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1: 1 - 2: 1 호세아의 예언과 성취
천사무엘 (한남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구약학)
결혼에 실패한 예언자. 아내가 도망가 버린 예언자. 다른 남자의 품으로 달아난 아내를 다시 찾아 용서한 예언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예언자. 호세아서를 이해하려면, 바로 이러한 예언자의 아픔과 말씀에 대한 열정을 알아야 한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출신의 유일한 문서예언자로, 주전 8세기 북왕국에서 활동했다. 그의 이름이 제목으로 되어 있는 호세아서는 12권의 소예언서 중 맨 처음에 놓여 있지만, 연대기적으로는 아모스에 이어 두 번째다. 호세아서의 앞부분을 차지하는 본문(1:1-2:1)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①1:1 ② 1:2-9 ③1:10-2:1이다.
1. 말씀과 상황(호 1:1)
(1) 호세아의 시대
호세아 1장 1절에는 다섯 명의 왕들이 호세아 시대의 통치자들로 언급되어 있다. 이들 중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여로보암 2세)만 북이스라엘의 왕이고 나머지는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남유다의 왕들이다. 남유다의 네 왕들의 통치기간을 모두 더하면 86년(783-697)이고,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간은 40년(786-746)이다. 호세아가 거의 90년 동안 예언활동을 했다고 보기 어렵고 또한 그의 예언의 내용으로 보아, 그의 활동기간은 주전 752년경부터 주전 722년 직후까지 약 30년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왜 이 기간 동안의 북이스라엘 왕들 중 여로보암 2세만 언급하고 다른 왕들은 열거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야기되는데, 이에 대한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는, 여로보암 2세 이후 약 12년 간 북이스라엘은 정변으로 인하여 왕이 6명이나 바뀌었는데, 이러한 왕들을 언급할 가치가 없어서 생략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히브리어 원문에는 1절 하반절이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것을 2절 상반절에 있는 "야웨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처음 임할 때"라는 말과 함께 번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던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처음으로 임했다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아무튼 호세아의 예언활동 기간은 여로보암 이세의 통치 후반기부터 사마리아의 멸망 직전 혹은 직후까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세아가 예언활동을 시작하던 여로보암 2세 때의 북이스라엘은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던 시대로, 정치적, 경제적, 물질적인 면에서 매우 안정되고 풍요로웠다. 그러나 종교적, 도덕적, 윤리적으로는 문제가 있었다. 야웨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백성들은 바알신을 비롯한 이방신 숭배에 빠져 있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 바알종교와 야웨종교는 극도로 혼합되어 있었고, 제사장들도 타락하여 오히려 종교혼합을 조장하고 성직자로서의 임무와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성도덕이 문란하였으며 가난한 자들이 무시되고 인권이 유린되었다. 사회적으로도 부정과 부패가 팽배하여 정의와 사랑이 없었다. 또한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국내정치는 불안해져 정변이 계속되었고, 국외적으로는 동쪽의 앗시리아 제국의 티글랏빌레셀 3세(주전 745-727년, 성경에서는 그를 불이라고 부른다: 왕하 15:19-20, 29; 16:5-18)가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침공, 약탈하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한마디로 북이스라엘은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 물질만능주의에 도취되어 패망을 느끼지 못하는 백성! 물질은 풍부하나 신앙은 잃어버린 사람들! 호세아는 예언자로서 국가의 임박한 멸망을 직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2) 표제의 의미
호세아 1장 1절은 호세아서 전체에 대한 표제이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내용의 표제를 다른 소예언서들의 서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욜 1:1; 욘 1:1; 습 1:1; 슥 1:1). 이 표제는 호세아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첫째로, 본문은 호세아서를 가리켜 "호세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것은 호세아서를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으라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왕들을 열거하면서 예언활동의 구체적 시기를 밝힌 것은 호세아의 예언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선포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인 사람을 통하여,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대상을 상대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의 역사를 가능한 한 자세히 알아야 하고, 그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호세아서를 읽을 때, 그의 예언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이 말씀은 호세아 시대의 말씀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바울이 말한 것처럼(갈 3:29), 이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통한 신앙의 유산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과 결합시킬 때, 구원에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히 4:2-3).
2. 호세아의 가정(호 1:2-9)
본문은 호세아의 가정생활에 관한 이야기이다. 호세아가 예언활동을 시작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라고 말씀하셨다. 결혼은 분명 기쁘고 즐거운 일이지만, 호세아의 결혼에는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은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으셨지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음란한 여인이란 직업적인 창녀라기보다는, 오히려 바람을 피울 수 있고 가정에 충실하지 않을 수 있는, 행실이 부도덕한 여인을 의미한다(잠 7장 참조).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런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까지 낳으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에서 음란한 자식들이란 천성적으로 음란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음란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호세아는 왜 이러한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그 이유를 이스라엘 땅에 속한 백성들의 음란죄가 갈 때까지 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호세아를 징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된 모습을 나타내어 저들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충실한 아내가 되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성실한 남편인 야웨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비롯한 이방신들을 섬기는 음란의 죄를 범했는데, 그러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남편과 아내된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호세아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한마디로 순종이었다. 그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맞아들여 이남 일녀를 낳았다. 첫 번째 자녀는 아들이었는데, 그가 태어나자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도시와 평야의 이름인 이스르엘이라 지으라고 명하셨다. 이 명령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이것은 이 작명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첫째 이유는 예후가 이스르엘에서 오므리 왕조를 멸망시킨 것처럼, 이제 하나님께서 여로보암 2세가 속해 있던 예후 왕조를 그와 같이 멸망시키려고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이스르엘 평야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어 패배하게 하실 것을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셋째 이유는 이스라엘 왕국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멸망시키시기로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세 가지 계획, 즉 예후왕조의 멸망, 전쟁에서의 패배, 이스라엘의 패망은 얼마 있지 않아 호세아의 예언대로 실행되었다. 먼저,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는 왕이 된지 6개월만에 살룸의 혁명에 의하여 백성들의 목전에서 살해되었고, 예후왕조는 끝이 났다(왕하 15:8). 오므리 왕조처럼, 예후왕조도 피의 혁명에 의하여 막을 내렸던 것이다. 둘째로, 이스라엘 왕국은 호세아의 예언이 있은지 약 30년 후, 앗시리아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왕하 18:9). 셋째로, 이스라엘은 주전 733년 앗시리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스르엘 지역을 포함한 갈릴리 지역을 빼앗겼다.
호세아의 두 번째 자녀는 딸이었다. 첫째 아이처럼, 이 아이의 이름도 하나님께서 지어 주셨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로루하마였다. 그러나 이것은 로루하마가 앞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북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이 이름은 남유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유다의 구원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사용된 활, 칼, 전쟁, 군마, 군마병 등 물질적인 힘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한 것이었다. 실제로,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멸망했지만, 남유다는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도 앗시리아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로루하마가 젖을 뗀 후에 고멜은 또 잉태하여 세 번째 아이를 낳았다. 그는 아들이었는데, 하나님은 역시 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 로암미! 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이름 역시 이 아이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패역한 백성들이 그러하다는 것을 상징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야웨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호세아의 예언은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맺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에 체결된 계약이 파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을 때,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자기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신이 되겠다고 하셨다(출 6:7; 레 26:12; 신 27:9).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이제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므로, 그 계약은 파기되었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구원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계약파기의 원인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있었던 것이다.
호세아의 언행일치된 예언과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호세아의 가정을 통해서 볼 수 있도록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를 깨닫기를 원하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는 것처럼, 본문에 나타난 호세아의 가정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 상징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했지만….
3. 이스라엘의 회복(호 1:10-2:1)
1장 2-9절에 있는 심판의 메시지와는 달리, 1장 10절-2장 1절은 앞으로 다가올 구원의 날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회복될지를 말씀하고 있다. 구원의 날에 실현될 첫 번째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인 앗시리아의 침략전쟁과 나라의 패망으로 인하여 많은 숫자가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고, 이스라엘 땅을 떠나야 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인구는 매우 감소했다. 그러나 호세아의 예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미래에는 그들의 수가 많아져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게 된다고 한다(창 13:16; 왕상 4:20 참조).
두 번째 구원의 약속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진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이 구원의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암미)으로 불리워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루하마)라 칭하여지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약속은 남북으로 갈라졌던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적 죽음인 나라의 패망에서 소생되고, 서로 하나가 되어 한 통치자를 세운다는 것이다. 여기에서(11절) 새 통일왕국을 이끌어 갈 새로운 민족의 지도자를 왕이라 칭하지 않고 단순히 "통치자" 혹은 "우두머리"라 부르고 있다. 이것은 과거에 백성들을 잘못 이끌었던 왕과는 다른 새로운 지도자, 즉 민족을 구원의 길로 이끌 지도자를 의미한다. 또한 "그 땅에서부터 올라온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포로로 있던 땅에서 돌아온다"와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 즉 땅에서 소생한다"(겔 37:12-14)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패망한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새로 세워지는 이스라엘 왕국은 분열이 없고 연합이 있으며, 멸망과 죽음이 없고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 약속은 이스르엘의 날이 창대하리라는 것이다. 즉, 그날은 이제 멸망의 날이 아니라, 승리의 날이요 민족적 번영이 성취되는 구원의 날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본문은 북이스라엘의 패망을 앞두고 호세아가 선포한 예언이다. 이것은 구원의 메시지로 이스라엘이 패망한 후,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호세아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에 이어지는 것은 구원의 날인데, 그 날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번성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움을 받으며, 한 통치자를 중심으로 한 나라를 세우고, 평화와 번영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 구원의 날은 과거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때요, 의인들만이 희망할 수 있는 미래이다.
이 희망의 미래는 호세아 시대 이후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성취되었는가?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그 성취를 찾아야 하는가? 신약을 가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언의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찾는다. 바울의 지적처럼(롬 9:25-26), 그리스도의 사역은 호세아의 예언의 성취를 의미한다.
본문에 나타난 구원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었다(마 4:15-17).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이스라엘이 되었다(갈 3:29). 그리하여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백성(암미)이라 불리어지고 새 계약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루하마)로 죄 사함을 얻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 통치자 예수를 중심으로, 교회라는 새 이스라엘 공동체 왕국을 세웠으며, 이를 통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또한 새 이스라엘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성령을 통하여 오늘도 창대하게 되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의 예언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지적처럼, 이스라엘의 회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롬 10:1; 11:26). 그리고 요한 계시록의 환상처럼,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그리스도를 통치자로 모신 때가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했기 때문이다(계 7:9). 그러므로 새 이스라엘로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호세아의 예언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계 21:1),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호세아
호세아( )란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의 말기(B.C. 750년경)부터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된 B.C. 722년 이후까지 활동했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미묘하여서 막강한 부를 이루었던 여로보암 2세가 죽자 계속된 왕위 찬탈로 인해 급격히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모스 선지자가 선포했던 것 처럼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심히 부패하여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을 호세아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고질적으로 앓고 있던 병인 우상숭배가 마침내 그 도가 지나쳤고, 그동안 하나님은 여러 차례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아모스를 통하여 회개하고 돌아설 것을 경고했으나 이스라엘은 더욱 패역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형식적인 하나님께 대한 예배마저도 잊어버리고 우상에 깊이 빠져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변질되고야 말았습니다.
(4:11-14). 이처럼 여호와 좇기를 그치자(4:10) 하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택하시어 최후의 경고를 선포하십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1:9).
1.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왕국을 건설한 것은 솔로몬이 나이 많아지자 외국과 맺은 정략결혼으로 혼인한 처첩들의 우상예배에 참여하면서부터였습니다.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왕상11:4-11)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10지파를 떼어 여로보암에게 주어 이스라엘왕국을 건설하도록 하셨습니다(왕상 12:20).
이처럼 하나님께서 유다에게서 이스라엘을 떼어내 새 나라를 만드시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운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참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정치적인 이유로 자기의 지위가 확고하지 않음을 염려하여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도록 하였습니다(왕상 12:25-33). 하나님은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왕상 14:9)고 책망하시면서 철저하게 여로보암을 쳐 멸절시키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왕상 14:9-16).
그러나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이스라엘 왕들은 한결같이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아합은 여호와의 단을 헐고 바알과 아세라 산당을 세우고 제사장들을 세웠습니다(왕상 16:30-33). 그 후 이스라엘은 심각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1:2).
끝내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바라며 의뢰하는 삶을 얻지 못하고 배역하고 맙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4:6)고 저주하시며 지상에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제거해 버리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화 있을찐저 저희가 나를 떠나 그릇갔음이니라 패망할찐저 저희가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저희를 구속하려 하나 저희가 나를 거스려 거짓을 말하고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7:13-14).
결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되고 말 것이라고 호세아는 선포합니다(8:8).
2. 이스라엘의 멸망이 주는 교훈
점차 패역해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 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이스라엘 열 지파의 대표)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11:1-4).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애굽을 동경하면서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앗수르에게 이스라엘을 넘기기로 하셨던 것입니다(11:5-7). 그렇지만 하나님은 결단코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함께 멸망된 도시임; 참고 신 29:23)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11:8).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마치 호세아가 고멜의 돌아옴을 기다리며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3:3)고 했던 것 처럼 이스라엘이 이제라도 하나님께 돌아설 것을 오래도록 기다려 오셨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6:1-3).
하나님은 결단코 그의 백성을 버리시질 않습니다. 아무리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패역하고 하나님을 거역할지라도 어느 때든지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 자기들 갈길로 내닫기만 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누구를 위해 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분명한데도 도무지 하나님을 찾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불안하면 애굽을 향하여 도와달라 하고(왕하 17:4), 그것도 안될 것 같으면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쳐서라도 이스라엘을 지키려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지키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의 주인이신 하나님 보다는 이방을 의뢰하고자 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그들을 책망합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저희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7:10). 그처럼 핍절한 상태가 되도록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도무지 돌아설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처럼 철두철미하게 내던져 버린 민족은 역사상에 이스라엘 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부패한 모습이 얼마나 악독한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한 번 죄로 인하여 부패한 인간의 심성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회유하시고 기다리시고 심지어는 매로 때려서라도 회개할 것을 촉구함에도 불구하고, 결단코그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 타락한 인간성의 본연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무리 애써도 돌이키지 아니하고 자기의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것이 부패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순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사악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있으면서도 거역할 정도로 우매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간성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그 역사적 증표가 곧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사랑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의 한계 안에 있는 이스라엘은 마침내 멸절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구원을 얻을 뿐입니다.
3. 새 인간성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이스라엘의 철저한 파괴는 마치 요나가 경험한 스올의 경험과 같이 살벌한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B.C. 722년 역사상에서 영원히 감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댓가이며 부패된 인간성의 종국이 곧 심판과 죽음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스올의 죽음 속에서 깊이 침잠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일하시고 계셨습니다. 마치 깊음의 혼돈 가운데서 빛을 창조하시던 것 처럼 죽음과 같은 흑암 속에 버려진 이스라엘을 전혀 새로운 존재로 재창조하시고 있었습니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13:14)는 하나님의 선포는 진정참 생명의 주인이 누구이신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14:4)는 말씀은 이제 새롭게 태어날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았던 죄수에게 최종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과 같습니다. 다시는 이스라엘의 죄를 힐문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철저하게 새롭게 지으시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심으로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은 죽음 아래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처럼 수 없이 회개하고 돌아설 것을 촉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한 댓가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이 갑자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본래 우리들도 이스라엘과 같이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벽하게 단절된 상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느날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존재로 바뀐 것 뿐입니다. 우리가 애써 새 생명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는 말씀과 같이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증표까지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어느날 그 증표를 손에 쥐고 나서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는 천군 천사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사단이 꿈도 꾸지 못할 기묘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 죽음의 댓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서(구속) 새 생명(구원)을 주실지를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것을 가리켜 바울 사도는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엡 3:9)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창 1:26). 그 형상이 인간성의 부패로 인하여 사라지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형상이 아닌 직접 하나님 본체이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혼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육신의 이스라엘을 멸절시키시고 신령한 이스라엘을 새롭게 건설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곧 새로운 인간성의 창조이며 죽음으로써 죽음을 초월하게 하시는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권능인 것입니다(롬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