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파의 장로 청허자는 문도 십여 명을 끌고 느긋하게 여행하고 있었다. 그의 목적지는 하남의 무림맹이다. 청허자 는 무당파의 장로임과 동시에 무림맹의 장로다. 두 개의 신분 덕에 그는 무림에서 끗발 상당히 날리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먹어야 산다. 아직 솔잎파리 몇 개 따 먹 고 때울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먹을 것을 제법 따지는 그의 성품을 볼 때 앞으로도 그런 경지는 어려워 보인다. 그들은 여행 도중에 꽤 큰 마을에 도착했다. 무당파의 도사 하나가 청허자에게 공손히 말했다. "장로님, 저 객잔이 여기서는 제일 화려해보이니 오늘 거 처는 저 곳으로 정하시지요?" 그 말에 청허자가 엄한 인상을 쓰며 말했다. "도인이 너무 좋은 음식과 편한 잠자리를 탐하면 안 되지. 네 녀석은 그리 해서 어찌 도를 얻으려 하느냐?" 그 말에 도사가 즉시 허리를 굽히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럼 저 쪽의 낡은 객잔을 잡겠습니다. 가급 적이면 마굿간이나 창고 같은 곳을 빌려볼까 합니다." 청허자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녀석. 말이 그렇다는 거지. 본산의 음식은 입에 거칠다. 잠자리는 딱딱하다. 우리가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제대로 먹 고 푹 쉬어 보겠느냐? 도는 얻으려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 다. 오히려 마음가는대로 하다가 얻을 수도 있는 것이 도다. 그러니 제일 좋은 집으로 가자꾸나. 무당의 재정은 결코 가난 하지 않다." 청허자가 기분 좋게 말하며 객잔 쪽으로 걸어갔다. "객잔 이름이 십장생이라. 음식을 파는 집 치고는 특이하구 나. 몸에 좋은 요리라도 파는지 모르겠군. 젊어서 고생을 많 이 했더니 이제는 몸에 좋다고 하면 관심이 더 가는구나. 어 디 호강 한번 해 볼까?" 무당의 도사들이 객잔 십장생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 즉시 준비된 점소이가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도사님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점소이의 안내에 무당 도사들은 널찍한 탁자에 앉았다. 점소이가 공손히 옆에 서서 말했다. "무엇을 주문하시려는지요?" 무당의 도사들은 청허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청허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렸다. 그는 자 신이 앉은 탁자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허, 대단한 솜씨로고. 어느 목수가 대패질을 이리도 완벽 하게 한다는 말이냐?" 그 말에 도사 하나가 궁금한 듯 물었다. "장로님, 대패질은 결국 대패질 아닙니까?" 도사의 말에 청허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무릇 만류귀종이라고 했다. 뭐든지 경지에 이르 렀으면 존중받을 가치가 있지. 이 대패질을 보거라. 탁자의 표면이 마치 한 번에 잘라낸 것처럼 고르지 않느냐? 조그마한 층 진 것 하나 없다." 그 말에 도사들도 탁자를 쓰다듬었다. 다들 수련이 얕지 않 으니 청허자의 말이 이해가 된다.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보통 솜씨가 아닙니다. 그럼 이것 은 어느 정도 경지인지요?" 도사의 말에 청허자가 부드러운 웃음을 얼굴에 지었다. "높고도 높은 경지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 이 자가 수련한 것이 만약 대패가 아니라 검이었다면 지금쯤 능히 나와 견줄 수 있을게다." 그 말에 도사들이 깜짝 놀랐다. "장로님은 우리 무당의 고수이십니다. 어찌 한낱 목수의 경지가 비교된단 말씀이십니까?" 청허자는 눈을 스르르 감으며 탁자를 쓰다듬었다. "물론 비유지만 그래도 대단하다. 단지 대패 하나로 이 경 지를 이루다니. 이보게. 점소이." 점소이는 이제 이 도사들이 무당파의 사람이고 노인이 장 로인 것을 알게 됐다. 무림에 명성이 쩌렁쩌렁 울리는 사람 들을 만난 점소이가 바짝 긴장해서 즉시 대답했다. "예, 도사님." "이 대패질을 한 목수를 한번 만나고 싶다네. 그를 불러주 겠는가?" 그 말에 점소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만 그 분은 더 이상 뵐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청허자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허. 이 경지를 이루고 죽었단 말인가? 그럼 이것은 그의 일생의 역작인가 보군. 안타깝고도 안타깝도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자신의 혼을 탁자에 불살랐단 말이냐?" 점소이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이것은 잠시 식사하러 들르셨던 분의 솜씨입 니다. 그 분은 이제 이곳을 떠나셨습니다. 저희도 기다리고 있지만 언제 돌아오실지 아무도 모르지요." 청허자가 감탄하며 무릎을 탁 쳤다. "허. 그렇군. 역시 기인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 대패 솜씨를 직접 보고 싶었거늘. 그와 서로 이룬 도에 대 해서 대화해 보고 싶었거늘. 진정 아쉽구나." 청허자는 무당의 장로다. 점소이가 감히 먼저 말붙일 상대 가 아니다. 그래도 하는 수작을 보니 점소이는 가슴이 답답해 졌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저, 무당파의 높으신 장로님. 그 분은 목수가 아닙니다." 그 말에 청허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피식 웃었 다. "목수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이 대패 실력은 보통 사 람은 평생을 정진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녀석. 사람을 그 외모로 평가하지 마라. 하긴. 그런 인물이라면 목수처럼 보이지 않았을 수는 있지. 하지만 네 녀석이 사람을 잘못 본 게다. 대패는 보았을 것 아니냐? 그 사람은 틀림없이 목수 야." 일개 점소이가 감히 무당파 장로의 말에 반발했다. "우리 가게의 탁자를 반들거리게 만든 것은 대패가 아닙니 다." 점소이의 말에 청허자의 얼굴에 궁금증이 생겼다. "대패가 아니야? 그럼 뭐로 이렇게 했다는 것이냐?" 점소이가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 했다. "검입니다. 검 한 자루로 하셨습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청허자가 벌떡 일어서며 호 통을 쳤다. "네 이놈! 나를 농락하려는 것이냐? 감히 이걸 검으로 깎았 다는 거짓말을 해?" 청허자의 서슬 퍼런 모습에 겁먹은 점소이가 급히 넙죽 엎 드렸다. "제가 어찌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그저 본 대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요." 그 모습을 보고 청허자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하긴 점소이가 내게 거짓말을 할 리 없지. 이거 미안하네. 그나저나 자네가 검과 대패를 구분하지 못했을 리도 없고. 하 지만 이게 검이라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이 정도 실력의 무림고수라면 자존심도 셀 텐데 왜 객잔의 탁자 같은 것을 깎았을까?" 청허자는 정체불명의 고수와 자신과의 실력을 비교해 보기 위해서 다시 질문을 했다. "대패가 아니라면 생각보다 높은 실력은 아닌가보군. 그 래. 그 고수는 이 탁자를 이렇게 깎는데 얼마나 걸렸느냐? 한 시진을 넘겼느냐?" 그 말에 점소이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닙니다요. 한 시진이나 걸리다니요." "그럼 반 시진?"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점소이의 반응에 청허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설마 한식경?" "아니옵니다." 답답해진 청허자가 호통을 쳤다. "이놈. 그럼 설마 일각에 끝냈다는 말이냐? 설마 그런 경지 의 고수가 여기서 탁자나 깎고 있었다는 말이냐?" 청허자의 말에 점소이가 고개를 처박았다. "일각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칼질 몇 번이었습니다. 칼을 한 번 쓱 흔들 때마다 탁자 위가 대패로 민 것처럼 얇게 벗겨 져 나왔습니다. 탁자 하나에 세 번의 칼질이면 끝났습니다." 점소이의 말에 청허자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 리고 호통을 쳤다. "설마 단숨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누가? 누가 있어서 그 런 경지를 보인다는 말이냐? 무림이 넓다 하나 그런 경지에 든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왜 이 객잔의 탁 자를 깎아!" 점소이는 이왕 내친 김에 남아있는 말을 마저 뱉어냈다.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객잔의 탁자와 의자 대부분을 깎았습 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앉아있던 곳을 제외하고는 다 깎 았지요." 그 말을 들은 청허자의 얼굴이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변했 다. "아하, 그렇구나. 이제야 알겠다. 이 객잔의 모든 탁자와 의자를 검으로 단숨에 깎았는데 그 중 하나가 우연히 제대로 나온 것이구나. 그런 것이었어. 그쯤이라면 아주 귀한 실력은 아니지. 하하하." 상황이 그가 납득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자 청허자는 기분 이 좋아졌다. 그가 시원한 표정으로 웃으며 옆의 탁자로 여유 있게 걸어갔다. "그렇게 생각해도 보통 실력은 아니구나. 검술이 대단해. 그럼 이 탁자의 상태로 그의 실력을 다시 추정해보자꾸나." 청허자가 탁자를 슬쩍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이 다시 굳어 졌다. 그는 급히 다른 탁자로 옮겨가서 그것도 쓰다듬었다. "이럴 수가. 모든 탁자가 완벽하게 깎였구나. 도대체 누가, 어느 고수가 이런 짓을 한다는 말이냐. 이 정도면 남의 눈을 신경써야 할 신분일 텐데 왜?" 중얼거리던 청허자의 눈에 계산대가 들어왔다. 그는 계산 대 앞에 새겨진 은자 그림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에 는 가볍게 보았던 것이지만 상황이 변하자 그 그림이 예사롭 지 않게 보였다. 청허자는 체면도 잊고 급히 계산대로 달려갔다. 그의 몸을 따라 바람이 일었다. 주변 탁자 위의 젓가락들이 우르르 떨렸 다. 무림 고수가 달려오는 모습에 이번에는 계산대에 있던 객잔 주인이 깜작 놀랐다. 청허자는 주인에게는 신경 쓰지도 않고 계산대에 새겨진 은자 그림들을 쓰다듬었다. "혹시 이것도 검으로 새겼느냐?" 청허자의 말에 객잔 주인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무당은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무척 높다. 무림맹은 아 예 무림삼대세력 중 하나다. 무당의 장로이자 무림맹의 장로 인 청허자는 평소에 좋은 것을 볼 기회가 많다. 청허자 정도 되는 무공 경지를 이루고 도까지 닦은 사람이 예술품 감상까 지 자주 한다면 그 보는 눈은 저절로 올라간다. 실제로 청허자는 그림을 볼 줄 알고 그 외에 여러 잡학에도 재능이 있다. "새겨진 깊이가 자유자재고 그 굴곡이 매끄럽기 그지없구 나. 더구나 이런 생동감이라니. 새겨진 은자 조각이 어찌 튀 어나올 것만 같단 말이냐. 단순히 조각이 아니구나. 이 사람 은 나무를 판 것이 아니라 여기에 은자를 담았다." 무당의 도사 하나가 다가와서 궁금한 얼굴로 질문했다. "이 자는 어느 정도 경지입니까?" 청허자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누구인지 몰라도 고수다. 엄청난 고수다." "하지만 무림은 넓습니다. 엄청난 고수가 한둘이 아닌데 어찌 그리 놀라십니까?" "무공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다. 물론 무공도 아주 높지만 그 외에 서화에 조예가 깊다. 이만하면 명인의 실력이다. 하 나만 하기에도 힘든 것이 인생이다. 보통 사람은 두 가지나 이런 경지를 이룰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이 경지 에 이를 수 있을까?" 비결은 놀고먹는 삶이다. 은자조각을 보며 감탄하던 청허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것과 탁자를 같은 사람이 만들었느냐?" 주인이 긴장한 채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 명예를 걸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같은 분이었습니다." "이것을 새기는 데는 얼마나 걸렸느냐?" 청허자의 말에 객잔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얼마 걸리고 자시고도 없었습니다. 뭔가 손이 파바박 하 고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나뭇조각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 지요. 그러고 나서 보니 조각이 완성됐습니다. 그야말로 물 한잔 마실 시간이었습니다." 청허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완전히 일그러졌다. "물? 일다경도 아니고 물 한잔 마실 시간?" 객잔 주인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청허자가 은자 조각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믿어지지 않는구나. 정말 믿어지지 않아. 누가 있어 이런 일을 했다는 건지. 그 속도로 칼을 움직여 이런 예술품을 만 들려면 무공과 그림 실력이동시에 뛰어나야 한다. 무림에 인 물이 많다지만 둘 다 가능한 사람은 겨우 몇밖에 생각나지 않 아.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여기서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으니." 청허자의 표정에 용기를 얻은 객잔 주인이 자기 최고의 자 랑거리를 들먹였다. "그 분이 십장생도도 하나 새겨줬습니다. 그래서 우리 객잔 의 이름도 십장생으로 바꿨습니다." 객잔 주인의 말에 청허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십장생? 그것은 어디 있느냐? 어서 보여 다오." 객잔 주인이 점소이를 불렀다. "장막을 거둬라. 귀한 손님이 보고자 하신다." 그리고 청허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원래 이건 단골손님이 아니면 잘 보여드리지 않는 겁니 다. 하지만 귀하신 분이 오셨으니 특별히 공개하겠습니다." 청허자가 보니 한쪽 벽이 모두 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점소이가 그 천을 하나씩 걷었다. 청허자도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대단하군. 작품이로구나, 작품." 천이 걷어져나가자 청허자의 다리가 비틀거렸다. 그는 급 히 팔을 뻗어 계산대를 잡을 정도였다. "구도로 볼 때 벽 전체가, 저 벽 전체가 십장생도이구나." 청허자는 내공을 끌어올려 안력을 키웠다. 그 거리에서도 십장생도를 만드느라 새겨진 선 하나하나가 보였다. "한 선 한 선이 모두 제대로 된 흐름이다. 검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다. 더구나 이 그림에는 세상이 담겨 있구나. 이만 하면 명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천하에 손꼽힐 그림 실력이 다. 대작이다. 더구나 이 연속된 칼자국은, 이건 설마, 설마 쾌검은 아니겠지. 그렇겠지?" 객잔 주인은 청허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니 대답도 할 수 없다. 청허자가 객잔 주인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저것은, 저것은 얼마나 걸렸느냐? 응? 시간이 상당히 걸렸 지? 오래 걸렸지? 그렇지?" 청허자의 손은 객잔 주인의 멱살을 잡았지만 눈은 벽에서 떼지 못했다. 객잔 주인이 끝까지 청허자를 배신했다. "그냥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천천히 걸어가는 속도였습 니다. 그 분이 걸으신 자리 뒤쪽으로 십장생도가 저절로 생기 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청허자는 더 이상 서있지 못하고 주저앉았 다. 그리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쾌검으로 저런 대작을 만들어? 도대체 정체가 뭐냐. 누구 냐? 어떤 자가 온 것이냐?" 이제 점소이는 벽을 가린 천을 모두 거둬냈다. 웅장한 모습 의 십장생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학이 날아갈 것 같고 해 가 어둠을 밝힐 것만 같다. 청허자가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손으로 벽을 쓰다듬었다. "대단하구나. 이건 예술 작품이다. 무림 고수 중에 이렇게 서화에 능한 사람이 있다니. 검으로이걸 만들다니. 정말 대 단하구나. 대단해." 청허자가 주인을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누구인지 정체를 알아야겠다. 어떻게 생겼더냐? 나이는 얼마나 되어 보이더냐? 혹시 얼굴에 칼자국이 있지 않더냐? 아니면 외팔이는 아니더냐?" 청허자의 말에 객잔 주인이 즉시 대답했다. "이제 스무 살도 안 됐을 것 같은 앳된 젊은이였습니다. 대 단한 미남이었지요." 객잔 주인의 말은 오늘 하루 종일 놀란 청허자의 머리를 망 치로 내려치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 청허자가 멍하니 서서 객 잔 주인을 쳐다보며 다시 확인했다. "잘못, 잘못 본 것 아니더냐? 노인이 아니란 말이냐? 겉으 로는 장년층처럼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젊은이는 아닐 거 야. 그렇지?"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틀림없이 젊은이였습니다." 그 말에 청허자가 넋이 나가 축 늘어졌다. 힘이 빠진 그의 몸이 털썩 넘어졌다. 놀란 무당 도사들이 급히 달려왔다. "장로님. 괜찮으십니까?" "호법을 서 드리겠습니다. 운기조식을 하십시오." 도사들의 호들갑에 청허자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저 그림에는 인생의 연륜이 들어있다. 더구나 검으로 순 식간에 만들었다고? 젊은이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어. 이 건 반로환동. 틀림없이 반로환동을 한 고수다. 그렇구나. 그 러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엄청난 자가 나타났다. 이게 무림 의 길이 될지, 흉이 될지." 무공과 명성이 높다고 해서 이런 것을 알아보는 안목까지 같은 급은 아니다. 오히려 무공과 도만 닦느라 현실 감각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 * * 주유성은 사태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나물을 캐 먹고 사냥을 하면 된다. 자기들은 무공을 익혀 손 발이 빠르니 그 일에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림 팔아먹 기는 이미 객잔에 실패해서 다시 할 생각을 못했고 일행은 돈 벌 방법을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사석이 아저씨, 아시다시피 제가 제대로 그리면 그림이 좀 나오기는 하는데요. 몇 년 안 그려서 손이 좀 굳기는 했지 만 그래도 하면 돈이 되지 않을까요?" 장사석이나 다른 무사들이 단호히 거절했다. 그들은 주진 한에게 단단히 지시를 받았다. 장사석은 이미 이 기회를 이용 하기도 결정했다. "유성아, 네가 그림 제대로 그리려면 시간이 꽤 걸리잖아. 우린 그럴 시간이 없다." "그럼 금방 그린 걸로 어떻게 팔면 안 될까요?" 장사석이 일부러 호통을 쳤다. "어허, 이 녀석! 그림을 팔아본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런 말 을 하는 게냐. 더구나 금방 그려서라니. 그런 것을 팔라고 배 웠단 말이냐? 우리 주가장은 싸구려는 취급하지 않아." 주유성도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렇다고 배웠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그가 본 책에는 물건을 속여 파는 일은 큰 죄라고 써져 있다. 더구나 구장춘 여기 마음에 들지 못하는 작품은 절대로 남 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이미 객잔에 대충 조각해 놓은 십장생도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알았어요."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무사들은 주가장에서 무공이나 닦으며 살아왔다. 모두 서 현 사람이다. 이런 식의 외유는 흔치 않은 일이고 그나마도 돌아가면서 하기 때문에 기회가 자주 오지 않는다. 언제나 돈 이 풍족하고 넓은 길로만 다니니 노숙을 할 일이 없다. 정히 노숙을 해야 한다면 그 전 마을에서 먹을 것을 미리 풍족히 준 비해왔다. 처음에는 나물을 캐려고 했다. 아무도 먹을 수 있는 나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 은 신의 혀라고 명성이 자자한 주유성의 판단을 기대했다. 주유성이 풀 한 가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이렇게 귀한 것이 여기 있네요?" 무사 하나가 잔뜩 기대하며 그 풀을 뽑았다. "소장주, 이거 맛있나요?" 주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삼선과의초라고 하는 거예요. 그냥은 보통 풀이지 만 처치하기에 따라서는 독초이지요. 이걸 찧어 소금과 유황 을 섞은 후 아홉 번 찐 다음에 주먹만큼만 먹이면 황소라도 단숨에 죽일 수 있어요." 그 말에 무사가 즉시 풀을 버렸다. 손까지 옷에 비벼 닦았다. "소장주! 누구 죽일 생각입니까? 먹을 수 있는 나물을 말해 주셔야지 독초를 골라주면 어쩝니까?" 무사의 항의에 주유성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맞는 말이네요. 먹을 수 있는 걸 찾아볼게요." 주유성이 다시 주변을 서성대다가 다른 풀을 가리켰다. "와, 이것 참 몸에 좋은 거예요. 물론 먹을 수 있고요." 다른 무사가 즉시 그 풀을 뽑았다. "이건 무슨 나물입니까?" "이건 도심관제초라고 하는 거예요. 잘 말려서 감초와 섞 으면 배앓이에 좋은 효과가 있어요." 약초를 손에 쥔 무사의 얼굴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한숨 을 쉬고는 일행을 이끄는 장사석에게 말했다. "장무사님, 이거라도 많이 찾죠? 먹을 수 있는 거라니까 배 를 채울 수 있을 거 아녜요?" 주유성이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큰일 날 말을 하시네. 약은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에요. 도 심관제초를 많이 먹으면 설사가 나와요. 그리고 그거 맛이 무척 써서 그냥은 먹기 힘들 텐데요." 무사들의 얼굴이 제법 나빠졌다. 장사석이 주유성에게 따졌 다. "유성아. 너는 신이 내린 혀를 가졌잖느냐? 요리를 잘 아니 까 맛있는 나물을 좀 골라주렴. 독초나 약초가 지금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 주유성이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요. 어머니한테 독초와 약초에 대해서는 좀 배웠거든 요? 특히 독초에 대해서는 자세히 배웠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나물 같은 식용식물은 가르쳐 주시지 않았어요." 장사석이 조금 놀라서 말했다. "우리 서현에서 요리의 맛을 가장 잘 보는 네가 나물을 모 른다는 말이냐?" 주유성이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줄 안다고 해서 만들 줄 아는 건 아니거든요." 무사들은 모두 얼굴이 굳었다. 그들은 서로를 돌아봤다. 그들 중에 나물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 남이 요 리해주면 먹기만 해왔다. 마침내 장사석이 한숨을 푹 쉬었다. "휴우. 할 수 없지. 조금 힘들기는 하겠지만 사냥을 하자." '우리가 사서 고생이구나.' 그들의 무공이라면 호랑이라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마주쳤을 때 이야기다. 주유성의 머릿속에는 사냥에 대한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 있다. 그러나 그는 사냥에 대한 경험이 아예 없다. 게으 른 그가 사냥을 해 봤을 리 없다. 다른 무사들도 입장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사냥꾼이 아니 다. 주가장은 여행 경비를 박하게 주지 않으니 그들도 사냥해 서 뭘 먹어야 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사냥감이 원할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면 배를 곪을 사 람은 없다. 세상의 기간산업은 농업이 아니라 사냥이 돼야 한 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전문적인 사냥꾼도 하루 종 일 토끼 한 마리 못 잡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그들은 한가하게 사냥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 여유 가 없다. 배송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적다. 사냥감은 없다. 사냥을 위해 할당한 시간이 다 지나가도록 그들의 성과는 별 로 없었다. 첫 날은 그렇게 쫄쫄 굶었다. 둘째 날, 주유성이 첫 번째 사냥에 성공했다. 재수 없는 토 끼 한 마리가 그들의 근처를 지나가다가 주유성의 굶주린 눈 에 발견됐다. 그 게으른 주유성이 번개 같은 동작으로 이동하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그 손은 조그마한 자갈 하나를 주웠다. 그는 자갈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내공이 몸 을 돌고 손가락은 당문의 암기술을 발휘했다. 자갈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토끼가 무림 고수도 아닌데 그 암기를 피할 수는 없다. 토끼 는 찍 소리도 내 보지 못하고 뒤통수가 터져 죽었다. "만세!"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그들은 즉시 수레를 세우고 토끼 에게 달려들었다. 무사들이 신이 나서 말했다. "하하하! 토끼다. 토끼." "토끼 한 마리는 양이 작으니까 탕을 끓여요, 탕." "그래, 국물을 잔뜩 만드는 거야. 배가 불러야지. 배가." "그런데 누구 토끼탕 만들 줄 아는 사람?" 사람들의 몸이 갑자기 굳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솥도 없어." "양념도 없지." "요리할 줄 아는 사람은?" 무사들이 주유성을 돌아보았다. 침을 흘리던 주유성이 멈 칫하다가 소리쳤다. "구워먹어요. 굽는 거야 요리법을 몰라도 할 수 있잖아요?" 먹을 줄만 아는 주유성이 밍밍의 꼬치구이를 기대하며 제안 했다. "그래, 굽자. 구워." 무사들이 즉시 찬성했다. 그들은 토끼의 껍질을 재빨리 벗 겼다. 적어도 내장을 빼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안다. 무림인은 사람을 상대로 칼을 휘두른다. 토끼 배 가르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잠시 고민하던 주유성이 막대 하나를 주워 토끼의 몸통에 꽉 끼웠다. 그리고 마른가지들을 재빨리 모았다. 가지 두 개 를 대고 빠르게 문질렀다. 무공 고수가 마찰을 일으키자 불은 쉽게 붙었다. "그냥 굽는 거예요. 까짓 거 별게 있겠어요?" 다른 무사들이라고 별 수는 없다. 그들은 그저 불길에 익어 가는 토끼를 보며 침만 삼켰다. "어허, 그쪽 타잖아. 조심해야지." "자주 자주 돌려주라고. 그게 나을 거야." 참견만 무던히 해댔다. 마침내 고기가 다 익을 때쯤 되자 실망한 무사 하나가 말했 다. "그런데 껍데기 벗기고 익히니까 참 작다. 꿀꺽." "그러게. 혼자 먹기에도 모자란 것 같은데. 꾸울꺽." 어쨌든 토끼는 한 마리다. 납품 기한이 있으니 오늘은 더 이상 사냥하며 보낼 시간이 없다. 주유성이 익은 토끼를 재빨리 다섯 등분했다. 그들은 뜨거운 토끼 고기를 호호 불면서 먹었다. "윽, 노린내가 난다." "그러네. 토끼 고기가 원래 이런 냄새가 나나?" "그래도 배고프니 먹어두라고. 이거 말고는 먹을 것도 없 어." 아무것도 처리되지 않은 토끼는 심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들은 그걸 가릴 처지가 아니다. 맛있는 것이 아니면 입도 제대로 대지 않는 주유성은 토끼 의 노린내가 고통스럽다. 그러나 배고픔이 더 크다. 그는 억 지로 고기를 씹어 삼켰다. 무사들이 입맛만 버렸다고 투덜대며 서로 눈짓을 했다. '우리,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그냥 소장주가 대충 그림 그려주면 헐값에라도 팔아다가 돈 만들죠?' '시끄럽다. 이 일만 잘 처리하면 돌아간 뒤에 장주님이 특 별 상여금을 주실 거다. 한몫 챙겨주신다고 했어.' 다음 날에는 바보 같은 꿩 한 마리가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 갔다. 주유성은 다시 조약돌을 날렸다. 꿩도 명색이 하늘을 나는 새다. 그러나 배고픔에 눈이 먼 주유성에게 걸리면 닭이나 다름없다. 무사들이 다시 환성을 질렀다. "꿩이다, 꿩." "꿩만두 만들어먹자." "꿩고기탕을 먹어야지." 말은 무성하지만 그들 중에 다른 조리법을 아는 사람은 없 다. 장사석이 선언했다. "구워 먹자." 꿩의 경우는 토끼보다 더 어렵다. 토끼는 가죽만 벗기면 되 지만 꿩은 깃털을 뽑아야 한다. 게으름뱅이 주유성이 몸소 나섰다. 그는 무사 하나의 칼을 빌려들고 꿩의 표면을 깎았다. 가죽은 다치지 않고 깃털만 잘 라내는 그의 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 "꿩은 껍질도 구워먹을 수 있어요. 오리도 껍질이 맛있으 니 이것도 맛이 죽일 거예요." 배고픔에 지친 무사들이 벌게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꿩도 토끼처럼 구워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 겼다. 깃털을 뽑지 않고 잘라낸 덕분에 거죽에 그 깃대의 일부가 여전히 남아있다. 사람들은 고기를 씹으면서 거친 깃대를 같 이 먹었다. 깃대가 입안에 계속 걸렸다. "오늘은 냄새는 좋지만 이거 참 먹기 힘드네." "에구. 찔렸다." "오늘은 이게 끝인 것 같다. 참고들 먹어." '다들 참아라. 특별 상여금이 걸려 있다고.' 그들은 며칠동안 거의 굶으면서 움직였다. 당소소의 지휘 아래 고된 수련을 하느라 언제나 잔뜩 먹던 그들이다. 그런 식 습관을 가진 그들이 느끼는 배고픔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납품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주진한이 하남십대상 인이 되는 데는 신용을 철저히 지킨 것이 한몫 했다. 강행군을 한 그들은 마침내 무림맹에 가까운 장소에 도착 했다. 주유성이 그들을 보고 말했다. "지금 우리는 거지꼴이에요." 그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다들 헐벗고 굶주렸다. "상인은 그 모습도 중요해요. 상인이 거지꼴을 하고 물건 을 판다면 고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그러니 우리는 좀 깨 끗해질 필요가 있어요." 주유성은 장사 경험이 없지만 책에는 사람을 상대할 때의 예의에 대해서 나와 있다. "그러니 마침 개천을 만난 김에 우리 좀 씻어요. 옷도 빨고 요." 무사 하나가 반대했다. "하지만 소장주, 옷을 빨 기운도 없어요." 장사석이 주유성의 편을 들었다. 지금 이 꼴로 가면 납품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 "유성이 말이 맞다. 우리는 무사이기도 하지만 상인이기도 하다. 거지가 파는 물건은 아무도 안 사. 어서 씻고 빨자." |
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ㅎ늘 감사 히 잘읽고 갑니다
즐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