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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자료 스크랩 기타 이스라엘 역사 1
John 추천 0 조회 50 07.11.09 09:0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이스라엘역사 1


[집필목적] 이스라엘 역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곧 성경의 역
사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성경은 또한 이스라엘 역사와 더불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소개된 많은 [이스라엘 역사]는 외국인 저술의 번역
물이 대부분이며, 그 역사 기술이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다.

[책의 성격] 따라서 본 저술은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의
도에서 시작하려 한다. 특히 역사 기술에 있어서 신학적 의도를 배제하고, 고대
사 부분과 중세 및 현대사 부분의 균형을 맞추어 서술하게 될 것이다.

[목차] 제1장 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의 형성
1.1 문명의 사이에 서 있는 이스라엘
1.2 간추린 고대근동의 역사
1.3 이스라엘의 족장들
1.4 이집트 탈출 사건과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1.5 가나안 정복과 사사시대

제2장 제1차 성전시대(1024 B.C.E -586 B.C.E.)
2.1 왕정의 확립
2.2 사울
2.3 다윗과 솔로몬
2.4 남북 분열의 원인과 그 의미
2.5 남북 왕조의 역사
2.6 분열 왕국의 남북관계

제3장 제2차 성전시대(538 B.C.E.-70 C.E.)
3.1 바빌로니아 포로시대
3.2 페르시아 시대의 이스라엘
3.3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과 헬레니즘
3.4 마카비전쟁
3.5 헤스모니안 왕조
3.6 로마의 통치와 헤롯대왕
3.7 제1차 유대반란과 예루살렘의 멸망
3.8 예수와 초기 기독교

제4장 미쉬나,탈무드 시대(70-640 C.E)
4.1 성전멸망 이후의 변화들
4.2 산헤드린의 설치
4.3 제2차 유대반란
4.4 아모라(Amora)의 시대
4.5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4.6 미쉬나와 탈무드
4.7 콘스탄틴 황제와 유대-기독교 논쟁
4.8 산헤드린의 폐지와 아랍의 등장

제5장 팔레스틴의 새주인들
5.1 비잔틴(325-640 C.E.)
5.2 모슬렘(640-1091 C.E.)
5.3 십자군(1091-1299 C.E.)
5.4 마멜룩(1299-1517 C.E.)
5.5 터어키(1517-1917 C.E.)

제6장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6.1 디아스포라의 유대사회와 문화
6.2 중세 유럽의 유대인
6.3 유럽의 변화와 유대인 공동체
6.4 반유대주의(Anti-Semitism)

제7장 현대 이스라엘의 건설과 중동의 평화
7.1 시온주의의 태동과 그 이념
7.2 헬쩨 이후의 변화들
7.3 제1차 세계 대전과 시온주의 운동
7.4 양차 대전 사이의 시온주의 운동
7.5 나치 대학살(Holocaust)
7.6 현대 이스라엘 독립과 그 과정
7.7 이스라엘의 정책과 중동전쟁
7.8 중동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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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의 형성
1.1.문명의 사이에 서 있는 이스라엘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필연적으로 주변 국가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
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경우 약소 민족으로서 주변 강대국으로부터의 영향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이며, 그 사람들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과정에 의해 한 민족이 되었는가? 그들의 종교적 뿌리는 무엇인가? 그들의
하나님 야훼는 누구이며, 어떻게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는가? 이러한
질문들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이 위치하며 살고있는 근동 지방
의 다양한 역사와 변화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한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계 3대 대륙인 아
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연결하는 교량적 위치에 놓여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
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과 정치
적,종교적,경제적 관계를 맺어 왔다.
상대적으로 약세에 처해있던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
아 왔으며, 그들로부터의 종교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었고, 인류 문명의 발생지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양대 문명과의 경제적 관계를 맺지 않
을 수 없었다.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앗시리아, 페르시아 제국들은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영향을 끼쳤으며, 이집트 역시 직접 이스라엘을 지배했었다.
뿐만 아니라 서쪽의 아나톨리아와 그리이스 및 로마 제국 역시 이스라엘을 다스
렸다. 서방의 이 문명은 이스라엘을 지나 동방의 그것과 충돌하였다. 이러한 동
서의 만남도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룩된 셈이다.
한편, 이스라엘은 '기름진 초생달'(Fertile Crescent)의 서남쪽 끝에 위치하
고 있으며, 평야와 사막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동쪽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
스강과 티그리스강 줄기를 타고 초생달 모양을 이루며 북서쪽으로 발달한 기름
진 평야는 이스라엘의 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 끝을 이루고 있으며, 이집트
로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사막과 만나게 된다.
이스라엘을 지나가는 중요한 고대 도로는 양대 문명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역
할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 안에서 발달된 도로는 이스라엘의 국제적 관계를 이
해하는 열쇠가 되며, 도로를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들과 인구의 밀집상태, 군사
적 행동등 많은 사건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대의 역대
왕들의 매우 중요한 사업 가운데 도로공사는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왔으며, 이는
곧 정복의 한 과정으로 취급되어졌다(cf.사62:10; 40:3; 57:14; 49:11; 렘
18:15). 동시에 국제 상업로(international transport routes)로서의 도로의 역
할은 경제 교류에 크게 기여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을 통과하는 국제로(International Highways)는 '해변의 길'(Via
Maris)과 '왕의 대로'(the King's Highway)로 크게 구별된다. 이 두 도로는 많
은 군인,사신,상인,여행자들이 지나 다니는 길로써 역사적,정치적,경제적,문화
적으로 이스라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다.
이사야 9장 1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해변의 길'은 이집트 탈출 사건에서 언
급되고 있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the way to the land of Philistine,출
13:17)과 부분적으로 일치 한다. '바다의 길'(the way of the sea)로 불리우는
이 도로는 라틴말로 Via Maris라 칭한다. 이 도로를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들로
는 이집트로부터 시작하여 가자, 아스돗, 아벡(삼상4:1;29:1; 왕상20:26ff; 왕
하13:17), 므깃도(왕상9:15-19, cf.계16:16), 하솔(왕하15:29), 다마스커스를
지나 메소포타미아에 이르게 된다.
한편,'왕의 대로'는 요단 동편 산지(Transjordanian highlands)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로써 민수기 20장 17절과 21장 22절에서 언급되고 있
다. 이 도로는 세렛(Zeret,신2:13), 아르논(Arnon,신3:8), 얍복(Jabbok,신
2:37;3:16;민21:24,cf.창32:22), 그리고 야르묵(Yarmuk)등의 큰 와디(Wadi)가
가로 놓여 있어서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집트 탈출의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
은 이 도로를 따라 모압산지 느보산에 이르러 가나안땅으로 들어오게 된다(신
2-3장). 한편,창14장에서는 '왕의 대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많은 도시국가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1.2.간추린 고대근동의 역사
1.2.1.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두 강이 흐르고 있는 메소포타미아는 3,000
B.C.E. 이미 청동기 문명을 가진 수메르인(Sumerian)들이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종교, 언어, 군주를 가진 인류 최초의 고등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나스르 시대(2,800-2,700 B.C.E.), 메질림 시대(2,600 B.C.E.), 그리고
우르 왕조(2,500- 2,350 B.C.E.)를 거쳐 오면서 그 세력을 확장해 왔다.
그러다가 이들의 세력은 서북쪽에서 발흥한 셈족의 아카드인(Akkadian)들에
의해 멸망하면서 메소포타미아를 넘어 소아시아, 이란의 고원 지대를 포함한 거
대한 아카드 제국(2,350-2,050년 B.C.E.)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중앙 집권적인
관료 국가를 이룩하였으며, 왕이 곧 신이었다. 국가 건설의 주역인 사르곤 대제
(Sargon I)는 그야말로 '위대한 왕'이요, '신의 대리자'였다. 2,150년경 아카드
왕조는 비셈족계의 산악인들의 침입으로 그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100여
년을 보낸다. 1976년 에블라(Ebla)에서 발견된 약 16,000여개의 토판문서는 이
시대의 법률, 종교, 교역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수메르 복고 시대(2,050-1,950 B.C.E.)를 거쳐 바빌로니아 왕조로 이어지는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함무라비왕(1,728-1,686 B.C.E)의 법전이 완성되기도 하였
다. 바빌로니아의 발흥과 함께 마르둑(Marduk) 신은 만신전의 최고의 신으로서
당시 에테메난키(Etemenanki) 신전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풍부한
문헌들-바빌로니아의 창조설화와 홍수 설화, 점성술과 제의 신탁등-은 고대 사
회의 성왕한 문화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1.2.2.이집트
팔레스틴을 사이에 두고 발생한 또 다른 하나의 문명은 역사가 헤로도
투스(Herodotus)의 기록대로 "나일강의 선물"이라 일컫는 이집트 문명이었다.
이집트는 가장 안정된 정치적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그 나라가 사막
과 바다에 의해 고립된 사실에 기인한다. 고왕조(제1-6왕조,2,850-2,200
B.C.E.)의 시작은 메네스의 통일 국가로부터 이룩된다. 고전적 개화기를 맞은
제3왕조에 들어서면서 불가사의라 일컬어지는 피라밋(Pyramids) 건설은 이들
문명의 대표적 표상이 되었다.
중왕조 제1기(제7-10왕조, 2,200-2,052 B.C.E.)는 여러 지방 군주들의 반란과
폭동으로 인한 혼란기였으나, 제2기(제11-13왕조,2,052-1,790 B.C.E.)에는 다시
국가의 통일을 이루어 테베(Thebe)를 중심으로 그 문명의 자리가 바뀌었다. 제3
기(제14-17왕조,1,710-1,570 B.C.E.)에 들어서는 아시아로부터 온 힉소스
(Hyksos) 의 침략으로 통치권이 넘어가면서 이집트 내부에는 많은 구조적 변화
를 맞게 된다.
이집트 왕조의 꽃이라 일컬어 지는 신왕조(제18-24왕조,1,570-1,085 B.C.E.)
는 아흐모스(Ahmose),투트모스(Tuthmoses),아메노피스(Amenophis),투탄카문
(Tutankhamun),람세스(Ramses),세티(Seti),메르넵타(Mernepta)왕으로 이어져 내
려오면서 화려하게 발전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주기적인 나일강의 범람과 함께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이
러한 현상은 역사를 순환하는 것으로 보게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이집
트인들에게 유동적인 사고의 특징을 가져다 주었다.

1.2.3.소아시아
고원 지대와 에게 해안의 저지대에 이르는 서부 아시아는 독자적인 소
아시아의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힛타이트 제국(Hittite, 1,800-1,460
B.C.E)으로써 성경에서는 이들을 헷족속으로 부르고 있다. 그들은 1,530년
B.C.E. 바빌로니아를 침공하여 그를 정복하기도 하였으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
아 사이의 세력 균형을 조정하고 중재하는데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하
였다.

1.2.4.고대 근동과 팔레스틴
고대 근동 지역의 여러 왕국들은 각각 시대의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제국으로 발전하였으며, 그들은 관개 농업을 발전시키고, 국가간의 무역, 외교,
동맹 체결, 패권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등을 통하여 발전해 왔다. 그들에게 있어
서 종교는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합법화시키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담
당하였다. 그들은 제국들의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관리들을 수반
으로하는 행정구역을 만들었으며, 강력한 식민지 정책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팔레스틴은 여러 민족의 이동과 이주와 함께 인구가 증가하
고 도시 국가들이 세워지며, 여리고, 므깃도, 하솔, 게셀등의 도시들이 견고하
게 요새화 되었다. 이 시기에 페니키아에서는 초기 가나안 언어인 알파벳 문자
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가나안 사람들의 이 언어는 고대 히브리어의 모체가
되었다.
고대근동의 이러한 정치사에 대한 관찰은 이스라엘의 기원을 확인하는데 있어
다소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나 우리가 이스라엘의 초기 삶이
보도되어 있는 성경 안으로 들어가 보면 고대 팔레스틴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
적, 사회적 특징을 만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는 보다 넓은
근동의 상황 속에서 이해되나 동시에 그들 고유한 상황과 특성 속에서 이해되어
야 한다는 것이다.

1.3.이스라엘의 족장들
1.3.1.족장 이전의 팔레스틴
족장 이전의 팔레스틴의 환경에 관하여는 우리가 아는 사실이 극히 제
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이주 이후의 역사로 부터 취
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로 인하여 족장 이전
의 모습에 관하여 대강의 모습을 구성할 수 있는 정도이다.
기원전 2,000년의 팔레스틴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역사는 인종적,문화적,정치
적 패턴의 대 변혁기였다. 이집트는 신왕조(New Kingdom Dynasty,18-24왕
조,1570-1085년)의 시작과 함께 막강한 힘을 뻣어 나갔으며, 북쪽의 힛타이트
제국 역시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팔레스틴은 이러한 강대국들의 틈에서
여러차례 지배를 받아 오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아모리인(Amorite) 의 이동과
함께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이들의 이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의 발전을 이루며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외에도 그 후 에돔, 모압, 암몬, 블레셋등의 세력들이 함께 팔레스틴에 머
물며 살게 되면서, 가나안 문화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를 이룩하게 된 것
이다. 이들의 문화는 주로 도시국가(City-State) 형태를 갖춘 고등문화 수준이
었다. 한 통치자(왕)를 중심으로 하여 귀족 계급을 두고 있으며, 때로는 도시
국가 간의 동맹 체제를 이루면서 중앙 집권 형태의 구조를 가진 제국들과 맞서
나갔다.
시리아-팔레스틴은 대략 1550-1225년 B.C.E.까지 이집트의 속국에 불과하였
다. 최근 발견된 엘 아마르나(El-Amarna) 문서 는 이집트의 식민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외교 문서로써 이 시대의 가나안의 환경을 이해는데 도움
을 주고 있다. 특히 가나안의 도시 국가의 목록-세겜, 라기스, 아쉬켈론, 예루
살렘, 가자등-과 군대 규모, 정복한 도시 통치자들을 다스리는 방법등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담고있다.

1.3.2.아브라함의 이주와 이스라엘의 여명
구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최초의 이스라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
상인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시작된다:"너는 너의 본토 친
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아브라함의 순종은
이스라엘 문명사(history of civilization)의 전환점이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팔레스틴의 원주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다른 지역에서 살던 한 유목민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었다. 본래 아브라함의 고향
은 메소포타미아의 한 도시 우르(Ur)였다. 당시 이 도시는 메소포타미아의 최고
의 도시 국가였다. 그는 '기름진 초생달' 지역을 지나 가나안이라 일컬어지는
팔레스틴 땅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가 지나간 하란(Haran) 역시 매우 번창했
던 도시였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가나안에 입주하던 시기를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 고고학자인 올브라이트(Albright),그릭
(Glueck),드보(De Vaux)등은 이 시기를 2,000-1,500년 B.C.E., 즉, 중기 청동기
시대(Middle Bronze Age)로 잡았으며, 이러한 주장은 유프라데스의 마리(Mari)
에서 출토된 문서에서 뒷바침되고 있다. 그러나 코프만(Kaufmann), 고든
(Gordon), 아이스펠트(Eissfeldt)등은 가나안 정복과 정착 시기와 비슷한 기원
전 14세기로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 창15:16을 들고 있다:
"네 자손은 4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야곱 이후의 4대는 야곱-레위-고
핫-아므람-모세이다.
그런데 대표적인 시대 착오적인 성경의 기록으로써 족장들의 기록에 '약대'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창12:16;24:10; 30:43; 31:17등). 인간이 낙타를 길들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2세기였다. 이처럼 성경에서의 년대는 일반적인
년대나 족보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cf.대상7:22-27).
이처럼 이 시대의 년대를 정하는 일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업
을 성경의 역사적 기록이나 자료, 또는 고고학의 증언을 통한 확증의 방법을 사
용하는 것 보다는 일반 정치적, 지리적 자료, 그 시대의 관습이나 법률, 사회
경제적 지위, 혹은 생산 및 자기 방어에 대한 관심을 균형있게 연구함으로써 보
다 가까운 조상들의 시대의 상황을 그려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살던 시대의 삶의 상황과 형태는 반유목문화적
(Semi-nomadic) 형태를 띄고 있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유리하는
아람인"(신26:5)으로써 여기 저기 이주하면서 살았다. 세겜(창12:6;33:18), 베
델과 아이(창12:8), 헤브론 근처(창13:18; 35:27), 브엘세바(창26:25)등의 중앙
산지가 그들의 중요한 거처들이었다. 이 곳은 잘 발달된 목초지로 목축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 족장 가운데 이삭은 부분적으로 농업을 하기도
하였다(창26:12). 이들은 분명히 사회,경제적으로 반유목문화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유목문화의 특징으로는 1)계절에 따라 이주하는 생활, 2)가축과 재산을 보호
하기 위한 조직 사회의 구성-족장을 중심으로 한 씨족이나 부족 사회(각 부족의
특색), 3)지파간의 권리 보호를 위한 계약 제도 형성(규율), 4)계약 위반자에
대한 철저한 피의 복수법(명예), 5)손님에 대한 융숭한 대접과 친절한 행위(나
그네 보호법), 6)상속법등을 들수 있다. 유목민들은 대체로 열려진 광야에서 살
면서 종교적이거나 혹은 정치적인 것이거나 간에 그 어떤 속박도 용납하지 않는
자유를 가진 자들이었다.
이러한 족장들의 삶의 형태는 최근 고고학적인 발굴 자료를 통하여 어느정도
확인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발굴을 통한 자료가 직접적으로 아브라함을 비롯
한 족장들에 관한 자료는 아니라 할찌라도 그 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초기 히브리인들의 이름들은 대부분 근동지방의 고고
학적 자료에서 나타나는 이름들과 유사한 셈어적 이름들-야곱, 아브람, 나홀,
데라등-이라는 사실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유사한 주민들이 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를 요약해 보면 먼저 족장들은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으며, 도시 문명
지대의 영향권 밖에 머물면서 도시 문명을 건설하지 않았고, 천막을 치고 이주
하던 생활 구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몇몇 무덤(cf.창23;35:19-20)이 발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
한 동시대의 특성이 족장들의 역사의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경에 기록된 족장들의 시대 상황과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
다.
다만 아브라함에 관한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구약 성경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관심은 아브라함 이후의 족장들(Partriarchs)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
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씨가 확산되는 근거가 되었다는 점과 그들이 살 땅을 유
산으로 받았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었
다:"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2:2,7).

1.3.3.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
아브라함 이 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소위 족장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다. 족장들은 단지 고독한 개인이 아니라 꽤 규모가 큰 씨족들의 추장들이었다.
이 시기의 팔레스틴은 수없이 많은 유목민 씨족들로 뒤섞여 있었으며, 이스라엘
의 족장들은 이들 가운데 한 집단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역사와 삶은 대체로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특히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하나님과 씨름하다'는 뜻을 담
고 있다.
야곱은 4명의 아내로부터 모두 12명의 아들을 두고 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의 각 지파의 조상이 된다. 레아에게서 낳은 장자 르우벤을 비롯한 시므온, 레
위, 유다, 잇사갈, 스블론,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 과 베냐민, 빌하에게서 낳은
단과 납달리, 실바에게서 낳은 갓과 아셀이 그들이다(창35:22-26). 이스라엘의
역사는 12지파의 역사로 전개되어 가고 있으며, 각 지파간의 협력과 갈등의 역
사이기도 하다.
한편, 요셉의 생애는 그가 살던 시대의 배경을 무대로하여 문학적으로 잘 구
성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형들의 미움으로 이집트에 팔려 갔으며(창37
장), 머슴살이를 시작으로 이집트의 총리 대신에 이르기까지 지혜롭게 살아간다
(창38-41장). 훗날 가나안 땅에 큰 기근이 들어 야곱과 그의 형제들이 이집트로
내려와 살게 된다(창42-46장). 바로 여기서 요셉의 이야기는 족장들의 약속과
이집트 탈출 사이의 연결 고리를 이루고 있다.
종합하면 주전 20-18세기 '기름진 초생달' 지역의 북부 문명 지대안으로 수많
은 이주민들이 들어왔으며, 그들은 작거나 큰 조직 사회를 형성하였다. 팔레스
틴에로의 이주가 제법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면서 이 지역의 문화를 결정해 나갔
다. 특히 족장 중심의 성경 기록은 이 시대의 여러 민족들의 이주와 더불어 이
해될 수 있으며, 이들은 각각 개별적인 민족 혹은 부족으로써 존재해 오던 것이
하나의 계보(부족집단)로 결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대체로 반유목민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족장들은 각각 씨족의 수호신을 숭배하고 있었으
며, 토착적인 종교 제의가 행해졌다.
이러한 여러 각기 다른 전승들이 하나의 체계적인 전승으로 묶여 확장 혹은
손질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승은 조상들의 역사를 고증하기 위한 전승의
편집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웅적인 조상들을 새로운 사회 종교적
질서(socioreligious order)의 창립자 또는 선각자로 찬양하기 위한 보도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초기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역사는 성경 이외의 이들에 관
한 직접적인 자료 부족으로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들이 살던 시대의 시대적
정황을 통하여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장들의 초기 유산은 이스라엘의 민족 의식과 신앙을 형
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그런점에서 족장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
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을 자신의 '조상'이라 부르는 것은 역사상 타당한 이유가 없지 않은 것이다(창
15:6;롬4:3;히11:8-10).

1.4.이집트 탈출(Exodus) 사건과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1.4.1.민족의 이동과 '아삐루'
성경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보도
가 요셉의 이집트에로의 이주 기사(창37장 ff)를 깃점으로 팔레스틴의 족장 전
승의 흐름이 이집트 이후의 모세 전승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
에서 이스라엘이 단일한 족보상의 발전 과정을 거쳐 출현하였다는 인상을 받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으며, 성경도 이스라엘 민족
이 대단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으며, 또 극히 잡다한 출신 배경을 가진
구성원들을 포괄하였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의 혈속(nefesh,"person"(JPS);"generation"(RSV);씨족)
은 모두 70인이었다(출1:5;cf.창46:8-27). 이집트 사람들은 그들을 '히브리'라
불렀다. 그런데 성경은 400년(창15:13) 혹은 430년(출12:40)간 종살이를 한 후
이집트를 탈출해 나온 사람들을 600,000명의 "이스라엘 자손"(bnei israel)과
"중다한 잡족"(erev rav,"mixed multitude")들이었다(출12:37-38)고 말하고 있
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더불어 탈출한 사람들을 "이스라엘 중에 섞여사는 무리"
(ha-esafsaf,"riffraff in their midst"(JPS);"Rabble that is among them"
(RSV),민11:4)라고도 불렀다.
이 점에 비추어 볼때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으로 이주한 이들은 이스라엘을 포
함한 대규모 하류민 집단이었음이 확실하다. 조상들의 전승과 관련해서 볼 때
이집트 탈출의 무리들은 이스라엘의 자손들뿐아니라 전쟁 포로 혹은 노예들이
포함되었다. 노예들의 반란과 탈출이라는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의 이주와 연합
되어 이집트 탈출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사실 히브리인들의 정체에 관해서도 여러가지 추론들이 있다. 특히 가장 유력
시 되고 있는 학설가운데 하나는 아삐루(apiru)와의 관련설이다. 주전 14세기경
의 엘 아마르나 문서(el-Amarna Letters)는 종종 하비루(hbr)라고 표기된 침입
자들에게 대항하는 상황에서 팔레스틴의 도시 통치자들이 이집트 바로에게 원조
를 요청하고 있는 글이 발견된다. 주전 1360년경 예루살렘의 도시 군주 압디-헤
바(Abdi-cheba)는 이집트왕 아메노피스 IV(Amenophis)에게 이렇게 쓰고있다:
"...사람들이 나의 주, 왕 앞에서 나를 비방하고 있읍니다...어찌하여 너희는
아삐루('Apiru)를 사랑하고 지역의 감독관은 미워하는가? ... 아삐루는 왕의 모
든 나라를 약탈합니다..."
비슷하게도 킬티(케글라,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도시)의 슈바르다타
(Schuwardata)도 "나의 주 왕께서는 아삐루가 다..(무기?)를 가지고... "라는
문구가 발견되며, 또 이집트의 아메노피스 II의 한 비문(주전 1400년경)에서도
포로민인 '아삐루 3600명'이 언급되어 있으며, 라암세스 II(주전 13세기)때의
서신에도 "라암세스 미아문 돌들을 운반하는 ...,거대한 이집트 궁전과 사원의
문을 위하여 일하는 군인들과 아삐루들에게 군량미를 주어라"는 기록이 있다.
라암세스 IV의 원정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nt 지파들의 800명의 아삐
루"가 나온다.
아삐루는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가나안 및 이집트등지에 흩어져
살던 뚜렸하지 않은 백성(inconspicuous people)임에 틀림없다. 이들 아삐루는
대체로 땅이나 소유가 없는 외국의 용병(mercenary soldiers)이나 약탈자
(guerilla bands), 또는 포로민들과 노예들(slave labor)로써, 사회의 가장자리
에 뿌리없이 살아가는 "떠돌이"(wanderers) 혹은 "국외자"(outsiders) 였다. 그
것은 종족적(racial or ethnic)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 계층적(social stratum)
인 개념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사람들은 아삐루('Apiru)를 이브리('ibri,"히브리인")와 동일시 하였다. 구
약에서 이브리가 완전한 자유인이 아닌 종이나 남녀에게 사용되었던 것과 같이
(출21:2;신15:12), 그것은 "가족의 소속이 없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
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주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권리가 없는 약한 외국인을 통
칭하는 의미로도 사용되게 된 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히브리 사
람 아브람"을 최초로 말하고 있으며, 가나안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들어
와 체류(거주,ger)하는 모습이 분명하다(창14:13).
가나안에 머물던 히브리인들의 뿌리는 야곱이 이집트로 이주한 이 후 약화된
다. 특히 이들의 이주는 이집트의 베니 하산(Beni-Hasan) 무덤 벽에서 발견된
벽화(19세기 B.C.E.)를 통하여 당시의 삶의 양태를 알 수 있다. 이 그림에는 수
염 달린 사람들, 활쏘는 사람(bowman), 음악가, 당나귀를 탄 여자와 어린이, 그
리고 양과 염소등이 어우러져 있다.

1.4.2.연대기와 이집트 탈출의 시기
성경의 본문은 연대기적 골격을 제공해 주는 몇 개의 기록을 남기고 있
다. 먼저 솔로몬은 이집트를 탈출한지 480년 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고 한
다(왕상6:1). 성전의 주추돌을 놓은 시기는 967-958년 B.C.E.가 확실하다. 역으
로 계산하면 이집트를 출발한 시기는 15세기, 즉 1447-1438년 B.C.E.년경이 된
다. 출12:40에서는 이집트에서의 체류기간을 총 430년이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창15:13에서는 400년), 이에 의하면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간 것은 19세기, 즉
1877-1868년경이 될 것이다. 이에 성경의 여러 연대표를 통하여 추정해 보면(창
47:9;25:26;24:5;12:4)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을 떠난 시기는 2092-2083 B.C.E.
년경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연대기는 성경 밖의 여러 자료와 비교할 때 상치되는
점이 많다. 먼저 사마리아 오경(Samaritan Pentateuch)과 70인 역(Septuagint)
에 제시된 수치가 히브리어 성경(MT)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는 점과, 보다 중대
한 문제는 15세기 이집트 탈출설을 가정하는 것은 성경에 묘사된 당시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또 고고학적으로 이스라엘이
1400-1250년대에 가나안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집트 탈출의 년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이집트의
증거 자료의 제시일 것이다. 이집트 탈출 년대를 기원전 15세기로 보는 입장은
이집트로부터 힉소스족을 몰아낸 제18왕조(Thutmosis III,1468-1436년 B.C.E.)
는 추정컨대 아시아인을 무척 혐오하게 되면서 그들이 지배하고 있던 히브리 노
예들을 가혹하게 억압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다. 이는 성경의 요셉이 힉소스
계의 바로에게 총애를 받은 것과 그 뒤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1:8)인
제18왕조가 아시아계인 히브리인들을 학대하는 것과 일치한다. 또,1425-1350년
B.C.E.동안에 가나안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무너뜨리며 활동하던 아삐루(apiru)
에 관한 엘 아마르나 문서의 언급은 성경의 기록에 나오는 가나안 정복을 위한
이스라엘인들의 활동과 일치하는 기록으로 설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 다른 기록과 정황에 관
하여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들면 히브리 노예들이 노역에 시달렸다는
비돔(Pitom)과 라암셋(Ramses)(출1:11)은 텔타 지역의 아름다운 목초지의 도시
로써 이집트의 수도인 테베(Thebe)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이러한 정황은 오히
려 제19왕조의 라암세스 II(1290-1224 B.C.E.)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된다. 즉 제19왕조는 텔타평원에 있던 힉소스의 수도인 아바리스(Avaris)에 도
시를 재건하여 "라암셋의 집"(Raamses)이라 불렀으며, 그 외에 몇 개의 도시를
건설하고 가나안과 시리아 출정 기지로 삼고자 대규모의 건축 사업을 시작하였
다. 이러한 건축을 위해 아시아계의 노예들이 징집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
것이다.
나아가 기원전 13세기경에 가나안의 몇몇 도시들이 파괴된 고고학적인 증거와
함께 1220년경에 이스라엘을 패퇴시킨 것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 메르넵타
(Merneptah)의 승전 비문은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원전 1225-1200
년까지는 이미 가나안 내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 이집트 탈출의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요단 동편의 민족인 에돔인,
모압인, 블레셋인, 가나안 거민들(출15:14-15)은 12세기에 이르러서 가나안에
공존했던 민족들이라는 점도 아울어 지적하고 있다.
요약하면 고대 이집트의 배경에 의거하여 모세 전승을 역사 비평적으로 평가
한 결과 이집트 탈출의 가능한 역사적 배경은 기원전 13세기경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하나의 가설로써 이집트 탈출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몇몇의 자료로만 결정하기에는 성경의 전승은 너무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우리
는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여러 전승을 충분히 고려한 년대를 확정할 만한 성경
밖의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우리는 '만일' 모세의 전승이 어떤 역사
적 사건과 결부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그렇다면' 그것들은 '이 당시의' 이
집트와 가나안 배경과 '이런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1.4.3.지도자 모세의 전승과 역할
모세는 자기 민족을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킨 자로서 이스라엘 역사에
서 가장 우뚝 솟은 지도자로 나타난다. 그는 이집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가 태어난 시대는 히브리 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도록 명령된 시대였다
(출1:22). 석 달을 숨겨 키운 어머니는 그 아기를 갈대 상자(tebah)에 담아 나
일강에 띄운다. 마침 나일강에 목욕을 하러 나왔던 이집트의 공주가 발견하여
궁중으로 데리고 간다. 궁중에서 왕실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그는 그 시대의 몇
몇 히브리 사람들(홉니, 비느하스, 므라리등)처럼 이집트식 이름을 가지게 된
다. '모세'라는 이름은 투투-모세(Tut-Mose), 라-암세스(Ra-mses)등의 이름에서
도 나타나듯이 '아들', 혹은 '태어난'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모세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게 되고, 살인 사건을
경험한 후에 시나이 반도의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그곳 제사장 이드로의 가문에
들어간다. 40년의 세월을 미디안에서 생활하던 모세는 마침내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야훼(YHWH)를 만나는 체험을 한 후 이집트에 돌아가 히브리 노예들
을 해방시켜 광야로 탈출한다. 그는 그들과 광야에서 40년간 생활하면서 그에게
나타났던 야훼와 시내산 계약을 체결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종교
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계약의 내용대로 그는 백성들을 가나안땅 입구까지 인
도한 후 그곳에서 죽었다.
모세에 대한 성경 밖의 확실한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가 수립, 형성
해 나간 수 많은 종교 사상이나 신앙이 어떤 곳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가?에
관해서 말할 수 없다. 그는 이집트의 마술사들처럼 기적을 행하는 사람었고(출
7-10장), 외교적 협상가였으며, 광야길을 인도한 안내자, 군사(병참) 전문가,
하나님과의 계약 중재자, 입법가, 행정가, 지휘관, 예언자였다. 그에게 제외된
기능은 왕으로서의 기능 한 가지 뿐이었다. 모세에게 부과된 역할들은 분명히
지나치게 과중하였던 것은 명백하다(민11:10-15). 새로운 사회조직을 과감히 시
도해 나가는 과정에서 모세에 대한 끈질긴 반역과 내적인 분쟁은 계속되었다.

1.4.4.이집트 탈출의 여정(route)과 광야 생활
이집트에서부터 가나안에 이르기까지의 행군 경로를 재구성하는 일은
어떠한 일보다 까다롭고 힘든일이 아닐 수 없다. 민수기 33장은 이스라엘 백성
이 이집트에서부터 가나안 접경 지대까지 이르는 동안의 완전한 여정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P자료), 이 여정은 다른 자료에서 제공하고 있는 여정과 약간의 차
이를 보여주고 있다.
불행하게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집트 탈출 여정의 도시 가운데 비돔, 라암
셋, 카데스, 에시온 게벨, 그리고 모압 지역의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명은 거의 없다. 특히 "갈대바다"(yam suf,출14:21)의 위치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홍해')는 결코 받아질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시내산의 위치이다. 기원 5세기 기독교의 전승에 따르면 시내산/호렙산
은 시나이 남부에 있는 제벨 무사(Jebel Musa,"모세의 산")라 일컬어 지는 곳이
다. 그러나 이 곳 이외에도 더 많은 전승들이 남아 있어 그 산의 위치를 실증적
으로 확인할 만한 독자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이 지역이 아라바의 미디안
광야로 언급되는 것조차 시내산의 위치를 결정하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미디안족은 실제로 당시에 남부 요단 동편, 네겝, 시내 반도에 걸친
비교적 넓은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광야 40년의 생활가운데 38년간이나 머물렀던 카데스 바네아(신2:14)에
관한 전승은 광야 생활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성경의 몇몇
귀절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곧장 카데스로 갔음을 시사하고 있다(출15:22;
삿11:16). 카데스는 브엘세바 남서쪽 약 80Km 떨어진 아인 엘 쿠데랏(Ein
el-Qudeirat)과 동일한 지역인데, 그 곳은 풍부한 물이 있는 커다란 오아시스로
써 농사가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카데스의 다른 이름이 성경의 여러 다른 곳에
남아있어(삿11:16;창14:7;출17:7;민20:1,13;겔47:19; 48:28) 이 시대의 전승이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광야에서 일어
난 대부분의 모세 전승-계약 체결과 율법 수여를 포함하는-은 시내산 전승과는
전혀 독립적인 카데스 전승과 관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가능케 할 만큼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경의 증거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단편적이고 간접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 이외의 정보 자료들은 너무나 개괄적이
어서 성경의 전승들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이 시대의 역사 연구는 매우 불완전
한 설명에 만족해야만 하고, 완전한 설명은 보다 많은 성경 이외의 자료의 증거
가 나타나야만 가능해질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생활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경험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음으로써 이스라엘은 하
나의 민족으로 형성되었으며, 율법과 언약을 중심으로한 신앙이 바로 이 광야에
서 기원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출애급 사건]과 [시내산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결합되어 기록되어있다.
광야를 일컫는 히브리어의 '미드바르'는 구약 성경에 약 270여회나 나오는데,
"씨 뿌리지 못하는 땅"(렘2:2), "사막, 구덩이 땅, 간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렘2:6)등으로 정의 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40년의 긴 세월을 지
내야만 하였다. 강력한 지도자 모세가 이끄는 공동체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마실
물이 부족하고, 먹을 양식이 없음을 인하여 많은 불평과 반역을 행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들에게 바위를 쳐서 물을 나게 하시며, 하늘에
서 만나(Manna)를 내려 그들을 먹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야훼 자
신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라는 신앙을 갖도록 그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반역
자들은 가차없이 처벌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 생활은 하나님과의 밀월의 시
대로 이해하고 있다(렘2:2).

1.4.5.이집트 탈출 전승의 사회 종교적 평가
앞서 언급한대로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온 사람들은 다양한 계층의 하류
민들이었다. 이들을 인도해 낸 모세는 강력한 지도력으로 지휘하였으나 많은 어
려움과 고통이 있었다(cf.민11:10-15).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출한 노예들을 결
속시키고 그들을 한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를 위한 가장 기본이
되고 있는 이념은 "이집트에서 압제를 당한 공통의 경험"과 "YHWH와의 계약"이
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족장들의 경험을 시작으로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역사적 연속성의 끈은 바로 이들이 경험한 이집트에서의 공동의
체험이었다. 이들이 외부로부터 부과된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이들간의
동등한 부족 공동체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으로 발전되었다. 이스라엘과 '잡족'
들을 묶어주고 새로운 공동체를 창출해 낼 수 있었던 사회적 요소를 우리는 염
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들을 묶어준 종교적 요소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시내
산에서 맺은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인 야훼(YHWH,출3:6;6:3)와 "히브리 사람
들의 하나님"(출3:18;5:3;7:16;9:1,13;10:3)인 야훼와의 계약을 통하여 '계약
공동체'로 성립된 하나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한 하나님'의 '한 백성'
(Chosen People)이라는 사상이다. 여기서 모세의 역할은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것이었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씨족적 경험으로서의
전역사를 가진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탈출 이후의 고백은 야훼와의
계약을 내적 구속력의 바탕으로 삼는 '새로운 백성'(a new people)으로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비로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묶어주는 계기가 되
었으며, 이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이스라엘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집트 탈출
의 사건은 이스라엘 전역사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
는 것이다(호11:1;암9:7;렘2:6;시78:12-13;81:6).






제1장 서 언

1. 근원 자료
- 구약성경 : 이책은 이스라엘 조상의 배경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역사뿐만아니라 율법, 철학, 보고서, 설교 등도 포함되어 있다.
구약에서 제외된 부분을 채워주는 다른 자료가 있어서 일반적 배경을 보충해 주는데,
이 자료가 고고학적 연구이다

2. 이스라엘의 중요성
- 기본원리들은 법률가들에게 지침을 제공해 준다.
- 당시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이나 저술가들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속에 끼어 있었다.
-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는 대화, 극, 시, 격언등이 발견된다.
- 구약성경의 영속적 가치는 주로 종교적, 도덕적인데 있지만, 그 예술적 특징도 간과 되어서는 안된다.

3. 이스라엘의 전략적 위치
- 서쪽으로는 지중해, 동쪽으로는 아라비아 사막, 남쪽으로는 나일강, 북쪽으로는 “초생달 모양의
기름진땅”이라고 불리우는 나라들이 놓여 있다.

4. 팔레스틴의 지리
- 팔레스틴은 블레셋인이 살았던 땅인 남서쪽만을 포함 했었다.
- 팔레스틴은 동쪽으로는 수리아, 남쪽으로는 사막같은 네게브, 서쪽으로는 지중해, 북쪽으로는
페니키아와 내륙쪽의 아람이 자리잡고 있다.

(1) 요단계곡
- 요단강 : 헤르몬산 기슭의 300피트 높이에서부터, 지구상의 가장 낮은 장소인 해저 1,200피트
지점인 사해로 떨어지고 있다.
요단강은 고기가 많으며, 잔잔한 수면이 끓는 솥과 같이 급변 하는 폭풍우로도
유명 하다. 요단 계곡은 갈릴리로 부터 사해까지 대략 70마일 퍼져있다.
(2) 트랜스 요단
- 트랜스 요단 : 고원지대로 초원으로 알려져 있다.
요당 계곡으로 부터 펼쳐지는 높은 산 마루는 공기를 차갑게해 상당한 분량의
강우량을 가져오게 한다
(3) 중앙 산맥들
- 북쪽구획 : 갈릴리
- 중앙구획 : 처음에는 에브라임 산지로, 나중에는 사마리아로 불렀다.
- 남쪽구획 : 유대
(9) 해변 지역
- 팔레스틴 본토 산맥들과 지중해 사이에는 해안 평야가 놓여있다.
- 지중해는 자연항구의 부족으로 팔레스틴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10) 기 후
- 팔레스틴은 아열대지역에 속한다.
- 우기 : 11월 - 4월

5. 역사구분
- 첫째 : 족장 시기
- 둘째 : 애굽 시기
- 셋째 : 광야시대, 팔레스틴 정복시기
- 넷째 : 사사 시대
- 다섯째 : 단일 왕국 시기
- 여섯째 : 분할 왕국 시대
- 일곱째 : 포로시대, 포로이후 시대
제2장 족장의 배경


1. 역사적 정확성
(1) 이 름
- 한 가지증거는 창세기에 사용된 이름들이 고대자료에 나타나있는가에 관계하고 있다.
- 구체적인 성경의 이름과 지명을 나타내는 증거가 부족하긴 하지만 이것들은, 창세기 기록에
사용된 이름들이 당시의 술어들이라는 것을 나타내어 준다.
(2) 관 습
- 창세기 기록은 아들이 없을때 상속에 대한 그러한 걱정은 정상이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누지자료는 바로이러한 경우를 보여 준다.
누지자료에 의하면 자손이 없는 부모는 종을 아들로 입양 할 수있는데, 친아들이 태어나지 않는
다면 입양된 아들은 평생 그 부모를 섬기다가 임종시 그의 상속 자가 되는 것이다.
- 그때에 아들이 태어난다 해도 종과 입양된 아들은, 집 밖으로 쫓아 버릴 수가 없다고 지적 하고
있다
- 누지자료는 또한 구두 축복이 계약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팔레스틴의 상황
- 북쪽 세겜으로부터 남쪽 브엘세바까지 아브라함이 이동한 지역에 인구가 거의 없었다.
- 사해근처의 요단계곡이 많은 도시 지역이었다는 것은 고고학이 증거 하고 있다.
(4) 광범위한 이동
- 족장시대의 극동 지역에서 광범위한 이동이 존재 했다.
-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남쪽 가나안까지 1,000 마일 이상이나 여행 하였다.
- 야곱은 재산을 얻어 남쪽 가나안으로 돌아 왔다.
- 앗수리아 상인 들의 무역중개소가 힛타이트 속에 있었다.

2. 아브라함의 부름의 중요성
* 하나님은 오직 한 인간을 다른 인간과 구분 하여 개별적인 지시를 하였다. 그 의도는 새로운 인간을
길러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여 나라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3. 아브라함의 연대
* 자유주의 학자들의 결론은 주전15세기 후반 부터 때로는 20세기 까지 다양하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그 이전연대를 주장 하여 아브라함의 출생을 22세기 중반부로 보고 있다.
(1) 성경적 증거
①출애굽의 연대
출애굽의 연대라는 첫 문제는 보수주의 자들에게 거의 확실한 대답을 주고 있다.
보통 주전 1446년으로 보고있다.
②애굽 체류 기간
체류기간은 43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보수학자들은 주장한다
첫째, 출애굽기 12:40 의 진술
둘째, ‘그 자손들은 타국에서 400년 동안 핍박을 받을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창15:13)
셋째, 스데반이 행 7:6에서 400의 숫자를 언급한 사실
넷째, 야곱의 가족이 실질적으로 430년 보다 짧은 기간에는 200만 백성의 국가로
증가할 수 없다는 사실
(2) 성경 외적 증거
①가나안의 상황
- 아브라함이 주전2166년에 태어났다면 그가 가나안에 75세 때에 도착 했으므로 가나안
도착 연대는 주전 2091년이 된다.
- 아브라함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 많은 인구가 존재 했다는 점에 일치한다.
- 이것은, 아브라함과 롯이 고지대가 멸망된 뒤나 요단 평야의 도시들이 멸망되기 이전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애굽의 상황
- 주전1900년 경의 애굽 무덤 벽화에는, 야곱과 아브라함의 경우 처럼, 일단의 셈 족인 반 유목
민이 애굽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 “요셉을 알지 못한”(출 1:8)바로의 존재 문제이다. 그는 요셉후에 일어난 사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화 했다.
③바로왕의 정체
- 다음의 네가지 요소가 모두 “요셉을 알지 못하는” 힉소스 왕조의 첫번째 왕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1▷ 바로를 위하여 노예화된 이스라엘에 의해 세워진 애굽도시 비돔과 라암셋은, 아모스가 살
았던 제18왕조 전이나 후에 건축되었음이 틀림 없다.
2▷ 출애굽기의 “요셉을 알지 못한” 바로왕이라는 말은 바로왕이 제18대 왕조의 한 왕이 아니
라 힉소스였다고 할 때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3▷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노예화가 뒤의 제18왕조라기 보다는 보
다 일찍 힉소스 왕조때 일어난 것이라고 해야 더 어울린다.
4▷ 아시아족인 힉소스를 애굽에서 몰아 내는데 있어서, 왜 제18왕조는 아시아계 이스라엘 백
성들을 몰아내지 않았을까 하는것이 이해하기 어렵다.

4. 아브라함이 살던땅
(1) 우르의 셋째 왕조
- 함무라비가 집권을 시작한 연대
→ ‘늦은 연대’ : 주전 1728년
→ ‘중간 연대’ : 주전 1792년
→ ‘빠른 연대’ : 주전 1848년
- 아브라함이 주전 2166년에 태어났고, 주전 2100년에 이주 했다고 하면, 이것은 늦은 연대를 기
초로 할때 이 기간이 시작 되기 30년전에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났다는 것을 의미 하며, 중간연
대나 빠른 연대를 기초로 할 때 이 기간 중에 살았으며 이주했다는것을 의미한다.
(2) 통치자
- 그들은 북방으로 앗수르까지 그리고 남방 메소포타미아 전부를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 5명의 연
속 통치자가 알려져있다.
→ 우르 남무(18년 통치)
→ 술기(48년 통치)
→ 아마르신(9년 통치)
→ 수신(9년 통치)
→ 이비신(25년 통치)
(3) 종 교
- 아브라함 시대의 사회는 종교적인 사회였다. 훌륭한 종교 건축물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4) 생활 환경
- 구데아 : 수메리아 언어가 최고조로 발전 했음을 알려주는 많은 송가와 기도문을 남김
둥근 판에 새겨진 많은 법령을 남김
- 10만개의 사업용 서류들은 곡물, 야채, 과일, 짐승, 노예, 그리고 다른 생활 용품의 거래에대해
가격과 사업 방법을 보여준다.
- 문화적 진보와 번영의 증거는 훌륭하게 새겨진 상당수의 돌도장(질그릇)과 고대에서 야금술으
탁월함을 보여주는 다수의 세련된 금속 장신구에서 나타난다.
(5) 아브라함의 부름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떠날것을 명령한 이유
→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방해할지 모르는 친구, 환경으로 부터의 격리
→ 출발은 앞으로의 신앙 발전을 나타내는 첫단계
→ 하나님의 역사적 중심을 가나안으로 옮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5. 출 발
- 출발을 주도한 사람이 아브라함의 아버지였다.(창11:31)
- 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가야하는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다.

(1) 하란에서 멈춤
- 하란은 700 마일 되는 거리이며 전체거리의 3분의 2가 되는데 일행은 여기서 주거를 정하였다.
- 아브라함은 데라가 죽을때까지 여기서 머물렀다.
(2) 멈춘 이유
- 하란에는 그의 친척이 있었고 우르 에서 처럼 달신 숭배가 행해 지고 있었으므로 데라는 여기
서 여행을 중단 하려고 아들을 설득 하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신앙 또한 오랜 여행으로 인해
약해져 있었을 것이다.
- 또 다른 이유는 데라가 여행 도중 병을 앓아 하란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은 하란이 우르와 종교적 연관이 있음을 알고 늙은 아버지에게 보다 익숙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
해서 원래 노선에서 60마일이나 노선을 바꾸었을 것이다.



제3장 아브라함


1. 새 땅
- 가나안은 시돈에서 남쪽 가자 지역까지, 동쪽 소돔과 고모라까지, 북쪽 라사에까지 퍼져있는 수리아-
팔레스틴을 포함 하였다.

(1) 가 나 안
- 가나안은 이전 수세기 동안 번창하는 지역이었다
- 발굴된 유적은, 초기 청동기인들이 도시국가 통치형태로 놀라운 발전을 했었다고 보여준다.
- 주전 3천년대 후기, 아브라함이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가나안은 이땅으로 밀려오는 반 유목민에
의해 크게 변하였다.
- 새 주민들은 그지역에서 자유로이 이동 하며 반 유목민 생활에 만족했으나 차츰 정착하여
전에 파괴 되었던 많은 도시들을 다시 재건 하였다.
(2) 애 굽
- 애굽문화의 첫 황금기 : B.C 2600 - 2200
- 첫 중간 시기 : B.C 2200 - 2000 ; 어려운 때였음.
- 종교가 백성들 생활에 주 역할을 담당 했지만 애굽 전반에 걸친 통일적 힘은 아니었다.

2. 세겜, 벧엘, 애굽, 벧엘(창12:4-13:18)
(1) 세겜에 도착(창12:4-9)
- 아브라함이 세겜에 도착
- 창12:7 을 통하여서 아브라함에게 목적지에 도달 했음을 알려 주었음.
(2) 애굽으로 내려감(창12:10-20)
- 아브라함이 세겜에 도착한후 바로 기근이 닥쳤음으로 그는 애굽으로 건너갔다.
- 애굽에 도착 했을때 그의 부인 사래에 대해 진실을 말하지 않고 처음 우르를 떠날때 사용했던
속임수를 사용 한것은 그 책임이 신앙의 긴장에 있었을 것이다.
(3) 롯과의 분리(창13:1-18)
- 아브라함과 롯은 많은 가축으로 인하여 충분한 목장을 찾기 어려웠다.
- 롯은 도시와 목축이 성행 하였던 요단강 지역을 선택함.
- 아브라함은 비교적 외부 영향에서 벗어난 고지역에 남아 계속 하나님을 섬겼다.

3. 롯의 구출(창14장)
(1) 아브라함의 용감한 구출
- 아브라함은 그의종 318명과 그의 이웃 마므레, 아넬, 에스골의 도움을 얻어 그들을 쫓아 갔다.
- 이 작은 부대는 접전한 적을 단에서 물리쳤으며 포로들을 석방하고 많은 재물을 되찾아 왔다.
(2) 성경 외의 증거
- 아카드 자료 : 서쪽으로의 여행이 빈번 했음을 알려줌.
언급되고 있는 장소뿐만 아니라 왕의 이름들도 당시 명명법에 잘 부합된다.
- 사사기때 단 자손이 이주할 때까지 라이스에 ‘단’ 이라는 이름이 붙여지지않은것은 사실이다.
(삿18:29)
- 에돔과 미디안은 구리와 망간이 있는곳이었다.
(3) 소돔과 살렘의 왕들(창14:17-24)
- 소돔왕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되찾아온 물품은 네가 갖고 백성들은 돌려 보내라고
촉구하였다.
- 다른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로 아브라함을 영접 하였고 아브라함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그에게 물품의 10분의 1을 주었다.

4. 소돔의 멸망(창18:1-19:38)
(1) 롯을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
- 아브라함은 마므레에서 ‘세 사람’을 만난다. ; 둘은 천사, 하나는 ‘야웨의 천사’였다.
- 아브라함은, 소수의 의인이 있다면 - 몇명인가에 대하여 천사와 흥정 하였다 - 그 도시는 구원
되어야 할것을 요구 하였다.
(2) 소돔에서 구출된 롯(창9장)
- 먼저 떠난 두 천사는 롯의 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롯괴 그 부인, 두딸은 도시를 떠나도록 권유
받았다.
- 후에 두 딸은 소돔 생활의 영향으로, 아버지와 근친상간을 범해 모압과 벤암미가 태어난다.
(3) 소돔의 멸망(창19:24-25, 27-28)
- 소돔의 멸망은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림으로 이루어 졌다.
- 전체 요단 계곡은 지구 표면에 거대한 단층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 또한 지진의 조건으로
보인다.

5. 계 약
* 아브라함의 계약
1. ▷ 아브라함이 약속된 땅에 도달하기전(창12:1-3)
2. ▷ 아브라함이 롯과 결별한 후(창13:4-17)
3. ▷ 아브라함이 네 명의 왕 으로 부터 롯을 구출한 후(창15:1-21)
4. ▷ 소돔의 멸망 직전, 곧 아브라함이 99세였을때(창17:1-22)
5. ▷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지난지 몇년 후(창22:15-18)

6. 약속된 아기를 기다림(창16:1-18:15)
- 아브라함이 큰 후손을 갖게 될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나이 75세때에 처음 이루어 졌다.
- 오랜기간을 기다리는동안 사래는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후처로 취하여 아이를 낳는 방안을
제시 하였다.
- 아브라함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었으나 당시 관습의 면에서 이해되고 판단 되어야 한다.
- 그들의 신앙은 기울어 졌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100세, 사래가 90세때 실제로 이삭이 태어났다.
- 하나님은 그들의 생애 에서 이 사건을 기념하여 이름을 바꾸게 하였다.

7. 아비멜렉과 블레셋 족속(창20-21장)
(1) 사라에 관한 두번째 거짓말(창20장)
- 이삭 탄생의 소식을 들은후 아브라함은 부인에 대해 그랄왕 아베멜렉 에게 또 거짓말을 한다.
(2) 초기의 블레셋 족속
- B.C 1190년경 애굽의 라암셋 3세에 쫓겨난 해상 백성으로서 많은 수의 팔레스틴 족속이 팔레스
틴땅에 들어온것은 사실이다.
- 족장시대 가나안 - 카프톨 사이의 교류가 있었다고 증명됨
1. ▷ 하솔과 우가릿에서 중기 미노아 둘째 옹기의 발견
2. ▷ 하솔왕이 카프톨에게 선물을 보냈다고 언급하는 18세기 마리자료에 의해.

8. 이삭의 번제 명령(창22장)
(1) 이삭이 태어남(창21:1-21)
-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부딪힌후 바로 이삭의 탄생의 약속이 성취됨(창21:1-8)
(2) 아브라함의 가혹한 시험(창22:1-14)
-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리아산까지 가게 함으로써 그의 신앙의 진실성을 나타내 보이셨다.

9. 사라의 죽음과 장례(창23장)
- 사라는 127세에 죽었다.(이삭 : 37세. 아브라함은 이후로 38년을 더살ㅇ음)
- 사라의 매장 장소로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전체땅에서 아브라함이 사들인 땅은 이것 뿐이었다.

10. 이삭의 신부(창24:1-25:11)
(1) 리브가를 발견함(창24장)
-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을 먼 여행길에 보내어 며느리를 구하게 하였다.
-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로 그는 성 밖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 나온 나홀의 손녀 리브가를 만났다.
(2) 아브라함이 그두라와 결혼함(창25:1-11)
- 아브라함은 그두라와 결혼 하였는데 이 이름은 그전에 알려진 바가 없다.
-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었으며, 이삭과 이스마엘은 그를 막벨라 굴의 사라 옆에 장사하였다.

11. 신앙의 사람, 아브라함
- 아브라함은 실로 뛰어난 신앙의 소유자였다.
- 아브라함은 롯에게 땅을 선택할 권리를 먼저 줄 정도로 관대 하였다.
- 아브라함은 롯을 구출 하기위해 훨씬 더 힘이강한 군대를 쫓아갈 정도로 용기가 있었다.
-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고 이로인해 ‘하나님의 벗’이라는 높은 칭함을 얻게 된것이다.



제4장 이삭 ․ 야곱 ․ 요셉


1. 이삭(창25:9-26:35)
- 그에게는 용감한 행적이나 특이한 공로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경 전체에서 아브라함이나
야곱과 동등하게 평가 되고 있다.
(1) 야곱과 에서가 태어남(창25:21-34)
- 이삭의 신앙도 아브라함처럼 시험을 받았으나 그도 역시 계속 하나님을 믿었다.
- 쌍둥이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리브가의 태 속에서 서로싸웠다.
- 자라면서 이 둘은 서로 닮은바가 적었다
(2) 블레셋과의 관계(창26:1-33)
- 이삭도 아브라함처럼 흉년을 만났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경고
하셨다.
- 여기에서 이삭은 그의 아버지 처럼 아내에 대한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 그랄왕 아비멜렉은 백성들에게 리브가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삭으로 하여금
그 땅에 머물도록 허락 하였다.
(3) 도적질한 축복
- 이삭은 장자 축복의 예식을 에성에게 행하기로 결정 하였다.
그러나 리브가는 야곱이 축복 받기를 원했다.
- 변장을 하고 들어간 야곱을 에서라고 생각항 이삭은 그에게풍성한 식량을 받을 것과 그 어미의
후손과 열국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
(4) 이삭의 인간성
- 이삭은 20년을 기다려 아이를 가질때까지 하나님을 계속 믿었다.
-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내에 대해 거짓말을 범 하였다.
- 어떤 주도권이나 신앙이 발휘 되어야 할 상황이 그에게느 주어지지 않았다.
- 그는 바깥으로 공격을 나타내지 않는 은둔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 볼때
칭찬할 만한 특징이다.

2. 야곱(창28:1-36:43)
-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행동의 인간 이었다.
- 이삭 보다는 야곱에 대한 기록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 하고 있다.
(1) 하란으로의 탈출(창28:1-29:13)
- 야곱이 리브가의 고향으로 떠나기 전에 이삭은 야곱을 불러 그에게 더한 축복을 내렸다.
- 이 당시 그는 정신적으로 성숙해 있지 않았고 집을 떠날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었다
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2) 하란에서의 20년(창29:14-31:20)
① 야곱의 두 아내
- 야곱은 처음 부터 라헬을 더 사랑 했으며, 이 결혼을 위해 7년간 라반을 섬기기로 동으 하
였다. 7년이 다 되었을때 라반은 야곱을 속여 라헬 대신 큰 딸 레아를 주었다.
- 야곱은 다시 라헬을 얻는 조건으로 7년을 더 일해야 했다.
② 야곱의 자녀
- 레아를 통해 낳은 자녀 :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디나(딸)
- 빌하를 통해 낳은 자녀 : 단, 납달리
- 실바를 통해 낳은 자녀 : 갓, 아셀
- 라헬를 통해 낳은 자녀 : 요셉, 베냐민
③ 마지막 6년
- 야곱은 자신의 새 품삯으로 전부 희거나 전부 검은것을 제외한 나머지를 달라고
제안 하였다.
- 장인 집에서의 야곱의 번영은 하란으 친척들에게는 좋은 인상을 줄 수가 없었으며 야곱은
곧 그곳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 품삯을 협정한 뒤 6년(총20년)이 흐른 뒤였다.
(3) 가나안으로 돌아옴(창31:21-33:20)
① 라반의 추적
- 라반은 야곱이 몰래 떠났음을 알고 몹시 분노 하였다.
그는 하란에서 적어도 275마일 떨어진 길르앗 산에 이르러서야 만날 수 있었다.
- 사건은 라반과 야곱 그 어느 누구도 서로 다시 해하지 않겠다는 언약으로 끝을 맺었다.
② 씨름의 상대
-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는동안 그의 적수가 인간이 아님을 깨닫고 따라서 그는
축복을 요청 하였다.
- 야곱은 하나님께서 계속 그와 함께 하신다는 보장을 받고 싶었고 사자는 이러한 보장을 약
속 하였다.
③ 에서와의 만남
- 다음날 야곱은 하나님께서 실지로 그를 축복 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를 얻었다.
- 그가 에서를 만났을 때 아무런 노여움도 나타나지 않았다(창33:1-17)
(4) 가나안으로 복귀(창34-36장)
- 세겜에서 그의 아들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사람을 배반 하여 죽이는 결과를 가져 왔으므로 야곱
은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 야곱은 이지역 다른 거주자들로 부터의 복수가 두려워 남쪽 땅으로 급히 이동 하였다.
(5) 변화된 인간 야곱
- 하나님을 충실히 따르는 자가 됨.
- 조용한 명상으 생활을 함.
- 아들의 나쁜 행동에 대해 슬퍼함.
- 계약적 축복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잘 받아들임.
- 블레셋 땅으로 돌아온 후의 그의 생애는 크게 본 받을만 하였다.

3. 요셉(창37-50장)
(1) 애굽으로 팔려감(창37장)
- 요셉은 아버지의 남다른 사랑과 그가 부모 형제들 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예언한 꿈 때문에
17세때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 갔다.
(2) 유다와 다말(창38장)
- 여기서 요셉의 이야기는 중단되며,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과 관계를 맺는 어두운 내용이 연결
된다.
- 유다는 다말이 그를 속였음에도 불구 하고 다말이 자기보다 더 옳다고 말했다.
(3) 애굽에서의 요셉(창39-41장)
① 애굽에서의 불의
-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함으로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 요셉은 다른 사람과 구별된 행동을 함으로 다시 신임을 얻게 되었다.
② 애굽에서의 영광
- 바로왕의 꿈을 해석 하여주고 요셉의 충고에 따라 바로왕은 관리 자리에 요셉을 등용 하게
된다.
- 이로 인해 요셉은 바로왕의 다음가는 권력을 얻게 되었다.
(4) 성경 외의 사항들
- 애굽에도 기근이 알려져있고 이 기근 동안 양식 분배의 임무를 맡은 사람의 내용이 무덤 비문
에 새겨져 있다.
- 한 비문은 제3왕조(B.C2700년경) 때의 7년 기근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5) 야곱이 애굽으로 건너 가다(창42:1-47:11)
-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사건들을 한데로 모아 역사 하셨다.
① 요셉과 그의 형제들
-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베냐민에 대한 형제들의 태도를 알아 보기 위해 두번이나 형제들을
엄하게 대했다.
- 그러나 요셉은 더이상 자신을 억제 하지 못 하고 형제들에게 사실을 이야기 했다.
- 기근을 당했으니 가족을 다 데려오라고 했고 바로는 마차를 내어 주기까지했다.
② 야곱의 이주
- 블레셋 땅에서 야곱은 요셉의 소식을 듣고 기뻐 하였다. 그리고 바로는 그들을 고센땅에서
살게 하였다.
- 고센땅은 비옥 하였으며 나일강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충분한 식량을 공급할 수가 있었다.
(6) 야곱과 요셉의 죽음(창47:27-50:26)
- 야곱은 애굽으로 온 후 17년간 더 살고 147세때 죽었다.
- 요셉은 야곱의 축복을 받기 위해 그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리고 왔다.
- 요셉은 야곱이 죽은지 54년 뒤인 110세때에 죽었다.
(7) 성실한 인간 요셉
- 그는 성실하였다. 형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 씌움을 당해도 모든일에서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를 잘 감당하고 분별 있게 행동 하였다.
(8) 족장 시대
- 요셉의 죽음과 함께 족장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게 꾸준하고도 훌륭한 삶을 요구 하셨다.
- 계약의 약속은 여러가지 수단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반복 되었다.



제5장 애굽에서의 체류와 출애굽 연대기


1. 애굽에서의 체류기간
(1) 430년을 뒷받침 히는 증거
① 출애굽기 12:40
-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에서 출애굽기 12:40 에 430년으로 기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 창세기 15:13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예언 하신 것을 보면 그의 후손은 「이방나라」에서 「객」이 될것
이며 그 나라는 “400년동안 그들을 괴롭힐 것이라”고 되어 있다.
- 성경의 400이라는 숫자는 대략의 숫자이다.
③ 사도행전 7:6-7
- 스데반이 산 헤드린 앞에서 창세기의 내용과 비슷한 말을 한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이
스라엘이 400년 동안 외국땅에서 괴로움을 당하리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인용하였다.
④ 인구의 증가
- 실제로 430년의 기간 보다 짧은 기간 안에서는 야곱의 가족이 2백만이 넘는 국가의 형태로
증가할 수 없다는것이다.
⑤ 『이스라엘 자손』(bene Yisra'el)이 430년간 체류했다고 한 출애굽기 12:40 에서 찾을 수 있다.
(2) 215년을 뒷받침하는 증거
① 4 대
- 215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세의 계보가 적혀있는 출애굽기 6:16-20 에서 모세가 레위 증
손자임을 지적 한다.
- 여기에 나열된 이름은 레위, 고핫, 아므람, 모세 이다.
② 교부들
- 터툴리안(Tertullian)같은 초기 교부들은 가끔 215년의 견해를 주장 하는 사람으로
인용된다.
- 요세푸스는, 어떤곳에서는 215년으로 주장한다.
③ 갈라디아서 3:17
-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고 말하고 있다.
- 이 선택을 하는데에는 다음의 사항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생각된다.
1 → 바울의 요점은 율법이 그 전에 생긴 계약을 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2 → 독자로 하여금 요점을 파악 하는데 있어 마음이 분산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3 → 게약은 아브라함에게 뿐만 아니라 이삭, 야곱 에게도 반복 되었으며 실제로 마지막
계약은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기 직전에 주어 졌다.

2. 출애굽 연대
(1) 직접적인 성경의 증거
① 열왕기상 6:1
- 초기 연대에 대한 첫번째 이유는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시작한 때보다 480년 앞서서 출애
굽이 일어 났다는 왕상 6:1의 진술이다.
② 입다의 진술
- 두번째 이유로는 입다의 진술을 들수 있는데 그는 그 날 까지 이스라엘이 블레셋 땅에 300
년간 거했다고 말 하고 있다.
③ 사사시대의 길이
- 사사시대의 길이를 분석 해보면 후기 연대에서 계산된 것보다 더 많은 길이가 요구 된다는
것이다.
④ 역사적 상호관계
- 성경의 사건과 초기연대를 기초로한 애굽역사 사이의 상호관계에 있다.
- 이는 두가지 면에서 특히 주목된다.
1 → 이스라엘 사람 들을 노예로 삼아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 하게한(출1:11) 바로왕의 명령
에 관한 것이다.
2 → 모세가 미디안에 있을 동안(출2:23-25) 죽은 왕이 누구인가 하는것이다.
(2) 성경외적인 고찰
① 비돔과 라암셋
- 13세기의 애굽역사와 성경 기록을 조화 시키는데에는 연대적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기 연대 주장자들은 출 1:11의 건축 명령으로 부터 그들의 증거를 찾고 있다.
- 출1:11에서, 왕이 건축 하라고 명한 도시 이름을 라암셋이라 한것을 보면 이 사람은 분명
라암세스2세일 것이다.
- 제 19왕조 훨씬 전에 라암셋이라는 이름이 힉소스 왕들에 의해 이미 사용되었다는것이다.
② 여리고
a. John Garstang 의 결론
- John Garstang의 주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 1. 여리고성은 아멘호텝3세(B.C 1414-1378)의 집권때에 무너졌다.
⇒ 2. 14세기 말경의 한 건물에서 발견된 자기류들은 모압와 에글론이 잠시 접령했
을때의 것이었다.
⇒ 3. ‘후기 청동기Ⅱ’와 ‘초기 철기Ⅰ’ 때로 여겨지는 그 이후의 몇몇 자기 조각
들은 숫자가 몇 안돼는 거류민들의 것이었다.
b. Katheleen Kenyon의 탐사와 결론
- 그녀의 해석은 매우 다른 모습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 1. Garstang은 여호수아 앞에서 무너진 성이 “이중벽” 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
것은 두개의 성 이었다.
⇒ 2. 구릉으로 된 이도시는 심하게 폐허가 “샘” 위의 구릉을 제외 하고는 후기 청
동기 시대의 모든 유적이 없어 졌으므로 이기간에 힘이 약한 것으로 보고
있다.
⇒ 3. Garstang 은 이 구릉 지대에서나 또는 무덤에서 발견한 자기들을 주전 1400
년경의 아멘호텝 집권때로 계속 이어진다고 보고 있지만, 실제로 주전 1550
년경의 ‘중간 청동기Ⅱ’때에 중단 되었다.
c. 평 가
- Kenyon 여사의 결론에서 첫째와 둘째 사항에 대하여는 분명히 그가 옳다.
- 세번째 항목에 있어서, Kenyon 여사는 Garstang보다도 더 후기 연대 주장자들과 맞서고
있다.
- 네번째 항목에 있어서는 Kenyon 여사의 설명보다 Garstang의 설명이 더 합당 하다고
볼 수 있다.
- 여리고는 므깃도에 비해 더 내륙쪽에 있으므로, 수입된 물품은 여리고에 더 늦게 도착
했을 것이다.
- 아마도 수입된 물품이 므깃도에 풍부해진 후일 것이라고 기대되는데, 이것은 주전 1479
년 이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발견된 자기가 실제로 주전 1400년까지연장되었다
는 중요한 증거를 제공하는것이다.
③ 라기스, 드빌, 하솔
a. 13세기의 멸망
- 라기스는 오늘날의 텔 에드로 판명됨
- 두웨일과 텔 베이트 미르심에는 모두 주전 1400년경의 검은 재의 층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 하솔은 갈릴리 바다에서 북쪽으로 9마일 떨어진 텔 엘 쾌다이로 밝혀졌다.
b. 하솔에 있었던 초기 파괴
- 지층Ⅲ이 불에 의해 파괴 되었으며 아마도 새 왕국의 애굽왕인 아메노피스 2세나 투트
모스 3세에 의해 파괴되었음을 말 하는것이다.
c. 여호수아에 의해 불사르지 않은 라기스와 드빌
- 수 11:13 에는 “하솔만 불살랐고 산 위에 건축된 성읍들은 여호수아가 불사르지 않았다”
고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④ 요단 동편 지역에서 발굴된 증거
- 후기연대를 주장 하는데에 자주 인용되는 또다른 이유는 주전 1900년 부터 1300년 사이에
요단 동편과 네게브 지역에 정착민이 없었다는것이다.
- Lancaster Harding 은 힉소스 기간중 암몬 지역에 정착민이 있었다고 지적 하는데 이는 이
곳에서 발견된 무덤 속에 매장 물질이 잘 보관되어 있으며 유목민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함.
⑤ 애굽의 수도 위치
- 제18왕조 : 테베(Thebes)
- 제19왕조 : 아바리스(Avaris)
⑥ 아마르나 서판
- 아마르나(Amarna)서판에서는 하비루가 가나안을 침략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a. 증 거
- 서판은 1400년-1367년 에 가나안 족 도시왕들이 아멘허텝 3세나 아케나톤의 애굽 법정
에 보내진 서한들이다.
- ‘하비루’와 ‘히브리’는 그이름이 동등 하므로 이 하비루를 여호수아의 침략 군대로 볼
만하다.
- 그러나 최근 이러한 견해는 상당히 감소되었다.
b. 첫번째 가능한 설명 : 히브리인은 하비루 였다.
- 많은 초기 연대 주장자들은 남쪽 가나안에서의 하비루를 히브리인으로 보고 있다.
c. 둘째 가능한 설명 : 히브리인들은 하비루 보다 먼저 있었다.
- Meredith Kline 이 이 둘을 동일 하게 보지 않는 이유
1→ 히브리라는 용어는 민족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2→ 어원학적으로 ‘히브리’와 ‘하비루’를 동일하게 보기 어렵다.
3→ 아마르나 편지에서의 하비루의 행적과 여호수아 행적에서의 히브리인의 행적을
완전히 일치시키기에는 어려움이있다.
⑦ 세티1세와 라암세스2세의 군사원정
a. 증 거
- 세티1세와 라암세스2세의 군사원정에서 애굽의 군대는 팔레스틴땅을 통과해서 행군 하
여야만 하였는데 이 땅에 실재로 이스라엘이 있었다면 그들은 이스라엘과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b. 설 명
⇒1. 메르넵타와 라암세스 3세에 의한 후기의 군사적 침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
간 다음에 행해진 것이다.
⇒2. 초기원정이건 후기 원정이건간에 이 원정이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에 관한
것이다.





제6장 애굽에서의 생활


1. 애굽 통치의 4기간
⇒1. 주전 1991 - 주전 1786 : 제 12 왕조 ; 나라가 안정되고 왕은 최고의 권력으로 통치함
⇒2. 외국 백성이 애굽에 들어와 왕권을 잡았던 힉소스 왕조기간 ; 아바리스를 수도로 정함
⇒3. 제 18 왕조기간 ; 가장강한 시기 였음
⇒4. 제 19 왕조 기간 ; 전 팔레스틴과 남방 수리아를 총 지휘함

2. 애굽 사람의 생활
-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에 크게 의존 하여 이곳에 모여 살았다.
- 백성들은 많은 신을 섬겼는데 가끔 새나 동물들도 섬겼다.
- 국가신은 지방신만큼 개인 생활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3. 애굽에서의 야곱의 후손
-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제 12왕조때 애굽에 도착 했다.
- 비옥한 고센땅을 받은 야곱의 후손 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아 번성 하였다.
- 대부분의 야곱의 아들들은 모여 살았으므로 고센땅을 완전히 채우도록 그들의 소유가 증대되었다.

4. 압박(출1:8-22)
(1) 노예화됨(출1:8-14)
- 고센땅 거주자에게 속박이 주어진 이유
1) 새 통치자는 “요셉”을 알지 못하였다.
2) 이스라엘은 힉소스 왕 보다 “수도많고 힘도 강하게”나타났다.
3) 전 왕조와 군사적 동맹을 일으킬것으로 보였다.
(2) 남자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출1:15-22)
- 빠른 증가를 제지 하려는 또다른 방법이 바로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 이 명령은 첫번째 단계인 히브리 산파들에게 모든 히브리 남자아이들이 출생 하는 즉시 죽이라는
명령이었고 두번째 단계로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나일강에 던지라는 것이었다

5. 모세(출2:1-10)
(1) 초기의 가정(출2;1-10)
- 모세는 레위 자손인 아므람과 요게벳에게서 태어났다.
- 모세는 하나님의 아이로 표현된다.(출2:2-10)
(2) 바로의 딸 핫?수트(Hatshepsut)
- 투트모스1세와 아모스 사이에 태어남
- 여자였으므로 왕위를 직접 계승 할 수 없었다.
- 그녀는 강한 개성과 놀라운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
(3) 궁궐에서의 모세
모세는 가장 훌륭한 선생을 제공 받았을 것이며 그의 지적인 능력은 배운것을 모두 소화해 낼수 있었
을 것이다.

6. 모세의 선택(출2:11-25, 행7:23-29, 히11:24-27)
(1) 칭찬할 만한 결정(히11:24-27)
- 모세는 장성 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 하였다.
- 그는 속박되어있는 자기 백성들의 곤경을 돕기로 결정 하였다.
(2) 어리석은 행동(출2:11-22, 행7:23-29)
- 그는 애굽인 감독을 죽였다.
- 그는 도망하여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 도달 하였다.
(3) 투트모스 3 세(Thutmose Ⅲ)
- 그는 정치적 해정가로 능하였고 당시 경마, 궁도, 그리고 모든 운동에 능하였다.
- 그가 뛰어난점은 군사 전략가로 서였다

7. 애굽으로 돌아온 모세(출3:1-4:31)
- 야웨의 천사는 모세를 불러 애굽으로 내려가 오랜세월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인도 하여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 모세는 장인에게 인사를 하고 부인과 두 아들과 함께 애굽으로 떠났다.

8. 바로왕과의 투쟁(출5:1-12:36)
- 모세는 처음 바로에게 “사흘길쯤 광야로 가서 야웨께 희생제를 드리게 해달라”고만 요청하였다.
- 바로는 거절하였으며 이스라엘에게 더 심한 고통을 주었다.
- 하나님은 계시를 내려 그 다음의 지시를 설명 하였다.

(1) 열가지 전염병 (재앙;출7:14-12:33))
① 물이 피로 변함
② 개구리
③ 이
④ 파리
⑤ 악질
⑥ 독종
⑦ 우박
⑧ 메뚜기
⑨ 흑암
⑩ 장자의 죽음
(2) 바로왕의 박수들
- 고대의 박수들은 고도의 속임수를 가지고 있었다.
- 그들은 악마의 힘에 의해서 속임수를 수행하였다.
(3) 재앙에서 제외된 고센
- 넷째 재앙때 하나님은 고센과 애굽을 구분 하셨다.
- 다섯째 재앙때 바로는 고센으로 사람을 보내어 애굽과의 구분을 확인토록 했다.
(4) 서서히 변하는 바로의 마음
- 계속 하여 재앙이 심해지자 바로왕은 모세의 요청을 승락 하는쪽으로 기울어 지게 되었다.
(5) 재앙의 기간
⇒1. 어떤이는 니산월(Nisan,3-4월)의14일인 유월절에 관심을 둠
⇒2. 일곱째 재앙의 시기를 밝혀냄
⇒3. 나일강이 범람 했을때로 시기를 제시한다.
⇒4. 첫째 재앙의 시기는 물이 최고 높이에 달해 있을때 바로 직후인것으로 봄
(6) 재앙의 목적
- 바로왕을 설득하여 애굽을 떠나는것
- 하나님의 실재와 권능을 애굽땅에 보이는것
(7) 열번째 재앙
- 니산월의 열네째날 밤에 모든 애굽의 장자들이 죽었다.
(8) 유월절
- 그들은 당시 하나님께서 명한 유월절을 지킴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 지정한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명령을 따랐고그들의 장자는 살아 남았다.

9. 애굽에서의 출발
(1) 애굽을 통한 경로
- 라암셋(니산월15일) → 숙곳(출12:37;13:20) → 에담 → 비하히롯(바알스본) → 얌 숲(Yam Suph).
(2) 백성들
- 이스라엘백성들은 430년을 애굽사람과 구별되어 있었던 세가지 요인.
1.⇒ 이스라엘사람들이 애굽 사람과 결혼 하지 않았음.
2.⇒ 애굽 사람들은 목자의 직업을 가증히 여겼음.
3.⇒ 이스라엘백성들이 250년간 노예로 멸시를 받았기 때문임.
(3) 얌 숲 에서의 곤경(출14:1-12)
- 넓은 수역으로 인해 전진이 어려움.
- 바로가 특별 병거로 이스라엘민족을 쫓음.
(4) 세가지 큰 기적(출14:14-31)
① 구름 기둥이 진 앞에서 진 뒤로 옮겨짐.
② 물이 갈라지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심.(출14:21-22)
③ 애굽 사람들이 물줄기 자리의 한 가운데로 들어 왔을 때 다시 물이 합쳐짐.
④ 이러한 경험의 이유
- 광야로 들어가는 길고 지루한 행로에서 이러한 종류의 경험이 이스라엘에게 필요 했기때문.




제7장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1. 이스라엘의 여행한 경로
- 이스라엘이 지나간 길은 홍해를 따라 남쪽으로 100마일이 넘게, 그리고 내륙으로 50마일 가량 시내산
을 향해 뻗어 있다.
- 이 경로를 결정 하는 핵심은 시내산의 위치이다.

2. 시내산 까지의 여행(출15:22-18:27)
(1) 마라, 엘림, 신 광야(출15:22-16:36)
① 물을 예비 하심(출15:22-27)
- 이스라엘은 구름의 인도를 따라 남쪽으로 가서 “마라”라는 작은 오아시스를 발견 하나 그물은
쓴 물이었다.
-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그 물에 나무 조각을 던지니 그 물이 달게되어 마실 수가 있었다.
- 백성들은 계속 해서 엘림으로 이동 하였다.
② 만 나
- 하나님의 섭리는 “작고 동그란” 형태의 양식으로 나타 났는데 “갓씨 같고 희고 달다”고 했으며
그것을 그들은 “만나”라고 불렀다.
③ 메추라기
- 만나가 나타난 첫째 아침 전날 저녁 메추라기를 통해 고기가 공급 되었다.
- 백성들은 이 메추라기를 통해 충분한 고기를 얻을 수 있었다.
(2) 르비딤과 시내산(출1:71-19:3)
① 바위에서 물이 나옴
- 르비딤에 이르렀을때 백성들은 물이 떨어졌다.
-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위를 치자 물이 솟아났다.
② 아말렉과의 싸움
- 모세는 신임 하고 있는 여호수아를 시켜 이 싸움에 참가할 사람을 선택케 하였다.
- 이스라엘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강한 교훈
을 받았다.
③ 조 직
- 모세는 진을 방문한 장인 이드로의 충고에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 오십부장 그리고 십부장”을
임명 하였다.
④ 시내산에 도착함
- 이스라엘이 이곳에 도착한 때는 셋째달의 소위 ‘같은 날’이었다.
- 이 곳에서 중요한 율법이 주어 졌고 장막(Tabernacle)이 주어 졌다.

3. 율법을 주심(출19:3-24:18;32:1-34:35)
(1) 십계명을 주심
-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첫 소통은 십계명에 관한 말씀이었다.
- 삶의 10가지 기본 원칙이 하나씩 묘사 되었고 백성들은 듣고 두려워 하였다.
(2) 언 약 서
- 이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언약서”라 불리운다.
- 그 날 모세는 이 모든 말씀을 기록 하였다.
(3) 비 준 식
- 언약을 받은 다음날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이 정식으로 비준되어 효력이 발생한 날이다.
- 모세는 먼저 단을 쌓고 그 주위에 열두 기둥을 세웠으며 청년들을 지정 하여 소를 죽이고 화목제
를 드리게 하였다.
(4) 율법이 깨짐
① 첫번 40일
-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산으로 올라와 40일의 계시기간을 시작 하라고 하셨다.
② 금송아지
- 40일째날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들이 우상으로 금송아지를 만드는 죄를 범하였다고 말씀하셨다.
- 이곳에 도착한 모세는 의의 분노로서 백성들 앞에서 두 새겨진 돌판을 깨고 금송아지를 산산히
부수었으며 이러한 범죄를 응낙한 아론을 꾸짖었다.
③ 모세의 훌륭한 정신
- 모세는 자신의 이익을 하나님과 백성들의 이익 밑에 두고 진으로 돌아가 심한 꾸중을 하고 , 다
시 하나님께 간청 하기를 이스라엘을 계속 책망 하기보다 자신을 영원히 멸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④ 두 가지 행동
1.⇒ 자기를 위해 진 밖에 장막을 치고 그 안에 들어 갔을때 구름 기둥이 그 앞으로 와서 서게 되
었다.
2.⇒ 모세는 하나님께 그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요청 하였다.
⑤ 둘째 40일
- 이제 모세는 두 돌판을 새기라는 명령을 받고 다음날 아침 산으로 올라 갔고 하나님은 40일 동
안 그에게 율법을 나타내셨다.

4. 율법
(1) 도 덕 법
- 도덕법은 일반적으로 생을 살아 가는데 필요한 광범위한 도덕 규칙을 제공하고 있으며 보다 구체
적인 민법이나 예식법에 대한 기초를 나타내고 있다.
(2) 민 법
- 매일매일의 사회 관계에 대한 구체적 지시를 담고 있다.
(3) 예 식 법
- 종교적인 일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대부분은 장막에서의 제사장 역할에 관한 것이다.
(4) 다른 법과의 비교
- 고대의 다른 법문과 이스라엘법과의 비교
다 른 법이스라엘의 법결론법만으로 구성결론법과 필연법 두가지로 구성법적이고 세속적종교적인 동기에서 시작정욕의 통제, 이기심의 제한, 자비심의 요구, 윤리적인 범죄 인식등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정욕의 통제, 이기심의 제한, 자비심의 요구, 윤리적인 범죄 인식등을 나타내고 있다.자유인, 반자유인, 노예등을 설정하고 있다(함무라비 법전)이러한것이 없으며 단지 비특권 집단을 보호하는 목적에서만 인정
5. 성막(출25-31, 35-40장)
(1) 설 명
- 가로 : 45.72m, 세로 : 22.86m
- 동쪽 : 구리 제단;아카시아 나무로 제작(넓이 : 2.28m, 높이 : 1.37m)
제단 건너편에 놋 대야가 있음
- 서쪽 : 성막;48개의 아카시아 나무로 둘려있음(가로 : 13.7m, 세로 : 4.5m, 높이 : 4.5m)
├→ 성소 : 등촛대, 진설병 상, 향제단
└→ 지성소 : 언약궤
(2) 위 치
<진 칠때의 위치>
므낫세 아셀 단 납달리 잇사갈 에브라임성 막 유다 베냐민 시므온 르우벤 스불론

<행진 할때의 위치>
유다르우벤에브라임단언약궤잇사갈성막 물품
(게르손, 므라리)시므온성막가구
(고핫)므낫세아셀스불론갓베냐민납달리
(3) 예식을 거행함
- 이스라엘이 시나이에 머무른 기간동안의 임무는 성막을 세우는 일이었다.
- 다음일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하여금 성막에서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기 위해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 이 거룩한 일주일이 지난후 제사장들은 그들의 직분을 시작 하였다.
(4) 나답과 아비후의 범죄
-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받았으나 “디른 불”로서 분향
을 드렸다.
- 이에대한 심판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을 다시 내어 두 사람의 생명을 앗아 가셨다.

6. 백성들의 수
- 인구조사는 2년 2월 첫째날에 행해 졌다.
- 인구조사는 시나이에서 행해진 마지막 일 중의 하나였다.
- 계산된 20세 이상의 남자들의 총 숫자는 603,550 이었다.
- 이들의 숫자에 같은 숫자의 여자를 더하면 120만이 넘게 되며 20세 미만의 어린이를 더하면 약 192만
정도가 된다.

7. 시나이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민10:11-17;33:16-19)
(1) 경 로
- 이스라엘이 가데스로 온길은 확실치 않으나 통과한 두 지역의 이름은 기브롯 핫다아와 하세롯만이
주어져 있다.
(2) 도중에서의 4가지 사건
1.⇒ 백성들의 심한 불평(민10:33-;11:1-3)
2.⇒ 장로 70인을 세움(민11:4-30)
3.⇒ 만나에 대한 불평으로 다른 메추라기를 가져옴(민11:31-34)
4.⇒ 아론과 미리암이 불복종의 태도를 취한것(민12:1-5)
(3) 땅에 들어가기를 거절함
-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위해 12명의 정탐군을 먼저 보내심.
- 이들의 보고는 그곳 사람들이 강하고 도시가 성으로 둘러 쌓여있어 정복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함.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하겠다고 하셨으나 모세가 다시 중개함.

8. 37년 6개월동안의 방황(민15-19장, 33:19-36)
-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시나이 사막에서 약 37년 6개월 동안 무익한 방황을 함.
- 이기간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음.
- 이기간 동안 의 단 한가지 기록된 사건은 레위 자손 고라와 두 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람이 이끄는
250명의 반란이었다.

9. 가데스 바네아에서 요단까지(민20-21장;33:37-48, 신2:1-3:14)
(1) 미리암의 죽음(민20:1)
- 가데스에 도달할 무렵 미리암이 죽는다. 이는 아론이 죽은 해 와 같은 해이다.
(2) 바위에서 물이 나옴
-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위를 때리라고 하지 않고 단지 “명하라”고만 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바위를
때렸고 이로인해 하나님은 노하셔서 모세도 약속된 땅에 들어 가지 못하리라고 말씀 하셨다.
(3) 에돔 땅 통과의 요청
- 가데스에 있는동안 모세는 에돔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의 땅을 통과하게 해 달라고 요청 하였으
나 그는 거절 하였다.
(4) 아론의 죽음
- 아론은 123세의 나이로 호르 산에서 죽었다.
-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아론과 그의아들인 엘리에셀을 데리고 산 꼭대기로 올라가
아론이 죽기 전에 그의 옷을 아들에게 입혔다.
(5) 에돔땅을 돌아감
- 이스라엘을 멀리 남쪽으로 에돔땅을 돌아 가기 시작 했다.
- 식량과 음료수에 대한 불평으로 하나님은 또다시 이스라엘을 “불뱀”으로 징계하셨다.
(6) 북쪽으로 돌아 시혼과 옥을 물리침
- 에돔족과 다투지 말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이스라엘은 그들 지역의 동쫑 가장자리를 지나 다
시 북쪽으로 향하였다.
- 시혼왕은 야햐스에서 그의 군대를 모았는데 모세가 이를 만나 격퇴 시키었다.

10. 요단에 머무름(민22-27, 31-32장, 신 31,34장)
(1)발람과 모압 자손(민 22-25, 31장)
- 모세는 여리고 건너편 요단강 근처에 진을 치게 되었다. 이에 모압왕 발락은 발람 선지자를 불러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나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는 커녕 오히려 축복으 ㄹ
하였다.
- 발락에게 해고 된 후에도 발람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와 장래의 이스라엘의 축복에관한 놀라운 예
언을 하였다.
(2) 요청이 허락 됨
-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지파들은 많은 가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곳 땅을 자기 본토로 삼게
해 달라고 하였고 모세는 이를 수락 하였다.
(3) 앞을 내다본 정책
1.⇒ 인구조사를 재 시작함.(20세 이상의 남자 숫자가 601,730명이었음)
2.⇒ 슬로브핫의 딸들이 상속권을 제기함.
3.⇒ 새지도자를 임명 하는것(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임명 하심)
4.⇒ 모세는 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가 필요한 최종 훈계를 전달함.

11. 신명기
- 모세는 임종이 가까와 오자 신명기의 큰 메시지를 구두로 전달하고 이를 책으로 기록 하였다. 그는 새
세대를 위하여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의 개요를 포함하여 애굽을 떠난 이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어
떻게 인도 하셨나 하는것을 적었다. 그리고 그는 가나안에 곧 들어 갔을때에 관계되는 조항, 그리고 그
곳에서 겪게될 정착생활에 관한 규정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아 적었다.







제8장 정 복


1. 가나안 땅
(1) 이스라엘의 정복임무
- 가나안은 중앙 토치가 없었고 많은 도시들은 각기 자기의 왕을 갖고 있었다.
- 이 땅을 정목 하는것은 각 도시를 차례로 멸망 시키는 것이었다.
(2) 진보된 가나안 문화
- 가나안은 물질문화가 진보 하였다. 가나안은 애굽, 북방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구브롤를 포함한
외국나라들과 광범위한 무역을 하였다.
- 다음에 이어진 시기에서 이스라엘은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3) 공격 계획
- 가나안 공격 전략은 그 땅의 대략 중간 지점을 동쪽으로 부터 공격 하여 남과 북으로 나눈 다음
각 부분을 따로따로 정복 하는것이었다.

2. 땅으로 들어감(수2:1-5:12)
(1) 여리고 정찰
- 여호수아는 두 사람의 정탐군을 보내어 가나안을 정탐케 하였다.
-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크게 두려워 한다는 사실을 라합을 통해 알게 되었고 여호수아는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2) 요단 강을 건넘
-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강으로 나아갔을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3,00피트의 거리를 두고
쫓아 갔다.
-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닿자 놀랍게도 물이 갈라 졌다.
(3) 길갈에 진을 침
- 이스라엘백성들은 길갈에 진을 친 후 세가지 중요한 일을 겪게 되었다.
1.⇒ 모든 남자에 대한 할례 시행.
2.⇒ 유월절의 준수(수5:10)
3.⇒ 만나의 정지.

3. 중앙 팔레스틴의 정복(수5:13-9:27)
(1) 여리고의 멸망
① 여리고
- 구약의 여리고 : 사해에서 북쪽으로 11㎞, 요단에서 서쪽으로 8㎞떨어진 텔 에스 술탄으로 판명
된다.
- 구릉 지대는 약 만 여평 가량 펼쳐져 있다.
② 정 복
- 하나님의 계획은 ‘용사’들로 하여금 언약궤를맨 7제사장들의 인도를 받아 엿새 동안 하루에
한 번씩 그리고 7일째 날은 7번 성 주위를 돌게 하는것이었다.
- 라합과 그의 가족을 제외 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으며 여호수아는 이성을 건축 하는 사람에게 저
주를 내렸다.
(2) 아이에서의 실패와 승리
① 실 패
- 아이성의 실패 이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범죄한 사람을 조사하라고 명하셨다.
- 곧 아간이 지목이 되었으며 아간은 물품을 취하여 장막에 감추었음을 고백 하였다.
② 승 리
- 죄악을 징벌한 이스라엘은 승리 할 수 있었다.
③ 위 치
- 아이 : 벧엘의 서 남동쪽 2.4㎞ 떨어진 에드-텔로 추정
- 에드-텔이 정확한 아이의 위치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④ 벧 엘
- 이 성을 직접 공격한 기록은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이 성이 함락 될때에 벧엘의 세력도 없어 진
것 때문인것 같다.
(3) 세겜에서의 예식
- 세겜 근처 에발산에서 여호수아가 제단을 쌓고 제사장들이 번ㅔ와 화목제를 드렸다.
(4) 평화적인 충성
- 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랏여아림은 이스라엘의 성공 소식이 내륙으로 퍼지게 되자 이들은 평화
적인 항복을 강구 하게되었다.
- 3일후 이들의 계략이 알려 지게 되자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조약을 맺고 기브온 사람들로 하여금
“온 회중 가운데 나무를 패고 물 긷는자”로 봉사 토록 하였다.

4. 남방과 북방의 정복(수10-12)
(1) 남방 동맹의 패배
- 예루살렘 왕은 헤브론, 야므론, 라기스, 에글론과 동맹을 형성 하기 시작 하였다.
- 여호수아는 이들을 쫓아 내어 서쪽으로 벧호론까지 추격하였고 이 도망하는 군대는 하나님의
우박을 만나 죽게 되었다.
(2) 낮이 연장됨
- 여호수아는 기브온 근처 언덕에 올라가 “탱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
짜기에 그리 할지어다”라고 부르 짖었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훌륭한 신앙에 응답하여 그렇게 해
주시었다.
(3) 남방 도시의 정복
- 첫번 공격은 막게다 였고 다음은 립나였다.
- 여호수아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라기스, 에글론, 헤브론의 세 동맹 도시로 내려 갔다.
- 여호수아의 군대는 가데스 바네아까지 도달 하였다.
(4) 북방 동맹의 멸망
- 하솔은 대도시로서 북방에서 주도적인 왕국으로 동맹을 형성 하였다.
-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 적을 접전 하기위해 전쟁에 지친 그의 군대를 이끌어 왔고 하나
님은 이스라엘의 작은 군대가 승리 하도록 이끄셨다.
(5) 정복의 줄거리
- 여호수아는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산 근처의 남쪽끝에서부터 헤르몬 산아래 레바논 공짜기의 북쪽
끝까지 차지 하였다.
- 여호수아의 능력이 닿지 않은 주요 지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중해 해변이었다.
5. 땅의 분할(수13-22장)
(1) 요단 동편의 분할
- 남쪽 지역 : 르우벤 지파
- 중간 지역 : 갓 지파
- 북쪽 지역 : 므낫세 반 지파
(2) 유다, 에브라임, 므낫세 지파의 할당
- 유다 : 처음으로 제비로 땅을 할당 받음. 갈렙에게 이미 허락한 땅도 포함됨
- 에브라임 : 두번째로 제비뽑아 땅을 할당 받음
- 므낫세 반 : 세번째로 제비뽑아 땅을 할당 받음
(3) 분할이 중단됨
- 이유 → 가능한 한 빨리 성막을 세우고자 함.
- 나머지 지파는 땅 분배에 관심이 없어짐.
- 실로에 도착 하자 여호수아는 다시 분할방법에 관한 명령을 내림.
(4) 나머지 7 지파의 분할
- 베냐민 : 남쪽의 넓은 유다. 북쪽으로 요셉 지파 사이의 좁은땅을 제비뽑아 땅을 할당 받음
- 시므온 : 유다의 넓은 땅에 있는 도시들만 배당됨.
- 다음으로 스불론이 할당 받고 뒤이어 잇사갈이 할당받음.
- 다섯번째로 에셀 지파가 할당 받고 마지막으로 단 지파가 할당을 받았다.
(5) 간신히 싸움을 면함(수22:1-34)

6. 제 도
(1) 정부 제도
-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직접 자기에게 복종 하기를 원했다.
- 세목관할에는 장로들로 구성 하였다.
(2) 중앙 성소
- 성막은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상징 하였다.
- 성막은 번제의 장소가 되었다.
(3) 제사장과 레위인
- 레위인중 아론늬 자손은 제사장으로 선언되었고 이 가족의 장자는 대제사장으로 지명되었다.
① 레위인과 도시
- 제사장과 레위인이 살던 특별한 도시는 각 지파당 평균 4도시로 똑같이 나누어져 전부 48도시가
되었다. 이중 6개는 『도피성』으로 지정 되었다.
② 교 육
-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침. → 레위 지파나 제사장들이 이일을 맡음.
③ 우림과 둠밈
- 이것이 ‘가’,‘부’의 형태로 제한된 소통방법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방법을 제공
하였다.
(4) 예 물
제 사참 고 성 구제 물번 제레1장,6:8-13
8:18-21, 16:24제단위에서 희생제물을(수소,수양,숫새,비둘기) 완전히 태움소 제레2장, 6:14-23고운 밀가루나 그것으로 구운 떡등을 함께드림화 목 제레3장, 7:11-34흠없는 소, 양, 떡속 죄 제레4:1-5:13,6:24-30
8:14-17, 16:3-22대제사장:수송아지 / 지도자:수염소 /
극빈자:고운가루 에바1/10
평민:암염소,어린양 / 가난한자:집 비둘기속 건 제5:14-6:7,7:1-6수양, 어린양
(5) 세 가지 큰 절기
① 유월절과 무교절
- 이절기는 연중 첫번째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② 칠칠절
- 아무노동도 하지 않았고 새 곡식으로 만든 두개의 떡을 포함해 많은 예물을 바쳤다.
③ 성막절(초막절)
- 이 기간동안 백성들은 출ㅇ내굽하여 광야에서 살았던 방식을 기념하여 초막이나 장막에
거하였다.
(6) 이 외의 종교 행사
- 안식일, 월삭, 나팔절, 속죄의날, 안식년, 희년
(7) 선지자
① 설교가
- 그들은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가르치는 일에 더 충실 하였다.
② 계시의 수령자
- 하나님의 계시의 수령자였다.
③ 봉사자로 부름 받은자
- 선지자는 가계의 계승이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제사장과 레위인과 구분 되었다,
④ 숫 자
- 모세 시대때 부터 이스라엘은 많은 선지자를 갖고 있었으며 초기 왕국시대와 특히 분닫된 왕국
시대에는 더욱 많은 선지자가 있었다.








제9장 사사 시대


1. 배경 문제
(1) 사사기
- 역사로서의 이 기록은 특별한 관점에서 쓰여졌다
- 이 책은 그들이 실패한 여러가지 모양을 기술하고 있다.
(2) 압 박
① 주변 적들에게 당함
- 사사기의 대부분의 기록들과, 이에 관련된 대부분의 시기는 여섯 차례의 계속적인 타민족 압박에
관한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그 시대의 강대국에 의한것이 아님을 주시해아한다.
② 가장 심각한 존재, 블레셋
- 이들은 아브라함시대에 소수가 내륙에 있었으나 사사시대에는 아주 거대한 숫자가 되었다.
- 블레셋은 이후 5개의 도시를 세웠다.
(3) 사사들
이 름압박 민족참고 구절1웃 니 엘메소포타미아3:7-112에 훗모압3:12-303삼 갈3:314드보라와 바락가나안4-5장5기 드 온미디안6-8장6돌 라10:1-27야 일10:3-58입 다암몬10:6-12:79입 산12:8-1010엘 론12:11-1211압 돈12:13-1512삼 손블레셋13-16장
(4) 연대기적 문제
- 이 책에 나타난 숫자는 삼손의 시기를 포함 하여 총 410년이 된다.
- 410년으로 나타나는 사사기의 기간의 총합은 75년이나 더 긴 기간을 포함 하고 있다.
(5) 가나안의 종교
- 가나안 사람들의 중요한 신은 바알이었다.
- 아세라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바알의 반려자로 나타난다.
- 이스다롯 역시 구약성경에서 바알과 자주 연관되어 나타난다.

2. 완전한 땅 정복의 실패(삿1:1-3:7)
- 자신에게 할당된 전 지역을 점령하는데 어느 지파도 성공하지 못했다.
- 땅을 분배 할때 불평을 했던 에브라임도 서편의 게셀땅을 취하지 못하였다.
- 스불론은 기드론과 나할롤을 취하지 못하였고 납달리는 가나안 주민을 벧세메스 또는 벧아낫으로부터
쫓아내지 못하였다.

3. 메소포타미아 압박 시대(삿3:8-11;17-21장)
(1) 압박과 구원
① 구산 리사다임의 정체
- 이 침입은 실제로 주변 남쪽 나라에서 부터 온 것으로 생각해 왔다.
- Garstang은 의견을 달리 하여 헷 족속 왕으로 보고 있다.
② 정복과 구원
- 사사기는 이 정복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③ 연 대
- 이 첫번째 압박은 주전14세기의 2․4분기로 추정된다.
(2) 두 개의 대표적인 이야기
① 단 지파의 이동
- 이 이야기는 이 당시의 심각한 종교적 변질을 나타내고 있다.
- 단 지파는 그들의 할당된 영역에서 이동하고 사적인 신당을 세우며 남의 영역을 탈취함 으로써
잘못을 범하였다.
② 기브아의 분노
- 이 사건은 대부분 바알 제단의 영향으로 인해 생긴 도덕적 타락의 내용을 나타낸다.

4. 모압의 압박 시대(삿3:12-31)
(1) 압박과 구원
- 모압은 부분적으로 암몬과 아말렉의 도움을 얻어 여리고를 차지 하였다.
- 에글론이 그의 왕이었으며 여리고를 중심으로 18년간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았다.
- 하나님은 에훗을 통해 구원 하셨다.
(2) 80년의 평화 시대
- 모든 국가들은 애굽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을것이고 그로인해 국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3) 삼 갈
- “아낫(Anath)의 아들”이라 불리움
- 그는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이김
- 그는 소를 모는 막대기 하ㅏ로 600명이나 되는 블레셋 사람을 죽임.

5. 가나안의 압박 시대(삿4-5장)
(1) 압박과 구원
① 압 박
- 군대장관 시세라는 이스라엘을 송두리째 넣고 20년간을 지배 하였다.
② 드보라와 바락
- 드보라는 여선지자로 불리웠다.
- 드보라는 여자인 이유로 바락을 앞세워전투를 하게 하였다.
③ 구 원
- 바락은 그의 군대를 남쪽 다볼 산에 집결 시키고 기손 강변에 있는 므깃도 서쪽에서 시세라와
전투를 벌였다.
(2) 메르넵타와 라암세스 3세의 침공
- 메르넵타의 주요 활동은 지중해 근처였는데, 그가 이스라엘백성을 패배 시키기는 했지만 그들땅의
주요 부분을 점령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 라암세스3세 역시 블레셋 지역에 한정된 전투를 보였다.

6. 미디안의 압박 시대(삿6:1-10:5, 룻1-4장)
(1) 압박과 구원
① 압 박
- 4번째 압제는 미디안 사람들에 의해 주어 졌다.
② 경 고
- 백성들이 부르짖을때 하나님은 무명의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의 죄악을 경고 하셨다.
③ 구원자 기드온
-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내린 첫번째 명령은 우상을 파괴하는것이었다.
-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과 싸울 군대를 모집 하였고 32,00명중 300명만을 추려 내게 되었다.
- 이제 기드온은 대항할 준비를 하셨다.
④ 구 원
- 기드온의 병사들은 밤중에 모두가 동시에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림으로 횃불이 드러 나게
했다. 적들은 놀람과 공포속에서 수 많은 무리가 그들에게 몰려온다고 생각하고는 도망 치기
작 하였다.
- 이 나라는 기드온이 살아 있는 40년간 평온 하였다.
(2) 패역한 왕 아비멜렉
- 기드온의 첩의아들.
- 그는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70형제중 1사람을 빼놓고 모두 살해 하였다.
- 그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무리를 쫓아 데베스로 갔을때 한 여인이 던진 멧돌에 맞아 죽었다.
(3) 돌라와 야일
- 돌라 : 에브라임 산지 샤밀에서 23년간 다스림
- 야일 : 요단강 건너 알려지지 않은 성읍에서 22년간 다스림
(4) 룻 이야기
- 룻의 이야기는 12세기 후반부에 일어난 것으로 기드온의 사사기간 중에 일어난 일이다.

7. 암몬의 압박 시대(삿10:6-12:15)
(1) 압박과 구원
- 암몬 족속의 압제는 주로 요단강 동편에서 행해졌다.
- 입다는 길르앗 북쪽의 돕(Top)땅에서 방랑무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 입다는 르우벤에게 할당되었던 지역에서 민닛과 아로엘 사이의 20개 성읍을 점령 하였다.
(2) 입다의 맹세
- 입다의 맹세로 인해 그의 딸이 하나님께 드려지게되었다.
(3) 에브라임 사람들의 불평
- 암몬족에 대한 입다의 승리후 이브라임 사람들은 도움요청을 받지 않은 사실에 대해 불평하였는데
이로 인해 42,000 명이 전투장 또는 요단강 여울목에서 살해 되었다.
(4) 입산, 엘론, 압돈
- 입산 : 7년간 베들레헴을 다스림
- 엘론 : 스불론의 아얄론에서 10년간 다스림
- 압돈 : 에브라임에서 8년을 다스림

8. 블레셋의 압박 시대(삿13-16장)
(1) 압 박
- 마지막 큰 압박은 블레셋사람으로 부터 주어 졌다.
- 가나안 백성도 이스라엘백성과 똑같이 그들의 정복의 대상이었다.
- 블레셋은 40년간 이스라엘을 지배 하였다.
(2) 삼 손
- 단 지파 사람 마노아의 아들
-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출생이 예고됨
- 그는 나실인으로서 소라에서 태어남
(3) 삼손의 힘의 업적
① 삼손의 첫번째 힘의 과시는 딤나의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에 연유되어 일어났다.
② 두번째 과시는 1년도 안되어 밀 추수 기간에 일어 났다(삿15:1-19)
③ 이런일 이후 삼손은 보다 평화로운 생할 방식에 만족하여 20년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봉직하였다.
④ 20년이 끝나갈 무렵 삼손은 가사(Gaza)에서 기생과 더불어 죄를 범하게 되었다.
(4) 삼손의 평가
① 특 징
- 칭찬할만한일 : 하나님은 삼손의 초자연적인 섭리를 두번이나 들어 주셨다.
- 비난받을만한일 : 여성에 대한 욕망.
② 하나님의 과제
- 하나님은 삼손으로 하여금 블레셋과 싸우도록 하셨다.
③ 영 향
- 삼손이 죄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반적인 행위는 이스라엘에게 이로운 것이었다.
- 삼손이 욕망의 포로가 되어 잘못된길로 가게된것은 크게비판 받아야 할것이나 이 점에서 다른
사람에게 큰 교훈을 주고있음을 간과 해서는 안된다.

9. 사무엘(삼상1-8장)
(1) 어린 시절
- 사무엘은 엘카나와 한나의 아들이었다.
- 엘리의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악하여서 가나안 사람 성전에서 행해지던 방탕과 비슷하게
의식을 악용하고 성전을 더럽혔다.
- 하나님은 이러한 아들의 방탕을 허락한 엘리를 꾸짖으셨다.
(2) 비극적인 아벡 전투
- 징벌은 블레셋과의 비참한 전투를 통해 오게 되었다.
- 싸움터앞에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 놓으면 승리하리라고 잘못 생각한 백성들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에 동의 하자 실로에 있던 궤를 23마일이나 떨어진 진중으로 가져왔는데 이로인해 홉니와
비느하스를 포함하여 30,00명의 이스라엘사람들이 거꾸러 졌고 궤를 빼앗기게 되었다.
(3) 인간 사무엘
① 착실한 준비
- 어렸을때 훌륭한 어머니의 영향과 박식한 엘리 제사장의 세심한 지도가 있었다.
- 성막의 부패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무엘은 백성들의 열렬한 종교적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② 일의 형태
- 성경에는 사무엘이 어떻게 이 일을 성취 했는가에 대하여는 말하지않고 그 결과만을 기록 하고
있다.
③ 훈련 학교
- 사무엘은 이러한 노력에 결부시켜 새로운 착상, 곧 젊은 선지자를 위한 훈련학교를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4) 미쓰바 전투의 승리
-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재생되어 여호와께서 그들을 승리하도록 축복 하신 것이었다.
- 사무엘이 하나님께 도운을 요청하자 하나님이 들어 주신 것이다.
-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승리할수 있었으며 40년의 압제는 끝이 났다.
(5) 언약궤의 복귀
-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일련의 재앙을 일으켜 언약궤를 빼앗긴지 7개월만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셨다.
- 그러나 그 땅에 돌아온 궤는 아직 놉에 있는 성막으로 보내지지 않았다.
(6) 백성들이 왕을 요청함
- 미쓰바 승리 이후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다시금 효과적으로 각기 자기일을 수행하게 되자 사무엘의
활동은 상당히 즐어 들게 되었다.
- 그들은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직된 군대를 가진 왕을 원하게 되었다.
- 이는 하나님의 신정정치를 원하지않는 모습이었다.



제10장 사울 왕


1. 기름부은 사울(삼상9-12장)
(1) 라마에서 기름 부음을 받다.
① 사무엘로 부터 기름 부음을 받다.
-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의 기스(Kish)의 아들 사울을 지명하셨다.
- 사울은 키가크고 놀라운 용모를 갖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중에 아무도 그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다고 햇다.
② 확정의 징표
- 사울이 집으로 떠나기전 사무엘은 그에게 여행에 겪게될 세 가지 징표에 대해 말해 주었다.
- 이러한 사건들은 사무엘이 예언한 대로 일어 났는데 이는 의심할 바가 없이 사울은 마음 속으로
사무엘의 놀라운 발언을 확인 하게 되었다.
(2) 미쓰바에서 왕으로 뽑힘
- 사무엘은 미쓰바에 각 지파들의 대표를 불러 모았다.
- 그는 여기서 임의 대로 임명을 한것이 아니라 사전 선택이 없이 묻는 형식으로 진행 시켰다.
(3) 왕으로 세워짐
① 기다림의 기간
- 사울은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 질수 있도록 하기위해 자신을 증명할 기회가 필요 하였다.
② 야베스 길르앗에서의 뛰어남
- 암몬 사람들이 야베스 길르앗을 공격하여 왔고 사울이 왕으로 추대된 사실을 모르는 이 성의 주
민들은 각 지파에 도움을 요청 하여 왔다.
- 사울은 소의 멍에를 벗겨 이를 쪼개어 각 지파에게 보냈다. 이를 전하는 사자들은 사울과 함께
야베스 길르앗의 요청에 응답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으 소가 이런식으로 처해질 것이라 선언
했다.
③ 사무엘의 권면사
- 즉위식에 이어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이별의 권면사를 전달하였다.
- 사무엘은 과거 그들의 과오를 상고 시키면서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할 것을 촉구 하였다.

2. 사울의 통치
(1) 단순과 검약
- 사울은 백성들이 정교한 국가를 세우는 일에 관심이 없음을 깨달았다.
- 백성들이 엄격한 규율을 부과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며 세금에 대한 사무엘의 경고가 받아들여
지기에는 시간과 교육이 요청 되어 졌을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단순하고 검약하게 유지 되었다.
- 사울은 수도를 그의 고향인 기브아로 정하였다.
(2) 기본적인 변화가 거의 없음
- 사울은 백성들의 생활양상을 눈에띄게 변화 시키는 정책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 백성들도 사울의 이러한 통치 방법을 좋아 했다.
- 백성들은 그들을 대신 싸워주는 상비군이 있다는것에 대해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3. 사울의 배척(삼상13-15장)
(1) 첫번째 배척
- 블레셋 사람들은 요나단이 그 땅에 나와있는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한것에 대한 보복으로
공격준비를 하였다.
- 이 전쟁에서 7일간 제사장을 기다리던 사울은 제사장직을 대신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을 통하여 사울이 승리 하도록 하셨다.
- 그러나 사울은 어리석게도 군대에 명을 내려 하룻동안 아무 음식을 못먹게 하였다.
(2) 두번째 배척
- 약20년후 사울이 아말렉과 싸울때 일어났다.
- 사무엘은 사울에게 모든 사람과 가축을 죽이라고 하였으나 사울은 아각왕과 가장좋은 양과 암소
몇마리를 남겨 두었다.
- 사무엘은 준엄하게 사울을 꾸짖었고 사무엘 자신의 손으로 아각왕을 죽였다.

4. 사울과 다윗(삼상16-20장)
(1)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심
-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자 하나님은 곧 새 사람을 지명하시게 된다.
- 다윗은 그의 아버지와 형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둘째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된다.
(2) 사울의 심리적인 불안
-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자 심한 우울감이 그에게 닥쳐 왔는데 이는 주로 하나님의 배척으로부터
야기 된것이었다.
- 사울은 때때로 극히 노하여 미칠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 그의 빈번한 비정상적 행동이 알려지게 되자 백성들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
(3) 다윗의 부상(浮上)
- 1 단계 : 사울의 궁중음악인이 됨
- 2 단계 :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굴복 시킴
(4) 사울의 질투
① 다윗을 죽이려 시도 하다.
- 다윗은 왕앞에서 하프를 켜다 두번이나 왕의 공격을 맞게 된다.
-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 결혼 패물로서 블레셋 사람 100명의 양피를 요구 하였으나 다윗은 200
명의 양피를 가져왔다.
- 사울은 그의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② 다윗이 왕궁에서 도피하다.
- 다윗은 요나단에게 조언을 구하여 왕이 계속 그를 죽이려는 의도가 있는지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 결국 두사람은 다윗이 왕궁을 떠나야 한다는것에 동의를 하게 된다.
5. 사울의 말년(삼상22:6-19;28:1-25;31:1-13)
(1) 계속된 타락 행위
-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이유는 다윗이 진정 하나님이 정한 후계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사울은 아무죄도 없는 제사장 85인을 죽였다. 그리고 여자와 아이들, 모든 동물들을 포함하여
놉성읍 자체를 멸하게 하셨다.
(2) 블레셋과의 마지막 투쟁
- 사울은 길보아산 에서 블레셋과 마지막 전투를 치르게 된다.
- 전투가 시작되자 비극적인 패배에 대한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다(삼상31:1-13)
(2) 사울의 평가
- 그는 시작은 좋았으나 부끄러운 종말을 고하였다.
- 사울은 하나님을 순종치 않는 사람에게 대한 본보기였다.
- 사울의 집권은 거의 끊임없는 좌절속에 무너지고 말았다.
6. 망명자 다윗(삼상21-27,29-30장, 삼하1장)

(1)다윗의 상황
- 그는 왕에게 쫓김을 받는 추방객이었다.
- 다윗은 사울로 부터 자기자신을 지키는일과 장차 왕으로서의 그와 백성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다윗의 활동 경로
- 기브아를 떠남 → 놉을 찾아감 → 부하를 데리고 가드로 발길을 돌림
→ 본국으로 돌아와 아둘람 근처의 동굴에 거주함 → 군대를 모으고 부모를 모시고 동쪽의
모압으로 이주함 → 유다땅 “헤렛 수풀”에 거함 → 남쪽으로 내려가 헤브론 밑의 십(Ziph)지대와
마온(Maon)지대에 거함 → 동쪽으로 이주하여 엔 게디(En-gedi)에 거함 → 다시 마온 지대로
이주함.
(3) 시글락에서의 다윗
① 시글락으로 가다
- 다윗은 두번째로 사울의 모습을 살려준이후 블레셋땅으로 갔다.
- 다윗은 가드왕 아기스에게 나아갔고 아기스는 다윗이 망명했다는사실과 다윗의 병사600명을
유용하게 쓸수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껴 다윗을 받아들였다.
② 시글락에서의 불안정한 활동
- 다윗은 그술사람, 기르스 사람, 아말렉 사람을 공격 하였다.
- 동시에 한편으로는 전리품을 남방 유다 성읍에 나누어 주었다.
③ 이스라엘과의 투쟁을 모면하다
- 다윗은 사울과 대항하는 블레셋의 마지막 전투에 따라나서겠다고 하였으나 블레셋 사람이 이릉
반대하여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려 보내 졌을때 크게 안심을 하였다.
④ 아말렉 접전
- 아말렉 사람들이 초기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에 습격하여 많은 물품 이외에도 다윗의 부인
과 군인들의 부인을 끌고 갔다.
- 그러나 다윗은 다시 그 진영을 습격 하여 부인들과 물품을 모두 찾아 왔다.
⑤ 사울의 사망 소식
- 길보아 산에서의 이스라엘의 처참한 패배와 사울과 그의아들의 사망소식은 그곳에서 도망쳐온
사람에 의해 다윗에게 전해졌다.

제11장 다윗 왕

1. 헤브론에서의 다윗(삼하1:1-5:5)
- 다윗은 7년 반동안 유다를 다스리고 후에 33년동안 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후에 33년동안 전 이스
라엘을 다스려 전체 재임기간은 40년 반이 된다(B.C 1010-970, 삼하 5:5)
(1)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되다
- 그는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자였고 그의 재능과 사랑이 그 성읍에 널리 퍼져 있었다.
- 다윗이 헤브론에 도착 했을때 유다 사람들은 재빨리 집합하여 그를 “유다족속의 왕”으로 기름 부
었다.
(2) 이스보셋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다
- 다윗을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지파들은 사울의 남은 아들 이스보셋을 다음 왕으로 우선 생각하게
된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이스라엘이 분단된것에 대해 블레셋은 기뻐하였고 이제 곧 전 이스라엘을 차지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3) 다윗과 이스보셋의 투쟁
① 초기의 갈등
-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6마일 되는 베냐민의 기브온에서 사소한 문제로 인해
발단되었다.
- 전투에서 결국은 다윗이 승리를 거두었다.
② 다윗의 세력이 증가 하다
- 날이 감에 따라 다윗의 통치가 계속 강력 해진 반면 이스보셋은 점점 쇠퇴 하게되었다.
- 아브넬은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어 자신의 안전과 높은 지위를 조건으로 모든 이스라엘을 다윗의
손에 넘겨 주었다.
- 아브넬은 여러 지파의 장로들에게 다윗에게 충성할 것을 촉구 하였으나 결국 요압에게 살해 되
고 말았다.
③ 이스보셋이 죽임을 당하다
- 아브넬의 통솔이 없어 지자 그 밑에 있던 이스보셋의 두 장군이 다윗에게 환심을 얻고자 이스보
셋을 살해하고 그 머리를 다윗에게 가져 왔으나 다윗은 즉시 이 두 장군을 처형 하였다.
(4)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다.
- 다윗이 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정식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을때는 헤브론에서의 7년 6개월 통치가
경과한 후였다.
- 지파들 사이의 협정이 이루어 지고 조건이 수락되어 다윗은 자기 생애에서 세번째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되었다.

2.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다(삼하5:6-8:18;10:1-19)
(1) 블레셋과의 투쟁(삼하 5:17-25)
① 첫번 전투
- 블레셋은 예루살렘 바로 남쪽인 르바임(Rephaim)골짜기에서 공격을 가했다.
-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승리를 보장 하시자 다윗은 숫자가 훨씬 적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을
패배 시켰다.
② 두번째 전투
- 이들은 큰 군대로 다시 모여 비슷한 수법으로 이 골짜기를 다시 공격하였다.
- 그러나 하나님의 반격 계획으로 이스라엘은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2) 새 수도
① 다윗은 여부스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수도롤 택하였다.
→ 유다와 이스라엘의 경계
→ 물공급지 : 기혼(Gihon)
→ 쉽게 방어 할수 있는 위치였음
② 종교적인 수도 역할을 겸하다
- 기럇여아림에 있던 궤를 이 성읍으로 가져오게 함
- 수행원 웃사(Uzzah)가 기둥이 아닌 수레로 가져오다 궤가 마차에서 떨어 지려는것을 막으려다
죽음을 당함
- 3개월후 다시 궤를 하나님이 가르쳐준대로 예루살렘에 준비한 장막으로 옮김
(3) 다윗의 정복
① 지파의 통합
- 성경에는 다윗이 이스라엘지파들을 하나의 중앙정부로 통합한 내용에 관하여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 지파의 통합은 원래 할당된 땅뿐만 아니라 전혀 점령 하지 않은 땅을 획득하는데에도 연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② 다윗의 군대
다윗 망명때의 군사 600명 이 중 약간의 보충과 추가가 있었을 것으로 보임
가드사람, ‘용사’로 언급된 깁보림 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회전식의상비군 한달에 한 번씩 순번을 바꾸어 24,000명의 상비군을 유지케 함용 병 외국 용병으로 그렛사람과 블렛 사람으로구성
③ 외국 정복
- 본국이 견고하게 통합되고 효율적인 군대를 소유하게 되자 다윗은 필요할때에 외국과의 전쟁에
참가 할수 있었다.
a. 모압과 에돔
- 사해 동쪽에 있는 모압과의 투쟁 에서 승리함
- 사해 남쪽에 있는 에돔과의 투쟁 에서 승리함
b. 다메섹, 소바, 하맛
- 소바 : 하닷에셀로 부터 병거 1,000개 / 마병700 / 보병20,000 을 사로 잡음
다윗은 병거 100승의 말만 남기고 모두 죽였다.
- 다메섹 : 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소바를 도우러 오자 이들도 격파하고 공물을 요구 하여 받았
다.
- 하맛 : 하맛은 자진하여 공물을 보내 왔다.
c. 암몬과 소바
- 다윗은 암몬의 새왕 하눈(Hanun)에게 친절을 표시 했는데 이것이 오해가 되어 다윗의 사자들
이 모욕을 당하였다.
- 다윗왕은 암몬의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군대와 요압을 보내었는데 요압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 하여 결정적인 승리로 이끌었다.
④ 다윗 제국
- 왕국의 본토는 열두 지파에게 분할된 모든땅을 포함하게 되었고 여기에 암몬 왕국이 첨가
되었다.
- 다윗의 권력은 남쪽의 아카바만과 애굽강으로 부터 북쪽의 유브라데스 강까지 퍼진 셈이었다.

3. 다윗의 행정부
(1) 국 가
- 이스라엘이 주도적인 국가가 되고 주변 나라들이 그들을 두려워 하게 되었다.
- 다윗왕은 이 새로운 세력형성의 중심 인물이며 그가 이 모든 것을 이룩한 셈이었다,
(2) 왕 실
- 요 압 : 군대장관(군사적임무 관할)
- 브 나 야 : 군대장관(그렛, 블렛 사람을 관할)
- 여호사밧 : 민간 업무를 관할
- 스 라 야 : 공문서 관리
- 아 도 람 : 외국 노동자로 구성된 마스(Mas, “부역”)를 관할
- 사독, 아비아달 : 종교적인 문제 관할
(3) 종교적 인사들
① 선지자 갓과 나단
- 갓 : 망명 시절 부터 다윗과 함께 있음
- 나단 : 하나님께서 성전짓는 일을 허락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
밧세바와의 범죄에대해 다윗을 꾸짖음
② 대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 아비아달은 사울이 놉에서 85명의 제사장을 살해할때 다윗에게 도망왔음
- 다윗이 전이스라엘의 통치를 맡았을때에도 이 살인 이후 사울에 의해 임명받은 사독이 또한
대제사장으로 인정됨
③ 조 직
- 대제사장 → 제사장 (24부분) → 성가대, 문지기, 관리와 판관

4. 중요한 행적
(1) 훌륭한 행적(삼하9장;21:1-14)
① 므비보셋에게 친절을 베풀다
- 다윗은 궁전에서의 영광의 자리를 그에게 허락 했다
- 다윗은 므비보셋을 데려와 그의 두려움을 가라 앉히고 왕궁에서 식사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 주
는 것외에 그의 할아버지 사울이 소유했던 모든땅을 그에게 주었다.
② 기브온 사람을 재판 하다
- 수년 전에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수아를 속여 그들과 언약을 맺게 했다.
- 사울은 이 조약에 응하지 않았고 이로인해 기브아 사람들은 사울의 일곱아들들을 처형하도록 보
내달라고 다윗에게 요구 하였다. 다윗은 므비보셋만을 남겨두고 그 요구를 이행 하였다.
(2) 비난받은 행적
① 밧세바와의 범죄
- 다윗은 밧세바와의 범죄 이후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살해하였다.
- 이 죄로 인해 다윗은 나단 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심한 면책을 받았고 다윗은 이를 회개
하였다.
② 인구 조사에서의 범죄
- 또다른 행적은 백성들의 인구 조사였다
- 이 범죄는 고의 적인 높은 세금의 징수와 부역에 관계된 일인것으로 보인다.
- 이 일이 끝난뒤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보내어 다윗으로 하여금 세가지 형벌중 한 ㅈ가지를 선택
하게 하였다.

5. 다윗의 말년(삼하 13-20장, 왕상1:1-2:11, 대상22,28-29장)
(1) 계승 문제
- 다윗의 집권이 종말에 가까와 오게 되자 누가 그를 계승하게 될것인가 하는 문제가 민감하게 대두
되었다.
- 다윗이 선택을 하리라고 생각 했으나 공식적인 발표가 이루어 지지는 않았다.
(2) 압살롬의 반역
① 음 모
- 압살롬은 백성들로 부터 환심을 사고자 노력했다.
- 또한 다윗이 헤브론에 가도 될것을 허락 하자 그는 거기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자기가 기름
부음 받은 왕이라고 하였다.(삼하15:7-12)
② 다윗의 탈출
- 다윗은 그의 호위병인 그렛 사람과 블렛사람 충성된600명 그리고 많은 신하들과 함께 예루살렘
을 탈출 하였다.
- 마하나임으로가는길에 므비보셋의 종 시바(Ziba)가 안장 지운 나귀에 음식을 싣고 와서 왕의
가족을 대접 하였다.
③ 전 투
- 전투는 마하나임 근처의 수풀에서 일어났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윗의 군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④ 세바의 반역
- 이스라엘대표의 다른 사람만 도착하고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길갈에 오게 되었을때 북방 사람들
은 다윗이 차별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세바가 북방 지파들로 하여금 다윗왕국으로부터의
분리 하여 자기를 따르라고 했다.
- 이로인해 큰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지혜로운 여인에 의해 인도되어 자기들의 안전을
조건으로 세바의 머리를 베어 주었기 때문이다.
(3) 솔로몬의 즉위
- 압살롬이 실패한 이후 아도니야가 왕권을 잡으려고 시도를 하였고 다윗은 재빨리 솔로몬을 왕으로
앉혀 놓았다.
- 다윗은 마지막 남은 재임기간을 앞으로의 통치를 위해 새 왕과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일로 보냈다.

6.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 백성들은 그의 집권을 그들 역사의 정점으로 보았다.
- 그는 그 이후 왕들의 의의 척도가 되었다.



제12장 솔로몬 왕


1. 왕 으로 세워지다(왕상 2:12-46;3:4-28, 대하1:1-17)
(1) 왕권 강화(왕상2:12-46)
-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통해 수넴(Shunammite)여인 아비삭과의 결혼을 요청 하였으나 솔로몬은 이
청약을 자기 통치의 위협이라 생각하고 거절하였으며 아도니야를 처형 하였다.
-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직에서 파면 시키고 아나돗으로 추방 시켰다.
- 솔로몬은 브나야를 시켜 제단 앞에서 요압을 죽이도록 하였다.
- 솔로몬은 더 나아가 왕권을 강화 시키는 일환으로 시므이를 죽였다.
(2) 하나님의 약속
- 하나님의 축복의 필요성을 깨달은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렸고 하나님은 이에 응하여 그로 하여
금 청탁케 하셨다. 이에 솔로몬은 통치에 필요한 지혜를 요구하였다.

2. 솔로몬 왕국
(1) 방어 조치
- 그의 주요 방어 조치는 이스라엘중심 땅을 둘러싼 주요 도시들을 강화 하는것이었다.
- 솔로몬은 1,400의 병거와 12,000 의 마병을 모으고 4,000의 말 외양간을 유지 하였다.
(2) 솔로몬의 궁정
- 솔로몬은 다윗 정부에 있던 사람들이외에 아사리아(Azariah)와 총리대신 사붓(Zabud)이었다
- 부인 : 700 / 첩 : 300 (왕상 11:3)
- 하루식량 : 가는 밀가루 30석 / 굵은 밀가루 60석 / 살진소 10 / 초장의 소 20 / 양 100마리
(3) 재정의 유지
① 세 금
- 나라를 열 두 군으로 나눈후 각 군 위에 세리를 두었음.
② 부 역
- 가나안 사람을 이용 하였으나 이스라엘사람들의 부역에도 의존 하였다.
③ 외국의 공물과 예물
-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
④ 무 역
- 무역로 : 홍해를 통해 남쪽으로가는것
- 솔로몬은 말과 병거에 관한 무역도 수행 하였다.

3. 외국과의 관계
(1) 애굽과의 동맹
- 솔로몬이 바로의딸과 결혼울 함으로써 애굽과 동맹을 맺었다고 직접 언급되어있다.(왕상 3:1)
(2) 두로와의 동맹
- 또다른 중요한 동맹은 페니키아왕 히람(Hiram) 1세 와 맺어진 것이었다.
- 히람은 성전 건축을 예상하여 이미 다윗에게 백향목을 제공 하였다.
(3) 스바 여왕의 방문
- 스바는 현대의 예멘(Yemen)으로 보여 진다.
- 그녀는 솔로몬에 대한 예물로 금 120달란트를 가져왔고 돌아갈때는 많은 예물과 함께 자기가
바라던 모든것을 다시 받아 만족하여 돌아 갔다.

4. 건축 사업(왕상 5:1-9:9, 대하2-7장)
(1) 성전 건축
- 구체적인 건축은 솔로몬의 재임 4년봄에 시작 하여 7년후 가을에 완성 되었다.
- 길이 27.4m / 넓이 9.1m /
- 성소 : 전체의 ⅔를 차지 ⇒ 정금제단, 정금등대, 열개의 진설병 상이 있음
- 지성소 : 전체의 ⅓을 차지
- 성소앞에 넓이 9.1m 길이 3m 되는 현관이 있음
(2) 성전 봉헌
- 언약궤를 지성소에 둠 :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것
- 긴봉헌 기도를 드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태웠다.
(3) 다른 건축물
- 자신의궁전 : 13년동안 건축
- “레바논 나무의 궁” : 백향목 기둥으로 바쳐서 지음.
: 무기고로 사용
- 솔로몬의 부인인 바로의 딸을 위한 궁전도 있었다.

5. 문학 시대
(1) 역 사 서
- 나단 선지자 : 다윗, 솔로몬에 대한 통치의 사기를 씀
- 갓 선지자 : 다윗의 집권만을 다룬 사기를 씀
- 아히야와 잇도 : 솔로몬의 행적을 다룬 역사서를 씀
(2) 음악과 시
- 다윗 : 73편의 시를 써서 일부를 성전 예배에 사용케함
- 솔로몬 : 2편을 씀
- 아삽(Asaph, 예배의성가대장) : 12편의 시를 씀
- 고라의 아들들 : 18편의 시를 씀
- 에단과 헤만 : 각각 1편의 시를 씀
(3) 지혜문학과 극 문학
- 솔로몬은 전도서와 아가서 전체와 잠언의 대부부을 씀

6. 영적인 쇠퇴와 징벌 (왕상11장, 대하 9:29-31)
(1) 쇠 퇴
- 종교적으로 솔로몬은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 그의 모든 외국 부인들의 거짓 신을 위해 산당을 지은데에서 그의 변절의 모습이 나타난다.
- 그러나 솔로몬은 죽기전에 이러한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 갔다.
(2) 징 벌
① 여로보암
- 선지자 아히야는 그의 새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 열조각을 여로보압에게 주면서 솔로몬이 죽은
후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다스리게 될것을 알려 주었다.
- 솔로몬은 이 사실을 알고 여로볼암을 죽이려 하였으나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하였다.
② 에돔의 하닷
- 하닷의 활동으로 솔로몬의 남방 제국 지배가 줄어 들게 되었다.
- 하닷은 요압의 잔인한 행위를 기억 하여 솔로몬에게 끊임없는 문제를 가져다주었다.
③ 다메섹의 르손
- 르손으로 인하여 솔로몬의 북방 제국지배가 줄어 들게 되었다.
- 그는 유능한 군사적 인물이었으며 배후에 유능한 군대를 모집하였다. 그는 점차 지위와 세력을
증가 시켜 솔로몬에게 심각한 골치거리를 일으켰다.

7. 왕 으로서의 솔로몬
- 솔로몬은 40년(B.C 970-931)의 긴기간을 통치하였다.
- 그는 넓은 제국을 물려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부와 명예라는 특별한 약속을 받았었다.
-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제13장 북방왕국


1. 반란(왕상12:1-4, 대하 10장)
- 열 지파는 이 왕국에서 탈퇴 하여 아히야가 예언한 대로 여로보안을 왕으로 하는 자기들만으 왕국을
세웠다.
- 여로보안 은 자기의 두지파 유다와 베냐민을 통치 하는것으로 만족 해야 했다.

2. 초기 시대(B.C931-885, 왕상12:25-16:20)
(1) 왕이 된 여로보암
① 새 왕국
-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이라는 열지파의 첫 통치자가 되었다.
- 그는 세금을 최소한도로 유지하고 징수제도를 완전히 없앴을 것으로 보인다.
- 그는 디르사(Tirzar)를 수도로 정했다.
② 대체된 예배 장소
- 종교적으로 여로보암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게 되었는데 이는 북방 백성들을 위한 다른 예
배 장소를 세우는 것이었다.
(2) 질책과 징벌을 받은 여로보암.
- 여로보암의 행동은 하나님앞에서 큰죄를 범하게 된다.
- 이에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그를 꾸짖게 하신다.
- 그가 그로임해 다시 마음을 돌이 켰다는 기록은 없다.
(3) 영토의 손실
- 이스라엘 초기에 특히 여로보암때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잃었다.
- 블레셋 사람들이 왕성 해져 그들이 잃었던 영토를 다시 요구 하였다.
- 이러한 영토의 손실 외에도 여로보암의 국가는 적어도 한번 외국의 침공을 당했을 것이다.
(4) 여로보암의 죽음
- 여로보암은 22년간의 통치후 자연사로 죽었다.
(5) 나 답
- 나답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디르사에서 2년간 다스렸다.
- 종교적으로 나답은 그의 아버지를 그대로 따랐다.
(6) 바 아 사
- 바아사는 24년이라는 긴 기간을 다스렸다.
- 그이 통치에 관해서 남쪽의 유다와 계속 투쟁을 벌였다는것 외에는 기록 된 바가 거의 없다.
- 종교적으로 바아사는 그의 두 선임자의 방법을 계속 했다.
(7) 엘라 와 시므리
- 엘라는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여 2년간 다스렸다.
- 군사적인물 시므리가 공모 하여 엘라를 살해 하였다.
-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질러 자살 하였는데 이것이 7년 통치 후였다.

3. 오므리 왕조(B.C885-841, 왕상 16:23-22:53, 왕하1-8장)
(1) 정치적 상황
- 오므리는 3년 동안 세번째 왕가를 대신 하였다.
- 유다의 아사왕은 바아사를 공격 하기 위해 이미 이 나라왕 벤하닷 1세에게 도움을 요청 하였었다.
- 오므리가 이스라엘을 지배 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2) 오므리의 집권
① 새 수도 사마리아
-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새 수도로 사마리아를 정했다.
- 역사적으로 보아 사마리아는 거의 공격이 불가능한 요새로 증명되었다.
- 이 건축 사업에 훌륭한 기술이 사용되었다.
- B.C 722년까지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다.
② 모압의 정복
- 모압인의 돌비에서는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가 모압을 정복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③ 페니키아 동맹
-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의 결혼은 정식동맹의 표시로 공주의 아머지 엣바알
과 조약을 맺은것으로 보인다.
(3) 아합과 이세벨
① 바알 숭배의 도입
- 이들은 이세벨의 본래 종교인 바알-멜칼트(Baal-Melqart)의 제단을 이스라엘에 도입 시켰다.
-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살해 하였다.
② 통치적인 수완
- 아합은 그의 아버지와 같이 능력있는 통치자였다.
- 오므리의 궁전 근처에 위치한 많은 건축물들은 아합의 “사아궁”으로 판명 되었다.
③ 전쟁 경험
- 종교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축복으로 아합은 군사적으로 살효를 거두었다.
- 아합은 라못 길르앗에서 벤하닷과 싸우다 죽임을 당한다.
④ 유다와의 동맹
- 아합의 딸 아달랴는 동맹의 표시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 하였다.
- 여호사밧이 아합의 아들들을 원조 하였다.
(4) 선지자 엘리야
① 기근과 불
- 그의 첫번 행동은 이런 사악한 종교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큰 기근을 내실 것이라고
아합왕께 고하는 일이었다.
-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갈멜산에서 시험을 주선 하는데 협동하도록 왕을 설득 하였다.
② 실패와 재기
- 엘리야 자신이 연약해지는 순간 여호와 숭배에 대한 국민적인 재생의 전망을 망쳐 버렸다.
- 엘리사와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 정권의 종교적 도덕적 부패를 계속 저항 하면서 10년동안
함께 일 하였다.
③ 이 후의 세가지 이야기
1. ⇒ 아합왕이 이스라엘에 있는 왕궁 근처에서 부당하게 포도원을 탈취한 사건에 대해 엘리야가
꾸짖은 것이다.
2. ⇒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얻은 병의회복을 바알세불에게 사람을 보낸것을 엘
리야가 꾸짖은 것이다.
3. ⇒ 엘리사가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 간것이다.
(5) 아하시야
- 아하시야는 2년간 다스리다가 아글이 없이 죽었다.
- 아하시야는 높은 난간에서 떨어져 얻은 병으로 인해 죽었다.
(6) 여호람
① 종교적 관점
- 여호람은 바알을 없애 버렸다.
- 그러나 여호람이 바알을 계속 지지 했을것이라는 추측은 이세벨이 그의 재임 기간에 계속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수 있다.
② 모압의 반란
- 여호람 당시 주목할 만한 사건은 모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7) 여호람 재임 시의 아람 사람 예화
① 아람 장군 나아만
- 그는 문둥병에 걸려 포로로 잡은 이스라엘여자 아이로 부터 이스라엘 선지자가 그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로부터 도움을 구하게 되었다.
- 나아만은 엘리사로부터 요단강에가 7번 씻으라는 말을 듣고 실천함으로 놀라운 치료를 경험하게
되었다.
② 장님이 된 아람 사람
- 얼마후 아람 사람들이 엘리사를 잡으러 군대를 보냈으나 이 군인들은 눈이 멀게 되어 곤경을
겪었다.
③ 사마리아의 포위
- 수 개월 후 아람 사람들은 더큰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로 다시 와 사마리아를 포위 하였다.
④ 아람 사람에의한 부상
- 아람 사람과의 마지막 교섭에서 여호람은 죽었다.

(8) 선지자 엘리사
① 배경 문제
- 엘리사가 한일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바알-멜칼트에 항거 하는것이었다.
- 엘리사의 활동기간은 여호람의 재임 초기에 시작 하여 요아스때에 죽었으니대략 50년의 기간이
된다.
② 엘리사의 경험
- 엘리사에 관한 내용은 주로 여호람 재임 시의 일로써 시간적으로 크게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하
나의 연속적인 내용은 아니다.
- 엘리사의 주요 관심중의 하나는 점ㄹ은 선지자를 교육 시키는 일이었다.

4. 예후왕조(B.C841-753, 왕하 9:11-10:36;13장;14:16-29)
(1) 오므리의 가문을 멸하다
- 하나님께서는 예후가 넷째 왕조를 살해 하리라는 징벌을 예고 하셨다.
- 엘리사는 선지자의 아들들중 한 사람을 보내 여호람 대신 예후를 왕으로 기름 붓고 숙청에 관한
지시를 전하게 하였다.
1.→ 여호람왕
2.→ 이세벨의 종들로 하여금 그녀를 창문에서 떨어뜨림.
3.→ 아합의 70명의 아들 살해.
4.→ 이스르엘에 있는 모든 궁정 관리를 살해
5.→ 아하시야의 친척 42명 살해
6.→ 바알의 선지자와 제사장들을 죽임
(2) 왕이 된 예후
- 종교적으로 예후는 오므리의 가문을 멸하는데 순종 하였으므로 제일 초기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
으나 처음에 시작한 그 길을 계속 따르지 못 하였다.
① 하사엘의 이스라엘파괴
- 외국 사람에 의한 이스라엘의 모욕은 특히 예후 재임 시에 선고 되었다.
- 이것은 아람 사람 하사엘에 의해 오게 되었으며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셈이었다.
② 앗수리아 앞에서의 모욕
- 이스라엘을 또한 에후 재임시 앗수리아로 부터 피해를 입었다.
- 앗수리아 침범은 하사엘의 침범 이전에 일어 났으며 이스라엘땅 부다는 하사엘의 땅에 더 큰 해
를 가져다 주었다.
- 이 사건은 앗수리아 기록에 의해서만 알려져 있다.
③ 예후가 미약하게 된 이유
⇒ 오므리 가문의 숙청 당시 유능한 관리를 살해한점
⇒ 유다와 페니키아와의 동맹이 이 숙청으로 끊어짐.
(3) 여호아하스
- 여호아하스는 그의 아버지 예후를 계승하여 17년간 다스렸다.
- 하사엘에게 굴복한점 외에는 그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다.
(4) 요아스
- 요아스는 왕위로 오른 직후 엘리사로 부터 군사적 지위를 회복 하리라고 약속을 받았다.
- 요아스는 유다와 아마샤(Amaziah)의 공격을 지탱할 정도로 우세 하였다.
(5) 여로보암 2세
- 여로보암 2세는 예후왕조의 세번째 후계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 여로보암은 다윗과 솔로몬 제국시대에 존재했던 동쪽과 북쪽 경계를 유지 할 수 있었다.
(6) 8 세기 선지자
- 선지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 했다.
- 여로보암 2세때의 선지자
→ 요나 / 아모스 / 호세아
(7) 스가랴
- 6개월 이내에 그의 후계자가 암살 당했다.
- 단과 벧엘에서 여로보암의 숭배를 계속 했다.


5. 이스라엘의 쇠퇴(B.C751-722, 왕하15:13-17:41)
(1) 살 룸
- 살룸은 스가랴를 죽이고 왕으로 선언 함
- 므나헴이 그를 죽임
(2) 므 나 헴
- 므나헴은 총 10년간 다스렸다.
- 므나헴 통치 기간 동안 앗수리아의 세력이 다시 한번 지중해 국가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 디글랏빌레셀의 주전 743년 원정은 이스라엘에까지 미치게 되어 여기에 므나헴이 휘말리게 되었다.
(3) 브가히야
- 므나헴이 죽자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를 계승 하였다.
- 그러나 2년을 다스렸을때에 군대 장관인 베가(Pekah)사마리아 궁전에서 그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의 8대 왕조를 세웠다.
- 베가의 단독 통치 6년인 주전 734년에 디글랏빌레셀 3세는 반역적 동맹을 진압 하고자 서쪽으로
돌아 왔다.
(5) 호 세 아
- 호세아가 즉위 할시 이스라엘은 큰나라가 아니었다.
- 살만에셀은 사마리아로 건너가 수도를 포위 하였다.
- 마침내 사마리아성은 무너졌고 주권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6. 앗수리아의 속국
- 사마리아 성이 무너지자 앗수리아 총독이 그 당에 오게 됨으로써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도 역시
주(Province)로 편입 되었다.

7. 요약
- 이스라엘은 B.C931년 부터 B.C722년 까지 약 2세기 동안 국가로 존재 하였다.
- 제9왕조 / 19명이 집권 / 8명의 왕은 암살당했거나 자살함.
- 오므리에게의 징벌
→ 예후에의한 오므리 가문의 진멸
→ 하나님은 앗수리아에 국가적 모욕을 허락 하심



제14장 유다 왕국


1. 이스라엘의 투쟁기간(B.C931-870, 왕상 14:21-1524, 대하10-16장)
(1) 르호보암
- 르호보암은 41세때에 왕이 되어 17년간을 다스림
- 솔로몬 후기 시대의 종교적인 타락으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음
① 여로보암으로부터의 성공
- 르호보암은 두개의 주요적, 곧 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애굽의시삭으로부터 군사적인 접전을 맞게
되었다.
- 여로보암과의 전투는 성공적이었으나 두번째 시삭 한테는 비극적인 참패를 당함으로써 종교적인
결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셈이었다.
② 애굽의 시삭에게 패배 당함
- 르호보암 5년에 시삭은 애굽의 우월성을 과시 하려는 강력한 시도를 감행 하였다
- 시삭의 세력은 북방 이스라엘에게도 미쳤다.
(2) 아비얌
- 르호보암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비얌은 3년간 다스렸다.
- 여로보암의 투쟁을 계속 하였고 승리를 거두었다.
(3) 아 사
- 아사는 41년을 다스렸으며 남방왕국에서 처음으로 종교적으로 선한 왕이 되었다.

① 종교적 행적
- 그는 그 땅에서 남색 하는자와 우상을 몰아 내었다.
- 최근의 전투에서 노략하여온 소700마리와 양7,000 마리를 번제로 드렸다.
- 아사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 하나님의 눈에 들지 못하였다.
② 애굽에게 승리하다.
- 아사왕은 두번의 외국전투를 겪었다. 첫번째는 애굽과의 전투였는데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③ 이스라엘에 대한 자만심
- 두번째 애굽과의 전투는 이스라엘왕 바아사 와의 갈등이었는데 그것은 군사적이기 보다는 경제
적이었다.

2. 이스라엘과의 동맹시대(B.C873-835, 왕상22:42-50, 왕하 8:16-29;11:1-16
,대하17:1-23:15)
(1) 여호사밧
① 훌륭한 종교 행적
- 그는 땅에서 바알 제단을 없애고 산당을 없애기도 했다.
- 그는 유다 전체에 “율법서”를 가르치게 했다.
- 여호사밧의 훌륭한 신앙은 모압, 암몬, 에돔의 세 동맹이 공격을 가헤온데서 드러난다.
② 강력한 통치자
- 5대대의 강력한 군대 소유
- 본국의 수비 강화에도 신경을 써서 요새와 국고성을 건축함.
③ 재판 규정
- 중요한 성읍에 재판관 임명
- 모든 재판을 공정히 하도록 촉구함
④ 이스라엘과의 동맹
- 그는 이 동맹에서 천부적인 정치가로서 자질을 과시 하였다.
-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면에서는 큰 손실을 가져 왔다.
(2) 여 호 람
- 여호사밧과 여호람은 4년동안 섭정을 하였다.
- 5가지의 불행한 사건
1.→ 여호사밧의 모든 아들들을 죽임
2. 3.→ 그의 통치에 대한 연속적인 반란
4. → 블레셋과 아라비아 인들의 침략
5. → 여호람 자신의 끔찍한 죽음
(3) 아하시야
- 아하시야는 아버지를 계승하여 1년도 채 못다스렸다.
- 아하시야는 예후의 습격으로 도망쳤으나 예후의 신하들에게 붙잡혀 므깃도에서 살해 당함.
(4) 아 달 랴
① 잔인하고 사악한 통치
- 아달랴는 이세벨의 딸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조장하여 그의 형제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 그녀는 죽은 아들의 장자에게 돌아갈 왕권을 차지 하기 위해 아하시야의 아이들을 살해 하도록
하였다.
② 요아스에게 왕관을 씌우다.
- 아달랴의 전복을 기다리고 계획해왔던 여호야다는 어린아이를 왕위에 올려 놓았으며 여호야다는
아달랴를 처형 하도록 명령했다.

3. 하나님께 합당한 왕(B.C835-731, 왕하12-15장, 대하 23:16-27:9)
(1) 요아스
① 종교적 개혁
- 요아스는 여호야다를 통하여 바알 멜칼트성전과 그 제단 우상등을 멸하였다.
- 요아스는 자신이 혼자 통치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성전을 수리 하도록 명령 하였다.
② 타락과 징벌
- 여호야다가 죽은 이후 왕은 바알-멜칼트 제단에 동조적인 조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 그에대한 징벌로서 요아스는 모반자들의 손에의해 암살 당했다.

(2) 아마샤
① 에돔에 대한 승리
- 아마샤는 에돔에 대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② 이스라엘에게 패배함
- 에돔을 이긴 아마샤는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패하게 된다.
③ 죽 음
- 그는 라기스로 도망 쳤으나 추격당하여 그곳에서 살해 되었다.
(3) 웃시야
① 섭 정
- 52년의 통치 기간중 처음 24년은 아버지와 섭정을 하였고 마지막 12년은 아들 요담과 같이 섭정
을 하였다.
② 영토확장
- 그는 영토 확장에 있어서 여로보암과 같은 능력을 발휘 하였다.
남쪽 : 에돔을 계속 지배
동쪽 : 아람에게 예물을 받음
서쪽 : 블레셋과의 전쟁을 이김
③ 전성기
- 주전743년 까지 웃시야는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됨
(4) 요담
- 요담은 20년간 다스림
- 아하스를 섭정으로 세움
- 요담은 유다에서 4번째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왕이었다.

4. 앗수리아 점령 시기(B.C743-640, 왕하 16-21장, 대하28-33장)
(1) 아하스
- 총 28년간 다스림 ; 12년은 아버지와 같이 다스림. ; 13년은 아들 히스기야와 섭정을 함.
① 베가와 르신의 포위
- 친앗수리아 감정으로 인해 이스라엘베가와 다메섹왕 르신은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을 포위 하여
유다로 하여금 앗수리아 반역에 협조 할것을 요구함
② 종교적 결함
- 종교적으로 아하스는 바알우상을 만들고 힌놈(Hinnom) 골짜기에서 어린 아이 희생제르르 드렸으
며 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③ 군사적 실패
- 에돔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유다에서 포로를 잡아가기까지 하였다.
(2) 히스기야
① 하나님이 인정 하심
-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보실때 가장 훌륭한 왕 중의 하나였다.
- 아하스의 고의적인 우상숭배 이후 히스기야는 철저한 개혁을 단행 하였다.
- 히스기야는 유월절을 명하여 다시 지키게 하였다.
② 히스기야와 앗수리아
- 히스기야는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반 앗수리아파였다.
- 히스기야는 주전 711년에 블레셋 지역으로 들어와 당시 주도적인 블레셋도시 아스돗(Ashdod)의
반란을 진압 했다.
③ 히스기야와 산헤립
-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705-681)이 왕위에 오르자 히스기야는 동맹에 가담 했다.
-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보복에 철저히 준비를 가하였다.

④ 산헤립의 침략
- 산헤립은 주역도시 두로를 분쇄하였고 이때 동맹가운데 비블로스, 아르바드, 모압, 에돔, 암몬도
포함되었다.
- 산헤립은 또다른 주역도시 아스글론을 멸하고 이곳의왕 시드기야(Sidqia)를 앗수리아로 추방 하
였다. 지중해 연안을 지배한 산헤립이 세번째 주역도시 예루살렘을 향해 내륙으로 이동한것은
이때로 보인다.
- 산헤립의 보고 :
⇒엘테케, 딤나, 에그론 근처의 성읍 정복.
20만명이 넘는 포로포획.
히스기야의 총 46개 성읍 점령.
⑤ 히스기야의 병과 명성
-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을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로 회복 되었다.
- 바벨론 왕 므로닥 발라단의 사자들이 유다와 바벨론에게 공통된 반 앗수리아의 목적으로 예루살
렘을 방문 하였다.
(3) 선지자 이사야와 미가
① 이사야
- 히스기야갸 단독으로 다스리게 되었을때 이사야는 애굽과의 연합을 반대 하였다.
- 여기서 이사야는 거짓선지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는데 히스기야가 마음이 변하여 주전 701년의
동맹을 맺은 데에는 이들의 영향이 작용항것으로 보인다.
② 미 가
- 미가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재임동안 활동 하였다.
- 미가의 주요 메시지는 백성들의 죄악에 관한 것이었다.
(4) 므 낫 세
① 종교적 배반
- 므낫세는 종교적인 면에서 하나님앞에 악을 행하였다.
- 이에는 당시 앗수리아 종교 관습과 이전의 페니키아의 바알-멜칼트 숭배가 혼합되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② 징벌과 회개
-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징벌은 므낫세가 앗수리아 왕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형태로 오게
되었다.
- 므낫세는 포로로 있는동안 회개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결과 마침내 유다로 돌아올수
있었다.
(5) 아 몬
- 아몬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2년간 다스렸다.
- 아몬은 우상숭배를 하였으며 그의 신복들이 공보하여 그를 죽였다.

5. 바벨론의 지배(B.C640-586, 왕하 22-25장, 대하34-36장)
(1) 요 시 아
① 요시아의 개혁
- 그의 나이 26세때 요시아는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백성들에게 읽어 주게 하고 개혁
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 예루살렘 성전과 전땅으로 부터 모든 이방 제단이 제거 되었다.
- 요시아는 앗수리아의 쇠약한 시기를 이용하여 북방 이스라엘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 요시아의 개혁중 가장 중요한 면은 유월절의 준수였다.
② 요시아의 죽음
- 세계적인 발전으로 추구하고자 하였을때 그는 자기 한계를 넘어 자기 죽음을 가져오게 되었다.
- 요시아는 전략지인 므깃도에서 애굽을 막으려다 죽임을 당하였다.
(2) 7세기 선지자들
◈ 예레미야 : 우상숭배에 대한 재앙에 대해서 경고함.
◈ 스 바 냐 : 유다의 죄악에 대한 극심한 재앙을 예고.
◈ 나 훔 : 간접적으로는 니느웨의 멸망을 말하나 악을 행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
리실것이라는 내용
◈ 하 박 국 :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바벨론이 들어올것을 예고
(3) 여호아하스
- 요시아의 세 아들중 첫번째로 여호아하스가 다스렸으나 애굽왕 느고는 그의 형 엘리야김을 왕으로
대치 시키고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꿀것을 명령 하였다.
-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4) 여호야김
- 여호야김은 하나님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며 효과적인 통치도 하지 못하였다.
-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이 “나귀와 같이 매장당할것”이라고 선언 함으로서 그에대해 멸시하고 있다.
(5) 바벨론의 부상
- 주전 605년 애굽과 바벨론은 유브라데스의 칼케미쉬(Carchemish)에서 세계를 변화 시키는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 애굽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줌으로 바벨론은 새롭게 세계의 주역이 되었다.
- 주전 601년 느부갓네살은 애굽쪽으로 이동하여 그 경계에서 느고와 대전 하였다.
(6) 여호야긴과 주전 597년의 예루살렘 포획 사건
- 느부갓네살은 잠깐의 휴식후 주전 597년에 다시 돌아와 큰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 주전 598년 겨울에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을 떠났고 이달에 여호야김은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7) 시드기야와 주전 586년의 포로 사건
① 바벨론에 대한 반란
- 예루살렘안의 강력한 반바벨론파들은 반란에 대한 압력을 불어넣어 시드기야로 하여금 애굽의
도움을 요청하게 하였다.
-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라고 촉구 하였다.
- 시드기야는 반바벨론파에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사신을 보내어
유다의 충성을 표현 함으로서 훌륭한 판단을 보여 주었다.
- 그러나 5년후 시드기야는 설득을 당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애굽에게 원조를 요청 하였다.
② 예레미야가 그의 백성의 손에서 고난을 당하다.
- 이 기간동안에 예레미야는 자기동포 유다 사람의 손에서 큰 고초를 당하였다.
- 수난에도 불구 하고 예레미야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경고와 충고를 던져 주었다.
③ 예루살렘의 함락
-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성은 주전 586년 7월에 바벨론에게 함락 되었다.
- 시드기야의 아들들은 그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는 두눈을 빼앗기게 되었다.




제15장 포로기와 귀환


1. 유다말기(왕하 25:22-26, 렘40-44장)
(1) 보편적 상황
- 정복국가에서 유능한 인물을 포로로 잡아가는 수법은 바벨론 사람이 아수리아에서 본뜬 것이다.
- 유다는 바벨론의 일개 주가 되었으며 외국이 지명한 총독이 다스리게 되었다.
- 그 첫번 총독이 그달리야(Gedaliah)였으며 그는 미쓰바를 새 수도로 정하였다.
(2) 그달리야의 암살
- 그달리야는 두달동안 다스리다가 왕가의 한 사람인 이스마엘에게 암살되었다.
- 이스마엘은 암몬왕 바알리스를 배경으로 음모를 꾸며 그달리야를 죽이고 미쓰바에있는 작은
바벨론 부대와 약간의유대인 조수들을 죽였다.
(3) 예레미야가 조언을 하다
- 요하난과 그의 동료들은 예레미야에게 찾아와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구하면서 무슨 말씀을 하
든지 그대로 따르겠다고 약속하였다.
- 10일후 바벨론이 보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땅에나아 있어 애굽으로 피신 하지 말라고 경고 하였다.
(4) 애굽으로 내려감
- 많은 유다사람이 애굽 여행길에 올랐고 예레미야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따라
갔다.
- 예레미야는 이들에게 경고 하기를 하나님께 계속 불충성 하였으므로 아무도 유다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2. 바벨론 포로시기(B.C605-539)
(1) 느부갓네살
① 군사적 활동
- 느부갓네살은 전쟁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 그는 두로섬을 실제로 취하지는 못하였지만 바벨론의 종주권을 인정 받았다.
- 그는 주전 582년에 코엘레-수리아, 모압, 암몬등을 원정 하였다.
- 주전 568년 애굽을 침략 하였다.
② 건축사업
- 그는 복잡한 구조의 요새를 건축하였다.
-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미디안 왕비를 위해 느부갓네살이 테라스 위에 메달아 세운 정원이었다.
(2) 느부갓네살의 후계자
- 그의 아들 아벨-마르둑이 2년간 통치 하였다.
- 아벨-마르둑은 그의 매부 네리 글리살에 의해 살해되었고 대신 그가 주전 560년 8월 왕위에
올랐다.
- 그이 아들 라바시-마르둑이 정권을 잡았으나 몇개월후 나보디누스를 포함한 신하들에 의해 암살
되었고 나보디누스가 왕권을 잡게 되었다.
(3) 나보디누스
- 하란출신인 나보디누스는 느부갓네살이후 가장 유력한 통치자였다.
- 재임 초기에 실리시아와 수리아에 대하여 두번의 원정을 하였다.
- 나보디누스가 없는 바벨론에서는 오랫동안 연례의 새해 잔치가 중단되었다.

3. 유다의 포로생활
(1) 다 니 엘
① 다니엘의 명예
- 느부갓네살이 이 젊은 이들에게 교육을 시킨 이유는 자기 왕국의 유능한 관리로 쓸 인물을 이
가운데서 뽑고자 함이었다.
- 실제로 그는 페르시아의 120방백들을 감독하는 새 총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② 다니엘의 영향
-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높은 자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기 동포 포로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중요한 역할 을 담당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다니엘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팔레스틴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선포에도 많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2) 일반 포로들
① 숫 자
- 두번째 추방때 : 용사 7,000 , 기술자 1,000명을 포함한 10,000명이었다.
② 에스겔
- 그는 포로 가운데 하나님의 사자로서 죄를 꾸짖기도 하고 구원의 약속으로 위로를 하기도
하였다.
(3) 바벨론에서의 생활
① 조직이 유지됨
- 유다의 지방 행정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계속 활동을 했다.
-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조직도 보유 되었다.
② 이주의 자유
- 포로들은 그 땅에서 이주의 자유를 누렸다.
- 에스겔은 자기집을 소유 하면서까지 이동하였다.
③ 서신의 특권
- 유대인 들은 서신의 특권까지 누려 유다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④ 고용의 기회
- 포로들에게 고용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 느부갓네살이 포로로 선택한 사람들의 종류에서 발견된다.
⑤ 비옥한 땅에서 살다
- 많은 사람들이 그발강가에서 살았는데 이는 카바리 운하를 말하는것으로 보인다.
⑥ 계속적인 징벌
- 백성들이 그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안락한 환경ㅢ 생활에서 오는 모욕감을 견디더야 했다.

4. 페르시아 시대
(1) 바벨론 정복
① 고레스의 예비적인 승리
- 페르시아는 바벨론을 정복 함으로써 그 세력이 고조에 달했는데 이는 주로 고레스 대제에 의해
이룩 되었다.
- 세계주도권을 노리는 고레스는 북메소포타미아 건너편에 그의 군대를 진군 시키고 크로이수스와
접전하여 거의 장해를 받지 않고 진입 하였다.
② 바벨론의 함락
- 주전 539년 그는 주요 지역 바벨론으로 진군하여 이제 단독으로 겨루게 되었다.
- 결정적인 접전은 북쪽으로 티그리스강의 오피스에서 고레스가 승리를 거두었다.
(2) 페르시아의 통치자
① 캄비세스
- 캄비세스는 그의 형 스메르디스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 캄비세스의 업적으로는 주전 525년 애굽을 정복 함으로써 이미 확보된 넓은 영토를 더 추가 시
킨 일이었다.
- 캄비세스는 전 국토를 지배 하여 제국의 관구로 포함 시켰다.
② 다리오 히스타스페스
- 다리오1세는 반란을 짐압 하고 왕위를 획득하는 일에 성공하고 반란자를 사형에 처하였다.
- 다리오는 전 조직을 재조직 하는 수완을 과시 했다.
- 그러나 주전 490년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이스의 손에 모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③ 크세르크세스 1세
- 그는 바벨론을 앗수리아와 통합 시켰다.
- 그의 함대가 살라미스에서 참패를 당한후 그는 수도로 돌아와 건축 사업을 시작 하였다.
④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
- 아닥사스다의 첫번 과업은 왕위를 탐내는 모든 적수들을 없애는 일이었다.
- 이후의 통치자들역시 미약 하다가 알렉산더의 출현으로 그리이스에게 망하였다.

5. 첫번째 귀환(에스라 1-6장)
(1) 고레스 칙령
- 고레스가 그 첫해 작은 나라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 고레스 칙령의 내용
* 고레스의 비용으로 예루살렘성전 재건
* 원하는 유대인은 귀국, 남아 있는 유대인 경제적 원조를 해줄것
* 느부갓네살이 취한 금,은을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낼것.
(2) 귀 환
- 칙령이 발표된 직후 주전 538년이나 537년에 귀환이 이루어진것으로 보임.
(3) 성전 건축
① 훌륭한 시작
- 성전 건축은 그땅에도착한 직후 시작되었다.
- 첫번 순서는 기초를 다지는 것이었는데 꽤 빨리 이루어진것 같다.
- 이때에 북쪽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반대를 제기 하여 건축은 중단 되었다.
② 건축사업이 다시 시작 되다.
- 다리오 2년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는 건축활동의 재기를 촉구 하였다.
- 그해 6월에 작업이 시작 되었고 4년후 다리오 6년에 성전이 완성 되었다.

6. 두번째 귀환(에스라 7-10장)
(1) 사이 기간
- 학개 : 성전을 완성 하지 않은 백성들을 비난
- 느혜미야 : 예루살렘성을 건축 하기 위해 돌아옴
- 에스라 : 주위의 이방인들과 결혼한 백성들의 죄를 고백
(2) 왕의 조서
- 에스라 는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데려갈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 에스라의 관심과 임무는 백성들을 정신적 사회적으로 재건 시키는 일이었다.
(3) 귀환과 활약
① 여행
- 에스라는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아하바 강에 집합시켜 첫달 12일에 출발해 5월 첫날에 예루
살렘에 도착 했다.
②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
- 에스라는 도착 직후에 유대인들의 주위 백성들과의 결혼에 대해 듣고 가책을 느꼈다.
- 에스라는 고백의 기도를 드렸고 곁애 있던 사람들은 이 결혼이 취소 되어야 한다고 말 하였다.
③ 결혼을 취소 하라
- 각각의 결혼을 따로 다스리기로 하였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각각의 마을에서 임명된 판사들과
장로들이 재판을 맡기로 결정 하였다.

7. 세번째 귀환(느헤미야1-13장)
(1) 성 건축 시도의 좌절
- 느헤미야가 돌아오기 얼마전에 성건축의 시도가 좌절 된적이 한번 있다.
-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건축을 중단 하도록 요구 하였다.
(2) 느헤미야
-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궁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술잔을 올리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맡았다.
-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의 귀환과 아발나하라의 관리들에게 공문을 보내 자신의 안전통과와 건축
에 필요한 물질원조를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왕은 응낙과 동시에 여행으로 부터 느헤미야를 보호 하
기 위해 군대 장관과 마병도 공급해 주었다.
(3) 느헤미야의 성 건축
① 준 비
- 그는 정확한 상황을 파악 하기 위해 3일 이내에 밤에 몰래 나아가 성을 탐 색 하였다.
- 예루살렘과 그 주위 성읍으로 부터 일할 만한 사람들이 곧 모아 졌고 이들은 모두 구체적인 노
동 지역을 할당 받았다.
② 반 대
- 사마리아 사람 산발랏과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처음에는 단순히 반대를 하였으나 예루살렘을 공
격하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4) 총독이 된 느헤미야
① 유다의 규모
- 경계선 : 헤브론 바로위에서 동서로 그은 선
- 북쪽 경계선 : 기브온과 미쓰바를 포함
- 동쪽 : 여리고 포함
② 빚을 사면 하다
- 빚을 사면한 기록이 건축사업 이야기에 포함된것으로 보아 아마 초기에 이루어진것 같다.
③ 보안 수단
- 성과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을 도우기 위해 노래하는 사람과 다른 레위인을 뽑았다.
- 주민등록 검사로 인해 유다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얻을 수 있었다.
④ 율법의 낭독
- 느헤미야는 율법 낭독을 위해 백성들을 모이게 하고 적은 수의 분단으로 나누어 그 뜻을 설명
해 주었다.
⑤ 봉헌식
- 주전 444년 두 행렬로서 성 주위의 양쪽에서 행진하여 성전에서 함께 만나는 봉헌식을 행하였다.
(5) 느헤미야의 둘째 임기
① 개혁
-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자기가 잠깐 없는 동안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헤이해져 있는 상황을
보고 슬퍼 하였다.
- 안식일에 느헤미야는 성문을 닫고 수비대를 두어 상행위를 금지 하였다.
- 느헤미야는 또한 혼합 결혼에도 개혁을 가하였다.
② 알려져 있지 않은 기간
- 그가 적어도 주전 407년에는 유다 총독이 아니라는 증거로 엘레판틴 파피루스 사본에 이때의 총
독이 바고아스라고 나와 있다.
(6) 구약성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 그가 시대의 죄악에 대해 기록 하고 있는것은 느헤미야가 겪었던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8. 에스더 이야기(에스더1-10장)
(1) 내 용
- 이야기는 아하수에로왕 3년에서 부터 시작 된다.
- 왕후를 해임 시킨후 새왕후를 에스더로 선택한다.
- 이 일 후 하만이 모든 유대인을 죽일 공모를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고하고 에스더는
용기를 내어 왕에게 나아가 조서를 요청하게 된다.
- 하만이 참석한 특별 잔치에서 에스더는 왕에게 백성을 음모한자가 하만임을 밝히고 왕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고자 했던 나무에 하만을 처형하게 된다.
(2) 의 미
① 유대인의 수
- 이 이야기에서 자기들이 죽인 75,000명보다 더 많은것으로 보인다.
② 자 유
- 모르드개는 궁정에서 뛰어난 지위에 있었으며 에스더는 왕후가 될정도로 유대인들은 자유를 누
렸다.
③ 섭리적인 보호
- 유대인의 보호를 위해 사건들이 정확한 시간에 들어 맞았다는데에서 특히 증명되는 이 섭리는
이 이야기의 뛰어난 특징이다.
④ 부 림 절
- 하만은 유대인을 살해할 구체적인 날을 결정하기 위해 제비 뽑기를 하였다.
- 유대인에게는 이사건이 좋은 일로 바뀌었음으로 절기를 제정하고 그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9. 엘레판틴 집단
- 엘레판틴은 섬이었다. 이 섬은 첫 폭포의 하단에 위치 하며 지중해에서 남쪽으로 500마일이다.
- 이 유대인들은 이전에 바벨론을 두려워 하여 예레미야와 함께 유다에서 도망한 사람들의 후손일
것이다.
- 이 유대인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거주인들이 섬긴 다른 신의 이
름이 최소 3개나 발견되는것으로 보아 순수한 여호와 숭배는 아니었다.
- 유다에있는 유대인들과 이곳의 유대인들과는 교류가 있었다.

10. 구약 역사의 종말
- 구약성경은 느헤미야 시대 이후의 역사에 관해서 주어진 언급이 없다. 아브라함 탄생때 부터 느헤
미야 시대까지 17세기가 경과 되었다.
- 이 17세기라는 기간은 그때 그때의 목적이 시행되었음을 증언한 것이다.

- 이스라엘의 역사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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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1.09 23:41

    첫댓글 와우 목사님..이렇듯 긴글을 어찌 다 ...수고거 넘 크십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방도 찾아 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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