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66
10월2일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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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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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6810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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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는 주님의 위대함 앞에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요?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요?">
요즘 시대가 바뀌어서 늘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권의식, 우월주의, 특혜, 특별대우, 갑질, 차별대우 같은 구시대적 악습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근현대사를 돌아보니, 그런 악습에 깊숙히 빠져 살았던 악한 무리들의 횡포와 갑질로 인한, 가난한 국민들과 힘없는 서민들의 수난사(受難史)였습니다.
청문회장과 국정감사장에서, 아주 거만한 자세로, 폼이란 폼은 있는대로 다 잡고, 틈만 나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참으로 봐주기 힘든 꼰대중의 꼰대인 한 국회의원을 보고, 정말이지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국회의원! 그거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어찌 그리 쌩난리를 다 피웁니까? 보아하니, 지금쯤 집에서 지난 세월 반성하며, 손주손녀나 보면 딱 좋을 분 같은데, 그분도 죽을 고생을 하길래, 참 불쌍해보였습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너무나 나약한 존재여서, 지속적인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할 때, 순식간에 안하무인, 꼴불견으로 돌변합니다.
쥐꼬리 만한 권세라도 손에 쥐게 되면, 천하를 다 얻은 듯 거드름을 피우며 돌아다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코웃음치는 것도 모르고,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내가 누군줄 알아?’하며 허세를 부립니다.
그저 야심으로 가득차 영혼은 사라진 채 좀비처럼, 불나방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의 미없는 것에 목숨을 거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들 인간의 시선으로 볼 때도 웃기고 가증스러운 데, 하느님께서 보실 때는 얼마나 더 웃기고 가증스럽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제자 직분의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지침을 가르치십니다. 요점은 제자들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리고 겸손의 덕을 지니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복음 17장 10절)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제자는 종이라는 것, 제자로서의 사도직 수행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그에 따른 보상이나 특별대우를 바라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사람들, 참으로 봐주기 힘들고,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업적을 한껏 부풀려 과대 포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근본, 원초적 결핍, 태생적 나약함을 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특징이 마치 이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 불과 20년 30년 세월이 흘러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의 육체는 아무 볼품없이 모습으로 차갑고 황량한 들판에 누워있을 것입니다. 영혼은 저 세상 어딘가에서 초조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도 꼭 쥐고 있던 재물들은 사방천지로 흩어져버렸을 것입니다. 남겨놓은 글도, 명성도 순식간에 잊혀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도 자부심을 느꼈던 소중한 저서들은 킬로그램당 얼마씩에 팔려 고물상 한 켠에 쌓여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에서 뭔가 대단한 인물, 엄청난 존재가 되고자 발버둥치는 노력들이 얼마나 가소롭고 한심한 일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사실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쓸데 없는 허영심, 자만심, 하늘을 찌르는 교만함을 버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영적·육적으로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위쪽에서부터 오는 은혜요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뭔가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덕분이라는 것을 늘 고백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위대함 앞에 나는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분의 무한하심 앞에 나는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 나는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늘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제자직 수행을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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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ggqjitqGn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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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극복의 열쇠: “나는 누구인가?”>
전에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욕을 하는 아이들이 욕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욕을 하는 대가로 많은 돈을 주다가 점점 돈을 줄여가니까 아이들이 그 적은 돈을 받으며 욕을 하지는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에 보상을 붙이면 보상이 작아짐에 따라 그 일을 하기 어렵습니다. 삶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에겐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이 고통을 넘어설 보상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힘차게 살아갈 힘을 주어야 한다면 무엇을 주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갓피플’이란 채널에 한창수 목사가 ‘고난을 절대 해석하지 마세요’란 제목으로 자기 삶에 비추어 고난 극복법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한창수 목사의 어머니는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소년을 출산한 직후 치료 불가 상태의 암을 얻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랜 투병 끝에 모르핀 중독으로 인한 쇼크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돈을 벌러 간다는 명목으로 삼 남매를 두고 사라졌습니다. 형은 공부를 핑계로, 누나는 시집을 핑계로 도망갔습니다.
소년이 사는 동네는 조폭들의 본거지인 대구 향촌동이었습니다. 버림받고 가난했던 소년이 가졌던 세상에 대한 분노는 그를 뒷골목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소년이 조폭의 세계로 발을 들이는 것이 당연한 절차처럼 여겨지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에 의해 교회에 출석하게 됩니다. 교회에 나오면 필통을 준다는 것에 혹해서 교회에 나갔습니다. 친구의 어머니는 아들의 친구면 똑같이 아들이라며 창수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들로부터 따듯한 밥을 얻어먹고 틈틈이 용돈도 받았습니다.
소년은 난생처음 받아보는 따뜻한 관심과 사랑에 어리둥절했습니다. 위험한 동네에서 온 소년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친구 어머니는 소년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느 날 한 권사님이 마태오 복음 6장을 읽어주었습니다. 6장 30절을 읽을 때였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는 부분이 갑작스레 소년의 심장을 파고들었습니다. 버림받은 줄로만 알았던 소년은 자신의 인생을 돌보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벅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소년에게 있던 어둠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물론 소년은 여전히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교실에서 자며 신문 배달, 붕어빵 장사, 방범대원 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소년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이상하리만치 행복했습니다. 비참한 환경이나 처절한 생활은 결코 소년에게 있는 빛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으로 뜨거워진 고등학생의 소년은 친구들과 길거리 찬양하며 뜨거운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소년의 친구들은 새벽에 일어나 소년의 신문 배달을 도와주었고, 친구들의 어머니는 소년의 도시락을 틈틈이 챙겨주시며 소년의 어머니가 되어주셨습니다. 그 친구 중 한 명은 후에 소년의 아내가 되었고, 친구들 대부분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소년 역시 목사가 되어 뜨겁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고난은 내가 해석하고 보상을 준다고 극복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하고 중독됩니다. 먼저 우리가 왜 고통스러워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안다면 모든 고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내가 누구를 위해 사는지 알면 됩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 목적은 바로 내가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고 그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2007)에서 보면 윌 스미스는 지구상에 퍼진 치명적 바이러스로 좀비들 속에서 자신 혼자 남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줄 유일한 존재는 개 한 마리입니다. 이 개는 이미 죽은 가족과 함께 키우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입니다. 하지만 좀비들에게 개까지 죽게 되자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그러다 다른 생존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는 생존자들을 지키기 위해 다시 싸웁니다. 결국 고통을 이겨내게 만드는 힘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는 공동체입니다.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 속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힘은 내고 속하고자 하는 공동체가 주는 정체성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믿음에 대해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믿음이란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듯이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만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한 종에 관한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종은 온종일 일하고 주인의 저녁상까지 차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하라 하십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신 주님께 감사만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아니면 우리는 이 세상 고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는 일. 이것이 우리가 믿음을 키우는 방법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저 사람들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라는 말씀을 들으시고 조금이라도 감사의 마음이 생겨 나쁜 생각을 버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주시는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좋은 분일 수밖에 없음을 믿게 됩니다.
미국 L.A. 올리픽 때 금메달을 딴 한 중국 선수가 있습니다. 이때부터 중국 다이빙이 전 세계에서 가장 기량이 높은 수준으로 장기 집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기자들이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어떻게 그런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선수는 어머니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선수가 처음에는 100미터 육상선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항상 이 선수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육상을 매우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자주 넘어졌고 자주 풀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나는 네가 1등을 해서 좋은 게 아니다. 네가 달리는 것만 봐도 좋다. 네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서 뛰는 것을 보면 엄마는 너무 기뻐. 1등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더 아름다운 일이야.”
늘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엄마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었습니다. 다이빙대에 설 때마다 그냥 그렇게 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엄마가 떠오르고 그러면 힘이 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속하기 위해 이 선수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 봉사하는 보상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 공동체에 속해있는 것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 공동체는 자신이 누구라는 정체성을 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가 천국이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의 수준만큼 고통을 극복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은 내가 속하려는 공동체에 있습니다. 그 공동체가 주는 정체성에 관한 믿음. 이것이 내가 어디까지 고통을 이겨내고 감사하며 살 수 있는가를 결정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과연 이 세상 모든 고통을 이겨낼 믿음을 주고 있나요? 그러면 그 공동체는 이미 천국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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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구에서는 저를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로 파견하였습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신문을 통해서 미주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신문사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주지역의 한인성당을 다니면서 신문홍보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신문홍보를 거의 다니지 못하였습니다. 오늘은 서부에 있는 ‘타코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으로 신문 홍보를 왔습니다. 제가 있는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데는 비행기로 6시간 걸리고, 시차도 3시간이 있습니다. 저는 2022년에 동부에서 서부로 5번째 왔습니다. 북미주 파견 사제 모임, 엠이 모임, 북미주 파견 수도자 피정이 있어서 LA엘 다녀왔습니다. 서품 31주년 동창 모임으로 타코마에 왔었고, 오늘은 신문 홍보 때문에 타코마엘 왔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여러분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신문홍보가 잘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오늘도 신문 구독자가 많으면 좋겠습니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우면 좋겠습니다.
후배신부님이 모금강론을 다닐 때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성당을 신축하면서 교우들만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비용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큰 성당으로 모금강론을 다녔다고 합니다. 예전에 보좌신부로 있었던 본당으로 모금강론을 갔을 때라고 합니다. 강론을 준비했지만 2%로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론 중에 이렇게 이야기를 더했다고 합니다. “저는 10년 전에 이곳 성당에 보좌신부로 있었습니다. 그때의 봉사자들은 모두 다 있는데 저만 성당을 떠났고, 이렇게 모금 강론을 왔습니다. 마치 시집간 딸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친정집에 와서 도움을 청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강론을 마쳤는데 많은 분들이 모금 강론에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목걸이와 반지까지 기꺼이 내 주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멋진 강론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간절함과 절실함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곳 타코마 성당으로 신문 홍보를 오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했습니다. 타코마 한인 성당의 본당 신부님이 저와는 인연이 깊기 때문입니다. 같은 서울교구 소속입니다. 일단 교구만 같아도 마치 가족처럼 든든합니다. 같은 서울교구인데 1982년도에 신학교에 함께 입학한 동창입니다. 같은 교구이면서 31년 동안 함께 사제생활을 한 동창이니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같은 교구이고 동창이면서 어린 시절 같은 성당에서 주일학교를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6학년 3반으로 같은 반이었습니다. 같은 교구, 서품 동창, 같은 본당, 초등학교 동창이니 이보다 더 큰 인연은 없을 것입니다. 시집간 딸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친정집에 와서 도움을 청하는 그런 마음까지는 아니지만 제가 이곳 타코마로 오는 발걸음은 다른 본당으로 홍보 갈 때보다는 훨씬 가벼웠습니다. 목걸이와 반지는 아니더라도 부디 많은 분들이 신문구독과 후원금으로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늘 성서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치 주님께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느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제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도움을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열심히 신문홍보를 다니면 주님께서는 신문을 복음의 도구로 써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제가 하는 일은 저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분부하신 일입니다. 그러기에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잘난 척하거나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과 사랑으로,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주님을 증언하며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신문 홍보를 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주님을 증언하며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렇게 신문홍보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본당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타코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의 모든 교우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와 저희 직원들은 타코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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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5-10: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오늘의 주제는 믿음이다. 그 믿음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그리고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 사랑의 계획에 온전히 의탁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두려움이나 자만심에서 우리를 해방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하바꾹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인간들 사이에 정의를 다시 세워주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비난하듯 항의하고 있다(하바꾹 1,2-3). 이 불편에 대해 주님께서는 믿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비록 쉬 오지 않으실지 몰라도 당신을 믿는 사람을 도와주시러 반드시 오신다. 믿음은 우리의 직접적인 체험을 넘어 기다릴 줄 알게 한다. 문제는 말씀을 신뢰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멸망할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라고 하시며, 약은 청지기와 부자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여기에 연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재물을 끊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사도들은 의기소침해진 것 같다. 그래서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그들은 아마 자신들이 믿음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들의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겨자씨만한 믿음도 갖고 있지 않다고 답변하신다. 그만한 신앙이라도 있었다면 그 믿음은 그 고장에서는 뿌리가 대단히 깊어서 폭풍우에도 절대로 뽑히지 않는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그대로 옮겨 심을 수 있다고 하신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믿음이란 양적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믿음의 가치는 질과 순수성에 달려있다. 겨자씨는 그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으면서 그 씨앗 자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시켜주는 강력한 생명력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즉 믿음이란 하나의 내적 실체로서 어떠한 형태도 갖고 있지 않으며, 거창한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평범한 일상성 안에 살아있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모든 일에 있어서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고자 노력함으로써 단순과 겸손을 통해 행하는 모든 것을 비범한 것으로 만들 힘을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믿음은 신앙인의 삶 속에서 아무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중요한 상황에서뿐 아니라, 매일 매일 매 순간순간 기적을 이루어주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종의 비유에서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은 일임을 말씀하신다. 당시의 종이라고 하면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떤 일이든지 시킬 수 있는 주인의 소모품 같은 존재였다. 이 종의 모습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무상이고 사랑의 선물이기 때문에 공로에 대한 기록부도, 봉사의 시간표도 없고, 봉사의 한계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도 없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다 무상적인 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10절) 우리의 봉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봉사가 '보잘것없음'이 드러난다. 정말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다 했는가?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무상성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자기 자신을 무상으로 내놓을 수 있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믿음이며, 제자들이 갖추지 못했던 믿음이다. 이 종의 비유는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든 권리주장을 포기하도록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이 활동적이어야 함을 입증해주고 있다. 즉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한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의 것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도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라고 청하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주님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하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믿음의 성장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며,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무상으로 내어 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하자. 믿음은 여기서부터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믿음 안에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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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종과 주인에 관한 비유를 조금 각색해 보면 이렇습니다. 종은 아침 일찍부터 주인의 밭으로 나가 일하거나, 들로 가서 주인이 아끼는 양들을 치며 온종일 그의 재산을 돌보고 관리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집에 와서도 쉴 틈이 없습니다. 서둘러 음식을 마련하여 주인을 식탁으로 모신 뒤 허리에 띠를 매고 주인이 식사하는 동안 시중을 들고 나서야 하루의 긴 일과가 마무리됩니다. 종은 그제야 비로소 편히 먹고 쉴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절대 착각하지 말아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또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 품삯으로 계약을 맺은 일꾼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느님께 온전히 속한 종으로서 그 일들을 수행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고 시중드는 일을 한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거나 마치 큰 빚을 진 것처럼 종을 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껏 해 온 일에 대해서 거들먹거리며 그에 걸맞은 대우와 보상을 요구한다면, 이는 우리의 처지를 망각한 것이 되고 맙니다. 임무를 마친 종이 주인에게 할 수 있는 바른 대답은 이러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맞는 말씀이기는 해도, 조금 서운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종을 함부로 부리는 주인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는 종과 주인의 관계를 잊지 말라는 경각심 차원의 말씀일 뿐, 예수님께서는 그 주인이 사실은 매우 관대하게 자기 종들을 대하는 분이심을 함께 가르쳐 주십니다.
혼인 잔치에 간 주인이 자신을 기다리던 종들을 보고서 어떻게 그들을 대하는지를 전하는 루카 복음의 또 다른 비유도 함께 기억합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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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1968년부터 군 사목에 종사하고 있는 군종 사제를 비롯하여 군인 성당, 국군 장병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물질적으로 돕고자 해마다 10월 첫 주일을 ‘군인 주일’로 지내고 있다.
오늘 전국 각 본당에서는 군의 복음화를 위한 특별 헌금을 봉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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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상균 안토니오 신부님]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는 것이, ‘작은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겨자씨가 실제로는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이 아닌데도, ‘작은 믿음’을 왜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셨을까요?
우리말에 ‘눈곱만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이 말을 찾아보면, ‘보잘것없이 썩 적거나 작다.’는 뜻이라고 나옵니다. 이와 비슷하게, 예수님 시대에는 ‘겨자씨만 하다.’는 말이 ‘가장 작은 것’ 또는 ‘가장 적은 양’을 가리키는 관용어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겨자씨 한 알만 하다’는 말씀을 우리말 ‘눈곱만하다.’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겨자는 한해살이풀로 토양에 따라 3미터까지도 자란다고 합니다. 하지만 ‘겨자풀’이 아무리 크게 자란다 하여도 ‘돌무화과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크기가 작습니다. 심지어 ‘겨자풀’이 아니라 ‘겨자씨 한 알’과 ‘돌무화과나무’를 비교하시니 둘의 크기 차이는 엄청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으로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믿음의 힘을 강조하시고자 크기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겨자씨와 돌무화과나무를비유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루카 복음서의 말씀인데요,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돌무화과나무’ 대신에 ‘산’과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마태 17,20)
예수님께서는 돌무화과나무이든 산이든, 작은 믿음만 있어도 큰 것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작은 믿음의 힘으로도 엄청나게 큰일을, 곧 기적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이, 믿음이 부족한 우리를 격려해 주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믿음이 부족해도 내가 도와줄 테니 넌 해 낼 수 있어!”
여러분도 삶 안에서, 믿음의 놀라운 힘을 발휘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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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현광섭 프란치스코 신부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루카 17,10)
한 우물을 판 지 25년이 되었다. 96년도 장익 주교님으로부터 입대 명령(?)을 받고 그리운 친정, 춘천교구를 떠나 입대하던 날이 어제 같은데 벌써 26년째 되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군 사목을 접고 돌아갈 시간이 되어 간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신자만 있는 공동체에서 사목하는 신부가 아니라 대부분 신자가 아닌 집단에서 사제 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보니 항상 나의 사제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교회 밖에서 가톨릭교회를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원점은 어디인지, 어렵고 힘들 때 돌아갈 곳은 어디인지 늘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돌아갈 때가 되어 겸허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면면히 나를 지켜 주시고 일깨워 주시고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면면히 기적이었음에 감사를 드린다.
아직도 많은 신자는 군복 입고 꼬박꼬박 출근하는 나를 보고 신기하게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을 하곤 한다. 수많은 사제직 중에서 나는 군대로 불림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누구는 본당 신부로, 어느 누구는 먼 선교 사목지로 불림을 받듯이 나는 군대라는 특수한 선교 지역으로 불림을 받았을 뿐이라고 한다.
그저 나는 이곳으로 불림을 받았을 뿐이고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고 말을 한다. 가톨릭을, 신부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군대라는 교회에서 나는 나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이해받기보다는 이 새로운 집단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 하는 사람들인지 알기 위해 함께 훈련도 하고, 파병도 가고, 한미 연합 훈련 때는 난해한 한반도의 전시 작계도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과 하나 되기 위해 매일 군복을 입고 출근하고 함께 회의에 참석했다. 자연히 많은 사람이 군인다운 군종 신부, 전투 중심의 군종 장교가 왔다고 좋아했다. 아마도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 이후에는 모든 것이 쉬워졌다.
다만, 동료 신부들이나 민간 신자들은 너무 군인스럽다고 낯설어했다. 뭐, 어쩔 것인가! 농촌 사목하는 사제는 농부를 알고 농사를 알아야 하듯이, 직장 사목하는 사제는 자신의 사목 대상이 무엇 하는 사람들인지 표면적으로만 알거나 이질감을 가진 채 사목할 수 없듯이, 나 또한 사제인 채로 군인 신분이 되어 보았고 조직의 일원으로서 전쟁을 대비하는 군인이 되어 보았다.
많은 신자가 그 오랜 시간 군 사목하느라 힘들지 않았냐고 질문을 한다. 그런데 나의 대답은 이렇다. “왜~에?” 어차피 군대에서도 사제로 사는 것이고 사목하는 곳이 군대라서 힘들면 어디에 간들 힘들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이고 교회가 명한 것이니 그저 나의 입장에서는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뿐이다.
이제 전역할 때가 되어 점차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주어진 현실과 조건에 맞게 사는 쓸모 있는 종인가? 맨날 핑계와 엄살을 부리며 사는 쓸모없는 종인가? 이제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쓸모 있는 종인가, 아니면 쓸모없는 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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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용욱 미카엘 신부님]
<성실한 종>
요즘 많이 인용되는 심리학 용어 중에서 ‘더닝-크루거 효과’가 있습니다. 능력 없는 사람은 자기 실력을 높게 평가하지만, 반대로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 같은 말을 보면 그다지 틀린 이론 같지 않습니다. 반면, 충분히 남을 도울 만하고 생산적인 일을 해낼 만한 사람이 겸손을 핑계 삼아 뒤로 숨는 경우도 더러 있지요.
더닝-크루거 효과를 방증하는 또 다른 사례입니다. 아무튼 자기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고, 자기 자리와 역할을 잘 알아서 그에 맞춰 제 몫을 하는 것은 삶의 근본 지혜요 의무에 속합니다.
오늘 첫째 독서는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고뇌하는 하바쿡 예언서의 한 부분입니다. 하바쿡 예언서는 총 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늘 첫 번째 독서는 그 세 장 전체를 몇 줄로 간추려서 핵심을 전합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라면 누구나 던질 법한 질문이 독서의 첫머리를 엽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하고 소리쳐야 합니까?”(하바 1,2-3)
폭력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 하마스는, 교만하고 탐욕스런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이용해 먹으면서 충만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기회를 빼앗는 의도적 행동을 말합니다. 하바쿡이 보기에 세상은 폭력 천지입니다. 곳곳마다 파괴, 고발과 소송, 시끄러운 논쟁, 그리고 불행이 넘쳐납니다.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가지면 그 힘에 도취되어 남을 해칩니다.
이렇게 동서남북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폭력이 퍼져 있으니 몇 군데 악하고 썩은 부분을 도려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힘센 손으로 저 악한 무리들을 모조리 후려치셔야 속이 시원해지겠습니다.
“하느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제 생각대로 세상을 갈아엎으시겠습니까? 제가 하느님이라면 당장 저 악한 이들을 처단하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할 텐데, 왜 침묵하십니까?”
어쩌면 하바쿡의 질문에는 그런 속내가 숨어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악에 대한 문제의식과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시작했다가, 어느덧 선을 넘게 되는 인간의 모습이 하바쿡의 질문에 투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리와 역할을 잊고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 하느님의 책임과 역할을 따지는 인간의 모습 말씀입니다.
그 질문을 두고 주님께서는 하바쿡이 원하는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모든 종류의 압제자들이 몰락하고 하느님의 약속이 완전히 실현되는 환시를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무릇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잠언 16,33)고 하지요. 사람에게는 사람이 할 일이 있고 하느님께는 하느님의 일이 있습니다. 시작은 인간이 할 수 있으되 맺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잊고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창세 3,5) 되는 것, 그러니까 사람이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 선과 악을 가름하는 것은 역사의 시초부터 인간을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유혹에 넘어진 사람은 오늘 첫째 독서가 말하듯 ‘뻔뻔스러운 자, 정신이 바르지 않은 자’가 되고 맙니다. 바른 정신의 신앙인이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끝내는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하느님을 믿고 “의인은 성실함으로”(하바 2,4) 삽니다.
그런 맥락에서 화답송은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하고 권고합니다.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였고,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 하느님의 업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느님이 움직여주시길 바라는 무디고 닫힌 마음을 접어 두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주님 목장의 백성’(시편 95, 화답송)이 할 일은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제2독서, 2티모 1,8)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따라 자기 사명에 성실해야 합니다.
이어서 듣는 복음은 예수님의 두 가지 가르침을 묶어서 전합니다. 먼저 루카 복음사가는 과연 예수님이 믿을 만한 분인지 미심쩍어하는 제자들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과연 예수님께 믿고 맡겨도 될지 긴가민가하면서 믿음을 더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작디작은 겨자씨와 커다란 돌무화과나무를 대비시키면서 제자들의 불신과 의심을 지적하시지요.
세리 자캐오가 예수님을 뵙고 싶어 올랐던 나무가 돌무화과나무였습니다.(루카 19,4 참조) 그만큼 큰 나무도 작은 씨에서 시작되는 법이고, 그 큰 나무를 옮기는 일도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실망과 조급함을 버리고 하느님의 약속과 성취에 의지하며 믿음의 길을 성실히 살아가면 하느님의 업적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복음의 두 번째 가르침은 제자들이 성실한 종의 태도를 배우고 실천하기를 권합니다. 자의식이 너무 강한 사람, 자기 뜻이 하느님 뜻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설사 그 뜻이 원대하고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하느님 나라와는 관계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낮추인 마음을 낮추아니 보시는”(시편 50) 하느님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치고,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고 겸손하고 성실하게 직분을 다하는 사람, 자기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루카 17,10) 하는 겸손한 종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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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에 이끌려 믿음으로 해야 할 일, 살림!>
루카 17,5-10 (믿음의 힘, 겸손하게 섬겨라)
그때에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영에 이끌려 믿음으로 해야 할 일, 살림!>
“상선벌악”(賞善罰惡). 비록 현실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침내 선한 사람에게는 상이, 악한 사람에게는 벌이 주어지리라는 ‘희망’이요, 꼭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입니다. ‘선한 일’이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면, ‘악한 일’은 ‘사람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사람일 수 있음’이 이미 주어진 상이요,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사람일 수 없음’이 이미 내려진 벌입니다.
해야 할 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하느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을 한 사람, 곧 다만 사람일 수 있음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자비의 육체적 활동,” 곧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며, 죽은 이들을 묻어 주는 것”과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면,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자비의 영적 활동”입니다.(교종 프란치스코, 자비의 얼굴, 15항) 이러한 자비의 활동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살림’입니다. 그러니 ‘살림’이 ‘해야 할 일’이요, ‘죽임’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는 당연히 ‘살림’이 넘쳐나야 하지만, ‘죽임의 문화’, ‘죽임의 정치’, ‘죽임의 경제’, ‘죽임의 무엇’이 어찌 보란 듯이 활개를 치고 있을까요.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일 수 없는 개탄스러운 현실에서, 사람을 당신 모습대로 지으신 하느님의 침묵은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시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하바쿡 1,2)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듯한 하느님을 향한 예언자의 절규가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하바꾹 2,3)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나아갈 밖에요.
허나 이 믿음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간청했는지도 모릅니다. 허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마침내 그리 되리라는 믿음 말이지요. 이 믿음은, 빛이 어둠을 이기리라는 믿음이고, 평화가 폭력을 물리치리라는 믿음이며, 정의가 불의를 정화시키리라는 믿음이고,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때 참으로 살리라는 믿음이며. 마침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당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리라는 믿음입니다.
믿음을 이루는 영
믿음은 현실과 괴리된 망상이나 자기 최면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에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쉼 없는 결단의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2티모 1,7)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을 이루기 위해서, 저 살자고 불의와 거짓에 침묵하고, 하느님과 맘몬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는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불의한 폭력에 맞서고, 벗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힘의 영’을 따릅니다. 죄 없이 착한 벗들의 고통에 연대하며, 가지기보다 나누고, 섬김 받기보다 섬기는 ‘사랑의 영’을, 추악한 탐욕을 거슬러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을 드러내는 ‘절제의 영’을 따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맡은 훌륭한 것을 끝까지 지켜나갈 것입니다.(2티모 1,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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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심오합니다. “어미가 어찌 젖먹이를 잊으랴. 어미는 혹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하신 사랑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아무리 작아 보여도 살아있는 믿음에는 그만한 힘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되게 믿으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믿으면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믿기 위해 이해하려 하지 말고 먼저 그냥 믿으십시오. 믿으면 이해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공로와 바람보다 훨씬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한 신자분이 남편을 위해 기도하러 오셨습니다. 그 남편은 방지거 형제인데 간암으로 고통을 받고 계셨습니다. 병원에서 이제 90% 이상 퍼졌기 때문에 임종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리를 듣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하필이면 저는 미사지향의 권고와 강론에서 고통의 의미에 대해 말씀을 하였습니다. ‘고통도 은총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체험할 수 있다면 분명 은총입니다. 따라서 나의 고통을 없이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가족과 친척을 위해 먼저 기도하기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들의 고통과 죽음까지도 대신하겠다는 마음으로 진정으로 기도하십시오.’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방지거 씨 아내는 마음의 갈등을 느꼈습니다. “나는 남편을 위해 기도하러 왔는데 신부님은 왜 나의 가족보다 남을 위해 먼저 기도하라고 하시는가? 내게 당장 필요한 것은 나의 남편이 일어서는 것인데 그 기도에 함께하시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하시는가? 그러나 신부님의 말씀이니 오늘만큼은 다른 사람을 먼저 기억하자.”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자기 기도의 우선순위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으로 가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을 위해 온전히 봉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사 안에서 신부님의 말씀대로 따랐으니 주님께서 이런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겠지 하고 위로를 삼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배에 가득 찼던 물이 빠지고 음식을 먹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퇴원하여 저에게 왔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남편을 비롯해서 시부모님, 자녀들 다 왔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정말 큰 은총을 입으셨습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용서 청할 것이 있으면 용서를 청하고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이 있으면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화해하는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가족 전체가 고해성사를 보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잊고 살았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기도회 미사를 봉헌하고 제의실에 있는데 한 여인이 쫓아와서는 덥석 껴안는 겁니다. 그러면서 신부님 저 아세요? 알긴 뭘 알아! 갑자기 놀라게 해 놓고는. 실은 좋으면서… 아! 남편은요? ‘예, 2년 만에 하느님께로 갔습니다. 저는 얼마나 기쁜 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완전히 알고 떠났습니다. 이웃과 화해하고 가정 안에 화목함을 만끽하다가 갔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세상을 떠납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입니다. 불노초를 찾고 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어도 언제가 하느님 앞에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태로 그분 앞에 서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하면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면 천상복락을 누릴 수 없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순명이 따릅니다. 방지거 씨 부인은 미사 안에서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받는 이들을 기억하기로 기도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 그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낳는 법입니다.
우리는 어떤 기적이나 표징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지켜 주십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고 희망하며 기뻐해야겠습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구리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할 때 하느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시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치워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합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하여 주님께서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놓았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쳐다봐라 했을 때 그냥 보는 것입니다. 두말없이 보는 것이지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결과는 살았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있습니다. 롯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였는데 그가 천사였습니다. 그 천사는 소돔땅이 곧 파멸될 것이니 롯의 아들 딸, 가족과 사위 될 사람들을 데리고 그 성읍을 빠져나가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딸을 데려갈 사위에게 말하였습니다. “자, 이곳을 빠져 나가게. 주님께서 곧 성읍을 파멸시키실 것이네.” 그러나 사위들은 롯이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롯과 아내, 두 딸을 데리고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서지 마시오. 휩쓸려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 부탁을 하였습니다. 롯이 초아르(작은 지역)에 다다르자 해가 땅 위로 솟아오르고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퍼부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 성읍들과 온 들판과 그 성읍의 모든 주민, 그리고 땅 위에 자란 것들이 모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된다” 했는데 돌아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위들도 장인을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우스갯소리로 지나쳐 버린 것이 죽음을 자초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순명이 따릅니다. 참된 믿음은 믿음에 따르는 행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돌무화과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머리로 아는 믿음인지 아니면 삶으로 행하는 믿음인지 살펴보고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단순하게 전적으로 따르는 순명의 믿음,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을 간직하기 바랍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 합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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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자매님께서 성당 교우분으로부터 “** 자매와 사이가 좋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평소에 그렇게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관계도 아니었지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니, 지난번에 모임이 있었는데 안 좋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자매님께서는 이 말씀을 듣고서 계속 불편한 마음이었습니다. 특별한 만남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자신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며칠 뒤에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로 서먹했지만, 이대로는 계속 불편할 것 같아서 상대편 자매님께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상대편 자매님은 깜짝 놀라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화하면서 오해를 풀 수 있었습니다.
불편한 마음은 빨리 해소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편한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끌어도 풀리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빨리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주님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태에서도 편하고 기쁜 관계가 되도록 불편한 마음은 얼른 풀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주인과 종의 관계는 매우 엄격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종에게 “수고했다. 어서 식탁에 앉아 밥부터 먹어라.”라고 말할 것 같은데,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라고 명령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자연스러운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그래도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이신데, 왜 이런 말씀을 비유로 매정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온종일 일했다고 해도, 종에게 일의 끝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인이신 주님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일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왜 보답해주지 않으시냐는 식으로 불평합니다. 주님과 불편한 관계를 계속 만듭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을 우리의 공로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무슨 선행을 했다고 해서 하느님께 그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이 역시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제1독서의 하바꾹 예언서가 말하는 성실함이었고, 성실한 사람이 의인으로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대단한 일을 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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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인내, 격려, 겸손-
오늘 말씀 묵상중 떠오른 성가 480장 ‘믿음으로’였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2절까지 나눕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저산도 옮기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바다도 가리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생명 바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넋을 다하라 믿음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없이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무신불립無信不立,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마음이 두렵고 불안한 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있어도 여전히 부족한 것이 믿음입니다. 사랑에, 기도에 영원히 초보자이듯 믿음에도 영원히 초보자인 우리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인간의 위대함은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은 인간 품위의 기초입니다. 믿음직스럽다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도 인내의 믿음을 뜻합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산처럼, 나무처럼 한결같이 묵묵히 믿음으로 살아가는 정주의 수도자들입니다.
믿음하면 연상되는 것이 나무의 뿌리입니다. 땅에 깊이 뿌리 내릴 때 나뭇잎들 무성한 튼튼한 나무들이듯 믿음의 뿌리도 그러합니다.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린 믿음일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반면 하느님 중심에 뿌리 내림 없이 표류하는, 방황하는 불안과 두려움중에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나중에 남는 것도 둘입니다. 하느님 믿음과 밥입니다. 인생 노년에 하느님 믿음은 없고 밥만의 식욕만 있다면 인간 품위도 실종입니다. 일반 동물과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믿음과 더불어 밥입니다. 믿음으로, 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했던 두 구절이 생각납니다.
“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한 우선순위는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이다.”이 우선순위가 절대 바뀌어선 안된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이처럼 돈의 마력은 막강하다는 것이며 이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 믿음뿐입니다. 참으로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참 좋은 최고의 유산은 이런 믿음입니다. 믿음 역시 보고 배웁니다.
참으로 주님께 하나 청한다면 저는 오늘 복음의 사도들처럼 믿음을 청하겠습니다. 힘중의 힘이 믿음의 힘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정말 간절한 청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와 더불어 ‘믿음밖에 길이 없었네’란 말도 쓰고 싶습니다. 물론 눈먼 광신이나 맹신은 금물이요 이보다 더 큰 해독도 없습니다. 광신이나 맹신의 병에는 약도 없습니다. 주님 역시 제자들의 청에 공감하시며 믿음의 힘을 역설하십니다.
“너희가 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져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서 거품을 빼버리면 진짜 믿음은 정말 작을 것입니다. 이래서 믿음의 여정입니다. 알게 모르게 하루하루 성장하는 은총의 나무들처럼 믿음의 성장도 그러합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에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자주 화살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음의 여정에 한결같이 항구할 수 있을까요? 믿음 역시 은총이자 훈련입니다. 구체적 처방을 나눕니다.
첫째, 믿음은 인내입니다.
믿음의 힘은 인내의 힘입니다. 믿음 역시 훈련이듯 인내 역시 평생 훈련입니다. 일상의 모든 힘든 점들은 인내 훈련의 계기로 삼으십시오, 참지 않고 이뤄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끝까지 참는 자가 승리합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형제들의 약점을 지적하기보다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했습니다. 인내의 믿음이요, 인내의 기다림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사랑을 둘 때 이런 인내력의 선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거칠게 격렬하게 항의하는 하바쿡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거듭 반복되는 “제가 언제까지” “어찌하여 제가”라는 말마디가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하바쿡의 절박한 심정을 드러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처방은 인내의 기다림입니다.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 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믿음으로 삽니다. 하느님의 때가 될 때 까지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하는 믿음의 사람이 진정 의인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모토이기도 했습니다.
둘째, 믿음은 격려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사람은 긍정적 낙관적 사람이요 격려의 사람입니다. 믿음이 훈련이듯 격려도 훈련입니다. 자주 남은 물론 자신도 격려하세요. 정작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조언이나 충고보다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공감하고 경청하며, 함께하며 하는 위로와 격려의 말은 침묵보다 백 배 낫습니다.
믿음의 대가, 믿음의 달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사랑하는 제자 티모테오에 주는 사랑이 가득 담긴 격려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를 대상으로 합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격려의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바오로 사도를 통해 티모테오는 물론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참 시의적절한 격려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한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각자가 받은 은사에 불을 붙여주시며,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선물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믿는 이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과 사랑으로, 또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가 맡은 훌륭한 자질이나 덕을 지키라는 바오로의 격려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합니다. 참으로 믿음의 사람은 격려의 사람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지친 영혼들에게 진정성 가득한 적절한 위로와 격려는 그대로 구원이 될 것입니다.
셋째, 믿음은 겸손입니다.
겸손한 믿음입니다. 진짜 믿음의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믿음의 진정성은 겸손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겸손과 온유입니다. 언제나 들어도 감미로운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온유와 겸손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주님의 평생 학인이 되어 배워야 할 겸손이요 온유요 더불어 믿음의 내적 성장입니다. 믿음이 훈련이듯 겸손도 의식적 훈련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갈 때 믿음과 함께 가는 겸손과 온유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뿐입니다. 종과 섬김은 같은 어원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종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겸손하고 온유한 종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다음 주님의 충고가 너무 멋집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같인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런 겸손한 종인지요! 진짜 겸손한 사람은 이렇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소리없이 행하는 이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거룩한 성인들입니다. 모두가 섬김의 종으로서 겸손이 산다면 공동체의 평화는 저절로 이뤄질 것입니다.
주변에서 겸손한 종이라 일컫지 당사자들은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하고 자연스런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기에 겸손이 뭔지도 모를 것입니다. 평생 마음에 담고 살고 싶은 주님의 종으로서 겸손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믿음의 종으로 살 때 바로 거기가 진리와 사랑, 구원의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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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
오늘 복음(루카17,5-10)은 '믿음의 힘과 겸손하게 섬겨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6)
사도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청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라, '있고 없고의 문제'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믿음만' 있어도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작은 믿음만 있어도 지금 여기에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온 정성을 다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하게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믿을 수만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많은 변화들(기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 방식으로 서로 사랑하는 기적,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적, 다시 돌아오는 회개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의 힘에 이어지는 말씀은 '겸손하게 섬겨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원'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주인이 아니라 종의 신분이고, 일을 하고 품삯을 요구하는 품꾼이 아니라 주인의 종이기 때문에, 주인의 분부를 다 마쳤다 하더라도 어떠한 요구를 할 수 없고,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작은 믿음과 분명한 나의 신원 인식을 통해 날마다 크고 작은 기적들을 만들어 봅시다!
오늘은 '군인주일'입니다. 나라와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애쓰는 군인들과 군 복음화를 위해 애쓰는 모든 분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위해 나의 작은 사랑을 드러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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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MGfJefmE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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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 5)
믿음의
나날들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한 고개를
넘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믿음은
생명의 올바른
방향성입니다.
믿음은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향합니다.
생활에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기초적인
질서이며
뿌리입니다.
믿음을 되찾는
여정이 바로
회개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믿음이
맺는 삶의
열매입니다.
새로운 삶을
열어놓는
믿음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열어주십니다.
믿음의 부활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믿음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우리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예수님께서
올바른 믿음을
보여주십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묵묵히
걸어가는
믿음입니다.
다시 제가
져야 할
십자가도
믿음이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간절한
기도도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일상은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믿음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가장 큰 은총임을
믿습니다.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믿음을
더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믿음의 길이
가장 좋은
생명의 길임을
믿고 실천합니다.
믿음의 실천은
겸손입니다.
삶의 자세와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는
믿음입니다.
은총가득한
주일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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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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