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예찬- '침묵' 2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침묵
델포지방을 걸어가면서 P. 마티센과 그의 동행은 자신들이 그 지역에 도착한 이래 줄곧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침묵뿐이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9월 이후 우리는 아주 멀리서 들리는 단 한 번의 모터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걸 아세요? 하고 G. S. 가 내게 말한다. 정말 그렇다 이 해묵은 산 속으로는 비행기 한 대 지나간 적이 없다. 우리는 어떤 다른 세기 속으로 발 들여놓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니까 침묵은 기술이전의 어떤 경험, 모터도 자동차도 비행기도 없는 세계, 즉 다른 시간의 고고학적 유적을 가리켜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뒤로 돌아가는 느린 발걸음은 어렵고 씁쓸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몇 달 동안 내적 평화를 경험하고 나서 소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길이니까 말이다. ‘오늘 오후 베리 언덕을 따라 걸어가면서 나는 선과 침묵으로 일주일을 지낸 다음이므로 갑자기 말을 너무 많이 하거나 너무 많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했다...... 너무 급격한 심리적 파열을 방지하려면 그 번데기 상태로부터 아주 점진적으로 빠져나와서 한 마리 나비처럼 아직 축축한 날개를 고요의 볕에 말리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환경은 단순히 인간이 눈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귀로 듣는 것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침묵이 지배하는 어떤 분위기는 세계 속에 아주 특별한 하나의 차원을 열어놓는다. 여러 달 동안 절대적인 침묵 속에(가끔 개가 끝없이 짖어대는 일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예외에 속한다) 푹 빠져 지내고 나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골짜기를 향해 걸어가면서, 시간을 채근하기보다는 그 시간에 몸을 맡기고 실려 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심해의 잠수부처럼 아직 침묵 속에 잠겨 있는 여행자는 수면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회생활의 소란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기 위하여 점진적 단계적으로 떠오른다. 이렇게 되면 침묵을 추구한다는 것은 정신을 집중 시키고 분위기 속에 용하도록 이끌어주는 어떤 고즈넉한 세계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도보 여행자는 그 정일함을 즐기기 위하여 샛길로 접어든다. 침묵은 어떤 정신적 광맥과도 같은 것으로 소음은 치명적인 적이다. 침묵은 감각의 양식을 표현한다. 침묵은 개인이 귀로 듣는 것의 해석방식이며 또한 세계와의 재접촉을 위하여 자아로 되돌아오는 길이다. 그러나 때로는 상투성이나 도회의 소란을 멀리하여 스스로 그 침묵을 추구하려는 노력, 그 침묵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요구 된다.
어떤 풍경의 아름다움과 관련된 침묵은 자아에로 인도하는 길이다. 문득 시간이 정지하는 그 순간에 하나의 통로가 열리면서 인간에게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그 기회에 우리는 세상의 소란과 일상의 근심걱정으로 되돌아가기에 앞서 감각과 내적 힘을 축적한다. 들이나 수도원, 사막이나 숲, 혹은 그저 평범한 정원이나 공원의 도움으로 삶의 서로 다른 순간들에 음미 할 수 있었던 침묵의 순간들은 도시 문명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서 온갖 소음에 시달리기 이전에 누리는 원천회귀의 기회요 휴식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때의 침묵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실감케 한다. 그 침묵은 지금이 껍질을 벗는 한순간임을 말해준다. 그 껍질 벗음을 통해서 우리는 현상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게 되고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되며 내적 통일을 기하여 어려운 결단의 한 발 자국을 내 딛을 수 있게 된다. 침묵은 인간의 마음속에 돋아난 쓸데없는 곁가지들을 쳐내고 그를 다시 자유로운 상태로 되돌려 놓아 운신의 폭을 넓혀준다. 그리하여 그가 몸부림치고 있는 일터를 말끔히 청소해놓은 것이다. 주의 깊은 보행자는 침착하게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동심원들 속으로 천천히 입장한다. 그는 매순간 침묵의 두께 속에 가득히 깃들여 있는 서로 다른 소리들의 세계에 접근한다. 그는 어떤 새로운 감각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청각의 심도가 깊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지각과 관련된 센스가 생긴다는 것이다. 충분할 만큼 예민한 청각을 갖춘 사람이라면 풀이 자라고 나무의 우듬지에서 잎이 펼쳐지고 머루가 익고 수액이 천천히 올라오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흔히 소음과 분주함에 가려져서 느끼지 못했던 시간의 떨림을 다시 감지하기 시작 한다. 침묵은 계절을 탄다. 우리 고장에서는 일월의 눈에 덮인 들판 속의 침묵이 다르고 팔월의 뜨거운 햇빛에 겨워 꽃과 잎이 폭발하고 벌레들이 울어대는 한여름의 침묵이 또한 다르다. 같은 풍경 속에서도 침묵은 날마다 제각기 다른 결을 보인다.
세상에는 낯선 소리나 수다스런 말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장소들이 있다. 그런 곳에서는 사람의 개입과는 도저히 맞지 않는 어떤 위태로운 균형이 유지되고 있어서 그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걷는다. 그곳에 어울리는 것은 오로지 명상뿐이다. 숲이나 사막이나 산 혹은 바다에서는 때로 침묵이 너무나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어서 다른 감각들은 상대적으로 시효가 끝났거나 무용한 것 같이 느껴진다. 언어는 무력해져서 그 순간의 위력과 그 장소의 경건함을 표현하지 못한다. 카잔차키스는 아토스 산중에서 어떤 친구와 함께 카리에스로 인도하는 포도를 걷는다. ‘우리는 무슨 거대한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바다, 밤나무 숲, 산, 그리고 저 위에는 열린 하늘이 마치 궁륭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침묵을 깨뜨려 보려고 친구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없는 거야? 그러자 친구는 내 어깨를 가볍게 짚으면서 대답했다. - 말하고 있잖아. 천사들의 언어인 침묵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지. 그리고는 갑자기 성이 난 듯 이렇게 내뱉았다. -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어? 야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마음에 날개가 돋아나서 날아가고 싶어졌다고? 이제 천국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고? 말, 그리고 또 말! 입을 다물어야지.’
함께 나누는 침묵은 의기투합의 징표로서 공간의 고즈넉함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을 연장시켜준다. 언어는 하나가 되었던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는다. 침묵은 그 갈라짐을 막아보지만 결정적인 성공은 불가능하다. 정신집중의 노력은 말에 부딪쳐 깨어져 버린다. 주의력을 일깨우는 것이 말이므로 그 때문에 정신이 흩어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는 우리를 풍경으로부터 떼어낸다. 대화는 장소의 정령에 대한 배반인 동시에 사회규범을 만족시키는 수단이며 자신만의 황홀한 격리상태에서 빠져 나와 안도감을 느끼는 한 방식이다. 그때 감동은 판에 박힌 말로 표현되지만 사실 그 순간 그 말과 더불어 진정한 감동은 사라져버린다. 우주와의 합일되는 느낌, 일체의 경계가 사라지는 듯한 감정은 깊은 내면의 어떤 성스러움과 관련이 있는 것인데 그 성스러움은 수다스러운 것을 두려워한다. 더 할 수 없이 약한 시간의 꽃병을 깨지 않으려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 현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사회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오래 전부터'몸'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몸과 사회』『몸과 현대성의 인류학』『위험의 열정』『살아 있는 살』『고통의 인류학』『몸의 사회학』
『몸이여 안녕』등...
*김화영- 서울대 불문과 졸업. 주요 저서- 「문학 상상력의 연구 - 알베르 까뮈론」「 행복의 충격」「프랑스 문학 산책」
「 미당서정주의 시에 대하여」「바람을 담는집」「한눈팔기와 글쓰기 」「소설의 꽃과 뿌리」옮긴 책-「알베르 까뮈 전집」
「섬」 「책읽어주는 여자」... 「짧은 글 긴 침묵」「예찬」..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