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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기-13차시 합평작(5월 8일 용)
1. 실향 그 이후 /금우동
1.초등학교 6학년 1학기 말에 대구 명덕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이윤복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의 영화 주인공 이윤복과 같은 학년이었다. 외가에 의탁하여 고향을 떠나온 후 고향은 안동댐으로 수몰되고 실향민이 되었다.
2.안동은 노론과 서인 중심의 중앙 정치무대에서 소외되었으나 위기지학의 퇴계 학풍을 중심으로 처사 학풍을 일으켜 전국의 가장 많은 불천위 종가와 부패한 왕권정치에 맞서 만인소의 주도 세력으로 참여했다. 왜적의 침탈에 맞서 예안 통문으로 의병봉기를 일으키고,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가를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3.내가 살던 마을은 안동군 예안면 귀단리 고통마을이었다. 과거 영남 좌도의 중심 예안은 도산을 품고 있었고, 도산은 퇴계 학풍의 중심 도산서원이 있던 곳이 부포와 이웃해 있다. 가까운 지역 부포는 도산서원에 퇴계와 함께 배향 된 월천 조목의 매제인 성재 금난수의 고조부가 처향을 따라 봉화에서 부포에 입향하여 함께 일군 부포마을이 낙동강과 동계수가 합수하는 곳에 있었다. 고통마을은 부포의 불천위 성재문중을 종가로 하는 봉화 금문이 일족이 부포와 이웃한 곳에 중심세거지로 삼아 집성촌을 이루고 누대에 걸쳐 살아온 곳이다. 나는 성제 금난수의 13대 지손이고 형님은 종가에 양자로 갔다가 6.25때 행불되었고 아버지는 종가 문중 종사를 보시며 종가 문중 산을 산판하고 그 자금으로 학산 문집 5권과 나산세고 5권을 발간하시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선친 산소를 부포 문중산으로 면리하셨다.
4.고향마을에는 여러 개울이 합수하여 동계수라는 강을 이뤘으며, 동계수는 샘끝을 지나 남강 들을 감싸고 돌아 횃골 어귀에서 안마(안마을)라고 부르는 부포의 낙동강 품으로 들어갔다.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까지 약 60여 호가 거주하게 되었다. 인근 마을인 인포, 태곡, 인계, 동천, 도촌, 삼계, 재산 등 거주자가 고통을 통하여 예안면으로 왕래하는 통행 중심지였다. 행정구역은 예안면 귀단리(남산, 지촌, 고통, 인겔)로 되어 있다.
5.“마을 이름을 고통 골이라 했다. 대밭골과 보리골을 품고 있으며, 수골, 높은 등, 아홉 사리, 열두 사리, 양지 갓을 통틀어 고통 골이라 불렀다. 아홉 사리는 마을 사람들의 나뭇길이고, 윗택골 사람들의 생필품 보급로였으며, 수천수만 켤레의 짚신과 고무신이 다져놓은 오솔길의 자취는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거기엔 청량산 줄기의 마지막 해발 420m의 두루봉이 너그럽게 마을을 품고 있다. 동계수가 어머니라면 두루봉은 마을의 아버지였다.”
- 이원길의 고향 이야기 본심이 중에서 -
6.고통 지명의 구전되는 내용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청량산으로 몽진할 때 인포에서 와운데를 통과하여 바드레길로 지나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가 행렬이 인포에서 휴식하면서 고통을 바라보니 동서 팔방을 볼 수 있어 높은 산과 소통할 수 있는 지형이고 경관이 고귀하니 고통(높은 곳과 소통함)이라고 하였다는 설과, 높은 분이 지나쳐 간 마을이라고 하여 고통이라고 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공민왕이 몽진할 때 바드레는 옹 옹주 탄생 태를 매장한 장소를 태봉이라고 하며, 학산은 인포에서 휴식할 때 왕비가 거울 속의 고통 서쪽 산이 고상한 학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며, 바드레는 왕족의 태를 받았다고 ‘바드레’라 하였다는 구전이 있다.
7.고향의 음력 7월 하순, 세 벌 논 메기가 끝나면 풋구놀이를 한다. 풋구는 원래 논에 피가 자라서 얼굴을 찌르면 문둥이가 된다는 세 벌 논까지 매느라 고생한 머슴들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집집이 십시일반으로 준비한 먹을거리로 잔치를 열어 풍물놀이와 함께 흥겨운 하루를 보냈다. 어릴 때 온 마을 집마다 풋구패를 따라다니면서 종일 춤을 추었던 기억이 새롭다.
8.어릴 때 늘 병약했던 나는 11남매 막내로 겨우 씨 하나 건진 귀한 자식이어서 논싯골 고인돌과 뒤싯골 바위에다 나를 팔았다. 어머니와 무당을 따라 큰 바위 밑에서 어머니와 함께 절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이 팔기’는 아이의 명이 짧거나 사주가 좋지 않을 때 신이나 자연물 또는 수양부모를 정하여 아이의 수명장수를 비는 의례였다.
9.“동계수 여울 돌 사이에는 꾸꾸리가 살았다. 메기처럼 용맹하지 못하고 노리치처럼 날렵하지도 않은 꾸꾸리는 제 울타리 밖을 넘보지 않는 우직한 고기였다. 그러나 피라미처럼 가볍게 꼬리질 하지 않고, 붕어처럼 함부로 입을 놀리지도 않으며, 수백 리 낙동강을 거쳐 바다까지 다녀온 은어처럼 제 견문을 자랑하지도 않는 폼이 구용(九容)을 두루 갖춘 군자 같았다. 한결같이 듬직한 이 고기를 마을 사람들은 ‘본심이’라고 불렀다.” - 이원길의 고향 이야기 본심이 중에서 -
추로 지향, 이제 늦은 중년을 맞이하면서 안동 껑꺼이의 ‘본심이’가 그리워지는 건 아마도 잃어버린 고향을 떠나 척박한 세상을 부평초처럼 부박하게 살아온 세상살이의 한이 켜켜이 쌓였기 때문이리라.
10.엊그제 같이 떠나온 고향을 해마다 산속에 누워 계시는 선친의 성묘와 종중의 불천위 제사를 위해 방문한다. 해마다 허허롭고 삭막한 산천초목과 무언의 대화를 나눌 뿐이다. 칠순의 나이에 고향을 저수지로 바라보는 마음은 그저 가슴이 먹먹할 뿐, 허망하고 서글프고 쓸쓸한 심정을 안으로만 삼킬 뿐이다. 고향의 삶터와 들판을 상상하면서 커다란 저수지를 바라본다. 안동댐으로 수몰된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태백에서 발원하여 안동과 영남의 젖줄로 충실히 그 역할을 하였던 낙동강이 안동댐으로 도시민의 식수원이 되면서 고향의 추억과 동심은 고스란히 저수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때로는 그 흔적들이 가끔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커다란 저수지로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11.동심과 추억이 깃들어 있고, 화수분 같던 붕정만리 꿈을 키우던 터전을 잃어버린 채 뿌리뽑힌 삶이 되었다. 그 무엇인지 모를 결핍과 허기와 갈증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고향을 잃어버린 삶이 가슴을 이리도 아리고 쓰리게 하는가 보다. 마치 둥지에 한 번도 앉아보지 못한 사막의 할단새처럼, 무언가 소중한 것을 크게 잊어버리고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아니 잃어버린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인생의 가장 빛나는 보석이었을 소중한 가치가 그리워 폐허처럼 피폐해진 마음으로 꺼이꺼이 피 울음을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2. 날벼락 행복 / 조장래
달포 전 무르익어가는 가을의 어느날 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지만 온통 뜬 눈으로 보낸 밤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에서 열리는 내일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야 했다. 그 누구에게 뒤질세라 해외여행을 떠나기 위해 인천공항행 셔틀버스의 출발지인 동대구복합터미널로 가야 할 시간이다. 오지랖이 넓어 매사에 치밀함으로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 시공간으로 여유로움을 고려한 출발시간이다.
오늘도 예외없이 사건은 일어났다. 비몽사몽간에 아파트 현관 앞에 나서면서 며칠 전 깔아둔 앱으로 택시를 호출했다. 단지 내 가로등은 있었지만 30년이 넘은 아파트의 커다란 나뭇가지로 꽤나 어두웠다. 배려한답시고 눈에 잘 띄게 입구관리소 앞으로 걸어 나갔다. 택시가 도착해야할 시간되었음에도 택시의 불빛은 보이지 않았고 휴대폰이 울렸다. 호출한 장소에 왔는데 손님이 계시지 않아 찾는 전화였다. 여차여차한 설명으로 우리가 있는 곳을 안내하여 호출한 택시임이 확인되었고 이내 복합터미널로 내리 달렸다.
호출한 장소에서 이동하지 말고 그 자리에 있어야만 GPS에 뜨는 장소에서 도킹할 수 있다고 한다. 기사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밝은 곳으로 움직인 것이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일어날 수 있는 변수를 생각하여 여유롭게 시작했지만 넓은 오지랖 탓에 오늘도 한건 했다.
국내 여행사 직원과 미팅한 후 8쌍의 부부 16명이 이번 여행의 동행자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단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여행 부부부터 결혼 40주년 여행 부부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 5,60대였다. 짐을 부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벼운 아침식사를 했지만 13시간 40분의 비행에 대한 압박은 가벼운 마음을 그냥 두지 않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항로를 남으로 우회하여 1시간 이상을 더 하늘에 떠 있어야 했다. 간간이 통로에 나가 뒤틀리던 몸을 추스르며 달래던 긴 시간의 비행 끝에 바로셀로나 공항에 도착했다. 다행이 바람의 영향으로 단축된 20분이 지루한 비행을 잘 견디며 참아낸 보너스 같았다. 가이드와 간단한 인사 후 호텔투숙으로 여행이 시작되었다.
젊은 시절 태권도 사범으로 스페인에서 현지 남자와 결혼하고 정착해 현지 여행 가이드였다. 중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바다진출과 신대륙의 발견 등 박식한 세계사는 대충 때웠던 고등학교 때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에 못지않게 국제결혼으로 스페인으로서 살고 있는 가이드의 걸쭉한 삶의 이야기는 매일 매일 이벤트였다.
3년 전 이맘때쯤 아내와 서유럽을 다녀 온 적이 있다. 평생토록 직장생활을 마치고 퇴직하는 아버지를 위해서 자녀 둘이서 보내 준 여행이었지만 이번은 자녀들 몰래 떠나는 여행으로 했었는데 아들 녀석이 막판에 어떻게 알게 되어 아내 통장으로 용돈 조금 쏘았으니 맛있는 것 사 드시고 좋은 여행되라는 메시지다. 믿음직하고 든든한 아들이었지만 늘 빈구석이 있는 것 같았는데 장가를 가더니 좀 의젓해진 것 같다.
7시간 시차가 있어도 시간대에 맞추어 수면에 방해되지 않게 톡으로 주고받으니 마치 옆에 있는 것 같아 든든하다. 크고 작은 이벤트로 장식되는 7박 9일은 쏜살같이 빠르다. 벌써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니 좁은 비행기 안에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들인 노력에 아쉬움이 남는다.
톡으로 여행에 대한 안부와 인천에 들어오는 시간을 물어왔다. 귀국하는 다음 날 스케줄로 바로 내려갈 것이라는 의사도 알렸다. 여행은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 여행도 참 즐거웠고, 너희들도 코로나로 제대로 가지 못한 신혼여행을 계획하라는 이야기도 덧붙여주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인천공항 입국장에만 오면 마음이 편안하다. 비슷한 시간에 들어온 입국자 외에는 더 없는 듯 그리 붐비지도 않았다. 짐가방을 기다리는 동안 함께 했던 일행들과는 미리 인사도 해두었다. 짐을 챙겨 나오는데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아들과 며느리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코로나로 미루고 미루어 금년 2월에 결혼한 신혼기의 아이들이다. 여행팀의 일행 중에 신혼여행으로 함께 한 두 쌍이 있었다. 코로나로 간단한 국내 신혼여행으로 때우고 계획한 신혼여행을 해외로 가지 못한 아들부부가 생각나 유난히 눈길이 갔었다. 그런데 그 아들 부부가 버티고 서 있어서 흠칫 놀랐다.
바람도 쐬고 드라이버 삼아 나왔다고 한다. 대구로 오는 공항버스 대기 중에 아들이 아내에게 봉투를 내민다. 아내는 여행갈 때 쏴주고 또 무얼 주느냐며 말로만 거부하며 천연스레 받아서 가방에 넣었다.
“고맙다. 잘 쓸게.”
한참이 흘렀다. 머뭇거리듯 아들 녀석이 “봉투를 받으면 확인하고 넣으셔야지....”
봉투를 받아 그냥 가방에 넣는 아내에게 에둘러 말했다.
“아, 참 그러네.” 아내가 봉투를 꺼내어 열어본다.
가로로 된 봉투의 속지에서 나온 것은 초음파 사진이었다. 순간 축하와 수고와 감사의 환호가 터졌다. 얼싸 안고, 다독이고, 주위는 아랑곳 하지도 않고 야단이었다. 무척 기쁘다.
해외여행의 즐거움도 즐거움이거니와 곧 만날 손주를 생각해 본다. 고향 집으로 달려오는 버스 속에는 온 통 미소로 가득 찼다. 아빠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비밀스럽게 마중 나온 아들 녀석의 능청스런 행동이 귀엽다.
결혼 40년을 무난하게 살아온 것에 대한 보너스인가.
“이 녀석이 이른 봄에는 결혼으로 기쁨을 가득 주더니 이 가을에 또 한 건 해냈네!
3. 개물 나무/손정희
1. 어릴 때 먹었던 몇 가지가 생각난다. 그것은 음식이 아니지만 우리가 배부르게 먹던 것들이다. 그 시절 항상 배가 고팠고 지금처럼 병원도 가까이 없었고 그 무엇보다 가난했다.
2. 4월의 아카시아 향이 코를 찌를 때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일들이 생각나 빙그레 웃고는 한다. 예전 대구는 시골 소도시처럼 논밭과 산이 집 주변 가까이에 있었다. 우리 집은 지금의 경대 후문과 북문 사이 동네에 있었다. 담도 없는 야산으로 들어가면 학교 건물이 드문드문 있었다. 그리로 가면 온통 아카시아 나무와 밤나무가 있었다. 4월 아카시아꽃이 필 때면 아카시아꽃을 손으로 확 훑어서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면 입안 가득 향기가 퍼지는 꽃을 밥 먹듯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달콤하면서도 배를 채울 수 있어서 나도 오빠들을 따라다니며 꽃을 먹었다. 그러다 손에 가시가 박힌 일도 많았다.
3. 여름의 들에 1년생 개물이라는 풀이 있다. 먹을 것 없는 어릴 적 동네들에는 지천에 핀 개물이 우리의 간식이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개물 나무라 했다. 작은 풀에 알맹이가 작고 포도송이 같은 것이 주렁주렁 열렸다. 입가와 혓바닥이 온통 새카매지도록 따 먹었다. 요즘 용어로 이것을 까마중이라 한다. 염증 해소에 효과적이고 부기를 없애고 소변 보기를 편하게 해주고 독성도 약간 있다. 이 까마중, 개물이 다 죽어가던 나(4 살 정도였던)를 살렸다. 큰딸을 일찍 여읜 엄마에게는 또 한 번 위기였다. 새까맣게 타들어가던 엄마의 가슴을, 어린 나를 개물이 낫게 해주었다.
4. 내가 4살이 채 되기 전 여름날이었다. 갑자기 낮에는 멀쩡하던 아이가 열이 펄펄 끓고, 자지러지듯 울어대기 시작했다. 한밤중이라 의원에도 못 가고 엄마와 아버지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어 안절부절못하였다.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아이 몸만 계속 닦아줄 뿐이었다. 날이 새도 여전히 숨넘어가듯 우는 아이, 열도 내리지 않았다. 엄마는 우는 아이를 덮쳐 없고 동네 한약방으로 뛰어갔다. 침을 맞고 약을 지어와 달여 먹였다. 열은 조금 내렸으나 아이가 자꾸 붓기 시작했다. 약을 처방받아와 달여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아이는 점점 더 부어서 몸이 두 배나 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 조금 내리던 열도 다시 오르고 계속 울던 아이도 힘이 없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5. 엄마는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엄마 자신이 못 먹어 젖도 나오지 않아서 사카린과 쌀뜨물을 먹이던 큰 딸, 두 돌이 지나도 앉지를 못했다. 그 아이가 세 돌도 안 되어 본인의 부주의로 뱀에 물려 죽었다. 그런데 지금 또 잘못하면 딸이 죽을 것 같이 아프다. 애간장이 탄 엄마는 온 동네를 다니며 좋은 처방이 없겠냐고 수소문하고 다녔다. 아픈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부모님 앞에 알려진 비방이 있었다. 개물 나무를 뿌리째 뽑아서 삶아 물을 먹이라고 했다. 즉시 지천에 널린 개물을 뽑아 삶았다. 쓴맛에 먹지 않으려는 아이에게 억지로 먹였다. 열도 내리고 울음도 멈췄다. 계속 먹이자 부기도 점점 빠졌다. 아이가 다시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부부는 애타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개물이 아이를 살렸다.
6. 신장염이라 했다. 성인 신장염은 치명적이지만 소아 신장염은 완치가 된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앓고 나서 자라면서 잔병치레는 하지 않았지만 빼빼 마르고 핏기 없는 얼굴이라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했다. 잠결에 "야가 와 이리 허약한지 걱정입니더. 토끼 한 마리 고아 믹입시더." "그리하지. 잠꼬대도 다 하는 기 안쓰럽네."라고 두 분이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7. 요즘도 시골에서 개물을 보면 반갑다. 어릴 적 맛있게 먹었던 간식이었고, 나를 살린 고마운 풀이었던 것을 나중에 알았기 때문이다. 까맣게 익은 열매를 따 먹어 본 일이 있었다. 달콤하던 옛 맛이 아니었다. 어릴 땐 이런 것을 그렇게 맛있다고 먹었던가 싶었다. 요즘엔 먹었을 것이 넉넉하고 더 맛있는 것도 많아져 그럴 것이다. 개물, 표준 용어로 까마중이 나를 살렸다. 여러 가지 의학적 효능이 많아서 알레르기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식물이다.
4. 향나무의 품격/오수미
1)무엇이 그리 아팠을까, 무엇이 그리 답답했을까. 뒤틀리고 썩어 문드러져 텅 빈 속이 안쓰럽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살아온 모습을 알 수 있다는데, 나무는 어떤 풍파를 겪었기에 저리도 험한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 이것이 나무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2)영천 화북면 횡계리에는 모고헌이 있다. 모고헌은 횡계서원에 있는 정자이며, 정자 뒤에는 수령 300년이 넘는 향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시에서 지정한 보호수이다. 표지석에는 ‘품격’이란 말이 쓰여 있다. 나무에게 품격이라는 말을 붙인 것을 보면 나무의 가치를 인성에 비유한 것은 아닐까 싶다.
3)벼슬보다 학문에 뜻을 두고 이 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학자 정규양의 인품이 나무에게 보살핌으로 고스란히 전해졌으리라.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긴 세월을 홀로 견뎠다. 사람도 곁에 있던 사람이 먼저 떠나면 견디기 힘든 것처럼 나무도 마찬가지다. 정자에 앉아 글을 읽던 그가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사람도 고독에 무너지는데, 나무라고 어찌 멀쩡한 자태로 살아낼 수 있겠는가.
4)지지대에 기댄 모습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요양원에 계신 시어머니의 모습을 닮았다. 수령 300년 향나무는 시의 관리를 받는다. 상수 100년의 어머님은 요양원에 계신다. 300년 역사를 간직한 향나무의 품격은 시나무, 100년 인간사를 알고 있는 어머님의 품격은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5)어머님은 6.25전쟁으로 부모형제자매를 잃었다. 어린 나이에 남의 집 가정부로 들어가 그 집 아이들을 업어 키우며 삶을 이었다. 가정을 이루었으나 서른 남짓에 남편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었다. 열두 살, 아홉 살, 다섯 살 그리고 돌배기 자식이 곁에 있었다. 막내를 업고 시장에서 나물장사를 했다. 시장은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서 인연을 찾으려 했다면 어렵지 않았을 터인데, 어머님은 끝까지 자신을 견디고, 자식들을 돌봤다. 자신과 자식들을 지켜내느라 얼마나 살천스럽게 살았을까.
6)언젠가 어머님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어머님은 그 긴 세월을 어찌 홀로 지내셨나요?”
어머님의 대답은 먹고 사느라 그랬단다. 배고픔이 외로움보다 더 컸을까, 한창 젊은 나이에 사람이 그립지는 않았을까. 수피의 거친 면이 어머님의 손처럼 느껴진다.
7)나무는 텅 빈 속을 다 드러냈다. 속살이 모두 떨어져나갔다. 뭇 생명들이 갉아먹은 속이 썩어 들어가고 거센 비바람에 쓸리고 거친 인간사에 휘말려 상하기를 오랜 세월 반복했음이 틀림없다. 속을 비워내지 않고는 견뎌낼 수 없었으리라. 썩고 문드러져 사그라지기까지 오랜 세월을 어찌 참았을까.
8)어머님은 화전민으로 살던 시절, 나물을 캐서 산을 넘어 시장을 오고 가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캄캄한 밤, 산을 넘으면서 산짐승들 울음소리에 얼마나 무서웠을까. 기다리는 자식들 생각에 얼마나 애태웠을까.
9)학교를 보내고 출가를 시키면서 평탄하기만 했을까. 어머님의 아들인 내 남편은 엇나가고 싶었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지만 어머님 때문에 착하게 살았다고 했다. 신이 모두를 돌볼 수 없어 엄마를 만들어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식들을 위해 살아온 100년 묵은 어머님이다. 그 이름만으로 이미 품격이다.
10)나무는 텅 비어버린 속으로 가지의 푸른 잎들을 모두 살려내고 있었다. 나무초리 푸른 바늘잎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향기가 흘러내렸다. 300년 묵은 향기다. 영원한 향기다. 모고헌을 지키는 나무의 의지다.
11)어머님이 알츠하이머진단을 받으시고 요양원에 가신지 10년이다. 코로나19 방역으로 3년 만에 대면만남을 했다. 집에 가고 싶다고 하시던 어머님은 이제 말이 없다. 그저 손을 꼭 잡고 가만히 바라보신다. 속을 다 비워내셨는가 보다. 아픔도 슬픔도 모두 감내하신 듯했다. 깊게 패인 주름살이 물 흐르듯 흐르는 것 같았다. (12.3)
5. 나의 소임 /변미순
1) 아버지는 피부가 검다. 난 그대로 닮았고 중학교 때 별명이 깜순이었다. 키도 작고 얼굴도 검은데 커다란 눈만 껌뻑껌뻑 거린다고 놀림받기도 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닮아서인지 검은 피부가 건강하다고 생각했다.
2) 대학 때 단짝 친구는 유난히 흰 피부였다. 책상 모서리에 살짝 부딪혀도 멍이 들었고, 그것을 본 남학생들은 그녀를 과보호해 주었다. 검은 피부인 나는 넘어져 피부가 벗겨지고 시커먼 멍이 들어도 표시가 잘 나지 않는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검은 피부로는 누구의 보호를 받기는 힘들다는 것을 배웠다.
3) 아버지와 붕어빵인 나는 가끔 엄마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두 분이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날이면 심했다. 용돈 받는 날인데도 아버지한테 받아가라 미루셨고, 낮잠자는 모습까지 아버지를 닮았다고 툭 차고 지나가셨다.
4) 아버지와 나는 독특한 자세로 잠을 잔다. 오른쪽 손이 왼쪽 어깨를 잡고 잔다. 그게 뭐 특별한가 싶지만 아버지랑 나랑 같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누가 봐도 무서운 닮은꼴이라고 놀란다. 그 모습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부녀가 말투, 행동뿐만 아니라 잠자는 모습까지 붕어빵이라며 만날 때마다 놀렸다. 아버지의 식성까지 빼 닮은 것에 대해 난 오히려 아버지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5) 아버지와 나의 얼굴은 길어 말상이라고 했다. 얼굴이 사각지거나 둥근 것보다 길쭉한 계란형의 미남, 미녀형이라 좋았고 얼굴형 때문에 살이 쪄도 날씬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6) 딸도 얼굴이 길다. 어떻게 3대째 얼굴형이 그대로인가 싶다. 딸은 긴 얼굴형이 기린 같고, 검정색 옷을 입으면 저승사자형이라 놀림 받는다며 불만이었다. 작고 동글한 얼굴형이 여성스러우며 귀엽다는 것이 요즘 세대들이 좋아한다며 나와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미의 기준이 세대 간 차이가 컸다.
7) 아버지와 나는 옥수수, 번데기, 누룽지, 땅콩을 좋아하는데 집착이라고 할 정도이다. 네 가지가 눈앞에 있으면 바닥이 보여야 멈출 수 있다. 가족 중 누가 옥수수를 사 와서 먹으면 내 것을 남겨두거나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할 정도이다. 식은 밥이 남으면 프라이팬에 얇게 노릇노릇하게 누룽지 만들기도 잘 해낸다.
8) 도경이가 이 4가지를 다 좋아한다. 겨우 세돌이 지난 외손녀가 공원에서 산 종이컵에 담은 번데기를 맛있게 먹는다. 옥수수, 누룽지, 땅콩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좋아하는 간식까지 이렇게 닮아가는 것을 보면서 피로 이어진 가족간 사랑이 어찌 깊어지지 않겠는가.
9) 지구상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수 많은 생물들은 어쩌면 유전자를 이어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생태학 전문가의 말에 백번 동감한다. 모든 생명체는 다음 세대로 유전자를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전달은 번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번식은 따로 학습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개체들마다 이미 유전가가 입력되어져 있다.
10) 봄이면 봄꽃이 서로 다투듯 꽃을 피워댄다. 생강나무 노란꽃을 시작으로 산수유, 매화, 진달래, 개나리, 동백, 벚꽃, 복숭아꽃, 살구꽃이 지천으로 핀다. 어떤 불량한 환경이 와도, 4월에 때아닌 눈이 내려도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봄마다 꽃은 피었다. 다음 세대를 출생하려는 임무를 수행 중이다.
11) 대가족이었던 과거에는 자식을 낳지 않는다는 것은 새댁이 쫓겨 날 칠거지악 중 하나였다. 당연히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가면서 인구는 완만한 증가가 이어져 갔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급격한 인구감소로 사라질 국가로 지목 받고 있다. 그 주체인 젊은이들의 고민과 심각성은 기성세대들조차 이해도 되고 걱정도 된다.
12)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여도 자식 낳기를 포기하고 있다. 남자들은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여자들은 직장을 잃을 수 있어서라고 한다. 자식부양에 대한 시간적, 경제적 부담이 부모의 경력단절, 궁핍뿐만 아니다. 잘 키우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우울한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다.
13) 다음 세대 잇기를 포기하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사람이 지구의 주인인양, 만물의 영장인양 하며 살지만 지구의 환경을 나쁘게 만드는 파괴 주체이면서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번식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 당연해지는 분위기는 어떻게 바꾸어갈 수 있을지 암담하다.
14)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된 나라중 우리나라는 최근 출산율이 1.0 이하로 세계 최저 수준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젊은이들의 이기주의로만 손가락질 해서는 안된다. 그들을 만나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원인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현 정부는 국가존재가 위협받고 있는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고 설득하여 어떤 문제점보다 빨리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15) 다시 생각해보자. 공생(共生)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인간의 욕심이 만든 잘못된 생활방식은 아닐까. 겨우 백년 정도의 한정된 삶을 살면서 우리의 삶의 목표, 목적이 너무 자본주의적이고, 경쟁적이고, 이기주의로 방향이 비틀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와서 짚신을 만들어 신고, 우물 물을 길러 마시자는 것은 아니더라도 생존과 번식이라는 생명체가 해야 할 가장 기본 의무마저 외면해서는 안 된다.
16) 모든 생명체는 부모에 의해 태어나고 자력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발전시켜간다. 자식을 낳지 않는다는 것은 차세대가 생명체로 태어나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할 기회마저 빼앗는 것이다. 생식 가능한 사람이 가임을 거부하고, 대를 끊어버리는 일을 하겠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
17) 수많은 유전자들의 결합에 의해 유전자는 다양해지고, 그것으로 외부환경으로부터 이겨낼 힘이 길러진다. 다양한 유전자 조합으로 세상에 대응해 가고 지구가 생명이 있는 혹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자기 자신은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 삶을 영위하고 누리면서 자신의 자식을 포기하는 것은 생명체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18) 매년 봄꽃이 피는 것에 환영을 하고 즐기면서 정작 그들이 번식과 증식에 의무를 다하고 있음을 깊게 깨달아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잘난척 하여도 자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고 배우고 함께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들보다 책임감 없는 생명체일 뿐이다.
19) 나는 아버지의 딸이라서 감사하고, 내 딸이 소중하고 다시 이어진 외손녀가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다. 그 백년의 역사 속에서 외형도 습관도 식성까지 닮아가는 유전의 위력에 놀란다.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기본적인 소임을 다하였다는 자부심으로 가슴도 뜨거워진다.
6. 아버지의 무게 / 윤미선
아침에 눈을 뜨면 마주치는 오래된 말이 하나 있다. 테두리를 잡아주는 쇠는 까맣게 삭았고 몸통을 이루는 나무도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앉아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어렵다. 말은 지금의 표준 계량이 나오기전 조선시대 부터 사용하던 우리 민속 전통의 계량 단위였다. 나무로 만들어 한번 계량에 쌀 한되가 되는 네모난 됫박과 이 됫박을 10번 부으면 쌀 한말이 되는 둥그런 원통형 도구를 말이라 하였다. 그 말은 우리 가족이 모두 대구로 나와서 장사를 시작할 때 아버지가 장만하신 것이었다.
아버지는 오래 딴집살이를 하시던 할머니와 한 집으로 합치면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어릴 때 할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마저 내가 태어나던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하늘아래 부모님 두분을 모두 찾아뵐길 없어지고, 외로워하시던 아버지는 자식들 공부시키고, 돈도 벌려고 대구로 나와 쌀가게를 시작하셨다. 홀로 되신 할머니는 먹고 살기 위해 아버지를 친척집 쌀가게에 의탁하셨다. 친척집 쌀 전에서 점원을 하며 어깨너머로 배운 장사가 아버지의 유일한 밥줄이었다. 쌀가게를 시작으로 고추 빻는 기계도 들이고, 연탄장사도 시작하면서 규모를 늘려가셨다. 가게의 규모가 늘어나는 만큼 부모님은 밤낮없이 장사에, 가게 일에 매달리셨다.
아버지는 아무리 추운 겨울이어도 동이트기전 새벽에 일어나 시외버스를 타고 오일장을 다니셨다. 그날은 어김없이 말을 자루에 넣어 어깨에 메고 떠나셨다. 그렇게 아버지의 장사에는 항상 같이 다녔던 쌀 한말이 들어간던 말이었다.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나가셔서 대형 트럭 가득 쌀가마니를 싣고 한 밤중이 되어 집에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팔십키로 쌀가마니를 직접 어깨로 메고 옮기시며 우리 다섯남매를 키우고 지켜주셨다. 아버지는 일년 열두달 고무신만 신고 다니셨다. 한겨울에도 양말 한 켤레에 고무신을 신은 발이 시리지 않다고 하셨다. 그때는 ‘우리 아버지 대단하다.’며 신기하다는 생각만을 하였다. 지금 철이 들어 헤아려 보니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아버지 맨손으로 자식들을 남들 못지않게 키워 내시려는 욕심에 한 겨울에도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 다니신 것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쌀가게가 바쁘게 돌아 갈 때는 말도 정신없이 쌀을 되고 가미니에 쏟아 부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아버지와 함께 하였는지 쌀말의 몸에는 두껍게 쌀겨를 입고 한 몸이 되었다.
언제나 손에서 말을 놓지 않으시던 아버지 삶의 무게는 얼마였을까? 한말을 한번에 담을 수 있는 쌀 한말의 무게였을까, 쌀 다섯말을 부어야 만들어지는 쌀한가마니의 무게였을까, 아니 그보다 더 딸의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삶의 무게 였으리라. 아버지는 한번도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보신적이 없으셨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신 적이 없으셨으리라. 아버지가 일곱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친척집 쌀가게에서 점원 일을 해야지만 밥이라도 먹을수 있는 형편이었다. 멀리서 고생하시는 할머니와 하루라도 빨리 한지붕아래 살고자 하셨던 소원하나만 부여 잡고 그 고단한 생의 시간을 지나오셨다.
기댈 언덕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가장으로서의 무게는 어깨위에 있었다.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고난이 그림자 처럼 따라왔다. 아버지는 앞에서 비질을 하고 길을 만들면 뒤따라오는 그림자를 피해 도망가야하는 숨가쁜 시간을 살아내셨다. 아들이어야 하고, 남자여야 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삶의 순서를 아버지는 잃어버리셨다. 아니 돌아볼수 없으셨으리라. 삶의 다른 길은 아버지의 시간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피할수 없는 삶의 무게에 나무 말하나 부여 잡고 억척같이 아버지의 삶을 만들어 내셨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무게를 진다. 여자는 출산과 육아의 과정이 가장 큰 삶의 무게가 아닐까 생각한다.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의 삶이 더 무겁고 가볍다 말할수 없는 것이 우리 생의 모든 시간이다. 그 중에서 남자가 아버지로서 지는 삶의 무게는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결코 피할수 없는 숙명의 무게라 생각한다. 어느 더운 여름날 삼베 바지자락을 둥둥 말아 올리고 물 말아 점심을 드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가슴 아프게 남아있다. 새까맣게 그을린 팔뚝과 바지가랑 아래 힘줄 불거져 새까맣게 그을린 다리, 새까만 얼굴 가득 지친 피로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단한 행색에 물말은 밥 한그릇을 넘기시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아버지는 이른이 넘어 '이제 쉬면서 살란다.'하시던 어느날 폐암말기 판정을 받고 한달만에 눈을 감으셨다. 나무로 만들어져 낡고 덜그럭 거리며 새까맣게 변해버린 말처럼 일만 죽도록 하고 까맣게 늙고 노쇠한 아버지의 모습을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뵈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살아생전에 다하지 못했음을 후회하지 않는 자식이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예외 일 수없지만, 아버지의 노고에 나를 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결혼하고 나서 친정을 제대로 찾아보지 못했다. 나 살기 바빠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빈말을 쏟아내면서 돌아 가시기전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뵙지 못했다. 빈손으로 달랑 달랑 직장생활하고, 내 아이 둘 건사하는 일에 언제나 피곤하디는 말을 달고 살았다. 아버지가 먼저 쓸어주신 삶의 무게로 내 아이들만 업고 가도 될 무게에 푸념이 먼저 나온다. 부족한 여식의 푸념이 아버지 앞에 죄송한 마음 가릴 길 없다. 아버지가 아셨다면 아마 안죽을만큼 혼이 났으리라.
아버지의 분신 하나 챙겨와 아침 저녘으로 아버지 뵙듯 한다. 말을 잡아주는 동그란 테두리 쇠가 낡아서 헐렁거리고 나무도 메말라 하나로 붙어있지 못한다. 아버지는 자신조차도 예측할수 없는 삶의 회로에 잠도 안자고 지나 오셨다. 한 말 가득 쌀을 부어주고 돈을 물어들일 때는 몰랐던 피로가 퇴락한 말 가득 남아 있었다. 쇠와 나무로 만들어진 말의 무게가 아버지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어 주었다. 내 삶의 무게는 아버지 삶의 무게와는 비교할수 없는 쌀 한말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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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난 주에 시간이 모자라 충분히 다루지 못한
- 장님들이 그리는 코끼리 정물화 /이정열
- 한순이의 진달래 /최미숙
두 작품을 이번 주에 먼저 합평합니다.
문우님들, 지난 주 프린트물 지참해 오세요.
네, 박사님. 확인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연휴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