서는 낭관을 대거 뽑았다. 이 때 司馬遷은 낭중이 되어 녹봉 300석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니 출세의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 建綠 亡身 -
기원전 110년 武帝는 태산에 올라 처음으로 한나라 황실의 봉선 의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司馬遷의 아버지 太史公은 주남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의식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태사공은 울화가 치밀어 번민하던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봉선 의식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는데 모처럼의 기회가 그만 좌절되어 한이 된 것이다. 태사공은 아들 司馬遷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유언하였다. 대대로 주나라 왕실의 태사였던 조상이었지만, 자기 대에 와서 끊어지고 마는구나 하는 걱정을 토로하면서 “그러나 네가 다시 태사가 된다면 선조의 유업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천자께서는 천 년 이래 황제의 대통을 이어받아 태산에서 봉선을 거행하시는데 내가 거기에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로다! 나의 운명이로다! 내가 죽은 뒤에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 내가 하고 싶었던 논저를 잊지 말고 이뤄주기를 바란다.” 하고 숨을 거둔다. 그렇게도 완성하고 싶었던 역사서를 아들이 대신 해 줄 것을 눈물로 당부한 것이다. 여기서 사마천은 일생 해야 할 목표와 명제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데, 36세 때의 일이다. 이후 司馬遷은 史記를 쓸 준비를 하게 되었고, 天文과 易을 전수받았으며 道家의 이론도 익혔다.
아버지 삼년상을 치르고 조정으로 돌아온 司馬遷의 나이는 38세였다. 복상 기간에도 司馬遷은 武帝를 수행하여 여러 곳을 순시했다. 특히 황하의 둑이 터진 호자에서 황하를 막는 대역사에 직접 참여하였고, 나무와 흙을 직접 나르면서 제방을 쌓기도 했다. 조정에 돌아온 사마천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녹봉 600석의 太史令태사령 직책이었다.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첫 조건은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史官의 기록과 국가 기록 소장처인 석실과 金櫃금궤의 서적들을 분류 정리하기 시작했다. 많은 문헌을 열람할 수 있었고,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것과 함께 많은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그리고 초안을 잡아 史記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 주상께서는 돌아가신 선친 때문에 저의 보잘 것 없는 재주를 인정하여 궁궐을 드나들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대야를 머리에 인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없듯이, 한마음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인간관계 듯 예의를 차릴 겨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친구와의 사귐도 끊고, 집안일도 돌보지 않으면서 밤낮으로 직무에만 전념하며 오직 주상의 총애를 받고자 힘썼다.
司馬遷이 조정에서 일하는 동안 제국의 강역은 더욱 넓어졌다. 서쪽의 최대 세력 가운데 하나인 대완을 대대적으로 공략했고, 武帝는 또 다른 강국 오손과는 그 왕에게 공주를 시집보내 화친정책으로 서역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동서 교류의 위대한 산물인 絲綢之路사주지로 곧 실크로드라는 비단길을 개척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전 99년 서한 내부 곳곳에서 민중봉기가 터져 나왔고, 제국은 통치권 내부로부터 서서히 썩은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 역겨운 냄새는 사마천에게까지 미치고 말았으니, 사마천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李陵이릉 사건이 터진 것이다.
한나라는 개국 이래 줄곧 흉노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왔는데, 기원전 104년 화친은 끝나고 쌍방은 다시 전투준비를 시작했다. 기원전 100년 武帝는 총애하는 이 부인의 오빠 貳師將軍이사장군 李廣利이광리를 보대 대원을 정벌하게 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여세를 몰아 흉노까지 제압하게 했지만, 이광리는 3만 부하들을 거의 다 잃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패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武帝는 이광리에게 책임을 묻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위로하며 중랑장에 임명하기까지 했다. 부당한 인사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보다 이전에 騎都尉기도위 이릉은 武帝의 명령으로 기병 800을 거느리고 흉노 땅 깊숙이 2천 리 지점까지 파고들어 대승을 거두었다. 기원전 99년 이광리가 출병할 때 이릉은 이광리의 후방을 담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릉은 자신이 부대를 이끌게 해달라고 武帝에 요청했고, 武帝는 이를 허락하였으며 路博德노박덕에게 이릉을 맞이하도록 했다. 그러나 노박덕은 이릉의 후원병을 맡는 것이 부끄러워 武帝에게 글을 올려 이릉이 싸우길 꺼려하는 것처럼 허위보고를 했다. 무제는 성이 나서 즉각 이릉에게 공격할 것을 명했다. 이릉은 하는 수없이 보병 5천을 거느리고 흉노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고, 지나온 곳을 지도에 표시케 하여 부하 陳步樂진보락을 시켜 武帝에게 보고토록 했다. 이릉의 통솔력에 부하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을 정도라는 보고에 武帝는 이릉에 대한 미운 마음은 풀렸다. 3만이 넘는 흉노 기병은 이릉의 군대를 포위했지만 이릉은 용감하게 싸워서 이겼다. 이에 흉노의 單于선우는 기겁을 했고, 다시 8만의 군사를 증원하여 이릉의 군대를 겹겹이 에워쌌다. 이릉은 후퇴하면서 싸웠지만 중과부적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대대장 하나가 흉노로 도망쳐 투항한 다음 이쪽의 정보를 알려주고 말았다. 결국 이릉은 포로로 잡혔고, 황제에게 보고할 면목이 없음을 깨닫고 흉노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릉을 칭찬했던 진보락을 추궁하자 진보락은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 旺 將星 -
이 일을 놓고 조정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고, 모두들 이릉의 유죄를 주장했다. 武帝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고, 답답한 마음에 태사령인 司馬遷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사마천은 애당초 貳師將軍이사장군 이광리의 패전이 원인이었으며, 중과부적이었던 이릉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변호했다. 武帝는 돼먹지 않은 수작으로 이광리의 공을 훼손하려 한다면서 司馬遷을 옥에 가두게 했다. 司馬遷 나이 47세 때의 일로, 친구 任安임안에게 보낸 편지에 “저는 저의 비천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주상의 슬픔과 번뇌를 보고는 저의 어리석은 충정을 다하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라 했다. 매일 똑같은 의견만 듣는 武帝의 답답함을 풀어주겠다는 일념이었다. - 衰 攀鞍 -
이듬해 武帝는 公孫敖공손오를 보내 흉노 진영 깊숙이 파고들게 했지만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귀환한 공손오는 뜻밖에도 이릉이 선우에게 병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武帝는 화가 나서 이릉의 일가족을 몰살시키고, 사마천에게는 사형을 언도했다. 그 뒤 흉노에 다녀온 사신으로부터 선우에게 병법을 가르친 사람은 이릉이 아니라 이서라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분통이 터진 이릉은 자객을 보내 이서를 죽였다.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옥중의 司馬遷은 삶의 본질에 대해 크게 고뇌했고, 인간 자체에 대한 짙은 회의에 사로잡혔지만,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죽는 것이야 무섭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작업을 그대로 둔 채 세상을 떠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고, 아버지의 뜻을 배반하는 불효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온 일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냥 죽을 수가 없었다. 지난날 서백(문왕) 공자 굴원 좌구명 손빈 여불위 한비자 등 모두는 자신의 울분을 극복하고 후대에 길이 남을 저술을 남겼던 것 아닌가? 에 생각이 미치자 희망을 찾았다.
당시 사형수가 살아날 수 있는 법은 벌금 50만 전을 내거나, 宮刑궁형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司馬遷에게 그런 돈은 없었고, 누구 하나 자기를 위해 벌금을 내준다거나 변호하거나 심지어 면회 오는 벗도 없었다. 인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짚어보았으며, 인간 존재에 대해 의문과 천명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했다. 결국 史記의 내용과 성격을 바꾸자는 생각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그래서 宮刑을 선택했다. 그러나 고뇌는 더욱 깊어만 갔다. ‘司馬遷은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사형을 당했다.’로 기록되는 것도 두려웠지만, ‘司馬遷은 죽을죄를 짓고 지질구질하게 살아남기 위해 宮刑을 자처했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로 기록되는 것은 더욱 끔직했다. 그렇지만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감수하며 궁형을 자처했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스스로를 이기고 겨우 죽음을 면했다. - 病 驛馬 -
司馬遷 나이 50세에 출옥하였고, 中書令중서령으로 복귀했다. 불구자 썩은 몸으로 구차한 삶을 택했지만, 혼란은 혼돈으로, 혼돈은 혼란으로 생각은 뒤범벅이 되면서 원한은 더욱 사무쳐갔다. 수시로 찾아드는 궁형 때의 처절한 기억은 뼈에 사무치게 괴롭혀왔다.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성한 몸을 훼손시킨 자신의 선택에 후회도 했다. 위로는 조상에게 면목이 없고, 후손에게는 참으로 부끄럽게 되었지만,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史記는 다시 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지 문화적으로 복수하면서 자신을 승화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공과는 후세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司馬遷은 자신과 애증 관계의 인물들을 특별한 형태와 방법으로 묘사했으며, 많은 故事成語고사성어(四字成語)로 조명되는 새로운 명언과 신선한 문구는 그야말로 司馬遷만의 창안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史記는 문학적 역사서이자 역사적 문학서이고, 절대적 역사서이면서 통섭의 역사서인 것이다. 훗날 사학자들은 이러한 史記를 가리켜 亂書난서라 했고, 마치 퍼즐 맞추듯이 기묘한 짜임새의 글맵시는 서로 비교해서 이해하도록 한 互見法호견법을 썼기에 학자들은 亂書가 아니라 難書난서라 했다.
司馬遷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다시 잡혀 들어가 죽었다는 설도 있지만, 부인 柳倩娘유천랑이 하향에 남편을 묻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권력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점철된 史記는 묻힐 뻔 했고, 그의 무덤 또한 돌아봐 주지 않았다. 후손들은 성씨를 바꾸면서까지 숨어서 살아야만 했다. 司馬 씨가 둘로 갈라졌으니, 馬는 큰아들 후손들로 馮 씨, 司는 작은아들 후손들로 同 씨로 살았다. - 死 六害 -
황하 유역 산서성 서촌에 있는 司馬遷의 묘소는 버려지듯 했고, 나라에서는 제사도 지내지 못하게 했다. 중죄인의 일가족을 몰살하는 일은 비일비재했기에 후손들은 묘소가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신분을 숨기며 살아야 했고, 그래서 청명일이면 귀신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위장하여 司馬遷의 제사를 몰래 지냈다. 버려진 무덤이었지만 이민족인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칙명을 내려 지금의 형태로 정비해줬기에 몽고의 고유 주거 형태인 파오(包) 모양의 八卦墓팔괘묘이다. 제국주의의 王들은 史記의 내용이 참으로 껄끄러웠고, 아픈 곳을 찔러대는 날카로운 비판의 글이었지만, 쿠빌라이가 볼 때는 오히려 통쾌했고 위대한 司馬遷이었던 것이다. - 墓 華蓋 -
司馬遷은 史記를 통해 후세 정치인들이 허물을 짓지 않도록 시사했지만, 신화와 전설로만 전해지던 상고시대를 과격할 만큼 구체화했다. 헌데 지금 중국은 司馬遷의 의도와는 전혀 딴판으로 史記를 악용하면서 역사왜곡에 혈안이다. 우리나라를 겨냥한 역사왜곡이 동북공정으로, 그 심각성을 깨닫고 국가정책으로 바로잡아야 할 작금인데, 정부에서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무관심이다. 史記를 내세우며 소프트파워를 지향하는 지금 중국의 존재감은 급진적 극단적 위협이 아닐 수 없으며, 국가전략으로 史記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심각함이 있다.
중국 역사상 10대 혹형이 있었다.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내는 剝皮박피. 산 채로 허리를 잘라 죽이는 腰斬요참. 양팔 양다리 머리를 묶어 다섯 마리 말이 끌게 하여 찢어 죽이는 五馬分屍오마분시. 천 번의 칼질을 가해서 죽이는 凌遲능지. 목 졸라 죽이는 縊首액수. 큰 항아리에 넣고 불을 때서 태워 죽이는 請君入甕청군입옹. 산 채로 땅에 묻는 活埋활매. 무릎 아래를 자르거나 뼈를 발라내는 刖刑월형. 손톱에 바늘을 꽂아 고통스럽게 하는 揷針삽침. 생식기를 완전히 거세하는 宮刑궁형.
이 외에도 삶아 죽이는 烹刑팽형. 배를 가르는 割腹할복. 돌을 매달아 물에 빠뜨려 죽이는 沈河침하. 독약을 먹여 죽이는 毒殺독살. 혀를 자르는 截舌절설. 눈알을 파내는 挖眼알안 등이 있다.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짓거리의 형벌이다.
宮刑을 가장 고통스러운 혹형으로 꼽는 까닭은 무엇인가? 오랜 시간 정신적 고통을 극대화하고 심리적 압박감을 주려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집행하는가?
발가벗긴 다음 생식기 전체(男根남근과 陰囊음낭)를 끈으로 묶어 신경을 죽게 하고, 예리한 칼로 통째로 잘나낸 다음 지혈제를 뿌리고, 굵은 거위 털을 요도에 박아 따뜻한 방인 蠶室잠실로 보낸다. 오줌이 나오면 살고, 오줌이 나오지 않으면 尿毒症요독증으로 죽는다. 혹 오줌이 나오더라도 상처가 아물지 못하면 부위가 썩어들어 결국은 죽게 된다. 여성은 질을 메웠다고 하는데, 죄가 미워서가 아니라 사람이 미워서라니 인간이라면 차마 못할 권력자의 만행이자 가혹행위가 아닐 수 없다. 어찌 그들인들 온전할 수 있겠는가? 하늘이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독재자의 비극적 말로가 입증되었던 역사였다.
河圖하도의 원리는 세상이 지어진 이치로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세상이다.
洛書낙서의 원리는 세상이 변하는 이치로 약육강식과 땅 뺏기 싸움의 세상이다. 司馬遷의 史記는 여기에 근거하는 몹쓸 인간들의 행태라 할 수 있다.
23.5° 기울어져 도는 지구의 자전축 때문에 생기는 春夏秋冬춘하추동은 자연현상이다.
지구의 자전축이 똑바로 서는 세상이 온다는 正易의 예언이 있었지만, 언제 이루어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正易의 시대가 오면 朝晝夕夜조주석야는 있지만 春夏秋冬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태평시대일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렇지만 혹 지구의 자전축이 똑바로 선다고 하더라도 우주의 대변혁일 것이므로 인간이 살아남을 확률은 적다고 본다. 이래저래 인간은 살아도 걱정 죽는 것도 걱정이다. 전쟁터 같은 살벌한 洛書의 시대보다는 河圖의 시대가 좋았을 것 같은데 선택할 방법이 없다.
독서는 지식의 재료일 뿐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색의 힘이라니, 史記를 읽더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행동은 달라질 것이다. 싸움질만 일삼는 삼국지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史記는 인간으로서 배울 점이 많고,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다만 소인은 “아! 저렇게 하면 되는구나!” 하기에 절대 소인이 보아서는 안 될 책이 史記이다.
司馬遷의 四柱는 아무도 모른다. 굳이 유추해본다면 官格에 傷官用神일 것이다. 官은 透干되지 않았지만, 大運에서 正官을 만났을 때 황제에게 미움을 샀을 것이다. 그의 천재성으로 보아 官印相生되는 구조에 印綬도 用神이었으리라. 따라서 天干은 내 四柱와 아마 유사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地支에는 寅巳申 三刑을 다 갖추었을 것이다. 고향을 등진데다 驛馬와 地殺 때문에 많이도 돌아다녔을 것이고, 日支를 冲하는 대운에 결국 왜곡의 인생 형벌을 받았을 것이다. 官을 돕는 財星은 忌神으로 작용했기에 녹봉만으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司馬遷의 일대기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상념을 할 수 있을까? 司馬遷은 치욕적인 삶을 감수하면서까지 보다 진보되고 완전한 사기를 완성한 공로자이다. 너무 참담하고 너무 가슴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선 大成功者라 아니할 수 없다. 사마천의 삶은 결코 비굴하거나 치욕일 수만은 없는 참으로 위대한 삶이었고, 끔직한 선택은 죽음을 넘어선 위대한 삶이었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수준 높은 가치관을 보여준 위인으로 인류의 귀감이라 하겠고, 품위 있는 문화 복수에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단어의 뜻을 새삼 실감나게 음미해본다.
작금 우리나라 통치자와 정치인들의 행태를 볼 때 司馬遷의 사기에 있는 여러 군상들과 비교해볼 때 참으로 치사하고 저질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누구나 제 잘난 맛에 살겠지만, 司馬遷을 나라고 생각해보자. 그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오늘 한 시간만 지나면 서기력으로 섣달그믐이다. 새로운 삶의 개혁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