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사과나무 집 남자들
부엌에서 라라의 간식을 만들고 있는데 충주 아줌마가 다가와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라라 삼촌, 김석훈 교장선생님이랑 하나도 안 닮았지요?”
“네. 전혀요! 누가 형제라고 믿겠어요?”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말했다. 젠틀한 석훈에 비하면 기훈은 지 멋대로란 말이 딱 어울리는 남자다. 아줌마가 주위를 살피고 내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건 라라 삼촌이 라라 할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서 데려온 아들이라 그래요. 그리고서 마침내
영애 언니가 이혼을 해준 거예요.”
“영애 언니요?”
“아…애들 할머니 그러니까 교장선생님 친모가 영애 언니라고 충주에서 내가 큰언니로 삼던
분이세요. 하여튼 영애 언니는 그때 이혼만은 안 된다고 그렇게 버텼었는데 라라할아버지가
회사 경리아가씨랑 바람이 나서는 떡하니 라라삼촌을 낳아 갖고 쳐들어오니까 별수 있었겠어요?
그때 교장선생님 12살 때였으니... 그래서 라라삼촌이랑 교장선생님이랑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거라구요. 세상에 한집에 부인이 둘이 되는 장면을 김 기사님이 보셨잖아요. 라라
선생님이 알아는 두셔야 할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예요. 나도 남의 뒷얘기하고 그러는 거 취미
아니지만 앞으로 여기서 사실 거면 말실수도 안 하셔야 하고 하니까. 하여튼 라라 선생님이
아주 복잡한 집구석에 들어온 거라는 걸 아셔야 한다고요. “
아하, 그래서였구나. 석훈과 기훈이 서로 바라보는 눈빛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고 미워하지만 형제이고 그리고 서로를 부담스러워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든 감정이 다 담긴 눈빛들이었다.
김기훈, 너한테도 약한 고리가 있었구나! 그래서 그런 반항적인 눈빛을 날리면서…
아 참, 이것도 여자들 꼬실 때 써먹었겠다 싶었다. 이복형제의 아픔…여자들 침대로 끌어들이긴 꽤 말랑말랑한 소재지.
아!!! 정다라. 나 왜 이렇게 꼬인 거지? 나 원래 이러지 않았잖아? 그냥 난 지금 너무 화가 난 거지? 그렇지?
“그렇다고 성격 삐뚤어진 걸 가정불화 탓으로 돌리면 안 되죠! 세상에 어렵고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훌륭하게 성장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이가 서른이나 넘어서 그런 거
갖고 아직도 반항적인 눈빛이나 날리면 누가 알아나 준대요? 유치하긴.”
부족한 것 없이 자란 게 눈이 빤히 보이는 기훈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을 이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애 셋을 둔 홀아비 김석훈에게 더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누가 뭐래요? 선생님, 흥분하니까 무섭다. 첫날부터 그렇게 모범생 같은 우리 라라 삼촌을
상대로 말싸움을 벌이시질 않나.”
“모..범생이요?”
김기훈을 표현하는 여러 말들이 있겠지만 이건 무슨 어울리리지 않는 단어란 말인가..모범생?
“그래요. 라라 삼촌이 어른들한테 얼마나 잘하는데. 그리고 잘 생겼지 어휴, 내가 20년만
젊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니까. “
충주아줌마가 노래를 시작했다.
“세월이 야속하더라…”
“근데 라라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누가 돌아가셔요? 여기 같이 사셔. 여행가셨는데 아마 ..내일 오시지?”
오 마이 갓! 하나님 맙소사!!!
이 집에서 라라 할아버지까지 함께 살아야 하는 거였구나. 물론 라라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다. 대가족이 함께 산다는 건. 하지만, 난 왠지 난해하고 복잡한 수학문제를 눈앞에 본 듯한 그런 암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줌마가 계속했다.
“서진이가 나한테 짜증내고 그래도 애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내가 참고 그러고 있지.
다른 사람 같으면 이런 집에서 하루도 못 버텨요. 세상에, 마누라 복도 없으면 자식 복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우리 교장선생님….”
어느 가정이든 문제가 아예 없는 집은 없다.
내니로 일하는 친구들 얘기를 들으면 완벽하게 화목하고 온전한 가정이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일하게 될 이 집이 어떤 가족구성원으로 이루어졌든 어떤 히스토리가 있던 나의 역할과 책임에는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나의 임무는 온 힘을 다해서 라라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하도록 돌보아주면 되는 것이다. 기훈이란 남자가 나에 대해 어떤 선입견을 품고 있던 상관이 없다. 화가 나지만 상관 않기로 하자. 복수고 뭐고 일단 난 라라와 친해지는 게 우선이다.
석훈이 나에게 읽어 보라고 전해준 파일을 읽어보았다. 라라의 건강기록과 그 밖에 라라에 관한 모든 내용이 정리된 파일이었다. 석훈이 아이를 챙기는 방식은 마치 회사의 CEO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라가 내 방문 앞에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들어오라고 하니 다시 숨어버린다.
난 정원으로 나갔다.
예상대로 라라가 졸졸 따라왔다. 난 먼저 놀이터로 가서 모래 장난을 시작했다. 라라가 지난번에 보여준 대로 그릇들에 모래를 담아 요리를 하고 먹는 시늉을 하며 혼자 놀고 있자 라라가 조금씩 가까이 왔다. 내가 고무호스에 수도꼭지를 끼워 물을 모래 안으로 흘러 보냈다. 라라가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는지 이번에는 바싹 내 옆으로 왔다. 난 물과 모래를 섞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보여주었고 라라는 마침내 젖은 모래에 손을 댔다. 그리곤 이내 젖은 모래를 플라스틱 양동이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곤 양동이를 뒤집었다. 양동이 모양의 모래성이 만들어졌다. 내가 물을 잠그자 라라가 고무호스를 잡았다.
“워터…(water..)”
“물이 더 필요해?”
“물.”
“물 틀어주세요. 해봐.”
“물 트러지쉐요.”
“…그래, 잘했어.”
파일에는 라라 발음 때문에 언어치료사와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고 들었다. 도대체 라라를 데리고 얼마나 많은 검사를 받았던 거야? 하지만 당연히 언어치료사의 소견은 정상이었다. 라라에게 필요한 건 많이 말하고 듣고 따라 해야 할 언어의 홍수였다.
“음 맛있다.”
난 수저로 모래를 먹는 시늉을 했다.
“라라가 모래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구나. 라라가 호스에서 나오는 물을 모래밭에
뿌리니까 모래가 다 젖었어. 그래서 라라가 그 젖은 모래를 그 그릇에 넣으니까 이렇게
단단해졌네. 이것 봐. 수저가 아까 마른 모래에는 쉽게 들어갔는데 모래가 젖어 있으니까
이렇게 좀 더 힘을 주어야 수저에 담을 수 있네.”
라라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한 문장 이상의 말은 처음 들어봤다는 듯이...
아니면 내가 너무 오버했나? 라라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노. 안대!”
“어?”
“진짜 머그면 안대.”
“알아, 그냥 이렇게 먹는 시늉을 한 거야. 진짜로 먹는 줄 알았어? 너도 지난번에 이러지 않았어?
내가 너무 리얼했나?”
라라가 갑자기 모래를 들어 자기 머리 위로 뿌렸다. 난 깜짝 놀랐다. 미처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라라가 다시 모래를 퍼서 자기 머리위로 뿌리고 날 보곤 씩 웃었다.
“라라, 이게 재미있구나? 근데 이러면 눈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우리 조심하자. 응? “
이런 모래 장난을 꼭 반대할 이유는 없다. 라라가 모래를 이런 식으로 느끼고 경험하고 싶다면 그 방식이 틀린 건 아니다.
“자, 이제 우리 들어가서 좀 씻고 유치원 갈까? 오늘은 라라 오후반이지?”
라라가 말했다.
“유치원.”
“그래, 유치원.”
라라가 유치원이라는 말에 눈물을 보였다.
“왜 그래? 라라야. 울지 마. 유치원 가기 싫어서 그래?”
라라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가니 아줌마가 말했다.
“원래 유치원 가자고 그러면 저래요. 그러니까 종일반에 못 넣고 선생님 같은 가정교사를 쓰는
거죠.”
“그렇구나. 라라야. 너 정말 유치원 가기 싫구나. 근데 오늘은 선생님이 라라유치원 구경도 하고
거기에 어떤 장난감이 있나 보고 싶은데…나 좀 데리고 가서 구경시켜 줄 수 있어?”
온갖 말로 라라를 달래서 드디어 걸어서 집에서 10분 거리인 사과나무유치원에 갔다.
듣던 대로 이 마을은 사랑고등학교 때문에 형성된 마을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담한 동네에 아기자기한 분위기...내가 결혼하면 아이를 낳고 살고 싶은 그런 동네였다.
라라의 유치원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다. 하지만 라라의 특이한 음식 알레르기와 가끔은 엉뚱한 행동들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다.
라라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은 정말 단순하다.
라라는 자기가 언제 오기 싫어했느냐는 듯이 실내 이곳저곳에서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었다. 물론 선생님과 아이들의 수업에는 잘 참여하지 않았고 선생님도 그런 라라를 억지로 끌어들이진 않았다.
난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몰래 숨어서 라라가 친구들과 어떻게 교류를 하며 노는 지 살펴보았다. 라라는 주로 아이들의 주변을 맴돌며 그들을 관찰하다가 그들이 자리를 옮기면 그들이 했던 놀이를 카피하며 놀고 있었다.
아직 라라의 유치원이 끝나려면 시간 여유가 있었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유치원 선생님이 알려주신 대로 사과나무카페와 슈퍼와 도서관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다행히 카페의 커피는 맛이 좋았다. 돈을 내려고 했더니 카페 주인아저씨는 내가 사는 집 주소를 물어보았다. 나중에 한꺼번에 결재를 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가만 보니 카페에 들어온 꼬마 아이들도 따로 돈을 내지 않았다. 주인아저씨가 이외수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참으로 독특한 인상이었다.
“이 동네가 정말 특이하네요. 카페에다 장부를 만들고 사먹는 시스템도 재밌고. 이런 시스템은
누가 만든 거예요?”
“…”
“아저씨? 안 들리세요?”
“들려요. 요. 즘 슬. 로. 우. 푸드가 인기라면서요. 그래서 슬로우 대화를 제가 실천하고 있습니다.”
“네? ..네에. 근데 전 그냥 보통 속도로 말할게요. 이 동네 무슨 공동체 마을 그런거죠?”
“……네… 사랑고등학교 이사장님이 여기 도서관도 유치원도 이 카페도 만든 겁니다.”
아저씨가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사랑고등학교 이사장님이라면 ...라라 할아버지를 말하는 거다.
아직 얼굴도 못 보았지만 분명히 산타할아버지처럼 사람들에게 퍼주는 것을 좋아하는 인자하고 마음이 넓은 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훈의 아버지이시니 어련할까? 바르고 올곧고 하지만 자상한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커피 향을 음미하며 두 잔째 커피를 들고 - 일회용 컵이 없다고 카페 아저씨는 머그잔에 커피를 담아주었다 - 걸어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달려와 나를 밀쳤다. 커피 잔이 바닥에 깨지면서 운동화에 커피 얼룩을 만들었다. 커피와 난 요즘 운대가 안 맞는다.
나를 밀친 사람은 남학생이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아이는 키가 무척 컸다. 고등학생이 분명한 외모였다. 바로 그 뒤로 나를 밀친 남자아이의 교복과 다른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들이 그 아이를 뒤쫓아갔다. 분위기가 척 보니 3대 1의 싸움이었다.
만약에 사태에 대비해 핸드폰을 들고 경찰에 신고할 준비를 하고 난 아이들이 들어간 골목 안으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이미 그 아이를 발로 짓밟고 있었다.
“너희 뭐야?”
내가 소리를 빽 질렀다. 순간 아이들이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내가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듯 하던 짓을 계속 했다. 날 무시했다 이거지!
“경찰에 신고했어! 빨리 도망가는 게 좋을 걸?”
신나게 때리던 남자아이 하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난 도망가려다 마음을 바꾸었다.
나도 태권도 빨간 띠다! 근데 막상 그 아이가 다가와서 내 얼굴 위로 손을 올리자 나도 모르게 자세가 낮춰졌다. 바닥에 기듯이.
그런데 그 아이가 갑자기 자신의 일행들에게로 달려갔다. 바닥에서 누워서 무차별하게 맞고 있던 아이가 일어나서 자신을 때리던 남자애들 두 명을 발차기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저럴 거면 처음엔 왜 맞고 있었지 싶었다. 실제의 싸움은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박진감이 넘치진 않았다. 맞는 소리도 너무나 작고 둔탁해서 그래서 더 …무서웠다.
결국 몹시도 불량하게 생긴, 교복이 너무나 안어울리는 세 명의 아이들은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면서 도망을 갔다. 난 숨어 있던 분리수거함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에이. 나쁜 놈들. 욕이 더 나쁜 거야 주먹질 보다. 어디서 그런 창조적이고 드러운 욕 들을
배워서는…”
남자아이가 가방을 챙겨서 내 옆을 지나갔다.
“넌 괜찮아? 다친 거 아니야?”
그가 날 쳐다봤다. 그의 얼굴이…이건 뭐지 싶었다. 이렇게 부드럽게 생긴 남자아이가 방금 저 세 명을 발차기로 날려버렸단 말인가?
“아줌마는 괜찮아요?”
“나 괜찮았는데 니가 지금 나 한 방 먹였다. 나 아줌마 소리 오늘 처음 들었다. 흑흑.”
그가 가버린다.
“야! 앞으로 싸움질하고 다니지 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어른 같은 소리 한번 뱉어본 건데 갑자기 아이가 돌아서 내게 걸어왔다. 후덜덜…요즘 애들은 당최 짐작이 가질 않으니까…
“아.줌.마! 앞으로 이런데 끼지 말아요. 진짜 큰일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가 돌아서 가기 전에 난 그의 명찰을 보았다. ‘김 영진’. 사랑고등학교 3학년 4반 김영진. 석훈의 큰아들이었다.
첫댓글 ^^ 다음편 기다리겠습니다
잼있어여~~ 다음편도 빠른 업뎃 부탁이요~
시야가 넓어서 좋아요.. 뭔말인지 ㅋㅋ
잼있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