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백암산
素眞 정 순 희
참 좋은 계절이다. 연일 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신께서는 수많은 향수병을 들고 계시다가 유독 오월에는 실수가 잦으신 건지 병마다 뚜껑을 활짝 열어놓으시는 모양이다. 어딜 가나 향기로 채워지는 이 오월이 얼마나 싱그럽고 좋은지 모르겠다. 향기로운 꽃과 나무와 봄나물을 생각하노라면 고향의 추억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꽁보리밥 한 덩이와 참나물 찍어 드실 생된장 조금 싸서, 엄마께서는 아지매들과 우르르 새벽같이 운주산을 향해 가셨다. 큰 산엘 가야 좋은 나물을 뜯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우리는 하루 종일 나물하러 가신 엄마를 기다렸다. 해가 지고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오시겠지만 우린 삽짝 밖에서 꼬챙이로 땅에다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엄마의 나물 보따리 한 쪽에 가지런히 담아 오실 회초리처럼 쭉쭉 뻗은 송기를 학수고대했던 것이다. 낫으로 겉껍질을 살살 벗겨내고 하모니카처럼 송기 막대기를 좌우로 왔다갔다 빨아먹으면 입 안 가득 차오르는 솔 향이 어찌나 좋던지. 먹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런 향긋한 음식을 어디서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언젠가 어느 어른께서 자양의 산에 대해서 쓰신 글을 읽었는데 거기에도 운주산이 등장해서 왠지 든든했지만 안국사가 소실됐다는 소식엔 마음이 아팠다. 가서 일박 하며 들었던 계곡물의 시원함이 아직 기억 속에 남아 있는데 말이다. 그 외에 생소한 이름의 산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쩌면 산마다 이렇게도 자세하게 기록하셨나 싶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 중에서도 내 어릴 적 추억이 깃든 백암산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반가웠다.
송정 끝에 있는 과수원을 지나 텃밭 넘어가는 골짝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백암산 능선이 시작되었는데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불미이가 줄지어 있기도 해서 그런 날은 산나물 횡재를 만난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도 본 건 있어서 나물이라면 그저 탐나고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운주산 나물보다야 못하지만 이른 봄의 나물로는 불미이 만한 것도 없었기 때문에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잎을 먹는 것이 아니라 꽃봉오리를 먹었던 그 불미이 꽃이 지금은 꽃 애호가들 사이에서 멱쇠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사랑받는 봄꽃으로 귀하신 몸이다. 그리고 이맘때엔 송화가 통통하게 살쪄있었다. 다식을 즐겨 만드시던 엄마께서는 어린 나를 봄이면 꼭 언니 따라 송화를 따오라 보내셨다. 다식은 송화다식을 최고로 쳤고 송화는 필대산 송화가 최고였다.
솔밭 가득 통실하게 알이 밴 송화들이 뿜어내는 향기에 섞여서 또 다른 달콤하고 우아한 향이 있었는데 그 향의 주인은 분꽃나무였다. 필대산은 소나무도 많았지만 야생화의 보고이기도 해서 백암산 가는 길에 꼭 들러서 꽃들과 놀곤 했었다. 어쩌면 나물은 의무였을 테고 나의 관심사는 야생화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나는 분꽃나무 꽃이 애인처럼 사랑스럽다. 며칠 전에 친구가 필대산 분꽃나무를 사진 찍어 보냈는데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여름에 큰비라도 내리면 귀미 앞 자호천은 건너지 못할 정도로 물이 불어 결석을 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노항 쪽은 강폭이 넓어서 물이 깊지도, 물살이 세지도 않아서 노항 거랑을 건너려고 또 백암산 능선을 따라 가곤 했다.
그런 고향이 수몰 된지도 어언 40년.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그리움으로 남은 추억의 백암산이 거짓말처럼 가까이에 왔다.
2018년 1월 14일 일요일에 참으로 뜻 깊은 행사가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적은 내 개인적인 추억이 아니더라도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올려다보던 높디높던 백암산, 교가에도 등장하는 그 웅장한(?) 백암산 정상에서 표지석 제단식이 있었다. 내겐 삼종 오라버니인 정동율 총동창회 회장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등산로가 만들어진 것인데 시작 지점인 귀미에서 시산제를 지낼 때는 어린 시절의 잊혀졌던 여러 이야기들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엄청나게 무거운 표지석을 남자 후배들이 지다가 들다가 270m 정상까지 올라가는 내내 동행을 했던 내겐 그 행사가 좀 더 남다른 감회로 다가왔기 때문에 힘들고 무거운 이동이 더 애틋하게 여겨졌다. 표지석 한 면엔 백암산 270m라 새겨졌고 또 한 면은 영광스럽게도 내가 쓴 그리움의 글귀가 새겨졌기 때문이다. 짧게 쓰라는 주문이 있어서 재회의 기쁨을 충분히 표현하진 못했지만 나름 공모에서 선정 된 글인 만치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도록 찾지 못했던 긴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도 살짝 담았던 것 같다. 후배들이 땅을 파고 시멘트로 정성껏 표지석을 고정 시켰다. 약식으로 의례를 하고 글은 작가가 직접 낭독하라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짧은 글이지만 정성을 다해 낭독하면서 앞으론 자주 오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졌다.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본의 아니게 추억과 애환을 비롯한 모든 것은 수장되고 없지만 기억 속에서 사라짐을 방지하기 위해서 고향 산의 면면들을 알차게 기록해서 알리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시는 어른이나 발길이 끊겨 밀림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옛 길을 등산로로 재탄생 시키는 일에 정열을 바친 어른이나 이토록 애를 쓰시는 어른들이 계시기에 물속에 잠긴 고향의 많은 것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깊은 감동으로 인해 너무나도 행복해지는 마음이다. 그날의 시산제와 백암산 정상에다 표지석을 세운 행사는 솔직히 현실에 얽매어서 사는 일에 허덕이던 내겐 크나큰 역사적 사건이었다. 고향은 그저 떠나간 옛이야기의 일부로만 여기고 살아왔는데 나의 무심함을 일깨워 주기도 한 행사여서 다시금 기억이 새롭고 감사하다.
아울러 백암산 등산로가 아직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금의 향수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가는 등산길, 이왕이면 옛 이야기가 아직도 도란거리는 백암산 산행을 추천하고 싶다. 정상에서 굽어보는 댐의 광활함이 비록 자호천의 예전 모습을 간직하진 않았지만 어느 여름날 광복절에 청년딸네 모여서 민물고기 매운탕을 끓여먹다가 우리 모두가 흠모해 마지않던 자상한 국모, 육영수 여사의 피격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서 함께 울었던 가매소 갱빈이 저기 저쯤 어디였지, 오빠들이 복숭아 서리하던 누구네 밭이 저기였던가, 짐작도 해보면서 추억에 젖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고향의 발전과 조상님의 유적을 보존하고자 애쓰시는 여러 어르신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덕분에 이 봄이 더 향기롭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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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14일 등산한 백암산 영상
첫댓글 소진시인 수필을 읽어보니 2005년.2010년,2019, 3,14일 노항친구와 세번째 등산했지요,
작년도 자양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입석한 백암산 표지석 보니 길도 쪼금 편하고 감회가 깊으네요,
지나온 생활상 이라할까 어린시절로 되돌라가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건강 회복 하셨다니 다행입니다,,,
"희야님(정순희)시인은 2014, 5,13.삼체계 카페에 가입한 회원입니다"
그리운 고향에 애뜻한 정이 묻어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하고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자상하게 올려주셨네요. 그동안 건강 핑계로 카페 활동을 하지못했습니다. 앞으론 자주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