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모윤숙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5. 22. 14:35
한국인물기행 모윤숙
2024.05.20. 12:53조회 4
변절 이력 화려한 친일작가, ‘모윤숙’(1909~1990)
지난해 6월 이항녕(전 홍익대 총장)씨가 경남 하동의 한 모임에서, 자신이 일제 때 그곳 군수를 지내면서 고향민들을 괴롭힌 죄의 용서를 빌었다. 때늦은 이씨의 사죄가 화제가 된 것은 반민족행위자들이 더 활개치고, 변절과 술수가 처세술이 돼버린 우리 현대사의 한 대목을 보여주고 있다.
정신대 문제가 본격 거론되는 요즘 일제 말기‘황국신민화’를 부르짖고 정신대 참여를 선동한 친일작가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으나, 대부분 사죄의 빛이 없이 눈을 감았거나 생존해 있더라도 굳이 스스로 입을 여는 경우는 없다.
임종국(89년 11월 작고)씨가 그의 책 <친일문학론>에서 든 주요 친일작가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일제침략 말기 우리가 손꼽는 시인·작가(윤동주 변영로 오상순 황석우 이병기 이희승 김광섭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박남수 이한직 홍노작 김영랑 이육사 한흑구 등) 몇 명을 빼고는 거의가 여기에 든다.
외교·여성분야 영향끼쳐
친일작가 가운데 해방 뒤에도 변절을 거듭해 역대정권과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를 가장 잘 누렸던 사람으로 모윤숙을 들 수 있다. 모윤숙은 문단은 물론 정치, 외교, 여성운동 분야에 두루 걸쳐 우리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의 대표적 여류시인’으로 일컬어지는 그는 가장 많은 친일작품을 썼고, 해방 이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48, 49년), 유네스코총회 한국대표(58년), 8대 국회의원(71년, 공화당 소속), 펜클럽 한국본부회장(77년)을 역임했으며 80년 3·1절에는 “기미독립운동에서 발양된 민족정신을 기리기 위하여”제정된 ‘삼일문화상’까지 받았다.
“이처럼 화려한 그의 경력은 바로 그의 변절의 이력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것이 ‘반민족문제 연구소’김봉우(41) 소장의 설명이다.
1909년 함남 원산에서 난 모윤숙은 개성 호수돈여고와 이화여전 문과를 나온 뒤 북간도 용정 명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때 <동광>이라는 문학지에 <검은 머리 풀어>라는 시를 처음으로 발표했다(33년).
이듬해 서울에 와 당시의 <경성방송국> 기자를 하면서 <시원> 동인으로 첫시집 <빛나는 지역>을 냈다. 여기엔 이광수가 서문을 쓰고 역시 친일파 대열에 끼는 김활란이 발문을 썼다.
1937년 대표작인 장편산문시 <펜의 애가>를 발표하여 문단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그는 한때 창씨개명을 거부한 채 1940년에는 <조선의 딸> <이 생명을> 등 항일성향의 시를 써서 경기도 경찰에 구류되기도 한다.
1940년대에 들어 전쟁이 확산되고 전국이 전시 비상체계로 들어가자 각 분야 친일파들의 매국행각이 본격화하면서 모윤숙도 그 대열에 끼어든다. 당시 이들의 친일 동기는 탄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었던 경우, 양심은 허락지 않았으나 주위의 강권에 밀린 경우, 대세에 휩쓸린 ‘부화뇌동’형, 그리고 독립운동이 성공을 못할 것으로 보고 ‘천황의 신민’이 되기를 자처한 경우 등으로 분류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명예·출세욕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으리라는 것은 해방 뒤 역대 정권 품안에서 일관되게 보여준 그들의 ‘어용’ 행적이 잘 설명해 준다.
친일문인들의 자기합리화 친일 논리는 “대동아전쟁은 일본의 침략전쟁이 아니라 영·미의 4백년 침략 마수에서 10억 동아인을 구출하고 동아인을 위한 대동아를 건설하자는 성전”이라는 것. “그러므로 총무장하고 허리띠 졸라매고 이 위대한 성업을 완수해야 한다”며 일제가 내세운 침략호도선전 문구를 그대로 되뇌었다.
이 무렵 모윤숙은 친일명사들이 주로 집필하는 <매일신보>와 <삼천리> <신시대> <대동아> 등에 활발히 ‘전쟁문학’ 작품을 발표한다. <독서와 교양미>(<매일신보> 40.8.1), <신생활운동과 오락취미의 정화>(〃 , 40. 9. 10), <창조적인 생활>(〃 ,40. 9. 17) 등의 글을 써 비상시국을 맞는 자세와 비상시국의 교양문제 등에 대해 독자들을 선무한 데 이어 본격 출정가격인 <지원병에게>(<삼천리> 41. 1), ‘총후국민의 정신무장태세로서 내핍생활’과 대동아전쟁·승리의지를 강조한 <동방의 여인들>(<신시대> 42.1), 강제동원된 소년병의 한사람인 히로우카 소년항공병에게 바치는 <어린날개>(<신시대>, 43. 12) 등을 발표한다.
창씨개명 거부 등 한때 항일
“새 날이래서 / 상차려 즐기지 / 않겠습니다 / 입던 옷 그대로 / 먹던 밥 그대로 / 달가와 새 아침을 맞이하렵니다 / ..비단 치마 모르고 / 연지분도 다 버린 채 /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다 / 온갖 꾸밈에서 / 행복을 사려던 지난날에서 / 풀렸습니다 / 들어보세요 / 저 날카로운 바람 새에서 / 미래를 창조하는 / 우렁찬 고함과 /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 산 발자욱 소리를 / 우리는 새 날의 딸 / 동방의 여인입니다”(<동방의 여인> 중에서)
“아름드리 희망에 팔을 벌리고 / 큰 뜻 큰 세움에 네 혼은 타올라 / 바다로 광야로 나는 곳마다 / 승리의 태양이 너를 맞으리 / 고은 피 고은 뼈에 / 한번 삭여진 나라의 언약 /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 적의 숨을 끊을 때까지 / 사막이나 열대나 / 솟아 솟아 날아가라....”(<어린날개> 중에서)
그는 또 <호산나·소남도>(<매일신문> 42.2)라는 시에서는 ‘황군’의 소남도(싱가포르) 점령을 동아 해방의 성전으로 마화하여 “...외로왔던 마래(馬來)의 처녀야! / 네 슬픔이 너무 길어 / 네 아픔이 너무 진하여 / 너는 오래 일어나지 못하였다 / ..2월15일 밤! / 대아세아의 거화! / 대화혼(大和魂)의 칼이 번득이자 / 사슬은 끊이고 / 네 몸은 한번에 풀려나왔다 / ...거리엔 전승의 축배가 넘치는 이 밤 / 환호소리 음악소리 천지를 흔든다...”
모윤숙은 8·15 해방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칭송·격려하는 황민문학작품들을 발표하는데, 해군특공대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어머니의 힘>(<매일신보> 42. 3), 학도병 출진을 격려한 <내 어머니 한 말씀에>(<매일신보> 43. 11)와 그 밖에 <여성도 전사다>(연설문·<대동아> 42. 5), <해군의 얼굴>(<춘추> 43. 6), <‘꽃다발’을 읽고>(<매일신보> 44. 6) 등이 그것이다.
모윤숙은 작품활동에 그치지 않고 1941년 10월에 출범한 ‘조선임전보국단’에 들어가 더욱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벌인다. 조선임전보국단은 “아등은 황국신민으로서 황도정신을 선양하고 사상통일을 기한다. 아등은 국방사상의 보급을 기하는 동시에 일조유사지추에 의용방위의 실을 거두기를 기한다”는 등 충실한 일본의 종복이 되기를 맹세하는 내용을 강령으로 내세우는 친일단체였다.
황민문학작품 활동 왕성
조선임전보국단은 41년 12월 27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결전부인대회’를 연다. 모윤숙은 이 대회에서 ‘여성도 전사다’라는 제목으로 반미주제의 연설을 했다. “이번에 영·미국의 죄상을 듣고 알고 보니까 참으로 황인종으로서는 견디지 못할 꽤씸하고 분한 일이 여간 많지 않았다. 이 사탄의 정체에 같이 춤추는 여자가 한 분 동양에 있으니 그분은 바로 저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이다...그러나 우리는 남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가슴에 대화혼의무형한 총검을 가져야겠다. ..미·영을 격멸할 자는 아세아요, 대일본제국이요, 국가의 뒤에서 밀고 나가는 원동력은 아내요, 어머니이다. ..우리들 여성의 머릿속에 대화혼이 없고 보면 이 위대한 승리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가문에서 쫓겨나더라도 나라에서 쫓겨나지 않는 아내·며느리가 되자...” 이 대회에서는 박순천·박인덕과 함께 김활란도 연설을 한다. 그는 ‘여성의 무장’이라는 연설에서 “이제 성전은 정말로 내려진 것이다...희생의 투구를 쓰고 적성의 갑옷을 입고 긴장과 자각으로써 허리띠를 매고 제1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미·영을 격퇴하여 버리자..”고 주장한다.
이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는 43년 11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의 이름으로 전국 39개 도시에 학병격려대연설회를 위해 ‘부인계몽독려반’을 보낸다. 이 때 모윤숙은 함흥·원산·북청지역을 맡고 이숙종은 인천·개성·수원, 배상명은 해주·사리원·안악, 김활란은 신의주·정주·선천지역을 각ㄱ각 맡아 떠난다.
해방이 되었다. 모윤숙은 일본의 패망을 기뻐하고 광복을 감격스러워하며 이제까지 사탄이라 부르던 미군정 및 이승만과 재빨리 손을 잡는다.
광복뒤 미군정과 손잡아
“야마도의 칼머리에 꿇어앉아 / 신의 심판을 기다리던 때도 / 생명의 황혼이 오기 전 / 한번만 보고지라 원하옵던 / 아아, 내 나라 군사의 모습을 지금 본다 / 넘어진 아마도의 그림자 위를 / 고요히 밣고 올라서는 조선의 힘을 본다”(<우리군대> 중에서)
이승만은 매우 활동적인 두 여성, 모윤숙과 임영신을 외교무대에 내세웠다. 임영신은 나라밖 유엔무대에서 한국문제를 상정시키는 데에, 모윤숙은 나라안에서 당시 유엔한국위원단 위원장인 인도의 므리슈나 메논에게 접근해 이승만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게 하는 데에 결정적 구실을 한다.
당시 메논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는 현존하는 적대관계를 심화시켜 한국의 영구분단을 초래할 것”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모윤숙은 인도 시인 ‘타고르’와 ‘사로지니 나이드’를 외면서 메논에게 다가갔다. 이승만의 부탁으로 그를 수차례 이화장으로 초청해 마침내 자기 조국 인도정부의 의사까지 묵살하면서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를 유엔에서 역설하도록 했다. 모윤숙은 뒷날 한 ‘회상기’에서 이렇게 썼다.“..고마운 사람, 메논. 때로 나와의 우정에 금가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은 정실에 흐르기도 했다. 그가 유엔에 가기 전날 밤 그를 이화장으로 데려가 이 박사를 지지하는 서명이 든 두루마리를 그의 주머니에 넣어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우정과 국가의 운명이 이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감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일 나와 메논씨와의 우정이 없었다면 남한만의 단독총선은 아마 없었을지 모른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에 선출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윤숙은 48, 49년 유엔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정부수립에 한몫을 하였고 57년에는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여성단체협의회 이사(62년), 여류문인협회장(69년), 서울세계펜클럽대회 준비위원장(70년) 등으로 활약하더니 71년에는 8대 국회에 공화당 전국구로 진출했다.
72년 7월 82회 임시국회에서 그는 남북공동성명에 관한 질의를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초자연적인 용기와 모험력과 결단성을 신앙해야 되겠습니다. ..나는 죽음의 사형대에 올라갈 때까지라도 공산당과는 어떤 의견이든지 호락호락 합치는 데에는 거부합니다...” 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모윤숙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서도 문학진흥재단 이사장에 선임(80년)되고 삼일문화상을 받더니(80년), 90년 6월 그간 자신의 친일·변절역정에 대해 말 한마디 없이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모윤숙의 공과에 대해 홍윤숙(한국시인협회장)씨는 “당시 여건에서 그분은 여성활동의 선구자요, 초창기 문학의 기수 역할을 했다. 그분의 친일활동은 유감스러운 것이며 선구자로서 좀더 자중했어야 했다는 비판의 소리가 있으나 여성으로서 정치적 투시력이 부족하고 쓰고 싶은 욕망에 붓을 꺾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해방 뒤에는 정치적으로 이용된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중·고교 교과서에는 모윤숙을 비롯한 무려 16명에 이르는 친일작가들의 19개 작품이 실려 있다.
김동환(중1, <산너머 남촌에는>), 노천명(중1, <여름 밤>), 모윤숙(중2, <어머니의 기도>), 김동인(중2, <조국>), 주요한(중3, <빗소리>), 김상용(중3, <남으로 창을 내겠소>), 서정주(중3 <학>, 고2 <국화옆에서>), 장덕조(중3, <아들에게>), 김소운(고1, <가난한 날의 행복>), 정비석 (고2, <산정무한>), 백철(중1, <다도해 기행>), 최남선(중3, <해에게서 소년에게>), 조연현(중3, <국문학에 관하여>), 이효석(고1 <낙엽을 태우며>), 최정희(중1 <생활의 반성>), 유치진(중2 <원술랑>, 중3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 고1 <조국>)
행적 언급없이 눈감아
이에 대해 신맹순(50·월간 <우리교육> 대표)씨는 “해방 이후 반민특위 등에서 친일파들을 단죄하지 못하고, 그들의 작품이 오늘날 교과서에 버젓이 나오는 것은 일제 침략을 방조하는 것으로 교육적 수치”라고 개탄했다.
우리와 비슷한 외세의 지배를 경험한 프랑스는 나치에 협력한 문인들을 전후처리의 일환으로 처벌했고 유대인들은 전후 50년이 넘도록 나치 협력자들을 세계 각처에서 추적해 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들을 그대로 싸안고 정권을 연 결과, 민족정기는 사라지고 역대정권의 비호 아래 변절을 거듭한 인물들이 버젓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