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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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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역사 스크랩 대왕의 꿈-태종 무열왕(김춘추)의 가계도
혜명 추천 0 조회 250 14.10.01 16: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왕의 꿈-태종 무열왕(김춘추)의 가계도

 

 

KBS 대하 드라마 '대왕의 꿈'

 

KBS 1TV에서 매주 토,일요일에 방영하는 대왕의 꿈은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생애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삼국통일 주역들의 이야기이다

 

김춘추는 삼한통일을 기획하고 신라 중흥을 실현한 주역이다.

엄격한 골품제 사화였던 산라에서 성골아 아닌 진골의 신분으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

(사실은 성골이라는 주장도 있다.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왕이 되었으로 진골이 되었다는 주장은 당연히 정치적이라는 이유)

당태종과 연개소문 텐지천황까지도 인정한, 탁월한 국제감각을 지닌 외교술의 달인.

삼국통일의 평생 동반자이자 정치 라이벌인 김유신과의 아름다운 우정 등.

몰락한 왕손에서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우뚝선 김춘추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드라마로 재현한 것이다

 

 

신라 제 29대 태종 무열왕

 

 그럼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가계는 어떠했는지 도표로 정리해 보자,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가계도

 

※ 김춘추의 아버지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동일인물로 기록되어 있고

    화랑세기에는 형제로 기록되어 있다

보종의 딸이며 김춘추의 첫번째 부인인 보라와 그의 언니 보량은 '공주'가 아닌 '궁주'로 불러야 한다

    화랑세기에는 김춘추의 첫번째 부인은 보량궁주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부(祖父)=진지왕(금륜)-(진흥왕+사도부인)의 작은 아들

조모(祖母)=사도부인-진흥왕의 황후-미실의 이모

  

친부(親父)=용수(진지왕+지도부인)의 큰 아들

양부(養父)=용춘(진지왕+지도부인)의 작은 아들

친모(親母)=천명공주-(진평왕+마야부인)의 딸

 

부인

보량궁주=첫부인(보종공+양명공주)의 딸-아이를 낳다가 죽음.

문명황후=(서현+만명부인)의 작은 딸-김유신의 누이 본명은 문희. 보량궁주가 죽고 정궁(정식 부인)이 됨

 

자식

법민, 인문, 문왕, 차득, 마득, 노단, 지경, 개원, 지소, 고타소

법민=큰아들. 문무왕(30대 왕)-부인 자의왕후

인문=둘째아들. 백제 정벌 때 신라측 최고사령관(부총관)/ 대총관(소정방)

지소= 김유신의 아내

고타소=첫부인 보량궁주의 딸. 대야성의 성주 품석의 아내

 

※ 자의왕후 =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 태어난 세째아들 구륜공의 아들 선품공의 장녀(長女). 진골.

※ 구륜공 - 신라 진흥왕 셋째 아들. 후백제 왕인 견훤() 고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나오지 않음)

※ 정명(政明) - 문무왕인 법민의 아들. 제 31대 신문왕

※ 비담 - 금륜태자와 미실 사이에서 태어남. 선덕여왕 말기 난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에게 토벌당함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

 

태종무열왕 -신라 29대 왕

김유신 - 신라의 명장

선덕여왕 - 신라 27대왕

승만왕후 - 진평왕의 후비

 

김춘추의 가문

김용춘 - 김춘추의 아버지. 진지왕과 지도부인의 아들

천명공주 - 김춘추의 어머니. 진평왕의 딸이며 선덕여왕의 사촌언니

보라공주 - 김춘추의 첫번째 부인. 미실궁주의 손녀이자 16대 풍월주 보종의 딸

문명왕후 - 김춘추의 두번째 부인. 김유신의 누이동생이며 문무왕의 어머니

보희 - 김춘추의 세번째 부인. 김유신의 첫째 누이동생. 문명왕후의 언니

 

김유신의 가문

김서현 - 김유신의 아버지

만염부인 - 김유신의 어머니. 숙흘종과 만호태후의 딸

재매부인(영모부인) - 김유신의 첫번째 부인

 

왕 실

진평왕 - 신라 26대 국왕

사도태후 - 진흥왕의 왕후이자 진평왕의 할머니

국반 갈문왕 - 진평왕의 친동생, 진덕여왕의 아버지

만호태후 - 진평왕의 어머니이며 김유신의 외할머니

마야왕후 - 진평왕의 왕후. 선덕여왕과 천명공주의 어머니

보량궁주 - 진평왕의 후비. 보라궁주의 언니로 미실궁주의 손녀이자 보종의 딸

보로전군 - 진평왕의 서자로 보량궁주의 아들

 

 정치 귀족

 알 천 - 서라벌 보수 귀족세력의 대표

 숙흘종 - 김유신의 외할아버지. 서라벌 구귀족세력의 실력자

 을 제 - 알천의 정치적 동료

 김후직 - 숙흘종의 측근 신료. 중언을 서슴치 않음

 임 종 -  서라벌 구귀족세력의 대표

 호 림 - 마야왕후의 동생. 제14대 풍월주

 염 장 - 제 17대 풍월주

 

신라 중흥 주역과 신라 인물

김흠순 - 김유신의 동생

찬 덕 - 가잠성 성주

 

귀문단

비형랑 - 진지왕과 도화녀 서이에서 출생항 유복자

길 달 - 귀문의 2인자. 비형랑에게 죽임을 당함

 

주변국의 인물

 

고구려 

연개소문 - 고구려의 재상(대막리지)으로 철혈 통치자. 

보장왕 - 고구려 제 28대 마지막 국왕

 

백 제

무 왕 - 백제 제 30대 국왕

의자왕 - 백제 제 31데 마지막 국왕. 무왕의 맏아들

 

당나라

당 태종 - 당나라 재 2대 황제

당 고종 - 당나라 제 3대 황제

소정방 - 당나라 장수

 

일 본

사이메이 - 일본 제 37대 천황

텐 지 - 일본 제 38대 천황

 

※  김춘추는 왜 진골인가?

 

 흔히 성골은 부계와 모계가 모두 순수한 왕족이고, 진골은 한쪽만이 왕족인 것으로 구별하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양계가 다 왕족인데도 진골이라 부른다. 진골로서 최초의 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진골일까?

 이유는 가야 출신인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혼인하였기 때문에 성골의 자격을 박탈당하였다는 것이다.

 

 이종욱 교수는 김춘추는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되고 진평왕이 즉위하자, 새 왕과 오촌 간이 되어

 진골로 내려앉았다고 주장한다.

 

<관련내용 보기 : 김춘추의 생부는 과연 누구인가? http://blog.daum.net/kinhj4801/15958695>

 

  ******************************************************************

 

 

비형랑(鼻荊郞)은 누구인가?

 

'대왕의 꿈' 드라마에 비형랑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어떤 인물인지 <삼국유사 기이편>에 전하는 내용을 옮겨본다

 

 

  '대왕의 꿈' 드라마에서의 비형랑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제25대 사륜왕(四輪王)의 시호(諡號)는 진지대왕(眞智大王)으로, 성(姓)은 김씨(金氏)이며 왕비(王妃)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 576,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己亥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랏사람들은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먼저 사량부(沙梁部)의 어떤 민가(民家)의 여자 하나가 얼굴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 사람들은 도화랑

(桃花郞)이라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여인은 말한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 시집가는 일은 비록 만승(萬乘)의 위엄을 가지고도 맘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한다.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여인이 대답한다. “차라리 거리에서 베임을 당하더라도 딴 데로 가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왕은 희롱으로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되겠습니다.” 왕은 그를 놓아 보냈다.

 

이 해에 왕은 폐위되고 죽었는데 그 후 2년 만에 도화랑(桃花郞)의 남편도 또한 죽었다. 10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왕은 평시(平時)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한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는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느냐”하고 딸을 왕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머무는 동안 오색구름이 집을 덮었고  방안에는 향기가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이 갑자기 사라졌으나 여인은 이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

더니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아이를 궁중에 데려다가 길렀다. 15세가 되어 집사(執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비형(鼻荊)은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놀곤 하였다. 왕은 용사(勇士) 50명을 시켜서 지

키도록 했으나 그는 언제나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가서 서쪽 황천(荒天) 언덕 위에 가서는 귀신들을 데리

고 노는 것이었다. 용사(勇士)들이 숲 속에 엎드려서 엿보았더니 귀신의 무리들이 여러 절에서 들려 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흩어져 가 버리면 비형랑(鼻荊郞)도 또한 집으로 돌아왔다.

용사들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비형을 불러서 말했다.

“네가 귀신들을 데리고 논다니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그 귀신의 무리들을 데리고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

비형랑은 명을 받아 귀신의 무리들을 시켜서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다리를 귀교(鬼橋)라

고 했다.

왕은 또 물었다.

“그들 귀신들 중에서 사람으로 출현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오도록 하라.”

 

  '대왕의 꿈' 드라마에서의 길달

 

이튿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니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는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이때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은 명령하여 길달(吉達)을 그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은 길달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門樓)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밤마다 그 문루(門樓) 위에 가서 자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 문루를 길달문(吉達門)이라고 했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을 갔다. 이에 비형은 귀신들 무리를 시켜서 잡아 죽였다. 이 때문에 귀신의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은 글을 지어 말했다.

성제(聖帝)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鼻荊郞)의 집이 바로 그곳일세.

날고 뛰는 모든 귀신의 무리, 이곳에는 아예 머물지 말라.

향속(鄕俗)에 이 글을 써붙여 귀신을 물리친다.

 

*********************************<삼국유사 기이편-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펀에서

   

 

이상이 ‘삼국유사’ 기이(紀異) ‘도화녀와 비형랑’ 편의 내용이다.

 

사실 비형은 진지왕의 서자로서 진평왕의 사촌아우가 된다. ‘삼국유사’와는 달리 진지왕이 귀신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도화와 관계하여 비형을 낳았던 것이다.

‘화랑세기’ 제13세 풍월주 김용춘(金龍春) 조에 보면 ‘서제(庶弟)인 비형랑과 함께 힘써 낭도를 모았다. 그러자 대중이 따랐고 3파가 모두 추대하고자 하였으므로, 서현랑(舒玄郞)이 위(位)를 물려주었다’고 했다.

용춘은 김용수(金龍樹)의 아우로서 진지왕과 지도부인 소생이다. 비형과는 배다른 형제다. 진지왕이 폐위될 때 어려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것을 진평왕이 대궐에서 살게 했으므로 사촌형인 진평왕을 아버지로 알고 자랐다.

진지왕의 서자인 비형도 이들 용춘 형제와 같이 진평왕에 의해 어릴 때부터 궁궐에서 자랐다. 그러니까 비형랑은 진지왕의 귀신의 아들이 아니라 폐위당해 잔명을 보존하던 그 3년 사이에 도화녀와 관계하여 낳은 자식이다.

‘삼국유사’와 ‘화랑세기’에 따르면 용춘은 진지왕이 폐위되기 1년 전인 578년에 태어났고, 비형량은 진지왕이 도화녀가 과부가 되는 2년을 기다렸다가 상관하여 태어났으니 581년생이다.

용춘이 제13세 풍월주(風月主)에 오른 때가 596년이니 용춘은 18세에 풍월주가 되고, 비형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춘을 도운 것이다.

 

이런 비형을 ‘대왕의 꿈’에서는 비적인 ‘귀문(鬼門)’의 수령으로 그렸으니 황당무계한 역사 날조요 왜곡이라고 하겠다. 사극의 역사왜곡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시청자들이 그것을 사실(史實)로 받아들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카페:'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의 평해거사님 투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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