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톨레도 1)
친촌을 빠져나온 차는 독주 하다시피 길을 차지하고 남으로 달린다. 그렇다고 알고 가는 길은 정녕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가다 또 길을 잘못 접어들었다. 상세지도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간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때는 경험이 많다고 해서 해결될 것도 아니다. 지금의 올바른 길잡이는 오로지 좌표가 정하여져 나타난 지도 한 장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서 아랑훼즈 쪽으로 가다 톨레도란 간판을 보면 그곳으로 향하기로 정하였다. 그렇게 정하고 가다 보면 갈 곳이 나오기는 하겠지만 그러하여도 확실한 지도 한 장만은 못하다. 지도 한 장의 간절함으로 무심한 황무지 길을 바라보자니 문득 인간 삶의 목표가 무작정 걷는 길에서 확실한 지도 한 장을 얻으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길 잃은 양은 늘 헤메기 마련이다.
되돌아가는 길의 중간쯤에 톨레도 길이 보였다. 그런 우리는 뜻밖에도 기진맥진한 차에 기름을 붓고 열을 식히려 들른 허름한 주유소에서 상세지도를 발견하였다. 그렇게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이 이름도 없는 황무지의 곳에서 그것도 거저 갖다시피 하다니 맞지 않는 비유인지는 모르나 삶이란 알 수 없다는 말이 이러한 때 또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드디어 마드리드와 톨레도 간에 뻥 뚫린 고속도로를 타고 단 20분 만에 톨레도 톨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좌측 편에 우뚝 선 성채가 뚜렷이 보였다. 톨레도는 역사적으로 볼 때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노송과도 같고 스페인의 역사를 농밀하게 나타낸 나무의 나이테와도 같다. 분재라 보면 또 어떨까. 그곳을 알면 스페인의 역사를 알 것 같고 그곳을 모르면 스페인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는 인구 십만의 중소도시에 불과하지만 그곳 도시의 역사는 서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 전 2세기 로마제국은 풍차로 유명한 라만차 지방을 점령했다. 하지만 저항이 얼마나 거센지 정복자들은 저항의 중심지를 참고 견디어 항복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톨레라륨이라 불렀다고 한다. 톨레도는 그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스페인은 도덕심과 힘을 잃어버린 로마가 쇠망함에 따라 정확히 5세기에 이르러 유럽 북쪽의 숲에서 살았고 거친 생활을 하던 반달족, 수에브 족들의 침입을 받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들은 그렇게 스페인을 거쳐 북아프리카로 건너갔으며 게르만 족의 하나인 서고트 족이 그 뒤를 잇는데 그들은 톨레도를 수도로 하고 5~7세기 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다.
그들은 그렇게 난폭하지 않았으나 현지인들과 상충되는 종교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들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예수의 신성함을 부정함으로서 이단으로 몰려 추방되었던 아리우스교를 신봉하였다. 즉 로마시대 때 이미 전도가 되어 기독교를 믿는 이베리아 반도 인들과 종교적인 갈등으로 통합을 이루어 낼 수가 없었다. 그런 때 톨레도가 역사적으로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레오비힐도라는 왕은 기독교로 개종한 아들 에르메네힐드와 전쟁을 벌여 아들을 죽인다. 그런 레오비힐도는 말년에 들어서 스페인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남은 아들 레까레도에게 개종하도록 명한다. 이에 레까레도는 톨레도 3차 종교회의라 칭하는 589년 때 당시 세비아의 대주교 산 레안드르의 주재 하에 정식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서고트 족들이 이에 따라 모두 개종을 하게 된다.
그간 금지된 타종족 과의 결혼도 가능하게 되어 소수로서 전체를 지배하였던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기도 하는 이 사건은 스페인이 비로소 하나로 통일 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는 톨레도 3차 종교회의를 레까레도의 큰 치적으로 평가를 하며 589년을 스페인 가톨릭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해로 기억을 한다. 이후부터 톨레도 대주교는 중세 이베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7개의 대교구중 교회의 수장으로 간주하게도 된다. 그 무렵 산 레안드르의 형제이기도 한 산 이시도로는 목회자로서 학문에 정진하여 수세기 동안 유럽의 학자들이 공부의 지침이 되었던 어원학이란 저서를 비롯한 많은 책을 펴낸다. 그는 형이 죽자 세비아의 대주교 직을 계승하는데 정신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국가가 교회에 종속되고 세속적인 문제는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균형적 논리가 담긴 책을 저술하여 중세 말까지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 그는 훗날 세비아의 성인으로 추대되고 스페인엔 그를 기리는 성당이 별도로 세워진다.
종교적인 통합을 이루어낸 서고트 인들이지만 그들은 왕위세습제가 아니고 귀족 사이에서 왕을 선출함에 따라 왕위 계승을 할 때마다 유혈투쟁을 겪어야만 했다. 그 결과 3백년의 지배기간 동안 32명의 왕이 배출되었으며 그중 10명은 대치되는 세력에 의해 암살되는 등 늘 혼란하였다. 결국 그들은 자체 분란이 일어나 이슬람세력과 그들과 내통한 자들에 의해 711년 정복되고 만다. 이후 앞서 설명하여 알다시피 722년 코바동가 전투로부터 시작한 국토회복운동은 카스티야 주변의 전 지역을 점령한 나바라왕국의 산초 3세 대왕과 물려받은 카스티야 땅으로부터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을 처음으로 통합한 그의 둘째 아들인 페르난도 1세(재위 1035~1065) 때에 활발히 이루어져 1085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에 이르러 톨레도는 기독교 재탈환이 이루어진다.
그 시기부터 톨레도는 스페인 속의 이슬람 세계라 할 코르도바, 세비아, 그라나다를 중심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는 1492년 까지 교회의 수장으로서 선봉에 서서 맡은 역할을 다하게 된다. 그러기에 스페인에서는 지금도 기독교의 성지하면 톨레도를 꼭 끼어 넣는다. 톨레도를 경계로 남북으로 가르는 타호 강은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그 강을 넘어서면 바로 카스티야가 흔들려 위로 고원지대까지 파고들어갈 수 있으며 그 강을 남하해 내려가면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이라 코르도바에 이르기까지 거칠 것이 없다. 이는 훗날 1934년에 벌어진 내란에서도 톨레도는 마찬가지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점에 1085년 재탈환이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 지점을 차지하기위한 싸움은 그 후에도 계속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기도 한다.
이후 페르난도 3세(재위 1217~1250)에 이르러 카스티야-레온왕국은 완전 통합되면서 톨레도는 과거의 번영과 영광을 안정적으로 되찾는다. 그런 톨레도는 고도로서 기독교 성지로서 전략 요충지로서 뿐 아니라 당시의 중세 스페인 문화를 활짝 피게 한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나는 그들의 역사 속에서 그 점이 아주 색다르고 고귀하다 여기며 그래서 또한 기이하다는 생각도 함께 하게 된다. 페르난도 3세와 그의 아들인 톨레도에서 태어난 알폰소 10세(재위1252~1284)는 그 시대의 암울함을 걷고 중세 스페인의 문화를 활짝 연 현왕들이다. 페르난도 3세는 비록 그의 말년에 코르도바와 세비아까지 쳐들어가지만 유대교와 가톨릭교도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스페인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톨레도는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그 문화가 한껏 꽃을 피우게 된다.
이는 유대인의 높은 자질과도 관련이 깊다. 당시 톨레도를 서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의 아들인 선왕 알폰소 10세는 궁전에 유대인 지식인과 아랍인 통역사 프랑스 음유시인을 불러들여 성경, 코란, 카발라, 탈무드등에서 우러난 종교의 문화를 융합하여 새로운 스페인 문화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 그는 아랍어로 쓰인 문학이나 작품들을 번역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아 고급지식에 목말라 했던 서유럽 지성인에게 많은 자양분을 공급하였다. 당시의 남유럽의 최고 대학은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인데 스페인 최초의 대학인 발렌시아 대학을 바야돌리도로 이전하고 살라망카에 스페인 최고의 대학을 만든 것도 바로 그였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살라망카 대학을 다녔다고 한다. 그런 톨레도는 유대인들과 귀족들의 상권 점령에 따른 횡포를 막기 위해 1561년 마드리드에게 수도를 넘겨주게 된다. 나는 그 점이 못내 아쉽다.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밴 중세 최대 문화운동의 중심지인 톨레도가 뒤로 처지게 되어 그렇기도 하고 종교의 화합과 균형발전의 역사는 지속될 수 없는가 하는 아쉬움을 갖게 하기도 하여 더욱 그러하다. 세 문화가 교차하며 공존 하던 때와 곳은 이곳 말고는 그 이전도 이후도 전 세계 적으로도 없지 싶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을 이끄는 길잡이가 어떤 의식과 어떤 사고로서 안내를 하느냐가 무척 중요하다 싶다. 갈 곳을 모르는 이에게 지도 한 장같은 삶의 지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소중하다. 우리는 지금 그 유구한 톨레도 역사 속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그런 톨레도의 숨은 역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