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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순의 수필 세계
- 그리움과 추억이 교직된 삶 속, 감동의 사연들-
권대근
(수필비평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수필은 인간 삶의 역정을 바탕으로, 그것이 지닌 가치와 진실을 구현해내는 문학이다. 인생에 대한 해석이 드러나는 문학형태인 것이다. 한마디로 이운순의 수필은 ‘정의 문학’이다. 정이란 인간의 영혼이 응결된 심성의 꽃이다. 맑은 영혼을 드러내는 투박한 그릇이요, 풋풋한 향기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감동성, 그것이 없는 수필은 이미 수필이 아니다. 문학은 삶에 대한 절실한 바람에서 꽃핀다. 단순히 자기를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삶의 중심을 파고 들 때, 진정한 문학에 값할 수 있음이다. 수필 속에 물상보다 이웃 사람과 나눈 따스한 교감을 더 많이 다루고 있다는 것은 이운순 작가가 삶의 현장에서 유난히도 사람을 사랑한다는 증거다. 그녀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추억임을 말하고 있는 휴머니스트 작가라 하겠다. 추억이 향기를 내고 있다는 것이 이운순 수필의 특징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향기가 없으면 생명이 없는 조화나 다름없다. 꽃도 향기를 갖고 있고, 사람도 그 나름의 향기를 낸다. 그녀의 수필에 있어서 추억이 매력적 요소라면, 인연은 절대적 요소라 하겠다. 추억이 인과관계없이 발생하는 필연성에 대한 대립개념이라면, 인연은 인과관계를 전제로 한 필연성의 등가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이운순은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인정을 수필나무로 키우는 정원사다. 인간관계에서 호감이나 친밀감은 기본적으로 인정을 발생시키고, 인정은 보다 구체적인 질적 관계로 발전하여 사랑을 생성한다. 인정은 사람으로서 주고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애로서 폭넓은 윤리적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 책에 실린 수필은 한결같이 자연의 빛깔과 인정의 향기가 내면을 촉촉이 적시는 정감의 세계를 향하고 있기에 감동을 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녀의 수필은 인연의 소중함 그리고 모성과 추억을 청량한 눈과 마음으로 그린 글로서한마디로 그 출발선이 그리움의 고백에 있다고 하겠다.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의 내면에 머문다. 주로 자신의 심중에서 여울치는 물결의 무늬를 그려내는 일에 몰두한다. 그녀의 문학적 그림자 형상은 '그리움'이다. 작가적 현실 세계가 삶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키를 틀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문학적 향기를 발산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포근하고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의식의 산실이었던 유년기 속에 있는 흑백 사진처럼 아련히 남아있는 인정을 오늘날의 건조한 풍요와 대비해 촉촉한 모습으로 구체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다소 안정된 공간에서 이운순이 마주하는 수필적 공간은 인정과 애환을 담은 애련한 사진으로 인식된다. 하늘을 안고 들어온 햇살이 모인 과거의 모습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운순의 작품은 크게 세 가지의 주제 범주를 갖는다. 첫째 범주는 이운순 수필의 거대한 물줄기로써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역사적 환경 속에서의 바람직한 삶을 위한 지향의식과 관련된다. 구체적으로는 이웃 사람들과 인연의 소중함에서 얻은 삶의 지혜를 담고 있는 글이고, 두 번째 부류는 수평적이고 당대적인 울림을 창조하는 모성적 그리움과 진한 가족 사랑을 담고 있는 글들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부류다. 본성 차원에서의 인간 존재해명의 문제를 천착하는 것으로서, 시간적 관성을 창조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지적 욕망의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자기실현의 모습을 담은 수필들이라 하겠다.
II. 이운순의 수필 세계
1. 인연 자락에 핀 추억의 노래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을 유감없이 기술할 수 있는 글이다. 이운순의 수필은 이러한 고유 영역과 특성을 제대로 살렸기에 향기를 지닌다고 하겠다. 수필을 인간학이라 부르는 소이도 수필의 내용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현대는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좌충우돌하지만,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학이 문학만을 위한 작업에만 충실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운순 수필가는 인간애의 정신을 수필적 주제로 그려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인연의 소중함과 만남의 축복이다. 이운순이 인정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있는 것은 그녀가 누구보다도 가슴 따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수필은 사람이면 가져야 할 인간적인 자세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해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 더하여 이운순 수필들이 함축하고 있는 감성의 세계는 탁월해서 금상첨화다. 이런 함축적 감성과 문장은 작가의 조용한 성품과 품격을 보여주기에 적절하다고 하겠다.
오늘의 만남을 위해 여름휴가를 기다려 왔다는 그 아이, ‘설 명절 추석 명절’ 휴가는 당연히 고향의 노모와 선산을 찾는 일정으로 획일화되어있지만 여름휴가야말로 진정한 휴가의 의미 아닌가.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처럼 휴식 같은 휴가를 기다렸을 이질부를 생각하면 좀체 미안한 맘이다. 일주일의 휴가 중 삼일은 아내를 위해, 그리고 마지막 삼일은 어머니를 위해 가는 길, 그 남은 날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찾아온 조카로 인해 외숙들도 이모도 모처럼 여유롭고 느슨하고 온전한 추억의 시간을 보냈다. ‘동상이몽’이라는 옛말처럼 모두가 꿈꾸는 획일적인 휴가를 거부하고 그리움이 내재한 감성 여행길을 택했던 그 아이의 오늘이 먼먼 후일의 귀착점이 바로 오늘이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귀착점> 중에서 -
위의 작품은 영역으로 번역된 작품으로, 큰언니 셋째 아들의 외가나들이에 대한 소회를 적은 글이다. ‘귀착점’은 그의 삶을 이끄는 철학이자, 그 나름의 바람직한 인간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바람직한 인간상은 이 수필의 지향적 목표라는 점에서 주제적 가치를 지닌다. 작가의 말처럼 ‘추억을 곱씹고 살아간다고 삶이 퇴보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같이 각박한 세태에서 추억은 긍정적 기운과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리움이 내재한 감정여행 속에서 추억바라기는 한 편의 흑백 영화를 보는 듯하다. 삼겹살과 약간의 전 그리고 몇 순배의 술이 돌자, 모두가 추억의 길을 따라 나서고, 가족들간 적조했던 시간은 이미 사라지고 만다. ‘무수한 별과 매캐한 모깃불’의 의미는 외가의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상징이다. 작가는 전개부 첫 마디를 ‘외가에 대한 향수를 갖는 이는 많다’라고 적었다. ‘잘그랑’ 워낭소리가 들리는 외양간 풍경 하나면 족하다. ‘워낭소리’가 인정의 상징임을 짐작케 한다. 인정을 베푼 경험의 기억보다 인정을 받은 흔적을 남기는 일은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녀가 우리 기억의 한켠에 속해 있는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자리했던 인정의 샘물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추억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적 특성을 의미화하는 작가의 문장이 담백하고 소박해서 좋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사건은 오라비가 군에 간 사이 남동생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펴 통기타 하나를 장만하기에 이른다. 아버지는 어쩐 일로 강경하게 못 하시고 모르는 체 묵인하셨는데 아마도 당신이 쉰 넘어 보신 막내에 대한 애틋함에 딱 한 번 너그러우셨던 것 같다.’‘밤이 이슥하도록 술잔을 기울이고 앞서 했던 말 처음인 듯 또다시 풀어내도 다시 들어주고 또 웃어준다. 추억의 길을 따라 찾아온 곳에 하얀 머릿수건을 쓰신 외할머니가 주름진 얼굴로 웃고 있고, 밤새 두들겨대던 기타 소리, 함께 부르던 노래 한 소절에도 이모가 떠올라 가끔 눈자위가 붉어진다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 온다.’라는 진술은 작가의 문학적 역량을 보여주는 예다. 그녀는 추억바라기를 통해 인정을 잃어버린 시대, 현대인들에게 추억의 가치를 전해주고자 한다. ‘동상이몽’이라는 옛말처럼 모두가 꿈꾸는 획일적인 휴가를 거부하고 그리움이 내재한 감성 여행길을 택했던 그 아이의 오늘이 먼먼 후일의 귀착점이 바로 오늘이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작가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추억의 길’을 독자들이 잘 걸어가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작가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무가 아니겠는가.
아이가 좀 진정이 되었던지, 우리를 한 번도 잊은 적 없다고 힘주어 말하며 “전요 아직 아저씨 이름이랑 애들이랑 다 기억해요.” 그간에 안부를 조심스레 묻자 서둘러 할머니를 깨우는 소리가 난다. ‘아! 다행이다. 아직 정정 하시구나.’ 수화기 저쪽 너머에서 소현의 짧은 설명이 들리고 이내 들리는 아주머니의 음성,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 음성에서 여전한 힘이 느껴진다. 우리가 시내로 이사를 했다는 잘못된 정보와 너무 변해버린 이 지역의 특성상 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단다. 그간 애타게 그리워한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던가 보다. 지나간 날들의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그 그리움의 끝에 비로소 만난 목소리가 그저 꿈만 같다.
- <그리움도 때론> 중에서 -
이 작품에서 생성되는 미의식의 정체는 무엇일까? 작가와 소현에게서 공통적으로 인식되는 미감은 품격미다. 이는 소현의 전화를 연민과 고마움으로 인식하는 작가의 성품에서 확인된다. 사람은 평생 동안 끊임없이 방황을 거듭하고 뒤척이며 산다. 그것은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찾아 헤매는 일종의 순례일 수 있다. 그리움이 형상화된 이 수필 <그리움도 때론>은 찬란하고 정결한 정신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이 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억의 뿌리를 움켜쥐고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잊고 있던, 기억 저 편의 모습을 드러내는 여러 일들을 서정어린 감성으로 펼쳐보일 수 있는 것이 이운순 수필이 갖는 매력이다. 이 작품 역시 그리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극적인 전화통화는 양자의 입장에서 일생 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서로에 대한 예의이자 가장 격조있는 또 하나의 해후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수필의 문학적 향취는 실감나는 회화체를 통한 체험의 구체화에서 풍겨난다.
문학의 감동이란 결국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그것이 연상과 상상의 작용으로 이미지화 될 때, 문학적 감동이 찾아드는 것이다.‘신호가 간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너무 늦은 시간인 걸까. 그만 수화기를 내려놓을까.’ 찰나에도 여러 생각이 스친다. 순간, 신호가 멈췄다. “여보세요” 다소 긴장 어린 그 아이의 음성이다. “소현아?” 나는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그 이름을 불렀다.’는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소현이는 작가의 삶에 늘 그렇게 따라다녔다. 이 정도면, 이 작품의 마지막 멘트, ‘기다림이 이토록 달콤한가를 느끼는 게 얼마 만인가. 이 또한 그분들이 내게 주는 선물이며 기쁨이라고 믿는다.’는진술에 힘이 실린다.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인용된 예문을 읽으면, 작가에게 있어, 추억은 그리움이고, 삶의 동반자임을 알 수 있다. ‘잠시 스친 인연에 불과하지만 그 아이가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겠다.’는표현 역시 인연에 인정을 담는 것으로써, 작가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는 전화기소리를 물꼬로 인연의 소중한 가치를 연출하는 솜씨가 보통이 넘는다.
사랑하는 남편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한 여인이 겪은 전쟁의 상흔은 그렇게 가혹하고도 냉정했다. 무심한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어느 사이에 그렇게 남의 집 첩살이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자신이 선택했다기보다 선택되어진 첩살이, 아들을 낳기 위한 한 남자의 강제적인 취함에 있어, 이미 첫 번째 결혼으로 딸아이를 두었던 그녀는 그런 치욕적이고 강제적인 순간에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던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신학문을 접했다고는 해도 조선의 유교관습을 그대로 지닌 그녀에게 닥친 일들은 그녀를 온전한 맨정신으로 아파하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그녀는 정신을 놓고 만 것이다. 피폐해진 그녀의 가족사처럼 급격하게 기울던 가세와 멍에처럼 지워진 노모 그리고 어린 딸과 새로운 생활로 하나 둘 늘어가는 아이들 ‘세상물정 모르던’ 그녀는 그렇게 녹녹치 않은 인생을 살아나왔던 것이다.
- <붉은 추억의 깃발> 중에서 -
이 수필 <붉은 추억의 깃발>은이운순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구상한 소설의 가제인데, 그녀는 결국 출산과 육아 등의 현실적 장벽에 막혀 소설 집필을 포기하고 만다. 비록 소설로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의 기구한 삶을 수필 속에 기필코 담아내었다. 이 작품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그녀는 정신을 놓고 만 것이다.’라는 표현이다. 얼마나 무서운 현실이었기에 차라리 미쳐버리자고 생각했을까. 일편단심의 사랑, 그 힘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사랑해야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쓰면서도 작가는 어김없이 체험으로 내재된 기억의 저장장치에서 ‘스키마’를 불러낸다. 삶의 질적 변화가 인간에게 반드시 행복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편리의 획득만큼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잊고 잃어야 했기 때문이다. 작가가 과거의 기억을 통해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비극적 삶의 시초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려는 이유 아니겠는가. 이 수필이 주는 가치는 등불로서의 교훈적인 가치 말고도 미적 쾌락을 안겨 준다는 데 있다. 적절한 삽화의 인용은 주제의 간접화를 돕는다.
결말부에 ‘중년을 넘어 몸도 마음도 쇠잔해질 만큼 세월이 흘러 편안한 이웃집 할머니가 된 그녀는 수년 전 하늘에 이르렀다. 광녀라기보다 그저 녹녹치 않은 인생을 살아나온 착하기만 했던 한 여인의 敵은 다만, ‘붉은색, 붉은 깃발’뿐이었다.‘는 대목의 의미화가 문학성을 크게 견인한다. 이운순은 전쟁의 비극과 함께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다”라고 이른다. 이 작품은 공감도의 측면에서도 성공하고 있는데, 결말에 앞선 전개부 말미쯤에서 작가의 시선이 그 소설 속 주인공의 내면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그녀와 함께 나눠 가졌던 작가가 아닌가. 자기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사는 한 여자를 물끄러미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 여인의 아픔을, 돌아서서 혼자 울음을 삼켜야 했던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슴이 찡하게 울려오도록 그려내는 글 솜씨가 대단해 보인다. 이 수필의 백미는 마지막 결구 문단에 있는 한마디다. 붉은 깃발 모티프를 비유적 이미지로 도입하여 여인의 의식을 형상화한 작가의 미적 감수성은 소재 선택의 적절성과 함께 탁월한 안목으로 남는다. 가장 독자의 공감을 받는 부분이 이 의미화다. 인간에게 운명지워진 모든 것을 갈등없이 수용하는 삶의 태도가 더없이 아름답게 여겨진다.
언제까지나 어머니의 살아생전이 영원할 것 같아 늘 응석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중년의 휑한 벌판 같은 가슴을 자각했을 때 어머니는 내게 추억 속에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림처럼 누워있어도 어머니는 언제나 내게 비비고 싶은 언덕이었는지 모른다. 그리움의 계절 가을은 모든 것을 추억하게 만들고, 만추의 풍요로움은 더 진한 그리움으로 추억과 마주하게 한다. 그것은 계절병과도 같아 몰캉한 홍시나 황금빛 늙은 호박의 속살을 보아도 내 어머니가 떠올라 울컥 눈물 한소끔 쏟아내고야 만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리움의 정점의 기억을 떠올려 고집스레 어머니의 음식을 만들어 공허함을 달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한여름 빗줄기가 사납게 지나간 다음날 해 주시던 야생버섯으로 끓이던 고추장찌개며, 밥하던 노구솥에 얹었다가 죽죽 찢어 무치는 가지나물도 노가리찜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움이 강물처럼 흘러 내려 가슴을 적시는 날에는 어머니의 음식을 대하는 날이다. 나는 그렇게 오늘도 그리움을 먹고 추억을 먹고 짭조름한 눈물도 함께 먹는다.
- <그리움을 먹는다> 중에서 -
모든 작품 속에는 고유한 설득의 논리가 내재한다. 독자가 작품을 읽고 감정이입에 몰입하는 것도 이런 내적 논리의 힘에 의해서다. 작가가 소재에 대한 심오한 성찰 끝에 자각하는 깨달음도 이런 내적 논리에 의해 획득된다. <그리움을 먹는다>에 숨겨져 있는 미적 설득의 논리는 인연논리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이웃의 미덕이나 미담을 추출해 내어서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멋스럽게 확대시키고 있는 점에서 설득력이 배가된다. 그리움과 모성 원리 그리고 자아실현 욕구로 대별되는 세 줄기의 큰 흐름을 가지는 이운순의 수필세계는 가슴 따뜻한 사람들과의 인연이 주가 되어 나타나면서 주로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세를 이룬다. 인간 속에서 살아가면서 부모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을 기억의 저장 창고에 쌓아두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다. 작가는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그 가운데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아들에게 일러두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운순의 수필이 주는 전반적인 인상은 눈물겨운 따스함이다. 고요한 호수 같이 평화로운 분위기요, 위대한 어머니의 품속 같은 이미지다. 그러기에 이 수필은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으로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준다.
생의 완성을 기대하는 자체가 무의미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어느 정도 깨달음에 이르는 일도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평범한 자체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작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가치를 아는 자다. 이런 가치관의 정립에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고집스레 어머니의 음식을 만들어 아들에게 내어놓는다. ‘그림처럼 누어계셨어도 어머니는 언제나 내게 부비고 싶은 언덕이었는지 모른다.’는 고백과 ‘몰캉한 홍시’와 ‘황금빛 늙은 호박의 속살’ 이미지를 통해 이별과 만남의 의미를 변증법적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인생 체험적 이야기는 그녀의 추억나누기라는 체험이 용해됨으로 인해서 더욱 튼실해진다. ‘나는 그렇게 오늘도 그리움을 먹고 추억을 먹고 짭조름한 눈물도 함께 먹는다.’는 마지막 문장이 가슴에 와락 안겨든다. 공감의 획득이다. 명제를 빛나게 하는 단정적 진술이지만, ‘먹고’의 반복적인 강조가 정서적 감화를 준다. 그리움의 미학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기에 그녀는 ‘추억을 먹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설렘도 잠시, 종숙님의 메일 ‘별이 지다’라는 제목만으로 나는 그만 메일을 열어보기도 전에 눈자위가 붉어지고 목이 메어왔다. 종숙님께서 누구를 회고하시는지, 이 글을 쓰실 때의 종숙님의 심중이 어떠하셨을 지의 마음이 닿자 그만 가슴이 답답해 왔다. 예기치 않게 훌쩍 떠나 이별을 고한 당신의 종제에 대한 원망과 회한을 어쩌시지 못해 그 비통하신 마음이 수필이 되어 화면을 채웠다. 통상적으로 하는 말처럼 몸도 마음도 약해진다는 높은 연세, 내년이면 희수가 되시는 어른에게 친 혈육만큼이나 아끼던 사촌아우에 부음이 얼마나 큰 충격이고 아픔이실까 눈앞이 흐려진다. 범인들의 시선으로는 두 분 종숙님 간의 우애를 가름할 수 없을 테지만 시집온 지 이십칠 년, 적지 않은 세월을 뵈어온 바로 감히 짐작 못 할 부분도 아니었다.
- <별(星)과 별(別) 하다> 중에서 -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유교적 전통이 쉽게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그 전통의 맥락 위에서 한국 고유의 선비정신을 수필쓰기로 보여준 문학철학적 지향의식과 작가의 심미안 속에 예리한 미적 내공이 숨어있다고 하겠다. 위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났듯이 이 수필은 작가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던 시댁 어른 종숙님이 사촌 아우의 부음을 받고 쓴 수필 형식의 추모글에 대한 단상이다. 종숙 어른은 시댁 어른이지만 작가를 문우로서 대해준 분이다. 이 글은 평소 종숙 어른이 사촌 아우와 나누었던 뜨거운 우정과 삶에 끼친 영향을 문학적으로 간접화하면서 진한 그리움의 향기를 담고 있다.‘아우를 보내는 배웅 길에서 당신의 남은 생애 동안 두 분이 함께 꿈꾸어오던 가문과 후손을 위한 사업들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현몽을 해서라도 함께 하자는 말씀과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는 종숙님의 말씀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하던 그 아우와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었던 종숙님의 마음이 담겨있음’을 확인하고, 작가는 자신을 문우로 대해준 종숙 어른에 대하여 존경을 표한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가치로 작용했던 전통적인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다시 조명해 보게 한다.
<별(星)과 별(別) 하다>에서 ‘별(星)’과 ‘별(別)’의 대응은 작가가 주제로 형상화해낸 정서의 빛깔이자, 심오한 성찰 속에서 획득된 언어의 이화현상으로서 철학적 울림의 멋과 힘이라 하겠다. 거추장스럽고 귀찮기만 했던 시댁 어른들의 엄격한 교육을 ’다시 보기‘를 통해 사랑으로 변환시키고, 종숙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에 우리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최상의 지혜는 정의 교류가 아니겠는가. 정감이 흐르지 않는 인간관계는 삭막하기 그지없다. 이운순 수필가는 훌륭한 집안에서 성장해서 항상 따뜻한 구도자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그래서 과거를 통해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보는 휴머니스트 수필가이자, 패밀리스트가 아닐 수 없다. 대구 종숙과 서울 종숙 사이의 우정 속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그녀는 가족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가문‘과 ’후손‘으로 상징되는 유교적 가치를 가슴으로 껴안게 하는 작가의 인간미와 문장력은 그녀에게 에세이문예작가상이 안겨진 것을 충분하게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풍요 속에 빈곤이라고 모든 넘쳐나는 것들 속에도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한정 돼 있다. 그런 사실은 이미 풍요를 겪어왔던 젊은 친구들에게 부족함이란 가일층 더 힘겨웠을 것이다. 대부분 부모의 경제적 뒷받침 아래 전력을 다해 공부에 매진해야 할 공부를 조카는 먼 이국땅에서 일가를 이루고 학위도 쟁취하느라 남들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어렵고 힘든 과정 속의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고 심리적 안정 속에서 이루어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평소의 선입견으로 유학파들은 모두 부모덕에 편히 공부하다 온 사람들일 거라는 나의 편견과 경험해 보지 못하고서 추측만으로 단정했던 나를 반성한다.
- <고백> 중에서 -
수필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에 비유된다. 수필은 단순히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써서는 안 된다. 수필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 <고백>은 작가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드러나 있다. 조카와 질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이를 증명한다. 발단부 서두를 ‘몰랐습니다.’로 시작하면서, 그녀는 해외 유학파에 대한 오해가 있었음을 미리 암시하고 있다.조카와 질부에게 보내는 작가의 인정어린 눈길이 감동을 주는 수필이다. 갑상선항진증을 앓고 있는 질부에게 보이는 연민과 발전을 기원하는 마음이 곱기만 하다. 연구원의 적은 월급으로 네 식구를 부양하느라 고생했던 조카를 추겨 세우며, 그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사방을 온기로 가득 채운다. 인간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수필의 향기다. 무엇보다도 큰 감동을 주는 요소다.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에는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직계 가족도 아닌 집안 사람들의 전도를 걱정하는 작가의 훈훈한 인간애에 독자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맑은 마음 속에 목련을 피워낼 수 있는 심성의 소유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들이 수필화되어 현실로 나타난 것에 우리는 안도할 수밖에 없다.
이운순의 수필은 한마디로 정으로 짜여진 천이다. 그녀는 다양한 인간 관계 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 인연을 소중하게 감싸 안고 아름다운 인생이란 한 필의 비단을 짜고 있는 직녀인 것이다. 건조한 현대적 인간관계를 사랑의 빛깔로 채색하면서 그 위에 신록의 향유를 발라 부드럽게 하는 그녀의 성자적 삶의 태도는 마땅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늘진 곳에 대한 연민이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임을 말해주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런 사랑의 자세가 아닐까. 이 수필은 정이 메말라가는 현대인에게 뜨거운 인간애를 호소한다. 글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 그녀는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우쭐거리기도 현학적인 언변으로 뽐내도 않는다. 마음을 열고 이웃과 호흡하며 맺은 인연을 삽화로 엮어 그려가는 일에 충실하기에 감동을 주는 수필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2. 회상과 공간의 아름다운 무늬
수필의 공간은 작가가 관찰하고 회상하고 상상하는 대상과 그 대상이 있는 곳이다. 이운순 수필의 공간은 가족과 함께 했던 삶의 현장이다. 2000년 에세이문예 가을호 신인상 당선작인 <나도 안다>의 ‘어쩌면 티격태격하는 그 속에서 가족 간에 정도 더 두터워지고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견디고 이겨내며 가족 간에 결속이 다져진다는 것도 이젠 나도 알 것만 같다. 평소 무심하기만 한 남편도 점점 자라서 곧 둥지를 떠나게 될 우리 아이들도 새삼 더 소중하고 건강한 오늘을 살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 부모님을 추억하며 진정한 가족애를 되짚어보는 이 시간 또한 부모님께 감사한 일이 아닐까.’라는 대목을 보면, 그녀의 수필에서 가족은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족해체는 비인간화와 같은 도시적 병리 현상으로 이하여 파생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가족애는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일종의 아름다운 의식의 성찬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기 탐색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삶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얽매인 일상의 생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시 가족주의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모성 체험과 같은 자녀와의 관계성은 여성의 도덕적 인식을 구성하는 요체다. 여성에게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모성성을 요구하는 어머니라는 위치가 가장 확실하게 그녀에게 존재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운순의 수필에서 여성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이운순 수필은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며느리로서의 전통적 지위와 역할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모정의 원리가 뜨겁게 솟구친다고 하겠다.
당시를 떠올려 굳이 경위를 찾아보자면 내 몸보다 더 큰 항아리를 들여다보고 쌀을 떠낸다는 것이 첫 번째 무리수였고, 또 더 큰 우를 범하게 된 것은 박의 두툼한 손잡이 부분을 잡지 않고 오래도록 써서 닳고 달아 얇아진 날을 쥐고서 헛손질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혹시 쌀이 많지 않아 바닥을 향해 헛손질을 한 탓이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쌀이 중간쯤 차 있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오랜 시간 집기로서의 일을 다 해 얇아진 박의 상태를 알지 못한 어린애의 실수는 변하지 않으니까, 무엇이든 아끼고 절약하며 살던 시절, 그러나 어머니께 꾸중을 들었던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세세하게 듣지 않고도 어머니는 모든 정황을 간파하셨을 것이다. 어린 딸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쌀을 퍼내려 했다는 것을 당연히 아셨을 어머니는, 조각난 손때 묻은 집기의 애틋하고 허전함을 딱 그만큼만 표현하셨던 것 같다.
- <조 표자가> 중에서 -
이 수필은 작가가 최명희의 혼불을 읽다가 중반 부분쯤에서 ‘조침문’과 유사한 이야기를 접하고, 그것이 어릴 적 자신의 과오와 유사하다는 데 착안하여 그 제목도 멋진 <조 표자가>가 되었다. 이 작품에는 ‘박’에 얽힌 작가와 어머니와의 일화가 모성원리를 감싸고 있다. 어린 날, 어린 몸에 지나간 기억들을 주워 모아서 한 편의 수필로 만들었다. 이 작품 역시 시대의 밑그림이 잘 그려져 있다. 작가가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기 전이라 시골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작가 자신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친정 어머니, 헌신과 희생을 훈장처럼 달고 어머니의 자리, 아내의 자리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했던 한국 여인들의 삶을 ‘박’를 통해 잘 전해주고 있다. 누구나 사람이 나이를 먹기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겪게 되는 것은 어릴 때 멋모르고 지은 잘못과 그것으로 받는 죄책감의 아픔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줄 알았던 그 일이 사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라지지 않아 비슷한 것만 봐도 조금씩 아픔의 실체를 만나게 된다. 아픔만큼 성숙해지기에 이러한 과정은 남은 자의 영혼을 살찌게도 한다.
작가는 ‘박’을 보면서 고향을 떠올리고 초가를 떠올리고 어머니를 떠올린다. 딱히 부잣집은 아니어도 반듯한 정신으로 살다 간 고인의 모습을 반추하며 자신의 삶도 반듯하게 세우고자 한다. 이 수필에 나타나는 문학적 논리는 기본적으로 주어진 세속적 삶의 범주 속에서 바람직한 인간상찾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문학적 논리는 엘리아데의 주장처럼 속의 세계에 살면서 성의 세계로의 변증법적 지향의식을 추구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볼 때, 딸의 잘못에 대응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존재 조건 속에서 바람직한 인간성을 모색하는 것이 문학적 구원을 위한 변증법적 설득논리와도 연결되어 있어 감동을 준다.
그 후 이틀 동안 난 몸살처럼 몹시 아팠다. 물론 집에 돌아와 청심환도 먹고 애써 평온한 척했지만, 또 남편에게 그렇게 빨리 달려와 줘서 고맙다는 말도 못 했지만, 두고두고 생각해도 불가사의하다. 남편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달려올 수 있었을까? 구불구불 동네 소로 길을 촌각을 다투고 달려와 준 남편에게 평생에 다 값 지 못할 빚을 진 셈이다. 그리고 못난 아내가 형제자매들로부터 자칫 평생의 죄인으로 남지 않게 해준 것에도 나는 아직 입을 떼지 못했다. 못난 딸로 인해 늙으신 노모께 잠시나마 불효를 저질렀고, 남편으로부터 다시는 엄마한테 이것저것 갖다 드리지 말라는 일장연설을 들어도 그저 다 고맙기만 하다. 소나기는 피하고 볼 일이랬다. 며칠 뒤 오라비에게 혼날 게 두려워 작은애를 앞세우고 친정엘 가보았다. 어머니는 엊그제 일은 모두 잊으셨는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전보다 더 아이처럼 밝게 웃어주신다. 그리곤 오랜만에 본 외손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시는 어머니, 한바탕 나쁜 꿈이라도 꾼 걸까?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찾아온 오늘의 평화가 너무 감사하고 꿈만 같다. 이것이 내가 내 남편에게 꼼짝 못 하는 제일 큰 이유다.
- <찰나의 그 하루> 중에서 -
오랜 문학의 역사 속에서도 구원은 작가들의 중요한 탐구대상이 되어 왔다. ‘어머니’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쓰기만 해도 따스함이 전해지는 구원의 말이다. 이 수필은 자신의 실수로 위기에 빠진 순간을 남편이 건져준 일화를 바탕으로 쓴 것인데, 작가는 남편에게 평생 갚아도 모자랄, 그간의 모든 서운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큰 빚을 지고 평생을 ‘나 죽었다고’ 살아야 할 사건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대체 무슨 사건이길래 내용이 궁금하게 하는 멘트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남편의 고마움이 겉주제라면, 속주제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어머니의 사랑만큼 고귀한 것도 이 세상에는 없다.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연민의 다른 말일 수도 있고, 공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일 수 있다. 운명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 이운순의 이 수필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맛에는 인연의 소중함뿐만 아니라 모성의 향기도 남편에 대한 사랑의 표현도 은근히 있다.
공기와 물보다 더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우리 곁에 있어 소중함을 모르듯 부부지간의 보이지 않는 사랑도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오늘의 평화가 너무 감사하고 꿈만 같다.’는 이 일성이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거늘, 그녀의 너무나 인간적인 애타심과 솔직한 심사는 우리의 눈물샘을 자꾸만 자극한다. 호빵으로 인해 어머니의 위기 상황을 남편의 기지로 모면한 작가의 이제야 남편을 고마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평생 죄인이 될 뻔했던 찰나의 순간이 리얼하게 잘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어려운 시대, 가족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호빵’을 소재로 해서 잘 반추하고 있다. 이 일이 있고 일년 후 어머니를 보낸 이운순의 수필은 사랑의 의미와 생의 의미를 함께 깨닫게 하는 내용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누구든 모든 인간에게 과거는 그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어머니는 더욱 그렇다. 어머니의 뱃속은 모든 이들의 영원한 본향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워하던 다듬이소리의 주인공이신 어머니는 구순(九旬)까지 사셨다. 그러나 시대 흐름의 따라 훨씬 이전부터 어머니는 다듬이를 놓아 종래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꽃무늬며 체크무늬의 폴리에스터, 화학섬유가 섞인 원단의 생산은 더 이상 다듬이질이 필요하지 않은 획기적인 변화로 어머니들의 일손을 덜어주고 보기에도 화사한 신문명이기도 했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어머니의 소리가 그리워지기 전까지 그랬었다. 내 기준으로 볼 때 다듬이소리야말로 악보도 없이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에게서 살뜰하게 이어져 여인들에게 계승되어온 훌륭한 악기요, 연주라고 늘 생각했었다. 지금도 눈감고 들으면 꼭 지금같이 바깥 날씨가 조금 선듯해지고 더위가 한풀 꺾인 여름날 겨우살이 준비를 하는 정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불 홑청 빨아 서걱서걱 소리 나게 풀 먹인 홑청을 두드리시던 내 어머니와 이웃들의 다듬이 소리가 청량한 밤공기를 흔들던 시절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추억 속에 존재한다. 가끔 어머니가 곁에 계시지 않은 현실에서 어머니를 매일 생각하고 그리워하지 않는 것에 놀라지만, 문득문득 어머니가 사무치도록 그리울 때 추억여행을 떠나게 된다.
- <소리> 중에서 -
이운순의 수필에서 어머니의 ‘다듬이소리’는 아프고, 힘들 때, 달려가는 피안의 세계였다. 이 수필은 이런 ‘다듬이소리’를 제재로 사랑을 주제화했다. 삼단 구성이 확연이 드러나는 점이 접근성을 높인다. 작가는 단조로운 구성의 변화를 위해 글에 탄력성을 주고자 한다. 이 수필의 서두는, “딱 딱 딱 딱 또드락 똑딱/ 또드락 또드락 또드락 딱 딱“, 눈물을 뽑아낼 만큼 리얼한 다듬이소리를 기억해 낸 최명희 작가에 대한 감사로 시작한다. 전개부에서는 제대 후 복학한 큰아들이 <토지>와 <혼불> 같은 책을 도서관에서 대여해 주어서 읽다가 다듬이소리를 만나고, 비로소 어머니를 만나고 어머니를 안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작가에게 다듬이소리야말로 악보도 없이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에게서 살뜰하게 이어져 여인들에게 계승되어온 훌륭한 악기요, 연주였다. 결말부에 가서 작가는 다시 다듬이소리를 한 번 더 놓는다. 작가는 얼마 전 인근 식당에서 보았던 다듬잇돌을 보며, 다시 어머니를 그리워 한다는 내용으로 이 수필을 마무리 짓는다. 이 작품의 미적 조직 원리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어머니의 성격과 삶의 방식을 객관화시켜 보여주기 위해 비유적인 관점에서 이미지의 유사성을 지닌 다듬잇돌을 보조관념으로 도입한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상관물의 선택은 이 수필의 문학적 격조와 풍격을 창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맑고 청아한 겨울 하늘은 왠지 아버지를 닮아 더 슬프다. 누구든 슬픔이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점점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에 엄격해서 더 고독했던 내 아버지를 가끔 그려 보곤 한다. 이 세상에 나를 있게 해 준 사람, 내가 보고 만지고 느끼고 맛보는 모든 것이 다 그분으로부터 기인했으니 내겐 아버지가 조물주요 신이요 절대자이시다. 그런 내 아버지가 세상에 나신 날도 추운 계절이요, 떠나신 그날도 새봄이 시작되려고 막 기지개 켜던 2월의 중순, 꽃샘추위로 모든 세상이 얼어붙던 그날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발단부>
아버지의 유교식 교육 방침에 대해 아직도 논박의 여지는 있다. 나 또한 그런 아버지를 다 이해하고 사랑했었는지 자신할 수 없다. 어리고 철이 없었다는 말로 정당화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이 못내 후회로 남는다. 철이 좀 더 일찍 들어 아버지를 잘 이해해 드렸더라면 어땠을까. 다른 사람들의 바르지 못한 평판에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을 만큼 아버지를 이해하고 좀 더 사랑하고 이해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랬었더라면 아버지의 말년은 덜 외로우셨을 것이고 시리고 아픈 이 계절의 회한도 없지 않았을까. 올해도 이렇게 시린 아버지의 계절이 끝나가고 있다. <결말부>
- <아버지의 계절> 중에서 -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랑과 행복이 아닐까. 사랑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은 아버지와 딸 그리고 부부와의 만남이 이루어내는 사연이다. 이운순의 수필에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아버지’도 어머니 못지않은 비중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양친이 그녀의 가슴 안에 뚜렷한 사랑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때로는 삶이 버거워 가슴이 휑뎅그렁해질 때 그 분들에 대한 아늑하던 추억은 작가의 마음 속 버팀목이 되어 따스하게 들어앉곤 한다. 이 작품에서 발견되는 미의식은 숭고미와 비극미의 양면성을 띤다. 숭고미는 엄숙한 중량감과 초월적인 정신적 높이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작가에게는 존경의 대상이다. 이와는 달리 변모한 시대환경 속에서 자존심을 지키면서 꿋꿋하게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연민의 비극적 정서가 비친다. 이버지의 이러한 숭고미와 비극적 정서는 대립적인 양가감정을 일으키면서 오히려 강조되고 확산된다. 이 수필은 주로 아버지를 둘러싼 끈끈한 삶의 이야기를 미학적으로 형상화시키는 것을 특색으로 한다. 이운순의 인간적 향내는 인연에 대해 그리움을 흘리는 모습에서뿐만 아니라 아버지라는 절대적 존재 앞에서 회고적 그리움에 젖어 들면서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올려놓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에 대한 이해와 세상을 산 연륜은 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어릴 때는 어머니만 절대적인 존재이나 어느 정도 세상사에 익숙해지면 시집 간 딸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되고 비로소 이해의 눈을 뜨게 되는데, 작가도 마찬가지다.
위의 수필은 냉혹한 이성으로 글을 쓰는 작가이지만 아버지라는 이름 앞에서는 그녀도 한 사람의 딸이고, 정을 흥건히 적시고 사는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는 글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반성적 성찰로 자신의 아픈 과거를 가슴에서 지워내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를 일러 ‘이 세상에 나를 있게 해 준 사람, 내가 보고 만지고 느끼고 맛보는 모든 것이 다 그분으로부터 기인했으니 내겐 아버지가 조물주요 신이요 절대자’로 명명하고 있다. 이런 진술을 토대로 볼 때, 이 수필은 그녀의 인간적 체취를 배태케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에 엄격해서 더 고독했던 내 아버지를 가끔 그려 보곤 한다.”는 발단부 문장부터 분위기를 무겁게 하는 이 작품은 우리가 풀어야 할 진정한 사랑에 대한 해답을 준비하고 있기에 소중하다고 하겠다. 인간의 정 중에서 가장 절실하고 애절한 것은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다. 딸이 망자에 대한 그리움을 이어가는 모습은 한국적 정서로 볼 때,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다. 특히 근원적 관계에 대한 애정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피를 나눈 혈통이라는 운명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상호간에 존재했던 많은 벽들로 인해 그녀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던 철없는 딸이었다. 유교라는 이데올로기가 상호간에 소통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3. 안주하는 삶에 대한 거부의 몸짓
수필의 주제는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하는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운순의 수필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올바르게 제시하고 때문에 가치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수필가는 워드워즈가 말한 "모든 시인은 교사다"라는 말을 음미해 봤을 것이다. 수필은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시킴으로써 바른 인생의 길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즉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모색이 있어야 한다. 더 이상 '개인적'이라는 이유로 사실에 머물러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면 좋은 수필이 못된다. 이운순은 이런 차원에서 끊임없이 시간의 관성에서 벗어나 자기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작가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수필은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는다. 후썰에 의하면, 의식은 항상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그것에 어떤 의미 규정을 부여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한 소도구로 알고 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 수필은 나름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터전으로서 좋은 도구가 된다. 이운순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의 존재해명 없이 글을 쓸 수 없고, 자아실현의 의지 없이 좋은 인간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필은 삶에 대한 관심과 그 의미를 표상하는 형태와 관념의 모습이다. 그 중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모든 것은 자신에 의해 비롯되고, 갖추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운순 수필세계의 마지막 줄기는 그녀 자신만의 흔적이다. 그녀가 그리고 품어내는 그녀만의 빛깔과 향기라 하겠다.
지금 이 시간, 이 낯선 곳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낯선 곳 낯선 길의 서 있는 내가 또 낯설다. 내 나이 오십 고개를 훌쩍 넘었다. 뭔가 유용한 소일을 찾다가 생각해 낸 것이 작년 초 방송대의 적을 두게 된 일이다. 뭔가 끊임없이 앎을 추구한다는 것은 분명 진취적인 사고의 소산물이다. 중년기 무료함의 돌파구였고 작은 도약을 위한 발돋움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앎의 희열만큼이나 일하는 즐거움 또한 거기에 비견할 수 없어 작은 중소기업에서 낮 시간을 보낸다. 그런 날 중에 오늘은 유명 교수님의 교양과목 특강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생애 처음 뚝섬을 찾은 것이다.
- <낮선 길에서 길을 찾다> 중에서 -
수필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에 비유된다. 수필은 단순히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써서는 안 된다. 수필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낮선 길에서 길을 찾다>는작가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드러나 있다. 사람은 생활하는 모습에서나, 생각하는 면에서 거의 비슷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밀접한 것, 본질적인 것에 소홀히 하는 수가 많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왜 사는가 하는 실질적인 관심거리를 도외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운순은 이런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수필가는 자기존재를 먼저 해명해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수필을 이 책의 제일 처음에 배치한 것도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수필이 인생을 그리는 글이고, 산다는 것은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은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드러낸다고 하겠다.
“내 나이 오십 고개를 훌쩍 넘었다. 뭔가 유용한 소일을 찾다가 생각해 낸 것이 작년 초 방송대의 적을 두게 된 일이다.”라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만학도다. 뿐만 아니다. 그녀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리산 종주라는 새로운 모험을 감행했다. 싸르트르는 인생은 알파벳 C와 D 사이에 있다고 했다. 그녀는 인생의 정답이 C(Challenge) 도전임을 잘 안다. 도전을 소중하게 감싸 안고 아름다운 인생이란 한 필의 비단을 짜고 있는 그녀는 직녀인 것이다. 무미건조한 삶을 열정의 빛깔로 채색하면서 그 낮선 길 위에서 흙길도, 자갈길도 다 받아들이겠다는 여유로운 승자적 삶의 태도는 마땅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글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뽐내도 안 된다. 이운순의 글처럼 마음을 열고 세상과 호흡하며 살아가면서, 긍정의 마음을 그려가는 정스민 수필들이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아니겠는가.
조선말의 문신, 학자, 애국지사, 그 많은 수식어는 그만두고라도 항일 운동 중에 일본의 체포 되어 대마도 유배지에서 순국하기까지의 고결하신 인품에 ‘따위’라는 부정적 단어가 쓰인 것도 짐짓 화가 나고 속이 상한데 용기를 내서 수정 제의를 했음에도 소정의 절차를 거처 정정될 것이라는 말에 막연하게 기다리는 내가 점점 작아지고 초라해진다. 담당자는 나에게 ‘어떤 절차가 진행 중이어서 늦어지고 있다.’던가, ‘검토 결과 정당하게 쓰인 단어라고 합니다.’라는 식의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는 일련의 사정까지도 내게는 알릴 의무가 있지 않을까. 도대체 내가 한 일은 무엇이었나? 해명 한마디 없이 시간은 무수히 지나가고 잘 되리라던 그 담당자의 말만이 공허하게 귓전을 떠돈다. 아직도 종무소식인 그들에게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나무라고 싶다. 따위라니! 따위라니?
- <따위라니> 중에서 -
지금까지 읽은 수필이 경수필이라면, 이 수필은 약간 중수필이다. 언어인 말은 존재의 집이다. 인간은 누구나 말 속에서 산다. 바른 용법으로 글을 쓴다면 분명 독자들을 감동으로 초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폭과 깊이는 자신이 지닌 어휘의 깊이와 폭을 넘을 수 없다. 화장하는 것이 자신의 외면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라면, 외면에 드러나지 않는 정신의 표현인 말을 바르게 쓰도록 변화시키는 것이 문인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사전에 존경하는 애국지사 면암을 설명하는 글 중에 ‘저서에 <면암집> 따위가 있다.’라는 표현을 발견한다. 이 수필은 ‘따위’의 부정적인 어감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작가가 국립국어원 사전편집자에게 수정제의를 전달하였으나, 아무런 해답이나 조치가 없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공직자가 상대를 무시해 버리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며 입을 다물어 버린다면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문학하는 생활은 자신의 정신을 변형시키는 내면의 화장이다. 외면인 육체는 다만 정신의 하수인일 뿐이다. 언어의 변화는 곧 그 사람 정신의 변화요, 정신의 표현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발표를 기다릴 것도 없이 이미 마음은 정리되었다. 결과는 분명한 실패였고 처절하게 나락으로 떨어졌다. 생각보다 충격이 작았던 것은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마음을 가다듬으니 문제점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자료를 수집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생략된 것이다. 창작의욕만 앞세운 신중하지 못했던 나의 허점들, 그중 가장 큰 실수는 다른 작가 지망생들의 오랜 노력을 터부시했거나 그들의 노력을 간과했었다는 것이다. 결과는 신중하지 못했던 나의 행동에 대한 처절한 응징이었고 질책이었다. 실패가 매양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비록 도전이 실패로 끝났다고는 해도 성찰의 기회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성과는 충분했다고 믿는다. 성장기 우연한 기회에 접했던 작품으로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았듯이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글쟁이로 기억되기를 소망하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금의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해 쉰 살의 겨울은 나름 진취적이었으며, 원고를 안고 우체국으로 향하는 동안 평생 잊지 못할 희열을 경험했었노라고, 그와 함께 처절하게 나락으로 떨어졌던 순간들마저 모두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지 않을까.
- <나락> 중에서 -
수필도 문학작품이므로 궁극적으로는 미의식으로 독자를 설득해야 한다. 수필은 철학적 인식의 대상이면서 미적 향수의 대상이다. 그래서 신춘문예 수필의 관문은 오랜 시간의 기량을 요구한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설명의 나열에 그쳐서는 안 되고 표현되어져야 하는 바, 그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기교가 없는 듯하면서도, 실은 없는 듯한 기교가 내재되어야 한다. 이운순이 신춘문예에 낙방하고 간결하고 소박하며 함축적인 언어가 만들어내는 감칠맛과 여운, 담백성과 격조 등에 신경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신춘문예에 도전했다가 낙방했던 경험을 반성적 성찰을 통해 끌어낸 글이다. 이운순의 이 수필을 이루는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자기응시’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수필창작을 통해 자기를 응시하고, 나아가 성찰을 도모한다. 종국에는 수필이 단순히 이야기의 예술이 아니라 미의식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 우주의 이야기를 통찰하는 미적 사유의 예술임을 인식시키는 데 있다고 하겠다.
문학도였던 그해 쉰 살의 겨울을 작가는 잊지 못한다. 나름 진취적이었으며, 원고를 안고 우체국으로 향하는 동안 평생 잊지 못할 희열을 경험했었노라고, 고백하는 작가에게 삶은 도전이었다. 그녀는 수필을 자기 응시의 수단으로 해서 먼저 자기를 구원하고자 하는 것 같다. 처절하게 나락으로 떨어졌던 기억마저도 추억으로 돌릴 수 있었던 것은 구원성에 그 기반을 두고 수필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의 행동이나 고백은 궁극적으로 그녀의 철학이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신춘문예 탈락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수필작품으로 고백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녀의 인격과 품격을 돌아보게 한다. ‘나락’은 다른 사람이라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겠지만, 그녀는 그 부끄러움을 용기있게 밝힘으로써 수필의 진솔한 맛과 수필가의 여유와 격조를 보여준다. 자신이 도전했던 삶만큼 소중한 경험도 없다. 그렇기에 이운순의 수필은 어떤 수필보다 진지하게 읽힌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도로 증설인가. 인간의 최적 조건에 맞는 배산임수는 아니더라도 오랜 시간 이웃을 형성하고 마을을 이루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토지보상과 건물값을 산출해서 지급하는 수순만으로는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적법한 절차에 의해 보상이 이루어진다고 그들은 단언하겠지만, 보상가가 얼마이든 누군가에게는 온전한 삶의 터전이거나 혹은 일부이거나 하는 것들에 임의적인 가치를 정하고 논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도시계획, 도로건설계획이라는 대의명분과 모두를 위한 공익사업이라는 감언으로 회유하니 소중한 내 것을 내어주고도 쫓겨나가는 듯한, 속내를 감출 수 없다. 국가 혹은 지방 사업에 대해 일 개개인이 그들이 하는 일을 무산시키거나 저지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럴만한 여력도 힘도 없지만, 그들에게는 보상액의 배가를 바라는 제스처쯤으로만 보일 뿐 그 어떤 효력도 발생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 <벌써 그리워진다> 중에서 -
이 작품은 작가의 따뜻한 감정이 대상과 상호 삼투되어 동일시를 이루고 작품 속에 자기를 용해시켜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공감과 감동을 획득하고 있는 수필이다. 무엇보다도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수필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작가의 눈이 토포필리아로 그윽하다. 인생에는 소중한 것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조상과 부모가 대대로 살아온 땅만큼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곳은 어머니의 품속 같이 포근한 생명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외면한 삶은 겉으로 보아 화려하고 찬란한 것일지라도 항상 비어있고 시장한 것일 수밖에 없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정이 결핍된 삶은 겉으로 보아 그것이 성공한 듯이 보이는 것일지라도 결과적으로 패배요, 헛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순수 자연에의 지향이나 그 실천 의지가 없는 인생은 작가에게 있어서 실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토록 귀한 것이 본향이기에 그것이 결핍된 삶은 비참한 것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수필적 화자가 갖는 내면 풍경의 진솔성이다. 더 나은 환경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온전하게 반갑지 않은 것이 솔직한 작가의 심정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그 의미와 상징성이 무한하여 이운순 작가에게 끊임없는 창작의 모티프가 되어왔다. 고향은 작가가 세상에 태어나 인간적 기초를 배운 태생지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볼 때, 고향은 인간의 물리적, 정신적, 영적 뿌리로서 상징성이 강하고, 일생 동안 끊임없이 환기되면서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원형적 심상으로 자리 잡는다. 그런 까닭으로 삶의 순간순간에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작용하면서 작가의 삶을 이끌어주는 영혼의 나침판처럼 기능한다. 이 작품은 본향을 향한 작가의 애정이 어떠한가를 제시해주는 글이다. 수필은 정의 문학이라는 명제에 비추어보면, 주제 지향성 면에서 이 수필의 가치는 충족되고도 남는다. 그녀가 갖고 있는 열망 중의 하나는 자연을 삶의 주변으로 끌어들여 동행을 이루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안정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이 곧 자연이다. 자연과 동행이 되고자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인간의 질주본능은 자연훼손을 재촉한다. 작가는 이런 개발로 인해 차츰 자연에서 멀어지는 삶을 문명 비판적 관점에서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잠자리의 사체는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처럼 안타깝고 쓸쓸하게 만든다. 계절은 이렇게 자연 만물을 제자리로 다시 돌려보내고 또다시 되돌아오는 윤회의 연속이다. 불과 수일 전만 해도 붉은 고추잠자리들의 비행을 보았지만, 어느 사이 쓸쓸한 이 계절의 뒤안길에서 생을 다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뒹군다. 그러나 분명한건 내년 여름, 또 그다음 여름에도 그들은 또 다른 개체로 우리의 머리 위를 날 것이다. 더 이상의 자연 훼손도 없고 더 이상의 무관심도 없는 언제까지나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이기를 간절하게 바라본다.
- <초하의 노래> 중에서 -
이 수필은 자연친화적 세계관이 빛나는 작품이다. 이운순 수필의 큰 줄기를 세 부류로 나누었지만 사실 네 부류로 나누어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 하나로 따로 떼어 놓으려면, 환경과 자연친화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고, 토포필리아 내지는 에코필리아의 사상이 녹아있는 녹색예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시골에서 자라고 커온 작가 역시 결국 대자연이란 문학의 온상만큼은 끝내 일탈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 확증인 것이다. 생의 참된 의의나 조화의 과정을 여유있게 관조함으로써 수필의 예술성을 나타내기에는 대자연의 오묘한 섭리, 그 이상의 제재는 다시 없기 때문에 작가는 수필 속에 자연을 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작가의 고향회귀 의식이나 과거지향성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작가의 자연친화적 의식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초하의 노래>는 인간의 삶은 자연과 밀착될수록 향기를 더한다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개구리소리도 농부도 볼 수 없다는 농촌의 풍경이 이를 잘 증명한다. 그래서 작가는 추억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한다. 단잠을 깨우던 제비의 지저귐도, 꾀꼬리 종달새 소리도 언제 들어보았는지 요원하기만 하다고 한다. 여기서 초하는 자연을 의미한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으려는 환경파괴의 심각성에 대한 경고적 의미로도 읽힌다. 생태위기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 때에 작가 역시 수필가로서 환경보존의 필요성을 여러 작품으로 통해 은은하게 형상하고 있음은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자연 친화를 통해 환경보호를 주장하는 작품들, 즉 <가을 스케치>, <사랑나무가 있는 집>, <그곳에 가면> 등 자연을 그리는 수필이 많다는 것은 작가의 시야가 밖으로 확대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잠자리의 사체는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처럼 안타깝고 쓸쓸하게 만든다.’라는 문장에서 함축적 형상화와 함께 이 수필의 주제적 구체화가 빛난다 하겠다.
III. 로그아웃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운순 수필의 지향성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하나는 그리움의 표백이고, 다른 하나는 추억의 단상이고, 마지막은 자기실현의 욕구라 하겠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운순 수필의 소재가 되고 있는 과거 회고적 그리움의 흔적들이 그녀의 삶에 있어서 스승의 한 자리로 남아 작가 자신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식이나 관념의 노래라기보다는 일상의 소중한 체험에서 인연의 가치를 건져낸 글이기에 그녀의 수필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향기를 풍긴다는 게 좋다. 이운순의 수필의 가장 큰 강점은 무엇보다도 체험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인정의 넉넉한 품이 있어 또 좋다. 그녀의 수필은 인연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만남의 미학으로 승화시킨다는 측면에서 영원의 여운을 느끼게 한다. 인연을 향한 그리움은 자기 존재의 성찰과 인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완성에 이르는 구도의 길에서 찬연한 꽃으로 피어난다. 모든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따뜻한 인간애와 삶의 열정은 그녀의 수필을 포근한 어머니의 치마폭처럼 따스하게 한다.
이제 에세이문예작가상 수상작가라는 깃발을 당당히 들고 수필의 길에 나섰으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차근차근 좋은 인연을 발견하는 데 더욱 전념하기를 당부하고 싶다. 십여 년의 문단 경력으로 이만한 품격을 갖춘 것은 그만큼 진지하게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수필은 수필적인 생활에서 찾아지는 법이다. 사람들과 인연의 소중함을 그려내는 휴머니즘의 수필 세계를 확보하고 있는 그녀의 수필 영토를 작가적 삶에 연계시켜보면 그녀의 인생관과 삶의 철학이 그대로 드러난다. 작가로서 그리고 모범적인 주부로서 누구보다도 깨어있는 자세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수필은 하나의 이야기문학이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작가의식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등 그녀는 작가의 사회적 책무도 다하고 있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이야기문학으로서 이운순 수필들은 글감을 작가의 체험에서 가져오고, 그것에 대한 깨달음을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준다는 차원에서 미학적 울림이 있다고 하겠다. 인연의 법칙으로 추억을 따스하게 감싸는 작가이기에 우리는 그녀의 다음 작품에 더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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