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세월의 나이테 / 박하
마트에 진열된 싱싱한 과일에 시선이 머문다.
불현듯 지난날 과수원 농사지으며 살던 푸른 시절이 영화 화면처럼 떠오른다. 그 추억 속으로 천천히 걸어 가본다.
사과나무가 부란병에 걸렸다. 이 병은 나무가 썩어 문드러지는 불치병으로 사람에 비유하면 말기 암 환자와 같다고 할까. 사과나무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약물을 발라 치료해도 차도가 없어 이를 지켜보는 마음이 아팠다.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다. 수년 동안 정을 쏟았던 사과나무를 파내고 88천 평 자리에 자두나무 묘목을 심었다.
자두나무는 성장이 빠르다. 사월이면 자두나무의 꽃망울이 우유 빛 팝콘처럼 터지고 열매가 방울토마토 크기 정도 되면 적과(摘果)할 시기다, 예닐곱 개 달린 열매 송이에서 두세 개 남겨두고 나머지는 따서 버렸다. 굵고 튼실한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다. 낮은 가지는 적과하기 쉽지만, 높은 가지는 이동식 사다리를 사용했다. 과수원 밭에 떨어진 풋과일들이 초저녁 아기별들이 놀러 온 것 같이 사랑스럽다. 초록 이파리가 넘실거리는 과수원에서 적과하고 있노라면 숲 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도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밭두렁에 앉아서 오후 참을 들며 휴식하는 시간. 언제 나타났을까. 과수원 한 자락 땅콩밭에 수꿩이 늘씬한 자태로 거닐고 있었다. 초록과 남빛의 멋진 자태! 살며시 다가가자 어느새 인기척을 알아채고 푸두둑 날아가 버린다. 더 오래 지켜보고 싶었는데….
우리 과수원에는 자두 품종이 다양했다. 가장 일찍 6월에 익는 올자두(에추)를 비롯해서 늦자두, 부사자두 (후무사), 바나나자두, 피자두 (혹자두), 수박자두가 있다. 과일 껍질이 연하여 만지면 손자국이 남는 부사자두는 하얀 분가루가 묻어 있어야 상품 가치가 높기에 아기 다루듯 조심스레 다루어야 했다. 자두가 익었을 때 올자두와 늦자두는 겉이 빨갛고 속이 노랗다. 부사자두는 겉이 누른 담황색이고 속은 미색이고, 바나나자두는 겉이 노랗고 속도 노랗다. 흑자두(피자두)는 겉과 속이 흑장미 빛깔이다. 수박자두는 익으면 자주빛깔, 속은 진한 빨간색이다. 건장한 남자의 주먹 크기의 부사자두는 최고로 맛있으며 한 개 먹어도 배부르다.
6월부터 자두를 공판장에 출하하는 시기다. 아침부터 우리 부부와 일꾼들은 자두 작업을 한다. 자두를 따서 망태기에 가득 담아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 갖다 나른다. 자두가 산처럼 쌓이면 크기를 상중하 분류하여 상자에 담아 1톤 트럭에 옮겨 싣고 우리 부부는 안동공판장으로 향했다. 그날, 경매 가격이 높으면 생산자는 기분이 좋았다.
자두 전표를 가지고 출납계에서 자두 값 받고, 그 돈 일부분으로 안동시장에서 간고등어를 산 후, 트럭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은 살맛이 나고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과일 공판장에 자주 드나들다 보니 낯익은 장사꾼들이 많았다. 자두 상자를 트럭에서 내려놓자마자, 장사꾼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어떤 상인은 경매도 하지 않은 우리 자두를 자기가 샀다고 우겼다. 아기 엉덩이의 몽고반점을 중국음식점 이름이라고 우기는 아줌마처럼…. 우리 자두를 맛본 사람은 그 맛의 달콤함을 잊지 못했다.
“아지매요, 아지매 자두는 비료 대신 설탕을 뿌렸능교. 우째 이래 달며 꿀맛인교. 그 비결이 어디 있능교. 좀 알면 안 되니껴. 기똥차게 맛있심더”라고 감탄을 연발했다. 자두 맛의 비결은 밭의 물 빠짐이 첫째 조건인데, 우리 과수원은 하천부지를 개간했기에 비가 오면 배수처리가 잘되고, 과수원 주위가 넓은 논밭이라서 자두나무가 일조량을 충분히 받아서다. 자두가 싱겁지 않고 소금도 뿌리지 않았지만, 간이 적당히 배어 있고 달디 달았다. 장사꾼들이 맛본다며 어른 주먹 크기의 자두를 한두 개씩 집어가니 가득하던 상자가 금세 줄어들어, 생산자인 나는 애간장이 바짝 탔다. 공판장 측에서 생산자의 심경을 헤아렸는지 ‘남의 과일 손대지 않기’라는 플래카드를 달아놓은 후로는 상인들이 과일을 함부로 갖고 가지 않았다.
자두가 한창 성수기 때에는 자두 한 상자 20킬로 가격이 시금치 한 단 값에도 못 미쳐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자두 농사를 지으며 터득한 것은 품질을 개선하여 품귀현상일 적에 공판장에 팔아야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여섯 살 딸아이는 자두나무 아래로 가서, 까만 눈망울로 자두나무를 쳐다보며, “아빠, 아무에게도 자두 팔지 마세요.” 말하며 제 아빠에게 간청한다. 어린 소견에 자두가 다 없어질까 걱정이 되나 보다. 아이 아빠는 빙그레 웃으며 “제일 좋은 자두나무는 별도로 남겨둘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자, 딸아이는 안심했는지 방긋거린다.
칠월에는 자두 향기가 과수원에 진동했다. 음료수를 사 먹지 않는다. 밭에 지천으로 깔린 과일을 압력솥에 넣고 끓여 고운체에 거르면 천연 과일즙이 되어서다.
여름철, 대낮에 시원한 소나기 한차례 지나가면 서쪽 하늘에 일곱 빛깔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는 기쁨으로 설레게 하고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금성산 너머로 자두 빛 노을이 곱게 물들면, 우리 부부는 딸아이와 함께 과수원을 산책했다. 커다란 인형을 안은 딸아이 뒤에는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가 따라오고, 밭두렁에는 강아지 꼬리를 닮은 강아지풀이 산들바람에 하늘거리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내 젊음의 꿈과 열정을 쏟은 나무의 푸른 숨결이 들리던 과수원!
그 수많은 날은 어디로 갔을까. 아내를 끔찍이 아껴주고 딸 ‘보라’를 귀여워하여 ‘꽃보라’라고 불러주던 남편도 벌써 20여 년 전 하늘나라로 갔고, 어린 딸도 자라서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결혼하여 아들 셋 둔 행복한 엄마로, 학교의 가정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매일 딸의 집 살림을 도맡아 해주고 사랑스러운 외손자들을 돌보며 틈틈이 글을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
가버린 날을 추억하는 것은 나이 탓일까. 나에게 추억은 소중하며, 삶을 건강하게 해주며 기쁨과 새로운 힘을 샘솟게 한다. 늘 그렇게 살아왔듯이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한다.
과수원에서의 자국 없는 작은 발자취가 아름다운 추억에 잠기게 해주었다.
세월의 나이테를 반추하며 내 마음의 초록 강물에 하얀 조각배를 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