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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 38. 첫째 되는 계명 - 마 22: 40. 선지자의 강령
마 22: 38. 첫째 되는 계명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사람의 첫째 의무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 혹은 영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경건은 인생의 삶의 기본적 의무요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다.
* 잠 1: 7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 잠 9: 10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사람의 모든 도덕적 생활은 참된 경건에서 나온다.
1] 이것이 크고
원문상(*, 헤 메갈레 카이 프로테) '가장 큰'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카이'는 설명적 용법으로서 가장 크기 때문에 첫째라는 말이다. 막 12: 31에는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다'는 말로 표현된다.
* 막 12: 31 -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2] 첫째 되는 계명이요
가장 큰 계명은 사랑이다.
(1) 사랑에는 다른 계명이 모두 담겨 있다.
율법 가운데는 부수적이고 제한적인 것들이 많다. 그것은 지엽적인 문제 하나하나를 취급하기 때문에 단지 그 문제에 해당하는 의무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어떤 계명들은 보다 본질적이고 깊은 내면의 문제를 취급한다. '사랑'에 대한 계명이 바로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대강령은 우리가 그를 경배하고 찬양하며 순종하는 모든 일을 가능케 하는 기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바로 성립되지 않는 한 어떤 형태로 이루어진 신앙일지라도 그것은 참 된 것이 아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진정 사랑하는 이에게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가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거나, 그의 물건을 도적질한다거나, 어떤 형태로든 그를 해롭게 할 것을 생각이나 하겠는가? 사랑은 이처럼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계명이다.
(2) 사랑 안에서는 영원한 진리가 담겨 있다.
주께서는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에는 원천적이고 불변한 특성이 들어 있다. 그것은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사랑, 즉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가져온 절대적 사랑의 은혜다.
인간의 수고로 이루어진 지식, 선행, 권세… 이 모든 것이 폐하여질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불변하는 힘이 되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도록 하실 것이다.
* 고전 13: 8 -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같이 실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공간적인 제약도 시간적인 한계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영원한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 22: 39. 둘째 계명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법은 레위기 19: 18의 말씀이다. 이웃 사랑은 모든 인간관계의 법들의 완성이다.
* 롬 13: 8-10 –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 둘째도 그와 같으니
분명히 이웃 사랑은 두 번째이다. 하나님은 항상 처음이다. 그것이 둘째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괄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인이요,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다'(*, 호모이아 아우테)는 문자적으로 '그녀와 동일하다'인데, 이 3인칭 여성 대명사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 헤 엔톨레; 여성 명사 단수)을 가리킨다. 즉 둘째도 첫째 계명과 같이 큰 계명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같은 것으로 보신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은 하나의 계명으로 보신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견해와 다르다.
그들은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면 어떤 경우에는 이웃에 대한 의무, 부모를 돌보는 것까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 마 15: 1-9 – 장로들의 전통 –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들은 원수는 미워했으며, 조건적인 사랑을 추구했고, 죄인들을 미워했다.
* 마 5: 43-47 –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예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은 사람의 유전을 배제하고 두 계명을 사랑이라는 말로 연결하여 하나로 만드신 것이다. 요한은 그것을 요일 4: 20-21에서 설명하고 있다.
* 요일 4: 20-21 -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2] 네 이웃을
이것은 레 19: 18의 인용으로서, 본서에서는 이미 5: 43. 19: 19에서 언급되었다.
* 레 19: 18 -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것은 십계명의 후반부, 사람에 대한 계명의 포괄적 요약이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결실된다.
이 두 계명의 결합은 '12족장의 언약'에도 나타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 문헌이 기독교 이전에 쓰였다는 것을 부인한다.
누가복음의 평행구가 보여주듯이 두 계명을 함께 묶어서 말하는 것이 예수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서기관들의 형식적인 일치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행위는 잘못되고,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고, 그들이 알지 못하여 주를 죽였어도,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서 율법을 지키는 데는 열심인 것은 사실이었다.
이 이웃의 개념이 레 19: 18에는 이스라엘 사람과 그 땅에서 함께 사는 외국인을 포함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원수(5: 44)를 비롯한 모든 사람(눅 10: 29-37)에게까지 확대된다.
* 마 5: 44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눅 10: 30-37 –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이 이웃을 사랑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이웃 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이웃 사랑 개념은 온 세상의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 요 11: 52 -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그러므로 이웃 사랑의 계명은 언약공동체의 존재 방식으로서 온전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과 능력의 반영이다.
* 마 5: 48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3]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네 몸과 같이'(*, 호스 세아우톤)는 '네 자신처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시인되면서 이웃 사랑의 표준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적인 억지 해석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돌본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돌봄은 무조건적이어서 그에 대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또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쉽게 용납하고 잊어버리고,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관대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미 지나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
이 사랑이 너무 과해서 우리는 이기적이고 타락하고 부패했다. 그러나 우리 이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냉정하고 계산적이다.
예수는 먼저 내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도 그 만큼 사랑하라는 순서나 정도가 아니라 이웃과의 형제적인 연합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웃에 대하여 그가 마치 '내 자신'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새 계명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요 13: 34). 이웃 사랑은 모든 인간관계의 법들의 완성이다.
로마서 13: 8-10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하였다.
4] 둘째 계명도 사랑이다.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38,39절)라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우리는 첫번째 사랑의 계명이 연장되고 있음을 본다.
(1) 이웃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성도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의 삶과 실질적으로 관련된 또 다른 한 인격과의 관계성 속에서 나타나야 할 태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2) 이웃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목적이 있다.
모든 율법의 하나하나가 지향하는 바가 예수께로 나아오게 하려는데 있듯이 첫째 되는 큰 계명과 둘째 되는 계명은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
이 둘이 별개의 것으로 나뉘지 않는 한 우리는 한 가지 목적 때문에 이것들을 지켜야 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 앞에서 올바르지 못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도 올바르지 못하며,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결코 올바를 수 없다는 결론이다.
(3) 이웃 사랑은 동일한 속성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가 실행해야 할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의 속성과 똑같다. 하나님을 대면할 때 거짓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그를 최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관계가 성립될 수 없듯이 우리는 형제를 대할 때 나와 동일한 소중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진실하게 대우할 수 있어야 한다.
* 요일 4: 20-21 –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4) 이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 것과 같다.
예수께서 명령하신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은 모든 율법의 총체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강조한 바와 같이 '남을 사랑하는 자야말로 율법을 다 이루는 자'라 할 수 있다.
* 롬 13: 8 -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죄인들에게 친히 확증해 주셨다. 이 사건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 달리신 어린 양 예수 안에서 이미 천명되었다.
그리스도야말로 사랑의 완성자시며, 온 율법의 성취자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인 그의 사랑의 실체가 우리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재확증을 요청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삶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마 22: 40. 선지자의 강령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구약의 모든 교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도덕적 율법의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도덕법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율법은 의로운 표준이며 규범이지만, 사람은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다 지키지 못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요구인가, 우리가 얼마나 죄악되며 무능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이 왜 필요한가를 알려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1]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문자적으로는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그 선지자들이 매달려 있다는 '강령'(*, 크레마타이)이라는 말이다.
'두 계명'은 서로 분리되거나 대등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처럼, 뿌리와 열매처럼 연결되어 있다.
* 사 1: 17 -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 사 58: 6-7 –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고 모든 율법과 그 선지자들은 구약성경 전체를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구약의 요체는 율법이라 할 수 있다. 율법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법조문으로는 나오지 않지만 그 계명들의 근본정신이 여호와 하나님 사랑이다.
모든 법은 항상 그 법을 만드는 근본정신에 달려 있다. 근본정신이 무시되면 법조문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구약의 계시와 역사의 목표와 의의는 하나님 나라에 있다. 법은 그 나라의 성격과 형태를 결정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요구하신다.
* 신 10: 12 –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마음으로부터의 하나님 사랑은 모든 종교적 의식들의 기둥이다.
* 호 6: 6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삼상 15: 22 -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암 5: 21-24 – 21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 미 6: 6-8 –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적 질서로서 연합과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사랑의 질서 위에 세워진다.
이 사랑은 십계명의 전문에 나타난바 이미 충분히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과 공동체 사이에, 또 공동체 내부에서 나라가 설 수 없으니 성경과 민족과 역사가 아무 의미가 없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물론 사랑이 유일한 계명이지만 다른 계명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법인 사랑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다른 구체적인 법조문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다른 계명들이 준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실상 모든 율법 준수가 헛된 것이다.
율법에 열심인 바리새인들의 율법 준수가 오히려 비판을 받는 것은 단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자기희생과 관용이 없고 보이기 위한 행위만 무성하며 스스로 의롭게 여긴 것이다.
예수의 이 사랑의 계명은 모든 율법 준수의 동기와 그 자세를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헌신과 자기희생과 관용을 요구한다. 이것은 산상보훈의 의미하는 바이다.
* 마 5: 17-20 – 예수와 율법 –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께서7: 12에서 똑같은 표현으로 '황금률'을 말씀하셨다. 바울은 롬 13: 8-10에서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 마 7: 12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롬 13: 8-10 – 사랑은 율법의 완성 –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랑게(Lange)는 예수의 신성 주장이 신 6: 4의 유일신 사상과 충돌하도록 해서 책잡으려는 바리새인들의 음모가 이 질문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예수의 입을 통해 사두개파보다 자기들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물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의 율법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사두개파에 비해서 옳은 점을 칭찬하시면서도 그들의 치명적인 헛점을 다음의 질문(22: 41)을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 신 6: 4 -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율법과 선지자들'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의 모든 교훈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이런 율법적 내용만이 아니다. 사람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율법은 의로운 표준이며 규범이지만, 사람은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 지키지 못한다. 그러나 율법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요구인가, 우리가 얼마나 죄악되며 무능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왜 필요한가를 알려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이제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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