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과 황진이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 상 한 인물의 생애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은 누구일까요?
이순신, 세종대왕, 박정희, 김대중, 싸이, 김연아, 요즘 한참 뜨고 있는 문재인, 방탄소년단 등
여러 인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
북한까지 포함한다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도 포함될 수 있겠죠?
그러나 내 생각은 오천년 역사를 통 털어 그 누구도 '대장금'을 따라 잡을 수 없다고 봅니다.
대장금 그녀의 생애가 사실이든 허구이든 간에 '대장금'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부터 아프리카까지 거의 전 세계인들이 그녀의 전 생애를 감명깊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현실 속의 이영애가 우리나라 역사상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얼굴이 되겠네요.
사실, 드라마 대장금은 드라마 상의 완전 허구인물만이 아닌 조선실록에 나오는 실존인물입니다.
물론 드라마 상 대장금의 생애는 허구입니다.
대장금 그녀의 전 생애에 대해서 자세히 나오는 역사서는 없습니다.단지 조선실록에 '서장금'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올 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장금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중종 10년 ..…… 2건
중종 17년……. 1건
중종 27년……. 1건
중종 39년……. 3건
선조 33년……. 1건
광해 5년……. 2건
중종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짧막하게 나와 있습니다.
'대장금 본명은 서장금이었으나 중종의 병을 고치고 중종의 주치의가 되면서
일명 대장금(大長今)으로 불리었다.'
이처럼 서장금은 중종의 총애를 받은 천민 출신의 의녀(醫女)로 기록되어 있지만
출생연도, 출생 배경이나 상세한 활동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윗 글처럼 《중종실록》에 중종(中宗)의 총애를 받은 천민 출신의 의녀(醫女)로 기록되어 있어
뛰어난 의녀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서장금은 중종의 어의녀, 곧 중종의 주치의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기록에 등장하는 많은 의녀 가운데 유일한 것입니다.
특히 천민 신분의 의녀로서 수많은 남자 의관(醫官)을 제치고 왕의 주치의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 남성 위주의 엄격한 관료주의제 아래서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습니다.
본명인 서장금의 성(姓) '서'보다는 '큰' 또는 '위대한'을 뜻하는 '대(大)'를 써서 대장금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서장금은 의술뿐 아니라 요리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서장금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시대의 인물인 것은 확실하고 의녀로서 아주 뛰어난 활동을 보여
여자로서 종삼품 어의녀까지 올라 대장금으로 불리어 졌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조선 궁녀 중 수랏간에 일한 '장금'이란 이름이 또 실록에 나옵니다.
이 점을 '허준'이라는 인기 드라마 극본을 썼던 김영현 작가가 허준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수랏간에서 일한 장금이라는 이름을 보게 됩니다.
김영현작가는 의녀가 되어 어의녀까지 되는 서장금이란 이름이 수랏간 장금이와 동일한 것을 보고
이것을 결합한 드라마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통해 대장금이라는 멋진 인물을 창조 해낸 것입니다.
김영현 작가의 상상력이 놀라울 뿐입니다.
여성이 활동하기도 쉽지 않은 조선시대에 종삼품 어의녀까지 오르고 이름 앞에
'대(大)'자 까지 붙었다는 것은 서장금이 드라마 못지 않은 치열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대장금이 살았던 동일한 시기(중종대)에 그 당시는 대장금보다 훨씬 더 유명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황진이'입니다.
둘 다 중종시대 성인여성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아 비슷한 연배였을 것입니다.
풍류를 즐기던 연산군을 몰아 내고 왕이 된 중종시대까지만 해도 조선 양반들도
상당할 정도로 풍류를 즐기곤 했습니다.
선조 대 가서야 사림파들이 정권을 완전 장악하면서 겉으로나마 그런 풍류가 사라져 갔습니다.
그리고 조선사대부들은 '똥구먹 호박씨'가 되어 갑니다.
그래도 풍류가 남아있던 중종시절이라 황진이에 관한 일화는 대장금보다
훨씬 다양하게 많이 남아 있습니다.
또 기생이 아닌 여류시인으로서 황진이 시조도 꽤 남아있습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가 지은 이 시조에서만 봐도 당시는 풍류를 모르는 선비들은 기생의 조롱거리가 될 만큼
남녀풍속도가 자유스러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산시대를 풍자한 '간신'이라는 영화에서 보면 연산군이 흥청이라 불리는 기생들을
만 명정도 모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왕과 신하가 일체가 되어 궁궐에서 까지 진한 풍류를 즐기곤 합니다.
그러다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쫒겨나 망했다 해서 '흥청망청'이란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흥청망청이 지금까지 그런 뜻의 용어로 쓰일 정도로 연산군을 쫒아내고 왕이 된 중종시대에도
그런 풍류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사대부들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고 힘을 잡는
조선 선조중기 때부터 이런 현상이 바뀌어 집니다.
그 한 일례로 '술한잔에 파직이라니'라는 제목으로 자세히 쓴 적이 있습니다.
시인 임제가 서도 병마사로 임명돼 임지로 가던 길에 황진이의 무덤 곁을 지날 때
황진이 죽음을 애도하며 시 한 수를 지어 낭송합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그리고 술 한 잔을 따라 황진이 묘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조정에 보고돼 임제가
임지에 도착 하기도 전에 임제는 파직되고 맙니다.
사대부의 체통을 떨어뜨렸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선조 중기 쯤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 사대부들이 선조 때 정권을 장악하자 당쟁을 시작했고
풍류문제도 도덕성 문제와 함께 당쟁에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임제사건이 보여줍니다.
조선시대는 여성의 인권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습니다.
고려는 남녀풍속도나 여성의 지위가 조선보다 자유로왔고 더 높았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여자도 호주가 될 수 있었고, 호적 기록이 나이 순이며,
아내도 재산 분배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자의 재가도 허용되었습니다.
자녀에게 재산을 분배할 때 자녀 균분으로 하며, 자녀들이 돌아가며 부모를 모셨습니다.
조선초기에도 고려와 같은 양상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양대군이 쿠테타로 집권하면서 어느 쿠테타 세력이나 약한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초기에 사회정화를 내 세우며 도덕성을 앞 세우듯이 수양대군도 그 공식을 따라 갑니다.
그러면서 수양은 남녀 풍속을 까다롭게하기 시작했고 수양의 손자인 성종 때 이르러
태종 때 부터 실시한 '서얼차대법'과 '여성의 재가를 금지법' 2대 악법을
조선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에까지 법제화 시킵니다.
앞서 말한 것 처럼 선조시대인 16세기 이르러서는 조선에 성리학이 깊숙히 자리잡습니다.
성리학 이론에서 남자는 본질적인 것이고 여자는 부차적인 것 취급을 합니다.
그때부터 여성의 권위가 쭉 더 떨어집니다.
그 뒤부터는 여성들이 왕들의 정비나 후궁이 아니면 역사에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황진이나 서장금도 조금 늦게 선조 이후에 태어났다면 실록에 이름이 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대장금이나 황진이 같은 멋진 드라마나 캐릭터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림파의 전면등장은 여성들에게 더 불행한 역사가 시작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도 역사에 아직까지 이름이 남아있는 궁궐여인이 아닌 일반 여성들은
대장금 역할을 한 이영애가 다시 역할을 맡아 현재 드라마로 방영 중이고
오만원권의 주인공인 '신사임당'이나, 허균의 누나이며 조선의 가장 유명하고
중국에서까지 이름을 날린 '허난설헌', 이 글의 주인공들인 대장금, 황진이 같은
중종, 명종, 선조 초기에 이르기까지 그 과도기적인 시대를 살아낸 마지막 여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진출 등의 면에서는 고려, 조선전기나 선조이후나
거의 불가능 했던 것은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대장금과 황진이라는 걸출한 여성이 나온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진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황진이와 대장금이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데 누가 더 이뻤을까요??
드라마로 보았을 때 내 눈에는 장금이가 훨 예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실제로는 황진이가 훨씬 더 예뻤을 것입니다.
장금이가 황진이 만큼 예뻤다면 당시 그 시대에서는 드라마처럼 그렇게 열심히 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성단체에서 항의할 내용이지만 당시 역사적 사실은 그랬을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대장금이 황진이처럼 예뻤다면 양반관료들이나 중종이 장금이를
가만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장금 드라마에서는 마지막에 중종이 대장금을 좋아하지만 장금이가 사랑하는 민겸호에게
보내주는 것으로 나오지만 드라마 일 뿐입니다.
민겸호는 실록이나 역사서에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 완전 허구의 인물입니다.
추측건데 서장금은 인물 면에서는 조금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남자들 등쌀에 안 시달리고 열심히 배우고 일해서 대장금이 된 것 아닐까요?
하지만 황진이의 인물은 황진이 시에 나오는 목석같은 벽계수가 황진이를 모른 체 하고
지나가다가 다시 돌아와 황진이에게 빠져 세월을 모르고 지냈을 정도라고 하니
아주 빼어났다고 할 수 있겠죠?
어쩌든 마지막은 조금 우수개 소리이지만 대장금과 황진이는 여성들이 살기 어려운
동시대에 태어나 정말 치열하게 살아 낸 우리의 선조 여성이며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할머니들입니다.
대장금과 황진이를 할머니라니까 조금 이상 하기는 합니다.
여성이었지만 그 어려운 시기에도 당당하게 한 세상을 살다 가고
그리고 이름을 남겨 오늘에 와서는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려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만든
대장금과 황진이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임제처럼 그녀들 무덤 앞에 가서 술 한잔 따라 놓고
못쓰는 시라도 읊어 보고 싶습니다.
파직을 당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