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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대구는 다른 도시와는 달리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한 덕에 전쟁으로 인한 큰 피해가 없었다. 따라서 당시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근대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동산 선교사주택을 비롯해, 계산성당, 제일교회, 그리고 화교협회건물 등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축물들 말이다. 어디 건축물뿐이겠나. 한 청년의 수줍은 로맨스가 가득한 청라언덕과 대구사투리로 ‘질다’ 에서 유래된 ‘진골목’ 은 흘러간 시간들에 대한 추억과 향수를 자극시킨다. 동산선교사주택에서 진골목까지의 약 1.7km는 그야말로 대구의 근대 역사와 문화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그 길을 걷노라면 시계바늘이 거꾸로 도는 듯, 낡은 영사기를 돌려보는 흑백영화 속 장면들이 차르르 펼쳐진다. 마치 2010년의 오늘이, 1900년의 그날인 듯.
높이 솟은 첨탑, 영남 최초의 고딕성당 ‘계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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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수환 추기경이 처음으로 사제서품을 받은 곳이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결혼식을 올렸던 계산성당
90계단에서 내려와 길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바로 계산성당이다. 계산성당은 영남 최초의 고딕성당으로, 높은 첨탑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계산성당은 우리 역사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던 두 인물과 관계가 깊다. 작년에 서거하신 고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서품을 받은 곳이 계산성당이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해서는 에피소드도 회자된다. 바로 결혼식 얘기다. 주례를 맡았던 당시 경북지사가 성(性)을 착각하여 신랑 신부 이름을 바꿔 부른 것이다.
“육영수 군과 박정희 양의 결혼을…” .
계산성당은 성당의 모습 자체가 하나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인성 화백의 화폭에 담겨졌던 감나무와 종탑, 그리고 성당 안의 파르프 오르간 소리, 그리고 스테인글라스에 비치는 아름다운 햇빛들이 고풍스럽게 조화를 이뤄 천주교 대구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써의 위엄을 여실히 보여준다. 스테인드글라스에 12사도 말고도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 대구의 초기 천주교 신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선교사 주택과 마찬가지로 계산성당의 마룻돌 역시 대구읍성을 허물고 난 뒤 나온 돌을 깐 것이라고. 성당을 나와 왼쪽으로 돌면 골목길의 바닥에 민족저항시인인 이상화 선생의 시가 적혀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몇 줄의 싯귀 속에 녹아 흐르는 민족정신에 가슴이 뭉클해져온다.
빼앗긴 들에서 민족혼을 일깨운 ‘이상화 · 서상돈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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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에는 일제강점기에 일제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 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이상화고택이 있다. 서슬퍼렇던 치하에서도 ‘시인에게’ ‘통곡’ ‘역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해를 먹다’ 등 보옥처럼 빛나는 저항시를 썼던 선생. 고택은 이상화시인이 숨을 거둔 역사적 장소일 뿐 아니라 절필이 된 시 ‘서러운 해조’를 마지막으로 써낸 곳이기도 해서 감회가 더욱 새롭다. 한때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 위기에 놓였으나 시민들의 노력으로 복원, 현재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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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고택 맞은편에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서상돈 고택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서상돈은 천주교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맨손으로 시작해 큰 부자가 된 대구출신의 민족자산가다. 대한제국이 1300만원이라는 거액의 빚을 일본제국주의로부터 쓰면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자, 서상돈은 일본 빚을 갖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게 되었다. 그 돈을 갚기 위해 남성들은 담배를 끊고 여성들은 은비녀, 금가락지를 뽑아 빚을 갚자는 구국운동을 펼쳤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지만 국권 회복을 위해 온 국민을 단결시킨 자발적인 사회운동의 모범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지대하다 하겠다.
복작거리며 살던 우리네 모습을 만나는 ‘염매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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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빠져나와 동아쇼핑 옆 골목으로 염매시장을 만난다. 염가로 매매하는 시장이라는 뜻이란다. 이 시장은 대구읍성을 끼고 있는 시장으로 당시 경제의 중심이었다. 주목해 보아야 할 곳이 바로 나무전봇대. 지름이 400mm 정도로 현재까지 발견된 나무전봇대 중에서 가장 굵은 것으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또한 염매시장 끝자락에 위치한 건어물 가게인 성주상회는 옛날 경인여관 자리로 일제강점기 약령시에 온 상인들이 묵어갔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비록 조그마한 간이 시장이지만 결혼 이바지 음식 전문가게와 떡가게가 즐비하게 있어 눈요기하기도 좋고 출출한 배를 달래기도 좋다. 시장을 빠져나오면 지나만 가도 병이 낫는다는 약전골목과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 의 테마가 된 한옥집이 이어진다. 한옥집 벽에는 소설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달성 서씨들이 살았던 부자골목 ‘진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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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읍성의 제일 남문인 영남 제일관을 지나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일제 강점기 시절 달성 서씨들이 살며 대구의 부촌으로 이름 높았던 진골목이 나온다. 근대문화유산골목 마지막 여정이자 절정인 셈이다. 대구사투리로 ‘길다’ 라는 뜻의 ‘질다’ 에서 유래한 진골목은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식, 중국식, 일본식으로 혼합되어 지어진 한옥의 느낌을 그대로 만날 수 있다.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진골목 식당은 코오롱 그룹의 창업주인 이원만 회장이 거주했던 곳으로 ‘육개장’ 맛이 좋은 것으로 유명해 점심시간이면 길게 줄을 서야할 정도로 붐빈다. 진골목은 또한 여성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곳에 살던 7명의 여성이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가 열린 이틀 뒤인 1907년 2월23일 이 운동 참여를 발표한다. 이들은 은반지 모으기 등을 전개했으며 달성 서씨 부인 등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기념하는 비가 진골목에 세워져 있다. 진골목 끝에 위치한 정소아과도 근대의 건축과 생활양식을 떠올리는데 도움이 된다. 골목으로 나오면 화교학교도 볼 수 있다. 현재 화교협회 건물로 쓰이는 서병국저택은 달성 서씨 중의 최고의 부자 서병국씨가 서양의 건물양식에 중국식 적벽돌을 사용해 지은 저택이다.
어르신들이 한잔 차 값으로 추억을 사는 ‘미도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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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지식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미도다방은 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또 한 곳 주목할 곳이 있는데 바로 미도다방이다. 미도다방은 일제 강점기 때 달성 서씨 집안의 사랑채가 있었던 곳이다. 오늘날에도 미도다방은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모여 저마다의 보따리를 풀어놓는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어르신들의 진정한 마담으로 통하는 정인숙 사장은 손님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감동적인 존재’ 다. 직접 타주는 정성어린 한잔의 약차뿐만 아니라 그녀의 한결같은 섬김에 감동받은 단골들은 정마담과 미도다방을 소재로 숱한 시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미도다방의 찻값은 2000원. 여기에 전병을 무료로 준다. 은발의 오빠들이 추억을 사는 미도다방, 바로 한 시대의 시간벌이를 하고 있는 곳이다.
2코스 : 동산선교사주택∼3·1만세운동길∼계산성당∼이상화·서상돈 고택∼종로∼진골목(1.7㎞) 3코스 : 동성로 대우빌딩∼교동∼약전골목∼서문시장(2.4㎞) 4코스 : 국채보상공원∼삼덕문화거리∼방천시장∼봉산문화거리∼건들바위(2.5㎞) 5코스 : 반월당∼상덕사∼성바오로 수녀원∼성모당(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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