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울산광역시 처용설화가 서려 있는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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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04:11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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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설화가 서려 있는 울산
경주 남쪽에 울산광역시가 있다. 울산은 본래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으로, 경덕왕 때 하곡(河曲) 또는 화성(火城)이라 하였으며, 1413년에 울산군이 되었다가 1962년 시로 승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다”라고 기록된 울산의 당시 호수는 1,058호이고 인구는 4,161명이며, 군정은 시위군이 16명, 진군이 116명, 선군이 368명이었다. 조선 초기의 학자 권근이 지은 「기」에 “동쪽과 남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 있다 하였고, 하연이 기문에서 “연해는 땅이 기름졌고, 성품이 강하고 굳세어 가히 문치를 일으켜 쉽게 교화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울산 포경선
울산시는 1962년부터 울산공업단지를 조성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울산시에 편입된 장생포는 예전엔 고래잡이의 전진기지였지만 지금은 중단된 상태다.
울산시는 1962년부터 울산공업단지를 조성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울산정유공장과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조선 등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울산광역시가 되었지만 도시가 급속도로 팽창하는 데 따르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일례로 온산공단 부근의 오염도는 전 국민을 놀라게 할 정도로 심하고, 울산시에 편입된 장생포는 예전엔 고래잡이의 전진기지였지만 지금은 중단된 상태다.
처용암
울산은 본래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으로, 경덕왕 때 하곡(河曲) 또는 화성(火城)이라 하였으며, 1413년에 울산군이 되었다가 1962년 시로 승격되었다.
울주군 온산읍 처용리는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처용설화의 본고장이다. 아래 정포의 시에서 노래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섬 속에 비치느니 구름 빛이 따뜻하고, 강에 연해 물맥이 통했어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날 처용 늙은이가 이 푸른 물결 속에서 자랐다 하네. 풀은 치맛자락처럼 푸르렀고, 꽃은 술 취한 얼굴에 머물러 붉었네. 거짓 미친 체하고 세상을 희롱한 뜻 무궁했으니, 항상 춤추고 봄바람을 보내네.
아내의 부정 앞에서도 춤을 추고 노래를 했던 처용의 혼백이 떠도는 울산의 태화강 상류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의 대곡천에는 시공을 뛰어넘어 이 땅을 살다간 공룡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고, 강을 건넌 벽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린 바위그림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그 물길을 따라간 대곡리 서원마실에 반고서원(盤皐書院)이 있다. 고려 말의 충신으로 이곳으로 귀양을 왔던 정몽주는 이곳의 경치에 반하여 정자를 짓고서 제자들과 학문을 닦았다고 하는데, 이 서원은 숙종 38년(1712)에 고을 선비들이 정몽주와 이언유 그리고 정구가 이곳에 머문 것을 추모하여 창건하였다.
그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신석기시대 말부터 청동기시대에 그려진 대곡리 암각화가 있다. 그리고 1억 5천만 년 전쯤에 지구를 주름 잡았던 공룡 발자국 2백여개가 찍혀 있다. 대형 초식 공룡인 울트라사우루스와 중형 초식 공룡인 고성고사우루스, 육식 공룡인 메갈로사우루스 등 공룡들이 이리저리 배회한 흔적이 남아있는 그 건너편 바위가 선사시대 사람들의 자취를 담은 천전리 각석(刻石)이다. 천전리 각석은 일명 서석(書石)이라고도 불린다.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바위 표면에 마름모나 동심원 같은 기하학적인 무늬와, 사슴과 용 같은 동물과 물고기 등을 그렸는데, 어느 때 누가 그렸는지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현재 국보 제147호로 지정된 천전리 암각화에는 신라 법흥왕 12년(525)에 사탁부의 갈문왕이 이곳에 행차하여 새겼다는 글이 남아 있고, 화랑도들이 다녀간 흔적도 남아 있다.
그곳에서 대곡천을 따라 2킬로미터쯤 내려가면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가 절벽에 그려져 있다. 신석기시대 말기를 살았던 우리 선조들이 그린 사슴, 멧돼지 같은 육상 동물과 고래, 사람 등의 그림이 2백 점가량 남아 있다.
한편, 천전리 용화사에는 영험한 미륵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언양관아의 남천(南川) 앞마을에 ‘미륵’이라는 이름의 석불이 있었다. 옛날에 언양고을 관리가 군역을 담당할 장정의 징발을 독촉하자, 마을 사람들이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부족한 인원수를 채워 넣었다. 그런데 군포를 받는 날, 당연하게도 미륵의 군포는 징수할 곳이 없었다. 관리가 마을 사람들에게 대신 내라고 요구하자 사람들이 크게 억울해하며 “부족한 인원수를 메우기 위해 석불을 충당했다가 가난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게 생겼구나”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느닷없이 미륵불의 어깨 위에 몇 필의 무명이 걸려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부처가 은밀하게 도와주어 그 같은 일이 생긴 것이라고 하였다. 양반이라고, 돈이 많다고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고 군대를 가지 않다 보니 군인은 부족해지고 어쩔 수 없이 미륵까지도 군역에 이름을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조선시대였다.
이와는 다른 이야기가 울주군 청량면 동천리와 온양읍 삼광리 고산리 경계에 있는 화장산(華壯山) 또는 다른 화장산(花藏山, 『여지도서』에 실린 이름)에 전해온다.
화장산(花藏山) 산마루에 화장굴(花藏窟)이 있다. 굴 앞에 대(臺)가 있으며, 대 위에 화장암(花藏菴) 옛터가 있다. 민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때 스님이 이 곳에서 불교 단체를 결성했는데, 그 이름을 도화(桃花)라고 하였다. 당시 신라의 임금이 병에 걸렸는데, 점쟁이가 하는 말이 “복숭아꽃이 신령한 약입니다”라고 하였다. 때는 추운 겨울이라 마승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조를 살피는 사람이 아뢰기를 “남쪽 지방에 가면 구할 수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곧바로 역마를 타고 가서 찾아보도록 시켰다. 곧장 이 산 아래에 이르러 멀리서 동굴집을 바라보니, 그 안에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복숭아꽃이 찬란하게 피어 있었다.
그 오두막집에 가서 보니 단지 한 명의 비구니만 보였는데, 몸가짐이 얌전하였다. 이름을 물어보니 비구니가 웃으며 말하기를 “복숭아가 바로 저입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비구니와 함께 빨리 말을 몰아 돌아왔다. 임금이 비구니를 보고 크게 기뻐했는데 임금의 병이 곧장 깨끗이 나았다. 당시 사람들이 이 일을 기이하게 여겨 그 산의 이름을 ‘복숭아꽃을 간직하였다’라는 뜻에서 ‘화장산’이라고 하였다.
굴 안에 돌 틈에서 솟아나는 ‘옥천(玉泉)’이라는 샘물이 있다. 액을 물리치는 기도를 올리는 사람 가운데 더러 몸가짐을 정결하게 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샘에서 구더기 냄새가 난다. 놀러 와서 구경하는 사람들 가운데 몸가짐이 더러운 사람이 있으면 샘물이 끊어져버린다. 그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그 샘을 ‘깨끗한 샘’이라는 뜻에서 ‘염천(廉泉)’이라 부른다고 한다.
한편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大松里)는 대륙과 송정을 한 자씩 따서 지은 이름으로, 이곳에 우리나라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간절곶 등대가 있다. 간절갑, 간절압, 간질끝이라고도 부르는 간절곶은 대송 동쪽 끝에 있으며, 동해안에서 제일가는 돌출지로 알려져 선박 출입 시 항상 조심을 요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간절곶 등대는 새해가 되면 찾아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이곳에는 가수 김상희가 부른 「울산 큰애기」 노래비도 세워져 있다.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애기
상냥하고 복스러운 울산 큰애기
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지만
울산이라 큰애기 제일 좋대나
나도야 삼돌이가 제일 좋더라.
한편 울산시 지역에는 신라의 박제상에 대한 전설이 서려 있다.
신라 눌지왕에게는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 하나는 고구려에, 또 하나는 일본에 볼모로 붙잡혀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였다. 임금은 지모가 뛰어난 박제상에게 볼모로 잡혀간 동생들을 구해오라고 부탁하였다. 박제상은 먼저 고구려로 가서 고구려 임금과 담판을 벌여 임금의 동생을 쉽게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은 고구려와 달랐다. 가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음을 잘 알았던 박제상은 아내와 딸들에게 알리지 않고 율포 바닷가인 강동면 구류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다. 늦게야 이 소식을 접한 박제상의 아내가 울며불며 율포로 달려갔지만 박제상은 이미 떠난 뒤였다.
그날부터 박제상의 아내와 딸들은 박제상이 떠나간 율포 앞바다가 보이는 치술령(鴙述嶺, 해발 765미터)에 올라가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렸다.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처음에 박제상이 떠나갈 때에 그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쫓아갔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만덕사 대문 남쪽 모래밭 위에 이르자 나가 넘어져 목을 길게 놓고 울었으니, 이 때문에 이 모래밭을 장사(長沙, 긴 모래밭)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의 양쪽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돌아오려는데 부인이 다리를 퍼질러 앉아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 땅 이름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부인이 못 견딜 만큼 그 남편을 사모하여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다보고 통곡을 하다가 죽었다. 그리하여 치술신모(鴙述神母)가 되었으니 지금도 이곳에는 당집이 있다.
뒷날 사람들은 박제상의 아내를 치술신모라고 불렀다. 그리고 치술신모를 위해 치술령 기슭에 신모사라는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신 다음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치술령곡」을 바쳤을 것으로 본다. 치술신모의 힘이 매우 영검하여 장마 때는 날이 개기를 빌고 가물 때는 무제(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눌지왕 때 박제상의 아내와 딸들이 날마다 올라가 바다를 보았다는 산마루가 경북 경주시 외동읍 내남면과 경상남도의 경계 지점이다. 박제상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높은 바위에서 떨어져 그의 아내는 치조, 딸은 술조라는 새가 되어 날아갔다고 하며, 그 새들이 날아가 숨은 바위를 은을암이라고 하였다. 다른 이야기로는, 모녀가 치술령에 서서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신모사도 「치술령곡」도 전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처용설화가 서려 있는 울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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