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22년 7월 21일 (목) 오후 3시부터
대구문화예술회관 비슬홀에서 개최된 대구문학제 강연 원고입니다.
이 원고에 등장하는 대구인물 중 회원 1인당 한 사람을 선정하여
전기문 형식(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될 수 있는 수준)으로
200자 원고지 기준 30매 내외/ 9월말까지
대구문인협회 이메일 dgmunin@daum.net 로 보내주시면
대구알리기문학페스티벌 사업의 일환으로 책으로 엮어 배포하고,
소정의 원고료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 원고에 나오지 않는 인물을 선정하셔도 좋습니다.
아래 꼬리말로 희망해주시면 중복되지 않을 듯 합니다.
특히 소설분과 회원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립니다.
참고로 20년도에는 시조, 아동문학/ 21년에는 시, 수필분과에서 대구를 소재로 한 작품집을 낸 바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소설분과 위주로 대구인물편을 내려하니 소설분과 회원님은 모두 참여해 주시고
그래도 집필자가 부족하면 타분과 회원님도 집필자로 희망을 받을 예정입니다.
문의/ 문협사무실 053-256-4484
문학작품 소재로서의 대구 인물 60선
정만진(소설가)
[1] 구석기인
대구에는 2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달서구 월성동 777-2번지가 구석기 유물들이 출토된 역사의 현장이다. 출토된 실물은 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만, 현지를 찾아 그 공기를 마셔보고 안내판을 읽어보는 것이 더 요긴하다.
파동 바위그늘岩陰도 집 없이 살았던 구석기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그들은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천변 거대 바위 아래에서 비바람과 맹수를 피하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그 모습을 오늘에 되살려내는 형상화는 시도해 볼만하다.
그들은 왜 그곳에서, 또는 대구에서 살았을까? 그것이 오늘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모두가 집이 없었던 구석기시대, 모두가 집이 있었던 신석기시대, 국민의 반이 집 없이 살아가는 현대사회 …. 파동암음은 수성구 파동 581-1번지 신세계주유소에서 바라볼 때 신천 건너편에 있다. 앞산쪽 구 도로에 차를 올리면 암음 바로 앞에 닿는다.
[2] 신석기인
북구 호국로57길 6 유니버시아드 레포츠센터 1층에 ‘대구 서변동 선사유적 전시관’이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여겨져 온 대구의 역사를 서변동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가 신석기시대로 끌어올렸다. 전시관 게시물은 이를 “대구의 역사를 다시 쓴 계기가 되었다”라고 표현한다. 대구 유일의 자연하천으로 남아 있는 동화천 일원에서 빗살무늬토기를 제작하며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살아간 대구 신석기인을 오늘에 되살려보자. 그들에게 빗살무늬토기는 무엇이었을까? 가족은 또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또, 새로운 증거물이 나오면 새로 써야 하는 역사는 우리에게 정녕 무엇인가?
[3] 청동기인
세계 고인돌 6만여 기 중 5만여 기가 한반도에 있다. 그 중 2만9610기가 휴전선 남쪽에 있고 2만여 기가 북한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을 보유한 고장은 대구였는데, 3천여 기나 있었다. 그만큼 대구 사람들은 청동기시대를 주름잡았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대구는 “넓고 기름져 신라 이래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지세와 생리 모두 대대로 살아가기에 좋은 곳”이라고 썼다. 고인돌을 설치하는 대구 청동기인, 100기만 남겨 놓고 고인돌을 끝없이 없앤 일본인과 현대 대구인, 모두가 대단한 글감들이다. 고인돌을 찾아다니는 인물도 그럴 법하다.
수성구 청수로 4길 64 ‘상동 청동기 마을’, 달성군 가창면 가창로 774 제일교회 뒤 고인돌 유적, 지하철 대구역 칠성시장 출구 칠성바위, 화원읍 비슬로522길 41 화장사 안팎의 고인돌 등이 답사지로서 괜찮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1927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던 이천동 고인돌은 현재 경북대 야외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이 발굴조사에 동원되었던 한국인 인부도 주인공이나 화자가 될 수 있다.
[4] 극종
극종克宗은 261년 달벌성 축성 때 초대 성주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거문고 음악이 신라에 널리 퍼지도록 한 통일신라기 극종과 동명이인이다. 종宗은 왕족을 뜻하니 두 사람의 연緣을 엮으면 훌륭한 허구가 창작될 법하다.
한때 경삼감영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국가 군사시설 달벌성이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 기도에 따라 유원지 성격의 공원으로 격하되고, 일본 헌병대가 주둔하고,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가 와서 기념식수를 하고, 일본 신사가 설치되고, 독립 이후 신사 건물이 단군전으로 쓰이고, 동물원이 되고, 오늘은 사적지 안에서 사람들이 테니스를 치며 노는 곳이 되어버렸다. 이 광경을 극종이 지켜본다.
[5] 선덕여왕
남자는 광개토대왕, 여자는 선덕여왕(재위 632∼647)! 符仁寺 아닌 夫人寺는 선덕여왕의 원당願堂이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남산 부처골 마애여래좌상’, 국보인 분황사와 첨성대, 사적인 선덕여왕릉 등과, 경주에서 부인사를 오가는 선덕여왕을 엮어볼 만하다. 부인사에 선덕묘善德廟를 세운 사람들, 매년 음력 3월 15일마다 선덕제善德祭를 여는 사람들의 사연도 궁금하다. 《삼국사기》에는 647년 ‘正月八日王薨諡曰善德葬于狼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3월 15일에 선덕여왕을 기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6] 신문왕
689년 신문왕(재위 681∼692)은 대구로 서울을 옮기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삼국사기》에는 “王欲移都達句伐未果”로 기록되어 있다. 신문왕은 그 목적 때문에 장산성獐山城(경산 압량)에 왔던 듯하다. 김유신이 군사들을 훈련시킨 경산 압량면 압량리 179번지 국가 사적 ‘경산 병영 유적’과 달벌성을 오간 신문왕의 신하가 2004년 행정수도 이전 논란 때 찬반을 오락가락했던 현대사의 대구 정치인을 만난다.
[7] 이재
대덕산성大德山城은 앞산 정상부 670m 일원에 축성되어 있는 대구시 기념물이다. 이 포곡식包谷式 산성과 관련되는 내용이 서거정의 《동문선》에 나온다. 최치원이 이재異才 등 수창군 호족들의 청을 받아 〈신라수창군壽昌郡호국성護國城팔각등루기八角燈樓記〉를 지었다는 기사이다. 908년(효공왕 12) 이재가 국가의 경사를 빌고 전쟁의 화를 물리치기 위해 남령南嶺에 팔각등루를 세웠다. 909년 이후 이재는 군사 수를 늘이고 보堡를 쌓아 나라 서쪽을 지켰다. 사람들은 대덕산성을 “호국성”이라 불렀다.
1776년 7월 4일 〈미국독립선언문〉은 “(인간에게는 천부의)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고,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한다”면서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개혁하거나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라고 했다. 부패와 무능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신라 조정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과, 그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봉기한 견훤 ‧ 궁예 ‧ 왕건 편에 서는 것 중 어느 쪽이 진정한 ‘호국’인가? “백성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는 충성할 필요가 없다!”는 박중양의 호언은 또 어떤가?
[8] 왕건 ‧ 신숭겸
927년 왕건王建(877~943)이 후백제 견훤에게 대패해 구사일생으로 달아나는 ‘동수 대전’이 일어난다. 용포를 입은 신숭겸申崇謙(?∼927)이 왕인 양 견훤군을 속이고 전사하는 동안 왕건은 피신할 겨를을 얻었다. 지묘동 ‧ 불로동 ‧ 무태 ‧ 연경동 ‧ 살내 ‧ 반야월 ‧ 안심 ‧ 도덕산 ‧ 나팔고개 ‧ 파군재 ‧ 시량리 ‧ 왕산 ‧ 안일암 ‧ 은적사 ‧ 임휴사 ‧ 왕산재 등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해안解顔은 그럴 듯하나 경덕왕 때 이미 만들어진 지명이다. 이렇게 이름을 만들거나 민간어원설을 믿는 심리, 왕건이 아니라 견훤을 지원한 동화사 승려와 지역민 들의 사연, 왕굴에 숨어 지내는 왕건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 동수대전 승자 견훤이 아니라 패자 왕건을 숭앙하는 정서 등은 좋은 글감이다. 동구 신숭겸길 17에 ‘신숭겸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9] 부인사 사람들
1232년 몽고군이 부인사 초조대장경을 불살랐다. 1078년 완성작 초조대장경은 1251년에 만들어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해인사 팔만대장경보다 173년이나 앞선 인류적 문화유산이다. 부인사에는 초조대장경을 만드는 데 참여한 기술자와 노동자, 불타는 광경을 지켜본 승려와 신도, 불을 지른 몽고군, 서탑만 남은 부인사를 둘러보는 현대의 대구 사람 등등, 여러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장엄한 스토리가 깃들어 있다. 일명암지석등逸名庵址石燈이 모티프가 되어도 좋다. 이 사찰을 원당願堂으로 삼았던 선덕여왕도 있고, 1930년대 초 중창한 허상득許相得 비구니도 있다.
[10] 일연
《삼국유사》의 일연一然(1206∼1289)은 인흥사, 용천사 등 비슬산에서 약 23년이나 머물렀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한 때가 70세 넘은 고령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보화 시대’인 지금과는 차원 자체가 다르다.
인흥사가 훼철될 때 부서진 탑신 일부가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401-2 문씨세거지 앞 목화밭에 나뒹굴고, 온전한 탑은 경북대 야외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문씨세거지를 마주보고 있는 인흥서원의 안내판도 그 일대가 《삼국유사》 유적지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비슬산 유가사 시방루 앞에 일연문학공원이 형성되었다. 인흥사를 폐찰시키고 그 땅을 빼앗아 세거지로 삼은 문씨들의 실화는 ‘인류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묻게 만든다.
[11] 서거정
흔히 “조선 전기 최고 문장가”로 평가받는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신라와 고려 등 우리나라 시가를 한데 묶은 《동문선》의 저자이다. 경직된 성리학적 사회에서 시정잡담을 엮어 책으로 펴냈다는 점에서 그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또 대구의 경치 10곳 골라 시로 남기기도 했으니 그 자체로 글감이다.
대구직할시가 1982년 펴낸 《대구의 향기》에 따르면, 서거정은 “가까운 친구였던 성삼문 ‧ 김시습과 같은 혁명가적인 기질은 없었으나 직분을 잘 지킨 행정가였으며, 훌륭한 시인이요 학자였다.” 그래서 “생육신 김시습은 세조의 신하와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지냈으나 서거정과는 왕래를 하고 지냈다.” 말하자면, 결이 다른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의 주인공이 될 만한 사람이 서거정이라는 이야기이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 1488년 12월 24일 기사에 실려 있는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도량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이로써 작게 여겼다”라는 사관의 평가도 눈여겨 볼 일이다.
[12] 서침
세종 당시 달성토성 일대는 서씨 문중 소유였다. 261년 달벌성이 축성된 이래 달성토성 일대는 국가 군사시설이었다. 세종이 대토와 관직을 제시하면서 달성토성 일대를 정부가 사용하겠다고 제안했다. 서침徐沈이 지역민들의 환곡 이자를 경감해달라는 대안을 내놓았다. 그래서 달성‘공’원에 ‘달성서씨 유허비’와 ‘서침 나무’가 생겨났고, 중구 국채보상로 492-58 옛 구암서원 터와,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 구암서원이 남게 되었다. 서침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참된 선비정신과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noblesse oblige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준거인물이다. 입으로는 서침을 존경하고 뒤로는 반대 행위를 일삼는 자를 내세운 풍자소설도 창작될 만하다.
[13] 이보흠
1448년 세종은 이보흠李甫欽(?∼1457)을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로 발령, 사창社倉을 시험 운용하게 했다. 사창은 정부가 운영하는 의창義倉과 달리 정부 조직과 향토 유지가 공동으로 조직해서 꾸려가는 구휼기관으로, 주희朱熹가 실시한 사창법에 근거를 두었다. 사창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이보흠은 순량循良 호칭을 들었지만, 그 후 전국적으로 사창이 어떻게 확산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미미하다. 사창 관련 유적이 대구에 남아 있지도 않다. 그 까닭이 글감이다. 이보흠은 1457년 순흥부사로 있을 때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 후 처형되었다. 그는 영천 청통면 애련길 174 송곡서원松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14] 박비
1456년 세조가 박팽년 등을 거열車裂로 죽였다. 어머니 뱃속에 있던 손자 박비朴婢가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졌다. 종의 아들로 위장 출산되었고, 사육신을 충신으로 현창한 성종 때 복권되었다. 선죽교에서 철퇴로 정몽주를 참살한 이방원 세력이 그를 천하 충신으로 떠받든 것과 매한가지 논리였다.
세조가 사육신 등을 처참하게 죽일 때 만조백관들을 불러 모아 모두 지켜보게 한 일, 정인지와 신숙주 등이 집현전 동료였던 사육신 등의 처자식을 자기집 종으로 부린 일, ‘숙주나물’과 ‘정獜지’ 등 글감이 많다.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4 묘골마을에 사육신기념관, 낙빈서원, 사당 숭정사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불태워 없애려 했지만 그때마다 벽력같은 소나기가 내리고 도끼가 왜병의 발등을 찍어 전소를 가로막아 주었다는 전설의 건물 태고정太古亭도 남아 있다. 태고정을 지은 사람이 뒷날 박일산으로 개명하는 박비이다.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은 전국 유일의 진정한 사육신 유허라 할 만하다.
[15] 김굉필
1504년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켜 김굉필金宏弼(1454∼1504) 등 사림파 선비들을 죽인다. 자신의 어머니 윤씨가 1479년(성종 10) 폐비되고 이듬해 죽임을 당한 데 대한 연산군의 한풀이가 낳은 비극이었다. 김굉필의 스승 김종직은 1498년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도동서원이라는 이름은 김굉필을 섬기는 제향 공간이 (서울에서 볼 때) 동쪽에 설립되었으므로 도가 동쪽으로 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만큼 김굉필이 거유巨儒였다는 뜻이다. 김굉필의 묘는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 도동서원道東書院 바로 뒤편에 있다. 은행나무, 좁고 낮은 환주문, 음양의 조화를 강조한 담장 등도 주목 대상이다.
달성군 구지면 내리 443 소재 이로정二老亭도 김굉필 유적이다. 김굉필은 1504년 이곳에서 정여창과 만나 정담을 나누었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모두 죽음으로써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16] 곽재우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1592년 6월 1일 임진왜란 최초로 창의를 한 역사의 선비이다. 동구 효목동 망우공원에 동상과 임란의병관이 있고,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산22에 묘소, 구례길 123에 예연서원이 있다. 봉분이 납작한 묘소, 선조의 의심을 피해 산중에서 생식을 하며 살아간 말년, 임란 초기 경상감사 김수와 벌인 공방전, 신출귀몰한 용병술과 작전, 과거에서 2등을 했지만 최종 불합격한 까닭, 2차 진주성 싸움 때 참전하지 않은 이유, 구미 천생산성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의병의 날’ 제정 등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가 있다.
[17] 우배선
우배선禹拜善(1569∼1621)은 임진왜란 의병장이다. 그의 좌상이 달서구 송현로7길 38 월곡역사박물관 뜰에 세워져 있다. 좌상 옆에 의마비도 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큰 활약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그것 자체가 대단하지만, 1등공신은 다른 사람들도 있다. 그런 뜻에서, 우배선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화원花園우배선의병진義兵陣군공책軍功冊 및 관련 자료〉를 남긴 것이다. 〈화원우배선의병진군공책 및 관련 자료〉는 국가 보물이다. 노비가 세운 전공까지 어느 하나 빠뜨리지 않고 세세히 기록한 그의 마음을 형상화하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담은 작품이 탄생할 것이다.
[18] 김충선
김충선金忠善(1571∼1642)은 임진왜란 항장降將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항장은 본디 일본군 장수였던 사람이 신분을 바꾸어 조선군으로서 큰 활약을 펼친 인물을 가리킨다. 사야가沙也可는 부산에 닿자마자 투항 문서를 배포했는데, 대략 “자녀에게 문화선진국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는 요지였다.
선조는 많은 공을 세운 그를 표창하여 성씨를 하사했다. 그래서 달성군 우록길 218 녹동서원 일대에 세거하는 김충선의 후손들을 ‘사성賜姓김씨’라 한다. 또 조선 선비들이 항장인 그를 우러러 보아 서원에 모셨으니 그 일만으로도 김충선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가늠된다. 서원 옆에 한일우호관이 건립되어 있으며, 우호관 뒤 산허리에 묘가 있다. 김충선은 전쟁, 평화, 귀화, 자녀교육, 한일관계 등 많은 화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19] 임의백
대구약령시는 경상감사 임의백任義伯(1605∼1667)이 1658년에 최초로 개설했다. 1941년 조선총독부는 약령시 개장을 불허했다. 약령시는 1978년 부활했고, 지금은 반쯤 먹자골목처럼 되어버렸다. 따라서 대구약령시에는 고비마다 서사가 될 만한 인물이 있다. 시장 개설의 역사를 만든 임의백은 물론이고, 한약방 주인으로 약전골목에서 평생을 살아온 ‘증인’도 빼놓을 수 없다. 약령시가 뭔지 모르는 신세대의 시각으로 남성로를 훑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20] 이양채
《삼국사기》에 “築達伐城以奈麻克宗爲城主”라는 대목이 있다. 이는 대구 이름이 “달벌”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기록이다. 경덕왕이 전국 지명을 중국화한 757년 달벌은 大丘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1750년 12월 2일 기사에 대구大丘 유학幼學 이양채李亮采가 상서한 내용이 나온다. “대구大丘의 구丘 자는 공부자孔夫子의 이름자인데, 이름자를 범해 인심이 불안하게 여깁니다.” 영조가 전교한다. “대구 유생儒生들이 고을 이름의 일을 상소로 진달했다고 한다. 아! 근래에 유생들이 신기한 것을 일삼음이 한결같이 어찌 이와 같은가? 3백여 년 동안 본부의 많은 선비들이 이양채 등만 못해서 말없이 지내왔겠는가? 한낱 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상구商丘와 옹구顒丘란 이름이 아직도 있는데, 옛날 선현들이 어찌 이를 깨닫지 못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大丘는 大邱로 바뀌었다. 그런 결과를 낳은 사유와 과정도 궁금하고, 그것이 오늘의 대구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살펴볼 만하다.
[21] 최흥원
1748년 당시 44세이던 대구 옻골마을 선비 최흥원崔興遠(1705∼1786)이 유형원의 아들을 찾아간다. 1673년에 세상을 뜬 유형원이 타계 3년 전인 1670년 ‘수록’ 집필을 마쳤는데, 70년이 지나도록 아직 출간되지 못한 그 원고가 너무나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원고를 빌려온 최흥원은 읽으면서 감동한 나머지 정성껏 전문을 필사했다. 소문은 흐르고 흘러 20년 후 영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영조가 최흥원에게 책임을 맡겨 경상감영에서 인쇄하라고 명했다. 동구 옻골로 195-5 백불고택 보본당報本堂과 동화사에서 작업이 진행된 끝에 1770년 실학을 최초로 집대성한 《반계수록》이 빛을 보았다. 최흥원이 없었으면 우리나라 실학 발전이 얼마나 지체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흥원은 100년이나 지속된 부인동동약夫仁洞洞約과, 사후 효행이 기려져 정문旌門이 세워진 일로도 유명하다. 1694년에 건축된 백불고택은 대구 소재 조선시대 주택 중 가장 오래된 집이라는 점도 상상력을 자극한다.
[22] 이서
1778년 대구판관 이서李溆가 사재를 털어 대구천 제방을 새로 쌓았다. 신천으로 가는 물길을 바꾸어 해마다 일어나는 홍수를 예방한 선행이었다. 사람들이 그 공을 기려 ‘이공제비李公堤碑’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 땅에 파묻혔던 비가 1896년 신천대로 공사 때 발견되었고, 2000년 수성구 신천동로 117 상동교 아래 소공원에 옮겨 세워졌다. 비석 둘레에는 ‘이서 공원’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
아쉬운 바는 이서가 가창면에서 금호강으로 이어지는 신천 물길을 바꾸었다고 현지 안내판에 잘못 새겨져 있는 점이다. 선정善政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서와 같은 인물은 진심으로 공경을 받아야 한다. 10리에 걸쳐 제방을 쌓는 이서 또는 둑 쌓은 일에 즐겁게 참여했을 당시 농민, 1896년 비석 발굴자, 오늘날 이서공원을 둘러보는 대구시민이나 어린이 등 서사의 중심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 많은 옛이야기이다.
[23] 서유교
1849년부터 1851년까지 대구판관을 역임한 서유교徐有喬는 금호강을 최초로 옷 벗지 않고 건너도록 만든 인물이다. 그때까지 부산 등지에서 한양으로 가려는 사람은 모두 옷을 벗고 금호강을 건넜다. 서유교는 사재를 털어 팔달진에 징검다리형 돌다리를 놓았다. 1851년 백성들이 ‘판관 서유교 영세불망비’를 지금의 팔달교 칠곡 방면 교각 아래 지점에 세웠다. 그후 2011년 1월 4일 영세불망不忘비가 잡목과 가시덤불에 묻혀 ‘영세망不忘’되었다는 보도가 났고, 2015년 북구청이 나서서 눈에 잘 띄는 더 높은 위치에 터를 닦고 옮겨 세웠다. 서유교 본인, 옷을 입은 채 돌다리를 건너는 부산 선비, 불망비를 세우는 주민, 이건한 북구청 관계자 등이 글감이다.
[24] 최제우
달성공원에 최제우崔濟愚(1824∼1864) 동상이 있다. 외세를 물리치고 폭정을 바로잡으려 한 당대의 시대정신이 일본 향나무에 둘러싸여 있는 정경이 낯설다. 종로초등학교 ‘최제우 나무’는 1864년 3월 10일 최제우가 감옥에서 처형장 관덕정으로 끌려가는 광경을 지켜보았을 거목이다.
반월당 동아쇼핑센터 앞 인도에 순도비, 북쪽 옆 지하 주차장 출구 앞에 관덕정 터 안내판이 있다. 이 안내판 설치 지점이 최제우가 순도한 현장이다. 허술한 현장과, 길 건너 남산교회 앞 웅장한 ‘관덕정’의 대비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좌도난정左道亂正, 즉 잘못된左 종교道로 성리학의 바른正 세상을 어지럽힌다亂는 것이 정치범 최제우의 죄목이었다.
[25] 문석봉
1895년 9월 18일 을미사변 이후 최초 의병이 일어났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이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최초로 거의한 그의 봉기는 의병 활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서 의병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라고 평가한 ‘그’는 달성군 현풍 사람 문석봉文錫鳳(1851∼1896)이다. 당시 공주부 영장으로 있었으므로 창의는 대구 일원이 아니라 충청도 유성에서 했다.
10월 20일 회덕현을 공격해 탈취한 무기로 300여 명을 무장시켰다. 10월 28일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전하고 경상도로 몸을 피했다. 초계군수 신태철이 거액 현상금이 걸렸다며 걱정해 주었지만 고령군수의 고변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1896년 봄 탈옥에 성공했으나 이미 신병이 깊어 회복불능이었다. 결국 11월 19일 46세 나이로 현풍에서 세상을 떴다. 달성군 현풍면 성하길 68-7에 생가터가 있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지라도 다른 이를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고, 이익을 위해 다른 이에게 해가 되는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있다.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인물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도 많다.
[26] 서상돈 ‧ 김광제를 비롯한 국채보상운동 인물들
1907년 2월 21일부터 본격화한 국채보상운동은 대구 시민에게 남은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국채보상공원, 구 시민회관 앞 조형물, 범물동 천주교 묘지 서상돈 묘, 중구 계산동 2가 84 상화고택 맞은편 서상돈고택 등이 남아 있다. 정경주 여사를 비롯한 일곱 부인들의 삶이 녹아 있는 진골목도 반드시 찾아보아야 할 답사 현장이다. 18세 기생 앵무가 100원(현 1000만 원)을 내면서 “만약 남자 중에 수천 만 원을 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죽기를 각오하고 따라 낼 것”이라고 말한 일화가 유명하다. 경북 성주군 용암면 운용로 1025 용암치안센터 옆에 앵무 기념비가 있다.
[27] 박중양
박중양朴重陽(1872∼1959)은 1906∼7년 고종황제의 불허도 묵살하고 임의로 대구읍성을 파괴한 당시 대구군수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알려졌을 만큼 대단한 친일파였던 박중양은 일본인들의 청탁을 받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 물론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고, 1924년 법주사 여승을 강간해 자살하게 만든 일로 동아일보에 보도되기도 했지만 끄떡없이 승진을 거듭해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유정회 국회의원 격)까지 역임했다. 그는 독립 후 “대구가 좋다”면서 고향도 아닌 대구에 눌러 살았다. 지금도 대구에는 “박중양이 사람은 좋았다”라고 평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오봉산 중턱에 그가 유유자적했던 정자 터가 있다. 중부경찰서 전시실에 “박중양은 대표적인 친일파. 대구군수 시절 대구읍성을 파괴하고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자제단을 조직해 탄압하는 등 친일 활동을 하였다”라는 설명이 붙은 큰 사진이 붙어 있다.
[28] 서병오
1862년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세에 서울로 간 뒤 대원군에게 배웠다. 2년 지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다시 2년 뒤인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며, 그로부터 10년 뒤인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그 2년 뒤인 1896년 신녕군수가 되었는데, 풍류만 즐기고 공무를 소홀히 하다가 대규모 공금 결손 사건을 일으켰다. 중국으로 도피해 3년을 지냈다. 그러자 나라 사정이 더욱 어려진 탓에 서병오徐丙五(1862∼1935) 처벌 문제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어졌다. 귀국 후 잠시 지내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거물 정객 출신 두산만頭山滿의 집에서 생활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귀국해 대규모 개간사업에 전재산을 투자했다가 거덜이 났다. 그때부터 글씨와 그림에만 전념했다.
한 번은 거물 친일파 박중양이 그림 한 폭을 요청하자 “당신은 일본인 화가 그림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텐데 하필 나한테 그림을 받으려고 하느냐?”며 거절했다. 대구직할시가 1982년 펴낸 《대구의 향기》에 따르면, 73세이던 1936년 일본인 경상도 지사 아베安倍와 밤새도록 바둑을 둔 게 화근이 되어 이튿날 뇌일혈로 의식불명에 빠졌고, 일 주일 뒤 세상을 떴다. 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의 《2017 석재 서병오 기념전》은 그 날을 음력 3월 28일로 밝혀두었다.
[29] 순종
1909년 1월 12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1874∼1926)이 이토 히로부미에 끌려 달성‘공’원에서 기생 공연을 구경하고 기념식수를 했다. 경상감영과 수창초등학교 일원 북성로 사이가 ‘어행길’이다. 그는 1926년 4월 25일 붕어했고. 제2의 3 · 1운동이라 할 만한 6 · 10만세운동이 그의 인산례因山禮를 기해 일어났다.
구 원화여고 앞 도로 복판에 순종 동상이 있고, 공구골목을 관통하는 어행길이 꾸며져 있으며,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가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일본산 향나무 두 그루가 서침나무 앞에서 오늘도 잘 자라고 있다. 순종 본인은 물론 기생, 이토 히로부미, 구경꾼 시민 등 그날의 풍경을 담은 소설의 주인공이 될 사람은 많다. 순종 동상 건립을 착상하고 실행해내는 대구 풍토도 사회소설을 낳는 토대가 됨 직하다.
[30] 우재룡
1915년 달성‘토’성에서 광복회가 결성되었다. 광복회는 제6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가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독립운동단체”라고 평가한 비밀결사로, 1920년대 의열단의 전신이다.
광복회 지휘장을 맡아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큰 활약을 펼친 우재룡禹在龍(1884∼1955)은 20년 가까이 감옥 생활을 했다. 두류공원에 그의 흉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달성토성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다.
세잔은 고향 엑상프로방스의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림으로 60점 이상 창작했다. 향토의 역사, 인물, 문화, 자연을 창작 소재로 삼아야겠다는 인식의 확산도 중요하지만, 예술가들의 의욕을 북돋우기 위한 정치와 행정이 먼저 요청된다. 1910년대 최고의 독립운동단체가 결성된 달성‘토’성은 오늘도 공원이나 동물원에 불과하다.
[31] 1919년을 뒤흔든 사람들
1919년 3월 8일 현재의 동산동 오토바이 골목 일대, 즉 구 서문시장에서 대구3 · 8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3월 10일에는 염매시장, 3월 30일에는 동화사 학승들이 주도해 덕산정시장에서 큰 시위가 벌어졌다. 4월 15일에는 대명동에서 강윤옥과 장용암 등이 주도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4월 26일과 28일에는 미대동 동민들이 여봉산에 올라 시위를 벌였다. 대구 유일의 마을 단위 독립만세운동이었다.
3월 8일 첫 시위 때 일본 기마 헌병대에 가로막혀 시위대가 앞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이때 안경수가 태극기를 꽂은 깃대로 말 엉덩이를 찌르자 말들이 어지럽게 날뛰면서 길이 트였다. 안경수, 강윤옥, 장용암, 학승 등 유명 인사가 아닌 인물을 중심에 세워 글을 쓰면 흥미로울 법하다.
[32] 김태련 · [33] 김용해
1919년 3월 29일 김용해金湧海(1897∼1919)가 순국했다. 3월 8일 만세운동 때 일본 군경들에게 둘러싸여 폭행당하는 아버지 김태련金兌鍊(1879∼1943)을 구출하려다가 집단구타와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숨졌다. 대구만세운동 최초의 희생자였다.
서문시장 시위 출발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김태련은 2년 6개월 뒤 출옥해 아들 무덤을 찾아 “너의 죽음은 장하되 처절했던 최후는 결코 잊을 수 없다!”면서 오열했다. 부자는 신암선열공원에 아래위로 안장되어 있고, 중구 관덕정길 16 남산교회 건물 벽에 부조로 새겨져 있다.
[34] 이영식
1919년 독립만세시위 이후 계성학교 학생들은 혜성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서문시장과 교동 등의 철시운동을 펼쳤다. 친일파 집단인 자제단과 일본인 요인 등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만세시위로 그친 1919년 초반 독립운동 기조에 새로운 확장성을 부여한 의미있는 새 접근이었다. 이영식李永植(1894∼1981)은 뒷날 한국사회사업대학을 설립한다. 그의 정신세계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주목해볼 만하다.
[35] 이종암
1910년대 최고의 독립운동 비밀결사는 광복회였다. 조직이 노출되면서 광복회가 해체된 1918년 이래 황상규 등 젊은 조직원들은 만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더 후배들을 규합해 의혈 투쟁 단체 조직을 모색한다.
이때 대구 출신 이종암李鍾巖(1896∼1930)이 나타난다. 대구은행 본점 직원이던 이종암은 공금 1만5백 원(현 시세 10억 원 수준)을 들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했다. 이종암은 그 돈으로 길림 화성여관을 세 얻어 김원봉 등과 폭탄제조법을 공부하고, 이윽고 1919년 11월 10일 1920년대 최고의 무장 항일 결사 의열단을 창단했다.
이종암은 동화사 아래 백안동에서 태어났다. 일제는 고문으로 지사를 죽기 직전까지 내몬 후 절명 바로 앞이 되자 가석방했다. 지사는 형의 집으로 돌아온 지 열흘 정도 만에 순국했다. 그 집은 ‘이종암 생가터’라는 안내판을 매단 채 남산동에 남아 있다. 그나마 아파트 재개발 지구로 공지된 상태여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종암이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던 경상감영길 1 소재 건물이 2021년 여름에 철거되고, 이육사가 17년이나 살았던 남산동 고택이 2018년 여름 어느 날 하루아침에 파괴되어 사라졌듯이.
[36] 이육사
이육사李陸史(1904∼1944)는 17번이나 투옥되었던 의열단 단원이다. 그는 17세(1920년) 이후 대구에 주로 머물렀다. 조양회관에서 민족의식을 키웠고, 1925년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윤세주의 투쟁에 감화를 받아 형 이원기, 동생 이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 이후 북경까지 왕래하면서 의열단 본부에 국내 정세를 보고하고 군자금을 전달하는 활동을 펼치던 중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 의사 조선은행 대구지점 의거 때 용의자로 지목 받아 형, 아우와 함께 구속되었다. 1943년 7월 서울에서 체포되어 북경으로 이송되고, 1944년 1월 16일 북경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구 남산동 662-35 이육사고택은 2018년 여름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반면, 경북대 박현수 교수가 세운 ‘264작은문학관’은 북성로1가 48-1에 의젓하게 남아 있다. 아무튼 일반인은 그를 〈청포도〉와 〈광야〉의 시인으로만 기억한다. 사람의 정체正體는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37] 장진홍
장진홍張鎭弘(1895~1930)은 1916년 12월 이내성李乃成의 권유로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했고, 1918년 만주 봉천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19년 독립만세운동 이후 귀국했다. 1927년 4월, 기회를 엿보며 경북 경산시장에서 매약상을 하던 중 이내성의 소개로 일본인 굴절무삼랑掘切茂三郞을 만났다. 폭탄 전문가 굴절무삼랑은 일본인이면서도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이었다(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표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일본인이면서도 한국의 독립을 염원’한 굴절무삼랑의 도움으로 장진홍 의사가 폭탄을 제조했다고 명시되어 있는데도 그것을 불신하는 사람도 글감이다. 그리스 독립전쟁에 자원 참전했다가 죽는 영국 시인 바이런, 에스파냐 내전에 역시 자원 참전하는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영화 〈모정〉의 실존인물 이언 모리슨과 범어동 뒷산의 나야르 대령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굴절무삼랑에게 폭탄 제조법을 익힌 의사는 1927년 10월 18일 덕흥여관 사환 박노선을 시켜 꿀 상자로 위장된 시한폭탄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배달하였다. 일제는 악독한 고문 끝에 이정기, 이원록 등을 진범으로 꾸며 재판에 회부했다. 장 의사는 1929년 2월 19일 일본에서 피체되어 대구로 압송되었고, 1930년 6월 5일 옥중에서 자결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새 건물을 짓기 위해 폭파되었고, 현재 공터로 남아 있다.
[38] 이혜경 · [39]김성국 부부
이혜경李惠卿(1889∼1968) 지사와 김성국金成國(1893∼1970) 지사 부부의 묘소가 신암선열공원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이혜경 지사는 신암선열공원 유일의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진성여학교 교사와 비밀결사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부회장으로서 항일운동을 펼치다가 투옥되었다. 김성국 지사는 경신학교 및 세브란스 의전 학생으로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두 번 모두 구속되었다.
부부는 나라가 독립을 되찾은 이후 대구에 와서 거주했다. 부부의 장남은 목사로서 의주에서 살았는데 독립 이후 일어난 폭발사고로 자녀들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차남은 전쟁 때 납북되었고, 삼남도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김성국 이혜경 부부의 사연은, 러시아의 식민지로 고통받고 있는 조국 폴란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은 러시아 사람입니까?”라고 말한 쇼팽의 간절함을 생각나게 한다. 캘빙의 ‘예정설’은 궤변인가?
[40] 현진건
1900년 9월 2일 대구에서 태어나 1919년까지 거주했다. 그 이후 서울에 살면서 동아일보 기자 등 주로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소설을 창작했다. 단편 〈빈처〉 〈술 권하는 사회〉 〈고향〉 〈운수 좋은 날〉 등과 장편 〈적도〉 〈무영탑〉 등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김윤식 ‧ 김현 공저 《한국문학사》는 현진건을 “한국 단편소설의 아버지”로 평가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후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의거’ 당시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다. 해당 분야 편집권을 가지고 있던 현진건은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그 이후 단편집 《조선의 얼굴》은 판매 불허, 신문에 연재하던 장편 〈흑치상지〉는 게재 중단 조치를 당했다. 분노와 울화에 파묻혀 살던 현진건은 1943년 4월 25일 병으로 타계했다. 현진건은 생가, 고택, 묘소, 문학관 등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대구시민 중에는 현진건이 ‘대구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현진건이 이승을 떠난 바로 그날 죽마고우 이상화도 병사했다. 두 사람의 1943년 4월 25일은 우리 역사와 문학에서 의미심장한 하루로 기억될 것이다.
[41] 현정건 ‧ [42] 현계옥
현정건은 현진건의 셋째 형이고, 현계옥은 현정건의 정인이다. 불과 27세 나이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현정건은 1928년 3월 일제에 피체되어 1932년 6월 10일까지 4년 3개월에 이르는 옥중생활과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후 이내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당대 최고의 연예인이었던 현계옥은 정인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 여성 유일의 의열단 단원으로 독립투쟁을 했다. 두 사람이 대구에 있을 때 영선못에서 데이트를 했다고 1925년 11월 3일치 동아일보가 보도하고 있지만, 매립된 지 50년이 지난 영선못에 아무런 표식이 없는 것은 물론, 대구시민 중 현정건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서부전선 이상 없다”가 아니라 “대구 이상 없다”라고 하겠다.
[43] 이상화
이상화의 생애는 장편소설이나 대서사시로 형상화될 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미독립만세운동, 금강산, 관동대지진, 불란서 유학 포기, 국문학사 미집필,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 방문, 교남학교 교사 생활, 시 창작 등이 그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농민운동에 여념이 없던 윤봉길 의사가 개벽 70호(1926년 6월)에 게재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고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상을 낳아준 들안길,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계산동 2가 84번지 고택, ‘라일락뜨락 1956’이라는 카페로 변신한 중구 서성로13길 7-20 생가 등이 남아 있다. 묘소는 달서구 명천로 43 이장가문화관 뒤 문중 묘역에 있다.
[44] 이상정·[45] 권기옥
개인전도 연 바 있는 화가 이상정李相定(1896∼1947)은 이상화 시인의 맏형으로, 계성학교 등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지하 항일운동을 하던 끝에 1923년 만주로 망명했다.
1926년경 이후 이상정은 중국 국민정부 정규군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윤봉길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김구, 김규식 등 독립지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1940년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을 적극 도왔다. 1945년 8월 15일 후에는 중국군 중장으로서 화북 지방의 일본군 무장 해제를 지휘했다. 1947년 9월 귀국하지만 40여 일 만인 10월 27일 뇌일혈로 돌연 타계했다. 중구 약령길 25-1에 남아 있는 그의 고택은 지금 주막으로 운영되고 있다.
‘부인’ 권기옥權基玉(1901∼1988)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다. 1925년 3월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제 1기로 졸업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소개를 통해 중국 공군에 입대해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복무했다. 독립유공자인 그녀의 남편은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 장군이다. 달서구 명천로 43 이장가문화관이 답사자를 기다리고 있고, 종로초등학교 정문 안쪽에 벽화로 그려져 있다. 두 사람은 중국 대륙을 누볐고, 권기옥은 평양 출신으로 그곳에서 독립운동으로 투옥을 겪은 후 망명했고, 이상정은 일본 유학을 거쳐 화가로 활동했던 이력이 있는 등 멋진 스토리를 지녔다.
[46] 박경원
1933년 8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민간비행기 조종사 박경원朴敬元이 사고로 숨졌다.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나 1917년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가마다 비행학교를 졸업하면서 3등 비행사 자격증을 받았다.
1933년 8월 7일, ‘황군 위문’ 행사차 만주로 가기 위해 일본 하네다 공항을 출발했다가 시즈오카현 겐가쿠산玄嶽山에서 짙은 안개에 묻혀 비행기 청연靑燕과 함께 추락했다.
2005년 박경원을 실존 인물로 한 영화 〈청연〉이 만들어졌다. 권기옥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만들어진 적이 없다. 서사 자체로 보아도 권기옥의 이야기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고 다채로운데 어째서 그런 결과가 빚어진 것일까? 예술가로서 한 번쯤 고민할 일이다.
[47] 현제명
〈희망의 나라로〉 〈고향 생각〉 〈그 집 앞〉을 작곡한 현제명玄濟明(1902∼1960)은 계성학교를 다녔고 대구 제일교회 성가대 단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숭실전문학교, 미국 인디애나 건 음악학교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음악부 주임, 조선음악가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1937년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과 관련해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이후 친일로 돌아섰다. 창씨개명한 구로야마玄山濟明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간사와 친일음악단체 조선음악협회 이사를 맡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산하 가창지도대의 지도자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일제의 전쟁을 정당화하고 조선의 민족정신을 약화시키는 노래를 불렀다.
독립 후 서울대 초대 음대 학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 1965년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제일교회100주년기념관 앞에 ‘현제명 나무’가 있다. 그런가 하면,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현제명을 친일반민족행위자 704명에 선정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은 현제명의 ‘성격’을 “성악가, 작곡가, 교육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두산백과》는 “한국의 성악가, 음악교육자. 친일 단체인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에 가담해 친일 활동을 하였으며 양악 발전에 기여하였다”로 ‘요약’한다. 누군가는 떠받들고, 누군가는 반민족행위자로 규탄한다. 예술가와 ‘작품’은 별개인가, 아닌가?
[48] 박태준
1920년 〈기러기〉 등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를 작곡했고,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 〈동무 생각〉을 작곡한 박태준朴泰俊(1900∼1986)은 우리나라 현대음악 개척의 선구자이다. 계성학교와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터스컬럼대와 웨스트민스터대에서 음악 지휘학을 공부했다. ‘박태준기념사업회’가 ‘작곡가 박태준기념사업회’로 이름을 바꾼 사연 자체가 글감이다.
1936년 귀국한 박태준은 대구 최초의 일반합창단인 대구성가협회를 조직해 연주회를 엶으로써 대구 지역 합창활동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1948년 연세대에 종교음악과를 설치했고, 그 이후 합창 운동과 교회음악의 기초를 세우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청라언덕에 노래비가 있다.
이광수가 일본군에 지원할 것을 선동하여 쓴 노랫말에 곡을 붙여 〈지원병 장행가〉를 만든 과오는 오늘도 그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다. 창원시가 ‘고향의 봄 도서관’을 만들면서 이원수의 업적은 물론 친일 행위도 밝혀둔 것을 모범 사례로 보면 될 듯하다.
[49] 이윤재
1943년 12월 8일 한글학자 이윤재李允宰가 옥중 순국했다. 1888년 김해에서 태어났고, 계성학교에서 공부했다. 3 · 1운동으로 3년 복역했으며, 중국 베이징대학 사학과에 유학했다. 1924년 이후 오산·배재 등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1927년 조선어학회 《우리말 사전》 편찬위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과 관련해 1년 반 동안 투옥되었다. 풀려난 이후에도 한글맞춤법 제정과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계속하다가 1942년 피체,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그의 묘는 달성군 다사면 이천리 산48번지에 있던 중 2013년 9월 28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비명이 한글로만 새겨진 묘비는 계속 제자리에 남아 있었는데, 김해시가 ‘김해한글박물관’을 세우면서 가져갔다. 의미 있는 무엇인가가 사라져가는 과정에 대한 보편적 형상화, 그리고 종당에 가서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대구가 주는 허망함과 비장감, 이런 글을 쓸 수 있겠다.
[50] 대구사범학교 교사와 학생들
1929년 6월 1일 개교 이래 대구사범학교는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1930년 ‘연구회’ 사건으로 37명 구속, 1939년 철도공사 강제노역 중 일본인 교사 집단폭행 ‘왜관 사건’, 1941년 300여 명이 검거된 다혁당 사건 등등 독립운동기 우리나라 청년들의 기백이 학교 역사 곳곳에 살아 남아 있다. 사대부고 교정에 ‘대구사범학교 항일 학생 의거 순절동지 추모비’, 왜관초등학교 교정에 ‘왜관 학생 사건 기념비’가 있다. 강두안, 장세파, 박제민, 박찬웅, 서진구 학생이 옥사했고, 출옥 이후에도 12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목숨까지 바친 분들인 만큼 충분히 현창되어야 마땅하다.
[51] 대구형무소 순국 독립지사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지사는 206명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지사 195명보다 더 많다. 한강 이남에서 피체되었거나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된 지사들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기 때문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끌려온 독립지사들이 대구형무소에서 함께 생활하는 모습, 면회를 온 경향 각지의 가족과 친지들, 더러는 풀려나와 달성‘토’성에서 ‘출옥 기념’ 단체사진을 찍는 광경(광주학생독립운동, 1931년 6월 16일) 등을 기록하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및 당대 대구 사회의 면모를 일정 부분 복원할 수 있다.
[52] 서상일
서상일徐相日(1887∼1961)은 대구가 낳은 대표적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다. 경술국치 당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서상일은 결사대를 조직해 서울 주재 외국 공사관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고, 1919년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등으로 수형 생활을 했다. 1929년에는 장진홍 의사 조선은행 대구지점 공격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조양회관을 지어 대구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데 힘썼다. 독립 이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지만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다가 구속되었고, 5‧16군사쿠데타 때 또 기소되었다. 재판 중이던 1961년 4월 1일 타계했다. 원화여고 교정에 동상, 망우공원 광복회관 앞에 흉상이 건립되어 있다.
[53] 홍해성
2007년 봉산문화회관 앞뜰에 홍해성洪海星(1893∼1957) 흉상이 세워졌다. 《두산백과〉는 홍해성을 “한국의 연출가이다. 사실주의적 연출 기법을 정립했고, 신파극에 리얼리즘 연출 기법을 도입, 토착화시키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라고 ‘요약’한다. 그는 1924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극장 전속배우가 되어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매일신보는 1930년 6월 30일치 지면에 “그가 귀국한 뜻은 적막한 조선극계를 위하여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조선극계를 위하여 기쁜 소식이라 하겠다”라고 보도했다. 1930년 이화여고 교실에서 체호프의 〈벚꽃동산〉을 공연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935년 창단된 예원좌藝苑座에서 활동하였는데, 예원좌는 “일제의 황민화와 전시 정책을 선전하는 연극을 적극 상연하는 등 친일적 색채가 뚜렷한 활동을 했다는 평가를 받아 일제 협력단체로 분류(《네이버 기관단체사전〉)”된다.
[54] 이인성
중구 계산동2가 71-1 계산성당 뜰에 ‘이인성 나무’가 있다. 이인성李仁星(1912∼1950)은 1929년 제 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뒤 세칭 ‘천재화가’로 각광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은 이인성이 보여준 “불투명 수채화의 극히 과감한 표현 처리와 특출한 기량 발휘는 근대 한국 미술사에서 특히 높이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채화의 본질적 묘미와 높은 차원의 표현성이 그로부터 처음 보인 것”으로 평가하면서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해서 그의 수채화는 그전까지의 독특한 창조성이 빛을 잃어 갔다. 그것은 유화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사실적인 수법의 인물 ‧ 풍경 ‧ 정물 그림을 계속 그렸으나 절정기의 작품들과는 달리 그의 작품 특징이 약간 엿보일 따름”이라고 해설한다. 천재가 작품성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예술가소설이 다룰 영역이다.
[55] 김성도
《두산백과》는 김성도金聖道(1914∼1987)를 “아동문학가 겸 동요작곡가. 작사 · 작곡한 〈어린 음악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동요가 되었다. 《색동》등의 동화집을 펴냈으며, 《안데르센 전집》을 번역하여 국내에 처음으로 안데르센 동화를 소개하였다”라고 ‘요약’한다. 초기에는 《아기별》(윤태웅 작사) · 《호박꽃 초롱》(강소천 작사) · 《산골동네》(김영일 작사) 등 동요 작곡에 주력했는데, 1950년대부터 동화 창작에 힘을 쏟아 《색동》(1965), 《복조리》(1968), 《꽃주머니 복주머니》(1972), 《꽃씨와 인형》(1974), 《피리와 달》(1982) 등의 동화집을 펴냈다.
모교인 경산 하양초등학교 뜰에 〈어린 음악대〉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계성고등학교 도서관장으로 줄곧 근무했으므로 1931년에 지어진 대구시 유형문화재 핸더슨관은 그의 유허라 하겠다. 대구 후배들은 안데르센 동화를 처음으로 소개해 한국아동문학사에 신기원을 이룬 김성도를 현창하는 일에 열성을 바쳐야 한다. 그가 작곡하고, 동화를 쓰고, 아동문학운동에 매진하는 모습을 글에 담는 일, 얼마나 멋지고 보람 있는가!
[56] 유치곤
2005년 6월 15일 ‘유치곤 장군 호국 기념관’이 달성군 유가읍 휴양림길 375에 건립되었다. 공군 최초 200회 출격기록을 달성한 유치곤兪致坤(1927∼1965)은 영화 〈빨간 마후라〉의 실존 주인공이다. 6 · 25전쟁 당시 평양 근교 승호리 철교를 폭파했다. 전쟁기념사업회는 2000년 1월과 2013년 1월 두 차례 그를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57] 2 · 28의 인물들
권준화, 안효영, 윤종명, (고)이대우, 이영소, 이완식, 전화섭, (고)하청일, 최용호, (고)손진홍, 윤풍홍, 장주효, (고)김윤식은 국가보훈처 인정 ‘2 · 28 공로자’이다. “엄혹한 시기에 가장 먼저 민주주의를 외친 2 · 28의 함성은 전 대한민국을 덮었다. 2 · 28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뿌리로서 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민주주의 실천 운동이었다.” 2 · 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누리집의 설명이다. 대구근대역사관은 “이 땅에 처음으로 민권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위대한 역사가 창조”되었으며, “당시 이와 유사한 처지에 있던 제3세계 국민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졌고, 1960년대의 세계적 학생운동으로 번져나갔다. 2 · 28민주운동은 국민이 주권자임을 역사상 처음 체험적으로 깨닫게 했고, 세계사의 변혁에도 하나의 불씨가 되었다”라고 그 ‘의의’를 규정하고 있다. 명덕사거리에 기념탑이 세워졌다가 두류공원으로 이건되었다는 표지석이 있고, 인근 명덕초등학교 교내에 2 · 28기념회관이 있다. 경북고와 대구고 교내에 각각 기념비가 있고, 2 · 28중앙공원에 김윤식 시비가 있다. 2 · 28의 역사 자체, 기념탑을 세운 사람들, 기념탑을 이건한 사람들 … 등 글의 제재가 많다.
[58] 심재완
심재완沈載完(1918∼2011)은 《교본校本 역대歷代시조時調전서全書》와 《시조의 문헌적 연구》를 저작하여 국문학 연구에 큰 공헌을 한 학자이다. 《교본 역대 시조전서》는 사방에 산재되어 있는 시조 관계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한 자료집이고, 《시조의 문헌적 연구》는 그 자료를 다시 문헌 · 작가 · 작품별로 연구 분석한 이론서이다. 또한 그는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하다. 그가 시조를 모으고, 나누고, 글씨로 쓰면서 지난날의 시조 작가들과 교감하는 모습을 잘 담아내면 전통의 현대화에 기여한 업적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59] 상희구
10권에 이르는 〈대구 시지詩誌〉를 완간했다. 그가 구상 · 자료수집 · 집필에 보낸 20년 세월도 뛰어난 글감이고, 작품 내용을 다른 갈래의 글로 재탄생시키면 그 또한 멋진 창작 활동이 될 것이다.
[60] 시대의 증인
머지않아 독립운동기, 해방 정국, 1946년 10월, 1950년 6월∼1953년 7월, 민주화 운동 등등 ‘격동의 정치’를 겪은 사람의 회고담을 들을 수 없게 된다. 정치만이 아니라 요즘 세상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이 각 분야에 서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문학작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정만진 : 대구의 역사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의열단》, 《소설 광복회》, 《일장기를 지워라》, 현진건 평전 《현진건, 100년의 오해》,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년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대구 임진왜란 유적》, 《예술 소재로서의 대구 역사 ‧ 문화 ‧ 자연 유산》(2021년 대구문화재단 학술조사지원사업) 등 저술.
첫댓글 심후섭(아동문학분과)/ 효자 전귀당 서시립 선생
위와 같이 희망해 주시고,
선정 인물이 중복되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원고 보내실 이메일 주소는 대구문협 사무국
dgmunin@daum.net 입니다.
<대구문학> 원고 보내는 곳과는 다릅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정만진(소설분과) : 광복회 지휘장 우재룡 독립지사
1. 정만진(소설분과) : 광복회 지휘장 우재룡 독립지사
정만진 소설가님 귀한 원고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필하시는 분 성함 앞에 번호를 붙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만진 소설가님께서 우재룡 지사님을 선택하셨으니, 다른 분은 우재룡 지사를 피하여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심후섭 올림
박방희(시분과, 대구소설가협회 회원) ; 선덕여왕
안윤하
화가 이인성으로 하겠습니다
정재용(소설분과위원장): 박중양으로 하겠습니다.
신영애(소설분과)-신숭겸으로 하겠습니다
송일호 선생님께서는 현진건으로 하셨습니다.
1. 정만진 소설분과 / 우재룡 지사
2. 박방희 시분과 / 선덕여왕
3. 안윤하 시분과 / 이인성 화가
4. 정재용 소설분과 / 박중양
5. 신영애 소설분과 / 신숭겸 장군
6. 송일호 소설분과 / 현진건 소설가
7.
8.
9.
10.
8월 10일까지
소설분과 희곡분과 평론분과 회원님들의
희망을 먼저 받도록 하겠습니다.
20년도에는 시조분과와 아동문학분과,
21년도에는 시분과와 수필분과 중심으로
<대구알리기문학페스티벌> 책자를 발간한 바 있습니다.
그리하여 22년에는 소설분과, 평론분과, 희곡분과 회원님을
우선적으로 모시려 하는 것입니다.
8월 10일 이후 타분과 회원의 희망도 받겠습니다.
2022.7.21.
대구문협 제14대 심후섭 올림
7번째 신청합니다
이근자- 소설분과- 위 예시에 없는 인물로 소개하겠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한학자였던 '배동환'옹입니다
8번째
고경숙(소설분과) - 여성 독립운동가 임봉선.
사진 등 관련 자료를 원고 속에 넣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소설, 희곡, 평론분과 회원님
우선적으로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수남 소설가 : 박재성(시인)으로 집필합니다
우리 대구 문협의 보석들... 이, 엄, 박, 오 선생 등도 참여하시면..
심후섭 아동문학분과 전귀당 서시립 선생
집필 희망합니다.
시분과 곽선희 : 홍의장군 곽재우
아동문학분과 최춘해 아동문학가 김진태
시분과 김영근(송정) 17번 우배선
1. 정만진 소설분과/ 우재룡 지사
2. 박방희 시분과/ 선덕여왕
3. 안윤하 시분과/ 이인성 화가
4. 정재용 소설분과/ 박중양
5. 신영애 소설분과/ 신숭겸 장군
6. 송일호 소설분과/ 현진건 소설가
7. 이근자 소설분과/ 독립지사 배동환 옹
8. 고경숙 소설분과/ 임봉선 여성독립운동가
9. 이수남 소설분과/ 박재성 시인
10. 심후섭 아동문학분과/ 전귀당 서시립 선생
11. 곽선희 시분과/ 홍의장군 곽재우
12. 최춘해 아동문학분과/ 김진태 아동문학가
13. 김영근(송정) 시분과/ 17번 우배선
14.
15.
16.
17.
18.
19.
20.
김영근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집필하시는 회원님은 유적이나 유물 사진 등을 첨부하셔도 좋습니다.
널리 홍보하는 데에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문장은 여러 번 읽으시고 교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병길 아동문학 분과 /유치곤장군
1. 정만진 소설분과/ 우재룡 지사
2. 박방희 시분과/ 선덕여왕
3. 안윤하 시분과/ 이인성 화가
4. 정재용 소설분과/ 박중양
5. 신영애 소설분과/ 신숭겸 장군
6. 송일호 소설분과/ 현진건 소설가
7. 이근자 소설분과/ 독립지사 배동환 옹
8. 고경숙 소설분과/ 임봉선 여성독립운동가
9. 이수남 소설분과/ 박재성 시인
10. 심후섭 아동문학분과/ 전귀당 서시립 선생
11. 곽선희 시분과/ 홍의장군 곽재우
12. 최춘해 아동문학분과/ 김진태 아동문학가
13. 김영근(송정) 시분과/ 17번 우배선 장군
14. 유병길 아동문학분과/ 유명악 유척기 대구판관
15. 서정길 수필분과/ 유치곤 장군
16. 이해리 시분과/ 백기만 선생
17. 김종근 시분과/ 이육사 시인
18. 신승원 수필분과/ 모산 심재완 선생
19. 우남희 아동문학분과/ 한훤당 김굉필 선생
20. 배정향 시분과/ 아동문학가 김성도 선생
21. 방종현 수필분과/ 금경연 화백
22. 전정남 아동문학분과/ 이응창 아동문학가
23. 곽홍란 아동문학분과/ 이상화 시인
24. 이기창 시분과/ 서상돈 김광제 국채보상운동
25. 김윤숙 시분과/ 두사충 장군
26.
27.
28.
29.
30.
이해리 시분과 /백기만 시인
김종근 시분과/ 이육사 시인
유치곤 장군에 대한 글을 쓰겠습니다. 3년 전에 자료를 확보해 두었습니다
우남희 아동문학분과/ 김굉필 선생
이해리 김종근 서정길 우남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원고 마감은 9월 30일까지 입니다.
유병길 아동문학분과/ 유명악 유척기 대구판관
유치곤장군은 서정길 부회장님이
써주세요.
시분과 배정향 회원님께서
사무국으로 김성도 선생에 대한 집필을 희망해 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1. 방종현 수필분과/ 금경연 화백
22. 이선영 아동문학분과/ 이응창 아동문학가
23 곽홍란(아동문학분과) / 이상화 시인
대리로 올립니다.(곽 회원 등업 부탁드려요)
24. 이기창(수필분과)/ 서상돈 .국채보상운동
25. 김윤숙 (시분과) 두사충 장군.
57번 시분되입니다 2.28의 인물들에 대해 써겠습니다
종합 0912
1. 정만진 소설분과/ 우재룡 지사
2. 박방희 시분과/ 선덕여왕
3. 안윤하 시분과/ 이인성 화가
4. 정재용 소설분과/ 박중양
5. 신영애 소설분과/ 신숭겸 장군
6. 송일호 소설분과/ 현진건 소설가
7. 이근자 소설분과/ 독립지사 배동환 옹
8. 고경숙 소설분과/ 임봉선 여성독립운동가
9. 이수남 소설분과/ 박재성 시인
10. 심후섭 아동문학분과/ 전귀당 서시립 선생
11. 곽선희 시분과/ 홍의장군 곽재우
12. 최춘해 아동문학분과/ 김진태 아동문학가
13. 김영근(송정) 시분과/ 17번 우배선 장군
14. 유병길 아동문학분과/ 유명악 유척기 대구판관
15. 서정길 수필분과/ 유치곤 장군
16. 이해리 시분과/ 백기만 선생
17. 김종근 시분과/ 이육사 시인
18. 신승원 수필분과/ 모산 심재완 선생
19. 우남희 아동문학분과/ 한훤당 김굉필 선생
20. 배정향 시분과/ 아동문학가 김성도 선생
21. 방종현 수필분과/ 금경연 화백
22. 전정남 아동문학분과/ 이응창 아동문학가
23. 곽홍란 아동문학분과/ 이상화 시인
24. 이기창 시분과/ 서상돈 김광제 국채보상운동
25. 김윤숙 시분과/ 두사충 장군
26. 이해리 시분과 /백기만 시인
종합정리 2
김영근 시인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희망은 40번으로 마감하고자 합니다.
원고는 가급적 9월 30일까지 사무국 이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김영근 선생님
중복되게 집계하여 혼란이 왔습니다.
정리해본 결과 37명이 아니고
27명입니다.
위의 글을 정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혼선주어 죄송합니다.
종합 0912
1. 정만진 소설분과/ 우재룡 지사
2. 박방희 시분과/ 선덕여왕
3. 안윤하 시분과/ 이인성 화가
4. 정재용 소설분과/ 박중양
5. 신영애 소설분과/ 신숭겸 장군
6. 송일호 소설분과/ 현진건 소설가
7. 이근자 소설분과/ 독립지사 배동환 옹
8. 고경숙 소설분과/ 임봉선 여성독립운동가
9. 이수남 소설분과/ 박재성 시인
10. 심후섭 아동문학분과/ 전귀당 서시립 선생
11. 곽선희 시분과/ 홍의장군 곽재우
12. 최춘해 아동문학분과/ 김진태 아동문학가
13. 김영근(송정) 시분과/ 17번 우배선 장군
14. 유병길 아동문학분과/ 유명악 유척기 대구판관
15. 서정길 수필분과/ 유치곤 장군
16. 이해리 시분과/ 백기만 선생
17. 김종근 시분과/ 이육사 시인
18. 신승원 수필분과/ 모산 심재완 선생
19. 우남희 아동문학분과/ 한훤당 김굉필 선생
20. 배정향 시분과/ 아동문학가 김성도 선생
21. 방종현 수필분과/ 금경연 화백
22. 전정남 아동문학분과/ 이응창 아동문학가
23. 곽홍란 아동문학분과/ 이상화 시인
24. 이기창 시분과/ 서상돈 김광제 국채보상운동
25. 김윤숙 시분과/ 두사충 장군
26.유가형 / 57번 2.28의 인물들
27. 김동원/ 이장희 시인
김혜숙 수필분과/ 윌리암 베어드 대구 선교사(제일교회, 제중원(동산병원) 계성 신명)
35분 마감되었습니다.
냉면장수 방수영, 50년 세월을 한자리에서 냉면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전국에 단골들이 찾아오는 이름난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