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이상국전집 제7권
●고율시(古律詩)
목차
促織歎
食蒸蠏
走筆謝希禪師惠米
手病有作
重九日。旣以手病未出遊。
十月二日。憶舊遊。
璨首座。方丈所蓄畫老松屛風。使予賦之。
戱友人製冠
冠成又作
冠成。置酒朴生園。餞梁平州公老。得黃字。
訪閔秀才。用古人韻。
又次韻
楊貴妃
謝應禪老雨中邀飮
復和
新晴
訪佛恩寺雲公。聞國令禁僧家飮。
謝梁校勘國峻送櫻桃 。
訪盧秀才永祺。用白樂天韻同賦。
復和
戱路上醉臥僧
贈沈天曹允章。是日大醉作。
訪梁參軍。梁不在。呼子壻李君與語。俄有玉川生來。因置酒留長句。
次韻。和崔相國詵和黃郞中題朴內園家盆中六詠。
仲冬十四日。同文丈老,朴還古。訪興聖寺成禪老。路上口占。
二子見和。復答之。
日晚到寺小酌。用皮日休詩韻各賦。
又和
遍閱院宇。還讀石碑。復用前韻。感舊記事。
復和
又分韻得岳字
明日。又用朴仁範詩韻各賦。
又用古人詩韻走筆書壁上
上趙令公永仁
上任平章
上崔平章讜
上崔樞密詵
重上趙令公
投崔吏部洪胤
戊午二月九日。同全履之餞朴還古之南。得舊字。
次韻朴還古南遊詩
同前
和宿天壽寺
和宿峰城
和宿德淵院
和送客湖上
和湖上偶遊
和塊居空館
和卽事
金大丈子由得尹學錄所贈朱藤杖。請予賦之。
○촉직탄(促織歎)
지난해는 뽕이파리 무성하게 되어 / 去年園中桑葉沃
누에마다 지은 고치 크기도 했었지 / 神蠶作繭大於屋
오색의 구름 비단 짜 이루나니 / 織成五色雲錦羅
베짱이의 재촉을 기다리지 않았더라 / 不待寒蟲苦相促
올해는 뽕나무가 마르고 시들었으니 / 今年桑老枯且萎
주린 누에 모두 죽어 실을 내지 못하네 / 飢蠶僵臥未生絲
온 집안 팔짱 끼고 겨울을 기다리더니 / 渾家拱手待天寒
베짱이 소리 듣곤 마음 먼저 슬프네 / 一聞促織先酸悲
수다스레 울어대도 베 한 자 없나니 / 千聲萬聲無一尺
네 아무리 슬피 운들 무슨 도움 있을까 / 爾吟雖苦終何益
달 아래 이슬 잎에 추위를 못 이기어 / 月叢露葉不耐寒
상머리 들어와 부질없이 울어라 / 入我床前空喞喞
그대는 보지 못했나 베짱이의 울음소리 저렇게 바쁜 것을 / 君不見促織之號何太忙
상자에 실오라기 없고 베짜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구나 / 箱無寸線機無聲
다만 병든 이 사람의 귀밑털이 / 唯有病夫雙鬢髮
한 소리 울 적마다 한 털이 희어지네 / 一聲促得一絲生
얽히어진 심사를 가눌 수 없는데 / 縈紆心緖亂莫斷
한밤을 지새면서 온갖 시름 짜내누나 / 一夜織得愁萬段
벌레 소리 나에게 아무 쓸데없으니 / 蟲聲於予已不費
네 부디 이제부터 울음 그쳐라 / 勸汝從今啼少緩
○찐 게를 먹으며
그대는 보지 않았던가 필랑은 술마시기에 딴 생각이 없고 / 君不見畢郞嗜飮無餘營
다만 원하는 건 게로 안주삼아 한생을 보냄이었으며 / 但願持螯了一生
또 보지 않았던가 전경이 고을살이 원함은 다른 게 아니라 / 又不見錢卿乞郡非他求
게만 생각하고 고을 일은 관여치 않았다네 / 唯思有蟹無監州
성순 웅장도 입맛을 새롭게 하지만 / 猩脣熊掌易爽口
게 맛이야 술에 더욱 맞음이리라 / 只應此味尤宜酒
강마을 아이들이 크고 살진 게를 보내왔는데 / 江童餉我蝤蛑肥
큰 딱지 둥근 배가 모두 암컷이로구나 / 厴大臍團多是雌
벼 까끄라기 동해신에게 이제 보냈으니 / 東海輸芒今已了
게는 8월에 벼 까끄라기를 동해신(東海神)에게 보내야만 먹을 수 있다.(蟹。八月輸稻芒於東海神。
然後可食。)
뒷다리 차츰 넓어 노만큼 크렸다 / 後脚差濶眞撥棹
영남(嶺南)에서, 유모(蝤蛑)가 노[棹子]를 헤친다고 했는데, 그 뒷다리가 넓어서 노와 같기
때문이다.(嶺南謂蝤蛑爲撥棹子。其後脚闊如棹子。)
평생에 글을 읽었기에 쓰르라미 방게는 분변하나니 / 平生讀書辨蟧蟛
옛날에 사도가 삶은 것은 아니로다 / 定非司徒舊所烹
삶아서 단단한 붉은 껍질 깨어보니 / 烹來剖破硬紅甲
노란 자위와 푸른 진액이 반쯤 들었도다 / 半殼黃膏雜靑汁
진흙탕에 뛰다니기 너는 좋아하지만 / 草泥跳躑雖爾宜
왕윤의 분풀이를 받았었지 / 猶被王倫餘怒移
차라리 나의 왼손에 들어와서 / 不如入我左手把
날마다 마시는 술에 안주됨만 같으랴 / 日飮無何柳得佐
시인 생활 담박하여 고기 하나 없기에 / 詩人冷淡食無魚
조롱박 삶아 먹으면 손은 쓴웃음 짓곤 하는데 / 爛蒸瓠壺客盧胡
조롱박도 다 먹었으니 또 무엇으로 이으랴 / 瓠壺食盡又何續
푸른 소반에 거여풀이 또한 보이지 않는가 / 更見靑盤堆苜蓿
딱딱한 비늘 썩은 고기도 탐낸 지 오래거든 / 硬鱗腐肉猶長饞
하물며 바닷게 맛 엿처럼 닮에랴 / 況此海産如糖甛
아이를 급히 불러 새 독을 헤쳐보니 / 急呼赤脚撥新甕
하얀 구더기 솟아올라 향냄새 풍기네 / 玉蛆星沸香浮動
게는 금액이고 술은 봉래주(蓬萊酒)로다 / 蟹卽金液糟蓬萊
어이하여 약 먹고 신선을 구하랴 / 何必服藥求仙哉
[주D-001]필랑(畢郞) : 진(晉) 나라 필탁(畢卓)을 이른다. 그가 이부랑(吏部郞)으로 있을 때
동료의 집 독에 든 술을 훔쳐 마시다가 술 관리자에게 포박을 당했는데 이튿날 보니
이부랑이었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술 수백 섬을 배에 싣고 사시 사철 뱃머리에서
오른손으로 술잔 잡고 왼손으로 게[蟹]를 쥐어 마시고 먹고 놀면 일생을 만족히 마치
리라.” 하였다. 《晉書 畢卓傳》
[주D-002]전경(錢卿) : 전곤(錢昆)을 이른다. 그가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바라고 있을 때 누가 “어느 고을을 마음에 두느냐?”고 묻자 “게[蟹]만 있고 통판(通判)이 없는 고을이면 되겠노라.” 대답했다. 이는 송(宋) 나라 초기에 통판이 지주(知州)보다 높다면서 권력다툼을 하는 고을이 있었으므로 그가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歸田錄》
[주D-003]성순 웅장(猩脣熊掌) : 성성이의 입술과 곰의 발바닥으로, 팔진미(八珍味)의 두 가지이다.
[주D-004]동해신(東海神) : 여기서는 바다를 말한다. 즉 바다에 떠내려가는 벼 까끄라기를 게[蟹]가 먹어야 독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주D-005]사도(司徒)가 삶은 것 : 사도 채모(蔡謨)가 강남(江南)에 이르러 팽기(彭蜞)를 게[蟹]로 오인하고 크게 기뻐하여 삶아 먹었다가 구토(嘔吐)가 극심하여 혼이 났다. 그 뒤에 사상(謝尙)이 이 사실을 듣고 “그대가 《이아(爾雅)》를 잘못 읽었다가 하마터면 지레 죽을 뻔했다.”고 조롱했다. 《晉書 卷77》
[주D-006]왕윤(王倫)의 분풀이 : 해계(解系)가 조왕 윤(趙王倫)과 함께 저강(氐羌)을 토벌할 때 영인(佞人) 손수(孫秀)와의 의견 대립이 있어, 손수를 베어 저강에게 사례해야 한다는 소(疏)를 올린 적이 있었다. 그 뒤에 윤과 수가 이 숙감으로 그를 몰아 죽이려 할 때 “나는 물 속에 있는 게[蟹]만 보아도 미웁거든 하물며 나를 얕잡아 보는 그들 형제이랴.”며 끝내 해치고 말았다. 《晉書 解系傳》
○희 선사(希禪師)가 쌀을 보내준 데 대해 붓을 달려 사례하다
슬프도록 가난 속에 빠져들어서 / 嗟我落寒貧
온 집안 모두가 죽을 먹는다 / 渾家皆食粥
진실로 나야 신선이 아니거니 / 亮非餐霞人
무슨 수로 벽곡을 하겠는가 / 何由得辟穀
인자한 법사의 마음 / 仁哉法師心
촌록 없이 사는 나 가엾게 여겨 / 燐我無寸祿
은혜로이 하얀 쌀 보내왔는데 / 惠然送白粲
알알이 참으로 구슬이로다 / 粒粒眞輭玉
안공의 첩을 어이 번거롭게 하랴 / 何煩顔公帖
이미 감하의 식량을 꾸어왔는걸 / 已貸監河栗
사방에서 저녁밥을 짓는데 / 扊扅方暮炊
찬 부엌에도 연기 비로소 나는구료 / 寒廚煙始綠
오히려 삼려를 비웃나니 / 猶堪笑三閭
쓸쓸히도 가을 국화 먹고 지났네 / 冷淡餐秋菊
[주D-001]안공(顔公)의 첩(帖) : 당(唐) 나라 안진경(顔眞卿)이 노 대부(魯大夫)에게 쌀을 부탁
하는 쪽지에 “내가 생업에 졸렬하여 온 식구가 죽을 마시고 있노라.” 했다.
[주D-002]감하(監河)의 식량 : 장주(莊周)가 감하후(監河侯)에게 양식을 꾸어달라고 부탁했더니
“고을 돈이 생기면 백금을 꾸어 줄 테니 어떤가?” 했다. 《莊子 外物》
[주D-003]삼려(三閭) : 초(楚)의 삼려대부(三閭大夫) 굴원(屈原)을 이른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아침에는 목란(木蘭) 위의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국화꽃을 먹는다.”
했다.
○손앓이에 대하여 쓰다
평생에 큰 붓을 휘두르기 좋아하여 / 平生喜弄如椽筆
풍월 희롱함을 그친 적이 없었다 / 嘲戲風月無停時
또 장차 조물아에 다 부치려 했더니 / 又將搪突造物兒
조물이 약아서 미리 알았구려 / 造物慧黠乃先知
갑자기 오른손에 부스럼을 나게 하여 / 故敎右手忽生瘡
손 늘어뜨리고 앉은 몰골 올빼미와 같구나 / 嚲手縮坐如凍鴟
붓을 찍고 먹 가는 일이 모두 어렵나니 / 捻毫潑墨俱艱澁
뱃속의 쌓인 글을 어떻게 써낼까 / 腹雖有藁何由施
건곤의 비밀도 찾아내기 어렵지 않은데 / 乾坤不復困搜剔
귀신이 함부로 흉보고 속이는구나 / 神鬼方應肆詆欺
달고 살진 게를 하얗게 쪼개놓으니 / 糖蟹螯肥堪斫雪
다행히 왼손이 성하여 집을 수 있구나 / 左手幸完猶可持
술에 취해 잠들면 아픈 줄 모르나니 / 被酒酣眠不覺痛
나의 의원은 쑥찜도 침도 아니로다 / 非灸非砭眞我醫
○중구일(重九日)에 손앓이로 나가 놀지 못하다
지난해 상주에서 중구절을 지낼 적에 / 去年尙州遇重九
병으로 오래 누워 술을 마시지 못하고 / 臥病沈綿未飮酒
억지로 지팡이 짚고 중을 찾아가 / 强携藜杖起尋僧
나의《남행집(南行集)》에 중구에 자복당두(資福堂頭)를 찾은 시(詩)가 있다.(予南行集。
有重九訪資福堂頭詩。)
손수 향불 피워 향내를 맡았더라 / 手撚寒香空自嗅
가버린 지난해는 뉘우친들 무엇하랴 / 去年已去莫追悔
올해는 좋은 모임 꼭 가지려 별렀건만 / 却待今年作高會
뉘 알았으랴 올해도 또 손않이로 / 豈知今年又病手
좋은 시주 모임에 나아가지 못하고 / 未趁好事時酒輩
또다시 물 마시고 국화를 씹으니 / 亦復起飮嚼霜蘂
속됨을 못 면하고 그저 지낼 뿐이로다 / 未能免俗聊爾耳
아내 웃으며 권한 술도 족히 기쁘거니 / 山妻笑勸良足歡
어찌 산에 올라 마냥 취해야만 하나 / 何必登高爛慢醉
서생의 기박한 운명 어이 말하랴 / 書生命薄何足道
해마다 좋은 절기를 병중에 지나는구료 / 佳節年年病中度
석양에 울밑 국화를 읊으며 소요하니 / 落日愁吟遶菊籬
그래도 서풍은 신의 있어 모자에 불어오네 / 西風有信猶吹帽
[주D-001]산에……하나 : 세속에서, 9월 9일이 되면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속례를
말한다. 《續齊諧記》
[주D-002]모자에 불어오네 : 환온(桓溫)이 9월 9일에 여러 막료와 함께 용산(龍山)에 올라 잔치할
때 맹가(孟嘉)의 모자가 바람에 날렸으나 흥에 취한 본인은 알지 못하므로 환온이 좌우에
눈짓하여 알리지 말라고 이르고 손성(孫盛)을 시켜 글을 지어 웃겼던 고사이다.
《晉書 孟嘉傳》
○시월 이일에 옛놀이를 생각하면서
지난 가을 구월달에 / 去歲秋九月
남쪽 내 고향에 돌아왔다 / 南來寓吾邦
상주(尙州)에서 고향으로 와서 살다.(自尙州來寓吾鄕。)
마을을 감싼 것은 모두 민둥산이고 / 遶村皆禿嶺
맑은 강은 고을을 안고 흐르네 / 帶縣唯淸江
아침엔 숲속의 절에 나아가서 / 朝遊林下寺
하얀 눈썹의 중에게 도를 묻고 / 問道雪眉厖
저녁엔 여사에 돌아와서 / 暮還寄旅舍
갈의를 두르고 등잔불을 대하네 / 擁葛對靑釭
시름에 잠 못 들어 외로이 앉았노라면 / 淸坐愁不寐
눈보라가 창문을 두드리네 / 風雪打紙窓
새벽에 누이를 이별하고서 / 平明別娣氏
검은빛 말을 타고 / 跨我鐵色駹
문 밖에 나서니 달은 지지 않고 / 出門月未落
먼 절에서 첫 종소리 들리네 / 遠寺鍾初撞
험한 길 높낮이를 가늠하기 어려워 / 崎嶇路高下
돌다리에 말굽이 미끄러지네 / 馬足蹶石矼
두세 사람 은근한 정으로 / 慇懃二三子
술통 메고 나와서 전송을 하네 / 出餞皆舁缸
갈림길 이르자 손을 흔드니 / 臨歧一揮手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흐르네 / 淸淚落雙雙
새벽에 숲 속을 헤쳐나갈 제 / 曉行䕺薄中
범이 두려워 짧은 창을 휘둘렀지 / 畏虎橫短鏦
높낮이 험한 산길 뚫고 가는 몸 / 身穿峀齾齾
시냇물 소리에 발걸음이 흩어지네 / 足亂溪淙淙
어려운 길 걸어 서울에 이르니 / 閒關到京洛
계절은 용투에 닿았다 / 日月會龍
아이들 나 보고 기뻐하여 / 兒女喜我至
정성스레 안부를 묻는구나 / 問訊何悾悾
이제야 밤의 꿈이 맑아진 것은 / 至今淸夜夢
높고 험한 먼 산을 넘어옴이라 / 萬里凌崆㟅
언제나 사신의 수레를 타고 / 何時乘使車
네 마리 말에 깃발도 삼엄하거든 / 四牡嚴麾幢
아전이나 백성들 옛 태도를 바꾸어 / 吏民改舊觀
손 모아 화고를 뎅뎅 쳐 울릴까 / 畫鼓千指從
이 말 또한 희롱으로 한 것이라 / 此言亦戲耳
좁은 마음 굽히려 아니함이네 / 褊心良未降
전년에 시골에 있을 때에 그 고을 원이 너무나 홀대하였기로 한 말이다.(前年寓鄕邑。邑宰頗輕。
故云。)
공명은 솥과 같이 무겁기만 한데 / 功名如鼎重
많은 사람 다투어 들고자 한다 / 萬夫力爭扛
우리 무리 손 거두고 물러났으니 / 吾儕己斂退
다시는 잡된 말을 따르지 않고 / 無復隨群哤
펄럭이는 깃발 거둬 잡아서 / 如收簸揚旆
민숭한 빈 대에 매어두듯 하리라 / 髠然束空杠
옷 떨고 멀리 떠나가 / 拂衣便長往
현산의 방공(龐公)을 배우려 한다 / 願學峴山龐
[주D-001]용투(龍) : 투는 미성(尾星)을 말한다. 일월(日月)이 용투의 궤도에 닿으면 하력(夏曆)
의 시월이 된다. 《國語 楚語》
[주D-002]현산(峴山)의 방공(龐公) : 후한(後漢) 때 현산 남쪽에 은거하면서 유표(劉表)의 초청을
사절한 고사(高士) 방덕공(龐德公)을 말한다.
○찬 수좌(燦首座)가 방장(方丈)에 간직한 노송(老松)이 그려진 병풍(屛風)에다 나더러 글을 써
달라고 한다
어떤 사람 청산 곁에 집을 짓고서 / 何人結宇靑山傍
만 길이나 높은 솔을 앉아서 보나 / 坐對高松萬丈長
보고 다시 보아 안력이 다하매 / 日看月賞眼力盡
술 한 말 들이마시고 그만 미쳐서 / 驅入麤狂一斗觴
엎치락뒤치락 토하려 할 때 / 千蟠百蟄急欲吐
교인의 육폭 비단에 토해버린 것일까 / 吐向鮫人六幅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조그만한 붓끝으로 / 不然安向寸毫端
천년토록 죽지 않는 울툭불툭한 늙은 나무를 이토록 그렸을까 / 寫此磊磈千年不死之老樹
아마도 안개 자욱한 어두운 골짜기에 / 我恐山盲谷暗煙霧裏
무쇠빛 검은 뱀이 달리려다 그치고 머리 숙였다 다시 쳐드는 것일까 / 鐵色黑蛇欲走未走低復起
아니면 바닷물이 말라붙어 밭이 되어 / 又恐波乾浪涸海變田
고래의 앙상한 뼈가 온 골짜기를 메우고 있는데 / 鯨鯢瘦骨塡坑跨壑枕相峙
텅 빈 틈마다 입과 코를 딱 벌리고 / 枵然罅縫呀口鼻
구름이 침침한 날 바람과 우레가 일어 용 울음을 짓는 것일까 / 雲陰之日疑有風雷作龍吼
온종일 턱 받치고 보아도 수묵의 그림은 아니니 / 竟日支頤未信水黑摹
세상이 어이하여 이런 솜씨가 있단 말인가 / 世間那得有此手
[주D-001]교인(鮫人)의 육폭 비단 : 남해(南海)에 사는 괴상한 인어(人魚)가 눈물[淚]로 짜낸
하얀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으면 물 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다고 한다. 《述異記》
○갓 만드는 친구를 희롱하다
새 모양의 야자관 유달리 알려졌나니 / 新模特地傳椰子
옛 모양 죽피관을 어이 물으랴 / 古樣何曾問竹皮
솜씨 익숙하여 꿰맨 자국도 안 보이니 / 手熟不生針線迹
그대는 참으로 늙은 갓장이로다 / 知君眞箇老冠師
[주D-001]죽피관(竹皮冠) : 한 고조(漢高祖)가 정장(亭長)으로 있을 때 죽순 껍질로 만들어 썼던
갓으로, 유씨관(劉氏冠)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작미관(鵲尾冠)이다. 《漢書 高祖記》
○갓을 다 만든 뒤에 또 짓다
흡사 녹태관이라 할까 / 穩似鹿胎幘
작미관보다 더 가볍구려 / 輕於鵲尾冠
유씨의 오줌이 다행히 없으니 / 幸無劉氏溺
공공의 갓 먼지 터는 것이나 배울까 한다 / 堪學貢公彈
[주D-001]녹태관(鹿胎冠) : 갓의 일종이다.
[주D-002]유씨(劉氏)의 오줌 : 패공(沛公)이 선비를 좋아하지 않아서, 갓을 쓰고 찾아오는 선비가
있으면 다짜고짜 갓을 벗겨가지고 오줌을 누었다는 고사이다. 《史記 酈食其傳》
[주D-003]공공(貢公)의……것 : 장차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매 그 갓의 먼지부터 깨끗이 털어놓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한서(漢書) 왕길전(王吉傳)에 “공우(貢禹)가 왕길(王吉)과 절친한
사이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왕공이 벼슬길에 있으니 공공이 갓을 손질해 놓고 기다린다.”
했다.
○갓이 되매 박생(朴生)의 동산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평주(平州) 양 공로(梁公老)를 전송하는데
황(黃) 자 운(韻)으로 짓다
스승이요 벗인 양 선생이 / 師友梁先生
활달하기 사명광객이로다 / 曠達四明狂
기마는 늙을수록 뽐내어 뛰고 / 驥老益奮驤
학은 파리하나 기상이 왕성하다 / 鶴瘦猶軒昻
글은 천 권 남짓 읽었건만 / 讀書千卷强
주머니엔 동전 한푼 없구료 / 苦欠一錢囊
마음이 넓은 바다 같아서 / 心若萬頃汪
아무리 퍼내어도 헤아릴 수 없구료 / 挹游良莫量
먼 걸음은 대장거를 경시하고 / 遠步凌大章
뛰어난 글은 장양부를 압도하였네 / 英辭倒長楊
술 마시는 창자가 텅 비어서 / 枵然飮酒腸
바닷물을 잔에다 붓는 듯하네 / 江海注杯觴
몸은 조그마한 집에 담고 있지만 / 身雖蝸屋藏
마음은 하늘을 나는 대붕이라네 / 意可鵬天翔
옛날 서울 곁에 있을 때 / 憶昔城西傍
서로 보니 머리 이미 희었더라 / 相見鬢已蒼
찾을 때엔 밝은 달빛인가 놀랐고 / 投人驚夜光
방에 들매 난초 향기 맡는 듯했네 / 入室聞蘭芳
북창 아래 맑은 바람 불 적에는 / 淸風北窓涼
함께 누워 희황인 되기도 했네 / 同枕臥羲皇
우리집에 술 막 익을 때 / 我家酒初香
그대 맞아 몇 번이나 취했던가 / 邀君醉幾場
그대 집에 달빛 좋을 젠 / 君家月似霜
날 불러 한 침대에 잤었지 / 呼我宿一床
백련장엘 찾아가 함께 놀았고 / 同遊白蓮莊
늘 함께 천수사(天壽寺)에서 놀았다.(每共遊天壽寺。)
홍루의 기생도 함께 찾았더라 / 共問紅樓倡
기생을 찾은 일이 있었다.(有訪妓事。)
가을 바람에 단풍잎 지고 / 紅葉秋風冷
봄날 버들잎이 푸르거든 / 綠楊春日長
손 잡고 이리저리 노닐었나니 / 携手聊徜佯
이런 즐거움이야 참으로 못 잊겠구료 / 此樂亮難忘
퍽이나 외진 한 고을 얻어 가니 / 得州天一方
아득한 산수가 멀기도 하여라 / 山水杳蒼茫
봄이 저무니 마음이 바빠서 / 春晩歸意忙
새벽부터 떠날 행장 서두는구료 / 明發欲騰裝
박생은 일 좋아하는 사나이라 / 朴生好事郞
호협한 기개를 뉘라서 당할 건가 / 氣俠誰敢當
문에 들어 낭랑한 말소리로 / 入門語琅琅
양 평주 전송하러 간다고 하네 / 告去將錢梁
다행히도 봄날씨 활짝 개고 / 幸此春日晴
거칠었던 동산도 말끔히 쓸었네 / 已掃園林荒
서로 어울려 모당엘 가니 / 相將往茅堂
꾀꼬리 소리 마치 피리를 부는 듯 / 黃鳥哢如簧
온갖 꽃은 붉은 비단을 펼친 듯하고 / 雜花紅錦張
높은 나무는 푸른 깃발이 펄럭인 듯 / 高樹靑旗揚
즐거움이 다하면 도리어 슬픈 법 / 樂極反悽傷
이별에 다다르니 눈물이 옷을 적시네 / 臨別淚霑裳
가는 이에게 주고픈 말 어이 다하랴 / 贈行言未詳
유한 것이 강함을 제어한다 말할 뿐이네 / 但願柔制剛
이 말을 깊이 맛붙여 안다면 / 此語苟深嘗
공황이 못 됨을 어이 근심하랴 / 何憂不龔黃
[주D-001]사명광객(四明狂客) : 당(唐) 하지장(賀知章)의 별호이다.
[주D-002]대장거(大章車) : 길의 이정(里程)을 알리는 수레이다. 《고금주(古今注)》 여복(輿服)에
“수레 위에 상ㆍ하 두 층을 만들고 층마다 목인(木人)을 두어서, 1리를 가면 하층에서
북을 치고 10리를 가면 상층에서 징을 울린다.” 했다.
[주D-003]장양부(長楊賦) :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지었다. 묵객경(墨客卿)과 한림주인(翰林
主人)이란 가공인물을 등장시켜 문답체로 만들어진 글로, 천자를 풍간하였다.
[주D-004]희황인(羲皇人) : 물욕의 속박이 없는 태고 시대의 백성이란 뜻이다. 도잠(陶潛)이
여름철에 한가로이 북창(北窓) 아래 누워 있다가 맑은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바로
희황 이전의 사람이다.” 했다. 《晉書 隱逸傳》
[주D-005]공황(龔黃) : 한(漢) 양리(良吏)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말한다.
○민 수재(閔秀才)를 방문하고 옛사람의 운자(韻字)로 짓다
한 잔 술로 담소하며 무료함을 위로하니 / 一樽談笑慰無聊
긴긴 날을 그대 아니고 뉘와 보내랴 / 永日除君孰與消
꽃은 삼천 궁녀의 뺨처럼 곱고 / 花媚三千宮女臉
버들은 십오세 기생 허리 흔드는 듯 / 柳搖十五妓兒腰
꽃술을 빠는 꿀벌은 허파가 불러오르고 / 蜜蜂啑蘂脾初重
어미 제비는 집 찾아와 새끼 제비 먹여주네 / 乳燕尋巢舌轉饒
그대 같은 훌륭한 가문에서 못난 손을 받아주니 / 如子豪門容惡客
이 생에 어느 곳인들 돌아다니지 못하랴 / 此生何處不逍遙
○또 차운(次韻)하다 2수
평생에 낙탕한 몸 무엇을 힘입으랴 / 平生落宕亦何聊
《문선(文選)》시(詩)에 “구차한 인생 무엇을 힘입으랴[苟生亦何聊]” 하였다.
(文選詩云。苟生亦何聊。)
한 번 웃고 나니 온갖 생각 사라진다 / 一笑無端萬慮消
해가 꽃에 비치니 취한 볼이 달아오르고 / 日映午花酣醉頰
이슬 내린 봄풀에 치마가 젖는다 / 露霑春草濕裙腰
술을 마심엔 석 잔이 족하고 / 慢斟芳酒三杯足
고요히 바둑을 겨루니 한 수가 높구나 / 靜鬪仙碁一路饒
그대를 제쳐두고 누구와 마시겠나 / 捨却郞君誰共飮
인심이 모두 구의산(九疑山) 같기만 하구려 / 人心都是九疑遙
병든 몸 봄을 만나도 힘입을 게 없으니 / 多病逢春不自聊
시를 읊던 옛 습관으론 시를 달래기 어려워 / 吟時舊習獨難消
옥서에서 창신을 찾을 게 뭔가 / 玉書不用尋蒼腎
비파로 녹요를 타는 것이 좋아 / 瑤瑟深宜奏綠腰
이 광객이 자칭 원낭만이라 하는데 / 狂客自呼元浪慢
뉘라서 동교요 같은 가인을 불러주랴 / 佳人誰喚董嬌饒
십 년을 사귄 정분 진실로 깊으니 / 十年交分良非淺
뜻 맞거든 길 멀다 한탄 말게나 / 意合休嗟楚越遙
[주D-001]구의산(九疑山) : 지금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산. 모두 아홉 봉우리로 되어 있어 그
모양이 서로 비슷하므로, 여기서는 아리송하다는 비유이다.
[주D-002]옥서(玉書)에서 창신(蒼腎) : 옥서는 수련법(修鍊法)을 적은 도가(道家)의 글이고,
창신은 창정(蒼精 용(龍)의 이름)의 오기인 듯하다. 《신선전(神仙傳)》에 “호공(壺公)
이 ‘내가 함영(含景 초목(草木)의 꽃)을 차고 창정을 탄다.’ 했다.” 하였다.
[주D-003]녹요(綠腰) : 당(唐) 나라 곡조 이름이다.
[주D-004]원낭만(元浪漫) : 후위(後魏)의 원열(元悅)을 이르는 듯하다.
[주D-005]동교요(董嬌饒) : 《전등여화(剪燈餘話)》에 나오는 미인(美人)의 이름이다.
○양 귀비(楊貴妃)
양 귀비 얼굴이 꼭 뛰어난 게 아니라 / 未必楊妃色絶奇
나라를 망치려고 예쁜 모양 지은걸세 / 只緣誤國作嬌姿
그대여 정관의 태평시대를 보라 / 君看貞觀太平日
궁중에 어이하여 한 미희가 없었겠나 / 宮掖那無一美姬
[주D-001]정관(貞觀) :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이다.
○응 선로(應禪老)가 나를 우중(雨中)에 맞아 술 권함을 사례하다
동서로 흩어진 지 두어 해 만에 / 數年飄散各西東
오늘에야 술잔 앞에 웃음 같이하였구료 / 今日樽前一笑同
동인 만지며 옛날을 이야기하고 / 乍把銅人相話舊
다시금 석녀를 근거로 공의 이치 말하였네 / 更憑石女苦談空
향불 타는 곳에는 온종일 맑은 연기 피어오르고 / 篆畦終日淸抽穗
밤새 타고난 등잔 심지는 벌레 모양 되었도다 / 燈蕊侵宵巧綴蟲
짙푸른 버들 비는 창가에 떨어지는데 / 濃翠滴窓垂柳雨
꽃 지는 바람에 그윽한 향기 가득하구나 / 暗香撲地落花風
늙은이 취한 흥 이백(李白)보다 거칠고 / 醉翁情興狂於白
선사의 게으른 동작은 융로(融老)와 같구려 / 禪老行裝懶似融
뒷날에 입사함을 사양하지 않으리니 / 他日不辭參入社
원공이 술 사거든 이 도잠(陶潛)을 부르게나 / 遠公沽酒引陶公
[주D-001]동인(銅人) : 구리로 만든 사람. 계자(薊子)가 장안(長安) 동편 패성(霸城)에서 한
노인과 함께 동인을 어루만지면서 서로 “우리가 이 동인 주조하는 것을 본 지도 벌써
5백 년이 가까워졌다.” 하며 세상의 무상함을 말했다. 《後漢書 方術傳》
[주D-002]석녀(石女) : 《유마힐경(維摩詰經)》의 번역된 이름. 《通俗編 石女》
[주D-003]입사(入社)함을……않으리니 : 진(晉) 의 고승 혜원(慧遠 : 원공(遠公)이라고도 한다)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때 은사(隱士) 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과 승도(僧徒) 등 1백 23명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란 모임을 조직했던 고사이다. 《梁高僧傳 卷6》
○다시 화답하다
깊은 밤 종소리 댕그랑 울릴 제 / 夜深蓮漏響丁東
그대여 삼어로써 같고 다름 말해주소 / 三語煩君別異同
오랜 세월 도 닦았으나 자신도 구제하기 어렵고 / 多劫頭燃難自救
한 번 슬쩍 보고 나니 모두가 허사일세 / 片時目擊摠成空
한자의 이조부(二鳥賦)는 듣기가 싫고 / 厭聞韓子題雙鳥
장생의 이충설엔 몹시 기뻐하네 / 深喜莊生說二蟲
타오른 불에 향기로운 차는 참으로 도의 맛이고 / 活火香茶眞道味
흰 구름과 밝은 달은 곧 가풍이었네 / 白雲明月是家風
생공(生公)의 법설은 말 기운이 날카롭고 / 生師演法機鋒銳
열자(列子)의 어풍(御風)은 육신이 해탈됨일세 / 禦寇乘冷骨肉融
우연히 만나 서로 잊고 뜻을 펴니 / 邂逅忘形聊得意
당일의 방덕공(龐德公)에 부끄럽지 않구려 / 不慙當日老龐公
[주D-001]삼어(三語) : 사도(司徒) 왕융(王戎)이 완첨(阮瞻)을 처음 만나서 성인(聖人)의 명교
(名敎)와 노장(老莊)의 차이점을 물었을 때 완첨이 “아마 같지 않을 것이다.[將無同]”
고 대답하자, 왕융이 한동안 감탄하다가 추천하여 관속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세
마디 대답으로 얻어진 연[三語掾]이라고 했다. 《晉書 阮瞻傳》
[주D-002]이충설(二蟲說)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조그만 매미와 비둘기가 어찌 큰 붕새의 뜻을 알겠느냐.” 한 논설을 말한다.
[주D-003]생공(生公) : 양(梁)의 고승(高僧) 도생(道生)을 말한다. 그가 소주(蘇州) 호구사(虎丘寺)에 있으면서 돌을 모아 놓고 설법하자 돌들도 다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吳郡諸山錄》
[주D-004]어풍(御風)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열자(列子)가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다.” 하였다.
○신청(新晴)
지루한 비에 손의 시름 많더니 / 久雨長愁客
말끔히 갠 날씨 예쁜 여인 같구나 / 新晴似媚人
햇빛 받는 꽃송이는 곱게도 피고 / 姸姸花笑日
봄기운에 하늘거리는 버들은 너무도 아리따와 / 嫋嫋柳嬌春
꾀꼬리 아름다운 소리 한결 공교롭고 / 圓滑鶯聲巧
가볍게 펄럭이는 나비 날개도 기지런하다 / 輕翾蝶翅勻
화려한 풍경 모자람 없으니 / 十分風景麗
좋은 시절에 마냥 취하자꾸나 / 正好醉芳辰
○불은사(佛恩寺) 운공(雲公)을 찾아갔다가 승가(僧家)에서 술마심을 국령(國令)으로 금한다는
말을 듣고
만사는 모두 천복비와 같은 것 / 萬事皆同薦福雷
서생의 성명 참으로 미미하구나 / 書生性命信微哉
한평생 승가에서 술 많이 마셨는데 / 平生多向僧家飮
또 승가에선 술 금한다고 하는구려 / 又被僧家禁酒來
[주D-001]천복비(薦福碑) : 중국 요주(饒州)에 있는 비로, 당(唐)의 이북(李北)이 글을 짓고
구양순(歐陽詢)이 글씨를 썼다. 송(宋)의 범희문(范希文)이 요주의 태수로 있을 때 한
선비가 찾아와서 “평생에 한번도 배불러 본 적이 없었으니, 세상에 나처럼 춥고 배고픈
자가 어디 있겠느냐.” 하였다. 그 당시 천복비문(薦福碑文) 묵본(墨本)의 값이 천금
이었다. 희문이 생각하기를, 천복비문 천 장을 탁본하여 이 사람에게 주어 서울에 가서
팔아 가난을 면케 하리라 하고 종이와 먹을 다 준비해 놓았더니 그날 밤에 벼락이
천복비를 쳐 부숴 버렸다. 이는 운명이 기박한 사람은 아무리 구제하려 해도 안 된다는
뜻이다.
○교감(校勘) 양국준(梁國峻)이 앵두[櫻桃]를 보낸 데 대해 사례하다 뒤에 다시 2수의 시를 지었
는데 다 없어지고 양 교감의 2수만 남았다.
봄에는 꽃송이 곱기도 하더니 / 絳葩春艶艶
여름에는 빨간 열매 둥글둥글하구나 / 朱實夏團團
처음엔 많은 별들이 매달렸나 했고 / 始訝繁星麗
다음엔 부서진 불등걸이 모여드나 싶었네 / 還疑碎火攢
나무에서 딸 적엔 이슬에 젖었더니 / 摘林濃帶露
이파리와 함께 섞어 쟁반에 그득한데 / 和葉爛盈盤
반짝이는 단사와도 같고 / 粲似丹砂粒
붉은 구슬보다 더 둥글구나 / 圓於赤玉丸
튕겨 나서 옷에 떨어질 땐 싫더니 / 跳嫌衣上落
손바닥에 놓고 보니 사랑스럽기만 해 / 弄愛掌中看
씨를 모으니 한 움큼이 넘고 / 留核欣盈掬
즙을 마시니 간이 시원함을 알겠으며 / 含津覺潤肝
눈은 광채를 받아 희미해지고 / 眼迷光熠煒
혀는 달고 신 맛을 식별하네 / 舌識味甘酸
그대의 은밀한 정 고마웁나니 / 感子親情密
병든 나의 허파 말랐음을 앎이리라 / 知予病肺乾
아름다운 선과를 나누어 주므로 / 爲分仙菓美
술자리의 기쁨 도와 주니 / 聊佐酒筵歡
푸른 자도도 이를 따를 수 없고 / 縹李攀援絶
노오란 복숭아도 견주기 어려워 / 緗桃比況難
아이들이 함부로 따지 못하게 함은 / 不敎兒擅取
손이 오면 함께 맛보려 함이로다 / 思與客同餐
원묘에 먼저 올렸던가 / 原廟魯羞否
먼저 맛보기는 마음 미안하네 / 先嘗意未安
[주D-001]원묘(原廟) : 정묘(正廟)가 있는데도 다시 세운 사당을 말한다. 《사기(史記)》 고조기
(高祖紀)에 “고조(高祖)의 원묘를 세우다.” 했다.
○수재(秀才) 노영기(盧永祺)를 찾아서 백낙천(白樂天)의 운(韻)을 함께 차운하다
오사모 비스듬히 쓰고서 / 半岸烏紗帽
한가히 대사립문 두들겼네 / 閑敲綠玉扉
버들가지에 꾀꼬리 공교롭고 / 柳深鸎百囀
저문 숲 속에 새 짝지어 돌아오니 / 林晩鳥雙歸
이백(李白)은 때 늦은 걸 달게 여겼고 / 太白甘時後
연명은 어제의 잘못 알았더라 / 陶潛悟昨非
마음의 어지러움 이제야 물러가니 / 紛華方戰退
비로소 자하(子夏)의 살쪘음을 깨닫겠구려 / 始覺卜啇肥
[주D-001]이백(李白)은……여겼고 : 경치에 도취되어 말한 듯하나 미상이다.
[주D-002]연명(淵明)은……알았더라 :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오늘이 옳았고 어제까지가
글렀음을 깨달았다.” 하며 자신의 용퇴(勇退)를 자축했다.
[주D-003]자하(子夏)의 살쪘음 : 증자(曾子)가 자하를 만나서 “왜 살이 쪘느냐?”고 묻자 “싸움
에서 이긴 때문이다. 내가 선왕(先王)의 의(義)를 보아도 부귀의 낙(樂)을 보아도 다
영광스럽게 여겨져 이 두 가지가 마음속에서 서로 싸워 승부가 나지 않아서 몸이 여위
었다가 이제는 선왕의 의가 이겨서 살이 쪘노라.” 대답했다《韓非子》
○다시 화답하다
한 용으로 벗이 되자 기약했거니 / 一龍期作友
어이하여 범조를 문에 쓸 건가 / 凡鳥豈題扉
거문고 좋아하는 사람 봄 되면 생각 많고 / 琴客春多思
바둑 두는 중은 늦도록 돌아가지 않네 / 棋僧晩未歸
몸은 궁하나 도 더욱 풍부하고 / 身窮道轉富
마음은 옳으나 겉모양은 되려 사납구나 / 心是貌還非
저 아첨하며 굽신거리는 무리의 / 不羨夸毗子
가벼운 갖옷 살찐 말을 내 부러워 아니하네 / 裘輕馬亦肥
[주D-001]한 용[一龍] : 화흠(華歆)ㆍ병원(邴原)ㆍ관녕(管寧) 세 사람이 절친한 벗이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흠을 용의 머리, 원을 용의 배, 녕을 용의 꼬리라 칭했다. 《魏略》
[주D-002]범조(凡鳥) : 봉(鳳) 자를 분해하면 범상한 새[凡鳥]가 된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혜강(嵇康)이 여안(呂安)과 서로 친하여 언제나 생각만 나면 천리라도 달려가곤 했
었다. 어느 때 여안이 혜강을 찾았으나 집에 있지 않고, 그 아들 희(喜)가 나와 맞이하자
들어가지 아니하고 대문 위에다 봉(鳳) 자를 써놓고 갔는데 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좋아했다.” 하였다.
○길 위에 취해 누운 중을 희롱하다
상인이 성인에 취한 걸 비웃지 마소 / 莫笑上人中聖人
청주나 탁주의 맛이 다 순후한 걸 / 醍醐與酒味同醇
알괘라 주신이 거칠고 사나워 / 始知糟麴神麤猛
금강삼매의 몸을 거꾸러지게 했음을 / 解倒金剛三味身
[주D-001]상인(上人)이 성인(聖人) : 상인은 불가에서 지덕을 갖춘 사람이고 성인은 맑은 술을
칭한다. 《위지(魏志)》에 “조정에서 술을 금하는데 서막(徐邈)이 몰래 취해 가지고는
‘이는 성인에 일치한다.’ 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이 말을 듣고 성내자 선우보(鮮于輔)
가 ‘취객이 술에 대해 맑은 것을 성인이라 하고 탁한 것을 현인(賢人)이라 한다.’
하였다.”
[주D-002]금강삼매의 몸[金剛三昧身] : 금강과 같이 견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는 몸.
○이날 대취(大醉)하여 지은 시를 천조(天曹) 심윤장(沈允章)에게 주다
이월 푸른 봄빛이 / 二月靑春光
황금 버들에 떠 움직이네 / 浮動黃金柳
동산의 꽃은 다물었던 입술 방긋하고 / 園花酒噤脣
수풀의 새는 부리 놀림이 부드럽구나 / 林鳥已柔咮
그대 의기 호협하니 / 問君氣俠豪
나에게 술 한잔 권해 주려나 / 能復觴吾否
좋아 좋은 술 준비되어 있으니 / 自言有醽綠
그대의 입술 적셔줄 만하다네 / 可以濡君口
그대는 장단편의 시 만 수 보지 않았나 / 君不見長篇短篇詩萬首
천년 뒤 어떤 사람이 나를 기억하겠나 / 何人記我千年後
차라리 이몸 죽기 전에 / 不若未死前
술구더기 뜬 술 한잔 마심만 못하리 / 一杯綠蟻酒
○양 참군(梁參軍)을 찾았으나 있지 않기에 그의 사위 이군(李君)을 불러 함께 이야기하는데,
마침 옥천생(玉川生)이 와서 이에 술자리가 되어 장구시(長句詩)를 써 놓다
장인은 못 만나고 사위만 보니 / 不見氷只見玉
뛰어난 풍채 속되질 않아 / 飄然韻格淸不俗
눈동자는 가을 물처럼 푸른데 / 相看眸子秋水綠
머리 위엔 소라 점박힌 오사모를 썼구려 / 頭上烏紗螺點粟
옥천생도 이어 찾아왔기에 / 玉川扣門來剝
바둑 한 판으로 하루해를 보냈다네 / 白日與消碁一局
가인 가인이여 내 어이 굴복지 않겠나만 / 可人可人豈不服
백란이 집에 없어 섭섭했다네 / 伯鸞不在傷心曲
[주D-001]가인(可人) : 쓸 만한 사람이란 뜻. 촉한(蜀漢) 때 비위(費褘)가 위병(魏兵)과 대치해
있을 때 내민(來敏)이 일부러 바둑을 두자고 했다. 그러나 그가 어엿한 자세로 바둑에
응하자 “이는 그대를 한번 시험해 보기 위함이다. 그대는 참으로 쓸 만한 사람이다.
반드시 적을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했다. 여기서는 이군(李君)을 칭찬한 말이다.
[주D-002]백란(伯鸞) : 후한(後漢) 때 고사(高士) 양홍(梁鴻)의 자. 여기는 양(梁) 자만을 따서
양참군(梁參軍)에 비유한 말이다.
○황 낭중(黃郞中)이 박 내원(朴內園)의 가분(家盆) 중 여섯 가지 화목(花木)에 대하여 쓴 것을
상국(相國) 최선(崔詵)이 화답하였는데 그 시에 차운하여 화답하다
사계화(四季花)
봄꽃과 함께 피려 했지만 어느새 지나쳐 버렸고 / 伴開春艶旋隨風
가을 국화와 짝하려 했으나 또 헛꿈이어라 / 欲配秋香夢又空
온갖 꽃 둘러보아도 짝할 만한 것 없기에 / 閱遍群芳無可偶
혼자서 싱싱하게 눈 속에 붉었나보다 / 依依獨到雪中紅
국화(菊花)
서리 꽃 가을되매 두루 피어서 / 霜卉秋來遍放花
들에도 산에도 마냥 보겠네 / 飽看野岸與山家
석분이 딱딱하고 미끄러워 의탁하기 어려운데 / 石盆硬滑應難穩
한 송이 차가운 꽃 자랑스러이 피었구나 / 一朶寒香尙足誇
서상화(瑞祥花)
외가에 쌓인 경사 봄날처럼 훈훈하니 / 外家鍾慶氣如春
박군(朴君)은 최 상국의 사위가 되었다.(朴君於相國爲外甥。)
화려한 집에 축하 손님 많기도 하여라 / 華屋尋常燕賀賓
한 송이 좋은 꽃이 말하는 듯 어여쁘니 / 一朶好花嬌欲語
더 이상 무슨 상서로 주인에게 보답하랴 / 又將何瑞報於人
석류화(石榴花)
나무라면 흙에 안착해야 무성할 수 있기에 / 例憑土肉得繁枝
온갖 꽃들의 한들거리는 모양 보기도 지겨운데 / 厭見群紅婀娜姿
꽃 가운데 너만이 돌이라야 안착할 수 있으니 / 賴爾花中獨安石
무심한 나도 너로 인하여 시름을 푸노라 / 鐵腸如我尙開眉
대나무(竹)
그대의 훌륭함 어찌 한 가지 뿐인가 / 欲試君賢豈一端
모진 뿌리가 차가운 석분에 의젓이 박혀 있네 / 悍根又奈石盆寒
그중에 상강의 뜻 간직하고 있어서 / 箇中尙有湘江意
하늘을 찌를 듯한 창대와 같구나 / 直作攙天玉槊看
석창포(石菖蒲)
이슬방울 동글동글 푸른 잎에 매달려 / 露珠偏上翠尖垂
떨어지지 않고 빤짝임이 사랑스럽구나 / 愛箇玲瓏未墮時
바닷가에는 탄자와가 남아 있어 / 賴有彈渦餘海暈
늙은 규룡 들어앉아 수염을 감췄으리 / 老虯盤穩秘鬚髭
[주D-001]탄자와(彈子渦) : 《소식시서(蘇軾詩序)》에 “봉래각(蓬萊閣) 밑에 있는 천 길의 석벽
(石壁)이 오랜 세월을 두고 출렁이는 바닷물에 의해 패고 벌어진 곳을 말한다.”
하였다.
[주D-002]늙은……감췄으리 : 소식(蘇軾)의 “땅 속에 천년 묵은 뿌리가 마치 규룡처럼 도사리고
있네.” 하는 창포시(菖蒲詩) 일부를 인용한 말이다.
○중동(仲冬) 십사일에 문 장로(文丈老)ㆍ박환고(朴還古)와 함께 흥성사(興聖寺) 성 선로(成禪老)
를 찾아가는 도중에 읊다
세 늙은이 짝을 지어 / 覓伴成三老
높은 산마루와 나뭇가지 끝을 지나가네 / 危巓度木梢
모진 바람 모자에 불어치고 / 猛風衝帽過
가는 눈 옷에 내려 녹는구나 / 微雪點衣消
길이 머니 살갗 터짐을 견디고 / 路遠猶甘皸
그 사람 멀리 있으니 몇 번이고 고개를 쳐들어 보네 / 人遐幾費翹
흥겨워 그대를 찾아가거니 / 興來聊訪戴
어찌 부름을 기다릴 게 있는가 / 不必見招邀
○위 두 사람의 화답에 다시 화답하다
눈은 기왓장에 쌓이고 / 雪華堆瓦縫
찬 기온은 나뭇가지를 얼리누나 / 寒氣束木梢
우리 이미 시기와 어긋났으니 / 道已將時左
이날 팔관회(八關會)가 있었는데 세 사람이 눈 속에 산사를 찾아가면서 우리가 시기와 어긋났음을
함께 말하고 웃었다.(是日入關會。三人雪中獨向山寺。因共笑吾儕之與時左也。)
술이나 마시며 시름 푸세나 / 愁宜託酒消
궁문에는 황금 수레 울리고 / 天門鳴鈿轂
궁궐에는 귀관들이 모였으련만 / 仙禁簇金翹
홀로 깊은 산골 찾아가니 / 獨向窮山去
다만 잔나비와 학들이 맞아주리 / 只應猿鶴邀
○저물녘에 절에 당도하여 술 한잔 마시고 나서 피일휴(皮日休)의 시를 차운하여 각기 짓다
푸른 기와 줄줄이 나무 끝에 보이는데 / 碧瓦鱗差出樹端
동구 밖에 인적 없고 소나무만 서 있네 / 洞門人靜立蒼官
눈 쌓인 숲 속에 원숭이 뛰놀고 / 滿林白雪猿跳破
벽에 걸린 햇빛에 새소리만 잦구나 / 半壁紅暉鳥喚殘
고요한 승방 안에 향불 재만 싸늘하고 / 香燼冷堆山室寂
차가운 창가에 풍경 소리 그쳤네 / 磬聲淸斷石窓寒
나의 광기(狂氣) 사라지매 중 노릇도 할 만하니 / 我狂漸息堪禪縛
당년의 사냥꾼으로 보지 말아다오 / 莫作當年獵將看
○또 화답하다
만사 모두 공허하여 한 번 웃을 뿐인데 / 萬事都空一笑端
지금도 오수는 부질없이 관리 노릇 하누나 / 尙欺螯叟漫爲官
바위가 우물가에 잇닿아 구름이 늘 짙고 / 巖連井榻雲長濕
지대가 다창에 가까워 눈도 쉬이 녹도다 / 地近茶窓雪易殘
쇠지팡이 걸어 두고 하안거(夏安居) 넘겼으며 / 閑掛鐵君經夏結
목불을 마구 태워 추운 날씨 지내누나 / 狂燒木佛禦天寒
언젠가는 푸른 산이 옛 벗되리니 / 靑山他日應爲舊
깊은 계곡 꺼리지 말고 자세히 보아 두세 / 不憚幽蹊子細看
[주D-001]오수(螯叟) : 진(晉)의 필탁(畢卓)이 게[蟹]를 좋아했다 하여 그를 이르는 듯하다.
[주D-002]하안거(夏安居) : 여름 장마 때 중들이 선방(禪房)에 들어앉아 수도하는 기간을
말한다.
○원우(院宇)를 둘러보고 돌아와 비문(碑文)을 읽은 뒤에 다시 앞의 운(韻)으로 옛일을 술회하다
지난날 이 좋은 곳에 절을 만들 때 / 記得香城締搆端
임금 수레를 백관이 옹위했더라 / 鑾輿曾此擁千官
이 절은 본시 보육(寶育)의 고가(古家)였는데 희사(喜捨)하여 절로 만들었고, 인종(仁宗)이 이
절을 중창(重創)한 다음 이 절에 거둥하여 비를 세우라고 명하였다.
(寺是寶育之古家。捨以爲寺。仁宗重刱。嘗幸于此。命立碑。)
전액에 이끼 번져 비문이 어둡고 / 苔侵篆額碑文暗
비에 물든 먼지로 벽화도 낡았도다 / 雨染紅泥壁畫殘
보육대 앞엔 달빛만 외롭고 / 寶育臺含孤月冷
절 북쪽에 보육대가 있다.(北有寶育臺。)
마하갑에는 구름 조각 떠도는데 / 摩訶岬觸斷雲寒
오관산(五冠山)의 하나. 이름을 마하갑이라 했다.(五冠山。此其一也。名摩訶岬。)
이곳 중은 익히 보아온 터이라 머리도 돌리지 않고 / 巖僧見慣慵回首
한가한 사람들 보는 대로 내맡겨두네 / 付與閑人自在看
○다시 화답하다 2수
우렁찬 설법 소리는 혀끝에서 나오고 / 剩遣談雷吼舌端
높은 문장은 습착치(習鑿齒)를 아관으로 삼았도다 / 坐敎鑿齒作衙官
휘두르는 주장자(柱杖子)에 여우들이 놀라고 / 狐驚柱杖初拈起
재 울리는 종소리에 새들도 좋아하네 / 鳥喜齋鍾半擊殘
눈빛은 선사(禪師)의 눈썹처럼 희고 / 雪色與師眉孰白
산 빛은 내 눈처럼 차갑구나 / 山光入我眼爭寒
뜻에 맞는 사람끼리 서로 만났나니 / 相逢得意眞些子
이다음 만나거든 꿈에서 본 사람으로 보지 마오 / 莫是他年作夢看
정착 없는 자취 어찌 한 곳에만 머물랴 / 散浪何曾釘一端
다만 상계 신선의 뒤를 따르기 위함일세 / 只緣上界足仙官
시(詩)를 구사하는 버릇 아직도 넘쳐 나오고 / 裁雲舊習津津出
속정(俗情)을 꿈꾸는 흔적 점차 희박해지네 / 夢雨餘㾗旋旋殘
발길 따라 우연히 선사(禪師)를 찾고 보니 / 信步偶尋融老懶
광문의 가난한 행색 온 몸을 덮었구려 / 滿身猶帶廣文寒
마음이 없거니 어디에 안착시킬 곳이 있으랴 / 無心那有安心處
삼가 마음을 특별한 것으로 보지 마소 / 愼勿將心特地看
[주D-001]높은……삼았도다 : 습착치(習鑿齒)는 진(晉)의 문장가이다. 《당서(唐書)》 두심언전
(杜審言傳)에 “나의 문장은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을 잡아다가 아관(衙官)으로 삼을
수 있다.” 하였다.
[주D-002]광문(廣文)의……행색 : 당 현종(唐玄宗) 때 정건(鄭虔)이 광문관 박사(廣文館博士)로
취직했는데, 그 명목만 그럴듯할 뿐 대우는 아주 냉락한 자리였으므로 두보(杜甫)가
다른 공경(公卿)들은 다 높은 벼슬과 좋은 집에 고량진미를 먹고 있는데 광문 선생만은
끼니도 어렵다는 내용의 시를 읊기도 했다.
○또 운(韻)을 나누다가 악(岳) 자 운(韻)을 얻다
성동의 한 움막집에 살면서 / 卜居城東蝸一殼
추위가 무서워 머리를 파묻고 지내네 / 怯寒無奈縮頭角
어쩌다 흥이 나서 성 밖에 나가면 / 偶然乘興閑出郭
석 자의 깊은 눈에 다리가 묻히누나 / 三尺雪深寒蘸脚
절간에 와서 툭툭 문을 두드리니 / 來打禪扉聲剝剝
한마디 기침 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치네 / 警咳一聲虛谷答
문안에 드니 대각을 본 듯 아찔하고 / 入門眩怳見臺閣
마치 소공을 보러 선각을 따르는 듯하네 / 似見小空隨善覺
숲 사이로 불 놓으니 사는 새 떨어지고 / 隔林吹火棲鳥落
목마른 사람 차를 찾으니 샘물이 마르려 하누나 / 渴漢求茶泉欲涸
이 속에서 하룻밤 즐겁게 지냄은 / 一夕忘懷這裏樂
여산에서의 삼소보다 훨씬 낫도다 / 大勝三笑遊廬岳
[주D-001]삼소(三笑) : 진(晉)의 고승(高僧) 혜원(慧遠)이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할 때 호계(虎溪)를 지나온 줄도 모르고 마음을 논하면서 서로 크게 웃었다는 고사
이다. 지금의 삼소도(三笑圖)가 여기서 기인된 것이다.
○그 이튿날에 또 박인범(朴仁範)의 시를 차운하여 각기 짓다
깊은 골짜기에 짙은 안개 차기도 한데 / 洞深煙霧碧凄迷
햇빛마저 무정해 또 기울어가네 / 其奈無情日又西
사슴은 찬 눈이 지겨워 따스한 곳을 찾고 / 厭雪寒麕爭穴燥
새는 바람을 피해 낮은 가지로 내려앉는다 / 避風幽鳥擇枝低
굽게 뻗은 등덩굴 지팡이 되기 어렵고 / 走藤遇曲難成杖
비스듬히 누운 나무 저절로 사다리 되었네 / 臥木因高偶作梯
절간의 한가한 맛은 알지 못하고 / 不識空門閑氣味
산에 오면 벽에 쓴 글씨만 바삐 찾누나 / 到山煩覓壁間題
○또 옛사람의 시운(詩韻)을 차운하여 주필(走筆)로 벽에 쓰다
해맑게 갠 하늘 달도 밝은데 / 霽天寒碧月分明
열두 송이 그림 연꽃에 이슬방울 떨어지는 듯 / 十二蓮花滴瀝聲
향불을 피우는 외에 아무 하는 일 없으니 / 除却燒香無一事
중의 자리 높은 줄 이제야 알겠도다 / 始知禪格高大生
○영공(令公) 조영인(趙永仁)에게 올리는 시. 병인(幷引)
저는 우둔한 자질로 과거에 합격한 지가 벌써 8년이 지났으나 일명(一命)의 벼슬도 제수받지
못하였더니, 이제 은상(恩相) 각하(閣下)께서 전부(銓部)의 권한을 맡아 선비들의 정감(精鑑)이
되셨음을 듣고 그냥 물러설 수 없어서 감히 진출을 구하고자 합니다. 명경대(明鏡臺) 앞에 얼굴의
곱고 추함이 쉽게 분별되겠지만 대장장이[洪爐手] 밑에서는 쇠붙이의 이둔(利鈍)을 가리지 않고
모두 다 융화되는 법이니, 용졸한 사람을 거두시어 지방관[絃歌]의 소임을 맡겨 보시기 바랍니다.
조전(趙典)은 한 나라를 붙잡았고 / 仲經扶聖漢
조경은 당 나라를 도왔어라 / 趙憬相皇唐
뿌리 크면 가지도 무성하고 / 根大瓊枝盛
근원 깊으면 흐름 또한 길다네 / 源深玉派長
거북이 도왔으니 뛰어난 자질로 나고 / 履龜生挻質
사슴을 그렸으니 이미 길한 조짐 점쳤도다 / 畫鹿早占祥
날카로운 붓은 천 근의 무게이고 / 筆刃千鈞重
넓은 마음은 만 경의 바다로다 / 心河萬頃汪
임금은 훌륭한 인재를 만나고 / 飛龍曾利見
어진 신하는 쉬 뜻을 얻었도다 / 威鳳欻高翔
하늘에는 문창성(文昌星)의 넋이요 / 天上文星魄
인간 겨울철의 햇볕일세 / 人間愛日光
의혹을 판단함은 빠르기 벼락 같고 / 判疑掀霹靂
일을 의논함은 구슬 부딪치는 소리로다 / 論事振琳琅
조반(朝班)에 올라 임금을 뫼실 제 / 扈聖登靑鎖
금상(今上)의 즉위한 뒤 공(公)이 함께 국책(國策)을 결정하였다.
검은 주머니에 봉서 넣어 올리고 / 緘書拜皁囊
벽문에서 각도로 나아가니 / 璧門趨閣道
임금이 문신(文臣)을 옹호하도다 / 璇極護文昌
명당을 굳건히 함은 철주(鐵柱)와 같고 / 鐵棟明堂固
적국을 방어함은 금성과 같도다 / 金城敵國防
백성의 바람은 배 진공에게 쏠리고 / 望歸裵晉國
국가의 기대임은 곽 분양보다 더하네 / 倚重郭汾陽
큰 솜씨는 나라살림 요리하고 / 大手調殷鼎
붉은 마음은 임금을 보필하도다 / 丹心補舜裳
인물을 품평함은 허소(許劭) 곽태(郭泰)와 같고 / 品人同許郭
손을 좋아함은 평원군(平原君)과 맹상군(孟嘗君)일세 / 愛客似原嘗
훌륭한 그릇은 망치로 두들겨 만들 듯 / 利器金椎鑄
유능한 재목은 시험을 거쳐 쓰도다 / 長材玉秤量
묻힌 구슬이라고 광채까지 감출손가 / 沈珠寧鏟彩
깊숙한 국화도 다투어 꽃을 피우네 / 幽菊競披芳
외로운 이몸 의뢰할 데 없어 / 無賴孤軀在
헛되게 지내온 지 십 년이 되었다오 / 投閑十年强
묘령의 어린 나이로 / 妙齡初丱角
양식 메고 멀리 유학하여 / 游學遠贏糧
글씨도 쓰고 문장도 익히며 / 染翰攻鉛槧
많은 경서 모두 섭렵했다네 / 橫經對縹緗
손경의 문처럼 고요히 닫았고 / 靜閉孫敬戶
관녕의 평상처럼 앉은 자리 구멍났으며 / 坐穴管寧床
악기는 나름대로 소리는 낼 수 있고 / 樂器堪調啞
시편은 누락된 시를 채울 만하지요 / 詩篇欲補亡
시단(詩壇)에 올라서는 심약(沈約) 사조(謝眺)를 / 登壇屠沈謝
대결에 임해서는 반고(班固) 양웅(揚雄)을 압도하려 했으며 / 劘壘倒班楊
과거를 해마다 잇달아 합격해 / 科第連年捷
명성이 하루 사이에 빛났으니 / 聲華一日彰
일찌기 묵수를 마시지 않았음은 / 不曾呑墨水
어른들의 가르침에 힘입었음이지요 / 聊得鍍金湯
곧장 하늘에 오르려 하였거니 / 便欲層霄擊
어찌 중도에 쓰러질 생각 있었겠는가만 / 何思半路僵
거센 풍파 요란하고 / 風濤終蹭蹬
하늘은 더욱 아득해져 / 雲漢轉徵茫
우물 안 개구리처럼 죽치고 앉아서 / 反蟄跳蛙井
부질없이 녹황을 찾을 뿐이지요 / 空尋覆鹿隍
호소할수록 자꾸 구렁텅이로 빠져 들고 / 號呼逾壑底
꿋꿋한 기세는 곁길을 싫어하네 / 骯髒厭門傍
물은 있지만 타는 목 뉘라서 적셔 주며 / 有水誰霑鮒
지름길이 많아 바른길 잃었지요 / 多岐竟失羊
마치 은호(殷浩)의 돌돌과 같고 / 頗同殷咄咄
또한 공자(孔子)의 황황과 같군요 / 更比孔遑遑
쌓은 공은 퇴문총에 부칠 것이고 / 功寄堆文冢
궁한 삶은 송귀장을 끌 뿐이요 / 窮牽送鬼檣
본디 운명이 기박한 탓이지만 / 本雖由薄命
반평생을 미치광이로 방황했다오 / 半亦坐佯狂
모든 일은 삼절이 중한 걸 알았고 / 萬事經三折
헛된 이름은 칠양이 부끄럽군요 / 虛名愧七襄
밝게 비치는 달빛은 / 早聞明鏡照
엎어 놓은 동이 속도 비쳐 준다더니 / 猶及覆盆藏
미천한 이 사람 잊지 않고 / 果記氷鄕子
분성당서 여러 번 칭찬했다지요 / 曾稱粉省堂
상국이 성중(省中)에서 여러 번 홀(笏)을 들고 나를 칭찬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너무도 기뻐 뛰놀며 춤추니 / 喜深跳欲舞
뜨거운 눈물 씻을수록 더욱 흘렀다오 / 涕出拭還滂
연곡에서 다사로운 음률만 생각나고 / 燕谷思溫律
무염의 얼굴에 고운 화장 부질없군요 / 無鹽費靚粧
이제 인재를 뽑는 소임 맡았으니 / 銓衡今入手
조화의 힘 마음대로 하겠구료 / 造化大專場
다시금 목을 빼고 바라보며는 / 益復伸吭望
봉(鳳) 날개에 붙어 날기를 생각하지요 / 方期傅翼揚
머리를 새로 감고 때를 털어버리며 / 沐芳新振垢
무딘 칼 다시 갈아 날을 세웠다오 / 磨鈍漸生鋩
계자(季子)는 아름답기 옥과 같아 / 季嗣眞如玉
나는 상국의 계자와 가장 친하고 또 동년(同年)이다.
맑은 조정에서 금인(金印)을 찾는데 / 淸朝早綰黃
다행히도 반갑게 대해 주어서 / 幸承靑眼眄
외람되어 높은 분을 뵙게 되었군요 / 叨對白眉良
계자와는 스무 살 때 비로소 알게 되어 / 結髮初相識
마음 논하며 잊지 말자고 맹세했지요 / 論心誓不忘
몇 번이나 좋은 감화 받아 왔던가 / 幾薰蘭室臭
둘이 함께 과거에 급제했으며 / 同折桂枝香
아름다운 자리에 뒤따르기도 하고 / 綺席嘗陪後
꽃핀 둑길을 함께 걷기도 했으므로 / 花堤共綴行
나를 알아 준 포숙아(鮑叔牙)로 여겼고 / 自呼知我鮑
나를 깨우쳐 준 복자하(卜子夏)라 말했지요 / 枉道起予商
외람되게 주리(珠履)의 자리에 있은 지도 / 謬殿三千履
벌써 열 다섯 해가 지났으니 / 今移十五霜
마치 띠풀이 비단을 가까이하고 / 茅菅親繢繡
벽돌이 구슬과 나란히 한 셈이지요 / 瓴甋側珪璋
실의에 찬 이 몰골 너무도 애석해 / 爲惜纍纍狀
딱하게 여기는 마음 주셨기에 / 聊廻惻惻腸
천금 같은 허락 자주 받들어 / 累將金諾重
임금의 밝은 빛 뵙고자 했더니 / 欲借袞褒煌
오늘 어이 그리 다행한지 / 今日何多幸
내심 스스로 용기가 나는군요 / 中心竊自昂
사사로운 인연 얕지 않으나 / 私因誠不淺
떳떳한 천거로도 무엇이 해로우리요 / 公道亦何妨
일단 소임 맡겨 재주를 시험해 보오 / 好試淸琴撫
미금을 망가뜨리진 않을 것이오 / 無嫌美錦傷
일 많은 고을은 감당하기 어려우니 / 亮難堪劇郡
작은 고을 맡아 함이 마땅하겠소 / 正合委偏鄕
가장 바라는 곳은 동해가이고 / 最望鱉東海
멀리는 북쪽도 생각해 보았지요 / 遠思雁北方
궁한 새 어찌 나무를 가리리요 / 窮奔何擇木
허기진 입 방어(魴魚)만을 바라지 않지요 / 饞口不須魴
들뜬 마음 하소연하기 급하고 / 躍躍哀鳴急
생각이 많아 바쁘게 말합니다 / 懸懸仰叩忙
[주D-001]거북이……나고 : 서서(徐瑞)가 어렸을 때 수재(水災)를 만나서 어느 각(閣)으로 피해
있었는데, 그 각마저 곧 물에 잠기게 되었다. 순간 공중에서 누가 “그는 재상(宰相)감
이다. 잘 보호해야 한다.” 외치자 수백 마리의 거북이가 나타나 그 각을 등으로 받쳐
물에 잠기지 않게 했다는 고사이다. 《文苑彙雋》
[주D-002]사슴을……점쳤도다 : 정홍(鄭弘)이 어느 날 자기 수레 뒤에 백록(白鹿)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주부(主簿)에게 묻자 “삼공(三公)의 수레에는 다 사슴을 그렸
는데 지금 백록이 뒤를 따르니 명공(明公)은 반드시 재상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한
고사이다. 《漢書》
[주D-003]겨울철의 햇빛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조쇠(趙衰)는 겨울철의 햇볕이고, 조돈
(趙盾)은 여름철의 햇볕이다. 겨울 햇볕은 사랑스럽지만 여름 햇볕은 무섭다.” 했다.
[주D-004]주머니 : 임금에게 글을 올릴 때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봉서를 넣는 검은 비단 주머니
이다.
[주D-005]벽문(璧門) : 한 무제가 지은 건장궁(建章宮)의 정문인데 임금의 궁문을 뜻한다.
[주D-006]각도(閣道) : 북두(北斗)의 축성(軸星)인데, 임금의 궁(宮)을 뜻한다.
[주D-007]명당(明堂) : 임금이 정치를 묻고 혹은 나라의 제사를 지내던 집인데, 국가를 뜻한다.
[주D-008]배 진공(裴晉公) : 진공은 당(唐)의 어진 재상 배도(裴度)의 봉호이다.
[주D-009]곽 분양(郭汾陽) : 분양은 당 숙종(唐肅宗) 때 안사(安史)의 난(亂)을 평정한 곽자의
(郭子儀)의 봉호이다.
[주D-010]손경(孫敬)의……닫았고 : 손경은 한(漢) 나라 사람으로 그는 문을 닫고 글을 읽다가
잠이 오면 목에 끈을 매어 대들보에 매달곤 했으므로 저자 사람들이 모두 폐호 선생
(閉戶先生)이라 불렀다. 《尙友錄 卷5》
[주D-011]관녕(管寧)의 평상 : 관녕은 동한(東漢) 말기 사람. 난세를 피하여 요동으로 옮겨 살았
는데 백모(白帽) 차림에 한 목탑(木榻)만을 사용한 지 37년 만에 목탑은 그 무릎이 닿은
부분에 구멍이 뚫렸다.
[주D-012]누락된……만하지요 : 진(晉)의 문장 속석(束晳)이 《시경》의 남해(南陔) 이하에 누락된
시편을 지어 보충하였다.
[주D-013]묵수(墨水) : 먹물. 북제(北齊)의 과시법(課試法)에 답안이 너무 부진한 자에게는 먹물
1되를 마시게 했다. 《通典 選擧典》
[주D-014]녹황(鹿隍) : 《열자(列子)》 주 목왕(周穆王)에 “정(鄭) 나라 사람이 땔나무를 하다가,
갑자기 쫓겨오는 사슴을 때려잡아 섶나무로 덮어 놓고는 이내 그곳을 잊어버렸다.
혹시 꿈을 꾸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그 일을 혼자 중얼거렸는데 옆에서 한 사람이
듣고는 몰래 그 사슴을 찾아가 버렸다고 했다. 여기는 흐리멍덩하다는 겸사로 쓰인
말이다.
[주D-015]은호(殷浩)의 돌돌(咄咄) : 진(晉)의 은호(殷浩)가 벼슬을 삭탈당하고 집에 있을 때
온종일 아무말 없이 공중을 향하여 손가락으로 글자를 그리면서 “아, 괴이한 일이다.”
고만 했다. 《世說新語 黜兌》
[주D-016]공자(孔子)의 황황(遑遑) : 공자(孔子)가 벼슬을 잃은 지 석 달만 되면 마음이 황황하여
국경을 나갈 때에 반드시 폐백을 준비했다고 하였다. 《孟子 縢文公下》
[주D-017]퇴문총(堆文冢) : 장사(長沙) 사람 유태(劉蛻)가 자신의 문장 초고(草稿)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모두 모아서 매장해 둔 무덤이다.
[주D-018]송귀장(送鬼檣) : 궁귀(窮鬼)를 보낼 때 쓰인 돛대.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 한
구절을 인용한 말이다.
[주D-019]삼절(三折) : 많은 경험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정공(定公) 13년에
“팔을 세 차례 꺾인 사람이 양의(良醫)가 된다.” 하였다.
[주D-020]칠양(七襄) : 아무 실속도 없이 여러 차례 이리저리 옮긴다는 뜻. 《詩經 大東》
[주D-021]분성당(粉省堂) : 상서성(尙書省)의 이명. 그 벽에 분가루로 현인(賢人)ㆍ열사(列士)를
그렸으므로 이른 이름이다.
[주D-022]연곡(燕谷) : 한곡(寒谷). 《유향별록(劉向 別錄)》에 “연(燕) 나라에 한곡이 있는데
추연(鄒衍)이 율(律)을 불매 온기(溫氣)가 이르렀다.” 하였다.
[주D-023]무염(無鹽) : 전국 시대에 제(齊)의 추부(醜婦) 종리춘(鍾離春)을 이른다.
[주D-024]주리(珠履)의 자리 : 구슬로 꾸민 신을 신은 빈객, 즉 상등의 빈객을 말한다.
《史記 春信君傳》
[주D-025]미금(美錦)을……것이오 : 자피(子皮)가 윤하(尹何)로 읍대부(邑大夫)를 시키려 하자
자산(子産)이 “아직 어리니, 한 고을의 행정을 배워가면서 하도록 할 수는 없다.
괜히 그 사람을 해치는 결과만 된다. 이는 마치 아름다운 비단을 기술 없는 자에게
재단을 맡기면 비단을 해치는 결과와 같다.” 한 데서 인용된 말이다.
《春秋左傳 襄公31년》
上趙令公永仁 幷引
某謬將爽鈍之資。早占桂仙之籍。八霜倐變。一命不霑。今伏遇恩門相國閣下掌銓部之劇權。作士倫之
精鑑。實難自縮。輒欲求伸。眀鏡臺前。雖愧姸媸之易別。洪爐手下。不論利鈍以兼鎔。冀收樸樕之村。
用試絃歌之任云云。
仲經扶聖漢。趙憬相皇唐。根大瓊枝盛。源深玉派長。履龜生挺質。畫鹿早占祥。筆刃千鈞重。心河萬
頃汪。飛龍曾利見。威鳳歘高翔。天上文星魄。人間愛日光。判疑掀霹靂。論事振琳琅。扈聖登靑鎖。
上卽祚。公與定策。緘書拜皂囊。璧門趨閣道。璇極護文昌。鐵棟明堂固。金城敵國防。望歸裴晉國。
倚重郭汾陽。大手調殷鼎。丹心補舜裳。品人同許郭。愛客似原嘗。利器金椎鑄。長材玉秤量。沈珠寧
鏟彩。幽菊競披芳。無賴孤軀在。投閑十載强。妙齡初丱角。游學遠贏糧。染翰攻鉛槧。橫經對縹緗。
靜關孫敬戶。坐穴管寧床。樂器堪調啞。詩篇欲補亡。登壇屠沈謝。劘壘倒班揚。科第連年捷。聲華一
日彰。不曾呑墨水。聊得鍍金湯。便欲層霄擊。何思半路僵。風濤終蹭蹬。雲漢轉微茫。反蟄跳蛙井。
空尋覆鹿隍。號呼逾壑底。骯髒猒門傍。有水誰霑鮒。多歧竟失羊。頗同殷咄咄。敢比孔遑遑。功寄堆
文塚。窮牽送鬼檣。本雖由薄命。半亦坐佯狂。萬事經三折。虛名愧七襄。早聞明鏡照。猶及覆盆藏。
果記氷鄕子。曾稱粉省堂。聞相國屢稱笏於省中。故云。喜深跳欲舞。涕出拭還滂。燕谷思溫律。無鹽
費靚粧。銓衡今入手。造化大專場。益復伸吭望。方期傅翼揚。沐芳新振垢。磨鈍漸生鋩。季嗣眞如玉。
僕與季嗣最親。且同年。淸朝早綰黃。幸承靑眼眄。叨對白眉良。結髮初相識。論心誓不忘。幾熏蘭室
臭。同折桂枝香。綺席嘗陪後。花堤共綴行。自呼知我鮑。狂편001導起予商。謬殿三千履。今移十五霜。
茅菅親繢繡。瓴甋側珪璋。爲惜纍纍狀。聊廻惻惻膓。屢將金諾重。欲借衮褒煌。今日何多幸。中心竊
自昂。私因誠不淺。公道亦何妨。好試淸琴撫。無嫌美錦傷。亮難堪劇郡。正合委偏鄕。最望鼇東海。
還思鴈北方。窮奔何擇木。饞口不須魴。躍躍哀鳴急。懸懸仰叩忙。
[편-001]狂 : 枉
○임 평장사(任平章事)에게 올리다 병서(竝序)
제가 문하(門下)에 있은 지 매우 오랩니다. 나이가 서른이 넘도록 한산한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
가까스로 공명을 세울 날만을 기다려 왔으나 도리어 길 잃은 사람이 되었으니, 상국(相國) 각하
(閣下)의 인자하신 덕이 아니면 뉘라서 돌봐 주겠습니까? 평원 땅의 한 마리 독수리를 곧 추천
하여, 먼저 잡은 고기를 슬퍼하던 용양군(龍陽君)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심을 바랍니다.
여러 대 대가(大家)의 후예로 / 累葉衣冠後
세 조정에 폐부 같은 친신(親臣) 되어 / 三朝肺腑親
주 강왕(周康王)이 백부라 부른 높은 처지요 / 周王呼伯父
한 소열(漢昭烈)이 중히 여긴 종신의 지위로다 / 漢帝重宗臣
훌륭한 풍채는 세상에 빛나고 / 瑞世龍章煥
뛰어난 시문은 일대를 울렸으며 / 鳴時玉韻新
예부터 장상의 인장 전해 오고 / 舊傳張相印
일찍이 왕언승의 은인 찾으니 / 早綰彦昇銀
벼슬은 상국의 귀한 자리에 있는데 / 位已黃扉貴
몸은 오히려 검은 머리의 젊은이로다 / 身猶綠鬢春
급제한 인재는 재량을 펴고 / 飛鸎曾放手
옹졸한 사람도 출세를 꾀할 수 있네 / 跛鼈亦攀鱗
나는 다만 농 안의 약이나 되거니 / 但備籠中藥
어찌 큰 선비의 대열에 참여하리요 / 何參席上珍
동문들은 출세한 사람 많은데 / 同門多振躍
나만이 빈한한 생활에 처해 있으니 / 唯我落寒貧
나이 서른에 벼슬도 없이 / 三十無官客
이리저리 방랑하는 사람이구려 / 東西浪跡人
안자(顔子)의 바가지에 맹물만 들어 있고 / 顔瓢空有水
범염(范冉)의 솥 안에 먼지만 쌓였다오 / 范釜久生塵
단련한 쇠붙이 뉘라서 그릇 만들어 줄까 / 鍛鍊誰成器
비틀걸음으로 앞길을 물으니 / 俜停尙問津
먼저 잡은 고기 버리지 말고 / 前魚如不棄
임금을 뵙게 하시면 얼마나 다행이겠소 / 何幸達楓宸
[주D-001]한 마리 독수리 : 여러 사람 가운데서 뛰어난 인재를 비유한 말이다. 공융(孔融)의
평원(平原) 사람 예형(禰衡)을 추천하는 글에, 아무리 사나운 새 수백 마리가 있어도
한 마리의 독수리만 못하다고 했다. 《後漢書 文苑傳》
[주D-002]먼저 잡은……용양군(龍陽君) : 위왕(魏王)이 남색(男色)인 용양군과 함께 배를 타고 낚시질하는데 용양군이 고기 십여 마리를 낚고는 눈물을 흘렸다. 위왕이 왜 우는냐고 묻자 “신이 처음 고기를 낚으매 매우 기뻐했지만 다음에 낚은 고기가 더욱 컸으므로, 신은 먼저 낚은 고기를 곧 버리고 싶었습니다. 신이 지금은 대왕의 침석(枕席)을 받들고 있지만 천하에는 미인(美人)이 많은지라 신이 대왕의 사랑하심을 받고 있음을 알면 모두 대왕에게 올 것입니다. 그러면 신도 앞에 낚은 고기와 같이 버려지게 될 것이니,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했다. 《戰國策 魏策》
[주D-003]장상(張相)의 인장(印章) : 당(唐)의 장열(張說)을 말한다. 일찍이 요숭(姚崇)과의 혐의가 있어 상주 자사(相州刺史)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주D-004]왕언승(王彦昇) : 송(宋) 나라 초기에 원주 방어사(原州防禦使)가 되었는데 법을 범한 강인(羌人)에게 바로 형벌을 가하지 않고 관속들을 모아 잔치하다가 대뜸 범인의 귀를 찢어 씹어 먹었으므로 강인들이 감히 변방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주D-005]농 안의 약[籠中藥] : 문객(門客)을 비유한 말. 적인걸(狄仁傑)이 정원담(貞元澹)에게 “그대는 바로 나의 농 안의 약품과 같으니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겠다.” 하였다. 《唐書 貞元澹傳》
[주D-006]범염(范冉)의……쌓였다오 : 후한(後漢) 때 지사(志士)로 가끔 끼니를 잇지 못하는 때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시루에서는 티끌이 일고 솥에서는 물고기가 산다는 노래까지 지었다.
上任平章 幷序
某居門下久矣。年踰三十。投閑置散。徒恃攀鱗之幸。反爲失路之人。苟非恩門相國閣下成物之仁。
則其誰恤之耶。冀立薦平原之一鶚。使無泣龍陽之前魚云云。
累葉衣冠後。三朝肺腑親。周王呼伯父。漢帝重宗臣。瑞世龍章煥。鳴時玉韻新。舊傳張相印。早綰彥
昇銀。位已黃扉貴。身猶綠鬢春。飛鸎曾放手。跛鼈亦攀鱗。但備籠中藥。何參席上珍。同門多振躍。
唯我落寒貧。三十無官客。東西浪跡人。顔瓢空有水。范釜久生塵。鍛鍊誰成器。俜停尙問津。前魚如
不棄。何幸達楓宸。
○평장사(平章事) 최당(崔讜)에게 올리다. 병서(幷序)
제가 들으니, 상국(相國) 각하(閣下)께서 조 영공(趙令公)의 좌상(座上)에서 저를 크게 칭찬하셨다
하기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금체시(今體詩)를 지어 올립니다.
봉(鳳)과 같은 풍채로 태어났고 / 五色毛生穴
구슬처럼 아름다운 세 형제인데 / 三珠樹接枝
형제 두 분이 동시에 상신(相臣)됨은 / 弟兄雙拜相
예나 지금이나 드문 일이로다 / 今古罕同時
상국은 상부(相府)에, 아우는 추부(樞府)에 들어갔고, 형은 예부상서(禮部尙書)에 머물렀다.
처음부터 은총 받아 창옥을 찼고 / 蒼玉初承寵
품계를 뛰어넘어 상국에 올라 / 黃扉旋躐資
상서(尙書)가 바로 성중(省中)에 들어갔으므로 한 말이다.
음양을 섭리하고 / 陰陽歸燮理
나라의 안위 맡았도다 / 社稷寄安危
청정함은 지름길 없는 오얏나무요 / 靜似成蹊李
단아함은 좌상의 배이며 / 端宜飣座梨
명백한 이론은 그릇된 대답 없고 / 豹文無誤對
넓은 식견은 모든 의혹 결정하며 / 亥字判群疑
문장 구사는 한유(韓愈)처럼 빠르고 / 雷電扶韓手
시비 판단은 저부(褚裒)처럼 갖추었네 / 陽秋備褚皮
추천 잘한다는 여론 너무도 아름다우니 / 吹噓餘論美
공명을 얻은 이 그 얼마나 많은가 / 攀附幾人馳
내 본디 원헌(原憲)같은 빈사(貧士)이기에 / 我是諸生憲
두시(杜詩)에, 제생원헌빈(諸生原憲貧)이라 하였다.
일찍이 태위에게 녹을 구했던바 / 嘗干太尉憙
조 영공(趙令公)을 가리킨 말이다. 후한 때 조희(趙憙)가 태위가 되었다.
고맙게도 공의 칭찬 받고 보니 / 感公同見賞
마치 예부터 서로 친한 사이 같군요 / 似昔早相知
염거에 허덕이는 모습 애석히 여겨 / 爲惜鹽車困
앞으로의 진출 기약해 주시니 / 期將玉鎖縻
돌아와 생각할수록 꿈만 같아서 / 歸來猶夢寐
마음속에 깊이깊이 새겨왔다오 / 銘刻在心肌
다른 친구 모두 다 출세했는데 / 同輩皆翔聚
나의 생애 몹시도 험상궂어 / 吾生大嶮巇
오랫동안 가난에 허덕이는 몸으로 / 久爲莊轍鮒
부질없이 노 나라의 암꿩 부러워할 뿐 / 空羨魯梁雌
눈물은 삼거(三擧)에 그치지 않고 / 淚眼餘三泣
노래는 오희를 불렀지요 / 歌聲發五噫
깊은 구렁텅이서 헤어날 길 없으니 / 深坑無計出
긴 두레박줄 뉘라서 내려 주랴 / 長綆肯誰施
실의에 빠지니 남의 따돌림 받고 / 濩落從人棄
귀신의 놀림 당하다가 / 揶揄任鬼欺
다행히 추한 몰골로 / 幸粧嫫母面
상공의 자지 같은 모습 뵙게 되었으니 / 已識紫芝眉
머리를 어찌 움츠리고만 있으랴 / 頭角那長縮
속마음 한번 헤쳐 보고 싶군요 / 心肝會一披
그러나 하늘이 너무 높아 직접 오를 수 없어 / 天高難自達
상공의 예형(禰衡) 추천만 바랄 뿐이오 / 願綴薦衡辭
[주D-001]지름길……오얏나무 : 당(唐)의 이예(李乂)가 천성이 강직하고 모든 일에 사(私)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성(姓)을 따서, 오얏나무 밑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했다.
[주D-002]좌상의 배[梨] : 놓아 두기만 하고 먹지 않는 배로, 진귀(珍貴)함을 뜻한다.
《唐書 崔澹傳》
[주D-003]저부(褚裒) : 진(晉) 나라 사람으로, 간귀(簡貴)한 풍도가 있었다. 환이(桓彝)는 그는
뱃속에 춘추(春秋)가 들어 있다 하였고, 사안(謝安)은 그는 비록 말은 하지 않지만 사시
(四時)의 기후가 갖춰져 있다고 하였다.
[주D-004]염거(鹽車) : 소금 수송하는 수레. 이는 양마(良馬)가 노마(駑馬)와 어울려 소금수레를 끈다는 말로, 사람의 불우지탄(不遇之嘆)을 뜻한다.
[주D-005]노(魯) 나라의 암꿩 : 꿩이 사람의 거동을 살피다 산골에 내려 앉자 공자가, “산골에 내린 암꿩 때를 만났도다. 때를……" 했다. 《論語 鄕黨》
[주D-006]삼거(三擧) : 세 마디의 곡(哭) 소리. 포숙아(鮑叔牙)가 관중(管仲)을 얻고 나서 세 마디의 곡을 했으니, 관중이 금방 죽게 된 순간에 가까스로 얻어진 것을 슬퍼한 때문이다. 《管子》
[주D-007]오희(五噫) : 후한(後漢) 때 양홍(梁鴻)이 다섯 희(噫) 자를 써서 무한한 슬픔을 읊은 노래 이름.
[주D-008]귀신의 놀림 : 환온(桓溫)이 나우(羅友)의 재주나 학문은 대우하면서도 그 사람됨이 허탄하여 치민(治民)의 재목은 아니라 하여 발탁하지 않았다. 뒤에 한 사람이 고을살이로 나가게 되어 환온이 환송연을 마련하였는데 나우가 늦게 당도하였다. 온이 그 까닭을 묻자 “제가 급히 달려 오던 중 귀신이 나타나 ‘나는 그대가 남의 고을살이 나가는 환송연에 참여하는 것은 볼 수 있어도 남은 그대가 고을살이 나가는 환송연에 참여하는 것은 볼 수 없을 것이다.’고 야유하기에 자신이 부끄러워 내심 생각하느라고 길이 늦어지는 줄도 몰랐다.”고 익살을 부렸다. 《世說新語 任誕》
上崔平章讜 幷序
某伏聞相國閣下於趙令公座上。大加稱賞。喜不自勝。謹著今體詩云云。
五色毛生穴。三珠樹接枝。弟兄雙拜相。今古罕同時。相國入相。舍弟入樞府。唯兄止禮部尙書。蒼玉
初承寵。黃扉旋躐資。自尙書直入省。故云。陰陽歸燮理。社稷寄安危。靜似成蹊李。端宜飣座梨。豹
文無誤對。亥字判羣疑。雷電扶韓手。陽秋備褚皮。吹噓餘論美。攀附幾人馳。我是諸生憲。杜詩云。
諸生原憲貧。嘗干太尉熹。指言趙令公。後漢趙熹爲太尉。感公同見賞。似昔早相知。爲惜塩車困。
期將玉鎖縻。歸來猶夢寐。銘刻在心肌。同輩皆翔驟。吾生大嶮。久爲莊轍鮒。空羨魯梁雌。淚眼餘
三泣。歌聲發五噫。深坑無計出。長綆肯誰施。濩落從人棄。揶揄任鬼欺。幸粧嫫母面。已識紫芝眉。
頭角那長縮。心肝會一披。天高難自達。願綴薦衡辭。
○추밀(樞密) 최선(崔詵)에게 올리다
문장의 세가(世家)요 / 世出文章伯
덕의의 명문에 나서 / 興由德義門
여덟 분이 나란히 벼슬에 올랐는데 / 八龍初竝躍
세 분이 더욱 뛰어났으니 / 三鳳最超騫
진침은 아우 되기 어렵고 / 陳諶難爲弟
환영은 진실로 손자를 두었도다 / 桓榮實有孫
큰 분은 의표(儀表)도 특이하고 / 白眉奇表秀
젊은 나이로 높은 벼슬에 올랐는데 / 綠鬢美官尊
깨끗한 문필은 변화 많은 구름이고 / 洒翰雲多態
단아한 용모는 말 없는 구슬일세 / 端容不言玉
정연한 가훈이 있고 / 循循家訓在
조상의 바른 유풍 간직했으며 / 挺挺祖風存
달 속에 쓰인 자신의 이름 보았고 / 月裏名書澤
사롱(紗籠)에는 자신의 화상 수호되었네 / 紗中像護藩
중흥하신 금상(今上)이 천자에게 조회 갈 때 / 中興依日月
뛰어난 솜씨로 건곤을 안정시켰고 / 大手定乾坤
임금이 즉위하여 북조(北朝)에 들어갈 때 모든 제사(製辭)를 공(公)이 다 수찬하였다.
(入北朝修製。公皆爲之。)
이미 어사가 되었으니 / 已爲棲烏府
공이 어사대부(御史大夫)를 겸하고 있다.(兼御史大夫。)
장차 사슴 그린 수세를 타리로다 / 將登畫鹿幢
조정에 나설 때는 위풍이 늠름한데 / 立朝威凜凜
사람을 대할 때는 얼굴빛도 온화하시네 / 愛客色溫溫
지난날 처음 찾아 뵈었을 때 / 憶昨方投刺
때가 지나도록 충분히 담론 나눴던 바 / 移時得接論
대할수록 학문 더욱 높고 견고했으며 / 仰鑽彌自若
위로와 격려 또한 어이 그리 돈독했던가 / 慰勉一何敦
모든 일에 법도 따라 규제하면서도 / 邊幅規多檢
번거로운 형식은 일체 버리었네 / 毛皮禮去煩
돌아와서 부질없이 상상하기를 / 歸來空想像
머지않아 다시금 끌어 주시겠지 / 早晩更攀援
우리 집안 감싸 줄 이 없나니 / 我李難成蔭
어느 문하에 의탁할 수 있으랴 / 何門可託根
높은 행적은 넓고 곧음을 따랐고 / 高蹤隨泛梗
고요한 성품은 향기로운 난초를 맨듯 하네 / 幽佩綴芳蓀
뭇 사람은 허물 찾아내는 데 급급하지만 / 衆謗吹毛急
공은 듣지 않은 척 그냥 삼켜 버리네 / 狂言到口呑
짧은 옷은 영척의 시름이고 / 短衣愁寗戚
한 탑[一榻]은 진번의 특례일세 / 一室著陳蕃
벼슬 길은 하늘처럼 멀기만 한데 / 官路如天遠
세월은 흐르는 바다보다 빠르도다 / 年光劇海奔
어찌 오래도록 묻혀만 있으랴 / 陸沈那久困
반드시 날개 펴고 높이 날리라 / 水擊會高翻
지기(知己) 있음을 믿어 왔나니 / 已恃知音在
옥덩이 안고 하소연하던 설움 이내 풀리리 / 行銷泣璞冤
공융이여 나를 가엾게 여길는지 / 孔融憐我否
평원 땅의 한 마리 독수리 여기 있다네 / 一鶚在平原
[주D-001]진침(陳諶)은……어렵고 : 진침은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형 기(紀)와 함께 명망이
높았다. 기의 아들 군(群)과 그의 아들 충(忠)이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덕이 더 높다고
우기다가 결정을 짓지 못하고 조부 식(寔)에게 묻자, “원방(元方 기의 자)은 형 되기
어렵고 계방(季方 침의 자)은 아우 되기 어렵다.” 대답하였다.
[주D-002]환영(桓榮)은……손자 : 후한 때 환언(桓焉)이 조부 영(榮)과 아버지 욱(郁)의 학행
(學行)을 잘 계승했음을 말한다.
[주D-003]달 속에……보았고 : 감택(闞澤)이 13세 때 자신의 이름자가 달 속에 환히 쓰여 있는
꿈을 꾸었다. 《吳會稽 先賢傳》
[주D-004]사롱(紗籠)에는……수호되었네 : 당(唐)의 이번(李藩)이 미천했을 때 한 중이 “공은 사롱 안에 있는 사람이다.” 했다. 그 까닭을 묻자 “명부(冥府)에서는 장래 재상될 사람의 화상을 사롱에 넣어 수호하고 있다.” 대답했다.
[주D-005]영척(寗戚)의 시름 : 춘추 시대 위(衛) 나라 사람 영척이 집이 가난하여 남의 수레를 끌었고 제(齊) 나라에 이르러서는 소를 먹이다가 쇠뿔을 두들기며 자신의 시름을 노래했는데, 환공(桓公)이 현인(賢人)임을 알고 상경(上卿)으로 맞이했다. 《史記 83》
[주D-006]진번(陳蕃)의 특례 : 후한(後漢) 때 진번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을 때 남주(南州)의 고사(高士) 서치(徐穉)가 오면 특별히 한 탑(榻)을 마련하여 대접했던 고사이다.
[주D-007]옥덩이……설움 : 춘추시대 초(楚) 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옥덩이를 얻어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드렸으나 가짜라는 오인을 받고 왼발과 오른발을 차례로 잘리운 다음 옥덩이를 안고 슬피 울다가 문왕(文王)의 배려로 진짜임이 밝혀졌다.
○조 영공(趙令公)에게 다시 올리다
저는 성추(省樞)의 여러 상국(相國)께서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변변치 않은 저를 추천해 주심을
입어 제서(制書)가 내려졌는데 중도에 갑자기 철회되었으니, 마치 못에 놓아 주라는 잉어가 도로
어인(圉人)의 솥 안으로 들어가고 임금에게 바치려던 고니[鵠]가 사자(使者)의 농 속에서 도망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는 조야(朝野) 모두가 한탄할 바이고 다만 저만의 한탄이 아닙니다.
아무튼 시루[甑]는 이미 깨졌으니 무엇을 뉘우치겠습니까만 잿불은 꺼졌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
니다. 아, 하늘이 살피시고 각하(閣下) 또한 살펴 주십시오. 제가 더 이상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
니까.
추천서 임금께 올려지고 / 鶚書朝奏九重天
제서 내려져 뭇 사람 다 알았네 / 御墨才宣萬口傳
옛날에는 은잔이 날개 생겨 날아갔다더니 / 昔見銀杯嘗羽化
오늘은 차자가 갑자기 없어졌군요 / 今聞箚子忽登仙
새옹(塞翁)의 잃은 말 도리어 복이 되었나니 / 馬失焉知還是福
없어진 양 쫓아간들 무엇하랴 / 羊亡不用若相追
모든 것이 전혀 산공의 손에 매었으니 / 品題全繫山公手
제서가 중도에 철회된 일 어이 한하랴 / 何恨天書半路移
[주D-001]어인(圉人)의 솥 : 어인은 교인(校人)의 오기인 듯하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
에 “자산(子産)이 선사받은 물고기를 연못지기에게 주어 기르라고 했는데, 그만 삶아
먹어 버렸다.” 했다.
[주D-002]고니가……도망친 : 제왕(齊王)이 순우곤(淳于髡)을 시켜서 고니를 초왕(楚王)에게 드리
도록 했는데 도중에 고니를 날려 보내고 빈 조롱[籠]만 갖다 주었다는 고사이다.
《史記》
[주D-003]시루는……깨졌으니 : 후한(後漢) 때 맹민(孟敏)이 시루[甑]를 짊어지고 가다가 시루
한 개가 땅에 떨어져 깨졌는데, 돌아보지 않고 그냥 갔다. 마침 곽태(郭泰)가 보고 그
까닭을 묻자 “시루가 이미 깨졌는데 돌아보면 무얼 하겠느냐.” 대답하자 곽태가 기이
하게 여겨 유학(遊學)하기를 권했던 고사이다.
[주D-004]은잔이……날아갔다더니 : 당(唐)의 유공권(柳公權)의 집에 그릇 맡은 하인이 은잔을 다 훔쳐 가고는 엉뚱한 말로 둘러댔으나 그는 그저 웃으며 “은잔이 날개가 나서 날아간 모양이다.”고만 했다는 고사이다. 《唐書 柳公權傳》
[주D-005]없어진……무엇하랴 : 《열자(列子)》 설부(說符)에 “큰길은 갈림길이 많은 까닭에 양(羊)을 잃었고 학자는 그 학문의 방법이 많은 까닭에 생(生)을 잃은 것이다.” 했다.
[주D-006]산공(山公) : 진(晉)의 산도(山濤)가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어 인물을 선발할 때 각각 품평사(品評辭)를 붙여 주달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것을 산공계사(山公啓事)라 했다. 《晉書 山濤傳》
重上趙令公
愚伏蒙省樞諸相國同上箚子。薦達鯫生。制書已降。中路遽移。此何異放生之魚反入圉人之鼎。將獻之
鵠忽亡使者之籠。是朝野所共歎也。非獨愚之歎也。甑已墮而何悔。灰雖死而復然。噫。天察之。閣下
亦察之。愚復何言。
鶚書朝奏九重天。御墨才宣萬口傳。昔見銀杯嘗羽化。今聞箚子忽登仙。
馬失焉知還是福。羊亡不用若相追。品題全繫山公手。何恨天書半路移。
○이부(吏部) 최홍윤(崔洪胤)에게 주다
벼슬길에 오른 갑과랑(甲科郞)은 / 靑雲得路甲枝郞
대대로 금구로 성명을 덮어 왔다네 / 家世金甌覆姓名
가슴속엔 천 길 바닷물 출렁이고 / 璧海千尋胸底溢
붓 끝에는 오색 비단 피어나며 / 錦霞五色筆頭生
마음은 평소 엄숙한 위엄 간직했고 / 班心舊振霜威凜
안목은 지금 밝은 거울 매단 듯하도다 / 省眼今懸鏡炤明
가난에 시달린 사람 뉘라서 구제해 주려나 / 困涸誰煩呼斗水
어진 덕 입은 이들 다투어 갓의 먼지 터누나 / 沐芳人競拂塵纓
온화한 모습 일찍부터 알았고 / 玉溫顔色曾叨識
인척(姻戚)의 인연 또한 영화롭구려 / 浮薄因緣亦自榮
요사이 공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近結姻族。)
완우(阮瑀) 같은 서기 자신에 바랄 수 없으니 / 書記翩翩誠不分
조그마한 고을이 나의 실정에 걸맞다오 / 割雞一邑適吾情
[주D-001]금구(金甌) : 금으로 된 사발. 당 현종(唐玄宗)이 재상을 선발할 때 그 성명을 쓴
종이를 먼저 금구로 덮고 사람을 시켜 그 이름을 맞추게 한 뒤에 비로소 임명했다는
고사이다. 《故事成語考 文臣》
[주D-002]완우(阮瑀) 같은 서기(書記) : 삼국 시대에 위(魏)의 완우는 서기의 솜씨가 뛰어났다는
품평을 받았다.
○무오 이월 구일에 전이지(全履之)와 박환고(朴還古)의 남쪽 여행을 전송하는데 구(舊)자의
운(韻)을 잡았다
이십사 년 풍진 속에 / 二紀風塵中
한 용이 된 세 벗이로세 / 一龍三益友
흉금은 노래와 시에 부치고 / 襟期付歌詩
의기는 한 잔 술로 논하며 / 意氣許杯酒
미친 흥은 이백(李白)의 천 편 시를 따르고 / 顚狂白千篇
취한 태도는 유령(劉伶)의 닷 말 술을 배웠네 / 酩酊劉五斗
따스한 봄날에 / 準擬艶陽天
함께 꽃구경 가자고 언약했더니 / 尋花共携手
봄빛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아 / 春光不吾負
벌써 황금빛 버들가지 휘늘어졌는데 / 已着黃金柳
그대여 나를 두고 어디로 가는가 / 捨我忍何之
섭섭한 마음 마치 양손을 잃은 듯하이 / 如手失左右
작별 인사 어이 그냥 들어 넘기랴 / 別語那易聞
흐르는 눈물 옷소매를 적시네 / 淸淚濕我袖
강남 지방 어드매냐 / 江南阿那邊
하늘에 닿은 멧부리만 아득하구려 / 縹緲連天岫
한 채찍에 행색 점차 멀어지니 / 一鞭行色遙
혹 머리 돌려 나를 생각하려나 / 憶我回頭否
늦은 봄엔 빨리 돌아와서 / 殘春早早來
한바탕 웃으며 옛정을 논하세 / 一笑重論舊
○박환고(朴還古)의 남유시(南遊詩) 열한 수를 차운하다 병서(幷序)
계림(鷄林)에 사는 박환고는 일을 좋아하는 유별난 사람이다. 무오 2월에 한수(漢水)와 양주(楊洲)
방면으로 유람차 떠난다 하므로 내가 곡성(鵠城) 전이지(全履之)와 함께 동교(東郊)의 송전(松巓)
까지 나가 전송하였다. 내가 술이 얼큰한 김에 주필(走筆)로 시 한 편을 써 주었더니 전이지도
따라 화답하였다. 박군은 날이 저물어 미처 화답하지 못하고 천수사(天壽寺)에 이르자마자 전편
(前篇) 3수를 이어 화답하였고, 또 길에서 저록(著錄)할 기회가 많아 잡시(雜詩)와 고율(古律)
십여 수를 사평현(沙平縣)에 이르러 한 통(通)으로 만들어 보냈기에 내가 이지와 함께 음미하기
를 마지 않았다. 그러나 우물쭈물하다가 미쳐 화답도 못한 사이에 박군이 돌아왔다. 요사이
장마로 인하여 집에 한가히 지내게 되었기에 비로소 화답하는 시 몇 수를 지어 주었다.
이월이라 동교 밖에서 / 二月東都門
마음의 벗 전별할 제 / 別我同心友
삼첩의 노래 부르며 / 爲唱三疊詞
한잔 술 권해 올렸네 / 勸進一杯酒
한평생 장부의 심장으로 / 平生男子心
뜨거운 담 크기도 했건만 / 烈膽大於斗
작별에 임해서는 아녀자처럼 / 臨行效兒女
눈물 흘리며 손을 놓지 못하니 / 流淚惜分手
봄바람도 정이 아쉬운 양 / 春風如有情
가는 버들가지에 불어왔네 / 吹舞纖腰柳
이때 전이지는 / 是時全履之
말없이 오뚝 앉아서 / 傲兀居坐右
떠나는 옷자락 부여잡기를 / 相將挽歸衫
마치 부구공(浮丘公)의 소매 당기듯 했네 / 似挹浮丘袖
구름처럼 훌쩍 떠났던 그대가 / 何意飄飄雲
의외에도 옛 멧부리 생각하여 / 悠然戀舊岫
바람 따라 갑자기 돌아왔으니 / 隨風忽歸來
나의 다음 약속 따라 주겠나 / 肯復從吾否
다시금 꽃 찾아 노닐자고 / 約束更尋芳
내년에도 복사꽃 활짝 필 것일세 / 桃花笑依舊
[주D-001]삼첩(三疊)의 노래 : 당(唐)의 왕유(王維)가 원이(元二)를 송별할 때 지은 시를 그
뒤에 악부(樂府)에 올려 송별곡으로 유행된 것이다.
[주D-002]부구공(浮丘公) : 주 영왕(周靈王) 때 선인(仙人). 일찍이 왕자 진(王子晉)과 함께 학을
타고 생황을 불며 숭산(嵩山)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太平府志》
次韻朴還古南遊詩 十一首○幷序
雞林朴還古。好事奇人也。戊午二月。將遊漢水楊州之間。予與鵠城全履之。出餞於東郊之松巓。
僕酒酣。走筆一篇。以贐其行。全履之亦和之。朴君以日暮未和。行至天壽寺。追和前篇三首。又於路
上多著錄日。雜詩古律十餘首。抵沙平關。編爲一通以寄之。予與履之賞味不已。然亦因循未和。而朴
已還矣。近因泥濘。杜門閑居。始得和成若干首。書以贈之云。
二月東都門。別我同心友。爲唱三疊詞。勸進一杯酒。平生男子心。烈膽大於斗。臨行效兒女。流淚惜
分手。春風如有情。吹舞纖腰柳。是時全履之。傲兀居坐右。相將挽歸衫。似挹浮丘袖。何意飄飄雲。
悠然戀舊岫。隨風忽歸來。肯復從吾不。約束更尋芳。桃花笑依舊。
○동전(同前) 2수 이 두 편은, 박군이 다 방운(旁韻)을 사용했으므로 나도 그 운을 따랐다.
하늘은 어찌 퇴지를 궁하게 했던가 / 天胡窮退之
귀신 또한 나우를 비웃건만 / 鬼亦笑羅友
오자시는 구슬을 꿰놓은 듯하고 / 珠聯五字詩
천일주는 고래처럼 마시네 / 鯨吸千日酒
남쪽으로 노닐 적엔 풍대특(豐大特)과 맞닥뜨리고 / 南遊觸豐曦
바다에 떠서는 북두를 점검했으며 / 海泛占北斗
채찍 들어 습가지(習家池)로 나아갈 땐 / 擧鞭向習池
취한 모습에 아이들도 다 손뼉 쳤으리 / 醉任兒拍手
영주의 지초를 고요히 캐고 / 靜採瀛洲芝
연명(淵明)의 버들 마냥 읊었으며 / 狂吟彭澤柳
안목 높으니 미인도 추하게 여겨 / 眼高紅粉媸
고이 보내고 붙잡아 두지 않았으리 / 謝遣不留右
오마의 광채 눈부신데 / 五馬光陸離
그대 찾아 옷소매 잡고 / 訪君爲挽袖
황금 술잔 나누는 사이에 / 共倒黃金巵
하루 해가 다 졌으리니 / 晩色靄煙岫
그때 새로운 시 읊으면서 / 是時得新詞
미친 이 사람도 생각했었나 / 還憶狂生否
그대의 남행사 읽어 보니 / 覩君南行辭
그곳 강산도 다 예와 같구려 / 江山盡如舊
탈속한 객경 전이지(全履之)는 / 瀟酒全客卿
기개와 운치가 진정 나의 벗이야 / 氣韻眞我友
일찍이 제세의 뜻 품었고 / 早懷濟物情
잠시 도잠의 술에 숨었으며 / 暫隱陶潛酒
구사하는 글 육경과 같아 / 吐文似六經
여러 별들이 나열해 있는 듯하지만 / 錯落羅星斗
사람 놀래이는 명성 아니 냈거니 / 未放驚人鳴
누가 대장(大匠)을 대신한 손 상할쏜가 / 誰傷代匠手
보드라운 비에 바람도 가벼워 / 雨輭光風輕
꽃과 버들이 알맞은 시절이야 / 時節宜花柳
그런대로 한평생 마칠 만한 것은 / 亦足了一生
왼손에 게 안주 오른손에 술잔일세 / 蟹左復杯右
휘파람 소리는 난조가 우는 듯 한데 / 長嘯如鸞聲
선인의 소맷자락 가볍게 나부끼며 / 飄飄紫霞袖
시는 사조(謝眺)를 넘어뜨리고 / 詩成倒宣城
구는 창중수를 압도하네 / 句壓窓中岫
내 성품 본디 방향이 없는데 / 我性元無程
두 분은 이를 용납할 수 있겠나 / 二子肯容否
사귐은 담수처럼 더욱 맑으니 / 淡水交轉淸
이십 년 전의 옛 친구가 아니던가 / 二十年前舊
[주D-001]풍대특(豐大特) : 풍수(豐水)에 살았다는 큰 소. 진 문공(秦文公) 때 옹남산(雍南山)에
있는 큰 가래나무를 베었는데 벤 나무 속에서 한 마리의 청우(靑牛)가 나와서 풍수로
들어갔는데 가끔 발작하곤 했다. 그 뒤에 노특사(怒特祠)를 세워주었다. 《錄異傳》
[주D-002]습가지(習家池) : 《진서(晉書)》 산간전(山簡傳)에 “여러 습씨는 형양(荊襄) 지방의 호족(豪族)으로 아름다운 동산과 못을 가지고 있었는데, 산간(山簡)이 양양(襄陽)을 진수할 때 늘 그곳에 나가 노닐며 술을 마셔 취하곤 했다.” 하였다.
[주D-003]아이들도……쳤으리 :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 “양양의 어린이들 모두 손뼉 치며 길 막고 너나없이 백동제(白銅鞮)를 부르네.” 했다. 백동제는 가곡(歌曲) 이름이다.
[주D-004]오마(五馬) : 한(漢) 나라 제도에 태수(太守)의 말이 다섯 필이었으므로 전(轉)하여 태수를 지칭하기도 한다.
[주D-005]대장(大匠)을……상할쏜가 : 《노자(老子)》 74에 “죽이는 일을 맡은 자가 죽이게 마련인데, 죽이는 일을 맡은 자를 대신해서 죽이는 것은 마치 대장을 대신해서 나무를 찍는 것과 같다. 만약 대장을 대신해서 나무를 찍게 된다면 그 손을 다치지 않을 자가 드물다.” 했다. 여기는 괜히 세상에 나아가 남을 대신해서 수고로울 게 없다는 뜻이다.
[주D-006]창중수(窓中岫) : 사조(謝脁)가 여법조(呂法曹)에 화(和)한 “창문 정면에 먼 멧부리 늘어섰고 뜰 가에 높은 수목 우거졌네.” 하는 시를 말한 것이다.
○천수사(天壽寺)에 자면서 화답하다
온갖 꽃 다투어 피면 / 百花相倚鬪輕盈
그대와 함께 취하려 했는데 / 準擬同君醉太平
이 좋은 계절에 까닭 없이 눈물로 이별하고 / 嘉節無端揮淚別
어지러운 산 어디로 섭섭히 떠나는구려 / 亂山何處皺眉行
노동(盧仝)은 오천 권의 문자를 남겼고 / 玉川文字五千卷
육귀몽(陸龜蒙)은 삼십 간의 집 뿐이었지 / 魯望生涯三千楹
나도 소년 시절에 노닐던 곳이니 / 曾是少年爲客處
사람 만나거든 나의 옛이름 물어보게나 / 逢人問我舊姓名
○봉성(峯城)에 자면서 화답하다
산 중턱에 비낀 해 더디게도 가는데 / 半山斜日過簷遲
두자미의 시구만 읊고 있노라 / 淸句唯吟杜紫薇
이번 길에 《두자미집(杜紫薇集)》만을 휴대하고 왔었다.(此行唯携杜紫薇集。)
어린 대나무는 그늘에 눌려 자라지 못하고 / 溪竹困陰孫未長
뜰 매화는 흡족한 비에 열매 살쪄 가네 / 庭梅飽雨子初肥
여관의 삿자리는 나그네의 졸음 부르고 / 旅軒風簟牽人睡
들집 솥에 봄나물은 주린 손 위로하네 / 野鼎春蔬慰客飢
먼 타향에 한가히 노는 사람 뉘 돌보랴 / 千里倦遊誰勞問
안개 잠긴 석루에 중마저 선정(禪定)에 들었구나 / 石樓僧定鎖煙霏
○덕연원(德淵院)에 자면서 화답하다 2수
지는 해에 석 잔 술로 취하고 / 落日三杯醉
맑은 바람에 외로운 베개 벗하였네 / 淸風一枕眠
속 빈 대나무 손의 성품 닮았고 / 竹虛同客性
늙은 소나무 중의 나이와 비슷해 / 松老等僧年
들 물은 푸른 돌 움직이고 / 野水搖蒼石
마을 밭은 산마루 둘렀구나 / 村畦繞翠巓
산 빛은 저물녘에 더욱 좋으니 / 晩來山更好
시 생각이 샘처럼 솟아나네 / 詩思湧如泉
잔잔한 호수 파란 물결 넘실거리고 / 碧湖晴瀲灩
꽃다운 풀은 멀리 우거졌네 / 芳草遠芊綿
삼천리 곳곳에 길을 물었고 / 問路三千里
이름 알려진 지 사십 년이 되었구나 / 知名四十年
서늘함이 좋아서 물가 난간에 기대었고 / 愛涼憑水檻
먼 데를 보려고 높은 봉우리에 오르네 / 眺遠上雲巓
늙은 중들 일도 많구나 / 老衲渾多事
차 맛도 평하고 또 샘물도 평하려니 / 評茶復品泉
○호숫가에서 손을 배웅하며 화답하다
호수는 넘실넘실 버들 빛도 고운데 / 平湖水漫柳嬌春
외길 비바람에 먼지가 젖는구나 / 一路風輕雨浥塵
익새 그린 배는 한가한 듯하면서도 바쁘고 / 畫鷁似閑還以迫
방금 사람 전송하고 나서 또 사람 맞이하네 / 送人才了又迎人
○우연히 호숫가에 노닐면서 화답하다
봄놀이 쉽사리 노곤하니 / 春遊易成憊
나그네의 회포 항상 서럽구려 / 旅意動含悽
푸른 덩굴은 쓰러지는 나무 부축하고 / 綠蔓扶顚樹
파란 이끼는 무너지는 언덕 감싸 주며 / 蒼苔護圮提
저문 강가에 안개 낀 버들은 무거워 하는 듯하고 / 暮江煙柳重
새벽 언덕에 이슬 젖은 꽃은 흐느끼는 듯하네 / 曉岸露花啼
노래 부르며 양주로 가는 길에 / 歌吹楊州路
죽서에서 놀던 풍류 생각하겠지 / 風流憶竹西
[주D-001]죽서(竹西) : 지금 강도현(江都縣) 북쪽에 있는 정자 이름. 구양수(歐陽脩)의 죽서정
(竹西亭) 시에 “십리나 이어진 누대(樓坮)에 노래 소리 번화로우니, 저 양주(楊州)는
다시 전날 같지 못해" 했다.
○공관(空館)에 홀로 있으면서 화답하다
옛 집은 사람 겪은 지 오래인데 / 古院閱人久
가난한 마을이라 술 얻기 어렵구려 / 荒村得酒疏
시 읊으니 산새가 놀라고 / 詠詩驚谷鳥
연못에 밥 던지니 고기들 모이네 / 投飯聚池魚
강은 밀물이 물러간 뒤 고요하고 / 江寂潮廻後
산 빛은 해질 무렵에 환하여라 / 山明日側初
봄 게으름이 버릇이 되어 / 春慵渾作癖
글귀 얻고도 써 놓지 않는다오 / 得句不須書
○즉사(卽事)를 화답하다
한가롭기는 도정절 같고 / 閑於陶靖節
광직(狂直)함은 개관요라고나 할까 / 狂似蓋寬饒
나그네 꿈은 층계 진 멧부리를 뚫고 / 旅夢穿層岫
시의 눈동자는 푸른 하늘까지 닿았으며 / 詩眸截碧霄
회오리바람은 이별하는 옷소매 당기고 / 輕颷牽別袖
새벽 달은 돌아가는 배를 보내네 / 殘月送歸橈
수벽의 물결은 안개를 일으키고 / 水壁波霾粉
암비의 글자는 이끼가 끼었네 / 巖碑蘚蝕雕
강산은 북고와 같고 / 江山同北固
풍토는 남초와 같으며 / 風土似南譙
천연의 요새(要塞)는 험하기도 하고 / 控險天爲府
귀신의 솜씨인 듯한 다리는 하늘에 닿았네 / 連空鬼作橋
깊숙이 핀 꽃은 웬만한 비를 피할 수 있고 / 幽花逃小雨
누운 버들은 밀리는 모래에 시달렸으며 / 臥柳困驚潮
하얀 사장(沙場)에 거북이가 햇볕을 쬐고 / 沙日玄夫曝
호수의 안개 속엔 백로가 나는데 / 湖煙雪客翹
먼데서는 노 젓는 소리 들려 오고 / 遠聲聞欸靄
깊숙한 방에서는 와료를 굽어본다네 / 深竇俯窐寥
이별의 회포 나만이 느끼나니 / 離別吾偏感
하염없는 세월 뉘와 함께 보낼쏜가 / 光陰孰共消
떠나기는 원숭이가 우리를 벗어나듯 하고 / 去如猿出檻
돌아오기는 봉이 교외에 노니는 듯하거니 / 來忽鳳遊郊
어디에 간들 즐거움이 없겠나 / 何適未爲樂
괜히 시끄러움 피한다고 마음 쓸 나위 없어라 / 休煩苦避囂
[주D-001]북고(北固) : 지금 단도현(丹徒縣) 북쪽에 있는 산이름. 삼면(三面)에 물이 둘러 있고
형세가 험준한 곳으로 유명하다.
[주D-002]남초(南譙) : 동진(東晉) 시대에 설치된 군(郡)으로, 지금 전초현(全椒縣) 서북쪽에
있다.
[주D-003]와료(窐寥) : 텅 비고 깊숙한 모양.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에 “ 비고 깊어 그
바닥은 보이지 않고 허공에서 솔바람 소리만 들린다.”고 했다.
○대장(大丈) 김자유(金子由)가 윤학록(尹學錄)에게 주등장(朱藤杖)을 선물로 받고는 나에게
시를 지으라고 하다
계림 선생이 아흔 살을 넘어 / 鷄林先生九十餘
두 볼에 흰 수염 눈서리와 같은데 / 十分霜雪黏雙鬚
신선의 단약(丹藥) 못 이루어 다리가 둔해 / 金丹未就脚稍澁
나고 듦에 지팡이를 의지하네 / 出門入門須杖扶
윤랑의 의기는 모두가 아는 바이라 / 尹郞意氣衆所憑
남만(南蠻)에서 난 만년의 홍등장 선사했지 / 贈之以南詔萬歲之紅藤
성글고 고른 다섯 마디는 한 손아귀보다 굵고 / 五節踈勻過手卓
길고 곧은 여섯 자는 어깨 높이와 같아 / 六尺脩直等肩升
천산 만곡을 마음껏 다닐 수 있으니 / 千山萬谷意自便
어제의 늙은이가 오늘은 젊은이로세 / 昨日衰翁今壯年
장안에 술집 많으니 / 長安多酒店
동전 백 닢쯤 매달고 다니소 / 遊必掛百錢
그대는 보지 않았나 공광의 영수장을 / 君不見孔光靈壽煩帝賜
머리 하얗도록 물러날 줄 몰랐지만 / 白首冒榮能不恥
선생은 본디 신선(神仙)을 그리는 마음으로 / 先生本有紫霞想
몸에 구슬과 인끈 좋아하지 않았지 / 不事嬰身珪組累
선생은 이런 소박한 기풍 있으니 / 先生有素風
이 지팡이는 산중의 처사(處士)에게 마땅하오 / 此杖宜山中
그럼 어찌 나공원을 배울 나위 있겠오 / 何必學羅公遠
지팡이로 은교 만들어 월궁에 들어갔던 일을 / 擲作銀橋入月宮
[주D-001]영수장(靈壽杖) : 영수목(靈壽木)으로 만든 지팡이. 한(漢) 나라 때 공광(孔光)에게
조회에도 참여하지 말게 하고 열흘 만에 한 번씩 사찬(賜餐)하며 영수장을 내려 사부
(師傅)를 위하는 예우를 다했다. 여기서는 공광이 나이 높도록 벼슬에서 물러나지 않은
것을 농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