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고민형]
그가 문을 열고 나왔다. 활짝 웃으며 답답했다고 이렇
게 나오니 좋다고 했다. 이제 자기 기분을 말해줄 수 있다
고. 그는 하고 싶던 얘기를 다 털어놨다. 자기는 웃고 싶었
고, 울고 싶었는데 얼굴은 가면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똑
바로 서 있다가도 온몸이 쿵쿵 뛰었고, 하고 싶은 말을 하
면 입에서 건전지 좋아하냐는 말과 건전지의 수백 가지 종
류와 수만 가지 상표 이야기가 나왔으며, 무엇보다 친구의
물건을 뺏거나 친구를 때리고 싶지 않았다고. 나는 그랬냐
고 그래도 이렇게 네가 나오니 참 좋다고 했다. 우리는 동
산을 걸었다. 나는 튤립이 그는 패랭이꽃이 보고 싶었는데
그대로 두 가지 꽃이 피어 있었다. 강물을 떠다 마시면 입
안에 달콤한 향이 남아 꿈만 같았다. 이렇게 좋은 데를 걸
으니 참 좋다, 참 좋다, 이런 얘기를 했다. 그는 학교로 나
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뒤돌아 가 그를 붙잡았
다. 그가 나를 쳐다봤다. 혹시 건전지 좋아하냐고 내가 물
었다. 그가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엄청난 속도로 사랑하는, 아침달, 2022
술패랭이꽃 [이윤학]
네 개의 꽃잎들은
어쨌든
아슴한 부채를 펼쳐 들고
양지를 찬양하는 것이었다
한평생 놀아버리자
이번 생은
아주 제껴버리자
아빠, 저기로도 가보자
아직도 어린 딸내미가
그의 소매를 잡아채 이끄는 것이었다
- 나를 울렸다, 문학과지성사, 2011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김선우]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풀여치 있어 풀여치와 놀았습니다
분홍빛 몽돌 어여뻐 몽돌과 놀았습니다
보랏빛 자디잔 꽃마리 어여뻐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흰 사슴 마시고 숨결 흘려놓은 샘물 마셨습니다
샘물 달고 달아 낮별 뜨며 놀았습니다
새 뿔 올린 사향노루 너무 예뻐서
슬퍼진 내가 비파를 탔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잡아주고 싶은 새들의 가녀린 발목 종종거리며 뛰고
하늬바람 채집하는 나비 떼 외로워서
멍석을 펴고 함께 놀았습니다 껍질 벗는 자작나무
진물 환한 상처가 뜨거워서
가락을 함께 놀았습니다 회화나무 명자나무와 놀고
해당화 패랭이꽃 도라지 작약과 놀고
꽃아그배 아래 낮달과 놀았습니다
달과 꽃의 숨구멍에서 흘러나온 빛들 어여뻐
아주 잊듯 한참을 놀았습니다 그대 잃은 지 오래인
그대 만나러 가는 길
내가 만나 논 것들 모두 그대였습니다
내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2007
장마 [김사인]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 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으로
젖은 발 말리러 갈까
들창 너머 먼 산이나 종일 보러 갈까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
늘어진 물푸레 곁에서 함박꽃이나 한참 보다가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없는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민화투나 칠까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 먹으로 갈까
긴 긴 장마
-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우후풍경초(雨後風景抄) [박정만]
비 온 뒤 끝에
무지개 새로 생겨나듯이
맑은 산의 이마 위에
생략된 언어의 토씨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 속에 기억 밖의 종소리도
푸른 귀를 열고 앉아 있었다.
맨살을 드러낸 강변에는
수복표(壽福標)의 돌들이
저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채마밭엔 콩새가 먹다 버린
햇살이 하나,
양지꽃 노오란 오판화에 기어오르고,
그 너머 회양목 울타리 밑엔
허리춤을 드러내고 뒤를 씻는
패랭이꽃 두서너 포기,
쓸데없이 부끄럼을 타고 있었다.
우듬지가 잘려나간
청대콩 연한 대궁이엔
초경(初經)하는 아이의 비린내 몇 점,
생살 돋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미루나무 가지 끝엔
정든 말로 언치새가 울고 있었다.
이따금 생각처럼 바람이 불고
한국은행 발행 새 지폐처럼
빠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생각에 앞뒤로 귀가 열리고
흐린 날도 맑은 날도 한가지로
하늘의 은혜로다.
- 朴正萬 詩전집, 외길사, 1990
음악처럼, 비처럼 [안현미]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뱃불을 붙여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이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꼬드겨보고 싶었던가
그럴까봐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술래로 세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탔던가
춘천을 떠나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다 공지천 '이디오피아' 창가에 앉아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눈썹에서 주워온 몇 개의 비애를 안주로 비루를 마실 때
막 사랑을 하기 시작한 연인들의 백조는 물 위에서 뒤뚱뒤뚱,
그 뒤뚱뒤뚱거림조차 사랑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는데
아직도 찬송가처럼 몇 개의 빗방울 흩뿌리고 있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 곰곰, 랜덤하우스, 2006)
패랭이꽃 [이승희]
착한 사람들은 저렇게 꽃잎마다 살림을 차리고 살지, 호미를 걸어두고, 마당 한켠에 흙 묻은 삽자루 세워두고,
새끼를 꼬듯 여문 자식들 낳아 산에 주고 들에 주고, 한 하늘을 이루어간다지. 저이들을 봐, 꽃잎들의 몸을 열고
닫는 싸리문 사이로 샘물 같은 웃음과 길 끝으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모습
해 지는 저녁, 방마다 알전구 달아놓고, 복(福)자 새겨진 밥그릇을 앞에 둔 가장의 모습, 얼마나 늠름하신지,
패랭이 잎잎마다 다 보인다, 다 보여.
-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 2020
탐진강 3 [위선환]
발바닥이 파였다. 새살이 돋기까지 며칠이 남았다
며칠 사이에 들찔레의 가시가 단단해지고
자갈돌 틈새에 패랭이꽃 피고
강은, 희게 닳은 돌부리를 건져 올려
내 살에다 심었다
아직은 며칠이 남고, 물가 풀밭에 이슬 맺히고
이슬이 내리자 척척해진 발등에서
들풀이 자란다. 발가락 사이로
청정맥(靑靜脈)의 실뿌리가 내려온다
남아 있어서 심하게 아프던 날들의 늦저녁에 닿기까지
강은 흐르고
돌아가지 못한 것들의 적적한 슬픔을
낮은 물소리로 두런거린다
사람이 목메어 듣는다
강물 따라 걸어가면 나도 흐르게 되리. 먼저 흘러간 강은
멀리 흐를수록 어두워지고
어둠의 한쪽이 허물어져서 돌아다보니, 어떤 사람이
사람의 깊은 구석을 파묻어둔 흙무덤에다
삽질을 하고 있다
- 탐진강, 문예중앙, 2013
죽도 [김춘수]
날이 세면 너에게로 가리라.
詩人이 되어 나귀를 타고
너에게로 가리라.
새는 하늘을 날고
길가에 패랭이꽃은 피어 있으리,
보라,
미크로네시아의 젖은 입술,
보라,
미크로네시아의 젖은 허리,
나에게로 가리라.
詩人이 되어 나귀를 타고
날이 세면.
- 김춘수시선, 정음사.1976
호모노마드 [홍일표]
바람둥이와 바람은 인척간이다
같은 혈족, 같은 유목민이다
엉덩이가 가벼운 부족이니
잠시도 한 자리에 있지를 못하고
끝없이 보따리를 싼다
동가식서가숙을 시비하랴
야반도주 줄행랑을 탓하랴
바람은 애당초 집을 짓지 않는다
평생을 땅 한 쪼가리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머무는 곳이 모두 제 땅이요 제 집이니
그는 지상의 대지주다
걸으면서 꿈꾸고 걸으면서 사랑하고
순간, 순간 반짝이며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다
천지사방 도처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성벽을 넘어 그리운 초원으로,
말 젖이 흐르는 테렐지로 달려간다
가서 용담초, 패랭이꽃 피우고 말을 살찌우고
마주유를 마시며
머리 긴 처녀의 가슴에 향기로운 추억을 남긴다
겨울이 오면 세상 모든 검불과 더불어
다시 긴 유랑을 떠나지만
눈앞엔 언제나 설렘으로 펄럭이는 오색 깃발이다
- 살바도르 달리風의 낮달, 천년의 시작, 2007
출렁거림에 대하여 [고재종]
너를 만나고 온 날은, 어쩌랴 마음에
반짝이는 물비늘 같은 것 가득 출렁거려서
바람 불어오는 강둑에 오래오래 서 있느니
잔바람 한자락에도 한없이 물살치는 잎새처럼
네 숨결 한올에 내 가슴 별처럼 희게 부서지던
그 못다한 시간들이 마냥 출렁거려서
내가 시방도 강변의 조약돌로 일렁이건 말건
내가 시방도 강둑에 패랭이꽃 총총 피우건 말건
- 날랜 사랑, 창작과비평사, 1995
중심 [박영희]
사람의 깊이를 모르겠다
어제의 얼굴이 다르고
오늘 얼굴이 다르다
저렇게 넓은 집에서 어떻게 시가 나올까
저렇게 윤기나는 밥상에서 어떻게 소말리아가 보일까
저렇게 멋진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어떻게 실직자들이 보일까
노을의 실체를 알고부터였다
오랫동안 헤어져 지낸 친구를 만나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도
마음이 열리지가 않는다. 저 삶이 정말 정당한 것인지
오죽했으면 사람의 깊이를
패랭이꽃에게 물었으랴
오죽했으면 사람의 깊이를
날아가는 새에게 물었으랴
오늘도 나는 잔가지만 잔뜩 보고 돌아와
꽃병 가득 꽂혀 있는 장미를 들어낸 뒤
꽃병 안만 들여다본다
눈물로 꽃을 키우다니……!
- 팽이는 서고 싶다, 창작과 비평사, 2001
패랭이꽃은 아직도 들판에 핀다 [이기철]
전쟁이 오면 지상에는 달콤한 것들이 사라진다
달콤한 말들과 향기로운 올리브油와 달콤한 입술과 부드러운 손이 사라진다
밤이 길고 아침 이슬에도 장미가 피지 않는다
사랑의 편지를 쓰던 사람들의 손이 멎고
책상에는 긴 침묵의 잉크가 놓인다
아침에 보이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캡을 쓴 시인이 시집을 버리고 화약을 사러 간다
빨리 오너라. 아마릴리스 향기와
포도와 젤리와 칠면조의 식사를 마치면 너무 늦으리라
빌로드와 우단의 의상을 입고
발 편한 부츠와 마차를 타면 늦으리라
저 많은 빌딩들과 휴게실과 공원들도
어쩔 수 없다.
대학 노트와 부피 큰 책 갈피에 써둔 것들은
가지고 오너라
네가 家長으로 고민하던 집
도장 찍힌 문서 주식과 보험 증서는 두고 오너라
가지를 잘라내고도 아픔 없이 살 수 있는 나무가 아니고서는
한 시대를 튼튼히 쌓아 올리기는 힘든다.
라일락은 라일락과 더불어 잠들고
모래는 모래와 더불어 잠든다
강물은 갈물과 더불어 바다에 이르고
별들은 별들과 더불어 하늘을 수놓는다
시간은 시간과, 여름은 여름과
오랑캐꽃은 오랑캐꽃과 더불어 잠들지만
상실과 허위, 저주와 전쟁은 언제나 혼자일 뿐이다.
나비와 노가주나무들이 전쟁 없는 봄을 연장할 수 있다면
비타민과 채소들이 폭력 없는 밤의 편안함을 연장할 수 있다면
포성을 음악으로 길들이고
초토에서 샘물을 긷고 용암을 비료로 만들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딸기꽃과 패랭이꽃, 새로 돋는 잔디빛과 가시달린 장미원을 노래 할 수 있겠지
어제 헤어진 친구들의 이름과 상냥한 지붕들을 노래 할 수 있겠지
전쟁이 그 긴 팔과 큰 입을 벌리지만 않는다면
전쟁이 꽃밭과 시가지를 국방색 트럭으로 뒤덮지만 않는다면.
- 전쟁과 평화, 문학과지성사, 1985
패랭이꽃 [이재무]
바지에 풀물 들도록
자지러지며 달려드는 풀벌레 울음의 거미줄
걷어내며 걷는 들길
무언가 한사코 뒷덜미 잡아당겨서
뒤돌아보면, 거기 길섶
멍든 몸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낯익은 여자
내가 남긴 죄의 발자국
누가 볼세라 부지런히 지우고 있다
- 시간의 그물, 문학동네. 1997
별똥별 [이건청]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
1광년, 9조 5000억k.
여름밤 질펀히넘쳐나는 우리 은하 밖
안드로메다 별자리까지 250만 광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어느 빈터로
꼬리를 달고 스쳐가는
별 하나 있네
어머니
너무 멀리 가시지는 마세요
이따금 아들 세상, 밤하늘 스쳐 가신 후
패랭이곷 한두 송이쯤
안녕의 흔적으로
남겨두고 가세요
- 실라캔스를 찾아서, 북치는 마을, 2021
패랭이꽃 [이은봉]
앉아 있어라
쪼그려 앉아서 피워 올리는 보랏빛 설움이여
저기 저 다수운 산빛,
너로 하여,
네 아픈 젖가슴으로 하여 한결 같아라
하나로 빛나고 있어라
보랏빛 이슬방울이여
눈물방울이여
언젠가는 황홀한 보석이여
앉아서 크는 너로 하여,
네 가난한 마음으로 하여 서 있는 세상,
온통 환하여라
환하게 툭 터지고 있어라
- 내 몸에 달이 살고 있다, 창비, 2002
난장이패랭이꽃 [신경림]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때리고
닥치는 대로 팔다리를 꺾는 바람을 피하느라
뼛속 깊은 곳까지 후벼 파는 추위를 견디느라
이토록 작아지고 뒤틀린 우리들의 몸통을
말하지 말자 아름답다고
메마른 돌밭에 뿌리박기 위하여
천길 벼랑에나마 매달려 살기 위하여
보아라 굽었지만 더욱 억세어진 이 팔다리를
햇빛을 항하여 꼿꼿이 들려진
이 짧지만 굵은 목덜미를
말하지 말자 눈물겹다고도
아픔과 눈물을 보랏빛 꽃으로 피울 줄 아는
눈비 속에서 얻은 우리들의 슬기를
서로 받고 준 상처를
안개에 섞어 몸에 두르기도 하는
악다구니 속에서 배운 우리들의 웃음을
우리들의 울음을
-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패랭이꽃 [송찬호]
방죽 너머 길가에 패랭이꽃 여자가 피어 있다
여자 나이는 마흔쯤 됐겠다 꽃잎 속눈썹은 삐뚤, 꽃 모가지는 빼뚤,
그런 그 여자의 삐뚤빼뚤한 길을 따라 염소들은 오늘도 학교엘 가는데,
보나마나 오늘 듣고 쓰기 시간 염소들 글씨도 삐뚤빼뚤
그 주위 풍경도 더는 참지 못하고 공장 굴뚝 연기도 삐딱, 앞을 휑하니 지나간 택시의 먼지구름도 삐딱,
부스스 여자는 몸을 일으킨다 지금은 학교에서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
길 가는 누군가 패랭이꽃을 물으면 여자는 자기의 아랫도리를 보여준다
성긴 잎과 줄기, 초록 목발로 서 있는 패랭이 패랭이 패랭이……
그 여자의 몸에 다보록 패랭이꽃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