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기행 - 주시경-張志暎(1889~1996)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5. 20. 0:18
한국인물기행 주시경-張志暎(1889~1996)
2024.05.19. 20:55조회 0
1. 주시경
-張志暎(1889~1996)
선생은 한평생을 두고 양복이란 것을 걸쳐 본 일이 없으셨다. 언제나 두루마기를 입으셨고, 두루마기 속에는 엷은 회색 바지 저고리에 조끼를 입으셨는데, 모자는 제주 사람들이 말총으로 만든 총모자(중절모 같기도 하고 맥고모자 같기도 한, 그 때로서는 개화한 사람들이 쓰는 모자)를 많이 쓰셨다. 더운 여름에는 맥고모자를 쓰기도 하셨다.
당신은 그 당시‘양혜’라고 부르던, 지금의 구두를 신으셨는데 새 구두 신으신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때에는 양말이 없었기 때문에, 비록 구두는 신식 가죽 구두를 신고 다니셨지만, 발에는 다른 사람들같이 꼭 버선을 신으셨다. 검소하고 청렴한 선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때 세상은 개화의 물결이 한층 더 강렬하게 국민들의 교육열을 부채질하여, 서울에만도 배재 학당, 이화 학당을 비롯해서 경신, 보성, 숙명, 진명, 그리고 융희, 기호(지금의 중앙), 서북 등 여러 중학교가 있었다.(소학교는 동네마다 있었다.)
그런데, 이 많은 중학교의 국어 시간을 선생은 혼자 도맡아서 강의를 하고 다니셨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 우리말을 학문적으로 올바로 연구한 사람이라고는 주시경 한 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연구하신 분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마는, 우리말을 영문법의 방법으로 풀이하려고 했기 때문에, 한 분 주시경 선생 이외는 아무도 본격적인 우리말 강의를 맡으실 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그 많은 학교를 선생이 혼자 도맡아 가르치게 되니 선생은 한 주일에 자그마치 40여 시간을 강의하셔야 했다.
선생의 모습을 생각할 때 또 하나 잊히지 않는 것은, 선생의 커다란 책보퉁이이다. 새로 발견된 책이면 백리도 멀다 않고 달려가서 빌려다가는 붓으로 일일이 베껴서 보관하고 연구할 만큼 책을 가까이하고 소중히 다루시는 분이라, 책보는 언제나 들고 다니셔야 할 분인데, 그 위에 학교 강의까지 그렇게 많이 맡고 보니, 자연히 책보퉁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생보다 책보퉁이가 먼저 보인다고 했고, 언젠가 모르게 학생들 사이에는‘주보퉁이’라는 별명이 생기고 말았다.
그리고 워낙 가난한 살림이라 선생은 언제나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셨다. 그것도 지금같이 예쁘장하고 간편한 도시락이 아니라, 노끈을 꼬아서 엮은 노끈 망태기에다가 밥 담긴 놋주발을 넣고, 그 위에 반찬 그릇, 그리고 그 옆에 숟가락과 놋젓가락을 꽂아서는 한 손에 드셨으니 아무리 좋게 보아 드리려 해도 멋지다고는 말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선생이 사시던 상동의 집도 말이 집이지, 글자 그대로의 오막살이 초가집이었다. 그것도 상동 교회 뒤로 돌아가다 언덕 아래에 있는 집이라, 그리고 앞뒤가 아주 꽉 막힌 집이었기 때문에, 낮에도 촛불을 켜야 책을 볼 수 있었다. 그 좁고 어두운 방에서 촛불을 켜놓고 훈민정음이나 불경언해 같은 책을 일일이 베끼셨는데, 그것도 백지로 맨 책에다 붓으로 쓰시는 것이라, 지금의 만년필이나 볼펜으로 베끼는 것같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은 조금도 가난을 탓하지 않으셨다. 부끄러워하지도 않으셨다. 그렇다고 청빈이라 자랑으로 생각지도 않으셨다. 한 마디로 한글 연구에만 몰두하셨기 때문에, 그런 일에는 범연하신 분이었다고 할 것이다.
가난해서 충분히 영양을 취하지도 못하는데다가, 한 주일에 40여 시간이나 되는 강의를, 그것도 한 학교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 온 장안을 헤매다시피 찾아다니며 하는 일이라 몹시 피곤하실 텐데, 그 위에 또 집에 돌아와서는 책을 새로 베끼고 또 연구를 계속하곤 하셨으니 서른 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가신 것도 까닭 없는 일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이다. 선생은 갑자기 체했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앓지도 않은 채 숨을 거두셨지만, 체하지 않았어도, 그토록 몸을 혹사하고서 영양을 섭취한다거나 맛있는 것을 먹는다거나 하는 생각은 꿈에도 가져보지 않으셨으니, 영양실조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부터 영양 실조와는 인연이 깊으셨던가 보다. 선생은 나보다 꼭 11년을 앞서니, 근대사에서 흉년으로 가장 유명했던 병자년(1876)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가족이 모두 굶기를 밥먹듯이 해서 산모의 젖이 나지 않아, 선생은 날 때부터 굶주리셨다. 그래서 어른은 못 먹어도 어린애에게만은 곡식을 끓여서 밥물을 받아 먹여 겨우 살렸다고 한다.
이같이 어렵게 태어나고 또 어렵게 살았지마는, 선생의 마음은 언제나 부유했고, 또 한글 연구에 대한 선생의 정열은 조금도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 한글 연구에 대한 정열은 이미, 고향인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릉골에서 서당에 다니실 때에 싹이 튼 것 같다. 선생이 언제나 입버릇처럼 되뇌신 말씀이 있다. 그것은, 우리말에는 우리말의 길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 신념이 생긴 곳도 무릉골 서당인 것 같다. 선생은 그 때를 회상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하셨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울 때, 선생님이 한문을 한자음대로 한 번 읽어주시는데, 이 때에는 아이들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여 멍하니 그대로 앉아 있다가 다음에 선생님이 우리말로 새겨 주시어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같이 우리말로 하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읽고, 그 다음에 우리말로 되풀이하는가 하고 의심을 품게 되었고, 또 우리글이 있는데 왜 이토록 어려운 한문만을 배워야 하며, 우리말을 그대로 쉽게 적을 수 있는 우리글은 왜 쓰지를 않나 하고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한글을 연구하게 된 동기다.” 라고.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진리가 있는 말씀이다. 어쨌든, 서당에 다니시던 그 때, 선생의 어린 가슴에는 무엇인가 맺히는 게 있으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후에 서울에 와서 여러 가지 신학문을 배우는 동안, 그 때의 의문이 되살아나곤 해서, 드디어 평생을 우리말 연구에 바치시기로 결심을 하신 것 같다.
그 후, 서재필 박사 같은 선각자들과 만나서 그 때로서는 혁명이나 다름없는, 한글만 쓰는 독립신문을 발간하게 됨으로써 연구할 기회도 더 많이 가지시게 된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 당시만 해도 신학문이라면 아예 돌아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배척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주 그 풍조에 빠져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사람들이 많던 때였던만큼, 우리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거나, 더러 우리 문법을 새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도 다른 나라 말의 문법을 바탕으로 삼으려 했는데, 선생은 그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을 우리말 나름대로 풀이하신 일이다. 요새 흔히 말하는 ‘주체성’이 분명했던 분이라 할 것이다.
이같이 해서, 선생은 처음으로 국어 시간을 두어 가르치는 국어 교육의 창시자가 되셨고, 국어 사전 편찬의 역사적인 첫발을 떼어놓으신 새 문화 창조의 개척자가 되셨다.
2. 한힌샘 주시경
“적음으로 큼을 이루고 / 쉬움으로 어려움을 하나니 / 큼은 적음에서 꾀하고 /어려움은 쉬움에서 힘쓸지어다 / 큼을 적음에서 꾀하며 / 어려움을 쉬움에서 힘쓰는 이는 / 일어날 것이요 / 큼을 적음에서 웃으며 /어려움을 쉬움에서 잊어버리는 이는 / 넘어지리로다” (한힌샘 주시경의 ‘큼과 어려움’ 전문)
작은 것, 쉬운 것들을 기초로 큰 것, 어려운 것을 이루라는 낯익은 수신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이 시는 세상을 향한 발언이라기보다 오히려 작자 자신을 겨냥한 다짐이었다. 작자는 마침내 자신이 작고 쉽다고 생각한 일에 전념함으로써 진정으로 크고 어려운 것-민족어의 탐구와 수호작업의 파종-을 이루었다.
작은 것에서 큰 뜻 이루라
한힌샘 주시경(1876~1914)의 이름과 그의 짧은 삶 속에는 민족주의라는 고갱이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와 공간의 테두리 안에서 민족주의는 진보적 세계관의 중요한 축이었다.
20세기에 개화한 모든 유파의 국어학과 국어운동의 맨 앞에 우뚝 서 있는 한힌샘의 삶은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릉골에서 시작된다. 어릴 적 이름은 상호이다.
그의 아버지 학원씨와 어머니 전주 이씨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군 인산면 차돌개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둘째아들 한힌샘보다도 10년을 더 살며 <구암집>이라는 문집을 남긴 시골의 청빈한 문필가였다.
가난한 살림과 연년생의 형제들 때문에 한힌샘의 유년기는 도라지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궁핍의 체험으로 채워진다.
그의 나이 13세 되던 1888년 봄, 한힌샘은 서울에 살던 백부 학만씨에게 입양돼 서울살이를 시작한다. 백부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으나 모두 괴질로 일찍 세상을 떴기 때문이었다. 한힌샘은 서울에서 18세까지 한문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 시기부터 한글의 원리와 이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의 저서 <대한국어문법>(1906)에서 이 시기를 회고하는 구절이 발견된다. 15세에 이르러 국문을 공보하면서 국어의 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인데
“조희(종이)와 붓과 먹과 벼루와 책은선비의 쓰는 물건이라”는 문장에서‘먹과, 벼루와’같이“받침있는 자밑에는 '과'가 쓰이고, 받침없는 자 밑에는 '와'가 쓰임이라”는 사실을 때닫고, 나아가서‘을, 은 ’과 ‘를, 는’과의 차이도 역시 같은 이치에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크고 하나뿐인 한민족의 글
이런 진술은 그가 이때 이미 자료의 분석을 통해 어떤 규칙을 찾아 논리를 짜나가는 기술언어학 이후의 현대언어학적 원리를 스스로 깨달았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서당에서의 한문공부는 또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연구해야겠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서당의 스승이 한문의 뜻을 반드시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을 보고, ‘글은 말을 적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말을 적는 방법, 곧 일종의 부호에 지나지 않을뿐인 글자가 한자처럼 어려워서야 어느 겨를에 다른 학문을 닦고 문화를 창달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그를 한글 전용주의자로 이끌고 국어연구가로 키운 것이다.
‘크고 하나뿐인 한민족의 글’로 해석될 수 있을 ‘한글’이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 말이다.
18세 되던 해에는 배재학당의 인쇄소 잡역을 하면 교사 박세양, 정인덕으로부터 산술, 지지(地誌), 영어, 시사 등 신학문의 과외 수업을 받다가 이듬해에 배재학당에 입학해 23세에 역사지지 특별과를, 그리고 25세에는 보통과를 각각 졸업한다.
배재학당 시절은 그의 학문이 개화하기 시작한 첫 단게이다. 그는 이곳에서 지지학 교사 서재필을 만났고, 그와의 연분으로 학생으로서 <독립신문>의 회계사무 및 교열을 맡게 되었다. 순한글신문인 <독립신문>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한글연구를 유혹하고 다그쳤다. 그는 21세 때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연구할 목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연구단체인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독립신문사 안에 조직했고 22세 때에는 <독립신문>에 네차례에 걸쳐 ‘국문론’을 기고했다. 문자론에 해당하는 이 ‘국문론’에서 한힌샘은 뜻글자에 대한 소리글자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소리글자인 국문은 쓸 것을 주장했다.
그가 결혼은 한 것도 학창시절인 21세 때였는데 한힌샘은 부인 김해 김씨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 딸 송산, 춘산과 아들 삼산, 백산, 왕산 씨는 모두 작고했고, 그 아랫세대 자손들이 서울에 살고 있다.
배재학당을 졸업하던 25세 때 그는 상동교회(지금의 새로나백화점 자리)의 청년학원 국어강습소에 국어문법과를 만들어 자신의 연구결과를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때의 강의록을 31세 때 <대한국어문법>이란 제목으로 출판했다.
서재필 만나 독립신문 교열
상동교회의 강의 말고도 그는 학창시절과 그 이후의 삶을 통해 국어연구만이 아니라 서울 시내 각 학교와 강습소, 외국인 한어연구소의 국어교사로서, 또 독립협회와 협성회의 간부로서 분주한 생활을 보냈다.
독립협회의 간부로서 <독립신문> 발간, 만민공동회의 조직 등을 통한 정치, 사회, 문화운동이나 1907년 그의 상소가 동기가 돼 학부(學部) 안에 설치된 ‘국어연구소’와 최남선이 설립한 조선광문회에의 참여를 통한 학술활동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그의 교사로서의 삶이다.
특히 32세 되던 1908년 이래 한힌샘은 상동기독교청년회관 안의 하기 국어강습소 외에 청년학원, 공옥학교, 이화, 기호, 숙명, 진명, 휘문, 배재, 서북 등 20여개의 각급 학교와 야학강습소를 동분서주하며 국어문법을 가르쳐 ‘주보따리’, ‘주보퉁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 1911년부터는 서울 박동에 있는 보성중학교에 ‘조선어강습원’(일요강습소)를 열어 한성사범학교, 계성보통고등학교 등 서울의 각급 학교에서 몰려든 청년학생들에게 일요일마다 무료로 국어국문을 강의하고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킨다.
그리고 이 국어강습을 통해 그는 일제하 국어학을 이끌어 나갈 장지영, 김윤경, 김두봉, 최현배 등의 거장들을 배출했다. 특히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한힌샘의 민족주의는 더욱더 강화됐다. 그는 중국의 양계초가 쓴 <월남망국사>를 번역 출판하였고, 배재학당 시절의 종교였던 기독교를 버리고 대종교로 개종했으며, <조선어문법>(1913)부터는 주시경이란 이름을 한힌샘으로 바꾸었다.
그의 비타협적 민족주의를 펼치기에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은 너무 엄중했고 그는 마침내 해외망명을 결심한다. 그러나 그 결심을 실행하기 직전인 1914년7월 27일 이침, 급성체증으로 서른아홉 삶을 마친다.
세기의 전환기를 살아가며 그가 쓴 책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일제와 분단시대를 거치며 힘차게 자라날 국어학의 씨앗이 되었다. 그가 생전에 쓴 논문과 저서들은 서울대 이병근 교수가 작성한 논저목록에 따르면, <독립신문>에 실린 <국문론>(1897)에서 시작해 <국어문법>(1898), <국문문법>(1905),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국문연구>(1909), <국어문법>(1910), <한나라말>(1910), <말모이>(1911~?), <소리갈>(1912?), <말의 소리>(1914) 등 20여 항목에 이른다.
이 교수는 지난 85년에 쓴 한 논문에서 70년대 이전까지는 한힌샘이 로 민족주의적 국어관이나 학술용어의 특이성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면, 70년대 이후에는 주시경 언어학의 체계적인 독창성과 현대언어이론과의 유사성 때문에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말글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그의 민족주의적 국어관이란 “지역공동체(區域), 혈연공동체(人種) 및 언어공동체(말과 글)의 삼위일체인 사회, 국가, 민족의 성(性)이 곧 언어인데 그 언어의 수리가 사회, 국가, 민족의 보존 및 발전의 지름길”이라는 어문 중심의 민족주의관과 그의 한글전용주의, 그리고 그가 중심이 되어 조선광문회에서 편찬한 최초의 국어사전 <말모이>가 사전용어의 약호 범례 중 종교항목에서 가나다 순을 무시하고 ‘대종교’를 가장 앞세운 데서도 드러나는 민족중심주의를 일컫는다.
그는 한자로 번역된 서양식 문법용어를 무시하고 임(명사), 엇(형용사), 움(동사), 언(관사), 억(부사), 놀(감탄사), 겻(조사), 잇(접속사), 끗(종지사)등의 순우리말로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자신의 문법체계를 세웠고, 잡이(잡아야 할 것), 본(본보기), 곱슬줄(물결처럼 된 줄), 노(공기), 바탕(성질), 길(정도) 등의 말을 새로 만들기도 했다. 또 그의 이론에서 보이는 체계적 독창성과 현대언어이론과의 유사성으로는 그의 ‘음학’에서 간간이 느껴지는 형태음소론적 관심이나 ‘짬들갈’(문장론)에서 간취되는 변형문법적인 관점 등이 지적된다.
예를 들어 ‘ㅊ ㅋ ㅌ ㅍ’들은 우리말 관습에 따라 자음 앞에서 ‘ㅅ ㄱ ㅅ ㅂ’으로 된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 형태음소론적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예라면 “소와 말이 풀을 먹소”라든가 “저 사람이 노래하면서 가오” 같은 합성문장을 ‘뭇임이드’(主語群文章), ‘뭇씀이드’(敍述語群文章) 등으로 규정하면서 동일성분소거와 유사한 개념을 써서 분석하고 있는 것이 변형문법적 아이디어의 예이다.
이 교수는 70년대 이래 한힌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외래이론의 반성과 모방의 극복이라는 점에서 보면 진정한 국어학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어떤 개념이 서양언어학의 어떤 개념보다 수십년 앞선 것이었다든지, 또 그의 어떤 개념이 구조주의의 어떤 개념에 해당하고, 또 어떤 개념은 변형생성이론의 어떤 개념에 해당한다든지 하는 식의 평가는 적절히 않다고 말한다. 그는 한힌샘 학문의 부분적 현대성에 대한 찬사는 그의 학문적 미숙을 이유로 한 완전한 폐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하고 한힌샘 언어학의 역사적 의의는 학문적 독창성과 논리성, 끊임없는 학문적 노력에 있다고 결론 내린다.
‘주보퉁이’라 불린 참스승
한글학회 허웅 이사장도 “그이 학문의 성과는 그렇게 크지 못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모든 조건들, 예를 들어 이어받을 만한 학문적 토대가 전혀 없었다는 점, 나라의 형편이 매우 혼란한 상태에 있었다는 점, 나라의 운명이 기루어져가기만 했다는 점, 그이 개인생활이 극도로 가난했다는 점, 그의 학문활동의 햇수가 그리 길지 못했다는 점 등을 생각할 때 이러한 성과는 매우 큰 것”이라고 평가했다. 허 이사장은 또 그가 한글의 풀어쓰기를 시도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국어 정책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그에 의해 일찍이 제기됐었다고 말하고 한힌샘은 국어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국어정책의 길잡이였다고 평가했다.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책보따리와 도시락을 들고 이 학교, 저 학교를 돌아다며 국어를 가르쳤던 한힌샘. 궁핍에 시달리며 문법책을 쓰고 사전을 편찬하며 민족어에 애정을 쏟았던 이 선각자는 이제 분단시대의 양쪽 학계에서 공히 합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한글학회는 매년 한힌샘에 관한 논문을 모아 <한힌샘 연구>를 내고 있고 언어학 전문출판사인 탑출판사에서도 <주시경학보>를 매년 두차례씩 내고 있다.
정부의 한글날 공휴일 폐지 방침으로 어문학계가 떠들썩한 요즈음 그의 삶과 학문에 대한 추모의 염은 더울 간절하다.
세종이 봉건시대의 ‘훈민정음’의 한 상징이라면, 한힌샘은 시민사회의 ‘한글’의 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출처 :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1989. 한겨레신문 연재, 고종석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