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에 선생은 독손(獨孫)을 잃게 되었고 스스로 병이 쇠약해졌음을 생각하여 송추(松楸) 가까이에서 살고자 하여 드디어는 강도(江都)의 하곡(霞谷) 선묘(先墓) 아래로 옮겨 살게 되었다.
경인(庚寅 숙종36)년에는 강원 감사(江原監司)에 임명되었는데 사직하였다. 그러다가 신묘(辛卯 숙종37)년에는 다시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임명되매 의리상 감히 은명(恩命)을 여러 번 어길 수도 없어서 결국 부임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흉년이 크게 들었으므로 선생은 구휼(救恤)에 한결같이 뜻을 다했던 것이다. 얼마 후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으니 정사를 본 지는 겨우 3개월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사할 때에는 항상 합문(閭門)을 닫고 있었으므로 아전들은 선생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정치와 교화는 이미 흡족하여 회양 사람들은 철비(鐵碑)를 세우고 추모하기를 마지아니하였던 것이다.
정유(숙종43)년에 주상께서 온양(溫陽)에 행차하실 때에 선생은 서울에 들어와서 어가(御駕)를 맞이하여 전송하였다. 기해(숙종45)년에는 주상께서 기사(耆社)에 납시어 선생에게 은전(恩典)을 베푸셨는가 하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급되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가 미구(未久)에 한성 좌윤(漢城左尹)에 임명되었으나 선생은 모두 사직하였다.
경자(숙종46)년에는 상께서 몹시 미령하시자 선생은 세 번째 서울에 나아가 문병하였으며 6월에 숙종 대왕(肅宗大王)이 승하(昇遐)하심에 대궐 밖의 곡반(哭班)에 입참(入叅)하였고 10월에는 능소(陵所)에 참배했으며 신축년에는 소상(小祥)에 참배하였다.
주상께서는 별유(別諭)를 내리시어 체류하기를 권면하였으나 선생은 곧 돌아와서 소를 올렸다. 임인(壬寅 경종2)년에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에 시강원 찬선(侍講院贊善)에 겸임(兼任)되었다가 다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전임되었다.
갑진(甲辰 경종4)년에 주상께서는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별유(別諭)로 부르시었으나 선생은 소를 올려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성균관 좨주(祭酒)에 임명되었으며, 8월에는 경종 대왕(景宗大王)이 승하하시매 달려가 외반(外班)에서 곡(哭)한 다음 상복을 받고 곧 돌아왔다.
이때 주상[영조(英祖)를 말함]께서 별유(別諭)를 내려서 이르기를, “경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에는 병에 시달리던 것을 알고 부디 머물러 달라고 하지 못하였는데 막상 성(城)을 나갔다는 말을 듣고 보니 섭섭함을 이길 수 없소. 그러니 여기 좌사(左史)를 보내어 나의 마음속을 털어놓는 바이니 모름지기 양조(兩朝 숙ㆍ경종)의 은고(恩顧 특별한 총애(寵愛)임)의 뜻을 생각해서라도 곧 사관과 함께 마음을 돌려 길을 떠나 주었으면 하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회계(回啓)를 올려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한다는 뜻을 진술하였고, 아울러 또 이르기를 “지금 전하께서는 새로 천명(天命)을 받았사온대 건극(建極)의 근본과 질경(疾敬)의 덕이 이에 있지 않는 것이 없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강학(講學)한 것이 본래 있었고 얻으신 것이 몸에 있사오니 어찌 다시 천신(賤臣)을 부르시어 같이 의논하셔야만 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주상께서는 여러 번 유지(諭旨)를 내려서 부르시고, 사관을 오래도록 머무르게 하였으니 선생은 마지못하여 통진(通津)으로 나와서 소를 올려 해직하시기를 구하였고 따라서 “복제(服制)에 있어서는 고례(古禮)만 쓰고 오례의(五禮儀)를 쓰지 않는다면 도리어 경중(輕重)과 반박(斑駁 뒤섞여 얼룩짐)의 잘못이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적극 논란하였다.
또 아뢰기를,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을 가지고 일대 제왕의 예를 만드사 정밀한 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경자년 대상(大喪) 때에는 갑자기 천자에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임금을 위하여 삼년복(三年服)을 입는다는 설(說)이 나돌게 되자 예의(禮儀)는 모두 무너져서 조금도 남는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필부(匹夫)로서 선왕(先王)의 예를 의논한다는 것은 경상(經常)을 변란(變亂)하는 것이니 그 죄는 용납될 수 없사옵니다.”고 하매, 그 때에야 비로소 허락하시는 비답(批答)을 받았고 사관도 철수하게 되었다.
첫댓글 읽으면 읽을수록 역사
속으로 빠져가는 재미
를 만끽하니 이 어찌 단풍구경에 비할까요?
그새 단풍이 낙엽비가
되어 소슬해도 소슬속
에서도 인간의 도리와 역사의 온기가 더 더욱
느껴집니다.
한 사람의 역사가의
글에서 이렇게 인간의
德香이 피어나는것을.
더구나,
하곡선생(정제두)이
포은 정몽주 선생의
11세손이고,
저는 고려말 충신이신
경주김씨 상촌공 파조
(김自粹)의 후손으로
고려말 당시 호형호제
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 셨겠으니 옷깃이 여며
지게 되는군요.
가히,
충과 효는 백대의 근본 으로 이렇게 이어져 오
거늘 작금의 행태를 보
면 눈앞에 이익으로 나
라의 앞을 내다보지 못 하니 이 미로와 혼돈의 책임을 과연 누가 지려
는지...
충신은 없고 간신만 득
실거리는 세상에 코로 나 퇴치하듯이 내년엔
간신퇴치 또는 박멸의
시제로 한시대회가 많
이 열렸으면 싶어요.
정신이 살아야 육체가
건강한줄 모르고 돈으
로 도배하는 바람에 바
람이 통하지 않아 방에
서도 썩는 냄새가 나는
군요.
바람도 자고가고 구름
도 쉬어가는 추풍령고
개 노래가 생각나요.
장문의 댓글을 올려 주신 백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려말에 두문동 72현중에 일원이셨던 상촌 김자수 선생과
"단심가"로서 고려왕실에 대한 변함없는충성을 보이셨던
포은 정몽주 선생께서 호형호제하는 사이셨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한 선대의 인연이 후손들에게도 이어져서 상촌 선생의
현손이 되시는 십청헌 김세필 선생께서 1520년 명나라 사신의
임무를 마치시고 귀국하실 때 양명학의 입문서인 "전습록"
초간본을 지참하시고 귀국하시면서 조선에 양명학이 시작되는
결정걱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심청선 선생이 별세하신지 100년후에 포은 선생의 후손이
탄생하시니 이 분이 바로 하곡 정제두 선생이십니다.
사암 정약용 선생께서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신 것처럼
하곡 선생께서는 조선후기 양명학을 집대성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상촌 선생과 포은 선생간의 당대의 인연이
그 후손들에게도 이어져서 십청헌 선생은 양명학을 최초로
전래하였으며, 하곡 선생은 그 얌영학을 집대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2023년 10월 31일(화) 문 암 올 림.
천년만년 인연을 이어
가며 경국의 사상을 온
전히 보존해 오시는 선
현들의 노력에 머리숙
여 감사드리면서 애 많
이 쓰시는 문암 선생의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저 또한 백야 선생님의 감동적인
댓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