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회(一進會)는 1904년 8월 송병준과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 유학주, 동학교 이용구 등이 조직한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친일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단체이다.
1904년8월 18일한성부에서 송병준이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를 조직하였다가, 8월 20일에 다시 “일진회”로 회명을 개칭하고, 그해 9월에 동학의 잔존세력을 조직한 이용구의 “진보회”를 매수·흡수하여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이후 회장 이용구와 송병준 주도 하에 1910년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탄될 때까지 일제의 군부나 통감부의 배후조종 하에 일본의 침략과 병탄의 앞잡이 행각을 벌였다.
일진회라는 이름은 '조선과 일본이 하나로 나가는 모임'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의 일진(一進)은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는 뜻이다. 일부에서는 친일 단체이기 때문에 일진회(日進會)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한자 병기이다. 실제로 이 한자가 쓰였던 일진회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쪽은 반일 및 항일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발족과 동시에 4대 강령을 내걸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실을 존중하게 하고 국가의 기초를 공고하게 할 것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할 것
정부의 개선정치를 실시하게 할 것
군정과 재정을 정리하게 할 것
창립의 강령과 취지에서 제시한 비정(秕政)에 대한 국정개혁이나, 이 해 9월에 일진회의 급선무로서 회원의 일심단결의 표적인 단발착모와 양복차림을 하는 등 문명의 개화를 급격히 서둘렀다. 그러나 이해 10월 22일에 평의원 회의를 개최하고, 일진회의 취지가 일본군략상에 조금도 방해가 없다는 뜻을 의결하여 이날 주한일본군사령관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 헌병대장 다카야마, 그리고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전달한 공적 서한 내용에는 일진회가 추구하는 국정개혁이나 단발착모 등 표면상의 취지와는 달리 일제 침략에 동조하여 친일색채를 공공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의 방향과 병행한 표리가 부동한 상투적인 구호에 불과했다. 이때 각종 사회단체가 한성부를 무대로 활동하였을 뿐 전국적인 지방조직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일진회의 활동 역시 한성부를 무대로 하였을 뿐, 그나마도 대중의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일제의 보호하에 겨우 명맥만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 무렵 이용구 등이 동학의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이해 9월 하순에 조직한 '진보회'는 강령과 취지에서 제시한 국정개혁이나 갑진개화운동은 전국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음에 착안하여 송병준은 두 단체의 합동을 추진한 결과, 이해 12월 2일 진보회를 매수,흡수하여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이용구는 지방지부 회원의 거의가 진보회의 회원이라는 미명 하에 13도지방 총회장 직에 앉게 되었으며, 이면에서 일진회를 조종하던 송병준은 이듬해 평의원장(評義員長)에 취임하였다. 송병준은 일제의 계략적인 흉계에 호응하여 윤시병을 멀리하고 이용구를 매수하여 1905년12월 22일 총회에서 회장에 이용구, 부회장에는 윤시병, 지방총회장에 송병준, 평의원장에 홍긍섭을 선출하였다. 일진회는 일본인을 고문으로 채용하는 한편 일본군의 지원을 비밀리에 받아 활동했다. 일진회 회원은 창립 당시 300명, 진보회와 통합한 뒤 곧 수만의 회원이 되고, 한일 병합 이후에는 이른바 '100만의 회원'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나 실제는 10만명쯤 되었다. 이와 같이 조직된 일진회와 연계성을 가진 외곽단체나 주변단체가 또한 조직되어 일제와 일진회의 사주와 매수 공작에 의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일제 침략의 앞잡이 행각을 벌였다. 일진회는 한성부를 중심으로 하여 일본군의 보호 하에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온 조직이 미미한 단체로부터 시작해 일본의 지원하에 광범위한 지방조직을 가진 전국적인 단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인용 위키백과)
일진회의 역사는 일본인 망월동태랑등이 송병준 이용구 윤시병등 몇몇흉도를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한국관리에게 박해를 당하는 동학여당을 모아 일본의 사냥개무리를 삼은것이라 그런까닭에 한국이있는날에는일진회가 용납하지못할것이요 일진회가 하루라도있는 날에는 한국이없을지니 일진회를 어찌 한국인민이라 지목할수있으리오마는 세계사람의 안목으로는 이를 한국인민의 한분자라하며 일본은 이를 한국의 한정당이라하며 일진회는 자칭 이천만민의 대표라하되 사(邪)와정(正)을분별하여 세상에 들쳐내지못하는것은 과연 한국에 사람이없음이라 이같은 무인지경에 저 간흉한자가무슨일을 행하지못하리오
첫댓글글쓴북간도가 지금에 간도가 아니라 바이칼호 서쪽으로 알고 있고 1910년 합병은 공식이고 이미 1894년 일본에 의한 조선이라는 나라를 한반도에 설계하고 박아놈으로서 계획된것이고 1808년에는 서울에서 수많은 고려인을 학살하고 그곳이 지금에 서울은 아닐진대 지금서울은 1910년이후 새로만들은 도시라 1915년도 2만명도 안되였던 시기로 서울을 옮겼다는 증명이 됩니다
첫댓글 글쓴북간도가 지금에 간도가 아니라 바이칼호 서쪽으로 알고 있고
1910년 합병은 공식이고 이미 1894년 일본에 의한 조선이라는 나라를
한반도에 설계하고 박아놈으로서 계획된것이고 1808년에는 서울에서
수많은 고려인을 학살하고 그곳이 지금에 서울은 아닐진대 지금서울은
1910년이후 새로만들은 도시라 1915년도 2만명도 안되였던 시기로 서울을 옮겼다는 증명이 됩니다
1910년의 경복궁에 4천여칸의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눈에 들어옵니다. 현 반도 경복궁에 고작 740칸의 건물만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거짓의 역사 조작의 역사 그리고 4천칸의 거대한 궁궐이 이 땅의 이야기가 아님은 너무도 선명해 보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