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사] 조선판 역사 바로세우기-'노산군'에서 '단종'으로

[을파소]

왕의 여자>나 <불멸의 이순신> 등의 선조-광해군 연간을 배경으로 한 사극을 보면 가끔 ‘단종대왕이...’라는 대사가 나온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고증에 어긋난 대사이다. 왜냐하면 단종이라는 묘호가 정해진 것은 숙종 때의 일로, 선조시대의 단종은 왕이 아닌 ‘노산군’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 대접도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과 같아 이 때만 해도 <단종실록>은 <노산군 일기>로 불리고 있었다. 단종 복권 이후에는 <단종실록>이 되지만, 내용까지 고친 건 아닌 터라 그 형식은 여전히 <연산군일기>나 <광해군일기>와 같은 형식이었다.

그렇다면 노산군은 어떻게 복권되어 단종이 되었고, 그를 다르던 신하들도 복권이 된 것일까?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빗대었다 하여서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무오사화로 이어진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노산군에 대한 문제가 자칫하면 큰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던 환경을 말해준다. 선조 때만하여도 강원도 관찰사로 있던 정철이 노산군묘의 석물을 세울 걸 건의하기는 하지만, 그 복권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정철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것도 그래도 ‘군’ 칭호를 가진 왕족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지, 왕으로서의 복권을 추진할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본 선조는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이제 이른바 《육신전》을 보니 매우 놀랍다. 내가 처음에는 이와 같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아랫사람이 잘못한 것이려니 여겼었는데, 직접 그 글을 보니 춥지 않은 데도 떨린다.

지난날 우리 광묘(光廟)782) 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中興)하신 것은 진실로 인력(人力)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저 남효온이란 자는 어떤 자이길래 감히 문묵(文墨)을 희롱하여 국가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하였단 말인가? 이는 바로 아조(我朝)의 죄인이다. 옛날에 최호(崔浩)는 나라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했다는 것으로 주형(誅刑)을 당하였으니,783) 이 사람이 살아 있다면 내가 끝까지 추국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다. 기록된 내용 가운데 노산 군(魯山君)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유년784) 에 출생하여 계유년785) 까지 그의 나이가 13세인데도 16세로 기록하였으며, 광묘께서 임신년786) 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갔었는데 여기에는 부음(訃音)을 가지고 중국에 갔다고 기록하였다. 또 하위지(河緯地)가 계유년에 조복(朝服)을 벗고 선산(善山)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광묘께서 즉위하여 교서(敎書)로 불렀기 때문에 왔다고 하였다. 하위지가 갑술년787) 에 집현전(集賢殿)에서 글을 올린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 왜곡되고 허탄함은 진실로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가슴아픈 것은 뒷사람들이 어떻게 그 일의 전말(顚末)을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한번 그 글을 보고 곧 구실(口實)로 삼는다면, 이 글은 사람의 심술(心術)을 해치기에 적당한 것이 될 것이다.

또 한가지 논할 것이 있다. 저 육신(六臣)이 충신인가? 충신이라면 어째서 수선(受禪)하는 날 쾌히 죽지 않았으며, 또 어째서 신발을 신고 떠나가서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먹지 않았단 말인가?788) 이미 몸을 맡겨 임금으로 섬기고서 또 시해(弑害)하려 했으니 이는 예양(豫讓)이 매우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789) 그런데도 저 육신은 무릎을 꿇고 아조를 섬기다가 필부(匹夫)의 꾀를 도모하여 자객(刺客)의 술책을 부림으로써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랐고, 그 일이 실패한 뒤에는 이에 의사(義士)로 자처하였으니, 마음과 행동이 어긋난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열장부(烈丈夫)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이는 ‘헛되이 죽는 것이 공을 세우는 것만 못하고 목숨을 끊는 것이 덕을 갚는 것만 못하다. 성삼문(成三問) 등은 그 마음에 잠시도 옛 임금을 잊지 않고 있었으므로 아조(我朝)를 섬긴 것은 뒷날의 공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라고도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진실로 공을 이루는 것만을 귀히 여기고 몸을 맡긴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백이(伯夷)·숙제(叔齊)와 삼인(三仁)790) 도 반드시 서로 모의하여 머리를 굽히고 주(周)나라를 섬기면서 흥복(興復)을 도모했을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이들은 자기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후세에도 모범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제 드러내서 아울러 논하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은 각기 군주를 위하는 것인데 이들은 아조(我朝)의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역적이니 이들은 오늘날 신하로서는 차마 볼 것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고 누구든 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자가 있으면 그도 중하게 죄를 다스리려 하는데 어떠한가?”

<선조실록> 선조 9년(1576년) 6월 24일

하지만 왕은 뭐라 하건 민심이 생각하는 노산군은 엄연한 왕이었다. 이미 노산군이 죽은 영월에서 그는 신으로 숭상되고 있었다. 1년에 한번 서낭당에서 제사를 지낼 때 슬쩍 노산군의 제사를 모시던 것이 어느덧 그를 신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지배층이라고 언제까지나 민심과 동떨어질 수만은 없었다.

실록에 3천번이나 나온다는 송시열은 현종에게 “노산군(魯山君)이 해를 입었을 때 아무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가 곧바로 가 곡하고, 스스로 관곽(棺槨)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묘(魯墓)가 바로 그 묘입니다. 흥도의 절의를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컫고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그 자손들이 본 영월군에 있기도 하고 괴산(槐山) 땅에 있기도 한다고 합니다. 절의를 부추키어 장려하는 도리에 있어 녹용(錄用)하는 은전이 있어야겠습니다.”(<현종실록> 현종 10년(1669년) 1월 5일) 라 말한다. 엄흥도는 당대에는 노산군의 시신을 수습하고는 숨어살아야 하는 처지였으나, 급기얀느 집권여당의 거두에 의하여 절의를 지킨 인물로 칭송되니, 이는 노산군에 대한 시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결국 노산군의 복권이 본격 논의되는 건 숙종 즉위이후이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피해자들이나, 영창대군을 지지하거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죽거나 유배된 대신들은 폐출된 연산군과 광해군에게 책임을 돌리면 되었다. 기묘사화의 피해자들은 남곤과 심정 일파를 악인으로 규정지으면서 복권시키면 되었고, 을사사화의 피해자들은 윤원형 일파에게 책임을 돌리면 되었다. 이 말은 억울한 피해자들을 복권시킬 때 정통성을 가진 왕 대신 책임을 질 사람이 항상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노산군과 김종서, 사육신 등은 달랐다. 이들의 대척점에 있는 건 바로 세조였고, 이후의 왕들은 모두 세조의 후손이다. 노산군과 그 신하들의 복권은 “이게 다 한명회 때문이다.”라고 넘어갈 수도 없었으며 자칫하다가는 현 왕실의 정통성에 일대 타격을 줄수도 있었다. 선조가 괜히 <육신전>을 보고 흥분한 게 아니다. 가뜩이나 방계혈통 콤플렉스를 가진 선조에게는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 할 수도 있는 <육신전>이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노산군의 복권을 추진한다. 사육신의 억울함을 알리는 상소도 올라오더니, 우선 첫 단계로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한 단계 올려준다. 그리고 그 무덤도 개축하고 1691년(숙종17년) 사육신과 노산대군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하더니, 마침내는 사육신을 복작시킨다. 이 때 숙종은 “(전략) 아! 어버이를 위하는 것은 숨기는 법인데, 어찌 이 의리를 모르랴마는, 당세에는 난신(亂臣)이나 후세에는 충신이라는 분부에 성의(聖意)가 있었으니, 오늘의 이 일은 실로 세조(世祖)의 유의(遺意)를 잇고 세조의 성덕(盛德)을 빛내는 것이다.”(<숙종실록> 숙종 17년 12월 6일)라면서 사육신의 복권이 세조를 위한 것이라면서 왕실의 정통성 훼손을 절묘하게 피해간다. 

1698년(숙종 24년)에는 전 현감 신규가 노산대군에게 왕호를 내릴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다. 역시 왕실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라 여기에는 반발도 뒤따랐지만, 마침내 그해 노산대군은 왕으로 복권되니, 그 시호는 ‘순정 안장 경순 대왕(純定安莊景順大王)’이요, 묘호는 ‘단종(端宗)’ 이었다. 여인사자의 도움으로 생계를 꾸리다 세상을 떠난 그 부인 역시 당연히 왕후로 복권되어 ‘정순(定順)’이라 하였으니, 이제 단종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국왕의 자리를 되찾은 것이었다.  이 때도 숙종은 비방기에서 “내가 생각하기로는 세조[光廟]께서 선위(禪位)를 받으신 초기에는 노산 대군(魯山大君)을 존봉(尊奉)하여 태상왕(太上王)으로 삼았고, 또 한 달에 세 번씩이나 문안하는 예(禮)를 시행하였다. 불행하게도 마지막에 내린 처분은 아마도 세조의 본뜻이 아닌 듯하며, 그 근원을 추구해보면 육신(六臣)에게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육신이 이미 정포(旌褒)되었는데, 그들의 옛 임금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는 것은 또다시 어떤 혐의와 장애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명나라 경태제(景泰帝)의 일은 비록 서로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역시 본받아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후략)”(<숙종실록> 24년 10월 24일)라면서 단종의 복권과 왕실의 정통성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애쓴다.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었다. 계유정난  죽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은 여전히 복권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이들이 복권은 영조에게로 넘어간다. 영조는 1546년(영조 22년), 김종서와 항보인의 복권에 대한 건의가 있자  “김종서·황보인 등의 복관에 대한 일은 대신이 이미 헌의를 하였고 연신이 또한 모두 진달하였는데도, 내가 주저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고 판서 김진규(金鎭圭)의 헌의를 회상해서였다. 이제 어제(御製)의 훈사 서문 가운데 ‘나는 마땅히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마땅히 태평을 주라.’는 교명을 받들어 읽고 나니, 마치 귀를 잡고 직접 하명하시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슬픈 감회가 인다. 그리고 훈사의 말미는 곧 지난날 육신(六臣)의 복관에 대한 일을 잘 계술하라는 뜻인데, 또한 어찌 잘 계술하지 않겠는가? 지난날의 교명을 본받는 것은 곧 자식된 자의 도리이고, 또 육신을 복관시키더라도 위사(衛社)의 훈명(勳名)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니, 이로 미루어볼 때 지금 세 사람을 복관시키더라도 그 훈적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 지금 훈사를 받들어 보니, 서문이 감격을 자아내어 마치 이곳을 오르내리시며 지도하는 것과 같으니, 아무리 신중을 기하기로서니 어찌 다시 주저할 것이 있겠는가? 김종서·황보인·정분을 특별히 복관시켜 성의(聖意)를 표창하노라.”((영조실록> 22년 12월 27일)라 말하면서 아버지 숙종처럼 왕실의 정통성을 훼손하지 않는 절묘한 방법으로 김종서 등을 복권시킨다. 여기에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도 복권되면서 단종과 그를 지키던 신하들은 모두 복권된다.

마무리는 영조의 손자 정조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1791년(정조 15년)에 조종에서는 단종의 릉인 장릉에 단종과 그를 지킨 신하들을 기릴 배식단을 세운다. 배식단은 정단과 별단으로 만들어졌는데, 정단에는 사육신과 김종서,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세조에 반대하다가 죽은 사람들이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정승이나 왕자, 그 밖의 높은 벼슬을 진내 사람들이 즐비한 정단에 여월이 일개 호장이었던 엄흥도도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때 엄흥도에게는 공조참판의 벼슬이 추증되었지만 당대의 쟁쟁한 사람들과 함께 모셔졌다는 건 쉽게 보기 힘든 일이다. 이는 단종을 장사지낸 그의 공이 단종을 지키다 죽은 이들 못지않다고 인정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별단에는 전하는 기록이 자세하지 않거나 연좌되어 죽은 이들이 들어갔는데 모두 1백명이었다. 별단에는 여성들도 배향되었는데 단종을 모시던 궁녀들은 물론이고, 단종의 복위를 점쳤다고 죽은 무녀까지 포함되었으니 단종에게 작게라도 충성을 보인 이들은 대부분 배식단에 배향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단종시대에 대한 과거사 규명은 마무리된다. 단종과 그를 다르던 신하들은 당대에는 패배하였지만, 결구에는 역사 속에서 재평가 받고 충절의 표상으로 그 이름을 길이 남기게 된 것이다.  

[윤준영]

광해군도 시호가 내려졌었다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몇 번 한적이 있었는데, 단종도 이런 경우가 있었네요.

[을파소]

광해군은 그게 불가능한 게, 인조의 후손들인 왕은 물론이고,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집권한 서인(노소론 모두), 야당이지만 인조반정에는 동조한 남인까지 정통성에 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단종 복위도 왕실의 정통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는데, 광해군은 그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욱스]

아~~ 불쌍한... 광해군은 중립정책을 잘햇는데 서인들에 의해.... 쫓겨나구... 너무 불쌍함... 시대적으로도 정치를 잘햇는데... 정말 안타깝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