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학교의 이름이 보이는 것은 언제인가 궁금한 일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제17대왕인 소수림왕 2년(서기 372)에 대학大學을 설립하고 자제를 교육하였다. 이것이 현존 조선사상에 나타난 학교기사의 처음이다. 어쩌면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국 초기부터 학교를 설치했을 수도 있으나 기록상으로는 태학이 처음이다.
이 해는 중국 동진왕 부견이 사신과 승 순도로 하여금 불상과 불경을 보냈던 동년이며 왕이 도성에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설한 것은 그 후 3년만의 일이다. 소수림왕은 전진과 교류하면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국립교육기관으로서 수도에 태학을 세웠던 것이다. 이는 율령의 반포, 불교의 수용 등과 함께 국가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태학太學교육의 내용은 어떠했을 것인가? 태학은 중국학제를 모방한 것이요 또 학생인 자제는 당시 통치책임을 가진 왕공귀족의 자제인즉 태학의 교과과정은 통치기술인 한유漢儒의 경사經史, 서書, 산筭, 법령律令 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의 학교는 오직 수도에 태학 하나만이 설립된 것으로 기록된 점에 대해서는 최익한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이때 고구려는 나라를 세운지 벌써 4백 여 년이나 되었고 또 국토는 광대한 북부대륙을 석권하고 하물며 압록 이남의 반도를 집어 삼키려는 즈음이므로 사방의 적국에 대하여 군사일과 외교가 극히 다단하였으므로, 교육제도는 문무 양쪽의 방향으로 일정한 수의 기관이 이미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병참과 수도를 통하여 군인과 관리를 양성하는 일정 정도의 학업기관이 벌써부터 존재하였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태학을 창설한지 250 여 년 후 고구려 말 영류왕 시대에 고구려는 당나라의 도교를 전해 받았고 또 자제를 보내 당의 국학에 입학한 점도 학교기관의 발달을 뜻하는 것으로 봤다. 또 하나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큰 나라이면서 중국과 신라, 백제의 중간에 위치하였던 만큼 고구려의 교육은 학문(文事)보다 무예, 전투(武事)에 치중했던 것이 틀림없다고 보았다.
둘다 비슷한 해석으로 보인다. 학문적으로 아직 풍부하지 못한 상황이고 지방제도가 잘 갖춰지지 못하다면 지방마다 학교기관을 설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학문보다 무예, 전투에 치중한다면 그것은 앞선 시기처럼 독자적인 학교 시설이 아니더라도 사회 내에서 자연스럽게 교육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자료가 없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