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잡이
노래
기능
등 연구
충남 녹도의 조기잡이와 어로신앙
<목 차>
Ⅰ. 녹도 연구의 의의
Ⅱ. 주벅 어장과 주벅 어로
Ⅲ. 주벅 고사와 당제
Ⅳ. 녹도를 통해본 조기잡이권의
문화교류
【논문개요】
녹도는 규모가 작은 섬이지만 어로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는 중요한 곳이다.
녹도 일대는 조기 산란장을 끼고 있어서 조기잡이가 성행했던 곳이다. 특히 ‘주
벅’이라고 불리는 주목망(柱木網) 어업의 중심지로 꼽힌다. 녹도에서는 조기잡이
문화의 여러 측면을 한꺼번에 볼 수 있으므로 그 상관관계를 주목할 수 있다.
녹도 사람들에게 주벅 어로는 각별한 생업 전통이다. 그러므로 주벅 어로는
민요와 의례 전승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어로요의 구성과 다양한 형태의 고사
(告祀)는 주벅 어로의 특징과 관련 있다. 또한 주벅을 중심으로 한 조기잡이는
당제의 물적 기반으로 작용해왔다.
녹도를 통해 서해안 조기잡이권 문화교류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어로요의
경우 조기잡이 노래의 선택적 수용과 교류 과정을 보여준다. 주벅 고사의 경우,
어로의 생태적․사회적 조건과 의례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준다. 또한 여러 형태
의 고사가 공존하고 있는데 통합적 교류 형태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녹도
당제는 서해안 일반의 면모를 띠고 있지만, 그 수행 방식에서 지역성을 보여준
다. 녹도의 경우 세습무계 무당들이 당제에 참여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주변 몇몇 섬과 함께 전횡이란 신을 모시고 있는 국지적 분포 양상을 보여준다.
* “이 논문은 2005년 정부재원(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KRF-2005-005-J13702).”
**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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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의 사례는 조기잡이권 문화 교류의 다층성을 말해준다.
주제어 : 조기잡이, 어로신앙, 해양문화, 조기문화, 주목망(柱木網), 당제(堂祭)
Ⅰ. 녹도 연구의 의의
녹도는 서해안의 작은 섬이다. 충남 대천항으로부터 25km 거리에
있고 면적은 0.9㎢이다. 녹도에는 선창말(배가 닿는 마을), 큰샘말(큰
샘이 있는 마을), 고랑말(골짜기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 돌끝(섬 끝에
있는 곳) 등 네 개 자연마을이 있다. 녹도(鹿島)라는 이름은 섬의 생
김새가 사슴 형국이란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섬의 모양을 두고 ‘고
개는 서쪽으로, 뿔은 동쪽으로 두고 드러누워 있는 사슴과 같이 생겼
다’라고 풀이한다. 그리고 북쪽에 자리잡은 녹도리 호도(狐島)는 여우
형국이라고 설명된다.
입도조(入島祖)는 의령 편씨, 나주 전씨, 천씨 등이 거론되는데, 섬
에 이들 후손이 남아 있지는 않다. 현 주민 중에서는, 경주 최씨가 15
충남 녹도의 조기잡이와 어로신앙 57
대, 경주 이씨가 11대, 밀양 박씨가 11대째 거주하고 있다. 입도 내력
으로 볼 때 조일전쟁[임진왜란] 후에 충남 연안지역 주민들이 이주해
오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녹도는 1970년대까지는 활력이 넘치는 섬이었다. 당시에는 120호
이상이 살았지만 지금은 60호 170여 명이 산다. 인구가 급감했다는
것은 초등학교가 폐교된 데서도 알 수 있다. 1975에는 졸업생만 해도
26명이었고, 전학년 120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학생 수 감
소에 따라 2006년 2월에 청파초등학교 녹도분교가 폐교되었다.
<그림 1> 충남 보령시 오천면 녹도
녹도는 규모가 작은 섬이지만 어로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는 중요
한 곳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약간의 밭농사를
제외하고는 예나 지금이나 어업이 주를 이룬다. 연안 일대에는 제주
난류의 북상으로 난류성 어족이 풍부하다. 멸치잡이와 새우잡이가
성행하고, 김과 굴 양식도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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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녹도 일대는 조기 산란장을 끼고 있어서 조기잡이가 성행
했던 곳이다. 녹도는 특히 ‘주벅’이라고 불리는 주목망(駐木網․柱木
網) 어업의 중심지로 꼽힌다. 주목망은 서해안의 대표적인 정치 어업
인데 녹도가 그 거점 중의 한 곳이다. 또한 주낙 어로가 많이 이루어
졌는데, 조기잡이가 한창일 때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배가 120척 정도
되었고, 파시가 서서 흥청대던 곳이다. 그래서 작은 섬인데도 무창포,
안흥과 함께 이른 시기에 어업조합이 들어와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녹도에서는 조기잡이문화의 여러 측면을 한꺼번에 볼 수 있으므로
그 상관관계를 주목할 수 있다. 녹도에서 전승되는 주벅․주낙 등의
어로활동과 어로요, 파시, 산다이, 각종 고사, 그리고 마을 공동체 신
앙인 당제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민속이 아니다. 이들 어로와 민요,
파시, 신앙 등은 조기잡이문화라는 범주 속에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이 글에서 어로신앙을 다루면서 어로활동과의 긴밀한 연관관
계를 주목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의 조기잡이 연구는 어장 중심의 접근이 많았다.1) 칠산어
장, 죽도어장, 연평어장 등과 그 어장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문
화 현상을 주목해왔다. 이 경우 중선이나 안강망, 닻배 등의 어선 어
업을 염두에 두기 마련이고, 회유 어종인 조기의 생태와 관련된 문화
적 특징을 주목하게 된다. 그래서 계절별로 형성되던 어장과 어장 따
라 이루어지던 어로활동, 파시, 민요 등이 관심거리가 된다.
한편 서해안의 조기문화는 해안선이나 생태환경의 복잡성만큼 다
양하다. 그래서 개괄적인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조기문화에 대한
연구는 서해안 전체 차원의 접근과 함께 개별 사례에 대한 구체적인
1) 주강현, 「서해안 조기잡이와 어업생산풍습」, 역사민속학 창간호, 한국역사
민속학회, 1991 ; 이윤선, 「조기잡이 어로민요와 닻배의 민속지적 고찰」, 목
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 이경엽, 「서해안의 배치기소리와 조기잡이의
상관성」, 한국민요학 14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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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토가 필요하다. 배치기소리처럼 서해안 전역에서 전승되는 민요의
경우 전파와 교류의 문제가 중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또한 ‘조기
잡이의 신’ 임경업의 경우도 서해안에 널리 분포하므로 전체적인 판
도를 그려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러나 배치기는 어로방식의 문제
와 떼어놓고 얘기할 수 없고2) 임경업 전승도 서해안 모든 지역에 분
포하지 않으므로 무조건 서해안 전역의 문제로 정리할 수 없다. 지역
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례 연
구를 통해 조기문화권의 구체적 특징이 다뤄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지역과 비교하는 연구로 확장해야 한다.
서해안 중간 지점이라는 입지적 조건에 걸맞게 녹도의 민속 속에
는 여러 가지 점들이 복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당제의 전체 구성을
보면 서해안 일반의 특성을 보이지만 신격을 보면 인접 섬들과 묶이
는 국지적 권역성이 나타난다. 또한 세습무당들이 참여하는 형태여
서 황해도․인천 등지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이 글의 논의와 직
접 관련이 없지만 얼마 전까지도 초분이 있었으므로 서해안 초분의
분포를 다룰 때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녹도의
사례는 서해안 민속 전승의 지역적 다양성을 확인하기에 적합한 대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현지조사 내용을 토대로 녹도에서 전승되는 조기잡이
와 어로신앙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3) 특히 주벅 고사의 경우 생산
의례적 성격이 짙으므로 어로와 의례의 직접적인 연관성에 대해 다
루고자 한다. 또한 당제의 경우 본래 특정 어로에 제한되지 않으므로,
물적 기반과 의례의 연관성 문제로 접근하고자 한다. 그리고 녹도의
2) 배치기는 안강망, 정선망, 주목망 등의 망어로와 관련이 있다(이경엽, 앞의
논문 참고).
3) 2006.6.1~2. 충남 보령시 오천면 녹도리 현지조사. 제보자 : 이규인(남, 81),
김청산(남, 80)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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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를 다른 지역과 비교하고 서해안 조기잡이권 문화교류의 몇 가
지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주벅 어장과 주벅 어로
녹도 사람들의 어로활동은 주벅, 주낙, 어패류 채취․양식 등을 중
심으로 이루어져왔다. 이 중에서 주벅이 가장 중요시되었다. 지금은
주벅이 사라졌지만 20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의 논밭과 같이 중요하
게 간주되었다. 일년 내내 주벅 어로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년 농
사’에 해당할 만큼 비중있는 생업이었다.
계절별 어로를 보면, 음력 2월부터 5월 초까지 주벅을 하고, 이후
5월부터 9월 초까지는 낚시 또는 주낙을 했다. 주낙의 경우 주로 외
지배들이 와서 작업을 했으므로 녹도의 주력 어로는 역시 주벅이라
고 할 수 있겠다.
주벅은 어살과 함께 서해안의 대표적인 정치(定置) 어로 방식으로
서,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 주로 분포했다.4) 주벅은 물살이 센 구간
에 두 개의 말뚝을 설치하고 거기에 자루형의 긴 그물을 달아 물살에
휩쓸려온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물의 흐름이
빠른 서해안의 생태환경에 적응된 어로형태라고 할 수 있다.
어민들은 겨울에 육지의 전주(錢主)에게 빚을 얻어다가 쌀을 사고
짚을 사와 이듬해 어로를 준비한다. 녹도 사람들이 상대하던 전주는
4) 農商工部水産局, 韓國水産誌 1卷, 圖解第九圖,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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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의 오주사, 정참봉, 결성의 최병덕씨, 전주사 등이었다. 전주는
곧 객주를 의미한다. 전주는 돈을 빌려주고 어민들이 잡은 고기를 대
신 팔아주는데, 어민의 입장에서 볼 때 공정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고 한다. 전주가 실제 가격보다 낮게 책정해서 어물을 거래함으로써
어민들의 빚을 계속 유지하게 만든 까닭에 종속적인 관계가 쉽게 개
선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겨울철에 사온 짚으로 줄을 꼬고 그물을 엮고 ‘망’5)을 뜨는 준비
작업을 한 후에, 음력 2월 초에 주벅을 설치한다. 주벅은, 일곱 발 정
도 길이의 말뚝 두 개를 일곱 발 간격으로 세우고 망을 놓아 줄로 묶
어 고정시킨 후 그 사이에 사각형 입구를 가진 그물을 다는 방법으로
설치한다. 말뚝 두 개와 그물 하나가 주벅 한 틀이다. 이 한 틀을 한
집에서 관리한다. 한편 구역에 따라서는 말뚝을 세 개 세우고 그 사
이에 그물을 두 개 달아 두 집에서 관리한다. 수심이 깊고 해저가 갯
벌 지형이어서 설치하기 어려운 곳에서 이 방법을 사용한다. 녹도 앞
대화사도 밖 구역에 이런 주벅이 많았다.
녹도에 주벅이 설치된 곳은 4개 구역이다(<그림 2> 주벅 위치도).
녹도와 호도 사이 ‘너마지’라고 불리는 곳에 6개가 있었고, 돌섬[石
島]과 소화사도 사이 ‘우틀’에 15개, ‘아래틀’에 20개가 있었다. 그리
고 소화사도와 대화사도 사이에 20개, 대화사도 밖에 20개가 있었다.
주벅터는 논밭처럼 사고 팔 수 있었다. 또한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
아 관리했다. 주벅터는 장소에 따라 등급차가 있었는데, 참조기가 잘
들어오는 구역이 1등급이다. 1등급과 2등급 어장 가격은 배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가장 좋은 자리는 녹도 앞 돌섬과 소화사도 사이 ‘우
5) ‘망’은 말뚝과 그물을 고정시키는 닻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짚으로 엮은 후
그 안에 돌을 집어넣어 바다에 투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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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간 부분인 ‘골판’에 조기가 많이 들고,
주변인 ‘변전’에는 조기가 많이 들지 않기 때문에 우틀 내에서도 가
격 차이가 있었다.
<그림 2> 녹도의 주벅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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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벅터, 곧 주벅 어장은 ‘물발이 잘 가야 되는 곳’이 적격지다. 섬
사이라고 할지라도 물이 제대로 흐르지 않는 곳이면 주벅터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녹도와 서쪽에 있는 모도 사이는 “겉물은 빨리 가
는데 속물이 뜬” 곳이어서 부적합하다고 한다. 주벅을 신설할 때는
이와 같은 조건을 잘 고려해야 한다. 제보자 김청산(남, 80) 씨는 자
신이 40대에 큰형님의 말을 듣고 길산도 옆에 주벅을 맸다가 고기가
들지 않아 뜯어 버리고 다른 곳에 설치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주낙
배를 많이 탔던 큰형이 ‘물 가는 데’를 잘 알고 있어 길산도 옆이 괜
찮겠다고 추천했던 것인데, 물이 잘 빠지지 않고 겉도는 곳인 줄을
모르고 거기에 설치했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주낙은 조금 무렵에 조
업하고 주벅은 사리 무렵에 하는데, 어로 생태의 차이만큼 ‘물을 보
는’ 인지능력도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벅 어로는 배를 타고 나가 작업을 한다. 주벅 설치와 어로 과정
에 일손이 많이 들고, 물때에 맞춰 주어진 시간에 고기 들어내는 일
을 신속하게 해야 하므로 공동 작업 형태로 운영된다. 주벅 어로는
대개 일곱 명이 한 조가 돼 실시한다. 같은 구역에 주벅을 설치한
4~5명이 갹출해서 주벅배를 구입하고 군중동무(선원) 1~2명, 화장 1
명을 채용해서 어로 작업을 한다. 공동으로 구입한 주벅배는 매년 돌
아가면서 ‘돌림 차례’로 배 임자를 맡는다. 주벅배는 지금 톤수로 하
면 3~4톤 정도이고 큰 배의 경우 10톤 정도였다. 대개 노를 저어 다
녔지만 대화사도 밖처럼 거리가 먼 구역은 돛을 달아 이동했다.
음력 2월 초에 주벅을 설치하고 2월 그믐 사리부터 조업을 하는데,
월별로 다른 고기를 잡았다. 2월 그믐이 되면 복쟁이(황복)가 제일 먼
저 들어온다. 그리고 3월 보름이 되면 참조기가 온다. 4월부터 5월까
지는 갈치가 들어온다. 5월초에는 잔갈치(풀치)가 들어오는데 풀치잡
이를 마지막으로 주벅 어로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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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에는 곡우 무렵에 참조기가 들어온다. 곡우는 “녹도 앞 독섬에
알 싸러” 조기가 들어오는 산란기다. 녹도의 조기잡이는 음력 3월 보
름이 제철이다. 주민들은 조기가 밀려오는 곡우사리를 ‘조기 생일’이
라고 말한다. “칠산에 참조기가 비치면 여기도 비친다”고 말하는데
두 지역의 시차가 크지 않으므로 회유 경로가 비슷한 것으로 추정한
다. 그리고 연평어장으로 가는 조기와 녹도 조기는 다른 종류라고 설
명한다. 녹도에서 잡은 조기는 크기가 큰 데 비해 연평 조기는 작기
때문에, 녹도 조기가 연평어장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주벅 어로는 사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녹도 어민들의 물때 이
름은, “한매(10일, 25일)—두매(11일, 26일)—세매(12일, 27일)—네매
(13일, 28일)—다섯매(14일, 29일)—여섯매(15일, 30일)—일곱매(16일,
1일)—여덜매(17일, 2일)—아홉매(18일, 3일)—열매(19일, 4일)—한객
기(20일, 5일)—대객기(21일, 6일)—아침조금(22일, 7일)—한조금(23
일, 8일)—무심(24일, 9일)”이다. 주벅 어로는 물이 살아나는 두매․
세매부터 열매 사이에 이루어진다. 밀물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
하고 썰물은 반대로 내려오는데, 썰물의 센 물살에 휩쓸려 그물에 들
어온 고기를 잡는다. 하루에 두 번 ‘물을 보고’ 고기를 잡는다. 물 흐
름이 약한 ‘걱기’ 이후 조금에는 그물을 걷어 올려서 육지에서 말리
고 손질한다. 그것을 ‘그물 볕 갈헌다’고 말한다.
주벅에서 잡힌 참고기는 얼음을 싣고 온 상고선에 곧바로 팔려나
갔다. 녹도 앞 바다에 인천에서 온 상고선이 열 척 이상 머물 정도로
조기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런 어업 생산력 덕분에 다른
곳보다 앞서 녹도에 어업조합이 생겼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조기잡
이가 한창일 때는 외지에서 120척 이상 배들이 몰려들고 어부들을
상대하기 위해 술집이 들어서고 파수[파시]가 섰는데, 해변에 술을
파는 주가(酒家)가 16집이나 들어설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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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 어민들은 20~25년 전까지 말뚝을 세워 설치하는 ‘말장주벅’
을 사용했다. 그 뒤로 도람통을 이용한 ‘도라무주벅’으로 5~6년 정도
조업을 했다. ‘도라무주벅’의 경우 그물코가 촘촘한 그물을 이용하기
때문에 잔고기를 주로 잡았다. 그러나 그 후로는 고기가 별로 들지
않으니까 주벅 어로를 하지 않게 되었다.
주벅 외에 주낙을 이용해 5월부터 8월 사이에 조기를 잡았다. 주낙
은 녹도 뒤 길산도, 황도, 외연도 등지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주낙배
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 배에 선원으로 승선해 조업을 했
다. 주낙배는 배임자 외에 3~4명의 선원들이 조업을 했다. 주낙은 주
로 조금에 이루어지는데, 배에 싣고 간 소금에 절여 저장했다가 가까
운 포구에 나가 팔았다.
Ⅲ. 주벅 고사와 당제
1. 주벅 고사
고기잡이 과정은 노동요의 연행이나 의례의 형태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각각을 따로 설명할 수 없다. 주벅 의례에 앞서 주벅 어로
요를 통해 그 관계를 먼저 보기로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주벅은 긴
말뚝 두개를 세워 닻 역할을 하는 망에 줄로 묶어 고정시킨 후 그물
을 매달아 고기를 잡는다. 그리고 배를 타고 가서 그물을 끌어 올리
고 고기를 퍼서 올리는 과정을 거쳐 고기를 잡는다. 이와 같은 주벅
설치와 조업 과정은 민요 연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녹도에서 전승되는 어로요는 <배올리는 소리>, <줄꼬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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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젓는 소리>, <그물 당기는 소리>, <고기 푸는 소리>가 있다.6)
이 노래들은 주벅 어로의 진행 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벅배는
주벅 어로에서만 사용된다. 주벅을 해체한 직후나 태풍이 올 때 육지
로 올려두는데 <배 올리는 소리>는 그때 부르는 노래다. 또한 주벅
은 말뚝을 고정시키기 위해 굵고 긴 줄을 많이 이용하게 되는데, 이
런 이유로 겨울이면 공동으로 줄을 꼬는 작업을 한다. <줄꼬는 소
리>는 이 과정에서 연행된다. 그리고 주벅 어로는 개인 노동이 아니
라 공동 작업으로 진행되는데, <노젓는 소리>, <그물 당기는 소
리>, <고기 푸는 소리>는 그 진행 과정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녹도의 어로요는 다른 정치 어로와 비교해보면 특성이
금방 드러난다. 주벅과 비슷한 정치 어로인 어살이나 독살 등에는 독
립된 어로요가 없는데, 이는 어살과 독살이 주벅과 달리 줄꼬는 노동
의 비중이 크지 않고, 배를 이용해 공동 작업을 하지 않는 것과 관련
있다. 주벅이란 어로 방식과 어로요 전승이 상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벅 고사는 크게 보아 다섯 가지가 있다. 지금은 전승력이 약화됐
지만 얼마 전만해도, 명절에 맞춰, 주벅 설치 한 후에, 고기가 안 잡
힐 때 등에 여러 가지 형태로 고사를 모셨다. 그 종류를 보면, 섣달
그믐고사, 범벅고사, 뱃고사, 그물고사, 유황제가 있다.
섣달 그믐고사는 새벽 3, 4시경에 지낸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지
내야 복이 있다고 해서 새벽 일찍 모신다. 돌림 차례에 의해 그해 선
주 역할을 하는 배 임자가 주관해서 지낸다. 고사를 지낸 후에는 선
주들과 선원, 동네 사람들이 배 임자 집에 모여 음복을 한다.
범벅고사는 설 쇠고 정월에 손 없는 날을 받아서 지낸다. 주벅을
맨 어장 부근 육지에서 지낸다. 배임자와 화장이 고사를 지내러 간
6) MBC, 한국민요대전(충청남도편) , 1995, 206~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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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녹도 앞 쪽 어장보다 녹도 뒤쪽의 ‘너마지’나 화사도 너머에 어
장이 있는 사람들이 범벅고사를 많이 했다. 제물은 메와 범벅만을 준
비한다. 현장에 가서 놋솥에 ‘노기밥’을 하고 범벅을 만들어 물 닿는
해안가에 놓고 “금년에 조기 많이 들어오게 해주시라”고 축원을 하
고 온다.
주벅뱃고사는 당제를 모실 때 당집에서 뱃기에 길지를 받아 배로
가져와서 모신다. 화장이 깃발을 들고 당집에 가서 길지를 받은 다음
경쟁적으로 먼저 내려오는 ‘기저룸’을 한 후, 그 기를 받아 배에 세우
고 고사를 모신다. ‘돌림 차례’에 의해 그해 선주 노릇을 하는 배임자
가 제물을 준비하고 고사를 주관한다. 당제를 모시는 음력 2월에는
배가 육지에 올려진 것도 있고, 봄어장 준비를 위해 바다에 띄워진
것도 있는데, 위치에 상관없이 배위에 올라가서 고사를 지낸다.
뱃고사를 지낸 후에 배선왕을 모신다. 당제 모신 날 저녁에 당주가
선주들에게 주는 길지를 받아 배선왕으로 모시게 된다. 배선왕은 여
자 선왕(船王)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로 여자 빗, 가위, 실, 바늘을 한
데 싸서 모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여자 선왕이므로 ‘녹의홍
상(綠衣紅裳)’에 맞춰 배에 다는 오폭기 색깔의 상하가 나뉘는 것이
라고 말한다. 오폭기 맨 위에 파랑이 오고 중간에 하얀색, 남색, 노란
색을 넣고 맨 아래에 붉은 색이 오도록 하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라
고 한다.
그물고사는 주벅을 설치한 직후 지내는 고사다. 음력 2월 초에 10
여 일 정도 작업을 해서 주벅을 완성한 후에 날을 잡아 고사를 지낸
다. 이때는 배를 주벅 기둥에 묶어놓고 배 위에서 고사를 지낸다. 그
물고사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 먹기 위한 목적으로도
지내는데, 각자의 주벅이 설치될 때마다 날짜가 겹치지 않도록 돌아
가면서 고사를 모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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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황제[요왕맞이]는 어장 잘 되게 해달라고 비는 의례다. 개별적으
로 지내며, 장소는 선창 바닷가인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의 주벅에
비해 자신의 주벅에 고기가 잘 안 들어온다고 여길 때 요왕맞이를 한
다. 대개 물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두매나 세매 무렵에 지낸다.
이상에서 본 대로 주벅 고사는 섣달 그믐고사, 정월의 범벅고사, 2
월의 뱃고사, 주벅 설치 후의 그물고사, 풍어를 비는 유황제 등이 있
다. 주벅 어로는 고기가 그물 안에 저절로 들어오는 방식이므로 초자
연적인 힘의 작용을 연상하기 마련인데 그 때문에 여러 종류의 고사
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참조기 철에는 물 건너온 사람을
집에 들이기 않는다”는 말을 한다. 집안이나 주변이 어수선하면 그
이유로 고기가 안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한 속신이라고 할 수
있다. 고사를 지내는 태도도 이와 같은 속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벅고사는 조별 단위로 매년 바뀌는 배 임자에 의해 수행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벅고사의 수행방식은 주벅 어로 방식과 통한다. 같
은 어장에서 조별로 어로활동을 하고, ‘돌림 차례’로 배임자 역할을
바꿔가는 체제가 의례 수행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
고 특정 어장을 향해 고사를 지내고, 더불어 뱃고사를 지낸다는 점은
어선을 이용한 정치 어로라는 특징과 관련 있다.
2. 당제
녹도의 마을 제사는 일 년에 세 번 지냈다고 한다. 음력 2월에 모
시는 당제, 8월에 모시는 ‘신곡 차례’, 동짓달에 모시는 ‘동지 제사’
이렇게 세 가지가 있었다. 2월 제사는 4일이나 5일 무렵에 소를 잡아
크게 지냈고, 신곡 차례는 새 곡식으로 떡을 하고 메를 지어 술을 준
충남 녹도의 조기잡이와 어로신앙 69
비해 바치는 제사이고, 동지 제사는 메만 지어서 간단하게 지낸다. 2
월 초에 날을 잡는 이유는, 당제 전에 아이 출산이나 초상이 나면 부
정이 있다고 해서 3월로 연기해서 지내게 되므로, 연기되는 번거로움
을 피하기 위해 월초에 날을 잡아 당제를 모셨다고 한다.
세 번 지내던 제사를 한 번으로 통합해서 지냈는데 나중에는 그마
저도 중단되었다. 한 번으로 통합된 것은 40년 전의 일이다. 제보자
이규인(남, 82) 씨가 당시 젊을 때 노인들과 싸워가면서 “낭비할 필요
가 있는가. 일 년에 한 번씩만 하자”고 해서 제일을 정월 보름으로 옮
기고 일 년에 한번 당제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으로
날짜를 옮기고 5년 정도 당제를 더 모셨다고 한다.
제당은 마을 뒤 당산에 자리잡고 있다. 수백 년 된 소나무와 후박
나무, 동백나무가 우거진 숲 속에 당집이 자리잡고 있다. 당에 모셔
진 신은 ‘전웅대감’이라고 한다. 중앙에 전웅대감과 양옆에 제자(부
장) 두 명의 그림이 모셔져 있었다. 화상은 40년 전에 분실되고 지금
은 건물만 남아 있다. 전웅대감은 어청도에서 활동했던 분인데 녹도
에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 그 양반이 할아버지들 말을 듣기로는 중국서 온 사람인디 어청
도를 그 사람이 주도해가지고 있었어요. 어청도 주민이 먹을 것이 없
어서 곤란하면은 목포나 군산이나 이런 데서 범선 큰 배로 쌀을 싣고
서울을 가는 그런 배가 있었는데 그 배를 그 양반이 축지법으로 안으
로 부채질을 해서 들어오게 했답니다. 들어오게 해서 그 배에서 쌀을
내려서 어청도 주민이 먹고 살고 배는 불로 태웠답니다. 그래서 불탄
개라고 있어요(2006년 6월 2일 제보자 : 이규인(남, 82)).
전웅대감은 섬 주민들을 위해 세곡선(稅穀船)을 쇠 부채로 끌어 당
70 島嶼文化제30집
겨 쌀을 주민들에게 주고 그 배를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어청도에
있는 ‘불탄개’라는 지명이 그런 내력을 담고 있다고 한다. 녹도 당에
서 모시고 있는 전웅대감은 전횡(田橫)을 지칭한다. 전횡은 어청도,
외연도에서도 당신으로 모셔지는 존재다. 어청도와 외연도에서도 ㈎
와 비슷한 전설을 들을 수 있다. 당신으로 좌정된 내력이 자세히 드
러나지는 않지만 세곡선을 털어 주민들에게 나눠줬다는 내용에서 주
민들에게 특별한 존재로 수용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녹도 당에서 전횡을 모시게 된 경위에 대해 제보자 이귀인은 다음
과 같이 말한다.
㈏ 우리 8대조 할아버지가 산으로 칡을 끊으러 갔는데 저녁 먹도
록 안오셨더래요. 그래서 동네에서 불끈 뒤집어져서 사람을 찾으러
다닌디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재주가 있습니까. 그래서 이구석 저구석
을 다 다니는데 결국은 동받이라고 하는 데가 있어요. 장벌 말하자면
강변이죠. 강변에 자갈담이 있었어요. 거기에 가서 누웠는데 귀신이
끌고 갈라고 하고 이 양반은 안끌려 갈려고 하고. 그래서 보니 양쪽
손에다 나무를 하나씩 잡았더래요. 그란디 산에서 끌고 가려고 하니
까 안 끌려가려고 나무가 버텨가지고 강변까지 내려가서 이렇게 자
갈땅이 밭두둑 밭 갈듯이 했드래요. 그런디 끌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당에서 ‘웅’ 소리가 나더랍니다. 동네사람들이 들으니까 그래서 이상
스럽다고 해서 거기 가서 발견해서 우리 8대조 할아버지를 구했다는
얘기여(2006년 6월 2일 제보자 : 이규인(남, 82)).
녹도에서 전횡을 모시게 된 내력을 제보자 이규인은 자신의 8대조
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어청도에 살던 8대조가 갯귀신에게 끌려가 죽
을 뻔 했는데 당에서 나오는 소리 덕분에 구출될 수 있었다고 한다.
충남 녹도의 조기잡이와 어로신앙 71
이렇게 살아난 8대조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의 셋째가 녹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그 아들에 의해 전횡을 녹도에서 모시게 되었다
고 한다.
한편 다른 제보자는 녹도 당의 당신이 당할머니라고 말하기도 한
다.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1위를 모셨다고 하며, 여자 옷이 걸
려 있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전횡과 다른 신격을 설명하는 것으
로 여겨진다. 여러 신격 중에서 당할머니를 주신으로 기억하는 것인
지, 전횡이 추가되면서 복합되어 있는 현상인지 확정하기는 어렵다.
당제의 준비 과정과 진행 내용을 개괄적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당제 준비는 날짜를 정하고 당주를 선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2월
초에 마을회의에서 당제 날짜를 확정하고 생기복덕을 보고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제관을 선출했다. 제관은 당주, 부당주, 발당주 등 3명
을 선정한다. 부당주는 당주를 보좌하고 발당주는 심부름하는 역할
을 한다. 당주는 엄격한 금기를 지키며 제의를 준비했다. 화장실에
다녀오면 찬물로 목욕하고 제물을 사러 가기 전에도 목욕을 했다.
당제를 모시는 2월 초에 초상이 나면 3월로 연기해서 모시게 된다.
그리고 당제 무렵에 출산이 예정되어 있는 산모의 경우 다른 섬으로
보내 애를 낳도록 한다. 인근 길산도에 8호가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
출산을 하도록 했다.
제를 지내는 순서는, 먼저 아침에 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거기서
700m 가량 떨어진 봉화산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마을
의 ‘거리마당’에서 거리제를 지내고 장승이 세워진 강변[바닷가]에서
장신굿을 하고 마지막으로 용왕굿을 한다. 저녁에는 거리마당에서
소를 삶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놀았다. 거리마당에는 애 어른 할 것
72 島嶼文化제30집
없이 운집했는데 소 삶은 국물을 먹이고, 소고기 두 점씩을 떼서 120
호 집집마다 돌렸다고 한다.
당에 오를 때에는 풍장을 치고 뱃기를 들고 간다. 각 주벅배의 화
장들이 뱃기를 들고 올라와 당에 세워뒀다가, 봉화산에서 제를 지낸
다음에는 ‘기저룸’을 했다. 봉화산에서 출발해 자신의 배에 먼저 깃
발을 꽂으면 벌이를 잘 한다고 해서 경쟁적으로 기겨루기를 했다.
당제를 위해 원산도, 오천, 광천 등지에서 ‘당골’들을 불러 왔다. 원
산도 살던 박창기 씨가 당골들의 ‘주모자’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7~8명 정도를 불러왔는데 무녀는 부르지 않았다. 당골들이 풍물도
치고 삼현육각을 연주했다. 이들은 놀이판을 만들어 재주를 넘고 악
기 연주를 하고 용왕굿에서 비손을 했다. 특히 봉화산에서 가마니를
수십 장 깔아놓고 재주 넘고, 풍장 치고, 육자백이와 같은 소리를 하
고, 재담과 우스갯짓을 하고, 삼현육각을 갖춰 푸짐하게 놀았다. 당골
들은 장신굿, 용왕굿에서도 음악을 연주했으며 당주 옆에서 비손을
하기도 했다.
당골들을 많이 불러다 놀이판을 벌일 정도로 당제를 크게 모시기
위해 비용이 많이 필요했다. 당제 비용은 집집마다 걷었으며 어장 하
는 사람은 더 내고 안 하는 사람은 덜 냈다. 당시만 해도 봄어장을 하
면 참조기를 풍성하게 잡았으므로 ‘부촌’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
다. 옛날에 대천에 가서 녹도 사람 찾으려면 가죽신 신은 사람을 찾
았다고 한다. 가죽신 신은 사람은 녹도 사람밖에 없을 정도로 어장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녹도 당제는 30년 전까지 모셨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당제의
전승과 단절은 조기잡이의 부침과 관련 있다. 당제의 물적 기반이라
고 할 수 있는 조기잡이가 쇠퇴하면서 사회문화적 활력이 사라지고
충남 녹도의 조기잡이와 어로신앙 73
당제도 그 과정에서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농어촌이 위축되고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당제 수행
이 어려워진 환경 변화도 전승 중단의 원인이 되었다. 엄격한 금기를
동반한 당주 역할이 쉽지 않고 주민들이 그 역할을 기피하다 보니 당
제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Ⅳ. 녹도를 통해본 조기잡이권의 문화 교류
조기잡이는 서해안을 대표하는 문화 전승이다. 조기잡이는 조기의
회유 시기에 맞춰 서해안 전역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전체 어업력(漁
業曆)으로 본다면 조기잡이가 서해안 어업의 전부라고 할 수 없다.
조기가 북상하는 봄철에 어장 단위로 어선 어업이 이루어지고, 여름
과 가을에 낚시 어로가 이루어졌으니 조기잡이가 서해안 어업의 전
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매년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지속적인
전통이 되었으므로 서해안의 어로활동은 조기잡이를 토대로 해서 계
절별로, 어종별로 다양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굴비․염전․젓갈 등
의 식생활, 수산물의 유통 및 포구의 기능과 관련된 핵심적인 매개물
이 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조기잡이를 서해안의 두드러진 문화 현상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조기잡이라는 동일한 어업 형태로 인해 서해안 어로문화는 비슷한
점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배치기소리는 본래 황해도 민
요인데 진도 조도 일대까지 퍼져 있다. 배치기의 전파에는 조기파시
라는 지속적이고 연쇄적인 교류 과정이 매개되어 있다. 서해안 전역
74 島嶼文化제30집
에 배치기가 퍼져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7)
그러나 서해안의 어로민요가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다. 조기잡이
노래 중에서 배치기소리를 특징적으로 수용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지역마다 약간씩 다른 노래들을 전승하고 있다. 고유의 전승체계는
그것대로 유지하면서 배치기라는 특별한 지위의 노래를 공유하고 있
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다. 어로방식에 따라 배치기는 선택
적으로 수용되어 전승된다. 녹도의 경우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녹
도의 주벅 어로요에는 <줄꼬는 소리>, <노젓는 소리>, <그물 당기
는 소리>, <고기푸는 소리> 등이 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줄꼬는
소리>가 있고, <배치기 소리>가 없음을 볼 수 있다. <줄꼬는 소
리>가 중요시 되는 것은 주벅 어로에 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치기 소리>가 없는 것은 주벅이 일반 어선 어업과 달리
섬 인근 어장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망 어업이기 때문이다.8) 이와 같
은 현상을 통해 조기잡이 문화의 선택적 수용과 교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의례 전승을 통해서도 문화 교류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수산의
례는 어로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수산의례는 섬 주민들의 생계가
달려 있는 생업활동 속에서 생성되었다. 녹도의 주벅 고사와 당제는
풍어를 위한 생산 활동과 그것의 종교적․문화적 수용 과정을 담고
있다.
7) 이경엽, 「서해안의 배치기소리와 조기잡이의 상관성」, 한국민요학 14집,
2004.
8) 녹도에 <배치기 소리> 자체가 전승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에 다니
며 안강망 어선을 탔던 어민들의 경우 <배치기 소리>를 부를 줄 안다. 제보
자 이규인 씨 같은 경우 남녘지방 사람들이 부르는 배치기는 맛이 다르다며
지역적 차이까지 거론할 정도로 많이 안다. 그런데 이 배치기가 주벅 어로와
직접 관계가 없으므로 서해안 중앙에 위치한 녹도에서 비중 있게 전승되지
않는 것이다.
충남 녹도의 조기잡이와 어로신앙 75
녹도의 주벅 고사는 주벅 어로의 생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주
벅은 정치망이면서 어선을 사용해 조업을 하고, 개별 소유이면서 공
동으로 작업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주벅 고사는 이런 조건을 수용
하고 있다. 이 점은 일반 뱃고사나 명절 고사 등과 다른 부분이다. 생
산의례인 만큼 어로와의 관계가 더 직접적임을 알 수 있다.
범벅고사는 정치 어로지역에서 특징적으로 전승되는 의례다. 범벅
을 제물로 올리는 고사는 정치 어장 의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지역에 따라 ‘도깨비고사’라고도 한다. 그런데 녹도에서는 동일 어로
형태에 성격이 다른 뱃고사가 공존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이는 일반
정치 어로와 달리 어선을 이용해서 조업을 하는 주벅의 특징과 상관
있다. 또한 개인 단위의 그물고사․유황제와 함께 배 임자가 매년 돌
아가며 지내는 뱃고사․범벅고사가 함께 전승되고 있다. 이것은 개
인 소유의 어업이면서 조별로 공동 작업을 하는 주벅 특유의 어로 방
식을 반영한다. 주벅 어로의 생태적․사회적 조건과 의례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따로 존재하는 의례
형태가 녹도의 경우 통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위에
서 본 배치기의 경우와 달리 통합적 교류 형태에 해당한다.
물적 기반과 의례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녹도의 당
제가 큰 규모로 짜임새 있게 전승되었던 것은 조기잡이라는 경제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소를 잡고 외지에서 당골들을 불러다 놀이판을
크게 벌이고 놀았던 것은 조기잡이를 통해 확보한 경제적 기반과 그
것이 지속되기를 기대하는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녹도 당제의 진행 과정을 보면, 먼저 산 위에 있는 당에서 산신과
당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풍물을 치고 이동해서 마을 쪽으로 내려와
거리제—장승굿—용왕굿을 한다.9) 그리고 그 과정에서 뱃기에 길지
9) 녹도 당제에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띄배(액막이배) 보내기가 없다. 정
76 島嶼文化제30집
를 받아 배까지 오는 ‘기저룸’ 경쟁을 하며, 뱃기를 배에 달고 고사를
지내고 당에서 받아온 길지를 접어 배서낭으로 봉안한다. 산과 마을,
바다를 통합하는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절차와
구성은 서해안 일대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천 강
화도 외포리 곶창굿, 전북 위도 대리 원당굿, 전남 흑산면 대둔도, 도
초면 우이도 당굿 등이 모두 비슷한 구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녹
도 당제가 서해안 당제의 일반적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당제 수행 방식을 보면 지역적 차이가 있다. 녹도 당제는 세
습무계 무당들이 당제에 참여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금은 충청
도․경기도에서 강신무 주관의 풍어굿을 주로 보지만, 과거에는 그
렇지 않았다. 예를 들어 태안 황도 붕기풍어굿은 20여 년 전부터 황
해도 출신 김금화 만신을 불러 굿을 하지만 이전에는 당골들이 무굿
을 했다. 황도에 마을 당골이 있어 인근 안면도나 서산에서 다른 무
당들을 불러다 무당굿을 크게 했던 것이다.10) 경기도의 경우 북부의
강신무굿과 남부의 세습무굿으로 구분되는데,11) 안산 대부도나 선재
도 일대에서 후자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세습무 활동이
중단되었지만 화성 이남은 본래 세습무권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이
런 분포권에서 보듯이, 녹도 당제는 그 동안 별로 알려지지 않은 당
골 무굿의 사례에 해당하므로 관심을 모은다.
무당굿 형태의 서해안 마을굿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구가 없었
다. 황해도 만신들이 주관하는 인천 대동굿과 세습무가 주관하는 위
월 대보름에 띄우는 액막이배가 있지만, 2월에 하는 당제 순서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녹도의 액막이배는 4, 50여년 전에 전승이 중단되었다.
10) 공주대박물관, 황도 붕기풍어제 , 1996, 110~111쪽.
11) 경기도 북부와 달리 남부인 화성 쪽은 세습무가 활동했던 지역이다. 이와 관
련된 엄밀한 구분은 별도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이용범, 화성의 무속 ,
화성문화원, 2005 참고).
충남 녹도의 조기잡이와 어로신앙 77
도 대리 원당굿 정도가 주목받아 왔다. 이중에서 특히 세습무가 주관
하는 마을굿의 특징을 따로 주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별신굿의 전
통이 있었지만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서해안 별신굿은 전북 선유
도, 관리도, 위도, 성포, 전남 가거도 등지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별신
굿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지만 3년 또는 5년 단위로 무당굿을 크게
벌였던 사례는 충남 태안 황도, 전남 도초도, 대둔도 등지에서 더 많
이 확인된다. 이런 사례들은 기존에 알려진 동해안, 경남 남해안 별
신굿과 연결해 U자 형태의 별신굿 교류양상을 떠올리게 한다.12)
녹도 당제에 참여한 당골들은 원산도, 오천 등지에서 패를 이뤄 다
니던 세습무였다. 이들은 당제 공간에서 놀이판을 주도했는데, 땅재
주나 재담 외에 세습무 특유의 삼현육각, 육자백이 등을 연행했다.
당골들은 당제 기간 외에도 여러 차례 녹도를 오가며 놀이판을 벌였
다고 한다. 녹도가 ‘봄어장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 부촌’이니까 놀 일
이 있으면 이들을 불렀는데, 세습무계 광대들이 가야금이나 대금을
갖고 와서 며칠씩 머물며 놀았다고 한다.
녹도에 세습무계 광대들이 빈번하게 출입했기 때문에 관련 연행이
지금도 전승되고 있다. 녹도에 육자백이가 전승되는 것은 이런 배경
과 관련 있다. 제보자 이규인은 녹도를 오가던 광대들에게 배우고,
또 마을에서 노인들이 부르던 육자배기를 지금도 잘 전승하고 있다.
노인들은 육자배기를 진양조라고도 하는데, 긴 장단의 육자배기가
이들에게 특별하게 수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녹도의 육자배기는
당제를 통해 유통되던 서해안 민속 전승의 다양성을 보여준다.s
서해안의 당제나 무속의 신격 중에서 널리 알려진 존재는 임경업
장군이다. 임경업은 조기잡이 방법을 알려준 신으로 전한다. 그러나
서해안 전역에서 임경업을 모시는 것은 아니다. 임경업 장군당의 분
12) 이경엽, 「호남 무속의 존재양상」, 한국무속학 15, 한국무속학회, 2007, 35쪽.
78 島嶼文化제30집
포는 충청도 남쪽까지 내려오지 않는다. 알려진 바로는 임경업 당의
하한선은 충남 서산 창리당이다.13) 그리고 그 이남지역인 홍성군 성
호리, 옹암리 당제에도 임경업 신이 등장하지만, 그 남쪽으로 가면
잘 보이지 않는다. 앞에서 본 것처럼 서해안 당제의 전체 진행은 비
슷하지만 모시는 신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제 신격의 분포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로 해명할 수 있을 것
인데, 아직까지 서해안 전반의 현상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분
명하게 말하기 어렵다. 지역별 사례들을 총괄하여 분포양상을 정리
할 필요가 있다. 우선 녹도의 사례만으로 본다면 서해안에는 국지적
으로 권역화된 현상이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녹도 당제에서 모셔지
는 전횡은 충청도 서쪽 녹도, 어청도, 외연도 등지에서만 보이므로
그 배경에 관심을 쏠린다.
전횡은 중국 제나라 왕이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전횡은 한나라와
쟁패를 다투던 중에 한나라에 굴복하기를 거절하고 자결했으며, 500
여 무리도 그를 따라 자결했다고 한다.
전횡은 제왕(齊王) 전영의 동생으로서, 한신이 제나라 왕인 광을 사로잡
자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한 고조가 즉위하자 무리 5백 명과 동해의 섬에
들어가 살았다. 한 고조가 전횡을 부르자 낙양으로 가던 중에 한나라의 신
하가 되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하여 자결했다. 섬에 있던 5백여 명도 이 소
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史記 卷94).
전횡이 무리 5백과 들어갔다는 중국 동해의 섬은 전횡도다. 전횡도
는 중국 산동성 즉묵현 동북쪽에 있다. 전횡 일행의 일을 슬퍼한다는
의미로 오호도(嗚呼島)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섬에는 전횡을
따라 자결했다는 5백 의사의 무덤이 있고, 그를 기리는 동상과 사당
13)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서해해역편), 403~404쪽.
충남 녹도의 조기잡이와 어로신앙 79
이 있다.14)
이런 전횡이 우리나라 서해안의 섬에서 당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약간 복잡한 부분이 있으나 그 배경을 탐색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 측 기록에서 전횡은 바닷길로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의 시
문에 자주 등장하며 이후 ‘오호도의 전횡을 조문’하는 시는 여러 문
인들의 작품에서 반복되어 나온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오
호도가 우리나라 어디쯤이라고 ‘세상에 전해지기’ 시작하는데, 숙종
34년, 36년에는 유생들이 오호도에 제단과 비석을 세울 것을 거듭
상소한다.15) 그리고 오호도의 위치로 홍주(洪州) 지방,16) 신진(薪鎭)
지방17)이 거론된다.
조선후기에 ‘전횡 일행이 들어갔다는 동해의 섬이 우리나라 서해
안 어디’라는 이야기가 ‘세상에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횡
을 절의의 상징으로 이해하던 우호적 사고가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제단과 비석을 세워 미적(美績)을 표창’하라고 요구하
던 유생들의 발언이 당제의 신격화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민중
들은 전횡의 절행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섬 생활과 연관된 일로 관
련시킨다. 전설에서는 전횡 일행이 들어갔다는 섬을 어청도라고 하
는데, 전횡이 세곡선을 부채로 끌어들여 쌀을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배를 불태웠다고 한다. 세곡선을 털어 섬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의적
14) 2006년 8월 13~21일. 중국 산동성 청도 현지조사.
15) 숙종실록 34년 무자(영천의 유생 권순원이 오호도에 제단과 비석을 세울
것을 상소하다). 숙종실록 36년 경인(영천 유생이 상소하여 노동의 국릉과 오호도에 단을
세울 것 등을 청하다).
16) 영조실록 영조 17년 신유(한림 추천에 대한 폐단과 김원재의 일과 당습에
대한 헌부의 아룀).
17) 고종실록 고종 8년 신미(연생전에 영의정 김병학 등이 입시하여 ≪시전≫
을 진강하였다).
80 島嶼文化제30집
형 당신의 사례는 완도 송징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18) 전횡이 섬
주민들의 수호신적 존재로 형상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녹도를 비롯한 어청도, 외연도 등지에서 전횡이 당제의 신으로 모
셔지는 것은 중국과 근접 거리에 있다는 지리적 조건이 우선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횡의 행적을 특별하게 기리던 조선후기의
사회적 분위기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 더 직접적인 것은
전횡을 영웅적 인물로 수용해서 당제의 신으로 모셨던 민중적 사고
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19) 전횡의 사례는 서해안 민속신앙의 다양
성을 말해주며, 분포상으로 볼 때 국지적 권역성을 보여준다. 조기잡
이권의 당제인데 지역에 따라 모시는 신이 다른 것은 전승 배경이 같
지 않아서다. 개별 사례에 대한 천착과 전체적인 차원의 점검이 필요
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상에서 본 대로 녹도의 사례는 서해안 조기잡이 문화의 여러 특
징을 잘 보여준다. 어로요의 경우 조기잡이 노래의 선택적 수용과 교
류 과정을 보여준다. 주벅 고사의 경우, 어로의 생태적․사회적 조건
과 의례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준다. 또한 여러 형태의 공존 양상을
통해 통합적 교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녹도 당제는 서해
안 일반의 면모를 띠고 있지만, 그 수행 방식에서 지역성을 보여준다.
녹도의 경우 세습무계 무당들이 당제에 참여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주변 몇몇 섬과 함께 전횡이란 신을 모시고 있는 국지적 분포
양상을 보여준다. 녹도의 사례는 조기잡이권 문화 교류의 다층성을
말해준다. 보편적이고 기층적인 형태와 국지적인 양상들이 더불어
논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18) 나경수, 광주․전남의 민속연구 , 민속원, 1998, 261쪽.
19) 전횡이 당제에서 신격화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한국 서해안 동제의 중국
계 신격 전횡 연구」(중국해양대학교 국제학술대회, 2007.9)에서 상세하게 다
뤘다.
충남 녹도의 조기잡이와 어로신앙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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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島嶼文化제30집
Yellow Corvina Fishery in Nokdo in Chungnam
and Fishing Faith
20)
Kyung-Yeop Lee*
Nokdo is a small-sized island, however, it is very significant from the
perspective of fishery culture. The vicinities of Nokdo has been prevalent
with yellow corvina fishery because it nears the its spawning ground. It is
the center for bag nets which is also called ‘Jubuck’. Various aspects of
yellow corvina fishery can be observed in Nokdo and that is the reason we
focus on the correlation.
For the residents of Nokdo, ‘Jubuck’ fishery is a very special occupation
tradition. Therefore, ‘Jubuck’ fishery provides an important foundation for
folk songs and transmission of rituals. The organization of fishery song and
sacrifices in various forms are related to the characteristics of ‘Jubuck
fishery’. In addition, yellow corvina fishery mainly 'Jubuck' has functioned
as the material foundation of ‘Dangje’.
The characteristics of cultural interaction of yellow corvina fishery in the
west coast can be observed through Nokdo. In case of fishery songs, they
show the selective acceptance and interchange process of yellow corvina
fishery songs. In case of ‘Jubuck’ sacrifice, it shows a close relationship
* Mokpo National University
충남 녹도의 조기잡이와 어로신앙 83
between the biological and sociological conditions and rituals. The existence
of various forms of sacrifice allow us to assume the integrative interchange
of culture. Nokdo ‘Dangje’ takes on the general aspects of the west
coast, however, its performance displays locality. In case of Nokdo, the
participation of shamans from inherited shaman family in ‘Dangje’ is one of
its characteristics. Furthermore, it shows the local distribution of faith in
which Nokdo along with several nearing islands worship a god named
“Jeonwhoeng”. The case of Nokdo shows the multi-layers of cultural
interchange in the yellow corvina fishery region.
Key Words : Yellow corvina fishery, fishing faith, oceanic culture, yellow corvina
culture, bag nets(柱木網), Dangje(堂祭)
* 이 논문은 2007년 10월 29일에 투고되어 2007년 11월 29일에 심사 완료되
고, 2007년 12월 13일에 편집위원회의 회의에서 게재가 확정되었음/이경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