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67
10월3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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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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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그 누구도 ‘삶의 길가’에 머물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모든 형제들’을 줄까지 쳐가면서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회칙을 통해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을 보편형제애, 보편인류애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보편형제애는 내 것, 내 가족, 내 지역, 내 나라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는 하나로 묶여있는 존재이니만큼, 세상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내 형제로 여기는 복음적 태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제2장 ‘길 위의 이방인’에서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소개하시면서, 우리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관대한 마음을 지닐 것을 요청하십니다. 특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신분이나 국적 등 그 무엇도 따지지 않는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이 세상 방방곡곡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활짝 열린 마음을 지니신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신 말씀들, 한 말씀 한 말씀이 다 소중하며 가슴을 크게 울립니다.
“우리 각자의 존재는 다른 이들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통 앞에서 무관심한 삶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삶의 길가’에 머물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 고통을 접하고 분노하며 우리의 안락한 고립에서 벗어날 때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공경하고자 합니까? 그분께서 헐벗으셨을 때에 모른 척하지 마십시오. 바깥에서는 그분께서 추위와 헐벗음으로 고통받으시도록 내버려 두면서 성전 안에서는 그분을 비단옷으로 공경하지 마십시오. 역설적이게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때로는 신자들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실천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가장 근접한 삶을 사셨던 또 한 분은 제2의 예수 그리스도였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었습니다. 또 한 분을 더 소개하자면 제2의 아시시 프란치스코로 살아가고 계신 교황님이십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현신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자신의 이상향으로 설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으로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눈을 감으면 하느님을 바라봤습니다. 눈을 뜨면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바라봤습니다. 인간의 고통, 인간의 모순, 인간의 비참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었고, 그를 자기 등에 업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 따라 조건 없는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을 한평생 실천했던 프란치스코의 삶이 오늘 우리들의 일상 안에서 지속시키는 일, 바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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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뭣이 중헌디!>
오늘 전에 있었던 본당 젊은 부부가 잠깐 제가 있는 곳에 찾아왔습니다. 5살, 3살 정도 돼 보이는 두 자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남자 아이들인데 매우 귀여웠습니다.
큰 아이는 사내아이처럼 생겼는데 둘째는 약간 여성스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보는 순간부터 큰 아이가 더 착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들도 첫째가 더 착하다고 했습니다.
식사를 할 때도 둘째는 한 시도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습니다. 아빠가 안고 있었는데 좀처럼 아빠가 밥을 먹을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돌아다니다 울다 웃었다를 반복했습니다. 반면 큰 아이는 장난감 하나 가지고 얌전하게 놀고 있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첫째 아이를 가졌을 때 이 부부는 신앙심으로 똘똘 뭉쳐서 약혼자 주말 봉사까지 하며 아이가 생기기 전부터 54일 기도를 바쳤고 그 기도가 끝나는 날 아이가 들어섰으며 그 이후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함께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반면 둘째를 가질 때는 살림이 어려워져 아내까지도 일을 해야 해서 함께 아기를 위해 기도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째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몇년 전 유행어 중 하나가 영화 곡성에서 아역 배우가 했던 “뭣이 중헌디!”입니다. 영화의 흐름상 매우 중요한 대사지만 이 말이 유행을 타는 것은 우리 삶 안에서 어떠한 경우에나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계속 “뭣이 중허냐고?”라고 아빠에게 따져 묻다가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라고 하며 나가버립니다.
아빠는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딸을 보호하고자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딸에게 주문을 거는 나쁜 사람을 처치하기 위해 동네 친구들까지 동원하여 자신이 경찰임에도 범법 행위도 감행합니다. 그러나 어떤 힘에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친구들의 힘도 완전히 믿지 못했고, 자신이 불렀던 무당의 힘도 믿지 못했습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딸이 매우 아파하자 결국 참지 못하고 굿판을 뒤집어 엎습니다.
성당까지 찾아갔지만 그것도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지켜주려는 한 여인까지도 믿지 못하여 온 가족이 비극 속으로 빠져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아이는 계속 “뭣이 중헌디?”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아이를 살리기 위해 뭣이 중헌지 모르는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뭣이 중헌지 모르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조금씩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 덜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게 만듭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보다 돈을 더 벌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주어야 하는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라고 묻는 듯 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율법에는 우리 온 존재를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물어볼까요?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사랑하는 것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나 교회의 가르침은 사랑하면 천국가고 미워하면 지옥간다는 이야기밖에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더 중요했으면 좋겠기 때문에
자꾸 중요한 것에서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오늘의 율법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 질문은 카인이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왜 지옥에 갔습니까? 거지 라자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지 라자로는 개들에게 적어도 자신의 종기를 핥게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이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주위에서 굶주리는 사람을 자신이 목숨바쳐 사랑해야 하는 이웃으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라 여기고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나서 온 에덴동산의 동물들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그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한 것입니다. 이름을 지어주라고 한 것은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마리마 막달레나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 동산지기로서 아담의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들에 대한 책임을 진 사람들이지
내가 도와주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골라야 하는 선택을 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산책하다가 작은 저수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만약 낚시꾼이 어떤 물고기를 잡아야하는지 잡지도 않은 상태에서 고르고 있다면 정상일까요? 낚시하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잡기만 하면 됩니다. 선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아프리카 저 멀리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나의 이웃이고 그들이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고 있다면 지금 우리는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의 피를 쏟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무엇이 중헌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면 세상 것들을 더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뭣이 중허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당장 “제 목숨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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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알람이 저를 깨워줍니다. 똑똑한 스마트폰은 새벽 4시를 알려주고, 오늘의 날씨도 알려주고, 뉴스도 전해줍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알람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른 새벽에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복음서에는 잠을 깨우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호숫가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 떨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배에 누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함께 계셨음에도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아셨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우리는 미사참례를 하고, 성체를 받아 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쩌면 풍랑을 만났던 제자들처럼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흔들리곤 합니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는 오늘도 제자들처럼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번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가야파, 헤로데,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을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모욕과 조롱을 받으실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깨우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두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오늘은 정호승님의 ‘수선화에게’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입니다.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외의 복음은 헛된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지금 강도당한 이의 따뜻한 이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가끔은 외로워서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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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25-37: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율법 교사는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25절) 율법 학자지만 법조문만 잘 알 뿐 그 정신은 모르는 자들임을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의 첫 줄부터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고ㅈ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율법 교사는 계명을 말씀드렸다. 주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신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묻는다.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만이 예리코로 내려가던 사람의 이웃이었다고 가르치신다.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사제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37절)이 그의 이웃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4절)이라고 한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는 필요한 치료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치료제이다. 어떤 말씀은 상처를 싸매고, 어떤 말씀은 기름을 바르고 어떤 말씀은 포도주를 붓는다. 그분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노새에 태우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말씀하신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5절) 이튿날은 바로 강도를 맞은 사람이 구원받은 날로 부활의 날이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하느님의 두 계약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상처 입은 값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 고귀한 피가 우리를 구원하여 죽음의 아픔을 면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매 맞고 반죽음 상태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준 이가 당신이심을 알려주셨다. 우리의 상처를 보살펴 주는 이보다 더 가까운 이는 없다. 그분을 우리 주님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으로 사랑하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 된 몸 안에서 다른 어려운 지체들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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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의 핵심 단어는 ‘이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계명이 바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루카 저자는 다른 공관 복음 저자들과(마르 12,28-34; 마태 22,34-40 참조) 달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으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계명으로 함께 제시하면서 이웃 사랑이 결코 하느님 사랑과 떨어질 수 없는, 같은 효력을 발휘하는 계명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던 율법 교사는 이웃 사랑의 주제를 이어 나가며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도와야 할 이웃입니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 노새, 여비 등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탁월한 본보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율법 교사의 질문이었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질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이는 이웃에 대한 율법 교사의 생각을 바꾸게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고르고 선별하는 것에 더 마음을 쓰는 ‘나’ 중심의 사고에서, 내가 직접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겠다는 ‘상대방’ 중심의 사고로 전환한 것입니다. 곧 내가 정해 놓은 ‘이웃’의 범주에 누군가 자격이 되어 들어오면 그제야 사랑을 베풀겠다는 소극적 태도에서, 나 자신이 먼저 발 벗고 나서서 누구든 그의 이웃이 되어 주겠다는 적극적 태도로 변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내 이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인색한 사랑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랑,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이며 당신께서 몸소 십자가 죽음으로써 보여 주신 진정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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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글라라수도회 이회진 빈첸시오 신부님]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걷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에게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 나아가 모든 인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자신이 살아갈 “길”과 “목적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수많은 예언자와 현자들이 이에 대해 말을 했지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다시 율법의 정신에 대해 물으시면서 율법학자 자신에게, 즉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대답하시게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그 목적지에 이르는 길입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은 이 목적을 향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며, 우리가 기도를 필요로 하는 것도 기도가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사랑으로 우리의 사랑의 힘을 복돋아 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 삶의 모든 행위에 대한 근본 원리이며 생명을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을뿐더러 홀로 인생의 여정을 사는 존재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 세상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기에 모든 믿는 이들이 고독할 수 없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사회 안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무수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연인 사이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벗에 대한 사랑, 동포와 조국에 대한 사랑 ... 그러나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하지 않을 때 그 사랑은 자기애적 사랑으로 변질되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게 됩니다.
불행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이 그 좋은 예입니다.
1933년 독일교회는 “하느님은 히틀러를 통해 오셨다.”고 선언하였는데, 이 히틀러는 자기 민족 게르만의 우월성에 대한 지나친 애착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지닌 경제적 부와 민족적 우수성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유대민족은 게르만 민족을 위협하는 존재들이었기에 게르만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유대민족을 없앨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자기중심적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게 되면 자신의 마음이 아프고 슬프기에, 사랑하는 이가 다치고 마음 아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만족의 한 형태입니다.) 그래야 자신도 아프지 않을 테니까요. (이것은 자기방어의 한 형태입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고 사랑하는 것에 위협되는 모든 것을 미워하고 배척하며, 나아가서는 그런 위협으로 사랑하는 것/사람을 지키기 위해 살인과 폭력마저도 서슴치 않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소유화의 집착적 경향입니다.)
사랑의 폭력은 바로 그렇게 자신의 내면에서 자기사랑의 극단적 표현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는 우리의 사랑이 어떠한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 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분은 우리와는 멀리 계시지만 그리고 실제로는 사마리아인처럼 아무 연관도 없지만 세상으로부터 이리저리 터지고 맞아 반죽음이 된 우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신마저 내어주는 희생과 피흘림이라는 기름과 포도주로 인간의 상처를 싸고 동여매줍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당신의 은총과 축복을 남겨 놓으며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을 교회와 믿는 이들에게 부탁하기까지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묻는 율법학자에게 주님은 가서 “당신도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주님은 당신처럼 그렇게 가서 다른 이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 길이 어떤 길이며, 어떤 정신으로 가야 하는 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에서 어떤 일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도 배운 것과 체험으로 알고 있으며, 그런 일을 보게 될 때 어떻게 또는 누구처럼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주님, 당신은 제게도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귀찮다고 다른 형제에게 미루었던 일을 오늘은 나서 보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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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이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기쁨, 그리고 불멸의 희망이 있습니다.
복음은 어떤 이유에서든 하느님을 사랑하는 기쁨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 곁의 이웃을 향한 사랑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납니다.
이웃 사랑의 대명사인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를 넘어 인류 문명사에 이웃 사랑의 보편적 가치를 드러내 주는 이야기로 자주 회자됩니다.
내 편이 아니면 무시하고 경멸하는 집단적 이기주의가 강해지는 우리 시대에,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을 피해 달아나는 위선적 사제나 레위인과는 달리, 오로지 ‘가엾은 마음’ 하나로 아무런 편견과 조건 없이 애덕을 실천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에서 복음이 지닌 놀라운 힘을 발견합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자신에게 특별한 부담이나 피해가 오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한 위험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고도 구조에 나서지 않는 경우에 처벌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있다고 합니다.
최근 거리에서 폭력을 당하거나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돌보다가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를 핑계로 보편적 도덕심을 잃는 위기의 한국 사회를 볼 때, 오늘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자못 중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요청하는 애덕의 실천에 어떤 이유에서든 합리적 이유나 제한적 조건을 거는 것은 복음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무조건적인 하느님 사랑에 뿌리를 둔 조건 없는 이웃 사랑에서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얼마나 조건부 사랑에 익숙한 사람인지 되돌아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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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율법 교사가 예수님과 이웃 사랑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중에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당시 유다인들은 이웃의 범주를 동족으로 제한하였습니다. 다만 이방인이라도 이스라엘 땅에서 살고 있다면 이웃으로 받아들였습니다.(레위기 19장 18절. 34절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율법 교사의 질문에는,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인과, 갈등 관계에 있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의 범주에 넣지 말아야 하지 않겠냐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동족일지라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단죄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요한 복음 7장 49절 참조) 그러므로 그가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며 대화를 이어간 것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로 지내신 것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비유 끝에 율법 교사에게 되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여기서 율법 교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질문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율법 교사의 질문이 ‘이웃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예수님의 질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묻는 말에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라도 먼저 자신이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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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웃>
루카 10,25-37 (가장 큰 계명, 착한 사마리아의 비유)
그때에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아웃>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곁에
아무도 없어
나 홀로라도
곁이 되어야 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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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웃이 되어 준 사람>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사촌만도 못하다.'(잠언27,10)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되어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에는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27,1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가 이웃입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 불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었는데 마침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지나가 버렸고 또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그도 역시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자신 있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10,37) 하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 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누가 이웃이며, 이웃이 아닌지에 대해서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남으로 보았고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우리가 병들고 궁핍한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곧 고통을 받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입니다.”(성 마더데레사)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마음을 먹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저 '어떤 사실을 보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 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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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평화방송을 시작하면서 더 바빠졌습니다. 여기에 외부 강의도 늘어나면서 다른 곳에 신경 쓰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시간 없어.”
글도 매일 써야 하고, 방송과 외부 강의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성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 일도 그대로 해야 하기에 매일 바빴습니다. 그래서 좀 쉬고 싶더군요. 바로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원고 청탁 전화가 왔습니다.
예전에 홍보실장으로 있을 때, 원고 청탁의 어려움을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다짐했었습니다. 제게 원고 청탁하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겠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일이 많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그러다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시간’ 때문에 하나씩 포기하게 되면, 결국 내게 남는 건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과 공허함밖에 없다.”(정김경숙)
시간 없는 것이 아니라 안 되는 일을 찾으려는 마음이 더 컸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능력과 재주를 저 편한 대로 다뤄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단함과 공허함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시간 때문에’라는 핑계 만들기보다는 할 수 있는 긍정적 마음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는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워낙 유명한 비유인데, 이 비유에서 세상의 시선과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야기이지요. 사실 우리 사회의 관심은 범죄자 체포 여부가 관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강도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또 얼마나 잔인하게 강도질했는지를 궁금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의 관심은 피해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이 세상은 범죄자를 처벌해서 사회를 바로 잡으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사랑으로 사회를 옳게 이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제, 레위인은 민족의 거룩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네들 직무와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피해자가 죽은 줄 알고 시체에 손을 대서 부정을 타지 않으려는 율법 준수가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어떤 이유도 필요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서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만이 진짜 이웃임을 강조하십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만드는 가짜 이웃은 안 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진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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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여정, 사랑의 훈련, 사랑의 전사>
- 사랑밖엔 길이 없다 -
오늘은 단기 4355년, 서기로는 2022년 10월3일 개천절입니다.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날로 4대 국경일중 하나입니다. 제 어렸을 때만해도 달력에는 단기와 서기가 함께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개천절開天節 뜻도 새롭고, 개천절 가사 1절도 오랜만에 찾아 노래해봤습니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단군이시니를 하느님이시니로 읽으면 더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서력기원전 2333년에 하늘을 열고 나라를 세워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애국가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가 흡사 성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한민족 국가임을,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유구한 전통의 문화민족, 하느님의 백성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강론은 믿음에 대해 나눴고 오늘은 사랑에 대해 나눕니다. 믿음 대신 사랑을 넣어 “사랑의 여정, 사랑의 훈련, 사랑의 전사 - 사랑밖엔 길이 없다 -”로 정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전반부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사랑의 이중계명이 나오고, 후반부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우리들은 또 사랑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이제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자연의 피조물 사랑까지 더하여 사랑의 삼중계명 시대에 돌입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올해의 배 피해도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섭리란 깨달음입니다. 평년 수확의 반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배농사는 잘 되었는데 본의 아니게 피조물인 까마귀, 까치, 벌레들과 함께 나누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올해 교회일치적 기념의 시기는 9월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시작하여 내일 10월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에 끝나며 우리 수도자들은 그동안 매일 끝기도때마다 공동으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문을 바쳤습니다. 바로 이와 맞물려 9월 피조물들과 나누다 보니 배밭농사가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된 것입니다.
교황님의 담화문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찬가에 우리도 동참합시다. ‘저의 주님, 주님의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찬미받으소서.’ 시편저자와 함께 ‘숨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시편150,6) 노래합시다.
안타깝게도 이 아름다운 노래에도 비통에 찬 울부짖음의 합창이 따릅니다. 먼저 우리의 누이이며 어머니인 지구가 울부짖습니다. 지구는 우리의 소비주의적 만행의 희생양이 되어 흐느끼며 우리의 남용과 지구의 파괴를 멈추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합니다. 울부짖는 피조물들도 있습니다. 창조 사업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중심성에서 완전히 어긋나는 ‘자의적인 인간 중심 주의’에 휘둘려 수많은 생물종이 멸종하고 있고, 그들의 찬양 노래가 들리지 않습니다.”
참으로 피조물인 자연사랑과 더불어 생태적 회개의 절박성을 깨닫습니다. 요즘 수도원 쓰레기장을 보면 산같이 쌓이는 쓰레기들에 저절로 탄식이 나옵니다. “아, 먹는 것이 죄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대부분 택배를 비롯해 식품과 관계된 쓰레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어렸을 때 50-60년 대 버리는 쓰레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배설되는 오물들은 밭으로 갔고, 음식물 찌거기와 구정물은 돼지나 닭이 먹었습니다. 모두가 저절로 지속가능한 순환시스템의 삶이었습니다. 나무와 흙과 짚과 돌들로 이루어진 집들도 허물어지면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감상적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의 심각성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사랑의 여정중인 우리들이요 평생 사랑의 전사로 사랑의 영적전투와 더불어 사랑의 영적 훈련에 전념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어제는 미사중 ‘사랑의 전사로 평생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다가 영적전투중 부상으로 인해 병이 들어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여 주님과 하나 되고, 보속補贖과 대속代贖의 삶이 된다면 이 또한 축복이요 감사가 될 수 있겠다.’하는 깨달음에 위로가 되고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끝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적전쟁중 부상을 잘 관리하고 보살피며 한결같이 사랑의 영적 전투에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랜 군생활의 백전노장들이 부상도 많은 것처럼 평생 주님을 위해 영적전투를 하는 수도자들 역시 훈장처럼 병도 상처도 많을 것이며 전혀 부끄러워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정작 부끄러워할 것은 병이 아니라 죄요, 정작 무서워할 것은 병으로 인한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죄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영혼의 죽음’입니다.
제1독서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그리스도의 종인 바오로 사도는 하나인 복음에 대해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자체가 바로 복음임을 일깨워 줍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얻은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오늘 루카 복음서에서 배웁니다. 새롭게 마음에 와닿는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우리 사랑의 전사가 명심하여 지켜야 할 내용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율법교사가 이처럼 사랑의 이중 계명을 대답했을 때, 주님이 주신 답변은 사랑의 전사들인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저는 여기 사랑의 이중 계명에, “네 주변의 이웃인 피조물 자연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를 더하여 사랑의 삼중계명의 때가 도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착한 사마리안의 출현이 놀랍습니다. 사랑의 전사들인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이요 모범이 됩니다. 종교인도 유다인도 아니면서 자비하신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이 사마리아인입니다.
사제도 레위인도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피하여 갔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시종일관 최선의 사랑을 다해 살려 냅니다. 사랑의 전사라면 모름지기 “누가 나의 이웃인가?” 내 중심이 아닌,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인가?” 곤궁중에 있는 이들을 중심에 두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한 하느님의 세 특징을 지녔음을 봅니다. 초주검이 된 이를 살려 내는 과정에서 사마리아인의 ‘친밀함closeness, 연민compassion, 부드러움tenderness’ 의 세 모습에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특성이 잘 드러납니다. 마지막 주님과 율법교사가 주고 받은 대화가 우리에게는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랑은 관념이나 추상명사가 아니라 행해야 하는 동사입니다. 사랑의 전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수행자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의 전사, 사랑의 수행자되어 살게 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다음 말씀대로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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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행동으로 사랑하자!>
오늘 복음(루카10,25-37)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말씀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합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러자 율법 교사가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에리코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었는데, 사제와 레위인은 그를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큰 친절을 베풉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제와 레위인처럼 나의 절실한 도움이 필요한 이를 그냥 지나친 적은 없는지?
사제와 사제 곁에서 봉사하던 레위인은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고,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머리로만 사랑했지, 행동으로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제와 레위인들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살았던 사마리아인은 '행동으로' 사랑했습니다.
복음이신 예수님은 말과 행동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합시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으로 사랑합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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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tq0hdSjS9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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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 29)
가을비 내리는
맑은
월요일입니다.
기쁜 한 주
소중한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영원한 생명은
목적지와 방향이
같습니다.
참된 이웃은
서로의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참된 이웃은
사랑을 실천할
때를 놓치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두고
도망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이웃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착한 이웃이 있어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은 사랑의
말씀을 알아듣고
사랑의 실천하는
새로운 삶의
기쁨입니다.
이웃의 딱한
이야기는
우리자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착한 이웃들이
필요한
우리시대입니다.
착한 이웃은
착한 사람이
되는 실천입니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착한 이웃이
있기에
살 만한 세상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방향은
착한 이웃이 되는
사랑과 똑같은
방향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대치되는
반대쪽으로
가지 않길
기도드립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을
받은 그 이웃은
다른 곳에서
받은 사랑을
기쁘게 또
실천할 것입니다.
따뜻한
생명은 따뜻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서 그렇게 하여라."
말씀하시며
오늘도 쓰러진
이웃을 일으키십니다.
참된 이웃이 되는
좋은 날 되십시오.
++++++++++++++++++
(2)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 29)
사람
잘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다.
착한 이웃은
착한 사랑을
실천한다.
착한 사랑은
쓰러진 이웃을
지혜롭게
돌보아준다.
고통에
외면하지
않는 마음과
실천이다.
오고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좋은 이웃으로
사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우리자신이
먼저
좋은 이웃이
될 때 좋은
이웃을
만나게된다.
좋은 이웃은
자비가 만든다.
자비는
길을 밝혀주는
이웃에게 있다.
착한 이웃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복음의 이웃은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자비의 이야기는
이웃이 되는
이웃의 이야기다.
어제가 아니라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다.
신앙은
기도서에
있지 않고
따뜻한
이웃이 되는
실천에 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분리될 수 없기에
가까이 있다.
우리는
어떤 이웃이며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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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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