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는 한국 땅` 강력 증거 곳곳에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보여주고 있는 조선시대 지리지 '동여비고(東與備考)'의 지도.
/연합뉴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 후 가진 첫 연두 기자회견(1949년 1월7일)에서 “대일(對日) 배상 청구는 임진왜란 때부터 기산해야 한다”고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해 왔고, 도민들은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 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대마도는 한국 땅’임을 천명할 근거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최단거리가 49.5㎞로 일본의 후쿠오카(134㎞)보다 훨씬 가깝다. 182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를 비롯해 ‘삼국접양지도’, ‘조선팔도지도 원본’ 등은 대마도가 부산 동래부의 부속도서로서 지리적·역사적·문헌상으로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다.
●섬 곳곳에 항일 의병 전적비
더 의미 깊은 증언도 있다. 대마도의 초대 도주로 추앙받는 소 시게히사(宗重尙)와 관련,
“원래 우리나라 송씨로, 대마도에 들어가서 성을 종(宗)씨로 바꾸고 대대로 도주가 됐다”는
기록(1740년 간행된 동래부지)이다. 대마도의 일본명인 ‘쓰시마’의 유래와 맞물려 깊이 살필 만한 증언이다. 모든 고유명사에는 나름의 연원이 있다.
일본의 경우도 ‘동쪽의 서울’이란 뜻을 가진 도쿄(東京), 고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는 결의를 담아 이름지은 ‘나라(奈良)’ 등 지명(地名)의 유래와 의미가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유독 ‘쓰시마’에 대해서는 딱 부러진 유래를 찾지 못해왔다. ‘쓰시마’가 왜 그렇게 불리게 됐는지, 일본 학자들도 답을 찾지 못하던 수수께끼를 쾌도난마로 풀어낸 사람은 고 양주동 동국대 교수였다.
원래 영문학자였지만, 차음(借音)문자인 향찰로 쓰인 신라시대 향가 연구와 해석을 일본인
학자들이 도맡아 온데 분개하며 향찰 연구로 방향을 튼 분이었다. '두 섬'의 일본식 발음이 '쓰시마'양 교수는 “쓰시마의 뜻풀이는 복잡할 게 없다. 한국어의 ‘두 섬’을 일본식 발음으로 표현한 것뿐, 대마(對馬)라는 한자는 아무 뜻도 담기지 않은 단순한 차음”이라고 딱 부러지는 설명을 내놨다.
이 해석은 이승만 대통령이 연두회견에서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 라고 언급한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 유서 깊은 일본 도시 ‘나라’와 마찬가지로 ‘쓰시마’도 한국어에서 유래됐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한국의 옛 조상들은 지명을 외형적 특성을 살려 지은 경우가 많았다. 부산 앞바다에 있는 일련의 섬들을 ‘어떤 때는 다섯개로, 때로는 여섯개로 보인다’고 해서 ‘오륙도’로 이름붙인 식이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섬을 같은 방식으로 ‘두 섬’으로 부른 게 ‘쓰시마’로 둔갑했다는 게 양 교수의 설명이다.
대마도가 왜 한국 땅인지를 이런 식으로 파고들면 끝이 없지만, 이쯤에서 그칠까 한다.
어쨌건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섬이기에 그렇다. 유사 이래 한국의 땅이었고, 지금도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독도에 대해 일본이 더 이상 어깃장을 놓지 말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대마도는 본래 우리 땅"
마산문화원, 일본 고지도 발견…대마도 대한해협에 속해 있어
데스크승인 김두천 기자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은 "실제 지도를 보면 대마도가 대한해협에 포함되어 있다.
이는 대한해협이 현재 부산과 일본 규슈연안 사이의 바다를 말하는 것이다"며 "현재 일본이
주장하는 대로라면 대한해협은 대마도에서 우리나라 사이에 있어야 하고 대마도에서 일본
규슈연안은 쓰시마 해협이어야 한다.
그러나 대마도가 대한해협이라 표기된 우리나라 연안과 일본 규슈지역 사이에 있는 것은
이 곳이 명백한 우리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임 원장은 또 "지도에는 대마도와 규슈연안을 동한국해(EAST COREA STRAIT)로 표기하고 있다"면서 "일본은 현재 이 곳을 '현해탄(玄海灘)'으로 부르며 영자로 'KENKAINADA'로 표시하지만, 이 지도에는 그런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 연안과 일본 규슈 연안을 대한해협으로 표시한 내용으로도 대마도는 우리 땅으로 볼 수 있는데, 대마도에서 규슈 연안을 현해탄이 아닌 동한국해(EAST COREA STRAIT)로 표기한 점 또한 대마도가 명백한 우리 영토임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날 초청강사로 온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역시 "이번에 보게 된 '일본지도'는 영국 등 서양에서도 대마도를 명백한 우리 영토로 알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사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한편, 마산문화원은 지난달 26일부터 4박 5일 일정으로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미노미공민관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이 지도는 마지막 날 일정으로 하기시 박물관에 가게 된 일행이 전시된 지도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이번에 알려지게 됐다
. 대마도는 한국땅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 위원회의 창조지역 사업으로 ‘고추먹고 맴맴’ 발상지 음성군이 선정된 동요 에듀케어 프로젝트사업 시행 일환으로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나라사랑 동요 발표회를 갖게 되었다. 일본이 우리 영토인 독도를 억지를 부려가며 자기네 땅이라고 허튼 소리를 하고 있는데 더더욱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역사가 있다.
그것이 바로 옛 선조들이 남겨주신 대마도가 우리나라 영토인 것이다. 대마도라는 섬은 신라의 별칭으로 경상도를 가리키는 말로 본시 계림에 속한 우리나라 땅으로 문서에도 기록된 명백한 사실이며 조선 세종실록 에도 실려 있다. 또한 1860년대 삼국통람도설 (삼국 접양지도) 미.일 간의 오가사와라 제도영토 협상과 관련되어 어떻게 활용되었는가를 설명한 미국과 일본의 기록이 추가로 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2월31일 연말 기자 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 요구를 하기도 하였다. 지난 달 11일에 육사 군사 훈련 처장인 김상훈 대령이 일본 정부가 스스로 인정하는 지도를 발견 했다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적 근거가 명백한 만큼 이 노래를 통해 온국민 에게 전파하고자 한다. 그리고 요즘 초, 중, 고 학생들이 우리 좋은 바른 말 고운 말을 쓰지 않고 욕설과 나쁜 은어들을 사용하는 좋지 않은 습관들이 더 번지지 않게 올바른 언어 습관을 길들이기 위한 동요다.
행사명 : 나라 사랑 동요 발표회
일시 : 2011년 6. 17 (금) 13:00
장소 : 음성 대소 초등학교 대강당
주최 : 음성군. 음성동요 학교
발표내용 : 대마도는 한국땅 (유정작사/송결작곡/김민국과 맴맴 합창단)
고운말 쓰자 (유정작사/노영준작곡/맴맴 합창단)
♡대마도는 조선의 땅 입증 지도 발견♡
`대마도는 조선 땅`
-문서 은폐 미국과 협상에서 국제공인지도로 활용
미국-영국 지도도 "대마도는 조선 땅"최종편집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8일과 1949년 1월 7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공식 요구한다. 이 대통령은 당시 우리 지식인 중 일제 식민지 역사교육을 거치지 않고 서양에서 서양역사를 통해, 구한말 우리 역사와 일본의 한국 영토침탈 과정을 공부한 거의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이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한국과 일본 사이에 오래된 해상 경계가 있다” 고 한 발언 중‘오래된 해상경계“는 어디일까?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11일 열린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주최 제3회이승만 포럼에서 “이 오래된 해상경계는 대마도와 일본 본 섬 사이의 현해탄”이라고 밝혔다.
즉 대마도는 엄연한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주장이다.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93)는 1832년, 삼국접양지도를 만든다. 이 지도의 해설서가 삼국통람도설이다. 하야시 시헤이는 이 책에서 당시 일본과 그 주위 3국인 조선, 류쿠국(오끼나와), 하이국(북해도)과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小笠原, 일본 남부 태평양 1000km지점의 80여개 군도)제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해놓았다.
사진의 지도는 독일인 클라프로토(Klaproth)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대마도는 일본 영토로 표기된 위조 지도.@자료사진
김대령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거나 박물관에 소장된 일본어판 <삼국접양지도(구글에도 있음)는 물론, 심지어는 일본 극우단체가 제시한 프랑스어판 삼국접양지도 조차도 모조품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또 미국 국가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는 미국 페리제독의 1865년 일본 지도를 함께 제시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미 의회 지시로 미-일 조약체결(1858년)에 따라 페리제독의 정찰결과를 토대로 일본의 지도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미 국가기록문서소(NARA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당시 기록과, 1862년 미-일 영토협상 후 미국에서 작성된 1864~68년 일본 지도 역시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당시 영국지도에도 대마도를 우리의 영토로 표기하고 ‘대마도는 일본 영토에서 제외된다’고 지도에 직접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김 대령은 “한-. 일간의 해상 국경선은 일본지명사전에도 ‘고래로부터 일본과 한국, 대륙을 연결하는 통로’로 기록되어 있고,우리는 현해탄(玄海灘), 일본은 겐카이나다(玄界灘 )으로 부르고 있는 곳, 즉, 대마도 남단 한참 아래인 이끼섬과 일본 본토 사이”라며 “일본이 현재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의도는 대마도의 진실을 숨기기 위한 방패막이로 활용하려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아직도 유효하다”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대마도 반환하라” 이승만, 日에 수십차례 요구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3일 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을 열고
대일 관계에 관해 중대한 발언을 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 한일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 영토인데 삼백 오십년 전 일본이 불법으로 탈취해 간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대마도 한국 영유권' 발언에 당시 일본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반발하자
이 대통령은 9월 9일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 영유권을 확인했다고 뉴데일 리가 보도했다. 뉴데일리에 따르면 다음해인 1949년 1월 8일 연두 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대마도 반환문제를 강력히 제기한다.
이 대통령은 회견에서 "대일 배상문제는 임진왜란 시부터 기산하여야 한다"며 "특히 대마도는 별개로 하여 취급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대마도가 우리 섬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하여 왔고 도민들을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이 비석도 찾아올 생각이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1949년 12월 31일 대통령 연말기자회견에서 거듭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마도 문제는 대일 강화회의 석상에서 해결할 수 있으며, 일본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역사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강력히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는 약탈 문화재 반환 요구와 함께 한일회담 협상과 맞물리면서 60여 차례나 이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보도된 국내외 기사들을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의 대마도를 반환받는 것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함께 중국 여론도 이 같은 주장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이를 지원하는 대규모 시위를 했던 사실 역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어떤 근거로 대마도가 한국 땅이고 해방-건국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아야 할 실지(失地)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2008년 미국 조지 워싱턴대에 정책 연수를 위해 1년간 머물렀다. 조지 워싱턴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학부를 마친 곳. 건국대통령에 대한 관심을 갖고 조지 워싱턴대에서 1907년 청년 이승만의 흔적을 찾던 김 대령은 우연히 조지워싱턴대 도서관에서 이승만의 영문 저서 'Japan Inside Out'을 발견하고 탐독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책의 내용 중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오래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있다'라는 이 대통령의 언급을 발견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나라가 시끄럽던 시절, 김 대령은 이 '한-일 간의 오래 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어디를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승만이 건국대통령에 오른 뒤 기회만 주어지면 "대마도를 불법 점거한 일본은 즉각 반환해야 한다"고 수십 차례나 주장한 그 근거는 무엇인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수 년 간의 집요한 연구와 추적 끝에 김 대령은 이승만의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는 주장의 명백한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왜 일본이 틈만 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도 밝혀냈다. 김 대령은 11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리는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의 제3회 '이승만 포럼'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주장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그 명쾌한 근거를 제시한다.
동아닷컴 디지털뉴스팀 《SUNG RYE》 옮김
빼앗아 간도 대마도를 찾아 와야 합니다.
(조선일보) 2005/4/18
`대마도는 조선 땅` 이응백/서울대 명예교수
어원적 고찰부터 [독자 편지] 독도 어원적 고찰 지명 작성 원리로 볼 때 다케시마는 독도와 무관 입력 : 2005.04.18 18:03 / 수정 : 2005.04.18 18:52 우리가 ‘두 섬’이라 한 데 대한 일본식 음사(音寫)라 하겠다. ‘두’의 일본음은 ‘츠’가 된다. 가나의 ‘다디두데도’를 ‘다지츠데도’로 한 것과 같이 ‘두’를 ‘츠’라고 한 것이다. ‘섬’의 음사는 두 음절로 바꾸어 ‘시마’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츠시마’는 곧 우리 말의 ‘두 섬’에 일본식 음사일 뿐이다. 서울에 ‘뚝섬’을 독도(纛島)라고 표기한 것은 한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뚝’을 쌓아 그 지역이 ‘섬’과 같이 되었다는 유래를 나타낸 말이다. 독도는 한자로 獨島라고 표기하지만, 작고 큰 섬으로 된 독도가 홀로 선 섬이 아니므로, 그것은 ‘돌섬’이란 뜻인데, ‘돌’의 경상도 방언이 ‘독’이므로 한자음을 취해 獨島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소재에 입각한 이름이다. 죽도(竹島)라고 하면 대와 관련이 있어야 할 텐데, 독도에서 대를 어찌 했다든지, 바위섬에 대가 살 수 없어 지금도 대를 볼 수 없으니, 竹島라는 명칭은 가당치도 않다. 따라서 ‘다케시마(대섬)’는 독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지명이므로, 어원적으로 볼 때 이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된다. ‘다케시마’는 ‘독도’가 아니므로 딴다리를 긁는 셈이다. (이응백·서울대 명예교수) 한국, 샌프란시스코 조약때 대마도 영유권 공식 요구 1951년 美국무부 외교문서에 명시 입력 : 2005.04.10 17:01 / 수정 : 2005.04.10 17:01 위 지도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만든 지도로,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한 현존하는 최초의 지도이기도 하다. 고 이종학 초대박물관장이 기증한 이 지도는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돼 있는 것을 이 관장이 몰래 촬영한 것이다. 위의 내용들은 놓고 볼 때 3세기 이전부터 대마도가 바로 구야한국(가야)에 속했다는 것이 삼국사기 실성왕 7년편과가락국기 6대 좌지왕 2년의 기록 및 대동세보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 제3, 실성왕 7년조."편년 가락국기 실성왕 7년편 역사적 고증을 통해 볼 때 5세기 이전에 대마도는 오랫동안 바로 가야의 영토이었음이 밝혀졌다 일본어의 시마(島)는 한국어의'섬'에서 유래된 말로서 한국말의 두 섬이 두시마, 쓰시마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더 자세히 알고프면 ↓
◇ '역사 기록' 대마도가 우리 영토임을 생생 입증
대마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이다. "대마국은 구야(狗耶·가야)에서 강 건너 1000여 리에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인 대관(大官)은 비구(卑狗)라 하고, 부관(副官)은 비노모리(卑奴毋離)라고 한다. 대마도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절해의 고도다. 넓이는 대략 400여 리에 이른다."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13세기 말의 일본 책인 '진대(塵袋)' 제 2권)"대마도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경인년부터 뛰어놀기 시작하였다."(태상왕이었던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내린 교유문)
다음은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 관리인 강권선에게 일기도 영주 대내전(大內殿)의 관반(館伴)인 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 한 말이다.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 : 말 기르는 땅)이므로 대내전(大內殿)이 조선과 더불어 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조선)에 돌리고자 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 '팔도 전도'에는, 독도 뿐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 대상'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 고려시대
고려 공민왕 17년(1368) 대마도주가 고려의 만호 벼슬을 가진 사신(使臣)으로 파견된 이래 대마도는 600여 년간 조선과 대국휼소국(大國恤小國) 또는 조공회사(朝貢回賜)의 관계를 맺어온 속방(屬邦)이었다 공민왕 17년(1368) 사이 대마도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친 기록이 있다.
고려 말부터 대마도와 일본 근처에 있는 이키시마(壹岐島)송포(松浦) 등지에서 발호한 왜구가 한반도 남해안을 약탈하고 때로는 육지 깊숙이 침입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는 대마도주 종(宗)씨와 규슈의 탐제(探題) 이마가와(今川)오우치(大內) 등 호족에게 사신을 보내 왜구를 금압(禁壓)하고 고려와는 평화적으로 교역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 말 왜구가 횡행하게 된 근본 원인은 1218년과 1274년 두 차례에 걸친 여원군(麗元軍)의 일본 원정이 있은 후, 일본과 고려·중국의 통교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은 남북조(南北朝)의 쟁란(爭亂)에 빠져 있어, 규슈와 대마도 등에는 중앙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했다.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편입시켜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맞서서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주장하라! 일본이 한국 고유 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적 자료보다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진실한 역사적 자료가 더 많을 것이다.
일본자민당의 영토특명위원회 소속 극우 의원들이 울릉도 방문 목적으로 김포공항을 도착하였다. 그동안 수차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방문 반대 의견을 개진하고 일본 정부에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므로 방문을 취소하라고 공개 요구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극우 의원들은 소 영웅주의에 사로잡혀서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대한민국 애국시민단체들의 저지와 정부의 입국불허로 인하여 공항안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생쇼를 하다가 우리나라 비빔밥을 시켜 먹고 우리나라 김을 한 보따리 사가지고 9시간만에 돌아갔다.
아마 일본 극우 의원들은 김포공항에서 돌아갔지만 자기들이 온 목적은 달성했다고 자부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그들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한국 김포공항에서 주장을 하고 생쇼를 한 것을 대단히 만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돌아간 다음에 일본 정부는 국방백서에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7년간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일본이 독도 침탈 야욕의 환상을 갖게 만든 독도지역을 일본과 공동으로 어업활동을 할 수 있는 공동수역으로 합의를 해주므로 인하여 독도를 일본이 더욱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일본과 신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지역을 중간수역으로 정하여 공동수역을 할 수있는 지역으로 합의를 해주므로 인하여 일본이 더욱 극성을 부리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속히 신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한다고 일본측에 전달해야 한다. 정부가 속히 신한일어업협정을 파기시키고 독도를 우리의 전관수역으로 환원시켜서 독도지역에서 우리만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독도 주변에 일본 어선이 나타나면 불법 어업으로 체포하여 영해침범으로 처단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의 국방백서에 맞서서 우리 국방백서에도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주장하면서 우리 고유 영토임을 역사적 자료를 인용하여 밝혀야 한다. 정부가 독도 문제에 대하여 일본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표시하는 방법은 신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고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영토분쟁지역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우리는 대마도를 영토분쟁지역으로 만들어서 대륙붕 7광구도 우리지역으로만 편입시켜야 한다. 일본이 우리의 동맹국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웃이 울타리를 넘어서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면 이웃간은 이미 금이 간 것이다. 일본이 국경선을 넘어서 우리 고유 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조폭수준의 강도짓을 하려는 일본은 우리의 동맹국은 아니라고 본다.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나라가 동맹국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나라가 동맹국이 될 수 있다. 동맹국의 영토를 침탈하려는 일본의 행위는 이미 동맹국의 지위를 상실한 나라이므로 일본을 우리의 동맹국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이제부터는 강력하게 해야 한다. 광복 후에 우리나라가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까봐 일본이 상당히 노심초사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이 정도면 일본은 대마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할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고등학생들도 독도와 대마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알고 있는 학생들은 얼마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신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고 대마도를 우리 국방백서에 우리 영토임을 주장해야 한다. 일본의 독도 침탈 저의가 드러난 이상 우리도 대마도를 다시 되찾아와야 한다. 대마도는 교통의 요지이다. 땅은 척박하고 쓸모없을지 모르나 우리 동해의 관문역할을 하는 중요한 수상 교통요충지이다. 우리도 더이상 당하고만 있지 말고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편입하는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차분하게 가동해야 한다. 일본이 독도 침탈 야욕을 드러낼 때마다 우리도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다시 편입시키는 프로그램을 가동해야 한다. 정부는 독도를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할 때마다 왜 말로만 강력하게 대응만 한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도 저들이 독도를 침탈하려고 하면 할 수록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관철시켜 나가야 한다. 김민상 기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을 넘볼려고 시도한 분병한 테러를 자행했읍니다 단순히 왔다 갈려고 했던게 아니고 서서히 제국주의를 다시 실현 시킬려고 하는 첫번째 행동 이었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이런 추잡한 작태를 부릴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잃어버린 땅 대마도를 찾는 운동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그냥 막연한 우리것이다고 하는것이 아닌 고증을 거쳐진 자료를 바탕으로 국사교육 교과서를 대마도우리영토로 편입시켜 이제 대마도는 잃어버린 우리영토 찾기를 합시다. 면적 : 708제곱미터 거리 : 한국에서 대마도까지 49.5km 인구 : 4만2천명 대마도의 중심도시는 이즈하라이며 이곳에 전체인구의 절반이 거주하고 있다 중앙부의 아소만과 인공적으로 굴착된 만제카세토 수로에 의해 상하 두섬으로나뉜다 동서 18km남북의길이 82km이다 농경지는 계단식밭이많으며 오징어 도미잡이와 아소만에서는 진주조개 양식이 성하다
빼앗낀 우리의 땅.대마도
[오른쪽 지도는 대동여지전도(1860)이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오른쪽 아래의 섬이 조선의 섬 대마도(쓰시마)이다.
잘 알다시피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49km인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나 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