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제목 : ※※ 이중인격 황녀, 그의 수렁에 빠지다! ※※
작가명 : 비휴
E-mail : be_rain624@hanmail.net
연재장소 : 10대‥ 새싹소설방①
총편수 : 총 25 편 완결
장르 : 로맨스/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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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팬까페 : 위드비휴WITHBHUE: http://cafe.daum.net/Bhue
'......전해라. 난 바보가 아니라고- 좀 더 그럴듯한 일을 하라고 말이다.'
"하하하하!"
유쾌하게 웃는 내 모습을 의아한 듯이 쳐다보는 사내들. 피투성이인 너희 모습을 보면 조금
미안하긴 하다만, 그녀가 그렇게 쉽게 알아챘기에 망정이지- 그녀가 정말로 둔했다면 너희
의 목은 날아갔을 수도 있다구.
"대단하지. 그렇지?"
".....네. 덕분에 죽을뻔 했죠. 황녀가 무슨 청룡회주인거예요? 솔직히 말해보세요. 주군은 알
고 계셨던 거죠?!"
"뭐, 그녀에 대해 내가 모르는게 있어서는 안되는거니까."
"그런데 왜 말 안해주신거예요!!! 진짜로 죽을 뻔 했어요!"
"그런 것들이 달려들어봤자 너희는 죽지 않았을테니까- 그녀도 그렇게 말했잖아?"
'.......저들은 너희들에게 쉽게 당할 정도의 약한 자들이 아니다. 다만 당해준 것이지. 잡히기
위해서.'
그녀의 머리는 실로 대단했다. 이 내가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로. 그녀는 나의 부하 두명을 보
고 모든 상황과 그 속에 숨겨진 일들까지 알아챘다. 그 머리를 어떻게 지금까지 숨기고 살아
온 거지? 빛나는 사람은 어떻게든 빛이 나는 법인데. 뭐, 밀고 당기는 고도의 심리전- 쯤 되
는 것인가? 그녀의 주변인, 즉 청룡회의 간부들과 차기 재상인 신민형...정도만 그녀의 신분
을 파악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막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고. 심지어 학교에서도 멍하기 이를데 없는 멍청한 자폐아로 보이고 있었다. 황
녀임이 들통나지 않았을 때에도.
그리고... 그녀는 오래전 부터 주위를 멤도는 내 존재를 알아채고 있었다.
"이봐, 거기 있어?"
움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별 볼 일없는 황녀따위가 나의 은신술을 간파했을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나무 위에 숨은채로 더더욱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녀는 정확히 내 쪽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거기- 너 말이야. 숨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너, 벌써 10일전부터 내 주위를 멤돌고
있잖아. 나에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을테니까 이만 돌아가. 황태자는 현 황태자
인 이환영이 될 것이고- 황제의 자리에는 어떻게든 그가 오르게 될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거
거든."
....당황. 그녀는 보이지도 않았던 내가 '그림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또, 내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았던 걸까... 10일전부터 알아챘다면서 왜 지금에서야 말하는 것일까... 아무
튼 그녀가 범상치 않은 존재임은 그때 이미 깨달았었다.
그녀의 그런 친절한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그녀를 쫓아다녔다. 그 후로 일주일 쯤 지났을까... 테라스 곁에 있는 나무에서 그녀의 움직
임을 살피고 있는데, 그녀가 편한 복장으로 테라스에 조심스럽게 나왔다.
"어이- 지겹지도 않아? 하하. 날 쫓아다녀봤자 볼 건 별로 없다구. 특히, 지금 가는 곳은 더
더욱."
그러나... 나는 해야 한다. 기필코. 의무가 있단 말이다. 내가 하기 싫다고 해서 하지 않을 수
있는게 아니라구.
"그런 의미에서, 조금 쉬어-"
.......그 후로는 기억이 전혀 없다. 깨어났을 때 나는 이미 집으로 옮겨진 상태였고- 다친 곳
도 없이 멀쩡했다. 더더욱 신기한 것은 내가 들어온 것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 그러면 나를
데려다 준 것은 황녀, 아니면 청룡회라는 소리다. 결론만 말하자면,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 만큼, 그녀도 나에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
예상컨데, 나는 수면향에 당했던 것 같다. 최근 조사한 결과로는 청룡회의 창고에는 수십, 수
백가지의 독약과 수면향, 마약등이 들어있다고 하니까.
이것도 추측이지만, 그 날- 그녀는 아마 청룡회의 본부에 가는 길이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날, 황제의 다섯번째 후궁과의 결혼식이 청룡회에 의해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말이 한창 떠돌았거든.
"아무튼, 그녀는 대단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그렇지만 그녀의 의사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 인데... 흐음, 그렇지만 이미 내 선택은 그
쪽으로 기울어 지고 있었다.
"앞으로- 더 재밌겠는 걸?"
"내일부터 시험인 것 다들 알고 있겠지요? 이번 시험이 끝나면 곧 기말고사고- 시험이 끝나
면 방학이니, 너무들 힘들어하지 말고 '곧 방학이다' 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세요!"
"곧 방학인게 몇달뒤야- 어후."
"난 아직 암기과목 공부 하나도 못했는데."
"언제는 했냐? 쇼하지말고 벼락치기나 잘 해봐라."
"맞아, 너는 외워봤자 시험 볼 때 되면 다 잊어버리잖냐."
"야!!!"
소란스러운 반 아이들을 둘러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망칠 수 없는 첫 번째 시험. 여지껏
답이 아닌 것만으로 찍어서 올 0점의 수준이었는데... 갑자기 점수가 좋아지면 의심이나 안
받을까 걱정이네. 하긴, 이제 황녀라는 것이 다 알려져서 별로 건드릴 인물들도 없겠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몸을 늘어트렸다. 점점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장마가 시작되면
비가 내리겠지... 그 때가 되면 황태자 선택이 끝날테고, 또- 그 때가 되면 이 한제국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무것도."
"너도 시험 걱정을 하는 거야?"
"아니."
그래, 나는 그렇다고 치고- 너까지 너무 걱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냐? 생각해보면 네가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수업시간에 필기하고 칠판도 열심히 보는
척 하더니... 종이에 펜이 쓰고 있는 것은 '지랄, 염병, 쇼하네' 등등의 욕뿐이었단다. 넌 귀족
이라는 게 어디서 그렇게 욕을 많이 배운거야?
라고 말하고는 싶었으나...
"오빠- 저 이 문제 좀 가르쳐주세요-"
살살 웃으며 신우에게 다가온 한 여인네의 말에 녀석 역시 실실 웃으며(다른 여자들에겐 너
무도 매력적인 웃음이었겠지만) 문제를 유심히 보더니 1분도 채 되지않아 펜을 잡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래... 공부 잘하는 거였구나... 그것은 공부를 잘하는 자의 여유였던 거지.
"우와, 오빠 진짜 공부 잘한다. 이번 전교 1등은 문제 없겠는데-"
"하하, 복학이니까 당연하지."
"들어보니까 오빠 1학년 다니고 복학한거라면서요. 그럼 2학년꺼는 처음배우는 거잖아요-
아, 우리 신우오빠는 겸손하기도 해라-"
그러니까, 그 신우가 왜 너희 '오빠' 인 거냐... 그 빛나는 두 눈... 뽑아버리고 싶어. 우욱. 올
라와-
내가 창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쏠리는 듯한 모션을 취하자 창에 비친 신우의 눈이 반달모양으
로 휘어졌다. 그리고는 여학생을 자기 자리로 돌려보내고 작게 한다는 말이...
"질. 투. 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다 그 모양이냐.
"걱정마, 이래뵈도 양다리는 안 한다구."
"환희야!"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환영이를 슬쩍 바라보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얼마만
에 궁에서 공부를 하는 건지...
"공부해?"
"응."
"그러고보니 곧 중간고사네."
"응."
"그런데... 너, 어제-"
아아, 황태자 수업으로 바쁜 환영이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정도라면, 분명히 작은 아버지
라는 작자에게 뭔갈 들은 모양이었다. 물론, 사실과는 99% 과장되었겠지만.
"나디르 공작가에 갔었어?"
"응."
"...누구와?"
"....학급 동료."
이자, 현재 말도 안되지만 어쨌거나 애인.
"학급 동료...라고?"
"응."
"친구야?"
"아니."
친구는 아니고 애인이야.
"....후우. 알겠어. 그런데... 어째서 작은 아버지는 그런 소리를 하신거지?"
"무슨...이야기를 했는데?"
"아아, 아니. 별 것 아니야. 공부는 잘 돼?"
"그럭 저럭..."
환영이에게 대충 대답을 해주며 책을 덮었다. 환영이 앞에선 평범한 고등학생일 필요가 있는
데-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책은 고등학생과는 전혀 별개인 책이니까.
"도저히... 마음이 놓이질 않아- 너도 그냥 학교에 안가면 안되?"
내 머리를 만지며 환영이는 그렇게 말했다. 학교에 가지 않으면...? 이 답답한 곳에서 숨이
막혀 죽어버릴지도 모르는데? 끔찍한 악몽에 잠도 제대로 못자는 이런 곳에서... 한시도 나
가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것 같아?
"괜찮아. 난 너처럼 여기서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니
까... 학교 수업이라도 들어야지."
물론 수면을 섭취하러 가는 것뿐이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렇지.
"그럼, 나랑 같이 수업들을래?"
"그렇게 어려운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괜찮으니까, 걱정마. 민형이도 있고."
"......"
무엇인가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환영이. 그렇지만, 다 맞는 말 뿐이니 지가 어떻게
하겠어- 후후. 도대체 뭐가 걱정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궁에 쳐박혀서 살기 싫은
건 사실이야.
"알겠어- 이번 주말에 시간 있지?"
"...아마도."
"그럼 같이 드라이브라도 다녀오자."
"응."
환하게 웃으며 '그럼 다시 올께' 라는 말을 남기고 천천히 자신의 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환
영이... 후우, 저녀석은 도대체- 우리 둘의 외출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서 그러는 거
야? 아니면 알고도 저러는 거야?
"민형- 신민형!"
"아아, 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민형이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고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무튼!
저건 꼭 환영이가 있을 때에만 깍듯하다니까!
"주말에 환영이와 나가게 될 것 같으니까- 단과 몇명을 더 대기시켜줘."
"아아- 또 나가?"
"왜, 띠꺼워?"
"아니야. 아니지. 당연히 아니고 말고."
....역시... 교육이 잘못되었어. 처음부터 교육을 잘 시켰어야 하는건데. 후회가 막심하다.
"이번 주말에 시간있어?"
"환영이와 약속있는데."
"이..환영? 황태자?"
"응."
"왜?"
"...왜긴 왜야. 내 동생이니까-"
"아~ 너 황녀였지. 게다가 그녀석의 누. 나. 겉보기엔 니가 동생인데..."
피식 피식 웃으면서 말하는 신우. 지...지금 이거... 비웃는 거 맞지...?
"...신경꺼-"
"애인의 일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써."
진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신우는 내게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데이트 해야지. 주말에- 나도 간다."
........나야 상관없지만... 환영이가 가만히 내버려 둘까...?
"이환영이라면 걱정하지마. 그 녀석은 나를 막을 권한이 없으니까 말이지."
"...?"
....무슨 소리야? ...너-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던 거야? 레드폰가- 라는 말에서 이
미 대략 짐작은 했지만... 그 집은 외아들을 두고 있으니까... 레드폰 공작이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들이. 청룡회의 정보로 의하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입양아라고 하던데- 그럼 진짜
아들은 어디다 버린거지? 진짜 아들이 있기는 확실히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아이를 낳는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신전으로 잠입했을 때에 신관자격
으로 공작부인의 곁에 있었으니까.
아아, 이상한데로 말이 샜지만... 어쨌든... 레드폰 가의 영향력이 크긴 하지만 천하의 황태자
를 어떻게 할 만한 능력은 없을텐데...
이런 내 생각을 또 읽기라도 한 듯, 한신우는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웃긴놈... 정말... 너의
생각을 모르겠어. 어쩌면... 그래서 내가 너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일지도.
"그나저나, 시험은 어때? 잘 본 것 같아?"
"대충은."
"흐음, 모르는 문제가... 있기는 있었냐?"
"아마도... 없는 것 같은데..."
"...잘봤군."
흐음... 잘... 본 건가?
"시험 결과가 나왔습니다."
"어우-!"
그로부터 대략 일주일 후. 시험 결과가 나왔다.
"전체석차는 1학년 게시판에 붙여져 있고, 성적표에는 반석차만 적었어요. 그리고... 이환희"
"......"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할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이번 시험... 굉장히 잘 쳤군요. 올 백으로 전교 1등입니다. 모두 박수-"
라고는 했지만 ... 박수를 치는 사람은-
착한 척 하고 있는 한신우와 담임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의심의 눈초리를 나에게 던
지고 있었다. 그래. 컨닝을 했느냐 안했느냐가 너희의 관심사겠지... 그러나... 우리 학교의
시험 구조는 시험볼 때 절대 컨닝을 할 수 없단 말씀. 무작위로 뽑아서 들어가는 시험장인데
다 1,2,3학년 모두 섞어서 보기 때문에- 내 주변엔 2,3학년들만 있었으니까. 물론, 민형이가
일부러 손 쓴 것이 분명하지만.
"축하해요. 앞으로 더 분발해주세요-"
"......"
끄덕,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울한 하늘... 하늘 참 더럽게
깨끗하다. 기분나빠.
순간, 창으로 비친 신우의 얼굴에 서늘한 냉소가 떠올랐다.
빠르게 신우의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녀석은 그냥 빙긋 웃으며 평소와 다름없이 말했다.
"왜- 벌써 내가 보고 싶어서?"
.......잘못봤겠지. 그래... 잘못봤을 거라고 믿는다. 만약... 네가 이 내 믿음을 배신한다면...
그때는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몰라... 이건... 충고가 아니라, 경고야. 한신우.
"....전교석차 1등, 이환희-"
"이환희...이환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제 1황녀야."
"아아, 맞아. 황태자의 쌍둥이라고 했던가."
"...응. 일본에 왔었으니까... 알고 있어."
"그럼 너도 알겠네, 키리모토?"
"당연히- 후후. 만나기만 해봐라. 그간의 밀린 것들을 모두 풀고야 말테니!!"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이동하려하는 데, 1학년 게시판이 붙어있는 곳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모
여있는 것을 보고 석차를 확인하려나보다- 하고 지나가려는데,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
리...그리고 내 이름이 언급되는 대화를 듣고 멈추고 조심스럽게 그 말을 들었다.
"야, 야, 왜그래? 이환희!!"
크게 내 이름을 부르는 한신우의 입을 황급히 막고 빠른 걸음으로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저것들은 왜 여기있는....... 아아, 유학온거였지. 보통학교에 다닐 일은 없으니 이 학
교에 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하긴 시험 잘보라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
"환희?"
".......어? 저깄다!"
그런데... 도대체 키리모토는 왜 여기 있는거냐고! 저 녀석은 왕세자도 아닌데! 키리모토는
멀리서 뛰어와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니, 나에게 거의 매달리는 수준이었지만... 아아,
어렸을 때는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 운동을 많이해서 그런지 근육이 붙
은 팔과 구릿빛 피부. 거기다 동글 동글했던 얼굴과 눈은 날카롭게 바뀌어져 있었다.
"희쨩!"
"그 딴식으로 부르지마!"
"헤에, 역시 희짱이 맞잖아-"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마."
"자, 승부다!"
내 예상대로 다짜고짜 나에게 검을 검집채로 들이대면서 말하는 키리모토. 나와 키리모토는
사무라이 가에서 같이 검을 배웠다. 일찍이 키리모토는 무에 관심이 많았고 나 역시 스스로
를 지키기 위해 최고가 되고자 했으니까.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에는 나보다 키리모토가
월등히 뛰어났다. 아무래도 일본사람이고, 남자이니 감각이 더 좋았는진 몰라도- 나와 비교
해서 키리모토는 정말 감탄사가 나올만큼... 뛰어났다. 하지만, 오기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나 역시 만만치 않았고- 밤낮을 밥만 먹고 검만을 쥐고 산 결과 나는 당시에 왕자수업
을 받으며 검을 배웠던 키리모토를 훨씬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 후로 종종 키리모토를 놀려주려고 대련을 신청했고, 결국 모두 키리모토의 패.
그것에 한이 맺혀 내가 다시 한국으로 올 때까지도 '다음에 만나면 꼭 이길거야!' 라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후우, 여기선 곤란해."
"어째서?"
"보는 눈이 많으니까."
"일본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볼 때에도 했잖아."
"그때는 그때고, 게다가 그건 사부님과 사무라이 가문의 훈련생들이었잖아."
"그게 뭐 어때서."
지금은 상황이 틀리잖아 바보야... 이 바보를 어찌해야 할까... 지금 진검승부를 일반 학생들
이 있는 곳에서 하자는 말이냐?
"...아무튼 안돼. 나중에-"
"나중에 언제?"
"다음에."
"그러니까 그 다음에가 언제냐고!"
"곧. 그런데 넌 왜 여기있는거야?"
"응? 나야 당연히 류이치를 따라왔지!"
"류이치? ... 아아. 류이치."
나는 힐끔 시선을 돌려 옆에 서있던 류이치를 바라보았다. 지적...이라는 말이 정말로 잘 어
울리는 듯한 외모.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자같은 외모임은 여전했지만... 그때보다는 훨
씬 남성스러움이 짙어져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군요."
"아아, 그래."
"이거 이거, 저는 안보이십니까- 황녀님?"
"당신도 안녕하지?"
"물론이지요"
왕세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는 옆에서 멀뚱 멀뚱 서있는 한신우의 팔목을 붙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이 녀석들과 길게 있어봐야 그다지 좋을 것 없을테니... 빨리 헤어지는 것이 상책이
었다.
"잠깐! 오랜만에 만났는데 식사라도 같이 해야지-!"
"나중에- 그리고... 앞으로 자주 볼텐데 뭘그래?"
...그러나 이 막무가내 왕자들은 내 말을 무시하더니 조용히 내 옆에 와 섰다.
"..... 무시하는거냐?"
"설마- 내가 환희님을 어떻게 무시하겠어? 하하."
"키리모토."
"알았어. 장난 안칠께- 그치만... 우리 돈이 없어서 말이야. 항상 옆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있
다가 없으니까. 하하. 그러니까 한끼만 사줘. 나 배고파."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예의없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거기다... 한신우랑 먹는 것
도, 아니 내가 식당에서 먹는 것조차도 주목받는 이 상황에... 이런 녀석들이 더 달라붙으면,
후우... 생각하기도 싫군.
"돈 줄테니까 떨어져서 먹어."
"에? 어째서? 여기 이 사람과는 같이 먹을 거잖아."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야."
"싫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럴 수는 없지."
빙긋 웃는 키리모토의 얼굴이 어쩐지... 한신우의 얼굴과 겹쳐 보이는 이유는...뭘까?
"...어째서. 키리모토...전하께서 여기 계신겁니까?"
"민형! 오랜만이야."
".....그러니까... 왜 여기계신거냐구요."
나만큼이나 키리모토를 발견하고 놀란 듯한 민형이. 흐음, 결국엔 이 녀석도 모르고 있었다
는 건데... 민형이가 모를 정도로 조심스럽게 이곳에 왔다면... 혹시 일본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걱정마, 걱정마. 걱정할 만한 일은 없으니까. 간단한 가정사라고나 할까..."
가정사...라.... 알만하군. 일본이란 원래 그런 일이 흔해빠진 나라니까. 그렇지만 제국으로
피난 올 만큼이면... 이번엔 심각한 모양이네... 하긴, 왕이 류이치를 왕세자로 전면에 내세웠
으니까... 마음이 급해졌겠지. 후우, 멍청하긴. 그 왕은 잘나가다가 하나씩 실수를 한다니까.
"그 놈의 가정사는 류이치가 왕이 되면 끝나려나."
"아아, 아마도. 그 때쯤이면 우리 다음대의 가정사가 시작되겠지. 하하, 그렇지만 류이치는
아바마마보다 바람끼는 없으니 복잡한 가정사가 형성되지는 않을 거라고 봐."
"...형."
"알았어, 알았어. 자제할게. 하하. 그나저나, 환희는 어떻게 지냈어? 그동안 실력은 많이 늘
었겠지?"
"아아- 나도 그놈의 가정사때문에..."
뭐, 심각하다면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는 가정사지... 후후.
"그렇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없어. 어쨌거나 그동안 맺힌게 많으니까."
"그래 그래, 마음대로 해봐."
"아, 그런데- 나 아까부터 묻고 싶은게 있었는데... 물어봐도 되?"
"대답여부는 질문을 듣고 결정."
"별로 어려운거 아니야- 그냥.. 왜 학생들이 우리를 보고 이상한 표정을 짓느냐는 거지."
당연히 그렇지. 어쨌거나 잘생긴 외모를 가진 네 남자, 아니 민형이까지 다섯남자. 그 사이에
서 이 학교의 소문난 자폐아(이제는 아니지만)가 끼어있으니... 그럴만도 하지.
"신경꺼."
"응."
...너무 간단하게 대답하는 군.. 아아, 이런게 익숙해야 하는데. 왜 이런 게 오히려 어색한거
야!! 내 주변엔 왜 이렇게 기어오르는 놈들이 많았던거야.. 아아, 새삼스럽게 감동이구나.
"....그런데, 제국도 요즘 그렇게 조용한 것은 아니던데-"
"아아, 조금."
"흐음, 여기 오기 전에 황태자님을 만나서 들은 얘기로는... 청룡회 척살령을 내릴 거라던데."
"뭐?"
"일단 가장 후방의 청룡회부터 없애갈거래. 대외적으로는 화룡파의 공격인 거라고 하던데...
그새 화룡파라는 파가 생긴거야?"
...........이런...벌써 시작인가? 멍청한 녀석.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렇게 된 이상... 피할 수는 없을텐데요."
진지한 표정으로 수진이 물었다.
"까짓거- 한판 붙죠!"
잔뜩 찌푸러진 표정으로 단이 말했다.
"미쳤어?! 상대는 제국이야!! 대륙을 통일한 제국이라구!!"
드물게 수진이 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아니, 청룡회는 평민들을 도와주고 있어. 그러니까 제국이 괜히 나서서 반감을 사거나 할리
가 없어. 황태자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으니까! 제국군을 쓰지는 않을거야. 대신... 화룡파라
는 의문의 조직을 이용하겠지."
또 다시, 드물게 단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 가볍기만 했던 녀석에게는 큰 변화였다.
"회주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주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엔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그에 따른 내 대답은.
"제 1, 2본부를 제외한 모든 곳에 대피령을 내린다. 제 1,2본부는 전쟁 준비다."
물론... 전쟁이 일어날 리는 없지만, 미리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지. 환영이는 때로 내가 생
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할 때가 있으니까. 아무리 쌍둥이라도- 아무리 내가 머리가 좋아
도........ 후자는 생략하기로 한다. 흠흠. 아무튼... 녀석은 가끔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
각한다. 굉장히 엉뚱한 것을... 고로... 준비는 해야겠지.
"회주!! 안되요. 틀림없이 전멸할거예요!"
"너의 데이터가 틀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준비는 해야해."
"그래, 싸우는거야. 싸워서 이기는 거지!"
단은 흥분된 표정으로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환영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라도 할 듯한 호기
어린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반면 수진은... 화가 났는지 문을 쾅닫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도 너만큼이나 걱정되. 내 사람을...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죽게만들 만큼 바보는
아냐. 비록 지금 이렇게 바보짓을 하고 있지만... 난... 나로 인해 누군가를 죽게 만들 만큼 바
보는 아니다. 뒤돌아보고 후회할 짓같은 거... 난 안해.
"단, 흥분하지마."
".....예."
아무도. 아무것도. 그냥 하늘만. 하늘과 땅만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런... 생각없이... 평생을
따듯한 땅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 볼 수 있다면.
"오늘 저녁, 파티가 있습니다."
"환영이는?"
"황태자 전하께선 갑자기 일이 생겨서 중국으로 가셔서 참여하지 않으십니다."
"...그럼.. 안 가."
"예."
짜증스러움이 온몸에서 베어나는 하녀. 아아- 미안하다구. 나도 짜증나. 권력에 몸을 기대는
황녀라니. 거기다 멍청한 세상물정 모르는 아. 가. 씨. 라니... 내가 제일 혐오하는 스타일이
군.... 아니아니, 이걸 납득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가봐."
"예."
"아, 그리고 곧 민형이가 올테니 차를 준비해."
"예, 그럼 그 분이 오시면 바로 들이겠습니다."
"그래."
귀찮은 듯한 제스쳐를 취하며 하녀에게 말하자, 그 여자는 한번 더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
고 휙하니 몸을 돌려서 자리를 피했다. 아마 환영이가 있었다면 저런 행동을 하지 않을테지..
아아, 민형이가 있어도 안하겠지. 저 여자는 민형이를 짝사랑하고 있으니까. 물론 스스로는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설마 모를까.
하녀가 나간 후 나는 전화를 걸었다. 기대에 부흥해 줘야겠지? 후후.
"민형? 나야. 잠깐 와."
[ 왜? 설마, 파티에 가는 거야? ]
"파티? 당연히 안 가지"
[ 그럼, 왜? ]
"오라면 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 쳇, 알겠어. ]
하여간... 그냥 내버려 두는 건데!! 차기 재상 자리를 준게 누군데 이렇게 기어오르는 거냐
고!! 은혜를 몰라도, 너무 몰라.
10분쯤 지나고 민형이가 내 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아까의 그 하녀가 쪼르르
차를 들고 따라왔고... 민형이는 그런 그녀를 힐끔 바라보더니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뭐야, 너."
"..예?!"
"뭐가 마음에 안드냐? 어디서 그런 눈을 하는 거야! 네 앞에 계신 분이 누군지는 알고 있어?"
"..죄.. 죄송합니다."
꼭 지는 안하면서 남들이 그러면 화내더라. 너는.
"됐어.. 차나 마셔."
나는 무심코 내 앞에 있는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멈칫, 하는 내 모습을 보았는지 찻잔을 든 민형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너무 뜨거운 것 같아서 조금 식혔다가 먹으려고."
"그래?"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내가 내려놓은 찻잔을 들고 살짝 향을 맡는 민형이... 그래. 그
거다. 후후.
".......이거, 탄 사람 누구야."
"예?"
"당장 데려와. 아니, 너도 여기 있어. 어째서 내 것에서는 냄새가 안 났는지... 그건 네가 알고
있겠지. 이봐, 밖에 누구 있어?!"
......누굴 바보로 아나, 하하. 어떻게 차에서 이런 어지러운 냄새가 날 수 있지? 병신들... 아
무리 바보여도 이 정도는 알아. 하물며, 천재적인 내가 모르겠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
록 해주마.
"절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뭔가 잘못 아신 것이 아닙니까?"
"......"
민형이의 오른쪽 눈썹이 살며시 올라갔다. 그리고... 정말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화를 간신
히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내가... 이렇게 지독한 독약을 못 알아챌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 어디서 죄를 지은 자를
감싸고 도는 거냐!!!! 다 같이 죽고 싶은 모양이군."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옆에 놓인 작은 화분에 차를 쏟아붓자 얼마나 독한 약임을 선명하게 보
여주듯 약이 닿은 연한 잎사귀는 벌써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그에 우리 앞에서 엎드리고 고
개를 조금 올려 말하던 하인들의 눈이 조금 커지며 우리가 범인으로 지목한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차를 따랐던 여자 시녀는 이미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고, 차를 탔다던 시
녀는 조금의 미동없이 묵묵히 고개를 쳐박고 있을뿐이었다.
"그만둬, 민형."
"...전하."
오랜만에 민형이의 입에서 '전하'라는 존칭어가 나왔다. 새삼 감동스럽군.
"아닐거야. 아니라잖아."
"그 말을... 믿는거야?"
"아니라는데... 믿어야지."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예요! 분명 누군가의 모함입니다!"
저 하인들이 의기양양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바보같아서이겠지. 그렇지만...
"다들 나가."
"예."
...너희들의 운명에는 변함이 없단다.
그들이 모두 나가고 나는 민형이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죽여."
"...후우."
"절대, 이런 일은 꿈도 꿀 수 없도록. 그리고 모든 하인을 바꿔. 최소한의 인원으로. 별로 필
요도 없으니까."
".....또야?"
"소문은 내가 알아서 내주지. 아니, 굳이 낼 필요도 없이 나겠지만."
"...난 이 자리가... 불편해."
"그렇지만, 미래의 너에겐 좋을거야. 차기 재상이라니. 대단하지않아?"
"네가 욕을 먹으며, 그에 비해 무척이나 뛰어난 비서관... 이라는 이름으로 얻은 자리따위, 탐
나지 않아."
"그렇지만 네가 원하던 거였잖아. 네 아버지가 원하는 일이기도 하고."
나는 그들에게 속아넘어 갔다. 그러나 뛰어난 비서관인 신민형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뛰어난 충성심을 가진 그는 황녀모르게 복수를 해준다. 그것은 귀족들에게 퍼져나갈 것이고
그의 충성과 뛰어난 능력은 인정받을 것이다. 그것은 민형이와 내가 만난 이후로 계속 되어
온 일들이었고, 덕분에 신민형이라는 이름은 차기 재상자리에 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었
지. 물론 그 속에 숨겨진 사실은 소문과는 많이 달랐지만.
"....난...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난 행복해. 환영이처럼 바쁘지도 않고, 느긋한 일상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아무에게도...관
심받지 않고. 있는 듯, 혹은 없는 듯."
'...그렇지만, 미래의 너에겐 좋을거야. 차기 재상이라니. 대단하지않아?'
'난 행복해. 환영이처럼 바쁘지도 않고, 느긋한 일상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아무에게도...관
심받지 않고. 있는 듯, 혹은 없는 듯.'
그녀의 말이 내 머릿속에 울렸다. 어딘가 핀트가 어긋났다고 생각했던 것을 드디어 깨달았
다. 무엇인가 빠졌다고 생각했던 것... 바로 이것이었지.
"...그녀는...스스로의 행복을 참을 수 없는 것...이었나."
행복하다, 행복하다. 말하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위안일 뿐... 제국을 증오하고 또 없애버리
고 싶다고는 했지만...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었고, 제국의 백성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여자였
으니 제국민이 노예로 전락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그녀는 정말로 제국을 없앨
생각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황제가 되기는 싫고 하니까, 그 모든 것을 이환영이라는 자
신의 대리에게 맡겨버리고는 자신은 잠적하려는 속셈...이라고나 할까.
"하하, 더 마음에 드는 걸?"
"주군. 저러다 진짜 죽이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 녀석, 그래도 꽤 영리한 놈인데."
"필요없어. 마음에 칼을 품은 녀석이야. 언젠가 배신할거야. 그냥 내버려 둬."
"후우, 설마... 저희를 파견하실 때에도 그런 생각을 하신건..."
"뭐, 조금은. 하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는 녀석들을 보며, 농담도 못하느냐고 핀잔을 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궁이 한눈에 보이는 높은 층의 건물. 이정도면 눈에 띌 만도 하지만... 이곳은 '그림자'의 권
한으로 초대 황제의 권한으로 보호된 지역이라 이 건물에 대해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황녀궁의 테라스로 나오는 황녀가 눈에 들어왔다. 나른한 표정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 충분히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얼굴. 굉장한 능력을 가졌지만
그 중의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도 보여주지 않는 그녀. 도대체... 왜 그런 운명을 선택했
어야만 했을까.
"주군,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일반적으로 이곳에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텐데...
"누구지?"
"...황비...전하십니다."
"그분은..."
....이미...돌아가신 분이잖아.!
"처음 뵙는 것이겠네요. '그림자' 님."
빙긋 웃으며 방으로 들어오는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는 황녀와 비슷한 얼굴의 소유자. 정말
로......
"황비..님이십니까?"
"예. 제가 바로 황비이지요."
.....분명히 당신은... 10여년전에... 죽었을텐데.
"일단 앉으시죠. 용건이 있으셔서 찾아온 것일테니."
그러나, 나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죽었다고 했지만, 그녀의 시체를 본 사람은 없었
다. 그러니 지금 살아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니까... 일단 예의를 갖춰 맞이해야 겠지.
"환희는 아주 잘 자라주었군요. 약간의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황태자 전하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제 권한일텐데요."
내가 웃음지으며 말하자, 그녀 역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림자의 능력을 무시하시는 것인가요?"
"아니요. 당신이 위험하다는 것이 아니라, 환희가 위험하다는 것이지요."
"설령 그녀를 선택하게 된다면... 위험하도록 방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직 환희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당신이 내버려두지 않아도..."
그녀의 눈에서 번쩍하고 빛이 나는 듯하더니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 아이는 스스로 위험 속으로 걸어들어갈 아이이지요."
그녀의 시선의 끝은 테라스의 난간에 아슬 아슬하게 올라서있는 환희에게로 향해 있었다.
오랜만의 자유였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궁 안에서...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하인들을 없애달라고 할 걸 그랬나? 아아- 그치만 식사를 항상 해먹
기는 귀찮으니까... 그건 안되겠네.
".......좋다."
"...여어, 거기서 뭐하는 거야?"
".................에? 한신우?!"
난간 위에 올라서 있는 나에게 말을 건 것은 1층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한신우였다. 저
게... 왜 여기있는 거지?
"후우, 넌 어떻게... 여자애가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황녀인 주제에."
"황녀인 주제가... 어떤 주제인데?"
"...이 한제국에서 황녀라 함은, 그것도 제 1황녀라면. 고귀하고 기품있고 제국의 딸 답게 황
제의 왼팔정도는 될 정도로 냉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통치력... 쯤을 가져야 하는 것이지."
"......상상력이 뛰어나구나."
"어쨌든 내려가. 나도 지금 올라갈 거야."
"근데... 왜 온거냐니까?"
내가 난간에서 내려서며 말하자 신우는 내 말따위는 곱게 씹어주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쳇, 나에게 황녀다움을 바라지 말고, 일단 황녀 대우를 해주는 게 어때?
내가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니, 녀석도 역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정확하게 말
하자면 '왜 그딴 눈으로 보느냐, 마음에 안들어도 어쩔 수 없다. 눈 깔아라' 이런 의미가 깊이
담겨있는 눈빛이었지만 녀석의 의도에 따라 눈을 깔아줄 수는 없는 일... 나는 더더욱 뜨거운
눈길로 녀석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왜 왔어?"
"심심해서."
"...퍽이나 심심해서 왔겠다."
"정말인데."
앞에 놓인 캔 음료를 마시며 신우가 말했다. 간단해서 좋겠구나. 편하겠어.
"그런데... 궁이 좀 과도하게 조용하다? 다들 단체 휴가라도 간거야?"
"다 잘랐어. 필요없어서."
"...흐음, 그렇지만- 불편하지 않겠어?"
"원래 혼자서 해. 시녀들은 폼이었지. 간단한 청소부와 요리사만 있다면 별로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그래서 대접한다는 것이 겨우 이 캔음료냐...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 나에게 와 박혔다. 그
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마디 해주지 않을 수 없었지만.
"뭘 더 바래? 그거도 700원짜리야. 돈 내고 먹어."
"...치사하게 700원가지고."
"땅파도 돈 안 나와. 너, 돈도 많으면서 뭘그래?"
"설마 황족보다 많겠어?"
"걱정마. 내 재산은 청룡회에서 끌어모은 것이 전부니까."
"....어째서?"
"알다시피 난 버림받은 황족이잖아. 거기다가... 황족이라는 더러운 이름으로 받은 돈따위 쓰
고 싶지 않거든. 그냥 다 여기저기 뿌려서 기부해버렸어. 덕분에 청룡회에 대한 평민들의 시
선이 굉장히 좋은 거지."
태연자악한 내 말에 더 황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신우는 쓰레기통을 향해 캔을
던져 골인시키고는 내 침대로 가 누웠다.
"...이봐. 아무리 그래도 나는 황녀이고, 여기는 여자의 방이며- 그것은 내 침대이거든? 함부
로 눕지 말아줘."
"뭐 어때, 닳는 것도 아닌데."
니가 누우면 꼭 닳을 것만 같아서 그런다.
"정말로 심심해서 온 것 맞아?"
"응."
"후우,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느냐만은... 제발 부탁하건데, 무턱대고 찾아오지마. 이환영이
나 혹은 다른 황족들이 보면 결코 좋게 좋게 넘어가지 않을테니까."
"그거라면 걱정마. 누누히 말하지만, 그들은 나를 어쩔 수 없다니까?"
"어째서?"
"난 위대한 남자거든."
. . . . . .
할 말 없게 만드는 군.
"아아, 오다가 신민형을 봤는데- 그 녀석이 오늘은 바쁘다는 군."
"바쁘기도 하겠지."
새로운 요리사와 청소부들을 구하려면.
거기다 내 생명을 위협한 간이 배밖으로 나와 팅팅 부은 녀석들도 처리해 주어야 할테고.
"독 먹었다더니, 멀쩡하네?"
"내가 독을 먹고도 멀쩡할 만한 강철 위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인간이라, 독을 멀쩡히 소화시킬만한 소화기관은 없어. 당연히 안먹었지. 그런거에 속
는 게 바보야. 더러운 냄새가 확 올라오는 차를 누가 마시겠어?"
"흐음, 그정도로 냄새가 심한데... 왜 보란듯이 차를 내온 거지?"
"당연히 나를 무시했기 때문...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유는 따로 있겠지."
"이유?"
"비밀이야."
이건 시험이 아니라, 죽음으로 내모는 길 같은데... 그 놈의 그림자. 언제까지 숨어서 내 생명
을 위협할 참인지... 후우. 귀찮아. 귀찮아. 그러게 난 황제 안한다니까.
"아아, 그런데."
"또 뭐?"
"혹시 황비님이 살아계셔?"
"뭐?!"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화련고교에서는 수업 시작시에 차렷, 경례의 구호를 붙여 인사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인사하
고 싶으면 인사하고 아니면 아닌 거다. 수업 시작은 바로 저렇게, 선생님들의 '시작하겠습니
다' 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26번 일어나서 읽어보세요."
또 화련고교의 모든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존대를 사용한다. 학생들의 신분도 신분이지만,
이 학생들이 언제 어떻게 되어서 나타날지 모른다는 압박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大 화련
고교. 이 학교에 또 다른 위험 요소들이 있었으니... 선생님들의 블랙리스트 1위, 이환희. 본
래에는 극히 소수밖에 그녀가 황녀라는 것을 몰랐지만, 일명 수정참변이라는 커다란 사건이
후 그 사실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지금 후회하고 있는 선생들이 여럿. (정작 본인은 신경쓰지 않고 있지만 - 정확히 말
하자면 존재감이 없기에 기억을 못하는 것뿐...)
그러나 그것은 이미 엎지른 물이요, 떠나간 버스라! 이제와서 아부한다해도 달라질 것은 전
혀 없지 않는가? 그래서 그들은 타겟을 바꾸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영국과 일본에서 유학온
왕자들! 그들이라면 어찌 어찌 잘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흐뭇한(?) 마음으로 그들은 수업에
임했다. 그러나.
"앗, 희쨩이잖아? 앉아있어- 내가 할께~ 이건 내가 전문이거든."
싱글 싱글 웃으며 말하는 일본의 첫째 왕자(이지만 왕세자는 아닌)... 이럴수가. 이럴수가! 어
째서 저 멍청해보이는 황녀와 일본의 왕자와 친한 것인가! 그들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어째
서... 저 이환희의 주변에 거물들이 잔뜩 있는 것인가! 황태자부터 시작해, 차기 재상으로 확
정지어진 신민형, 거기에 일본 왕세자 류이치와 왕자인 키리모토, 영국 왕세자인 윌리엄에-
결정적인 것은 이미 커플이라고 여기 저기에서 알게 모르게 알려진 레드폰 공작가의 한신우.
결론은...
일단 황녀에게 잘보이고 보자.... 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환희의 학교생활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단체로 돌았나봐."
"내버려 둬. 사람이란 권력의 힘에 치우치는 거니까."
무덤덤하게 하는 내 말을 들으며 키리모토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래를 설레 설레 저었고,
류이치는 알 것 같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나머지들은 식사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내 말따위는 들었을리가 없다.
웬일인지 나따위에게는 관심조차 없던 선생들이 하나같이 다 내 눈치를 슬슬 보며 비위맞추
기에 들어간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밥을 먹다가 조금만 인상을 찌푸려도 '뭐가 혹시 마음에
안드냐' 혹은 '맛이 없으면 바꾸어다 주겠다' 라고 물으며 대놓고 표시를 하기도 하고, 혹은
뒤에서 (그 중에서도 꼭 내 눈에 보이는 곳에서!) 내내 뭐 마려운 개마냥 초조해 하고 있는 것
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수업시간에도... 나는 항상 잤었지만, 이런 생활을 공교롭게도 같은 반이
된 유학생들(키리모토 외 2명;)에게 보여줘서는 안된다고 당부하는 민형의 말에 나는 열심히
수업을 들었었다. 그래봐야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 내가 수업시간에 작게 한숨만 내쉬어도 그들은 깜짝 깜짝 놀래며
수업을 진행하지 않고 나가거나, 빨리 진행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덕분에 나는... 알아버리고 만것이다. 그들이 내 배경에 눌렸다는 것을. 씁쓸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런지도 몰랐다. 한제국에서 황족이란 그만큼 대단한 존재였으니까. 게
다가...
"으앗, 그건 내꺼야!"
"어차피 안 먹고 있었잖아."
"아껴둔 거란 말이야!!"
"치사하긴"
아마 이 녀석들의 영향도 크리라. 일본의 왕세자와 권력에서는 최고라는 제 1왕자, 또 영국
의 왕세자와 제국 내의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레드폰 공작가의 장남... 이런 사
람들과 어울린다면 당연한 반응일런지도.
"아아, 그러고보니 그림자의 선택기간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네."
"뭐,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어째서 현 황태자가 황태자위에 책봉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거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던 한신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거야... 당연한 결과이니까. 누구도 결코 의심치 않는, 이미 고정되어있는 결과니까."
"모르는 일이지. 혹시 알아? 그림자의 마음에 현 황태자보다 네가 더 마음에 들었을지."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만에 하나지만 가능성은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이 한제국에는 이
환영이 황태자가 아니면, 아니 현 황제를 이어 새로운 황제가 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어. 내
가 그렇게 만들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만들거거든."
아무리 바보같은 짓이라 욕해도 나는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이루어 낼 것이다. 설령 그
것이 위험한 일일지라도... 나는 해내고야 말 것이니까. 나는... 해 낼 수 밖에 없으니까.
"...어째서, 어떻게?"
"어째서냐고?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니까. 어떻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내 마지막 말에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던 나머지 남정네들이 동시에 얼이 빠졌다.....면 믿겠
는가? 하하, 나도 처음보거든. 이 사람들의 이런 표정.
"특별한 건 없는거야. 내가 하겠다면 하는거고. 최선을 다해서 하면 이루어지기 마련이지."
그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설령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길지 않을지라도...
나는 만족한다. 나의 짧은 행복에 이 사람들을 내려준 것을...
'혹시 황비님이 살아계셔?'
'혹시 황비님이 살아계셔?'
그녀가 살아있다면 더 좋겠다. 오로지 황태자만을 위하는 그 모습은 싫었지만, 어찌되었건
그녀는 나의 어머니였고, 나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주었으며 마지막엔 나를 위해 희생하
는 모습까지 보여주었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행했던 그 모든것이... 가식이라면, 난 그녀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믿었
던 것에 대한 배신감은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니까.
"뭐?"
"오늘 소집이라고."
"소집이라니?"
"황족소집."
빌어먹을! 몇십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황족소집회의가 왜 하필 내가 살아있을 때 걸리냔
말이다!! 내가 죽거나 이 황궁에서 나갔을 때 걸리면 어디가 덧나냐고!
"싫은거 알지만, 가야해. 왜냐고? 분명히 이환영이 널 데리러 올테니까."
"알고 있어."
"후우, 그럼 오늘이 그림자의 후계자 발표일이라는 것도 알겠네?"
"당연히."
"역시, 하긴 그정도는…."
"…몰랐지. 내가 알리가 있어? 그냥 조만간 하겠다- 라는 생각 뿐이었다구."
"…하긴, 니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깜박했다."
민형이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지금 그거, 무슨뜻?"
"Nothing."
...그래, 너도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는 걸 깜박했구나.
나는 오랜만에 황녀다운 옷을 차려입기 위해 그동안 거의 열지 않았던 구석의 옷장을 열었
다. 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이런 옷들을 입고 돌아다니라고? 후우- 미친거지. 그래. 미친거
야.
"그렇게 절망적인 표정하고 있지말고 얼른 입어."
"계속 거기 있으면 입고 싶어도 못입어."
"알았어. 알았어. 빨리 하고 나와. 늦겠어."
재촉하지말거라. 케세라 세라... 어떻게든 되는 인생이 아니겠어?
어깨를 으쓱하고 '아무것도 몰라' 라는 제스춰를 취한 나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린 민형이는
'오랜만에 또 그짓을 하는군. 오랜만에 봐도 재수없으니까 하지마-' 라고 말한뒤 방을 나가버
렸다. 도대체- 내가 뭘? What? 어쨌길래-
"가자."
"...휘유. 그런 모습,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적응이 안되네."
황금빛 드레스에 긴머리를 틀어올려 수수한 듯하면서도 화려한. 목에는 황족임을 상징하는
화려하기 짝이없는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황족 모임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황족의 상징
물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다. 머리장식부터, 옷, 신발까지. 모두 황금색으로 치장하게 되는
데 그것에는 하나같이 호랑이 문양이 새겨져있다. 꼴에 호랑이라고...
사실, 황족이면 응당 평소에도 이와 비슷한 차림을 해야 하거늘- 나는 너무 귀찮은 데다 아
무도 나에게 신경쓰지 않고, 또 외출을 자제하니까.
"...후우. 여자들은 하이힐을 신고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너도 여자거든? 제발 그런 소리 하지마."
"...쳇."
중앙홀로 이동하는 내내 투덜거리는 나를 보며 민형이는 쯧쯧, 넌 여자가- 하며 고개를 저었
지만, 어쩌겠어. 매일 운동화만 신고 살던 나에게 갑자기 하이힐은 무리라니까. 무리.
"잘 할 수있겠지?"
"물론."
"만일을 대비해 청룡회를 대기 시켜놨어. 위험할 땐 불러. 그 옷차림으로는 싸우기도 무리잖
아."
"알았어. 알았어."
황족 회의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비서일지라도 같이 들어갈 수 없다. 이 중앙홀 제일 꼭대기
에 위치한 회의실은 황족들만이 입장 가능한 곳이었다. 그러니 민형이가 이렇게 걱정하고 있
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들에게 눈엣가시였고- 그 안에서 나를 합의하에 처리한다면
어디에서도 반발하지 못한다. 아아, 반발할 세력도 없겠지만. 하나 있나? 황태자...
"환희야!"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이녀석은 생각만해도 어디선가 나왔다. 뭐, 그다지 반갑진 않
지만 반겨주지 않으면 안되겠지? 나는 아주 활짝 웃으며 환영이에게 다가섰다.
"환영아."
"오늘, 더 예쁘다."
"고마워."
"들어가자."
내 곁에 서있던 민형이가 깊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환영이는 그냥 손짓으로 대답하고 내
허리에 팔을 두르며 황금빛 문을 열고 회의실로 들어섰다.
"드디어 마지막 손님들이 등장했군요.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
적막. 고요. 숨막히는 조용함 속에 그녀가 있었다.
"정말로, 살아계셨군요."
"알고 있었니?"
"...어쩌다보니- 말이지요."
내가 빙긋 웃자, 그녀 역시 나를 보며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냉소적인- 차가운 미소였다.
"황비전하께 제 1황녀 이환희 인사드립니다."
어쩌면 난 그 때,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는 지도 몰랐다... 어차피 세상에 내 편이라는 것은 없
었을것이라고... 알고 있었는지도...
"네, 오랜만이예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 예의바른 모습을 처음보아서 인지, 아니면 그녀가 황비전
하로 시인해서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 상황에서도 나와 황비전하는 태연했다.
"많이 컸군요."
"물론이죠. 몇년이 지났는데요."
"성격도, 많이 변했네요."
"글쎄요... 바보같은- 눈엣가시 황녀라는 지위는 언제나 변함이 없지만요."
"당신은 나를 닮았어요. 그래서- 난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무엇을 원하는지도."
화려한 금빛 여우가 날 유혹하고 있었다. '자, 어때. 넌 내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러니
까 내 편이 되어라...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라고... 그러면 그 댓가를 주겠다고.
"어마마마...? 정말로- 어마마마신겁니까?"
잠시 멍해있던 환영이가 중앙에 자리한 황비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그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황비는 두 팔을 벌리며 매혹적인 미소로 환영이를 불렀다.
"예, 전하. 제가 당신의 어머니가 맞습니다."
"어마마마!"
"오랜만이지요? 당신이 어렸을 때 이후로는 본 적이 없으니 말이예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날 따스하게 안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것은 이환영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처음 그녀가 나를 만났을 때에도 '그를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지... 나는 씁쓸하게
웃을뿐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 그럼 이제 황족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회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허허, 그래. 황태자 전하께선 나날이 발전하고 계시는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황비님의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파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 그 놈의 청룡회때문에."
"걱정마십시오. 청룡회는 화룡파에서 맡기로 했으니까요."
청룡회를 겨우 그까짓 화룡파가 억누를 수 있으리라 생각해? 하하. 지금 이 회의장 곳곳에
숨어서 너희들을 비웃고 있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것인가?
"게다가 극비리로 추진될 것이오니 걱정마십시오."
"황녀는 왜 그리 입을 다물고 계시오? 무엇이 마음에 안드는 것입니까?"
시작되었군. 유치해. 괜한 시비라니. 이건 말이 회의지, 사실은 황족들끼리 수다떨고 새로산
명품 옷을 자랑하고 자기 자식자랑, 남편자랑, 아내 자랑을 하러 나온 것밖에 없었다. 물론
추가로- 시비거는 것도 있었지. 그 케이스는 나에게만 해당되었다. 이 중에 내가 가장 힘이
없거든. 누누히 말하지만 대. 외. 적. 으. 로. 그렇단 말이지. 나는 나에게 괜히 시비를 거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황족을 향해 무표정으로, 특별한 어조가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말했
다.
"하고 싶은 말이 없을 뿐."
"뭐, 뭣이라? 그것은 우리 모두를 무시하는 처사임을 시인하는 것이오?"
"그만들 하시지요."
어디선가 낯익지만, 이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놈은! 레드폰 공작가의..."
"한신우. 올해 황가의 '그림자' 이지요."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신우를 보며 황비가 얕은 미소를 뿌리며 말했다. 그랬던 건
가... 둘이 만났기에... 알고 있었던 건가...? 하하, 곁에 있으면서 나에게 죽음의 위기를 여러
번 보여주었군... 이것도, 일종의 ... 배신인건가. 괜히 가슴 한쪽이 시려왔다.
"...후우, 대단한데. 바로 옆에서 독약을 뿌리고 암살자를 보내다니."
"특기지."
혼잣말에 가까운 내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눈을 마주 보는 한신우. 그런 상황이 지속되자 황
족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몰렸다.
"어때, 기분은?"
"유쾌해."
"속은 기분은 안들어?"
"들지."
"그런데도 유쾌해?"
"물론. 너도 나에게 속아주었으니까."
"후후.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구나."
"너 역시."
한신우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지정된 좌석에 앉더니 둥글게 앉은 황족들을 쭉 둘러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림자의 권한으로 황실 후계자를 결정했습니다. 모든 것에 이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알
고 계시겠지요?"
"물론...입니다."
다들 쉽게 수긍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이미 황태자가 환영이라고 확정적인 결정을 하
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가 결정한 후계자는..."
"제가 결정한 후계자는 제 1황녀, 이 환희입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어째서 황태자가 아니란 말이냐!"
"더이상 그를 황태자라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제 1황자는 황태자가 아닙니다."
"......"
조용해진 회의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한신우, 아니면 나에게 고정되어있었다.
"무슨 수작을 부린거냐."
"아아, 설마 황녀가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당신들이 그렇게 바보같다고 욕했던
그 황녀가요? 설마 그랬겠습니까? 하하. 그것도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말이지요."
"......."
"무슨 생각인거야, 한신우."
"널 차기 황제로 지목한거다."
"...한신우."
"걱정마, 나라 말아먹을 생각은 나도 없어."
알...면서... 이런 짓을 벌인거냐. 물론 대강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설마 진짜... 니가 날 속
이다 시피 한 것은 너도 나에게 속아주었기 때문에 용서하겠어. 내가 모든 것을 안다는 것
을... 비밀로 지켜주었으니까.
"이 시간 이후로 '그림자'의 전속 기사단은 황녀의 호위대로, 또 저는 황녀가 황제가 될 때까
지 보좌관을 맡게 됩니다."
"...그. 그런... 말도 안되는!"
"이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한신우의 말에 황당하다는 듯- 제자리에 앉는 황족들. 그런 황족들을 보며
한신우는 씨익 웃더니 환영이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황자께선 시간이 아깝겠지만 사랑하는 누이를 위해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당신이 황제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제가 확인한 바로는 황녀가 훨씬 뛰어난 자질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당신은 제 다섯개의 테스트 중 단 한가지만 통과했으
며, 제국민을 보살필 줄 아는 자비로운 황제가 되기는 어렵다는 결론입니다. 당신에겐 오직
두가지만이 중요하니까요. 바로 한제국이라는 나라와 이환희라는 당신의 누나."
"......."
"황녀는 제가 수차례 실시한 테스트를 모두 통과했으며, 그것을 꽤 뚫어보는- 제가 두려울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습니다. 당신들이 바보라고, 있어도 없는 존재라고 욕하고 무시했
던 존재는 -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까지... 모두 알면서 가지고 놀고 있었
다... 라는 정도로 말을 마쳐야 하겠군요. 하하. 나디르 공작각하께서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
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평소같으면 길길이 날뛰며 나를 욕했을 나디르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의미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황비마마와 나, 그리고 환영이가 있었다.
"아쉽지만 이제 연극은 끝이다. 이환희."
"당신의 연극도 끝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황비마마?"
내 말에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황비는 활짝 웃으며 박수를 한번 쳤다. 그러자 어디선
가 쏟아져 나온 하얀 복면을 두르고 하얀 옷을 입은 사내들이 회의실을 점령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지요. 그림자님."
"번복이란 없습니다."
웃으며 말하는 황비에게 다시 웃으며 대답하는 한신우. 이번에는 검은 옷의 사내들이 어디선
가 들어와 하얀옷의 사내들과 대치했다. 뭔가... 이상한 상황이지? 하. 하. 하.
"환희야. 너... 황제가 되고 싶어?"
"......"
"나는 되고 싶다. 아니, 되야만 해."
"...환영아."
"...너를 내 곁에 두기 위해서는... 내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
환영이가 나를 돌아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마음대로 해라. 나도 네가 황제가 되길 바라니까.
그러나, 네가 황제가 된다해도 난 너의 곁에 있지 않을거야. 난 떠날테니까.
"미안하군요. 황녀. 하지만, 당신은 사라져 주셔야 겠습니다."
"사라지는 것쯤이야 제 특기지만...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사양하죠. 당신들 손에 죽을만큼
힘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상냥한 황비의 말에 나도 친절히 답해주며 오른팔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푸른 새 한마리가
내 팔에 와 앉으며 머리를 비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푸른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내려와 내 곁을 호위하듯 섰다. 그리고는 일제히 나를 쳐다보며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
였다. 그러자 단(丹)이 내게 다가와 그들과 같은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청룡회주께 '단' 인사드립니다."
"일어나라."
"예."
숨막힐 것 같은 고요가 회의실에 다시 찾아왔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사람들의 등장에 그들
은 동요하고 있었다. 물론 '그림자' 의 패거리들은 빼고.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테니까.
"쓸데없는 피해는 남기고 싶지 않군요. 절 이곳에서 조용히 내보내 주신다면 그냥 넘어가도
록 하겠습니다."
내가 빙긋이 웃으며 말하자 나디르 공작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공작이 황비에게 물었다.
"이미 예상된 반전이 아닌가요?"
"...예상..되었단 말씀이십니까?"
"당신들 눈에는 이환희의 뛰어난 자질이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청룡회주라는 것도 조금
만 생각해보았다면 금방 알 수 있는 거였어요."
공작은 자신의 한심스러움을 괜히 탓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환희의 어린시절의 잘못된 악몽
은 모두 만들어진 것이었다. 자신과 황비의 연극. 그 연극속에 비극적인 주연으로 환희가 선
택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 충격을 받아서 정말 바보가 됐으리라 생각했던 공작과는
달리 황비는 멀리서 지켜보면서도 그녀의 성장을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환희가 이환영이의 편에 서주어야 황제가 될 수 있는겁니다."
"그렇지만... '그림자' 는 어떻게 처리하죠?"
"그를 처리하기엔 무리가 많죠. 그러니까... 그를 황태자의 편으로 돌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어.. 어떻게요?"
"걱정마세요. 그건 이환희가 알아서 다 할테니까."
"호오, 회주.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긴 했군요."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있는 내 사진과 기사들을 보면서 단이 놀라운 듯 말했다. 어이,
나 황녀인 거 알고 있지 않았어? 왜 다들 새삼스러워 하는 거지?
"다행히 청룡회에 관한 건 나오지 않았네요."
"모든 방송매체들 사이에 청룡회 수하들이 없는 곳이 없으니까."
"후후. 그리고 믿을 사람도 없구요. 그쵸?"
"그래."
나는 신문을 구석에 대충 던져놓고 쇼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한신우가 왜 그런 선택을 했나-
는 등의 질문은 떠오르지 않았다. 잘난 척이라고 뭐라 그럴진 몰라도 나는 그럴 자격이 충분
했으니까. 그렇지만, 왜 그는 '다른 시선'을 생각하지 않았는가... 에 관한 의문은 강했다. 이
환영을 선택했다면 반발은 없었을 거고 이렇게 복잡해 지지도 않았을거다. 게다가... 날 택한
다면 제국민의 반발도 심각할텐데...
"무슨 생각일까... 한신우는..."
"널 믿는거지."
"........"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문에 기대어 서 있는 한신우였다.
"어떻게 들어왔냐- 는 질문 빼놓고 다른 질문은 다 해도 되."
빙긋 웃는 한신우의 얼굴이 왜 이렇게 얄미워 보이는건지... 하긴, 항상 얄미웠지만.
"뭘 보고 날 믿는다는 거야?"
"Everything."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지.
"니가 청룡회주라는 것이 알려진 이상 제국민의 반발은 없을거야."
"...언제 알려졌대?"
"신문 안봤어?"
"......."
물론 봤지... 제목만.
"게다가, 청룡회가 두려워서 황족들의 반발도 점차 줄어들테고... 아마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
겠지."
지금 나에겐 그게 문제가 아니거든?
"문제는 왜 니가 황제따위를 해야 하느냐... 라는거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것은 여전하군.
"내 선택이기 때문이야."
"뭐?"
"나는 너를 선택했다. 그러니까 해야해."
"그런 억지가 어디있어!"
"여기."
...대단하시군요. 대-단하십니다.
"그런 표정 짓지마. 나도 나름대로 고민 많이 했으니까."
"...별로 고민한 것 같은 표정은 아닌데?"
"사람은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는 거잖아. 안그래?"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하는 신우... 후우, 역시 당신에겐 못이기겠군.
"자- 그럼 이제 모든 문제를 풀어볼까...?"
"제일 먼저 너에 대한 문제를 푸는게 좋겠군."
"나? 하하. 나는 나지. 한신우야. 레드폰 가의 장남."
"선택의 그림자이며 너에겐 성이 없어. 안그래? 오래전 내가 너희집까지 모셔다 준 걸 잊은
건 아니지?"
"...기억하고 있었구나."
"이 몸은 천재니까."
멍한 여러 녀석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후후... 언제부터 내가 너희들 시선에 신경
썼니... 뭐, 어쨌거나 어째서 이녀석이 레드폰 공작가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만 알면 되니까.
"황족과 접촉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직위가 필요했으니까... 라고나 할까...? 하하. 사실은
이 일이 끝날때까지만 있기로 했는데, 의외로 그 영감이 마음에 들어서 말이지... 그냥 빈대
붙어 살기로 했어."
".....흐응, 그런거로군. 예상이야 했었지만..."
앞에 놓인 찻잔을 매만지며 신우를 똑바로 바라보자니, 녀석은 또 피식- 기분나쁘게 웃으며
내 곁에 와 앉더니 입을 열었다.
"황후를 믿지 말았어야지."
"어쩔 수 없었어. 날 처음으로 알아준 사람이었으니까..."
"뭐, 너의 심리까지 조정할 수는 없는 거지만... 그래도 황후보다 황제를 믿은건 잘한 일이야"
"아아... 너- 보기보다 눈치가 빨랐구나."
이건 또 무슨 소리냐- 는 듯한 표정을 짓고있는 방 안의 녀석들은 곱게 무시해주고 나와 신
우의 대화는 계속 되었다.
"글쎄... 눈에 보였지. 어째서 황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그렇게도 싫어할까... 하고 말이지. 또,
황제는 왜 그렇게 황녀를 싫어할까...... 뭔가 어색한 균열... 그걸 눈치 못챈 것들이 바보지."
픽 하고 웃으며 신우는 쇼파에 드러누웠다. 그러더니 천정을 뚫어져라 보며 술술 그간 숨겨
져 있던 엄청난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게다가... 아무리 바보같은 황제라해도, 자신의 권력이 그렇게 한순간에 빼앗겨지는 데도 가
만히 있다니... 하하. 알고보니 그것보다 더 강대한 세력을 뒤에 만들어 두고 있던거였지만...
어찌보면 너와 똑같구나... 너의 아버지는."
모르겠다- 는 눈빛의 무리들을 여전히 무시하고 신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바보같은 황제는, 바보가 아니었고... 바보같다던 황녀 역시 바보가 아니었다... 하하. 사실
은 둘이 손을 잡고 나디르 공작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을 속셈이었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낸
시나리오다. 어때?"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손을 잡고 나디르 세력을 제거하려던 것은 맞지만... 그걸로 인해 권
력을 잡을 생각은 없었지. 황제도 이제 그 자리엔 신물이 났으니까... 일이 끝나면 바로 어디
론가 잠적해서 조용히 살아갈 예정이었지. 둘 다. 빌어먹을 나디르 공작과 황후... 그리고 너
덕분에 완벽히 무산되었지만...."
"하하. 그런가...?"
"그래. 내가 황후의 연극에 넘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바라는 대로 따라주지는 않았
지... 그녀는 내가 황제를 원망하며 죽이기를 바라고 있었거든... 하루 빨리 세상에 나오기 위
해... 황제의 어머니로써 권력을 잡기 위해. 혹시 이것도 알아? 황후와 나디르 공작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
"뭐?!!!"
"뭐라고?!"
"진짜요?!"
이번엔 한신우 역시 놀랐는지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나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진짜
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잖아... 하하. 황당하지? 그렇지만 사실이야. 이미 그들 사이엔 명
백한 증거가 있잖아.
"부인이 없는 나디르 공작. 그런 공작에게서 어떻게 이하영이라는 딸이 나왔을까? 하하. 게
다가 이하영은 황후를 닮았다구... 물론 나도 황후를 닮긴 했지만 나보다는 그쪽이 훨씬 닮았
어. 다만 나디르 공작의 안좋은 유전자도 들어가 있어서 특별히 아름다워보이지 않는 거지."
대단히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나를 보며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 사람들... 거기
에 상큼한(?) 웃음까지 첨가하자 각자 고개를 돌리며 나를 외면한다.
".....띠껍냐?"
"아닙니다!"
벽에 걸려있는 칼을 보며 말하자 땀방울을 흘리며 대답하는 청룡회 녀석들... 무서움을 알기
는 아는 거지? 후후....
"그나저나, 넌 황후에 대해 어떻게 안거야? 나야 조사권한이 넓으니 그렇다치고..."
"아아- 천재잖아."
"......."
"미안하다. 하하. 사실은 청룡회를 세우자마자 제일 처음 조사한게 그거야. 황후가 살아있을
까... 어떻게 어떻게 뒤를 밟다보니까... 우연히 나디르 공작의 별장 한군데에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지. 이렇게 쉽게 말하지만, 사실은 거기까지 조사하는데 3년이 걸렸어. 대단하지?"
그래. 나디르 공작이 얼마나 꽁꽁 숨겨두었는지 알만할거다. 이 청룡회의 정보력은 대단한
것인데...(1시간이면 한사람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그것도 자신마저도
모르는 비밀이나 컴플렉스까지!) 3년이나 걸렸으니...
"....후우. 이런 이런... 더 복잡해져버렸네..."
복잡해졌다는 말과는 달리 씨익 웃으며 쇼파에 다시 몸을 누인 신우는 힘이 다 빠진 목소리
로 나에게 물었다.
"아직 여러가지 문제가 남았지만, 차차 풀어보도록 하고... 후우- 이제... 어떻게 할까?"
"뭘 어떻게 해. 당장 그 발언을 철회하고 나는 저 멀리 섬하나 사서 쳐박혀 살고 너는 너대로
살고 하면 되는 거야."
"아아, 그래? 그런데 어쩌지. 한번 내뱉은 선언은 다시 거두어 들이지 못한다는 게 그림자의
법칙인데... 게다가... 니가 어디 쳐박혀 산다고 해도 그걸 이환영이 내버려 둘까?"
"그 녀석의 영향력이 없는 곳에 가서 살면 되는거지."
"......설마... 너..."
"항상 준비하고 있었어. 대륙을 넘어가는 일은..."
멍한 표정을 짓는 민형이에게 피식 웃어주고 신우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날 황제로 지목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난 황제가 되지 않을 거야. 권력에 물들어 - 이리저리
치이는 일따윈 안해. 이 한제국은 분명히 얼마못가 망하게 되어있으니까... 지금은 얼마 안되
는 폭풍 전야일 뿐이야.
"내가... 나선다면 폭풍이 몰아올 것이라는 것... 알고 있잖아."
"이겨내면 돼. 내가 지킬테니까... 이길 수 있어."
.....오랜만에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쳐다보는 신우. 지킬...수 있을까...? 니가... 제국으로부
터... 나를?
"지킬거야."
빙긋 웃는 신우의 얼굴에 내 심장은 갑자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환영이에게
지켜주겠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갑자기...
"자, 그럼 이 잘난 보좌관을 이제 그만 받아주시지요."
"......누, 누가 잘났다고 그래- 천재적인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지!"
"후후, 그래. 그래."
...이 두근거림은 언제까지 이어질런지... 하아...
그렇게 나의 간단한 황제선언으로 인해 그림자인 한신우는 나의 보좌관이 되었고- 제국의
운명은...
"아씨, 귀찮아- 무슨 회의를 이렇게 많이 한대!"
"어쩔 수 없지. 조금만 참아봐. 정식으로 후계자 발표가 나면 하라해도 안할테니."
"Shit. 그냥 귀족들 다 쓸어버리는 게 어때?"
"꼭 지같은 말만 하지, 키리모토."
....바뀔...까...? 말아먹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포기할 수 없어.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알아요. 전하께서 포기 할 마음이 없다는 것쯤은...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찾아왔잖아요?"
무엇인가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황후가 황태자... 아니 이제는 평범한 황자로 전락해버린 환
영의 곁에 섰다.
"우리는 당신이 황제가 되리라고 조금도 의심치 않아왔어요. 그렇지만 어느 한 사람 덕분에
그것이 무산되었죠. 설마 친구라는 이름으로 접근할 줄은 몰랐던 우리들의 실수였습니다."
"...환희는 내 곁에 있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환희가 황제가 된다면... 여제가 되어 내 위에
선다면... 틀림없이 나를 떠나버릴거예요. 난...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환희는 내 곁에 있어
야 하니까..."
환영에게 환희는 전부였다. 고통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작고 예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지켜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세월이 지나며 조금 변질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환희를 위하
는 환영의 마음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스스로 그렇다고 믿고있었다.
"황녀를 얻고 싶다면... 이제부터 제가 말하는 대로 따라와 주십시오. 절...믿으시죠, 전하?"
"......물론."
환영은 웃고있는 황후의 오른손을 잡아 키스하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위험하다... 틀림
없이 자신이 잡은 이 손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
한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이 손에... 환희를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그림자가 그쪽으로 돌아선 이상... 전하께서 황제가 되기는 어려워요. 그림자
의 힘은 그만큼 막강한 것이니까... 하아, 초대 황제께서는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더군
요."
"...그렇다면?"
"그렇지만 당신에게 원하는 것을 줄 수는 있어요. 제 손을 잡으셨으면 이제 저를 믿어주세
요."
......그녀의 입이 요염하게 미소지었고 눈에서는 위험한 빛이 반짝였다.
"황후는 10년을 건 연극을 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야. 방심하지마라."
"알고 있어."
"....지금 니 모습은... 방심의 벽을 넘어 여유가 철철 넘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보이면 그런거겠지..."
"....이환희."
"알아. 알아. 나 황제될 마음 생겼다고 했잖아."
느긋하게 앉아 햇빛에 있는 광합성을 섭취(?)하는 나를 보며 방금 막 들어온 신우가 투덜거
렸다. 그렇기도 하겠지... 내가 이러고 있을동안 저 녀석은 전혀 없던 내 편을 만들려고 뛰어
다녔으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다들 호의적이야. 무슨 수를 쓴 것같긴한데... 짐작이 안 간단 말
이지..."
"흐음, 너의 그 좋은 머리로도 짐작이 안 된단말이야?"
"...그래. 나의 이 좋은 머리로도 안되는 것같다. 그러니 한 번쯤 너의 그 천재적인 머리도 빌
려주지 않을래?"
"흐응, 그런거야?"
"그런거야."
여유로운 내 말에 신우는 단호히 말하며 비스듬한 자세를 바로 고쳐 쇼파위에 양반다리로 올
라앉은 나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드폰 공작가는 너의 편에 선다. 그로 인해 상류 귀족들은 거의 너를 지지하고 있지."
"호오, 너의 아버지가?"
"그래. 황족들은 대개 중립을 지키고 있고, 문제는 이환영인데... 이환영이 너를 위협하는 황
후세력과 손을 잡느냐, 안잡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려있지."
"그건 당연한 거지. 이환영은 손을 잡아. 내민 손을 거절할 줄 모르거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쌍둥이니까. 알고 있어. 상대방의 행동패턴쯤은... 물론 녀석은 나를 모르지만. 그 녀석, 보
기보다 둔한 구석이 있거든."
".......그..래?"
"응."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곰곰히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신우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나더니 테라스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고 누구에게 '오라'는 듯한 손짓
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어디엔가 숨어있던 두 사람이 스르르 귀신처럼 나타났다.
"상황은?"
"긴급 회의로 황족과 귀족들이 소집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 결론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
렇지만 뚜렷한 행동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황제를 받아들인다는 표시인 것 같습니다."
"아아, 그럴리가 없어. 무엇인가 있는거지... 자신만만하게 회의를 소집할 정도로 무엇인가
큰 패를 잡고 있다는 뜻이야."
내가 조용히 말하자 신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두사람을 돌려보냈다. 호오, 신기
한데... 아무리 청룡회라도 저런 식으로 귀신처럼 나왔다가 귀신처럼 사라지지는 않는데...
아마 내가 쳐다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저 사람들이 왔다 간 것도 몰랐을지도...
"이환희!! 긴급 회의가.......어라? 너도 여기 있었어?"
"...벌써 몇번째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나는 환희의 보좌관이다. 그러니 붙어 있을 수 밖
에 없어."
"...마음에 안 든다라는 식으로 들리는데...?"
"심히 마음에 안들어. 그렇지만 별 수 있어? 이미 엎지른 물인걸."
".....처음부터...여전히 재수없는 녀석..."
"호오, 직접들으니 새삼스러운데..."
...저 빙글 거리는 웃음만 좀 사라져 준다면... 정말로 인생이 아름다울 것 같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곧... 모두 모일거야.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 거야?"
"그들은 날 황제로 인정할거다. 그럼 사상 처음으로 여제가 나오는 거지."
"....어째서 그건 또 그렇게 확신해?"
"당연한 일이니까."
"...?"
"후우, 나도 미래를 내다보는 기이한 초능력을 가진 건 아니야. 그렇지만... 눈에 보여. 그 바
보들의 행동이."
환하게 웃으며 하는 내 말에 모두 어이가 없는 듯 하지만... 뭐 어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전 백승이라는 말도 있잖아? 내가 그들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10여년동안 그들을
감시해왔기 때문이라는 거지. 물론... 그 바보들은 아무것도 몰랐겠지만.
"어서가자. 늦겠어."
"...제 1황녀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전에는 내가 오던지 말던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오늘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
나 고개를 숙였다. 전에 없이 황제도 살며시 미소짓고 있었고....
"무슨 회의를 이렇게 자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로써 끝인가 보군요."
경직되어있는 황족들을 보며 내가 말하자 그들은 흠짓 몸을 떨며 나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데... 말해볼까요?"
"미안하지만 제가 하도록 하죠. 전하."
"...아아, 당신도 있었군요. 하긴, 환희가 당신이 내민 손을 거부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이 없으니까요."
"잘 알고 있네요. 그럼 이 내용도 이미 알고 있겠죠? 그렇다니 간단하게 말하죠. 저희는 한가
지 요구조건을 들어주신다면 당신을 황제로 인정하죠."
여유롭게 웃는 황후의 얼굴을 보며 나 역시 미소지었다. 너희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이야
뻔하지...
"당신이 제 1황자와 혼인한다면... 말입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어머나, 그러면 제가 말이 되는 것을 내세워야 한다는 말씀이세요? 하하. 이거 어쩌죠? 전
황자전하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서 말이지요."
"뭐, 그런가요?"
"네. 그래요."
내가 너무도 담담하자 현실감을 못느끼는 것은 나와 황후, 그리고 나디르 공작... 또 환영이
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었다.
"너 미쳤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뻔하다고 했잖아. 이 사람들이 하는 짓이란..."
"...이미...예상하던 것이 이런 거였어?"
민형이가 답지 않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에게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원래 이런 사람들이란 걸... 넌 아직 모르고 있던 거야? 하하, 당연하잖아. 황후와 이환영이
원하는 것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방법!! 그 길은 단 하나거든. 반란을 하면 내가 쫓겨나게 되
는데 환영이는 그것을 바라지 않고... 이걸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것을 계산하면 크게
손해 보는 제안은 아닌거지."
"받아들이면 어쩌려고?"
"받아들여도 손해보는 것은 없어. 일단 대공의 자리에 환영이가 앉아있다면 나라를 휘두르기
도 편할테니까. 아무튼... 자, 대충 이런 것이죠?"
".......역시... 대단하네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황후가 말했다. 난 당신이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웃어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모든 것을 버릴만큼 당신을 사랑한 것은 아니거든... 나
에게 소중한 것은 이 황궁이 아니야. 한제국이라는 나라이고, 그 나라에 있는 백성이고 그리
고 내 곁에 있어주는 친구라는 존재지.
"그런데 이걸 어쩌죠? 이미 공식적으로 한신우라는 레드폰 공작가의 장남과 혼인서약을 맺
어버렸는데... 이것은 본의아니게 소문이 나버려서 말이죠."
"뭐?! 언제! 너 나도 모르게..."
이번에는 민형이 뿐만아니라 신우까지도 눈을 크게뜨며 무슨 소리냐고 물어왔다. 그렇지
만... 어쩔 수 없지. 이것의 발단은 모두 한신우... 너란다. 니가 그때 나보고 애인 행세를 해
달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나디르 공작의 파티에 가지 않았을거고, 덕분에 소문이 나는
일따위는 없었을텐데... 아아, 물론... 내가 조금- 아주 조-금 손을 쓰긴 했어. 그치만 정말로
조금이라구!
"그건 죄송하지만 다시 생각해주셔야 할 것 같군요. 초대 황제의 법전에 따라서 한번 맺어진
혼인서약은 파기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하. 그럼 저희는 이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자 뒤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들
리더니 이내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누구 마음대로... 혼인이야?"
"환영아..."
"말했잖아. 내가 널 지키겠다고..."
"그렇지만 이건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거야?"
"너... 다 알고 있잖아."
"...무엇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의 반을 너는 알고 있어. 더이상 외면하지마. 애써 지켜주려하지 않아도
난 내 스스로를 지킬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으니까."
"......"
"가지."
멍한 표정을 짓는 환영이를 내버려둔채 몸을 돌려 회의장을 나왔다. 아마도... 이해할 수 없
겠지. 그렇지만 너의 의식은 알고 있어.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라고.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냐고? 알잖아. 너와 나는... 공동체니까. 너의 느낌, 너의 생각... 무엇이든 나에게 느
껴져. 나는 알고 있기에 너에게 내 생각, 나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도록 두겹, 세겹 너를 향한
방어를 한거지. 내가... 너를 싫어하고 증오했기에 할 수 있었던... 아니, 그렇게 스스로 주문
을 걸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괜찮을까?"
"내버려둬. 성장이란 아픔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거야?"
"그런 짓?"
"설마하니 정말로 한신우와 결혼하려고?"
"흐음, 아무래도 좀 곤란하겠지?"
"뭐... 니가 나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만... 갑작스러운 프로포즈는
꽤 당황스러웠다구."
신우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아니, 어깨에 둘렀다기보다는... 목을 조른다...라는
게 맞는 말인듯...
"켁..켁.. 이... 이거나 좀..."
"어쩌자고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인거야. 응? 한마디 상의도 없이. 설마하니 이 몸이 너의 프로
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벌인 이벤트야?"
"자...잠깐...이거...좀.."
"아아, 그러고보니 이거 나에게 너무 위험한 것 아니야? 황자를 적으로 돌리다니...."
"....켁.."
"아, 너 아직도 그러고 있었어?"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투로 두 손을 들어올리고는 재수없는 그 면상으로 웃는 녀석... 지금
웃음이 나와? 난 죽을 뻔했다고!! 내가 목을 부여잡으며 눈물이 살짝 맺힌 눈으로 억울하다
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뻔뻔의 극도를 달한 한신우는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빙긋 웃고 한
마디 했다.
"결혼하자."
......내가 잘못들었나? 하아, 이제 환청도 들리는구나... 역시... 아까 목 졸린 것의 충격이 큰
거야.
"이젠 어쩔 수도 없는 거잖아. 결혼하자."
"......진담..이야?"
"응."
"....하아, 니 인생까지 망치고 싶진 않다. 너는 그저 이쁘고 싸가지 없는 애 만나가지고 너같
은 아들하나 낳아서 고생 좀 해봐야 되거든."
"딱 너잖아. 그러니까 결혼하자."
"말도 안돼는 소리. 나는 너보다 싸가지가 잘 따른다구."
"하하, 그치만 이제 어쩔 수 없어. 소문도 날대로 났는데, 거기에 니가 대못을 쾅쾅 박아놨으
니... 니가 내 인생 책임져야지, 별 수 있어?"
"걱정마. 진짜로 혼인서약을 하지 않았다면 그 정도 말은 물릴 수 있거든."
"그런데... 그건 내가 싫다."
"응?"
"결혼하자."
두근, 두근 떨리는 내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신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
이 장난스럽게 싱글 싱글 웃는 이 얼굴로... 결혼하자니... 저게 도대체 진담인지 아닌지 구분
이 안 가는 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구...
"진담이야."
한참을 그렇게 나를 바라보던 신우는 내 어깨를 잡으며 흔들리는 내 눈을 똑바로 보고는 웃
음을 싹 지우고 신우가 단호히 말했다. 내 마음을 읽어내는 기술은 여전하다- 며 말하려고
내가 막 입을 뗀 순간 내 심장을 아플만큼 뛰게 만든 신우의 말이 이어졌다.
"널 사랑하니까."
.........지금 내가 무슨 소릴 들은거지?
"내 심장이 너를 향해 뛰고 있으니까... 넌 어차피 내 곁에 있어야 할 운명이었어."
"...한신우."
"뭐, 정식으로 프로포즈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잖아?"
"...뭐 잘못 먹었니?"
"그런가봐... 나 뭘 잘못먹었나보다. 하하, 이 바보같은 황녀님이 귀여워 보이다니."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느끼한 말들을 남발할 수 있는거야? 그건 뭔가 잘못되지 않고
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구!"
"걱정마. 나는 지금 지극히 정상이고, 누구보다 나에대해 잘 아니까."
세. 상. 에. 그럼 그 말이 진심이란 말이야?!!
"진.심.이.야."
"어떻게 할 거야?"
"뭘?"
"이거 보긴 본거야?"
"보고 있어."
"선전포고라구. 청룡회를 싹 쓸어버리겠다는..."
"흐응, 그렇군."
"이환영이 열받았다구... 이젠 어떻게 해?"
"넌 차기 재상이라는 게 그런 가벼운 생각이나 하고 다니는 거야?"
"에?"
"그들이 아는 청룡회와 현재의 청룡회는 차원이 달라. 격이다르다구. 겨우 이정도로 우리를
이길거라고 생각하는 녀석들이 바보지."
나는 누군가가 어떤 루트로 해킹을 해 알아온 그들의 작전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도무지...
이런 말도 안되고 엉터리 작전보고서로 작전을 시행한다니... 이해가 안간다구...
"또... 이 작전보고서는 함정같기도 하고 말이야."
"함정?"
"요새 누가 미쳤다고 컴퓨터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저장해서 보고해? 해킹 될 것이 뻔한데.
다들 손으로 작성하거나 저장은 안하는 데... 이렇게 일부러 저장까지 해둔 것을 보면 함정이
라는 거지. 게다가 이 엉터리 형식 좀 봐... 하하. 날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알고 있어. 오히려 나의 이런 안일한 생각을 파고 들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이 일을 도운
사람은 아니다. 내가 두가지에 따른 대책을 세워놓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
"도운...사람?"
"그래. 그녀는... 내가 인정할만한 사람이니까."
"황후를 말하는 거야?"
내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려있는 종이를 단번에 구겼다. 그에 민형이는 흠짓하는
듯 했지만... 나는 민형이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온갖 복잡한 공식들이 떠올
라 정리하느라 바빴으니까.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후후... 그렇지만 내 세력을 없앤다고 해도... 신우의 세력이 만만
치 않을텐데...?"
"....후우,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선전포고다!"
"선전포고?"
"그 머리좋은 사람이 자기가 낸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
빙긋 웃는 내 모습을 본 민형이가 고개를 휙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넌 무서운 녀석이야."
"후후. 그거 이제 알았어?"
"자,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제 생각에는 틀림없이 이런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것 같은데
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던 환영이 뒤에서 조용히 물어오는 동업자에게 시선한번 주지 않은 채
로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어... 어떻게... 나에게... 이 나에게........ 환희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계실텐데요."
"........."
"청룡회... 그것만 없으면 그녀의 세력은 없어집니다."
"없앨 수... 있겠나?"
"가능합니다. 그들의 자료는 이미 제 손안에 있으니까요."
"...그럼 수고하게."
"예. 전하."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이났지만 그런 것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환영은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환희는... 왜... 날 봐주지 않는 걸까. 단 한번도... 똑바로 본 적이 없었지."
잘못된 느낌, 잘못된 감정. 도대체...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적어
도... 환희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부터... 환희를 갖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했고, 환희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함이 필요
했으며, 권력이 필요했기에... 환희를 영원히 곁에 두려면 근친혼이 가능한 황제가 되어야 한
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껏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버텨왔고 웃을 수 있었는데...
"어째서... 넌 날 눈으로 조차 담아주지 않는 거야...."
환영의 물기어린 애절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으와아아아앗!!!!"
"일어났네."
"아주 깔끔한데- 자주 써먹는 게 좋겠어."
"자...자주 써먹긴!!"
새빨개진 얼굴로 한쪽 귀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내가 소리지르자 '흐음' 하고 감
탄사를 연발하던 신우와 민형이 둘이 내가 다 들리도록 소근거렸다(?).
"나름대로 귀여운데?"
"흐음... 역시 콩깍지가 씌인거야. 형."
"이봐, 아우. 너무하잖아."
...도대체 둘이 언제부터 형, 아우 하는 사이가 된거냐...
"왜 아침부터 재수없게 느끼한 면상을 들이밀고 난리야. 둘 다."
"에에? 이만큼 상큼한 면상이 어디있다고 느끼한 면상이래-"
"흐음... 역시 동감이다."
"상큼은 무슨 상큼. 신민형- 넌 어서 니 일이나 해라. 신우, 너도 그렇고."
"...그런데- 민형인 날 형으로 불러주는 데, 너도 날 오빠라고...."
"너 나랑 같은 학년이잖아. 나에게 나이란 숫자에 불과해."
내 귀에 느끼한 바람을 불어넣은 것에 대한 작은 보복으로 말허리를 잘라먹으며 말하자 두
사람은 또다시 내가 다 들릴 정도로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내버려둬. 좀 싸가지가 부족하잖아."
"흐음, 그래도 오빠 소리를 들어보고 싶은데...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잖아."
"차라리 형이라고 하는 게 어울리겠다. 저런 게 오빠라니, 어우... 갑자기 소름이 막 끼치는
데?"
"신민형,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온다 그거지...?"
"...내...내가 뭘..."
은근슬쩍 신우의 뒤로가서 숨어버리는 민형이 자식... 얍삽하긴.
"근데 왜. 아침부터..."
"아침? 니 눈엔 이게 아침으로 보이냐?"
"응."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키며 말하는 민형이에게 단호하게 응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진이 빠진듯한 표정으로 다시 나에게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정오, 12시가 아침이란 말이야!! 지금은 점심시간이라구!"
"그게 뭐 어때서? 나한테만 아침이면 되는 거야. 내 아침은 기본이 1시까지라구."
"....잘나셨어. 학교는 어떻게 꼬박꼬박 등교했나 몰라."
"그 때는 지혜가 깨웠으니까."
"지혜?"
"아아, 내 아래에 있던 하인들 중 한명이지. 꽤 마음에 들었었는데..."
"에? 그럼 바꿀 때 말했으면 좋았잖아. 네 마음에 드는 인물이 흔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그런 상황에서 마음에 들었다는 것은..."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난 나 하나 지키기도 벅차. 내 곁에 있으면... 틀림없이 위험해
질테니까..."
나에게 모든 것은 이성적인 판단이 우선이었다. 감성적인건... 글쎄, 내가 그렇게 대하는 것
은 민형이나.... 한신우정도?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그 사람이 자신을 지킬만한 능력이 없
다면 내 곁에 있을 수 없다. 내게 친구가 없는 두번째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었지. 학교에서
심하게 바보짓을 해야 했던 이유도 그런 것이고... 그렇지만 이런 내 처지가 불쌍하다고 생각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에게 동정받는 눈따위는 질색을 하기도 하지... 타고난 운명이니까.
이정도면 배부른 인생아닌가? 황제의 딸이라니... 하하. 거지의 딸도 있는데, 하필 황제의 딸
이라니... 난 내가 내린 결정과 판단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미리 대비책을 마련해 놓는 것 뿐
이다. 그러니 그렇게 안쓰럽게 볼 것 없어. 한신우....
"그런데 너희, 무슨 일이 있어서 날 찾아온 게 아니었어?"
"아아! 맞다. 지난 밤 사이에 전면전 선언이 들어왔어. 서울 제 2본부에 화룡파가 쳐들어 왔
다는 군. 어떻게 된 일인지 비밀기관들이 속속 다 들켜서 사상자는 없지만 부상자가 꽤 나왔
어. 아무래도 스파이가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의 행동 경로까지 모두 알고 있었어."
"아아, 아직도 그런 멍청한 짓을 하는 놈이 있단 말이야?"
"그래. 추적할까?"
"...음, 아니. 그냥 내버려둬. 잠시라도 즐겨서 자만하라 그래. 그래야... 무너졌을 때의 절망
이 더 심할테니까."
이런 내 말에 잠시 나를 뚫어져라 보던 민형이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애
석하게도 그 목소리는 마치 나 들으라는 듯이 들렸지만.
"넌 말이지, 가끔 이럴 때 제일 무서워. 너무 태연하게 사람 하나 폐인 될 말을 한단 말이야."
내가 뭘- 하고 입모양으로 말하며 침대에 다시 드러눕자 민형이가 고개를 저으며 내 팔을 끌
어 일으켰다.
"넌 청룡회주라는 직책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 황녀이기도 하지만 넌 청룡회의 목숨을
쥐고 있는 회주라구. 그들을 모두 죽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일어나."
"걱정마. 안 죽을테니까."
"안그래도 일어나야해."
민형이가 방방뛰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내 귀에 들려온 것은
신우의 낮으면서도 진지한 목소리였다.
"이환영이 와있어."
"뭐?"
내가 벌떡 일어나 침대에 걸터 앉자 신우는 잠시 끊어졌던 말을 이었다.
"1층의 손님방에서 기다리고 있다."
"오래..?"
"새벽부터."
"...흐음."
"만날거야?"
"당연히. 피할 이유가 없잖아? 그 녀석은 내 동생이라구."
"...후우. 일단 사람들을 대기시키겠다. 혹시라도 그를 따라온 자가 있을 지도 모르니까."
"마음대로. 그렇지만, 이제 모든 것이 밝혀진 이상 나도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테니 걱정
하지마. 비록 총이 주무기가 아니라도, 항상 지니고 다니니까."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그 말과 동시에 민형이는 환영이에게 가는 듯 방문을 나갔고 신우는 내 옷장으로 향했다......
잠깐, 내 옷장으로 누가 향했다고...?
"Stop! 너 어디로 가는 거야?"
"음, 미래 남편이 옷을 골라주는 정도도 못하는 거야?"
"....누가 미래 남편이래?"
"당연히 나지. 니가 니 입으로 말한 사실이잖아."
"......틀림없이 힘들꺼야. 난 누구처럼 철저한 계획을 세워 미리 만들어 놓은 길로 편히 걸어
가는 사람이 아니니까. 내 곁에... 청룡회와, 민형이가 있는 것으로도 충분해."
"괜찮아. 너의 그림자가 된 순간 그것에 대한 각오는 이미 마쳤으니까. 넌 네 길을 가. 내가
너의 뒤를 따를테니까."
옷장 문을 열고 나를 돌아보며 말하는 신우.
'괜찮아.... 너의 뒤를 따를테니까.'
너의 그 말이... 내 가슴을 얼마나 울렸는지, 너는 아마 죽어도 모를 거야. 아픈 길을 선택하
는 나지만, 누군가가... 내 곁에 있어준 다는 것. 누군가가...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걱정하지마. 이제부터 넌 혼자가 아닐테니까."
그는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밝은 빛을 보면서 한참을 무엇인가 생각하다 이내 눈을 감아버렸
다. 마치 끔찍한 이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전하."
"......."
"황녀님께서 전하를 만나뵙겠다 하셨습니다."
"...알겠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전, 황녀님의 아래에 있기는 하지만 전하를 누구보다 오래 지켜봐온 사람 중의 한사람입니
다. 황녀님의 지시로 전하를 언제나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랬나."
"전하께선 어떤 일을 하셔도 환희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정해져있는 운명이고, 지난 10
여년 동안의 우리의 노력이기도 하니까요."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
"물론이죠. 환희는 전하를 죽도록 싫어하고 있었으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지?"
뜻밖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이 방에 들어선 이후로 가장 큰 목소리로 민형에게
물었다. 민형은 그런 그의 반응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미세한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하던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혹시 전하와 환희가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
"전하는 아마 기억하시지 못하실 겁니다. 그 일은 환희에게는 너무 끔찍한 일이었지만, 당신
에게는 그저 신기한 어떤 것을 처음 본 날이기 때문이니까요. 그것이 철저한 계산하에 꾸며
진 극본이며 그 비극의 주연으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환희가 깨닫기까지 2년이 걸렸
습니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급하게 귀국한 이유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죠."
"...일본...에...? 아, 그래. 환희는 일본에 있었지."
"환희는 태어나서부터 6살때까지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황후께서 환희에
게 이용가치를 느끼고 손을 내밀어 주시기 까지... 6년이 걸렸습니다. 전하께서 황제가 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에 환희는 기쁜마음으로 그러겠노라 약속했고 그리고 전하께서 황태자로
거의 확신이 되어갈 때, 환희는 생명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바로 그 날, 전하를 만난 것이죠."
여기까지 일방적인 대화가 진행되자 그는 조금 진정하며 다시 자리에 앉아 민형의 말에 집중
하기 시작했다. 환희의 일이니까, 환희가 모든 것을 닫아놓고 살기까지 분명히 자신만 몰랐
던 어떠한 일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니까... 지켜주겠다고...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했는데...
"이후 환희는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황태자 감으로 생각하지 않게, 철저히...
있으나 마나한 황녀의 연기를... 일본 유학도중 검을 배우고, 청룡회를 세워 사람을 모아 한
제국의 최강의 세력을 만들고 알게 모르게 청룡회를 심어 현재 귀족들과 황족들 중에 저희의
감시를 받지 않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전하께서도 얼마전까지 감시를 받고 있었으나
현재 철수된 상태입니다. 환희의 명령으로."
"....어째서? 지금으로썬 내가 가장 위험한 존재일텐데."
"당신은 절대로 환희를 헤치지 못합니다."
"...어떻게 장담하지?"
"가지지 못할 것이라면 부숴버리는 전하의 성격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환희에게 해
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환희는... 전하와 둘이면서 하나니까. 전하에
대해 모르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전하께서는 환희에 대해 전혀 몰랐을테
지만..."
멍한 표정으로 다시 빛을 바라보기 시작하던 그는 나즈막히 민형에게 물었다.
"그렇게... 내가 싫다고 하던가."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슬프게 울리는 목소리로 그는 그렇게 물었다. 초점없는 눈빛
으로... 그저 먼 하늘을 바라보며.
"아니오. 환희는 전하를 죽도록 싫어하도록 노.력. 한겁니다. 자신의 동생을 죽도록 싫어할
만한 모진 사람은 아니니까요."
"어째서지?"
"당신을 떠나야 할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떠나다니?"
"당신은 지금 두 개의 키를 가지고 있지만 단 하나 밖에 사용하지 못합니다. 두가지의 결과.
그것 중 어느 한가지도 당신이 원하던 미래는 없습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뜻 모를 말을 하고 조용히 문을 열며 뒤돌아 나가는 민형을 보며 그는 다시 조용히 눈을 감고
민형이 한 말을 다시 되새겼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부디...그녀의 마음이 나에게로 움직이길... 선택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길... 간
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전하, 황녀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앉자. 그렇게 일어서 있지말고."
"응."
"그래, 무슨 일이야?"
내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이하는 환영이에게 앉으라고 말하며 나 역시 고풍스
러운 느낌의 쇼파에 앉았다. 용건을 묻는 나에게 환영이는 눈에 띄게 섭섭하다는 듯한 표정
을 드러냈지만 이런 것 따위에 일일이 마음쓰는 세심한 성격이 못되는 나는 조용히 녀석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슨 일인데?"
"내가... 무슨 일이 있어야만 널 찾아오나?"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상황은 그렇지."
빙긋이 태연하게 웃으며 내가 말하자 환영이는 꼭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
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 달라졌어."
"그래. 달라. 네가 본 나는 내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얼굴들 중 하나였을 뿐이니까."
"...환희야."
"너에겐 미안하지만, 나의 원망. 그리고 복수심은 널 아끼는 마음을 너무 뛰어넘어 버려서 말
이야. 난 네 손을 들어줄 수가 없다."
"네가 다쳐."
"내가 다친다고? 환영아. 아쉽게도 넌 무엇인가를 착각하고 있어. 니가 날 청룡회로부터 지
켜줄 거라고 했지? 그러나 지금껏 정작 날 지킨 것은 너로부터 청룡회가 날 지켰던 거야. 알
겠어? 난 네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청룡회의 주인인데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바보도 아
니고 연약한 여자도 아니야."
단호한 내 말에 환영이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알아. 네가 나보다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는 않다는 것. 그렇지만... 난..."
"네가 날 지켜주겠다고 맹세한 그 날, 난 이 한제국을 멸망시키리라 마음먹었다. 널 불행하게
만들겠다고... 그렇게 맹세했다."
".........어..어째서?"
"넌 기억나지 않을... 그 날의 나의 마음이... 날 이렇게 만들어버렸어. 그러나 나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 단지... 내가 미울뿐이다."
...내 스스로의 편안함을... 내가 용납할 수 없어 하는 것이니까.
"어째서...?"
"한없이 나약한 날... 내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던 거야. 그리고..."
편안하다면 분명히 배부른 소리가 나올 것이 뻔하니까. 황제의 딸로써... 이만큼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다행인데... 겨우 약간의 차별따위를 받았다고 해서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아닐테니까... 나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훨씬 많을 테니까. 더이상 약해지지 않으려면 나
는 나를 미워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채찍질해야 했던 것이니까... 그러니까...그
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줘. 환영아.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난 약하지 않아."
"그만 둬 줄 수는 없는 거야?"
"그건 내갸 해야 할 말인 것 같은데... 안그래?"
"......."
"나에게는 약속이고 그에게는 맹세. 난 그것을 어길 수가 없다. 아마 민형이가 뭔가 말했겠
지? 그 녀석과 너의 행동패턴은 내 눈에 보이니까 아마 99퍼센트 그랬을거야. 분명히 너에게
좋은 말은 안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말이 맞지?"
"......"
"너에게 두가지의 키가 있다는 것도... 말했을거야."
눈에 띄게 굳어진 표정으로 환영이는 주먹을 꽉쥐며 고개를 숙여 내게서 시선을 떼고 묵묵히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을 쳐다보았다.
"하나는 붉은 색의 방으로 들어가는 방의 열쇠이고 하나는 푸른 색으로 들어가는 방의 열쇠
야. 하나는 다수의 행복이고 하나는 소수의 행복. 하나는 넓은 하늘, 하나는 깊고 푸른 바다.
하나는 나의 행복, 하나는 너의 불행. 자.. 어떤 것을 선택하겠어?"
"....나의 불행?"
"이 힌트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해 줄 것이 없어. 다만 네 선택에 따라 제국과 제국민, 그리고
너와 황족. 그리고... 나의 운명이 갈린다는 것만은 알아두길 바래."
"...너의 행복. 다수의 행복 그리고 넓은 하늘... 붉은 색 방의 열쇠를 선택하지."
"후회 없겠어?"
"물론."
"고마워. 하지만..."
"....."
"분명히 넌 후회할거야."
단호한 내 말에 고개를 들어 잠시 내 눈을 쳐다보던 환영이는 이 방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슬프도록 환한 미소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상관없어. 너만 행복하다면... 난 그것을 위해 존재했으니까. 네가 행복하지 않다면... 내 존
재의 이유는 없으니까....."
그래. 넌 그런 녀석이었지... 나의 행복을 선택해주어서 고마워. 그렇지만... 넌 후회할 거다.
틀림없이. 지금도... 후회하고 있잖아.
"일주일 뒤, 후계자 발표를 하겠다."
"....."
"나의 동생으로써. 보러와 줄거지?"
"....물론."
자,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시작할까요?"
"잠시. 대기해."
시간은 빠르면서도 천천히, 그러나 강물처럼 매끄럽게 흘러 어느덧 약속한 발표일을 이틀 남
겨둔 월요일이다. 발표는 바로 이틀 후, 수요일에 온 제국민들이 모인 곳에서 발표된다. 그러
나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어서인지... 나와 신우, 그리고 민형이의 몸은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빴다.
"그런데 나디르 공작가에는 무슨 일인겁니까? 그 거대한 저택이 활활 타오르니 속이다 후련
하군요.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괜찮아. 쓸만한 건 전부 빼서 평민들에게 풀어버렸으니까."
"역시, 우리 회주님이셔. 멋지시다니까요. 후후."
"아아. 그럼 나디르 공작은 어떻게 된 거죠? 지금쯤 꿈나라에 빠져있었을 텐데."
얼굴에 복면을 한 청룡회 일원들이 저 멀리에서 활활 타오르는 나디르 공작의 저택을 보며
속이 후련하다는 듯 한마디씩 이어갔고 나는 지금쯤 나에게 욕을 퍼부으며 황후와 대피를 하
고 있을 나디르 공작을 생각하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 뚱뚱한 몸매를 얇은 잠옷으로 유
감없이 내보이며 달리고 있겠지. 불과 함께 약간의 협박을 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내가 피식 피식 웃고 있자, 청룡회 일원들은 나를 무섭다는 듯이 힐끔 힐끔
쳐다보더니 내가 휙하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서로들 모르는 척 헛기침을 했다.
"나디르 공작을 걱정할 때가 아닐텐데? 우린 잠복중이라구."
"긴장감이 제일 없는 것은 회주님이세요."
"맞아. 그리고 이런 시시한 싸움은 재미없어요- 무슨 긴장감이 느껴지는 싸움이래야 긴장하
지. 겨우 이런 조무래기들을 처리하려고 잠도 못자면서..."
"한마디만 더 해라."
"......"
"자, 이제 슬슬 움직이려는 모양이군."
"후후. 저 녀석들... 이미 자신들의 행동상황이 다 들통났다는 거 모르고 있겠죠?"
"당연하지! 저 녀석들은 머리가 나쁘니까. 우리 회주와 비할 머리가 없잖아. 후후."
아부성이 짙은 말을 하는 녀석들을 향해 약간 손을 들어보이며 출발대기 명령을 내리자 그들
은 이내 장난기 어린 모습을 지우고 우리의 아래로 딴에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사내들을 주
시했다.
어떤 빌어먹을 스파이에 의해 우리의 비밀이 유출되고 화룡파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다는 것
은 한제국의 개라도 아는 사실. 그러나... 아마... 이것은 몰랐을 걸.
"...청룡회의 비밀따위는 애초에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이었다는 것을..."
나즈막한 내 말소리에 그들은 움찔하며 일제히 고개를 들어올려 나무에 잠복하고 있던 우리
들을 바라보았고, 나는 마지막 말을 이으며 청룡회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올리고 나무 아래
로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알았을리가 없지!!"
「 한제국의 조직 일인자는 사라지지 않는가. 」
「 화룡파의 처참한 패배 」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지요?"
".....죄송합니다."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았습니까?"
"......."
"당신을 너무 믿은 제 잘못이로군요."
"죄송합니다."
황금빛 옷을 입은 요염한 미녀 앞에서 검은 머리의 한 소녀가 깊이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
는 말만을 반복했다.
"...기어코 나디르 공작의 저택에까지 불을 내고, 화룡파를 해체시켜버리는군요..."
오늘 아침 제국 전체를 떠들썩하게한 내용이 담긴 신문을 구겨버리며 황후는 고운 얼굴에 주
름을 만들며 인상을 썼다. 그리고 그 때.
"호오, 자꾸 그러면 예쁜 얼굴에 주름이 생긴답니다- 주름이 생기면 성형한 이유가 없잖아
요. 안 그런가요?"
"...누...누구냐!"
"하하, 황후마마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 청룡회의 행동대장 단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정
의의 사도로 온것이죠."
"하, 정의의 사도라고? 도대체 여기서 죄를 지은 자가 누가 있다는 말이냐!!"
소리를 지르는 황후를 무시한 채 단의 시선은 오로지 단 한사람에게 고정되어있었다. 그리고
검은 머리의 소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 순간. 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작은 단도를
소녀를 향해 던지고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진, 청룡회의 머리로써 너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배신한 것에 대한 대가는 오로지 죽음
뿐이다. 네가 아니길 바랬지만... 넌 감추기를 원했지만... 이미 회주께선 다 알고 계셨어. 네
가... 몰래 자료를 빼내고 있다는 것도. 그게 거짓이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몰랐다. 단지 그
분만이 아셨을 뿐. 넌... 언제까지나 그 분의 아래다. 오를 수도 꺽을 수도 없는 나무를 밟고
올라서려던 너의 어리석음을 탓해라."
수진은 눈을 부릅뜬 채로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청룡회를 배신한 것에 대한 대가는 오로지... 그것 뿐이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정리 되어 가고 있어."
불타오르는 세 채의 저택을 지붕 위에서 바라보며 말하자 '그러게' 하고 조용히 동조한 신우
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오른손을 내 눈위로 올리고는 나즈막히 말했다.
"울어도 괜찮아."
....라고. 이제...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하늘... 그토록 바라던 푸른 하늘을 이룰
날이...
"과연... 장담했던 대로 다수의 행복을... 나의 행복을 이룰 수 있을까...?"
"틀림없이. 내가 있으니까."
"...그 놈의 병은 언제쯤 고칠래."
"이게 무슨 병이야. 사실을 말하는 건데..."
신우는 지금껏 진지했던 목소리는 마치 꿈이었다는 듯, 처음의 그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나
에게 말하며 붉은 제국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널 처음 본 그 날부터 이미 내 결정은 끝났었는지도 모르겠다."
"......"
"내 모든 마음이 널 향하기로...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결심이었고 결정이었어."
"......"
"행복하자.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고, 그럼 모두가 행복해 질거야."
"...고마워."
"천만에."
서서히 태양이 하늘을 향해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날이다. 오늘 모든 것을 마
쳐야 한다. 그 누구도 깨닫지 못하도록...
"왔느냐."
"예."
"들어오너라."
환희는 화려한 문을 넘어 천천히 넓디넓은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높은 금빛 의자
에 귀찮은 듯이 앉아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제국의 아버지. 황제였다.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착오는 없습니다. 예상 밖의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결론은 언제나 하나였으니까요."
"그래. 네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라고는 없지... 이제 무엇이 남은 거지?"
"모든 것이 정리되어가고 있습니다. 나디르 공작에게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몸과 이름뿐이
며, 반란을 꽤한 황족 그리고 귀족들의 재산은 전부 몰수. 어젯밤 그들의 주동자의 집에 불을
질러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순간적으로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떠올린 환희는 황제에게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슬픈 연극의 결말을 보는 것이죠. 폐하께선 그저 그 결말을 지켜보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래. 장하구나."
"....물론. 내가 누구인데요. 제 1황녀잖아요."
안타까운 목소리로 환희에게 말하던 황제는 고개를 숙인 환희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
다. 그와 동시에 놀란 듯한 환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번쩍 들어올리다, 이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싫어했고 지금은 그 감정이 모두 풀렸다해도... 황제는 황제. 그녀
가 후계자로 선포된 이후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을 정도로 숙일 필요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녀는 황제의 눈을 바로 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했다."
"황제는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환희야."
"....당신은... 내 아버지입니다.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말아주십시오. 만약 당신께서 약
해진다면... 내가 너무도 허무할테니까."
뜻밖의 말과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따스하게 불러준 황제... 어딘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만 같아서 환희는 애써 밝게 미소지으며 처음으로 황제의... 자신의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
다보고 말했다.
"나는 강하니까 아버지도 강하셔야 합니다."
"후우, 이제 어찌하실 예정입니까? 황제는 만나주지도 않고, 이환영은 어디론가 잠적... 게다
가 우리는 반역자로 몰려서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상태입니다. 당신께서... 어떻게 해주실 수
는 없는 겁니까?"
이곳은 황후의 궁에 위치한 서재. 둥그런 탁자에 중년의 남녀 대여섯명이 차를 마시며 어딘
지 모르게 초조한 얼굴로 가운데 앉은 미모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걱정마십시오. 이환희는... 제 손바닥 안이니까요."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우리는 이제... 더이상 당신
을..."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이라도 나가셔도 좋습니다. 나중에 후회하고 싶다면 말이지요."
입에 요염한 미소를 머금은 미모의 여자, 황후가 차를 한모금 마시며 그들에게 말했다.
"환희는 내 딸이예요. 게다가 난 환희를 위해 한번 목숨을 버리기도 했고... 내가 십여년 동안
모습을 숨겨가면서 어둠 속에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환희는 내 말이라면 죽고
못살정도니까 걱정마세요."
"그렇지만 이미 이환희는 당신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겉으로야 그렇지만 아마 속 마음은 숨기지 못하겠지요. 게다가... 황제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이 연극의 결말은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이것이 황후의 크나큰 착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을
위에서 도청하며 유유자적 구경하고 있는 청룡회와 전혀 도와주지 않을 황제뿐이었다.
"황후가 착각이 심하네요."
"뭐, 일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니까. 저래뵈도 능력있는 사람이니까 잡아 넣는 재미는 쏠
쏠할거야."
지붕 위에 드러누워 오른쪽 귀에 도청장치와 연결된 이어폰을 꽂고 입에는 청룡회 일원 중
누군가에게서 빼앗은 불 없는 담배를 입에 물고 하늘을 바라보며 오랜만의 미소를 지었다.
"한신우는?"
"어딘가에 있겠지."
"무슨 사고를 치려고 사라진거냐. 그녀석은."
"사고라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환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에선가 신우가 천천히 걸어나오며 환희의 곁에 앉으며 환
희의 손에 노란색 서류봉투를 쥐어주었다.
"원하던 정보다. 구하느라 힘들었어- 삼일 밤을 샜다구."
"너 어제 내방에서 잤어."
"아, 그랬던가...?"
뭔가 뉘앙스가 굉장히 이상한 환희의 말에 청룡회 일원들은 붉어진 얼굴로 일제히 고개를 돌
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신들만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데 진짜 처음이야?"
"당연하지. 날 뭘로 보는 거야?"
"너 정도라면 꽤 능숙할 줄 알았는데..."
게다가 더해지는 더 이상한 뉘앙스를 지니는 말들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
는 청룡회 일동...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그들의 모든 기대를 져버리고야 말았다.
"바보같기는. 넌 역시 최첨단 문물을 접하지 못하고 살아온 거냐- 그렇게 안생겨가지고는...
그 게임이 얼마나 오래된 건지 알기나 해? 나도 굉장히 어렸을 때 해보고 안 한거라구. 1945
에 빠져서 날 밤을 새다니. 그것도 이 바쁜 시기에."
"미안, 미안.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워낙 바빠서 말이지. 그렇지만 난데없이 닌텐도와 팩을 찾
아온 네 잘못도 있다구."
"연결된 건 다 분리 했어? 설마 그대로 켜놓은 건 아니겠지?"
"...아, 깜박했는데."
"바보야!! 내 궁엔 하인도 단 한사람도 없다는 걸 잊은거야? 이번에 전기세 나오면 알아서 부
담해."
"내가 왜- 겨우 그정도 가지고... 거기다 나 거지인거 알잖아. 너한테 무상으로 봉사하는 걸
보면 몰라?"
빙긋이 웃으며 환희에게 말하는 신우.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알게 모르게 이유모를 한숨을 내
쉬는 청룡회원들이었다.
"회주, 회의가 끝난 것 같은데요."
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 양반다리를 하며 앉은 환희는 이어폰으로 들리는 목
소리에 집중했다.
"그럼 연락기다리겠습니다."
"물론이죠. 저만 믿으세요. 호호."
요사스럽게 웃는 황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환희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고 그런 환희를 바
라보는 신우는 그저 빙긋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귀.엽.다.는.듯!
모두 방 밖으로 나갔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의 정적후 나디르 공작과 황후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들려왔다.
"정말... 괜찮을까...?"
"물론... 날 못믿는 건가요?"
"아니, 물론 당신을 믿어. 하지만..."
"그 바보같은 부녀가 스스로의 함정을 파고드는 꼴을.. 우리는 그저 구경만 하면 되는 거예
요. 우리의 각본과 연기는 완벽했잖아요? 이환희가 지금 냉정하게 있는 것 같아도 마음 속
깊이 그 일이 새겨져 있을 것이 분명해요. 그러니 내 말을 들어 줄 것이 뻔하죠. 당신과 나의
예상대로 그 아이는 정에 굶주려 있었으니까요."
"....그런가."
그러나 나디르 공작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류를 자세히 알수는 없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
서 불길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예전의 그 파티에서... 차가운 눈빛의 환희가 자꾸만 생각나
도저히 황후만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틀림없이 자신들이 이기리라 생각했지만, 이젠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걱정말아요. 다 잘될테니까..."
환하게 웃음지으며 황후가 나디르 공작에게 안겨오자, 공작은 이 불안함을 다 지우고 싶다는
듯... 황후를 세게 끌어안았다. 이것이 죄임은 알고 있으나, 이제 꼭두각시 황제따위는 무서
워 할 바가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황제는 언제 제거하죠?"
"황태자 발표를 하고 나서 제거해야겠지.. 나중에 딴 소리를 하면 골치아프니까."
"당신과 언제나 함께 일 수 있어서... 저 정말 기뻐요."
"나도..."
"야망이 없는 황제따위... 처음부터 싫었으니까... 얼른 일을 성사시켜야 겠어요. 그 늙은이를
없애는 것이 최우선이야."
"물론... 그 일은 나에게 맡겨.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주지. 후후."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나디르 공작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환희는 이어폰에 달
린 빨간색의 조그마한 단추를 누르고는 아래를 향해 특수제작 된 소형카메라로 두 사람의 모
습을 담았다. 모든 대화가 녹음된 테입, 그리고 이 서류봉투에 든 사진들과 서류- 덤으로 지
금찍은 사진까지... 이제 증거는 충분했다.
"자, 이제 가볼까?"
환희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검의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불행했던 자신
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드디어 다가온 것이다. 아마... 황후가 죽고 없었더라면 더
괴로웠을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환희는 웃었다. 실로 유쾌한 날이 아닐 수 없다. 달
이 유난히 밝은 날이었다.
「 황후, 나디르 공작- 의문사? 타살? 」
「 청룡회는 언제나 정의다. 」
「 모든 것은 밝혀졌다. 」
「 그들은 어째서 반역을 모의했는가? 」
「 10여년에 걸친 연극, 황태자를 노리다! 」
드디어 운명의 날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화려한 금빛 궁전. 크리스탈 샹들리제가 천정에 위태롭게 붙어있었고 패션쇼라도 하는 듯 황
제와 오늘의 주인공인 황태자가 등장할 길이 홀 한가운데를 가르며 황금빛 의자 앞까지 이어
져 있었고 긴장된, 혹은 들뜬 분위기의 손님들이 무대 옆으로 위치한 테이블에서 삼삼오오
모여 별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 모습을 한 테라스 옆의 나무 위에서 구경을
하던 환희는 그들의 모습에 혀를 차며 위태롭게 가는 나뭇가지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
다.
"가식적이긴. 저런 것들이 귀족이라고... 역시 이 한제국은 금새 망하고 말거야."
짹짹거리며 평화롭게 날아다니는 참새가 차라리 저 귀족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왜 저런
것들이 선택받아 태어나, 성실한 평민들보다 못한 두뇌로 돈이나 펑펑쓰며 사치스럽게 살아
가는가... 이 한제국이 제대로 살아나려면 이 쓰잘데기 없는 신분제도 먼저 바꿔버려야 할테
지만... 어쨌거나 자신도 귀족, 더 나아가 황족이므로 아마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할 것 같
았다. 언젠가, 누군가는 하지 않겠느냐는 태평한 생각으로...
"하아, 여기 있었구나."
나무 아래서 누군가의 숨찬 목소리..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다급함과 짜증스러움을 읽어낸 환
희는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어쨌거나 마무리는 지어야 할 거 아니야. 얼른 준비해."
"준비할 게 뭐있어. 이대로 갈건데?"
환희는 전혀 자신의 옷차림에 대한 자각이 없는 듯, 태평스럽게 말했고 그에 화가 나는 것은
어쨌거나 이 나라의 재상이 되어야 하는 민형이었다.
"제발 부탁인데 이것만큼은 잘하자- 응?"
"이게 뭐 어때서."
"즉위식이나 다름없는 행사야. 지금 저기 있는 사람들 안보여? 다들 드레스와 정장을 입고
있다구. 이런 상황에서 캐쥬얼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것도 찢어진 바지가?"
"굉장히 어울리잖아."
"........"
"누차 말하지만 이건 정말 재미 없는 일이라구. 아아, 나에게 많은 걸 바라지마. 이정도 하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능력의 한계를 초과했다구-"
"너의 능력에 천만분의 일도 다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어."
"흐음, 설마."
"남 일처럼 말하지마."
민형은 또 다시 한숨을 내쉬며 한없이 어른스럽지만, 어떻게 보면 또 아이같은 자신의 주군
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중... 그의 뒤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이제 10분 밖에 남지 않았는데..."
앞으로 환희의 남편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남들이 인정하나 환희 스스로가 인정
못하고 있는 사람. 한신우였다. 레드폰 공작가의 양자이자 제국의 그림자였던 남자... 그는...
"아아, 가야지."
...아마 환희에게 빠진지 오래가 아닌지 싶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보고
서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정도니...
"후우, 이제 마지막이군."
"...그래."
"잘 해. 너라면 분명히 잘할 수 있을테니까."
"물론. 날 어떻게 보는 거야-?"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려 신우의 곁에 서며 말하는 환희를 보고 신우는
또다시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그녀의 걸음에 맞추어 홀의 입구로 향했다.
"황제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홀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문지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황제의 뒤를 따라
오늘의 '무대' 위로 올랐다. 이제... 우리의 연극의 결말로 다다르고 있었다.
내가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나가자 홀에 있던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대놓
고 비웃는 바보들도 있었다. 병신, 난 이자리에 제국의 후계자로써 오른거야. 넌 끝이라구.
"그런데, 정말로 제국민 앞에서 선언하지 않아도 괜찮겠느냐? 알고 있겠지만, 귀족들은 교활
해. 전부 마음을 돌려 네가 선언했다는 것을 못봤다고 하면 그만이다."
"걱정마세요. 생각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아버지도 이 따위 귀족들에게 고이 당할 분이 아
니라는 것을 이제는 아니까. 겁먹을 필요도 없겠죠. 유약한 황제를 꾸미기 위한 청룡회의 작
전도..."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됐는지 황제는 그대로 자신의 자리에 올랐고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서 황제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와 제국의 부름을 받은 후계자 이환희, 인사드립니다."
"..그래. 어서오너라."
"나, 제 1황녀 이환희는 후계자...."
마지막 대사를 남겨두고 있을 때,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홀의 오른쪽 중앙이
었다.
"말도 안돼!! 너같은 게 어떻게!!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 교활한 마녀주제에!!!!"
.......이건 극본에 없던 반전인가? 피식, 왜 생각못했을까... 하고 나는 내 스스로의 아둔함을
비웃으며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하영... 나디르 공작과 황후의 불륜의 결과물이자...
나에게 약혼자를 빼앗긴 비련의 여자.. 엑스트라지. 엑스트라는 그냥 지나가는 거다. 네 자리
는 여기 없어.
그러나, 나는... 잠시 후, 나의 자만감을 비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바보였으니까.
"무슨 소란이야, 이게."
"억울해. 억울해... 아빠도, 엄마도, 약혼자도... 왜 넌 다 가지는 거지? 이제 제국까지 가지겠
다고? 네가 뭔데!! 너만 없었어도 제국은 이환영의 것이 되었을 거고... 그렇게 되면 아빠와
엄마는 세상에 나가 당당하게 살 수 있었는 데..."
"어째서? 나디르 공작이 황제가 된 것이 아니고 환영이가 된 것인데... 어떻게 두 사람이 잘
될 수 있는 거지?"
"당연하잖아! 애초에 황자는 꼭두각시였으니까! 넌 그것도 몰랐잖아. 엄마가 환영이에게 널
감시하라고해서, 그래서 환영이가 네 곁에 머물렀던 거란 말이야!!"
...몇 톤짜리의 헤머를 머리에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것이었나... 정작 속은 것은 나
였던 걸까...
"네 스스로 천재라하지만 넌 결국 바보였어. 엄마의 극본에 놀아난 거라구!!"
"...그래? 그럼... 왜 그 극본에서 내가 둘을 죽일 것이란 것을 예상 못한거지?"
"죽일 수 없었잖아!! 치사하게 뒤에 숨어버려놓고!! 남을 시켜 죽인 주제에!"
......그래. 그것도 사실이지..
그 날, 우리는 공격을 시작했고 두 사람이 지쳐버렸을 때... 나는 내 검을 황후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결말은... 나로 인한 연극의 결말은 내가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정말로, 날 죽일거니?"
"......"
지친 표정의 황후가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이렇게... 소름끼치도록 싸늘한 미소는 처음이
었다. 그녀는 아마 알고 있었는 지도...
"넌 날 못죽여. 알고 있지? 난... 너를 구했고, 네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다 죽는데 혼자서라도 살고 싶나요?"
"물론. 난 이기적이지."
"그렇지만 이미 쓰여진 결말은 바꿀 수 없어요. 반전은 없어."
손에 힘을 주었더니 황후의 목에서 가느다란 붉은 선이 그어지며 한방울 한방울... 피가 내
칼을 타고 땅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러한 순간까지도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너는.. 절대로 날 죽이지 못한다고...
"죽여라. 제국의 어머니셨으니 결코 마지막이 더럽지 않도록."
...그래. 난 죽이지 못했다. 그녀의 예상을... 뒤엎지 못했다. 그녀가 죽었을지언정... 나는 아
직 그녀의 극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모든 것을 빼앗고, 네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해?"
".....그래, 그렇지 않으면 어쩔건데."
유치한 말싸움을 하면서도 나는 너무 자만하고 있었다. 원망과 절망이 가득찬 여자가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하영은 빠르게 뛰어나와 나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머릿 속에
서는 빨리 피하라고, 피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지만- 몸은 다섯개의 단검이 여기저기서
날아오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고 지시를 거부하고 있었다. 아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
반응할 틈이 없었다는 것이 더 맞았는 지도... 나는 조금 지나서야 내 오른손이 곧 닿을 허리
춤에 검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막 검을 뽑으려던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내 앞을 막아섰
다.
챙, 챙, 챙, 챙. 네번의 차가운 마찰음이 들리고 내 앞을 막아섰던 사람이 경비병들에게 소리
쳤다.
"어서... 사로잡아라!!"
...신우였다. 그러나 나는 곧 생각해내고야 말았다. 나에게 날아온 검은 다섯개라는 것... 마
찰음은 네개 밖에 나지 않았다는 것...
"신..우야?"
내가 조심스럽게 신우의 이름을 부르자 서서히 나를 돌아본 신우는 얼굴에 진땀을 흘리며 고
통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이내 애써 미소지으며 말했다.
"바보야... 왜 중요할 때만 여자가 되는 거야?"
"......너..."
"괜찮아...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반드시..."
완전히 뒤를 돈 신우의 왼쪽 가슴부근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곳에는 아까 던
져졌음이 분명한 단검이 박혀있었다.
"한신우!!"
"...괜찮아... 어서... 끝내야지... 네가... 바라던 것을... 이룰 때가 왔잖아..."
"의사를 불러!!! 어서!!"
홀의 사람들은 다급하게 움직였고, 이하영은 이미 근위병들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사라지며
나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너때문이야... 또 너때문이라고!!! 신우오빠!!!"
아마, 이하영은... 신우를 정말로 좋아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린
듯 붉은 피만이 내 눈안에 들어왔고 신우가 달려온 의사들에 의해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
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침 등장하는 환영이를 보고... 이제
서야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조용."
나의 한마디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사라졌다.
"...나 제 1황녀 이환희는... 제국의 후계자로... 제 1황자 이환희를 임명합니다. 이 모든 것의
권한은 제국의 황제. 그리고 제국의 그림자. 제국의 후계자의 이름으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천천히 뒤돌아서 문을 향해 걸었다. 놀란 눈을 하고 있는 환영이를 천천
히 스쳐서 홀 밖으로 나와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어떻게... 됐나요?"
"...아직은 경과를 더 지켜봐야..."
"......가보세요."
"예."
나는 내 궁의 문을 걸어잠그고 의사와 일부 사람들만을 들인채 일주일째 생활 중이었다. 후
계자 발표가 끝난 직후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것과는 달리 일주일이나 머문 것은 아직도 의식
불명에 있는 신우 때문이었다.
다행히 단검이 조금 짧았고, 심장부위를 비켜나갔기 때문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이유
를 알 수 없이 신우는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왜... 깨어나지 않는 거지?"
내가.. 아프길 바라는 거야? 그런거... 너도 바라지 않을 거잖아...
'괜찮아...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반드시...'
죽은 듯이 침대에 누운 신우를 바라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바보였나보다...
그동안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아는 것은 몇가지 없었던 것이니까...
내가 환영이를 속인 것이 아니라 환영이가 날 속였다는 것과... 내가 언제까지나 그들에게 패
배자 일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한신우를 좋아한다는 것... 이제 알았어..."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빨
리...? 아마 자만심에 빠지지 않고 조금만 더 찾아봤더라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 사실... 그
리고... 조금만 더... 스스로에게 솔직했더라면 알 수 있었을 사실... 좀 더 빨랐다면... 신우의
말대로 위급상황에서만 연약한 여자가 되는 바보같은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난 후회할 일
도, 화를 낼 일도, 스스로를 비웃을 일도 없었을텐데...
나는 웃기지도 않는 이런 생각에 피식하고 웃으며 신우에게 좀 더 다가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전에는 이 녀석이 몸이 약하다고 했을 때 비웃었지만, 이렇게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
는 신우를 보니 웬지 믿어질 듯도 했다. 괜히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링겔때문에 이불 밖으로
나와있는 손을 잡고 신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그러다가 난 조용히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혼잣말이란거... 참 쓸쓸한 거라서... 제일 싫어하는 일인데...
"지켜주겠다는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 환영이는 날 지키겠다고 해놓고 지키지 못했으니까...
아무것도 없던 나를. 지켜줘서 고맙다."
다 버리려고 했던 나를. 잡아줘서 고맙다.
쓰러져 버릴 것 같은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
니가 칼 맞은 것에 대해서는 고맙다고 하지 않을거다. 넌 날 지켜주기로 약속했고, 약속을 지
키는 것이 당연하니까. 하지만...
"...좋아해. 나에게 감정을 느끼게 해줘서. 고마워."
나에게 가슴이 아플만한 떨림을 가르쳐줘서... 고맙다.
"......고마우면, 갚아라."
잔뜩 쉰 목소리로 내 머리맡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한신우...."
황급히 고개를 들어 신우의 얼굴을 바라보니. 신우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그러나... 내
가 붙잡고 있었던 신우의 손이, 이제는 나를 잡아왔다.
"니가 하도 불러서... 가던 길을 되돌아 왔어. 사실은... 불러주길 기다리면서, 아주 천천히 가
고 있었거든."
"...잘했다. 바보야."
"고맙다. 바보야."
이제... 모든 것이 끝났고... 이제...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었다. 조금 더 행복한... 결말로.
"난 안울어. 알고있지?"
"그래. 울지마. 니가 울면 슬퍼..."
"정말 안 울어. 난 강하니까..."
"그래."
"절대로..."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말하는 내 얼굴 아래의 하얀 침대시트는 투명하고 뜨거운 물방울로
젖어가고 있었다.
"후아! 기분 좋-다!"
푸른 바다. 그보다 푸르른 하늘.
"한신우- 아침먹어!!"
"아아, 응. 그런데 오늘 어디 나가? 옷차림이."
"응. 약속이 있어."
"약속?"
"응. 늦진 않을거야."
"...그래."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신우에게 웃어주며 천천히 걸어서 바닷가로 향했다.
우리는 신우가 깨어나고 회복이 되는 즉시 아무런 통보없이 이곳으로 왔다. 바다가 보이는
멋진 별장. 언제고 도망가고 싶을 때 오고싶어 예전에 아무도 모르게 사두었는데 설마 이렇
게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한참을 걸어가니 저 쪽에 검은색 벤츠들이 줄지어 서있고, 차들을 경호하는 듯-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차 옆에 서있었다. 그 사이로 간간히 아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끼어있었기에
나는 주저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왔구나."
이젠 정말로 황태자가 되어버린 나의 쌍둥이 동생, 환영이가 중앙에 주차된 차에 기대어 바
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묻지 않지?"
"뭘?"
"...널...속였잖아."
"나도 널 속였잖아. 뭐, Same- Same. 다 똑같은거잖아."
"그래도... 넌 날 믿었잖아. 난 널... 이용한거라구."
"그래. 넌 날 이용했지."
담담한 내 말투에 환영인 고개를 돌려 이제서야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와 바다를 담고
있는 환영이의 눈은... 굉장히 쓸쓸해보였다.
"하지만. 니가 날 바라보는 눈이 진심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그걸로 된거야."
"...환희야."
"제국을 부탁한다. 동생아. 난... 제국이 싫다. 어딘가에 매인 것보다... 자유로운 하늘이 좋
다. 네 선택이잖아. 나의 행복- 이라는 거..."
"......."
"귀족에게 특권을 주기보다, 평민에게 특권을 줘라. 그들이 있기에 이 한제국이 있는 거니
까..."
"...응."
"그리고... 행복해줘. 내가 너무 죄책감 느끼지 않게..."
"......너도... 행복해야해. 내 선택을 헛되게 하지 않도록."
"응. 가끔 궁에 갈게. 그렇지만, 난 푸른 바다와 하늘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자주는 안갈거
야. 난 언제나 그 궁에 있으면 답답했거든."
"...응... 그리고... 하영이는..."
"그냥 풀어줘. 그 애도.. 나름의 사정이 있잖아. 한신우도 말끔히 나았고, 나도 멀쩡하니까...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심정... 아마 굉장히 절망적이었을테니까... 그리고... 지금
아마 후회하고 있겠지? 그 땐, 제 정신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었을테니까... 용서하겠다고 전
해줘."
"...고마워."
다시 쓸쓸히 바다를 바라보는 환영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환영이는 내 손을 잠시 바라보더
니, 이내 마주잡았다.
"니가 이겼어."
"...아니, 난 패배자야. 이미 너에게 내 모든 것을 들켜버렸으니까."
"웃어라. 진정한 승리자는 웃는거니까."
"......."
이날 난... 내가 환영이를 만난 이후로 가장 아름다운 환영이의 미소를 보았다. 우린... 틀림
없이 해피 엔딩으로 끝날 거야. 그렇지?
"...사랑해.... 좋아해 .... 누나."
뒤돌아선 나에게 환영이는 그렇게 말했다.. 뒤돌아 보지 않아도 녀석이 울고 있으리란 건...
그리고 웃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바보야."
"읏, 또다!!"
"바보. 넌 생긴 건 안 그렇게 생겨서 진짜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새벽 4시 30분. 잠이 안와서 3시쯤 물을 마시러 나왔던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진지하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신우였다.
"왜 그러고 있어?"
"....음, 잠이 안와서... 넌?"
"나도."
"......."
"......."
"......."
"...하고 싶은..말... 있지?"
"......."
"해봐. 답지 않게 그러고 있으면 답답해."
".....후우...오늘...누구 만났어?"
귀여운 놈. 말 안해준다고 그걸 또 가만히 있다가- 궁금하긴 한데, 이제와 물어보기도 그렇
고... 해서 지금껏 고민하고 있었던 거겠지. 그렇다고 이렇게 새벽까지 고민할 건 없을..텐데.
"환영이."
".....뭐?! 이환영을?!"
"응."
"뭐...라고 그래?"
"왜. 뭐가 걱정 돼?"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게임할까?"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의 게임은... 내가 전에 그토록 구박했던 게임, 1945... 겨우
이런 간단한 비행기 게임을 못해서 - 지금 이렇게 한시간 반동안 열을 올리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게임은 더럽게 못한다니까.
"환희야."
내가 한참 게임에 집중하고 있을 때, 이미 Game Over 되어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신우가 갑
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왜."
"...떠나지 않을거지?"
"뭐?"
"그럼 영원히 곁에 있어주라."
"......한신우-?"
"니가 곁에 있어준다면, 굉장히 행복할 것 같거든."
"......너...설마."
"응. 설마 프로포즈야."
......빌어먹을 자식. 아무튼 프로포즈 한 번 더럽게 폼 안나게 해요.
"울지마라. 넌 강해서 울지 않는다고 했잖아."
"바보. 이런 상황에 프로포즈를 하냐!! 너 때문에 게임오버잖아!!"
"응. 미안."
"...아, 진짜..."
"곁에 있어줄거지?"
빙긋 웃는 신우의 이 말을 뒤로 나는 난생처음 남자의 품에 안겨 울었다.
짜증나게도... 너무... 행복하다.
이렇게 나는... 한신우의 깊은 수렁에 깊이 빠져버렸다.
소설제목 : ※※ 이중인격 황녀, 그의 수렁에 빠지다! ※※
작가명 : 비휴
E-mail : be_rain624@hanmail.net
연재장소 : 10대‥ 새싹소설방①
총편수 : 총 25 편 완결
장르 : 로맨스/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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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팬까페 : 위드비휴WITHBHUE: http://cafe.daum.net/Bh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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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휴] ※※ 이중인격 황녀, 그의 수렁에 빠지다! ※※ [11 ~ 完]
(펌설)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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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9.18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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