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최 열전 13 린(璘 ? ~1256 8世) 정안공파
1. 최 부(崔 溥)는 고려 때 평장사 최유청의 증손자요. 평장사 당의 손자요. 이부상서 신윤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207년(희종 3 丁卯) 진사 합격 좌어사가 되었다. 1218년(고종 5 戊寅) 11월 날이 어두운데 어가가 출발하지 않으니 좌어사 최 부와 우어사 윤세유(尹世儒)가 배고품이 심하여 길가에 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다가 어가가 나옴을 알지 못하였다가 사헌부에 탄핵되어 최부는 안동도호부판관으로 윤세유는 양주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전중감으로 승진되었다. 1223년(고종 10 癸未) 6월에 우복야 유택(柳澤)이 지공거로, 전중감 최부가 동지공거로 과거시험을 보았는데 조균정(曺均正)등 29명에게 문과 명경과 3명,은사과 9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2. 최 린(崔 璘)은 고려 때 평장사 최유청의 증손자요. 평장사 당의 손자요. 이부상서 신윤(臣胤)의 2남으로 출생하였다.
최린은 재능과 도량이 넓고 속이 깊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소한 일에는 구애치 않고, 개버들 나무 아래에서 한가하게 술을 마시며, 자제들과 가깝게 놀았다. 나이가 거의 30歲에 이르러서야 분발, 독서하여
1212년(강종 1 壬申) 과거에 급제하여 대간(臺諫) 벼슬을 지냈다.
1233년(고종 20 癸巳) 최린은 사간(司諫)일 때 표(表)를 받들려서 금(金)나라에 갔는데 길이 막혀 되 돌아왔다 그 후 나주부사(羅州府使)가 되었다.
1237년(고종 24 丁酉)이 때 원율인(原栗人) 이연년(李延年)이 자칭 백적도원수(百賊都元帥)라 하고 산중의 도적들을 모아 고을고을 마다 쳐들어가 재물들을 빼앗고, 노략질하고 남의 음식을 염치없이 빼앗아 먹었다. 이를 백적의 난이라 한다.
1240년(고종 27 庚子) 그 후 최린은 지휘사 김경손(金慶孫)과 함께 이연년 무리를 격파하여 높은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중추원의 우부승선(右副承宣)의 관직을 받았다. 이 해 4월 판비서성사 송국섬(宋國蟾)을 지공거로,우부승선 최린을 동지공거로 삼아 십운시(十韻詩) 시험을 보아 이석숭(李石崇) 등 41명을 뽑았다. 그 후 추밀원사가 되었다.
1241년(고종 28 辛丑) 4월에 최린은 추밀원사 일 때 왕의 일가인 조카 영녕공(永寧公) 준(綧)이 몽고로 들아가 독로화(禿魯花)가 되었는데 공이 같이 들어갔다.
1243년(고종 30년 癸卯) 1월 추밀원사 최린과 비서소감 김지대(金之垈) 등을 몽고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었다. 이 해 6월 우승선 조백기(趙佰琪)가 지공거, 추밀원 부사 최린이 동지공거가 되어 시(詩), 부(賻) 시험으로 한경(韓璟) 등 20명과 10운시 시험으로 60명과 명경(明經)시험으로 2명을 뽑았다.
최린은 누차 승진되어 중서문하성의 참지정사로 임명 되었다. 이때 몽고의 대군이 침입하였다. 왕이 친히 몽고의 사신을 맞은 뒤로는 몽고 군사가 조금 물러갔으나, 국경을 완전히 넘어가지 앉자. 재추(宰樞)들이 왕자 창(昌)을 보내어 회군하기를 빌자고 청하였으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참지정사 최린이 혼자 왕 앞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아들을 사랑하는 정은 귀천이 없이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들과 사별한 자도 있는데, 전하는 어째서 한 아들을 아끼십니까? 지금 남아 있는 백성들은 열에 두셋밖에 안됩니다. 몽고 군사가 돌아가지 않으면 백성들은 농사철을 놓치어 모두 저쪽 편에 투강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강화(江華) 하나를 지킨다 하더라도 어찌 나라 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할 수 없이 승락하고 최린으로 하여금 昌을 따라가게 하였다.
昌이 몽고에 이르자 준(綧)과 친 동생이라 해서 몽주가 심히 후하게 예우하였는데, 민칭(閔稱)이란 자가 이를 시기(猜忌)하여 몽주에게 준은 왕의 친자가 아니라고 일러바쳤다. 몽주가 준에게,
"네가 전에 王子라고 했는데 어찐 일이냐?" 하니 준은 답하여 아뢰었다.
"臣은 어려서부터 宮中에서 자라나, 王을 아버지라 하고, 王后를 어머나라 하였으므로 臣이 친아들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여기 와있는 使臣 최린은 전날 臣을 인솔해 와서 人質로 맡긴 자이오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몽주가 다시 최린에게 물으니,린은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愛子와 親子와 어떻게 다르냐?. 하고 묻자, 최린은 대답하였다. " 愛子라는 것은 남의 아들을 길러서 자기 아들을 삼은 것입니다. 만일 所生子일 것 같으면 어찌 다시 愛라고 일컫겠습니까/ 먼저 올린 表文을 징험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몽주가 전날의 표문을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니 과연 그러하기에 이문제를 불문에 붙였다. 최린은 여러번 몽고 사신으로 가서 재주가 있어지혜롭게 문제를 처리하여 외교에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재걸(才傑)이라 하였다.
최린은 사신으로 몽고에 다녀와서 중서문하성의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두 번의 지공거로 임명되어 많은 인재를 얻었다는 칭찬을 받았다.
1256년(고종 43 丙辰) 9월에 돌아갔다. 문경(文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부인은 군대부인 여흥민씨이다.
최린은 죽음에 임하여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많은 너희들이 오랑케 무리들에게 죽을 것이다." 과연 후일에
아들과 어머니 등 온 가족이 몽고병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평장사 최린은 문관과 무관을 겸비하였으며, 국가에 어떤 일이라도 재주가 있어 지혜롭게 해결하고, 문제를 해결하면 벼슬에 올라가곤 하여 世人들이 최린을 일컬어 벼슬을 얻는 재주꾼이라 하여 득사(得士)라 불렀다.또 가족의 장래의 운명을 사전에 알고 있는 先見之明이 있는 큰 인물이었으며, 당대의 위대한 인물이었다.
전중감 최부(崔溥), 평장사 최린, 평장사 최징(崔澄), 호부상서 최황(崔湟) 등 4형제다.
3. 평장사 최징(8世)은 평장사를 지낸 최당의 손자이며, 이부상서 최신윤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한림학사 승지.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 판호부사. 문하평장사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부인은 군대부인 파평윤씨이고, 아들은 이부시랑 최충약(崔沖若)과 삼중대광 판도사 최유(崔濡) 두형제를 두었다. 딸의 남편은 첨의중찬 남양 허공(許珙)이다.
(1) 최충약(9世)은 평장사 최당의 손자이며, 평장사 최징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최충약은 녹사, 비서랑, 이부시랑을 역임하였다. 1265년(원종 6 乙丑) 3월에 장군 오수산(吳壽山)을 만나 채찍을 갈기니 최충약이 말에서 떨어졌다. 장군 오수산이 말을 돌려서 밟아 죽이려 하니 대장군 박기(朴琪)가 구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일찍이 기준이 부(府)를 열때에 오수산이 그 친척 주연(朱然)을 부의 녹사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지주사(知奏事) 유천우가 최충약을 임명하였다. 그런고로 오수산이 충약을 미워하여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2) 최유(9世)는 평장사 최당의 손자이며, 평장사 최징의 2남으로 출생하였다. 초명은 충소(沖紹)이다.
1286년(충열왕 12 丙戌) 10월 찬성사 한강(韓康)이 지공거, 국자제주 이익뱌(李益培)가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았는데 최유 또는 이부(李榑) 등 31명이 진사에 합격하였다.
1288년(충열왕 14 戊子) 회원방어사(會源防護使)가 되다.
1297년(충열왕 23 丁酉) 부지밀직사가 되다.
1298년(충열왕 24 戊戌)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와 중경유수(中京留守)가 되다. 이 때 어떤 사람이 익명서(匿名書)를 궁궐문에 붙이기를 최유의 장인인 조인규(趙仁奎)의 아내가 귀신과 무당을 섬기며 저주(咀呪)하여 왕으로 하여금 공주를 사랑하지않고, 그 딸만 사랑을 쏟게 하였다고 하여 공주가 조인규와 그의 아내를 옥에 가두었다. 최유가 첨의찬성사가 되어 공창(鞏昌)에서 조사한 후 무죄로 드러나 모두 집으로 돌려 보냈다.
1307년(충열왕 33 丁未) 판판도사사(判判圖司事)가 되다. 그 해 3월에 여러 재신과 왕과 같이 삼교업(三敎業)에 대하여 함께 의논하였다. 또한 무관의 과의사(果毅事)의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었다.
1313년(충선왕 5 癸丑) 실성수절 광보공신(室誠守節 匡輔功臣)에 봉하고, 삼중대광, 철원군에 봉하다. 부인은 평양 국대부인 평양조씨이다. 친정 아버지는 도참의사사 조인규이다.
아들은 최광(崔廣 10世 봉상대부전의부령)이다. 손자는 최맹손(崔孟孫 11世 추성익재공신 광정대부밀직제학판개성부사진현관태학사지서천사철원군)과 최중손(崔仲孫 11世 밀직사 부사) 형제이다. 증손자는 최수염(崔守廉 12世 봉익대부판사재사의 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