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다시 생각하게 하는 내포의 이순신 장군
◎ 이순신의 생애
우리나라 국민중 이순신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국민이 인지도는 한국의 대표위인으로 1위가 이순신 장군이다. 우리나라 국민은 그를 가장 존경한다. 그의 생애 54년은 그가 최악의 조건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는 긍정주의자의 화신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1545년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의 몰락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 변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변씨는 현모(賢母) 로서 아들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 기록은 많지 않으나 얼굴 모양이 훌륭하고 기풍이 있었다고 한다. 자라면서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고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또 전쟁놀이를 즐겨하였다 한다.
그는 22세까지 는 별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하였다한다. 선조(先祖)가 문인이었지만 무과를 택했는데 이는 장인 방진과 아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2세 때 무과 시험을 치렸으나 낙방하고 32세때에 다시 도전하여 합격했다. 뒤늦게 무인의 길에 들어섰지만 10년동안 미관말직(微官末職)에서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함경도 동구비보의 군관이 되면서 이순신장군의 명성이 점점 알려졌다. 그는 그곳에서 국경수비를 맡았다. 38세때 무고를 받아 파직되었다. 39세 때 복직해 함경도 권관으로 근무하면서 호적(胡賊)의 괴수 울지내를 잡아드려 양민을 보호했다. 42살 때 조산만호가 되었고 녹도 둔전을 관리할 때 호적의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 수십 명을 구하다 넓적다리에 화살을 맞았습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1591년에 전라좌수사에 올랐다. 그는 왜적이 처들어 올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착실히 전쟁에 대비했다. 기존의 전함을 변경하여 거북선을 만들기도 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이순신 장군 나이 48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왜국 그리고 중국(명)간의 7년간의 왜란으로 조선 역사상에서 가장 참혹(慘酷)한 전쟁이었다. 이순신장군은 그해 5월 7일 수군을 끌고 나가 처음 치른 옥포(玉浦)대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가 그후 이룬 3 대첩은 한산도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 등이다. 1597년 명나라와 왜국의 강화회담이 결렬(決裂)되자 본국에 갔던 왜군들이 다시 침략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이순신장군은 적을 격멸할 기회가 왔다고 기뻐하며 싸움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선조(宣祖)의 무능과 판단 미숙으로 옥에 같이게 되었다. 그는 죽음직전에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후 도원수 권율 막하로 들어가 백의종군하였다.
그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적의 유인책에 빠져 거제 칠전량에서 전멸함과 동시에 자신도 전사하였다.
이 전투로 인하여 이순신장군이 힘써 길러온 수군의 행적조차 없게 되었고 한산도 군비도 흔적 조차 없게 되었다. 원균이 패한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 등 조야에서는 수군을 페하고 육군으로 전쟁을 치르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에 장군은 실망하지 않고 남해둥지를 두루 살폈으나 군사 120명에 병선 12척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이하여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에 앞서 병사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15일 병선 12척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적함 133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것은 다시 통제사로 부임한뒤 최초의 대첩이자 수군을 재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계기가 되었다. 이 대첩은 그뿐만 아니라 육군에게도 용기를 이르킨 쾌거가 되었다. 이순신장군은 1598년1월19일 벌어진 노량해전에서 적군의 유탄을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장렬히 순직하였다.
이순신장군은 ‘23전 23승’이라는 놀라운 전승을 기록하였으며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리더십을 발휘한 영웅이다. 그는 어떤 관점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아도 배울점이 많고 자랑스러운 내포의 큰 영웅이다. 그는 장수요, 경영자요,발명가요 시인이기도 했다
◎ 이순신의 사고방식
이순신 장군의 생애에는 성공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 듯이 절대적 긍정주의자였다.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그는 22세 결심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였다. 진로를 무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6년동안 무과 과거를 준비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4년을 더하여 합격했지만 말단 장교로 최전선을 전전했다. 직장을 세 번이나 잃었고 두 번은 계급장조차 없었다. 그리고 전쟁의 마지막 날에 전사했다. 이순신의 모든 선택에는 시련이 예고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련을 각오하고 선택했다.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 삶의 지혜를 쌓았다. 그가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그가 절대적 긍정주의자이었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왜군에 대패하자 선조는 수군을 해체하려고 했다. 삼도수군 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장군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자신감과 긍정주의로 선조를 설득했다.
“신에게는 전선 12척이 아직도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면 막는다면 오히려 해낼 수 있습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
그런 태도가 임금과 조정 그리고 부하들의 생각마저 바뀌었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긍정주의가 깊이 배여 있었다. 이는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즉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1597년.10월 24일 난중일기)
에 기록된 이글은 명량해전 하루 전날의 절대적인 수적열세 중에서 싸워야 하는 수군 장수들에게 싸움에 임할 때 자세를 당부한 글이다.
여기서 우리의 총체적 난국에서도 고독과 두려움을 극복하여 위기를 돌파해간 그의 위대한 정신을 엿볼 수있다. 그의 긍정주의에 전염(傳染)된 군사들도 이순신과 함께 위대한 승리의 역사를 썼다. 그 결과 패잔병으로 구성된 조선 수군 13척이 칠천량해전에서 승리한 기세를 올린 왜적을 명량해전에서 133척에 대승하였다.
◎ 이순신의 목표를 향한 전력투구
32세에 비로소 무인의 길에 들어선 이순신은 54세의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국가에 충성을 다하였다. 그에 관한 한 가지를 예로 든다면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한 후 조선 수군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조정은 황급히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이순신을 임명했다. 남아있는 전력은 전선 12척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절망하지 않고 이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육로로 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심한 고문으로 심신이 쇠약하여 지친 이순신에게 흩어졌던 병사도 모이고 의병들도 모였다. 이순신은 지방현감을 만나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사용할 무기도 수습했다. 그리하여 모든 기반이 무너진 상태에서 군선 13척과 왜병의 군선 133척이 대결한 명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끌어 냈다. 명량대첩에서도 그는 언제나 앞장을 서서 군사들을 독려하였다.우리는 말로는 최선을 다하라고 하면서도 행동은 빈약(貧弱)하기 일쑤다. 그러니 바람직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 핵심역량 키우기
‘핵심역량’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필수요건이다. 이순신은 장군으로서 필요한 핵심역랑을 튼튼히 했다. 우선 그는 병법에서 기본원리에 충실했다. 병서를 많이 읽어 병법에 있는 선승구전(先勝求戰 )은 기본에 익숙해졌다. 즉 미리 이겨놓고 난후 싸운다는 원칙을 지켰다.
오늘날의 기업도 승리하려면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미리 만들어야 한다. 이순신은 한산도 해전에서 학익진(鶴翼陣)을 써서 왜군을 대파하였다. 그는 자기 군대를 강군으로 만들기 위해 군사들에게 기초훈련을 혹독히 지도하였다.
최초로 화포전술을 고안했는데 왜군과 함포전을 예상하고 그에 알맞은 전술과 함포사격훈련과 진법을 구성하였다. 이로서 군사의 숫자는 열세였지만 전력에서는 강군이었다. 조선 해군의 판옥선은 일본수군의 배보다 훨씬 튼튼하고 강했으며 거북선과 총통도 기능이 우수했다.
정인보(鄭寅普)는 「이충무공순신기념비(李忠武公舜臣紀念碑)」에서 “공(公)은 명장보다도 성자(聖者)이다. 신묘불측(神妙不測)이 오직 지성측달(至誠惻怛)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고 하였고, 천관우(千寬宇)는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 하였다.
이순신장군은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死後)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해전사연구가(海戰史硏究家)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 제독은 이순신장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의 업적은 이순신장군으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이순신장군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이순신장군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이순신장군은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
……중략……영국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순신장군은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 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이순신이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순신장군은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시조(時調)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陣中)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 이순신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여수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賜額), 입사(立祠)되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十景圖)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 이순신을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申采浩)의 「이순신전(李舜臣傳)」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 우리는 지금 국가 지도자들의 뛰어난 지도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현실은 일부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기본인 도덕성조차 의심받는 지도자들도 있다. 이러한 우리 현실을 이순신 장군이 본다면 무엇이라고 할것인가, 얼마동안 ‘도덕성 회복 운동 ’을 종교단체에서 벌리고 있다 .
이런 운동을 하면서 도덕이란 말의 한 측면만을 생각한 듯하다 . ‘내 탓이요 ,’라든지 ~답게 살겠습니다 .등 고백운동 , 자기반성 등은 도덕의 소극적 측면의 자발적 고백운동을 추진 중이다 .양심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도덕의 중요한 원칙이다 .
그러나 양심의 문제가 공개적으로 해결될 성질의 문제인가 ? 그것은 도덕의 생명인 ‘자발성 ’을 오히려 해칠 위험이 있다 .도덕성은 감화력이라는 적극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 식견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감복시키는냐와 얼마나 넓은 범위까지 호응을 얻느냐는 차후 문제다 . 모든 사람 앞에 증명되는 적극적 의미의 도덕으로 이끌어야 한다 .
‘비리척결 ’ '적페청산'이니 하여 내가 다루지 않은 사항은 청산 대상이라고 한다. 그 뒤에는 ‘복지부동 ’ 나오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 잘못을 지적하거나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보여주고 스스로 따르게 하여야 한다 .
우리나라 철학자 혜강 최한기(1803~1877)는 “ 도덕은 크기가 있다.”고 하였다. 일처리(行事)얼마나 많은 사람을 감복시키느냐, 식견이 얼마나 넓은 범위까지 호응시키느냐로 도덕의 크기를 잴 수 있다고 한다. 행동이 사무실안에서만 통하는 것도 있고, 세계인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다.
오늘날 기업이나 개인도 주제파악을 하여 멸사봉공(滅私奉公)의 핵심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어제 오늘도 한결같이 당파싸움만 하여 많은 국민들을 불안한 심정을 유도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서로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없더라도 애국하는 마음으로 분쟁을 거두고 통 큰 정치를 보여 주어야 할 시점이다.
오늘날처럼 일부 지방자치 단체장의 사생활(여자문제)로 시끄러운 시절은 없었다. 인간의 기본도리인 도덕심은 어찌하겠는가? 설령 나는 그것과는 상관없다고 하는 지도자도 있겠지만 이를 세상을 바라보는 평범한 사람의 잣대로 본다면,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야속하고 한심하다.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해이(道德的 解弛)에 대하여 대오 각성이 참으로 필요한 시대다. 참으로 큰 문제다.
이것은 내포를 고향으로 두고 사는 사람의 큰 걱정이다.
첫댓글 네포의 최고 자랑인 이순신장군의 어록을 다시 잘보고갑니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