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天津)… 눈(雪)과 연(鳶)과 소년
영락제 이년(二年)은 유난히도 눈(雪)이 많은 해였다.
대설(大雪).
창궁(蒼穹)의 무궁(無窮)함이 마치 은린어(銀鱗魚)의 비늘이 되어 부서져 떨어지는 듯한 가운데, 모든 것은 설국(雪國)에 파묻힌다.
고루거각(高樓巨閣)도, 관도(官道)도… 모든 것은 백설에 뒤덮이며 하늘은 설움보다 짙은 푸르른 그림자를 가끔 눈 개인 모서리에 슬쩍슬쩍 내비치곤 한다.
아아, 대설(大雪)이여!
모든 것을 희게 파묻혀 버리는 눈이여!
하늘과 땅과 바람마저 모두 희기만 하다.
천년무림사(千年武林史) 가운데 가장 잔혹하고 처절했던 겨울은 그렇게 깊어 가고 있는 것이다.
천진부(天津府).
사통팔달한 거리에는 대운하(大運河)를 통해 모여든 상선의 화물이 마차에 실려 오가고, 원단(元旦)과 원소절(元宵節:일월 오 일) 사이의 가장 평온한 시절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화복(華服) 위에 두툼한 모피의를 걸친 채 돌아다니고 있다.
하늘(天)!
대설(大雪) 위의 거대한 거울과 같은 창궁(蒼穹)이다.
비수(匕首)를 들이대기만 해도 당장 뚝뚝 핏방울을 떨굴 듯한 하늘이다.
지금 하늘을 가르며 한 마리 거룡(巨龍)이 풍운(風雲)을 타고 날아오르고 있다.
비늘이 금빛이고, 길이는 칠 장(丈)!
곧 입을 벌려 화염(火焰)을 토할 듯한 거룡!
하늘은 용무(龍舞)에 유린되고 있다.
아아, 연(鳶)!
천진부사(天津府使)의 명에 따라 거대한 연 하나가 하늘 높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부중(府中) 사람은 모두 그것을 볼 수가 있다.
휘이이잉- 휘잉-!
바람을 타고 높이 높이 날아오르고 있는 연은 금방이라도 백운을 뚫고 치솟아 오를 듯했다.
북방에서는 대도(大都)로 손꼽히는 천진부(天津府)이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공자대부(公子大夫)들인 양 꽤나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시정(市井)의 매력은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늘 거리로 나오는 것일까?
구석진 곳에 홍등가(紅燈街)가 있고, 그 안에는 가슴살이 도톰하고 씨암탉처럼 오동통한 동기(童妓)가 있고, 동기의 입가에는 늘 미소가 있기 때문일까?
아니라면 인간이란 본시 고독(孤獨)을 싫어하는 족속이기에 모이는 것일까?
연(鳶)이 떠돌아다니는 천진의 하늘, 두 개의 눈은 지금 하늘을 담고 있었다.
부중에서는 이십 리(里) 정도 떨어진 구릉 위이다.
동쪽에서부터 철목하(鐵木河)가 흘러들고, 그 물이 휘어지며 노룡탄(怒龍灘)이라는 여울을 만드는 곳.
꽈르르- 릉- 쾅-!
노한 물줄기가 사납게 쏟아져 내리고 있는 오시(午時).
그는 한 시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황권(黃卷) 하나를 왼손에 들고 거기 서 있었다.
나이 십구 세 남짓, 옷차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소매섶이며 옷자락이 너저분하고 바람에 휘날리는 흑발(黑髮)이 앞 이마를 반 정도 가리고 있다.
하지만 호수같이 깊은 눈과 거악(巨嶽)과 같은 콧날은 결코 감춰지지 않았다.
그의 입매는 꽤나 특이한 미(美)를 지니고 있었다.
조금 냉소적이라고나 할까?
허무(虛無)스러운 가운데, 고졸(古拙)한 미소를 드리우고 있는 입가는 어딘지 모르게 고아해 보였다.
바람(風)과 강(江), 눈(雪)!
그는 그것을 벗삼아 하나의 석상 마냥 거기 서 있는 것이다.
"……!"
그는 용의 형상을 한 거대한 연이 아주 질긴 실에 의해 조종되어 허공을 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 보고 있었다.
매화(梅花)나무 아래, 그의 머리 뒤쪽에는 막 봉우리를 터뜨리는 혈매(血梅) 한 송이가 있다.
그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연이 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왜 그리 연을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일까?
뜨거운 차 한 잔이 차게 식을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허공이 돌풍에 휘감기더니 용연이 미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스으으…….
예리한 북서풍(北西風)이 바다의 소용돌이 마냥 허공을 휘젓더니, 용연은 일순 줄에서 끊어지고 만다.
"줄이 끊어졌다."
"연이 날아 도망간다!"
연을 보던 사람들은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용(龍)이 떠오르는 듯, 거대한 연은 백운보다도 더 높이 훌훌 날아오르기 시작하는데… 석상처럼 서 있던 그는 이제야 표정을 풀었다.
"훗훗… 그래, 그래야 하는 것이야!"
호수같이 깊은 눈에는 묘한 느낌이 떠올랐다.
쾌재연(快哉然)하다고나 할까?
"훗훗… 줄에 의해 조종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야. 어디든, 바람을 타고 훌훌 날아가야 하는 것이다! 자유롭게……!"
미소년은 묘한 승리감에 빠져드는 듯했다.
연은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바람(風)과 강(江)은 어디로 흐르고, 대설(大雪)은……?
"하여간 네가 부럽다. 연, 네가! 나는 언제나 너처럼 떠오를 수 있을지……."
철목하(鐵木河)는 늘 도도하다. 대운하(大運河)보다 폭이 좁으나, 철목하의 물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野生馬)마냥 거칠다.
벼락치는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철목하, 그 위에 핏물이 번지기 시작한다.
노을이 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할 때였다.
"내일은 대설(大雪)이겠다. 하늘이 저리 시뻘건 것을 보니!"
희미한 중얼거림 소리와 함께, 얼어죽은 위화(葦花:갈대) 숲 길을 따라 나아가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낮술을 마신 것일까?
그는 휘어이휘어이 매우 천연스러운 걸음걸이로 철목하 곁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곳은 천진부에서는 꽤나 궁벽한 곳으로 불렸다. 그러나 수 년 전부터는 사정이 판이해졌다.
밤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야경(夜景)이 아름답기 때문도 아니고, 밤낚시가 즐겁기 때문도 아니다.
화복 차림의 남자들이 모이는 이유는 단지 천목하 근처에 하나의 장원이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백매(白梅)의 숲 안, 단청(丹靑)이 아주 아름답고 회랑(回廊)의 총 길이가 삼 리(里)에 달하는 거대한 장원 하나가 서 있다.
쾌활화림(快活花林).
이 곳은 천부에서도 가장 비싼 주대(酒代)와 화대(花代)를 자랑하는 곳이다.
다른 청루(靑樓)는 주대나 화대를 내려 유객(誘客)하는데, 쾌활화림만은 달리 값비싼 주대와 화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쾌활화림은 늘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어 십 일 전에 미리 예약을 하지 않는다면 좌석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잡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 곳에 가면 누구든 왕(王)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쾌활화림에는 오백 명(名)의 미기(美妓)가 있는데, 그 중에는 머나먼 운남(雲南)과 청해(靑海)에서 온 기녀도 있다.
-쾌활화림의 기녀들은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지는데, 최하라 하더라도 하룻밤 화대로 거의 은자 백 냥(兩)을 받는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곳 기녀들 중에는 만금(萬金)을 줘도 남자에게 손목을 잡히지 않는 기녀가 있다는 것이다.
-쾌활화림의 기녀들은 하나같이 음률(音律)에 능하며 대장부(大丈夫)를 섬기는 말솜씨가 요조숙녀 이상이다. 거기 가서 은자를 쓴다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대장부가 의당 해야 할 도리이다.
쾌활림은 그러한 소문 가운데 일로 확장되었다.
림주(林主)는 초로(初老)의 늙은이로 늘 낚시만 했다.
무정태공(無情太公)!
그는 지금도 철목하와 이어지는 무정연(無情淵)에 죽간(竹竿)을 드리우고 있을 것이다.
천진부의 이대거부(二大巨富) 중 하나라는 무정태공.
그가 일야(一夜)마다 은자 오만 냥(兩)의 수입을 올려 주는 쾌활화림의 영업에 관여하지 않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삼 년 전일까?
그는 정말 보배로운 사람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산학(算學)에 밝은 소년. 그는 무유서생(無遊書生)이라 불렸고, 이 곳 유곽의 장부를 총 책임지고 기록하는 서기(書記)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어떠한 기장(記帳)이든 일문(一文)의 착오도 없이 해낼 것이오. 대신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장부 적는 일 이외의 일로 나를 번잡하게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오!
무유서생, 그는 몹시 괴벽한 사람으로 통했다.
남경(南京)에 권세 높은 인척이 있다던가?
하여간 그는 쾌활화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묘한 사람이었다.
계집의 뺨은 늘 그렇듯 창백하리만치 희었다.
노을이 붉기에 살결이 그리도 희게 대조되는 것인가?
그것이 성적(性的) 매력이라던가?
꺾어질 듯 가는 허리를 지닌 십칠 세 미기(美妓).
그녀는 지난해 쾌활화림에 들었고, 여름을 지내며 영예롭게도 교방일화(敎坊一花)로 꼽히게 되었다.
설향(雪香).
그녀는 황혼이 떨어질 때면 언제나 회랑의 월동창(月洞窓)을 반쯤 열고 후정(後庭)을 바라본다.
매우 요염한 두 눈으로 찡그리듯 슬퍼하는 듯 아주 복잡한 표정 가운데, 섬세한 턱을 섬섬옥수(纖纖玉手)로 합장하듯 모은 두 손 위에 받쳐 두고… 죽은 사람 마냥 숨소리도 내지 않고…….
설향, 그녀는 일 각(刻) 후면 방(房)에 들어가야 한다.
놀랍게도 은자 천 냥의 화대를 선금(先金)으로 받고!
교방일화(敎坊一花) 설향이 월동창을 열고 가산 아래 얼어붙은 인공호수와 꽃도 하나 피어 있지 않은 정원을 보고 있는 것도, 무유서생이 조금 취한 듯 삐뚤어진 걸음걸이로 정원 안으로 들어선 것도, 그리고 화림(花林)에 속한 제철점(蹄鐵店)의 망치 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려 온 것도 모두 같은 시각의 일이다.
'참 아름다운 눈이다. 늘 봐도…….'
무유서생은 힐끔 설향을 바라봤다.
'하여간 교만한 계집이다. 이 곳 기녀들 가운데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지 않는 계집은 설향뿐이다.'
바로 무유서생.
그는 림주(林主)가 자신에게 배정해 준 방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쾌활화림은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았다. 이 곳은 다른 곳과는 달리 밤이 되어야만 문을 연다.
새벽에 문이 닫히고 쾌활화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 덕에 박쥐의 생활을 하게 된다. 외부인들이 보면 모든 것이 거꾸로 된 곳이다.
낮과 밤이 바뀌고, 겨울 안에 애욕(愛欲)의 봄(春)이 피어 오르고, 의당 있어야 할 청춘(靑春)끼리의 호기심 대신에 허무한 교류마저 없으니까!
저벅-!
무유서생은 기녀 설향이 있는 곳을 지나쳐 간다.
"교만한 서생놈! 대장부라면 누구나 매혹되는 나를… 버젓이 스쳐 지나가는 놈은 저 놈뿐이다."
설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힐끔 눈을 흘겼다.
오룡문(烏龍門).
그 곳을 지나면 정원은 보이지 않고 흑석판(黑石板)으로 덮인 길이 있을 뿐이다.
무유서생은 일부러 그 곳의 제일 후미진 곳에 자신의 방을 잡았다.
그는 황포(黃袍)자락을 마파람에 펄럭거리며 걸어갔고, 구석진 곳에서 그를 향해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헤헤… 백서생(白書生), 이제 오시는군요. 낮에 비연회(飛鳶會)를 보러 가셨다더니, 재미가 어떠신지요?"
제철점(蹄鐵店).
말굽을 갈아 끼우는 곳으로 낮에만 문을 연다.
밤에 문을 닫는 이유는 문을 열 경우, 외부로 쇳소리가 흘러 나가기 때문이다.
제노인(帝老人), 그는 제철점의 주인이다.
그는 늘 그러하듯이 곰보로 박박 얽은 얼굴 가운데 아주 즐거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좋았소! 물론, 연(鳶)이 끊어졌으나……!"
무유서생은 가볍게 목례를 한다.
평범(平凡)한 사람들이다. 걸어가고 있는 무유서생도, 제철점의 제노인도.
무유서생이 제철점 앞을 지나칠 때, 제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백서생은 글만 읽으면서 나보다 십 배 나은 생활을 하는 데에도 늘 찡그리고 살고… 훗훗, 벌겋게 달군 망치나 휘두르고 말 똥구멍이나 쳐다보고 사는 나는 늘 웃고 사니……!"
그는 즐겁게 웃으며 문을 닫는다.
끼이이이- 익-!
꽤 두꺼운 문이 닫힌다.
정확히 술시 초(戌時初)였다. 이제 쾌활화림은 영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쓸쓸함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화려하게 피어나며 시끄러워질 것이고 노랫소리, 웃음소리가 먼 곳까지 들려 나갈 것이다.
벌써 천 일(日)째다. 늘 이러한 순간이 반복되어진 나날도.
<금은자 사천칠백 냥(金銀子四千七百兩)!
전표(錢票) 이천사백 냥(兩)!>
무유서생은 차가 식는지도 모르고 장부를 적는다.
창은 활짝 열려져 있다. 창 밖에는 뿌연 안개가 흐르고 있고, 간간이 진눈깨비가 희다기보다 회색으로 떨어져 내린다.
인시(寅時), 지금 쾌활화림은 문을 닫은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밤은 늘 그러하듯이 환락(歡樂)의 불바람(熱風)으로 뒤덮였었다. 특히 기녀들에게는…….
하지만 새벽에 기녀를 보는 사람이라면 밤에 기녀들과 잘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보라! 구석진 곳을 찾아 꾹꾹 젖가슴을 누르며 지난밤 억지로 들이마신 여아홍(女兒紅)을 게워 내는 계집들을.
치맛자락이 느슨해져서 떡반죽처럼 희멀건 궁둥짝이 하늘 쪽으로 희끗하게 드러난지도 모른 채.
"웨에… 엑… 에엑……!"
돼지 목을 자르는 양 구역질 소리를 내는 기녀들.
사실, 새벽에 토하는 기녀는 기적에 이름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는 동기(童妓)들이다.
그네들은 새벽에 속적삼 안의 향랑을 꺼내, 지난밤 취객(醉客)들이 터질 듯한 젖퉁이 사이에 던져 준 은자(銀子)를 세고 있다.
여기서 취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말이다.
황금(黃金)과 성(性)이 바뀌어지고, 여인의 젊음이 매물(賣物)이 되는 이 곳.
무유서생은 장부를 다 적은 후에야 붓을 벼루 위에 내려놓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또 새벽이다!"
밖은 무화과(無花果)숲이다.
꽃을 피우지 못하는 무화과!
천진부에서 무화과가 가장 많은 곳이 바로 무유서생의 서재(書齋) 남쪽에 있는 무화림일 것이다.
안개가 흐르고 있는 무화림!
"있다, 나를 부르는 기호(記號)가! 칠 일 만이다."
무유서생의 입술이 돌연, 흰 이빨에 질끈 깨물렸다.
찰나(刹那)의 순간, 그의 눈에서는 푸른빛이 번갯불처럼 쏘아져 나갔다. 물론, 그것은 곧 담담해졌고 무유서생의 표정도 본래의 신색을 되찾았다.
무화과 나뭇가지, 대체 누가 거기에 붉은 천을 묶어 둔 것일까?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