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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포션 "אֱמֹר 에모르" in 5782
레21:1-24:23(To), 겔44:15-31(Haft), 벧전2:4-10(Brit), 고후1:1-7:16(신약)
화요일(셋째 날)
레22:17-22:33(To), 고후3(신약)
אמר 에모르 토라포션은 עמר 오메르 카운트와 굉장히 깊은 연관이 있는 토라포션이다. 알렢과 아인만 다르다. 에모르는 말하다, Say라는 뜻이다. 그래서 에모르 토라포션의 마지막에 말을 잘못한 사람에 대한 처형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람은 엄마는 이스라엘인데 아버지가 애굽 사람인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슐로밋이다. 샬롬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다.
אמר 에모르 : 말하다, Say
에모르는 말과 관련이 있다. 요즘 유니스 사모가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 있다. 서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말을 안 듣나면 자기들이 영적인 줄 안다. 단독자이고 육체적인데 자기는 영적이고 상대방은 육체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대책이 없는게 육이면서 영적인 말을 한다고 생각하면 아무도 가르칠 수 없다. 서로가 육인데 자기는 영적인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디브리의 딸이라고 한다. 엄마는 이스라엘 사람이고 아빠는 애굽 사람이다. 이모 베아비브가 아니다. 혼합된 포도주이다. 헬라의 포도주는 혼합된 것이다. 그 안에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혼합되어있다. 그러면서 항상 자기에게는 영적으로, 상대방에게는 육적으로 적용한다. 이게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한 것이 된다. 그래서 이럴 땐 말을 하면 안된다. 이럴 땐 계속 여호와를, 상대방을 모독한다.
에모르 포션, 오메르 카운트 할 때쯤에 오면 오메르는 자기 관점을 죽이는 것이다. 에모르는 자기에게 있는 신성을 죽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들내지 않으셨다. 내가 맞고 너가 틀리다고 하지 않으셨다. 자신이 죽으셨다. 신이 죽으셨다. 에모르는 신이 죽으셨다는 것이다. 에모르는 말하는 것인데,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놀라운 것인데 여기에서 모든 창조가 나온다. 빛이 있으라 말하시니 빛이 있었다. 창조란 말로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우리처럼 디브리의 딸의 자식처럼, דברי 디브리란 나의 말이란 뜻이다. 나의 Speak이다. 상대방에게 다다다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를 모독하는 것이다. 우린 창조의 말을 하게 되어있다. 창조의 말을 하려면 내가 죽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창조의 말을 할 수가 없다.
시19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אין אמר 아인 에모르 : 에모르가 없다, Nothing Emor, Nothingness // 무[無]에 대한 말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언어도 없고 말도 없는데 어떻게 그의 소리가 세상 끝까지 이르는가? 에모르는 내가 영적이고 너가 육적이니 내 말을 들어 다다다 하고 이야기 한다고 해서 에모르가 아니다. 거기에 또 받아친다. 아니야, 내가 영적이라며 말이다. 그게 에모르가 아니다. 에모르는 아인 에모르이다. 에모르가 없다. 말 하는 게 없는 것이다.
이게 진짜 테프에레트이다. 내가 죽는 것이다. Nothingness 신의 죽음이다. 모든 영적인 횡보는 내가 잘났다고 하는 것이 죽은 것이 진짜 영적인 횡보이다. 내가 영적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죽는 것이다. 우리 샬라임이 나는 미쯔라임이라고, 애굽이라고 한다. 샬라임은 왜 애굽이라고 자꾸 이야기 할까? 베드로가 영적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되게 영적이고 샬라임은 육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말은 항상 영적이고 샬라임의 말은 항상 육적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그런데 이쪽도 저쪽도 영이 아니다. 우리의 말, 진짜 에모르란 그냥 자기가 죽는 것이다. 그럴 때 새 창조의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오메르 카운트란 자기 관점이 죽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관점을 뭐라고 하면 가만히 안 있는다. 그런데 오메르 카운트 기간에 우리는 자기의 관점을 죽인다. 남자와 여자는 항상 자기가 영적이다라고, 인간의 독특한 특징이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있는 육을 죽이려고 한다. 종교생활은 사실 자기 속에 있는 육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절대 자기 속에 있는 육을 못 죽인다. 우리가 착각하는게 내가 영적이 되고 성숙해졌다면 나는 육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나는 영적인 사랑을 하면서 영을 산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인간이 절대 하지 못하는게 육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큰 착각이다. 육은 내가 못 죽인다. 오메르 카운트를 하는 이유는 내가 못 죽이니 이 육을 카운트해서 주님 앞에 올려드리는 것이다. 주님만이 그것을 처리할 수 있지 육은 그것을 내가 처리하지 못한다. 그런데 종교적인 것의 특징은 육을 처리하려고 하고 자기가 육을 처리했다고 믿는다. 아니다, 우린 나의 육을 절대 처리할 수 없다. 심지어 히말라야 동굴에 들어가서 평생 있으면 육이 처리될 줄 안다. 보리수 나무 앞에 가부좌를 틀고 있으면 육이 처리될 줄 안다. 절대 처리되지 못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것이 내 속의 영이다. 영은 죽일 수가 있다. 내가 영적이다라고 하는 나는 죽일 수 있다. 그래서 신의 죽음을 에모르라고 한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거꾸로 신앙생활을 해왔는지 아시겠는가? 맨날 육을 다루려고 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영을 다루어야 한다. 내가 잘났다고 하는 것은 죽일 수 있다. 내가 맞다고 하는 것은 죽일 수 있다. 내가 진리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죽일 수 있다. 내가 진리라고 하는 것, 맞다고 하는 것이 틀린 것이다. 그것은 죽일 수 있다.
에모르에 오면 우린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된다. 이 계시까지 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우린 계속해서 내 속의 짐승을 죽이려고 하고, 내가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고 그래서 내가 의로운 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나한테서 계속 짐승을 발견하고 상대방에게서도 그 감각이 극도로 발달한다. 그래서 상대방의 짐승을 죽이려고 든다. 아주 기가막힌 사냥꾼이 된다. 상대방을 잡아 죽이고야 만다. 이 디브리의 딸 슐로밋은 그렇게 상대방을 잡아 죽인다. 그게 에모르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우즈벡에 다녀왔는데 미국에 있는 권사님 한분이 오메르 카운트를 하시다가 메시지를 남기셨다. 우리도 한 몸으로 품어주세요, 미국에 있는 인터넷 성도이니 말이다. 제가 굉장히 회개를 했다. 저는 인터넷 성도로만 생각을 했었는데, 물리적으로 너무 떨어져있고 거의 못 보니, 그렇구나. 내가 여전히 육적이였구나 라는 것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돌이키는 시간들이 있었다. 우리는 우즈벡에 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는데 에모르이다. 당신과 나는 하나입니다 라는 말이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를 창조해버렸다. 육신은 그런 소리 못한다. 단독자는 그런 소리 못한다. 자기가 잘났으면, 자기가 영이면 항상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저는 우즈벡에 가서 에모르를 한 마디도 못했던 것이다. 디브리, 내 말은 했다. 가르치고, 너희들은 이걸 몰라, 이걸 알아야 해, 너희들은 진정한 사랑을 몰라, 이것을 알아야 해, 나는 진정한 사랑을 만났어, 이걸 너희들은 해야 해, 너희들은 거듭나야 해 하고 굉장히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이번에는 가르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말을 한 게 하나도 없었다. 소리가 없고, 언어도 없었다. 제가 잘 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너희들과 나는 하나다, 너희들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들이 없는 나는 죽음이다. 만약에 너희들이 한 몸으로 결합되지 않으면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다. 가르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내가 이야기 한 것은 이야기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소리가 그곳에 가득찼는데 그것은 너는 유다야, 즈불론이야, 단이야, 시므온이야, 그 시므온을 만났을 때 반갑게 안아주고, 우리는 하나야 라고 했던 것 밖에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것에 의해서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고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신다.
그렇게 잘난 내가 사라졌다. 저 되게 잘나지 않은가? 가르칠게 얼마나 많았는지 아시는가? 그렇게 잘난 나를 한번도 나타낼 기회가 없이 그 성도들이 잘났다고 이야기 해왔다. 당신들이 신의 생명이고, 참 아쉬웠다. 저의 잘남이 죽었으니 말이다. 내 이야기를 하나도 할 기회가 없었다. 오히려 어떤 이야기만 했냐면 내가 단독자였을 때 내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이 살았는지, 자기 아내와 하나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이제 우리는 이아르월에 들어와있다. 이아르월이란 이 에모르를 배우는 것이다. 이아르월에 오면 오메르 카운트에 핵심에 들어온다. אייר 이아르란 오르, 빛이다. 이아르월은 잇사갈 지파이다. 우리 몸 가운데 잇사갈 지파가 굉장히 적고, 귀하다. 왜 잇사갈 지파가 귀하냐면 가장 어려운 달이기 때문이다. 이아르월에 라그 바오메르가 있다. לג 라그는 33일째를 나타낸다. 33일째 오메르 카운트이다. 왜 이 날을 기념하는가? 이아르월 18일에 있는 날인데 이때 토라의 제자들이 엄청나게 죽는다. 2400명이나 죽는다. 토라공부를 하고 그렇게 영적으로 높은 단계에 이르른 토라의 제자들이 왜 그렇게 죽어나갈까? 이때 랍비 아키바가 엄청난 회개를 한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자기가 잘났고 영적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을 가르쳐야 했고, 자기 부인, 자기 자식을 가르쳐야 했고, 자기의 잘난 것을 끊임없이 이야기 했어야 했다. 자기는 자기의 육을 죽였다고 믿어왔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메시아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육을 다룰 수 있는 것은 메사아 만 다룰 수 있다. 육은 자기가 다루고, 이렇게 위대한 영을 메시아에게 다루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가서 내가 위대한 영을 다뤘으니 나를 사랑해라, 나를 랍비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그래서 33일째 엄청난 수의 제자들이 죽는다. 이게 이아르월에 있다.
이아르월의 빛은 신의 죽음이라는 빛이다. 다 오메르 카운트에 대한 것이다. 오메르 카운트는 자기 관점의 죽음이다. 자기 관점은 내가 잘났다, 내가 영적이다, 내가 신이라는 것이다. 우상숭배이다. 자기 몸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숭배이다. 내가 아무리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을 최고로 여긴다. 자기 사랑을 최고로 여긴다.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이 이아르월이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래서 내 안의 신을 죽이고 나면 내 안의 영을 죽이고 나면 내가 죄인입니다만 남는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했느냐를 떠나서 내가 죄인입니다만 남는다. 제자 하나가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 와서 자기보고 무엇인가 잘못했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 이 제자는 내가 죄인이라는 말이에요? 내가 죄를 지었단 말이에요 하고 반문을 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다. 너 정신이 나갔냐? 당연히 네가 죄인이지 네가 뭘 잘했다고 말이다. 아니, 난 배운대로 했는데 말이다. 그리고나선 심지어 저에게 저는 아버지에게 배운대로 헀는데 그렇다면 아버지도 죄가 아니냐고 말이다. 이것이 제자가 라그 바오메르 때 죽는 과정이다.
우리 모두는 오메르 카운트를 하면서 자기가 죽어야 한다. 죽어야 하는 것은 내 속의 짐승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이 처리하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신됨을 죽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종교적이 되려고 한다. 상대방이 잘못했고, 상대방이 문제이고 자기는 항상 영적이다. 내가 나에 대해서 다룰 것은 에모르 밖에 없다. 오메르 카운트이다. 오메르 카운트란, 내 속에 있는 짐승은 카운트해서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이고 보리를 주님께 올려드린다. 무교절 다음 날에 보리를 올려 드린다. 보리는 사실 짐승의 음식이다. 굉장히 거칠다. 말은 인간의 음식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밀을 드리지 하나님께 보리를 드리지 않는다. 소제를 드릴 때 보리를 드리지 않는다. 그런데 유일하게 초실절 때 보리 이삭 단을 흔들라고 한다. 주님 앞에 와서 요제로 드리라고 한다. 오메르 카운트 때 우리의 짐승을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내가 죽이는 게 아니다. 오메르 카운트를 하다보면, 주님의 신성을 카운트 하다보면 내 짐승을 내가 알게 된다.
어제 저희는 부부싸움을 했다. 이제는 부부싸움도 아닌데, 싸우고 나서 유니스 사모가 저에게 카톡을 보냈다. 어제 티프에레트 주간이었는데, 나는 언제나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다는 카톡을 보냈다. 에모르의 말을 하는 것이다. 언제나 내 영이 아름다운 줄 알았다. 에모르의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다. 십자가 이야기 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언어도 없고 소리도 없다. 그게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도 그것이 기억이 잘 안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이 죽는 소리었다. 아내가 자기를 죽이는 소리었다. 굉장한 체험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나의 짐승은 하나님께 올라갔고, 아내의 짐승도 하나님께 올라갔고 새로운 창조가 일어났다. 새로운 삶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에모르인 것이다.
* 우즈벡 간증 - 샬라임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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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적으로 이 에모르에 오면, 디브리라고 하는 사람은 굉장히 무거운 사람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저주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구조로 내리고 무겁게 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Belong to인데, 이것은 인식조차 없는 것이다. 로맨스의 특징은 항상 그런다. 내가 너를 무지 사랑한다, 진짜 사랑한다고 한다. 진짜 사랑은 인식조차 없다. 한 몸 안에서 여러분의 몸을 정말 사랑한다. 특징은 몸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 오늘 여기 나오시면서 자기 간에게 간아, 난 너를 정말 사랑해, 영원히 사랑할거야 하고 고백하고 나오신 분 계시는가? 십이지장아 너에게 지장주지 않을게 하고 고백하고 나오셨는가? 그러나 진짜 한 몸의 사랑, 영원의 사랑을 한다면 그 사랑은 가볍다. 집착하지 않고 심지어는 만날려고조차 안한다. 엄지 발가락이 뇌를 만나고 싶어서, 계속 뇌에게로 가려고 한다면 웃긴 것이다. 이것을 암적인 사랑이라고 한다. 암들은 만나야 한다며 계속 전이가 된다. 온 몸으로 만날 수 없는데 가서 만나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운다. 에모르에 오면 진짜 사랑을 배운다. 진짜 사랑을 하려면 자기 속에 신이 죽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육으로 보내시고 육적인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맨날 육적인 것이 나타나면 지옥 갈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육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루시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 속의 신이다. 내가 잘났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잘남을 가지고 사람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잘남을 광채라고 한다. 탁월함, Splendor, 빛남이다. 그것이 탁월하고 현저한 뜻을 지닌다.
사실 주님의 빛을 이용해서 자기가 탁월하다고 해서 자기를 위한 몸을 만드는 것이다. 자기에게 갖다가 붙이는 것이다. 덕지덕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에게 갖다가 붙이는 것이다. 몸에게, 아버지 집에게 갖다가 붙이지 않는다. 그것을 배우는 이 신의 죽음에 대해서 배우는 이 달을 이아르월이라고 한다.
אייר 이아르월은 성서력으로 זיו 지우월(지부)이라고 한다. 고대 히브리어 발음이다. 이아르는 오르에서 나왔다. 빛이란 말이다. 지부하면 어떤 광채이다. 여기에서 탁월함, 이런 것들이 나온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곳, 성전 기초를 놓는 것의 시작이 지우월이다. 우린 광채와 빛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1. מאור 마오르 : 광명채, 빛의 근원, 태양
태양에서 오르가 나온다. 빛이 나온다.
2. אור 오르 : 빛
이 빛은 여전히 광명채와 연결되어있다. 태양에서 가시광선이 나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3. זיו 지우 : 광채, 환함
태양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빛을 우리가 보지 않아도 날이 밝으면 건물 안에서도 빛이 있다. 그리고 태양이 뜨면 따뜻해진다. 태양은 빛과 연류되어있다. 그래서 지우는 광명채와 떨어져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빛이 있는 것이다. 이게 이아르월이다. 왜 이것을 이해하는게 굉장히 중요하냐면, 이것이 우리의 물리적 세계에서의 필요한 일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뭔가 빛이 있는 것이다. 육신의 세계에서 빛이 있는 것이다.
왕상 6:37 넷째 해 시브월에 여호와의 성전 기초를 쌓았고
시브월이란 시우월이다. 이 달은 기초를 놓는 달이다. 기초란, 예쏘드이다. 쏘드에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지우월에 태어난 사람들은 쏘드의 힘이 강하다. 실제적으로 성욕도 강하고, 기초를 놓는 것은 그것과 굉장히 깊은 연관이 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이 이 실제, 물리적 세계에 나타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빛이란, 그리스도를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물리적 세계에 실제로 나타나는 일이다. 빛의 관한 모든 이야기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물리적 세계에 실제로 나타냐는 것이다.
니산월에서는 씨앗을 심는다. 약간 녹은 땅, 봄이 온 땅에 여전히 겨울의 기운이 강하다. 그러면 땅 속에서 생명을 내는 게 니산월이다. 유다 지파들의 파워는 정말 대단하다. 죽음 가운데에서도 생명을 낸다. 이 힘이 굉장히 강하다. 그런데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땅에 떨어져서 썩어 진다. 자기가 죽고 썩어지고 여기에서 생명을 낸다. 그러나 여전히 죽음, 어둠 가운데 있다. 그것이 니산월 1일에 여전히 재앙이 시작되고 있고, 여전히 애굽에 있다. 그러다가 니산월 유월절 마지막 재앙에 애굽을 나오기 시작하고 유월절 마지막 날에 홍해를 건넌다. 니산월 22일에 홍해를 건넌다. 홍해를 건넜지만 여전히 뭔가 죽음과 어둠 가운데 있다. 니산월 25일에 여전히 마실 물도 없고, 주님 앞에 불평하고, 나무를 던져서 쓴물을 단물로 만들고, 여러분들이 니산월에 진행하는 오메르 카운트를 진짜 믿지 않는다. 먹을 고기도 없고, 양식도 없고, 여전히 애굽에 있다. 여전히 어둠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을 나왔다. 자기 육체의 한계, 의식의 한계를 뚫고 나온 것이다.
그러면 이아르월에는 무슨 일이 시작되느냐? 이아르월에는 굉장히 특별하게 빛에 대해서 배운다. 빛이 있지만 빛의 실제를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빛으로 실제로 나타나신다. Manifestation. 육체적인 실제 세계에 빛으로 나타나신다. 하나님이 계시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이아르월에 뚫고 새싹으로 나온다. 이게 이아르월이다. 이것을 싹, Bud 나무도 겨울내내 죽어있다가 새순이 돋기 시작한다. 그리고 꽃이 피기 시작한다. Blossom, 이것이 이아르월에 있게 된다. 히브리어로 ציץ 찌찟, 아론의 싹난 지팡이라고 한다. 한살부터 세살까지 놓은 기초가 평생을 작동시킨다. 이아르월 사람들은 기초를 놓는데 집중한다.
무엇을 위한 기초이냐?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이 오실 수 있는 집을 짓는 것이다. 이 땅에 올라가자 하는 게 아니다. 이아르월 사람들은 이 땅에 하나님이 오실 수 있는 집을 지어야 한다는 Awakening,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빛이 주는 것 중 하나가 꺠달음이다. 그것은 굉장히 놀라운 것이다. 하나님이 오실 수 있는 집은 기초에서 결정된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선수 중 손흥민 선수가 있는데, 이 선수가 위대한 선수가 되었을 때 영국 방송에서 손흥민을 취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손흥민 아버지를 취재하러 온다. 왜? 그 기초를 놓은 사람을 취재하는 것이다. 엄청나게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이아르월에 잇사갈 지파의 데스티니가 교육이라고 한다. 그 교육은 성인교육이 아니다. 이것은 기초를 놓는 것이다. 우리 아람이가 잇사갈 지파인데, SJ를 세우고 (세우는 것은 יסוד 예쏘드이다), 성전의 기초를 놓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다. 우리 몸 가운데 잇사갈 지파가 굉장히 귀하다. 하나님이 오실 수 있는 성전이란, 한 몸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다. 이 기초에 따라서 나머지 농사들이 다 결정된다.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한다.
그래서 잇사갈 지파들은 하나님이 이때 가장 관여를 깊게 하신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이 어린 아이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이때 내가 할 일이 있다, 바로 깨어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오시기 위한 기초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기초라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얻는 것이 잇사갈 지파이다.
지우란, 광채라고 하는데 이것은 직접적인 빛이 아니다. 멀리 떨어져있지만 빛이 있다는 것을 안다. 빛이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안다. 이때는 초봄이기 때문에 여전히 춥다. 봄에 가시광선으로부터 오는 것을 피해서 그늘로 들어가면 춥다. 특히 이스라엘 날씨는 그런 게 심하다. 바깥은 더운데 그늘에 들어오면 쌀쌀하다. 이때는, 빛의 근원이 멀리 있기 때문에 여전히 춥구나. 빛이 우리 가운데 와 있으면 그것이 최고구나. 빛으로부터 떨어지면 춥구나. 북극이란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이다. 빛이 있지만 다 얼어 붙는다. 이아르월의 사람들은 빛이 직접 우리에게 오면, 심지어는 그 근원이 우리에게 와 버리면 최고구나 라는 깊은 깨달음이 있게 된다. 빛을 가져오려고 하는 성전을 짓게 된다.
이렇게 직접적인 빛이 다다르기 힘든 곳이 물리적인 세계이다. 이것은 비닐하우스 만드는 사람과 비슷하다. 빛이 있긴 있는데 부족하면 비닐 하우스를 만들고 그 안에 발광채를 놓아 온도를 높이고 따뜻함을 준다. 그러니 잘 자라게 된다. 이아르월의 사람들은 마치 그런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자, 빛이 직접 오게 하자. 그래서 삶의 목적을 하나님이 오시는데 둔다.
이 광채가 있는 것은 왜 있는 것이냐? 건물 안에 들어와도 환하다. 육체를 입고 있는 영혼에게 아직 발광채가 들어오지 않았다. 너는 빛을 받아들여야 하는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에게 너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 빛이 너에게 올 수 있도록 너를 준비시켜라, 그런 기초를 놓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아르월에 왜 수많은 제자들이 죽었느냐? 내가 발광채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광채 가운데서, 지우 가운데서 영혼이 깨어나서 빛이 오실 수 있도록 나를 그릇으로 준비하자고 하지 않고 내가 환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빛을 받으라고 하니 상대방이 내 빛이 더 확실하다고 서로 레이저 광선 놀이를 하고 우주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마치 불꽃 놀이와 비슷하다. 라그 바오메르 때는 온 동네 아이들이 어둠 가운데서 장작을 갖다가 마을에 피운다. 라그 바오메르가 되면 온 동네가 난리가 난다. 장작 구하러 다니느라고 말이다. 우리가 빛의 근원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잇사갈 지파는 유다 지파와 굉장히 다르다. 같은 봄이지만 굉장히 다르다. 유다 지파는 죽음에서 뚫고 나와야 하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강하다. 이것을 성공해야 한다. 자기 성공이란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불가능한 미션을 이겨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 지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그런데 잇사갈 지파는 내가 성전의 기초만 놓으려고 하면 된다. 나는 빛만 있으면 된다는 의식이 강해서 욕심이 없는듯이 보인다. 자기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특별한 욕심을 내지 않고 이 가운데에서 성전의 기초만 놓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환함, 빛남에 대한 계시, 깨달음에 대한 욕구가 어느 지파보다 강하다. 그러면서도 이 땅에 물리적 현실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물리적 현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내 가정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물리적 현실을 빛이 올 수 있는 기초로 만들려고 한다. 아이들을 주님이 오실 수 있는 기초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니 나에게 주어진 물리적 현실이 작던 크던 상관하지 않는다. 일단 있으면 그것을 주님이 오실 수 있는 기초로 만들려고 하고,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니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이 강해진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이 있게 되면 잇사갈 지파는 놀라운, 제자들의 죽음을 방지할 수 있는, 잇사갈 지파들이 우리 교회에서 많이 태어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잇사갈 지파의 부족으로 말미암아서 많은 제자들이 죽었다. 지우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많은 제자들이 우주전쟁을 하며 서로를 죽이고 있고, 그러나 이때 우리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 기도
이아르월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광채, 깨어남을 허락하시도록 같이 기도하자.
하나님, 이아르월에 내가 빛이 되려고 하다가 어처구니 없게도 내 몸을 만들려고 덕지덕지 내가 원하는 것들을 내 삶에 갖다가 붙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나의 빛으로 나의 말로 디브리로 주님을 훼방했고, 많은 이들을 죽였습니다. 우리에게 빛을 비쳐주사 우리가 이아르월에 오메르 카운트를 하며 오메르 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에모르 넷째날 5월4일
토라는 드러난 측면과 숨겨진 측면이 있다. 리빌드(revealed 드러난), 컨실드(concealed 숨겨진).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 아들, 하나님의 드러난 측면이다. 숨겨진 측면은 아버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았다는것은 드러난 측면, 하나님의 뜻, 의지가 드러난다. 토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 의지, 목적을 알게된다. 여기서 종교가 발생한다. 종교인들은 자기 구원, 자기 행복, 자기 소유가 목적이다. 진짜 단독자들이다. 하나님의 뜻을 종교적으로 이용한다.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께 나가는 것을 아마르, 에모르다. 제자교회의 구조는 아버지와 아들을 가르치기 위한것이다. 아들들은 다 아버지께 나와야 한다.
에모르는 자기 신의 죽음.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인간의 종교성을 안고 죽은 것이다. 토라의 드러난 면을 숨겨진 면으로 이끈것이다. 드러난 영역을 오르(빛), 지우(광채). 컨실드의 영역은 마오르(빛의 근원, 광명체, 발광체)
지금은 이아르월(지우월), 빛(오르)와 지우는 연결되어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하나님의 신부는 연결되어있다. 토라에서 아버지의 뜻(미쯔보트-계명)말고 아버지의 더 숨겨진것이 아버지의 사랑, 갈망이다. 토라의 숨겨진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토라의 모든것은 이웃을 사랑하는것에서 행해진다. 아마르는 종교인(단독자)이 죽으면 입을 닫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그 숨겨진 의미를 알게된다.
레19:16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주님의 신성중 호드에 해당되는 짐승의 성격은 돌아다니면서 이웃에 대해 가쉽하는 자다. 이웃에게 네가 틀리고 네가 문제다 라고 얘기 하고 다니는것이다. 오메르 카운트의 핵심은 주님의 신성을 받는것, 첫째날은 헤세드와 헤세드가 결합, 아홉번째 날은 게부라와 게부라가 결합, 17번째 날엔 티프에렛과 티프에렛이 결합, 25일째는 네짜흐와 네짜흐가 결합한다. 결합을 통해서 신성이 내려온다. 33일째 호드와 호드가 결합, 41일째 예쏘드와 예쏘드가 결합. 49일째 말쿠트와 말쿠트가 결합한다.
33일째를 라그 바오메르라고 한다. 라그 바오메르의 핵심이 자기 신, 종교의 죽음이다. 호드는 가쉽, 백성들을 비방하는 것이다. 호드는 영광스럽게 하다, 감사하다, 당신의 가치를 높인다.
가쉽은 내 가치를 높인다. 안믿는 인간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인간들이 있어야 내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호드에 오면 끊임없이 말한다. 호드의 다른 의미는 평온한 상태, 고요한 상태라고도 한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40일 후에 승천하셨다. 주님은 라그 바오메르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오메르 카운트를 통해서 제자들의 종교성을 다 죽이셨다. 33일째 제자들에게 에모르를 가르치시고 40일째에 비밀중의 비밀을 가르치시고 승천하셨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은 자기 구원을 케어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예쏘드와 예쏘드의 비밀, 아버지의 숨겨진 비밀. 너와 내가 같다 우리 모두 한사람 이라는것을 알게된다. 하나님이 신랑되시고 우리가 신부되어서 우리랑 결합하신다. 이게 승천일이다. 제자들은 오메르 카운트를 통해서 마지막 배움, 예쏘드와 예쏘드의 결합을 배운다. 이게 컨실드, 숨겨진 토라다. 컨실드 토라때문에 생겨난게 해석(파라샤), 가르침이다. 아들이 리빌드 토라를 드러내는 이유는 이것을 통해서 아버지를 알라는 것이다. 숨겨진 아버지의 마음, 너희가 다 하나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것을 드러내서 너를 선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예쏘드+예쏘드에 오면 우리 모두는 한 몸이 된다. 라그 바오메르를 거치지 않고 에모르를 배우지 않는한 우리의 말이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리는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없다. 33일째는 그렇게 종교생활하던 모든 제자들이 죽임당한다. 짐승은 아마르를 절대 못한다. 오메르 카운트를 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역사해주신다.
아들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존재다. 주님의 신성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가 헤세드. 처음에 카운트 하는것,1,9,17번째의 것은 영적인것이라 다바르(speak)하기가 쉽다. 더 어려운것은 25,33,41번째의것, say(아마르)는 소리가 없다.
에모르에 오면 돌아다니며 비방하는 자들의 왼쪽 다리를 부러뜨리고 고요함 가운데 들어간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것을 라그 바오메르 라고 한다.
티프에렛의 주간이 끝나면 네짜흐 주간(오른쪽 다리), 호드는 왼쪽 다리, 예쏘드는 성기, 인간의 음행이 내 몸애 덕지덕지 붙이고 아버지 마저도 자기 몸에 붙인다. 자기 진리를 찾아 돌아다니며 내 구원과 행복을 찾아 다닌다. 라그 바오메르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다 죽이신다.
카운트(싸파르-복음을 선포, 전파하다). 오메르 카운트를 통해서 아마르를 배운다. 알렢과 아인의 차이다. 알렢은 빛을 상징, 아인은 빛을 담는 그릇, 오메르 카운트 하는것은 내 말로 선포하는 것이다. 사피르(사파이어-빛나는 돌판)에 하나님이 쓰신다. 오메르 카운트 할때 쓰는것도 중요하다. 카운트 하는것은 말하고 쓰는것이다. 오메를 카운트를 통해서 진정한 창조의 힘이 생겨난다. 그 창조의 힘이 땅에서 완성되는게 라그 바오메르, 33일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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