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유식했습니다.
아버지가 쓰신 한문은 명필이었습니다. 동리에서 초상이 나면 상여 앞에 들고 가는
깃발을 써 달라고 부탁 하러 오고 회사에서 근로자들에게 알릴 거리가 생겨 공고문을
써 붙일 때면 늘 아버지의 손을 거쳤습니다.
음주 가무를 좋아 하시던 아버지는 술이 거나해지면 아버지가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부르며 들어오십니다. “우리 집엔 딸이 삼형제 큰딸이 예쁘냐? 작은딸이 예쁘냐?
셋째 딸이 더 예쁘냐? 이 노래가 끝나면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라는 노래로 마무리를 하실 때 쯤 이면 마을 입구에서 시작된 아버지의 노래는 사립문에
도착하면서 끝이 납니다. 어머니는 동네 카수였고 아버지는 동네에서 제일가는 음치
였습니다. 어머니는 장자였던 할아버지가 작은 할머니까지 두면서 문전옥답을 다 날렸
다고 가끔씩 애석해 하셨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술을
사주다가 주머니에서 돈이 똑 떨어져야만 집으로 돌아온다며 날마다 아버지를 비틀어
짰지만 어쩌면 아버지가 사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아버지에게 붙잡혀 술동무를 해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이런 어머니의 지청구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꿋꿋이 한량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여름 방학이 되면 솟을 대문을 거쳐야 들어가는 동네 제일의 부자인 작은 할아버지
집을 우리 오남매는 찾아 갑니다. 어머니는 이 땅도 저 논도 저 위에 밭도 다 우리 것
이었다며 한숨을 쉽니다. 큰아들 이셨던 할아버지가 제일 많이 물려받았고 할아버지가
하나씩 떼어 팔 때마다 현금 동원이 용이한 작은 할아버지가 사들인 거지요. 아버지는
그래도 남의 손에 안 넘어 간 게 어디냐고 웃고 어머니는 웅얼대며 말을 삼킵니다.
작은 할아버지는 추수 때가 되면 농작물을 아주조금 나누어 주시며 쯧 하고 혀를 차십니다.
어머니가 평생을 두고 가장 억울해 한건 토지도 돈도 아니었습니다. 17세에 스물여섯의
아버지에게 시집와서 18세에 큰언니를 출산하고 시아버지와 손아래 시누이를 치다꺼리
하면서 농사일까지 도와야 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저녁이면 이웃집 순이 아줌마네 집에
군대 간 아들이 보낸 편지를 읽어주러 가는 아버지가 그냥 편지만 읽어주러 가는 줄로
알았습니다. 순이 아줌마는 청상과부로 유복자인 아들을 하나 두었고 그 아들이 군대를
갔는데 까막눈인 아줌마가 글을 모르니 아버지가 편지도 읽어주고 답장도 써주러 가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첫 닭이 울고 나서야 돌아온 아버지가 깜빡 잠이 들었었다 하면
그런 줄 알았습니다. 개울에 빨래를 하러 가면 동네에 나이 먹은 아주머니들이 어머니를
보면서 “ 순예 네 새덕 어제 밤도 아범은 편지 읽어주러 간 겨 ? ” 물을때 “야” 하는 엄마의
대답에 “그랴아” 하며 단체로 까르르 웃으면 느낌이 이상했다고 합니다. 편지 읽어주러
가는 걸 말리면서 싸움이 시작 되었고 삐뚤빼뚤 겨우 한글만 깨우친 어머니가 어느 날 부터
싸울 때 마다 들고 나오는 이야기가 생겼습니다.
이씨조선 양녕대군 호롱파의 사대부집 딸이 이누무 집구석에 와서 평생 고생만 하고
산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긴 푸념이 이어지고 아버지의 인내력이 바닥날 쯤 이면 아버
지의 영어가 터져 나옵니다. “ 쎗따 마우스 쎗따 마우스” 하면 흥 유식한척 하기는 하는
어머니의 비 아 냥 에 아버지의 영어가 한 번 더 나옵니다. “ 쎗따마우스 노 까땜 ” 이 영
어를 끝으로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오랜 후에 문득 아버지가 생전에 하시던 국적 불명의 영어가 궁금해 졌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싸울 때 쓰던 그 영어는 대체 어디서 배우신 거래요? 물었더니 “ 하이고 야! 야!!
니 아부지가 원래 유식하잖나 나를 무식하다고 얼 매나 무시했는지 니 모르재? “ 어머니는
유식한 아버지가 일어와 영어까지 삼개국어를 구사 하셨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발자국만 남기고 간 공룡이 지금까지 전설로 남아 있듯이 아버지의 영어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전설로 남았습니다.
첫댓글 재미있게 쓰셨네요, 그런데~
정란 샘의 노래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했는데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능이었군요.
쉽게 꺼내 놓을수 없는 가정사를 재미있게 풀어놓으셨네요. 지루한 줄 모르고 잘 읽었습니다. ^^
솔직하고 단백한 글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