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오키나와 여행, 뷔페 추억
사람은 어쩌면 추억의 동물이 아닌가 싶다.
지나간 날들의 사연을 순간순간 떠올리고, 그 추억의 사연으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하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는 그 중에서도 유독 먹는 것으로 관련된 추억이 많다.
헐벗고 굶주린 세월이 있기 때문이다.
내 나이 세 살 때에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그때 우리 할아버지가 과자공장을 하면서 유복하게 살던 경북 예천을 떠나 남으로 남으로 피난길에 올라, 영천에 하양에 경산에 청도까지 내려갔다가, 결국은 대구 칠성동 판잣집을 거쳐 비산동에 정착했었다.
그렇게 내 나이 열 살로 국민학교 4학년까지 피난생활을 했으니, 먹는 것으로 아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구한 날의 끼니를 보리밥에 멀건 국 한 그릇으로 때우기 일쑤였고, 개떡에 국수이기 십상이었다.
당연이 먹는 것으로 추억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내게 있어 먹는 것으로 첫 번째 추억은, 한 갑자 세월도 더 전으로 거슬러, 내가 대구 수창국민학교 1학년 입학할 즈음에, 대구 서문시장 가까운 곳의 유명한 빵집인 삼송빵집에서 삼촌한테 얻어먹은 앙꼬빵이다.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세상에나!’라는 감탄사를 내뿜으면서 먹었던 것 같다.
국민학교 4학년 2학기 때, 울 엄마의 친정이 있는 경북 문경으로 이사를 와서, 점촌국민학교 같은 학년으로 전학이 되면서, 그 땅이 내게 고향이 되었는데, 그때도 역시 헐벗고 굶주렸었다.
그때 울 엄마가 다락에 숨겨놓은 곶감이며 밤을 훔쳐 먹다가 울 엄마에게 들켜서 혼난 서글픈 추억도 있다.
울 엄마 죽고 집안이 갑자기 몰락하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고향땅 문경 점촌역전에서 삽질과 지게질로 막노동을 할 때, 내 그 형편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또래 친구에게 짜장면 곱빼기 얻어먹은 추억도 아련하고, 라면 한 개를 끓여서 녹말가루로 부풀려 반 동강을 내서, 한 조각은 아침에 먹고 점심은 굶고 나머지 한 조각은 저녁에 먹던 시절도 있었다.
그랬던 내 인생에서 배고픔이 사라진 것은,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1973년 10월에 국가공무원 9급인 검찰사무직 검찰서기보 시험에 합격되면서부터였다.
박봉이지만 굶지는 않았다.
그러나 호의호식(好衣好食)은 할 수 없었다.
구수해 보이는 설렁탕을 먹을 형편이 안 되어서 그보다는 한 단계 아래쪽인 해장국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고, 부드러운 식감의 함박스텍을 주문하기가 부담스러워 딱딱한 돈까스로 대신해야 했었다.
그 즈음에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음식은 호텔에나 가서야 먹을 수 있는 뷔페 식단이었다.
갖가지 음식을 마음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는 말만 들어도, 그저 침이 꼴깍 넘어가고는 했다.
아련한 기억으로, 내 나이 마흔이 넘어가는 중년쯤 되었을 때, 서울 시내 중심의 롯데호텔에서 누군가로부터 뷔페 음식을 얻어먹은 것 같다.
그때쯤에 일상으로 먹던 설렁탕 값의 열 배쯤 되는 가격이 아니었나 싶다.
먹는 것으로 그런 아픈 추억이 있기에, 나는 그 이후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싶으면,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두 며느리에 손자 손녀 데리고 뷔페식당을 찾고는 한다.
지난밤을 묵은 아자트 나하(Azat Naha) 호텔의 식당에서 아침상을 받았다.
뷔페로 차려진 상이었다.
내 앞자리에서 그 상차림 된 음식들을 하나하나 맛있게 챙겨 먹는 다섯 살배기 손자 서율이의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그 까마득한 지난 세월의 추억들을 떠올려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