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과 틈새의 시간 [곽효환]
푸르게 일렁이던 청보리 거둔 빈 들에
하얀 소금 덩이 같은 메밀꽃을 기다리는
비움과 틈새의 시간
배꽃과 복사꽃 만발했던 자리에
코스모스와 키 큰 해바라기 몸 흔들고
배롱나무 더 붉게 물드는
세상의 풀과 나무와 산과 강이
제각각의 빛깔을 머금고 뒤섞이는 시간
징검다리 여남은 개면
눈에 띄게 수척해진 물살을 건너
다음 계절에 닿을 듯하다
크게 물굽이를 이루며 사행하는 물살에
수없이 부딪히며 어질고 순해진 돌들에게서
거친 시대를 쓿는 소리가 들린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뿐이겠냐마는
초록이 다 지기 전에
물길 따라 난 길이 문득 끊어진
강변 마을 어느 허술한 찻집에 들어
아직 고여 있는 것들
미처 보내지 못한 것들
함께 흘려보내야겠다
빠르게 질러가느라 놓친 것들
그래서 잃어버린 것들
찬찬이 새김질해봐야겠다
- 너는, 문학과지성사, 2023
슬픔의 레미콘 [황인숙]
슬픔 반 남은 거 판매함
포장해드립니다
직립원인이 미소 띠고
엉거주춤 팻말을 들고 있다
한들한들 꽃 피운 코스모스들
짚단처럼 쓰러져 있는
지방도로 길섶
막무가내로 바람 불고
온 하늘이 거대한 물고기
비늘 같은 구름으로
촘촘히 덮여 있다
저 하늘 포장 鋪裝하고
남은 반
- 아무 날이나 저녁때,현대문학, 2019
평택 여자 [최삼용]
평택시내에서 차로 십오 분 남짓
안중에도 없던 안중 땅에
내 안중에 송두리째 넣어도 아니 아플
숲 그늘 같은 여자 하나 살고 있다네
안성 땅 이웃 두고 안성맞춤 같이 살고 싶어
밤이나 낮이나 가슴 저미던
포승 항구에 밥줄 걸고
행담도 넘나들던 돛배 같은 사람
까짓거 질끈 눈 감고 내 자리에 닻이나 놓으시지
꺽다리 코스모스 바람에 흔들리듯
이 풍진세상에 흔들리다 흔들리다
쓸쓸한 날에는 소주 한잔에
유행가 한 자락 불러도 밉지 않을 여자길래
이제 평택 땅 깡촌 여자야
아름다워지기 위한 변신은 무죄다
제발 서해대교 장식등처럼 멋지게 살아다오
- 그날 만난 봄 바다 , 그루, 2022
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
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
리카락까지 조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
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
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
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
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
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
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
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실천문학사, 1989.
데이트 [유자효]
유리창에 비치는 새초롬한 프로필
속상한 내색은 결코 않는 자존심
늦어도 만나 좋은 걸 이제 그만 용서하지.
배밭에 드러누워 배를 깎는 손을 본다.
심줄 돋은 여자의 손
품에 넣고 살고 싶다.
귀로에 코스모스는 왜 저리 출렁일까?
가을비에 젖으며 헤매다 조우하다.
신열이 있음인가? 발그라니 상기한 볼
새처럼 떠는 어깨에
무너지는 가슴 가슴.
풀잎은 떨고 있다.
시들지 않을까?
끝내 말없이 일어나 돌아서다.
바람만 휘파람 불며 사라지는 텅빈 들.
네가 젊고 싱싱하여 목숨을 잃지 않으면
내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아니어도 좋아.
그러나 늦장마 비는 가슴으로 흐르네.
-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태학사, 2006
7번 국도변 [이윤학]
검정 모자를 눌러쓴 눈 나쁜 아비와
늦둥이 딸아이가 캥거루가 되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왼손을 내밀어 코스모스를 훑는 딸아이와
홀아비 냄새를 뒤로 피우는 아비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7번 국도변을 역주행으로 지나간다
영재유치원 가방이 핸들에 걸려 지나간다
체인 집 긁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지나간다
신문지에 말아 싼 제수용 북어포가
짐칸 고무 바에 묶여 지나간다
창문을 연 시외버스가
커튼을 쳐 매고 지나간다
아비의 가발과 모자가 날아간다
아비는 자전거를 멈추고
받침대를 세워 올린다
허옇게 드러난 아비의 대머리
놀란 딸아이가 몸을 틀어
허둥대는 아비를 바라본다
속내를 다 드러낸 코스모스가
끊임없이 피어 있는 7번 국도변
가발을 씌워주는 딸아이와
부끄러운 아비가 마냥 웃고 있는 7번 국도변
- 나를 울렸다, 문학과지성사, 2011
버스에서 [함민복]
임산부와 함께 앉게 되었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동행하게 되었네
아이와의 인연으로
내 인생이 길어지자
나는 무상으로 어려지네
버스가 조금만 덜컹거려도
미안한 마음 일고
따갑게 창문 통과하는 햇살
밉다가
길가에 핀 환한 코스모스
고마워지네
아이가 나보다 선한 나를
내 맘에 낳아 주네
나는 염치도 없이 순산이라네
- 시와함께, 창간호, 2019
불혹, 블랙홀 [안현미]
칼 쎄이건의 저서『코스모스』를 참조하자면
약 150억년의 나이를 가진 우주의 역사를
달력의 년으로 줄인다면
지구의 탄생은 9월 중순 어느날 일어난 사건이며
그후 10일쯤 지나 최초의 생물이 싹트고
인간의 조상이 불을 사용하게 된 것은
12월 마지막 날의 마지막 15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으며 지나가는 시간을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잠시 사는 것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으며 지나가는 시간을 잠시 씹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잠시 사는 것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삶을 인용해서 살고 있는 것만 같은
불혹, 블랙홀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꼭꼭 씹어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는 일만으로도
나는 잠시 너를 사랑하는 것
* 어디선가 읽고 메모해두었지만 어디서 읽은 건지는 잊었다. 잊어먹는 동안에도 나는 살고 있었던 것이고 곤드레나물밥은, 시간은, 가끔 맛있었다.
-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 2014
여진 [길상호]
뒤늦게
꽃 한 송이 올라왔다
말라버린 물관으로는 더이상
입술을 적실 수 없어
코스모스는
몸을 쥐어짜내 겨우
빨갛게
꽃잎을 물들였다
장의사가 그려놓은
아버지의 마지막 입술처럼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저녁이
따스한 햇살 한 줌
꽃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 우리의 죄는 야옹, 문학동네, 2016
고통에 대하여 [이승훈]
고통이 견딜 수 없는 것은 고통을 피할 수 없기 때문
이다 고통을 피할 수 있다면 고통받지 않았으리라 그
해 가을 저녁도 피할 수 없었다 내가 고통에 시달린
건 거기 고통이, 고통이라는 이름의 물건이, 책상이,
술집이 거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벗어날 수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고통
받습니다 항구가 있다면 배를 타고 떠났을 것이다 고
통 속에 항구가 있다면 물론 역이 있다면 기차를 타고
도망갔겠지요 그러나 항구가 있고 역이 있어도 떠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다른 항구에 닿고 다른 역에 닿기
때문입니다
항구에서 항구로, 역에서 역으로 떠나는 삶, 이 회귀,
이 돌아옴, 결국 고통 속엔 코스모스도 없습니다
- 나는 사랑한다, 세계사, 1997
코스모스 [양진건]
오랜 만에 산길을 찾았더니
아, 벌써 코스모스
오후 햇살이 많이 엷어졌나 했더니
그렇대도 벌써, 휘청거리는 꽃길.
뜰을 갖게 되면 코스모스 많은 꽃밭을 만들겠노라
그것이 그대의 다짐이었지만
오늘 그대는 없고,
그대를 닮았을 한 송이 찾아내어 입 맞추면
내 앞에 잇바디 환한 모습으로 그대 돌아올까?
그래서 일찍부터
분홍 꽃 하나가 유독 몸 흔드는 걸 테지만
그렇대도 큰 꽃밭이 흔들리도록 바람 불면
그때 어느 꽃에 내 입 맞춰야 할까?
아닌 게 아니라 서둘러 차를 내리자
아, 모든 코스모스가 흔들려
이제 잘못된 입맞춤으로 나 역시
한 송이 코스모스로 변해야 하는가?
마침내 흩어져버릴 평생의 시간들이여.
꽃의 영광이여.
바람이 불자 모든 것이 쉽게 흔들린다.
- 귀한 매혹, 문학과지성사, 2008
그리운 옛집 [김영남]
옛집은 누구에게나 다 있네. 있지 않으면 그곳으로 향하는 비포장 길이라도 남아 있네. 팽나무가 멀리까지 마중 나오고, 코스모스가 양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는 길. 그 길에는 다리, 개울, 언덕, 앵두나무 등이 연결되어 있어서 길을 잡아당기면 고구마 줄기처럼 이것들이 줄줄이 매달려 나오네.
문패는 허름하게 변해 있고, 울타리는 아주 초라하게 쓰러져 있어야만 옛집이 아름답게 보인다네. 거기에는 잔주름 같은 거미줄과 무성한 세월, 잡초들도 언제나 제 목소리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 이를 조용히 걷어내고 있으면 옛날이 훨씬 더 선명하게 보인다네. 그 시절의 장독대, 창문, 뒤란, 웃음소리.... 그러나 다시는 수리할 수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집. 눈이 내리면 더욱 그리워지는 집. 그리운 옛집.
어느 날 나는 전철 속에서 문득 나의 옛집을 만났다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나의 옛집이 아니었네.
- 소통의 월요시 편지 589호
추석날 고향에 와서 [이재무]
골짜기의 옆구리 차며 흐르던 물방울들이
냇물에서 만나 하나로 뭉쳐내리 듯
우리들 이렇게 만나 명절의 오곡들판을
참새 떼되어 키득거리며 걷는구나
그간 살아온 안주 구절구절 걸어온 눈물내력
벽공에 걸어두면서
늘 설레임으로 남는 사랑 얘기로
툭툭 채이는 돌팍에도 아프지 않고
코스모스 만개한 신작로길 걸으며
고향의 흙향기에 몸을 묻는다
어릴 적 스스럼없이 어깨 치던 손장난으로
계장이 된 경중이 농협직원 명호 기능공 장환이도
오랜 외출에서 돌아온 우정의 겨드랑에
간지럼을 먹이는구나
누구는 장가를 가서 콩잎같은 딸애를 낳았다더라
누구는 시집을 가서 보리알 같은 머슴애을 낳았다더라
고향 떠나 멀리 사는 동무들
떠올리며 간절한 그리움에 설레다보면
하늘 말없이 높고 걸어야 할 들길 끝없어
한 잔 술 걸친 발길 삐뚤어져도
우리들 살아갈 내일 앞산 보듯 숨차고나
이만큼 가깝고 확실하구나
비록 가진 것 없이 빈몸으로 돌아온 고향이지만
비록 가질 것 없이 빈 몸으로 돌아갈 고향이지만
- 섣달 그뭄,천년의시작, 2003
7번 국도에서 쓰는 편지 [우대식]
로드 무비처럼 걸어서 바다에 왔다. 걷는다는 것은 적당한 가격으로 인생을 거래하는 일. 철 지난 해변의 상가에는 고양이들이 순회하고 있다. 머리 기댈 당신은 없다. 머리를 뚫고 나온 겨울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려 어지러울 뿐, 아무 일도 없다. 잠시 겨울나무를 내려놓고 편지를 쓴다.
"행복하신지요. 사랑의 순정, 이런 것이 하마도 남아 있습니까? 10월의 하늘 아래서 당신을 생각하는 일, 푸른 하늘 속으로 가끔 손을 흔들고 가는 구름을 보는 일, 7번 국도 길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 툭툭 코스모스가 얼굴을 치기도 합니다. 어느 신도 이것을 예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람이 붑니다. 오래전 내가 고아였음을 깨닫습니다. 하마도 사랑의 순정이 남아 있습니까? 이만 총총"
- 설산 국경, 문예중앙, 2013
의미심장(意味深長 ) [장석남]'
돌 위에도 물을 부으면
그대로 의미심장
내게 온 소용돌이들이
코스모스로 피어 흔들리는
병후(病後) 문밖에
말뚝이 서넛 와 있다
오늘 밤 내 머리맡에는
티눈 같은 웃음들이 모일 것 같다
길 잃은 웃음들이, 막차 놓친 웃음들이
갈데없이 모일 것 같다
찔레 넝쿨도 바람 불면
그대로 의미심장
-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문학동네, 2012
코스모스는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다 [[이규리]
몸이 가느다란 것은 어디에 마음을 숨기나
실핏줄 같은 이파리로
아무리 작게 웃어도 다 들키고 만다
오장육부가 꽃이라,
기척만 내도 온 체중이 흔들리는
저 가문의 내력은 허약하지만
잘 보라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도
똑같은 동작은 한 번도 되풀이 않는다
코스모스의 중심은 흔들림이다
흔들리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중심,
중심이 없었으면 그 역시 몰랐을 흔들림,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마른 체형이
저보다 더 무거운 걸 숨기고 있다
- 뒷모습, 랜덤하우스, 2006
흔들리는 것들 [나희덕]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송이가 허리를 휘이청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흔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끝에도
온기는 남아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 1994
가을, 꽃 한 다발 샀어요 [홍정순]
달포 만에
郡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러 갔어요
코스모스 아록아록, 가을이
꽃을 굽고 있었어요
길섶에서 봇물 터지는 꽃, 꽃, 꽃들
괜히 미워서 눈 질끈 감고 1톤 트럭 몰았지요
감시 카메라는 또 얼마나 많은지
찍힐 듯 말 듯한 속도로
달렸지요 서둘러 책 반납하고
단양 읍내 꽃집에서 장미 한 다발 샀어요
(가을 꽃은 팔지 않고요, 장미는 계절이 없지요)
꽃손이 아름다워 백장미 한 단
흑장미 또 한 단
곱은 그대 손에 쥐어 주려고요
꽃 피는데 무슨 이유 있나요
덧없이 피는 마음들을 꽃이라 부르지요
볼긋볼긋 가을마져 구워지는 오늘.
오늘은
보름 내내 읽었던 책 속의 봄꽃들도
꽃뱀의 혓바닥처럼 사륵사륵 고개 내밀 것 같은
그런, 가을날이네요
- 시로 여는 세상 2009 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