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김복진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5. 23.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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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기행 김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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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0. 12:54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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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조각 선구자로 카프 주도, ‘김복진’(1901~1940)
1940년 8월 18일 이질이 그의 삶을 앗아갔을 때 김복진의 나이는 40세였다. 우리나라의 첫 현대조각가이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의 이론가였으며 한때의 열성적인 공산주의 활동가였던 그의 때이른 죽음은, 조선의 문화예술계나 그의 가족에게는 쉽사리 보상될 수 없는 손실이자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었을 터이지만, 달리 보면 김복진 개인을 위해서는 하나의 복이랄 수도 있었다. 작품활동의 절정기에 급서한 예술가가 응당 누릴법한 비극적이되 신비스럽고 싱그러운 이미지 외에도, 그의 요절은 그가 맞닥뜨렸을지도 모를 친일의 강요로부터 그를 구해내 그의 이름에 떳떳함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름이 그의 삶에 걸맞는 인지도를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복진이라는 이름은 예컨대 그의 아우인 김기진을 비롯한 카프의 동료맹원들이나, 서양화 분야에서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한 고희동보다 일반인에게는 훨씬 덜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의 삶이 짧았다는 사실 못지않게 그가‘당원’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 김기진의 형
정관 김복진은 1901년 충북 청주군 남이면 팔봉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홍규는 여러 곳에서 군수를 지낸 관리였고, 팔봉 김기진은 그와 두 살 터울이다. 일곱 살 때부터 선생을 사랑에 앉히고 글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황간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영동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한 열두살 때까지 서울과 고향에서 한문을 배웠다. 아버지의 근무지인 영동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뒤 그는 열다섯살에 서울로 올라와 제일고보(지금의 경기고) 입학시험에 실패하고 배재고보에 입학했다. 배재고보에서 그가 어울린 벗들은 김기진을 비롯해 박영희 이서구 박팔양 이백수 나도향 최승일 등이었고, 휘문의 정백 홍사용, 양정의 마해송 등과도 교우를 텄다.
죽기 얼마 전 김복진이 <조광>에 기고한 회고에 따르면 고교시절의 그가 얌전한 모범생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 지긋지긋한 시험 때를 당할 때마다 협잡하는 기술과 창의만은 신통하여서 근근이 낙제를 면하”는 정도로 학업에는 별 뜻이 없었고, 반면에 “어찌어찌하면서 톨스토이를 읽다”가 예술이라는 병에 걸리게 됐다는 것이다. 그가 집에서 오는 학비가 부족하면 전당질도 하고 일가에게 거짓 전갈도 하고 해서 1백여원의 영문학 서적을 쌓아놓는 한편, 연극·영화·노래에 몰두했다고 한다. 눈썹을 덮을 정도로 머리를 기르고 명주 두루마기에 오스카 와일드를 흉내내 질피구두를 신고 공책 한권만을 가지고 학교를 다닌 그는 스무살 때 졸업생 27명중 24등으로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다.
두루마기에 철피구두
그를 우리나라 현대조각의 선구자로 만든 조각과 입학을 그는 ‘우연의 수수께끼’라고 회고한다. 대학이나 전문학교의 입학 시즌이 지난 지도 오래여서 그는 영어를 공부하면서 도쿄 구경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우에노 공원을 지나가다가 일본 미술원 전람회를 보게되었고, 거기서 <노자>라는 제명의 석고조각을 보고 조각을 해보겠다는 뜻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는 미술학교 재학 중 박승희 (메이지학원), 연학년(도쿄 상과대학), 이서구(미술학교), 김기진(리쿄대학) 등과 함께 토월회를 조직해 연극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김복진은 특히 23년 9월에 막을 올린 토월회의 제2회 공연작 <하이델베르히>에 쓰인 벽화를 40여일에 걸쳐 그리는 등 무대미술 쪽에 주력했고, 이 단체에 참여한 미술가들을 토월미술연구회로 묶어 미술운동과 미술교육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이 해 9월 박영희 안석주 김형원 이익상 김기진 연학년 등과 함께 파스큘라를 조직해 진보적 예술운동의 첫발을 내디뎠다.
한편, 그는 자신의 조각수업에도 성실히 임해 24년에 작품 <나상>으로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조각가로 데뷔했고, 이듬해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에는 모교인 배재고보와 경성공업학교 도기과에서 가르치며 <3년전> <나체습작> <여> 등의 작품으로 선전에 여러차례 특선·입선 하는 등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28년부터 33년까지 6년간의 투옥을 분기점으로 그의 삶을 전후기로 나눈다면 전기 김복진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자기 개인의 예술이 아니라 운동이었다.
미술학교 졸업 무렵부터 서울청년회에 가담해 좌파운동가로 나선 그는 25년 서울청년회계의 파스큘라와 북풍회계의 염군사가 카프로 통합될 때 이를 주도했으며, 곧이어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나상'으로 일본서 데뷔
초기 카프를 실질적으로 이끈 것이 당시의 문학논쟁을 주도한 문인들이라기보다는 김복진이었다는 사실은 일찍이 임화에 의해 고백되었고, 서울대 김윤식 교수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에 의해 관찰된 바 있다. 예컨대 김기진 박영희를 축으로 이뤄진 내용·형식 논쟁을 마무리짓게 하고, 이를 카프의 제1차 방향전환의 동력으로 삼은 것이 김복진이었다.
조선공산당 가입 활동
내용·형식 논쟁이란 김기진이 <조선지광> 1926년 12월호에 기고한 ‘문예월평-산문적 월평’에서 박영희의 소설‘철야’와 ‘지옥순례’를 비판하면서 촉발된, 소설에서의 내용과 형식에 관한 논쟁이다. 김기진은 그 글에서 박영희의 두 소설이 “계급의식 계급투쟁의 개념에 대한 추상적 설명에 시종하고 일언일구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었다”라며 “소설이란 한 개의 건물이다. 기둥도 서까래도 없이 붉은 지붕만 입혀놓은 건축이 있는가”고 물었다. 이에 대해 박영희는 <조선지광> 27년1월호에 기고한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라는 글에서 “프로문학에서는 빛나는 내용이 중요하지 형식은 제일의적이 아니다”고 받았다. 이 논쟁은 아나키스트 계열의 김화산이 문학예술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박영희의 ‘문학의 당파성’론을 비판하고, 윤기정·조중곤·한설야·임화 등이 김화산을 거세게 비판하는 등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김복진의 권고로 김기진이 박영희와 다른 맹원들에게 사과하고 아나키스트들이 축출됨으로써 내용주의자들의 승리로 귀결됐다.
그에 잇따른 방향전환 논의는 27년 9월1일의 임시총회를 통한 카프재조직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로 나온 카프의 1927년 강령은 “우리는 무산계급운동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을 정확히 인식했다. 그럼으로 우리는 무산계급운동의 일부분인 무산계급 예술운동으로써 1. 봉건적 및 자본주의적 관념의 철저적 배격 2. 전제적 세력과의 항쟁 3. 의식층의 조성운동의 수행을 기한다”고 말함으로써 카프의 지도이념이 마르크시즘임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이것은 카프가 일선적·경제적·부분적 투쟁에서 대중적·전체적·전선적 투쟁으로, 즉 정치적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했음을 뜻한다. 김복진이 카프의 방향 전환을 주도한 것은 당시의 맹원들 가운데 그가 유일하게 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김복진이 당원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아우인 김기진조차 김복진이 체포된 이후에야 알았다고 하는데, 김복진은 이미 제3차 공산당(엠엘당) 시기부터 조직의 핵심부에서 일했으며, 28년 2월의 제3차공산당 일제 검거를 용케 모면했고, 그 직후 결성된 제4차 공산당의 경기도 위원 겸 제4차 고려공산청년회의 경기도 책임비서·학생부 책임비서를 맡아 그 해 7월8일 검거될 때까지 지하활동에 전념했다. 서대숙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에 따르면 제4차당의 공청은 학생운동에 특히 중점을 두고 전조직을 개편하는 일을 김복진에게 일임했으며, 그는 여러 학교에 연구회와 독서회를 만드는 데 전력을 쏟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확산에 노력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김복진은 조선공산당과 카프를 잇는 연결 고리였던 셈이다.
이 시기에 그는 미술비평과 미술운동론에도 힘을 쏟았다. 27년에 카프와 별도로 김창섭 안석주 임학선 이승만 등과 함께 미술단체 ‘창흥회’를 만들어 진보적 미술운동을 펼쳐나간다.
제4차 공산당의 와해와 함께 투옥된 그는 6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33년에 출옥했다. 그는 투옥중 불교에 귀의해 목조불상 제작에 전념했다. 출옥한 해 배화여고 교사 허하백과 결혼한 김복진은 그 뒤 잡지사·인쇄공장 등을 운영하기도 하고, 잠시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도 지냈지만, 주로 작품활동에 몰두하는 한편 허백련 김은호 박광진과 함께 조선미술원을 창설해 후진을 길렀다.
타계할 때까지 그가 만든 작품은 최송설당 동상(김천중학교), <목>(제15회 선전입선작), 김제금산사 미륵대불, 서울 영동사 불상, 이종만 동상(영흥·영평 금광사무소), <나부>(제16회 선전 특선작), 정봉전 동상(서울 화산 심상소학교), 손봉상 동상(개성 인삼조합), 김윤복 동상(인천 계립자선회), 밀러 동상(서울 성회공회), <백화>(도쿄문전 입선작), 러들러 동상(세브란스 의전), 박병열 동상(당진 함남 심상소학교) <다산선생의 상> 등이 있으나 6·25를 거치며 모두 소실돼 그 일부만 사진으로 확인될 뿐이다.
그가 39살에 제작에 착수한 법주사의 미륵대불은 머리 부분과 전체의 비례를 마치고 예산 부족으로 중단된 뒤 뒷날 윤효중 장기은 임천의 손을 거쳐 63년 3월에 완성됐으나, 88년 붕괴 위험을 이유로 헐리고 청동대불로 대치돼, 그의 유작은 한 점도 남아있지 않은 셈이다. 김기진의 회고에 따르면 김복진이 죽기 전 5년여 동안 제작한 작품이 30점 가까이 된다고 하니, 조각이 단순히 정신노동이 아니라 힘들고 오랜 육체노동이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정열을 짐작할 수 있다. 외딸 산용이 이질로 죽는 참척을 당한 지 한달 만에 세상을 뜬 김복진의 주검은 김기진과 아내 허하백이 화장해 그 유품을 청주 팔봉산에 안치했다.
보보라는 애칭을 지닌 산용 외에 김복진 부부는 아들을 하나 두었으나 그 역시 어려서 죽고, 허하백은 6·25때 북으로 넘어가 김복진의 직계 후손은 남아 있지 않다.
전면적 복권 이뤄져야
김기진은 생전에 그의 형을 사람에 대한 호오가 분명했고 일에 대한 결단력과 추진력이 대단했으며 비타협적 성격을 지닌 인물로 회고했다. 또 조카인 성악가 김복희(63)씨의 기억 속에서 김복진은 자상하기 그지 없었던 백부로 존재한다.
미술 평론가 윤범모씨는 김복진의 조각자품들이 모두 충실한 사실주의적 기법을 바탕으로 해 이룩됐다고 평가하고, 그의 작품 가운데 단순히 감상만이 목적이 아닌 환경 속의 미술 즉 공공성과 대중성을 띤 기념조각이 많았다는 점을 주목한다.
그의 작품들이 당대 최고 수준에 이르렸는가의 여부를 떠나서 그가 근대적 의미의 첫 조각가라는 사실, 그리고 그의 카프·조선공산당 활동이 민족해방운동의 흐름 속에 포섭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예술과 삶을 복권시킬 충분한 이유가 될 것 같다.
[출처] 김복진|작성자 바람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