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經筵) 의 명암(明暗) - 임금 노릇은 아무나 하나 !?
작금(昨今)에 「쪽 팔린 통치권자(統治權者)」의 천둥벌거숭이 같은 좌충우돌(左衝右突)은 권부(權府) 쪽을 향한 국민의 존엄(尊嚴)이나 국민 쪽을 향한 위엄(威嚴)에 완전히 먹칠을 하였다.
시정잡배(市井雜輩)들이 제 또래와 술집에서나 오고갈 비어(卑語)들을 공중(公衆) 앞에서 소낙비 퍼붓듯 쏟아 놓는 것을 마치 「권위(權威)를 초탈(超脫)」한 어깨동무처럼 친숙(親熟)의 발로(發露)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배움이 모자라도 그 끝을 모를 처사(處事)요 어리광에 불과한 것이다.
TV의 사극(史劇)이나 소설(小說)을 보면 빈궁(嬪宮)들의 옹위(擁衛)를 받으며 비원(秘苑)을 배회(徘徊)하고, 밤이 이슥해지면 소담스러운 주안상(酒案床)을 마주하여 어여쁜 후궁(後宮)이 건네는 교태(嬌態)와 술잔에 녹아나는 왕의 모습을 본다.
조금 뜻에 거슬리는 신하(臣下)에게는 「- 당장 의금부(義禁府)에 하옥(下獄)시켜라-」 대갈(大喝) 일성(一聲)에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떠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이조(李朝)의 국왕(國王)중 몇몇을 제외(制外)하고는 저「쪽 팔린 집권자(執權者)」에 훨씬 못 미치는 권력(權力)에다가 수많은 속박(束縛)에 묶여 허울좋은 전제군주(專制君主)로 평생을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가시밭길을 걷고 살았다.
그 대표적(代表的)인 사례(事例)로 「경연(經筵)- 신하들이 임금에게 경전(經典)을 강의(講義)」을 들 수 있다.
「제왕학(帝王學) 의 경연(經筵)」이라는 통칭(通稱)은 허울이고 내용은 임금을 옛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으로 꽁꽁 묶어두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實現)하려했던 삼봉(三峰) 정도전의 구도(構圖)였던 것이다.
국왕은 상징적(象徵的)인 존재이고 실질적인 통치(統治)는 재상(宰相)중심으로 함에 제왕(帝王)의 국량(局量)이 조금 모자란다고 하더라도 국정(國政)에는 하등(何等)의 소루(疏漏)가 있을 수 없게 꾸민 것이다.
여기 「경연(經筵)」에서 철인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을 공부해야하는 임금들이 치르는 고역(苦役)은 현(現)「고3 수험생」들과 일반이었다.
「경연(經筵)」과 인연이 깊은 두 임금을 든다면 11대 중종(中宗) · 22대 정조(正祖)를 꼽을 수 있는데 전자(前者)가 경연(經筵)의 신고(辛苦)에 몸살을 앓았다면 후자(候者)는 반대로 경연(經筵)에서 신하들의 무지몽매(無知蒙昧)를 호통치며 국왕의 권위(權威)를 되찾은 역전(逆轉)의 빌미로 삼았던 것이다.
참고로 1862년 12월 8일에 등극(登極)하여 다음 해인 1863년 1월 15일부터 경연(經筵)에 임(臨)하는 13세의 소년 고종(高宗)의 일과(日課)부터 일별(一瞥)해 보자
1월 16일
소대(召對)
1월17일
권강(勸講)·소대(召對)
18일
권강(勸講)·소대(召對)
19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0일
권강(勸講)
21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2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3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4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5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6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월 28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월 2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월 3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월 4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월 5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월 6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월 7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월 8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월 9일
권강(勸講)·소대(召對)
2월 10일
권강(勸講)·소대(召對)
「권강 勸講」은 임금을 모시고 경전을 강의하는 것을 말하고 「소대(召對)」는 반대로 제자인 임금이 홍문관(弘文館) 참찬관 이하 앞에서 배운 바를 강론(講論)하는 것이다.
13세인 고종이 강론(講論)받은 책은 「효경(孝經)」이었는데 그 시행(施行)세칙(細則)을 보면:
①. 「옥당(玉堂) - 홍문관(弘文館)」에 입직(入直)한 상·하번(上·下番) 중에서 매일 한 사람이 윤번(輪番)제로 입실하여 강론할 것
② .「문형(文衡) -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사람이나 각신(閣臣) 중에서 일찍이 제학(提學)을 지낸 사람이 매일 한사람씩 윤번(輪番)제로 들어와 강론할 것
③ .주상께서 앞서 배운 내용을 먼저 한 차례 암송(暗誦)한 뒤에 입시한 강관(講官)이 새로 배울 내용을 읽고 나서 의미를 해석. 주상께서 10회를 읽고 나면 강관(講官) 이하가 각각 글 뜻을 해설할 것
④. 5일마다 대신(大臣) 한 사람이 윤번(輪番)으로 참가하여 지난5일 동안에 배운 것 중에서 몇 대목을 뽑아내어 질문하기도 하고 혹은 더 부연(敷衍)해서 해설할 것
⑤. 매일 강론(講論)을 권하는 것 외에 소대(召對)도 행함. 소대(召對)하는 예에 따라 임금이 강론을 할 때에 배운 글자의 음을 10회까지 읽을 것.
⑥ 강론을 할 때는 모두 정좌(正坐)로 함
그해 2월 28일 효경(孝敬)이 끝나자 바로 3월 1일부터 「소학(小學)」으로 들어갔으니 방학(放學)이나 휴일(休日)도 없는 강행군(强行軍)이다. 더구나 강사진(講士陣)이 매일 바뀌고 또 시험(試驗)=소대(召對)가 있으니 적당히 졸거나 한눈 판다는 것은 상상(想像)할 수도 없었다.
고종이 15세 때 이모(姨母)뻘인 16세의 민자영(閔紫英) - 훗날 명성황후(明成皇后) - 을 왕비를 맞이하였다. 궁중에서 미색(美色)과 교태(嬌態)가 짙은 궁녀(宮女)들을 보다가 뻗뻗하고 고집이 센 고아(孤兒) 출신 배필(配匹)을 맞이함에 소년왕으로서는 이중고(二重苦)는 맞는 꼴이 된 것이다.
11대 중종(中宗)은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의 반정(反正) 공신들이 등떠미는 통에 엉겁결에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진성대군(晉城大君) 시절에는 이복(異腹) 형님인 연산군(燕山君) 눈치를 살피는 것 이외는 간섭하는 무리가 없어 가히 「고복격양(鼓腹擊壤)- 배 두드리며 태평을 노래함」이었는데 왕위에 오르자 공신(功臣)들의 횡포(橫暴)에 따라 왕비가 된지 7일만에 조강지처인 단경왕후가 내쫓기는 「허수아비 왕」의 참극(慘劇)을 겪어야 했다.
10년의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1515년에 홍문관(弘文館) 「정언(正言)-수찬(修撰)-교리(校理)」등 언관(言官)을 맡는 조광조(趙光祖)를 얻는다. 허수아비 왕 노릇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絶好)의 찬스를 잡은 것이다.
이상적(理想的)인 도학(道學)정치를 구현(具顯)코저 하는 조광조(趙光祖)등 사림파(士林派)는 우선 개혁과 혁파(革罷)로 새로운 정치를 폈다.
이 와중(渦中)에 제왕학(帝王學) - 세자(世子)가 아니면 배우지 않음 -을 배우도록 중종을 닦달하여 경연(經筵)에 임(臨)하게 하였다.
졸지에 왕위에 올라 지난 10년은 눈치코치로 헤쳐왔는데 현량과(賢良科)출신의 대쪽같은 선비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경연(經筵)에 임(臨)하도록 채근하며 엄(嚴)하게 학습을 시켰다.
처음에는 못 배운 지식(知識)이요 임금이 갖춰야할 「격물치지(格物致知 )- 참다운 지식(良知)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물욕(物欲)을 물리쳐야 한다는 대학(大學) 조목」 -를 얻기 위해 성심껏 경연(經筵)에 임하였다.
그러나 그 노릇을 3년 동안 치루고 나니 반정(反正)공신들과 어영구영 보내던 시절이 오히려 그리워졌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학(道學)」운운(云云)하는 조광조(趙光祖)들에게 신물이 난 것이다.
1519년 중종 나이 32세에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등을 끼고 조광조(趙光祖) 일파를 척살(刺殺)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켰다. 물론 사림파들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에도 무리가 있었지만 여(余)가 보는 관점에서는 학문에 넌덜미를 냈던 중종(中宗)의 「경연(經筵) 기피증(忌避症)」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 뒤로는 아무도 「경연(經筵)」을 꺼내놓는 신하도 없음에 중종(中宗)은 책을 덮고 슬슬 여색(女色)에 빠지게 된다. 암울(暗鬱)하고 용렬(庸劣)한 임금 치고 호학(好學)하는 대신에 후궁(後宮)의 치맛자락에 놀아난다.
22대 정조(正祖) 시대는 이조(李朝)의 「르네상스 (Renaissance)」였다.
정조는 11세때 부왕인 장조(莊祖)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참사(慘死)를 겪는다. 69세인 조부(祖父) 영조(英祖)는 28세인 세자를 「뒤주」에 넣고 굶겨 죽이는 것이다.
24세인 모친 혜경궁 홍씨는 친정(親庭)쪽에 붙어 벽파( 派)인 「 홍인한(洪麟漢)· 김구주(金龜柱) ·정후겸(鄭厚謙)」이 남편을 죽이려는 음모(陰謀)를 꾸밀 때 만류(挽留)보다는 편드는 쪽에 서 있었다.
정조(正祖)의 어린 눈에도 아비를 죽인 원수(怨讐)들의 눈초리가 이번에는 호시탐탐(虎視耽耽) 자기로 향하고 있음을 감지(感知)한 것이다. 조부인 영조(英祖)는 물론 고모(姑母)인 화완옹주(和緩翁主) ·문소의.... 모두가 자신에게 나쁜 조짐이 나타나기를 고대(苦待)하는 독사(毒蛇)의 눈초리인 것이다. 거기에 모친(母親)과 외가(外家)까지 한 편이 되어서.
정조(正祖)는 이목(耳目)을 닫고 청맹과니 노릇을 하였다.
죽자 사자 학문(學文) 연마(硏磨)에만 진력(盡力)하는 인고(忍苦)의 세월이었다.
「마부작침 (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끈기 」 - 와 「위편삼절(韋編三絶) - 책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갈아 끼워야 했을 정도로 탐독(耽讀)-」으로 메꿔진 세손(世孫) 시절이었다.
「삼년불비우불명 (三年不飛又不鳴)」 -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훗날 웅비(雄飛)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음을 이르는 말 - 이 아니라 14년간의 「절치부심 (切齒腐心) ·와신상담 (臥薪嘗膽)」이 끝나고 조부인 영조가 82세로 졸(卒)하였다.
그 때 정조(正祖)의 나이 25세, 왕대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32세, 모친 혜경궁 홍씨 42세, 왕비 김씨 24세였다.
정조(正祖)는 여타(餘他) 임금들이 학질( 疾)을 떠는 「경연(經筵)」을 임금 스스로 열었다.
홍문관(弘文館) 관원(官員)들이 처음에는 거드름을 피우고 경연(經筵)에 임했으나 정조(正祖)의 해박(該博)한 논평(論評)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나중에는 출강(出講)시킬 관원조차 없었다.
이에 정조(正祖)는 신진사류(新進士類)를 대거 등용(登用)하였고 학문에 통달(通達)한 선비를 중용(重用)하였다.
채제공(蔡濟恭) 이가환 李家煥 정약용(丁若鏞)이 이 부류(部類)에 속하며 이들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시파(時派)가 된 것이다. 비록 서얼(庶孼)이라도 학문만 도저(到底)하면 등용하니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이덕무 (李德懋)등 쟁쟁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경연(經筵)」은 가히 「백화제방, 백화쟁명 (百花齊放, 百花爭鳴) 」의 찬란한 문화의 산실(産室)이 된 것이다. 선비라 하여 어찌 공자(孔子) 왈(曰)만 찾을 것인가? 위의 선비들은 모두 과학(科學) 지식에도 일가견(一家見)을 터득하고 있었음에 다산(茶山)의 거중기(擧重機) 발명과 수원화성 건립(建立)은 한 예(例)에 불과하다.
여(余)가 조선사(朝鮮史)에서 통분(痛憤)하는 대목에 둘이 있으니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요절(夭折)와 정조(正祖)의 급서(急逝)이다. 역시 반도(半島)의 지세(地勢) 중국과는 반대(逆)로 발달하여 요샛말로 치면 「그레샴 T. Gresham」의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 (Bad money drives out good)」는 형세(形勢)인 것이다.
정조(正祖)는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帝國)」을 보면 정순왕후(貞純王后)를 필두로 한 노론(老論)들의 손에 독살(毒殺) 당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평지풍파(平地風波)나 일으키는 오늘의 「통치권자(統治權者)」에게 제발 「경연(經筵)」이나 열어 부족한 공부나 열심히 하기를 부탁하고싶다. 대학에서 신입생들에게 철학(哲學)개론과 문화사(文化史)를 필선(必選) 과목으로 넣은 것은 학문의 시야(視野)를 넗이고 인생(人生)의 목적(目的)을 고뇌(苦惱)케 하려는 목적(目的)에서 이다.
고시생(考試生)들이 하루 종일 도서관(圖書館)이나 사찰(寺刹)에서 끼고 앉은 것은 출세(出世)를 위한 「도구(道具)」일뿐 그것은 독서(讀書)가 아니다. 「통치권자(統治權者)」가 반성해야 할 것은 「제왕학(帝王學)」을 전연 모르던 중종(中宗)의 행태(行態)가 자화상(自畵像)임을 깨닫는 것이다.
첫댓글
권강 소강 처음 들어보는 단이이네요 ~
인상깊은 단어이네요~
어려운 글이네요 ~
새해들어 더욱 건강하시고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2024년 갑진년(甲辰年) 새날이 밝았습니다.
-♥- 2023년 계묘년(癸卯年) 한해 수고많으셨으며
2024년 갑진년(甲辰年)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만사형통하시는 한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