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설*에게 [정온]
기별을 하였지 아이가 열두 해를 잘 넘겨 볼이 봉숭아*처럼 홍기가 오르니 이름을 얹어야겠다고 기러기가 남천*으로 날아간 지 달포나 되었을까 새벽녘 측간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발끝이 시렸어 서리가 허옇게 내렸었으니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네 초설, 자네가 온 줄 알았구먼
문간 아래 흰 봉투가 놓여 있었지 구기자*를 따라 복령* 넘어 맥문동*에 거처를 정했다는 말은 들었네 아마 양귀비* 입술이 붉어질 때쯤이었지 여하튼 낯익은 서체에 가슴이 뛰고 목이 메었네 아이는 자네를 꼭 닮았구먼 가녀리지만 더운 바람을 품고 있지 은은한 향내가 천남성*까지 이른다네
천냥금* 만냥금*인들 다시 살 수 있겠나 그때 그 밤
그리하겠네 부용*이라 하겠네
* 꽃 이름
- 소리들, 푸른사상, 2022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하다 [이기철]
깨진 유리잔은 소리친다, 다시 올 수 없다고
찢긴 페이지는 소리친다
잃어진 제 말의 짝을 찾아 달라고
나는 이 상실을 사랑한다
달리아를 국화꽃으로 만들 순 없다
새의 날개를 빌려 하늘을 날 순 없다
구름을 끌고 와 흰 운동화를 만들 순 없다
씨앗을 묻어 놓았다고 겨울이 안 오는 건 아니다
수심 일만 미터, 마리아나 해구를 장미원으로 만들 순 없다
사과나무가 안 보인다고 밤을 걷어낼 순 없다
포도덩굴에게 오두막 지붕을 덮지 말라고 부탁할 순 없다
나는 끝내 이 집과 처마와 마당과 울타리와
울타리 아래 핀 물봉숭아를 미워할 순 없다
칫솔을 물고 쳐다본 하늘, 그 푸름을 베어
내 호주머니에 넣을 순 없다
아무리 수리해도 덧나는 들판을 내 손으로 고칠 순 없다
지은 지 십팔 년 된 집, 처음엔 그토록 경탄이던 집이
기둥과 대들보, 천장과 보일러가 자주 고장 난다
새뜻하던 타일과 서까래가 금이 가도 내 힘으론 안 된다
이렇게 쓰려고 한 것이 아닌데 하고 다시 고치지 않는다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한 일이 나의 동행이므로
-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2021
사랑합니다 [이정록]
제가 드려야 할 말이 아니라
제가 늘 들어야 할 말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언젠가 사용설명서까지 올 거라 믿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내 상처에만 필요한 약이라고 여겼습니다.
옹알이부터 시작한 최초의 말인 걸 잊어버리고
고쳐 쓴 유언장의 사라진 글자처럼 생각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건넨 흉터들,
그 바늘 자국을 이어보고야 알았습니다.
마중물을 들이켠 펌프처럼 숨이 턱, 막혀왔습니다.
기름에 튀긴 아이스크림처럼 당신의 차가움을 지키겠습니다.
빙하기에 갇힌 당신의 심장을 감싸겠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별자리처럼 아름다운 말이었습니다.
봉숭아 꽃물을 들인 새끼손톱 초승달에
신혼방을 차리는 가슴 뛰는 말이었습니다.
당신을 당신 그대로 사랑합니다.
별자리와 구름의 이름도 바라보는 쪽에서
마음대로 이름 붙인 것이었습니다.
까치밥에겐 늦었다는 원망 따위는 없습니다.
당신의 부리가 아플까봐 햇살에 언 몸을 녹이던
까치밥이 바닥을 칩니다. 사랑합니다.
몸통 가득한 얼음을 녹여서
마중물을 들이켠 펌프처럼
숨이 퍽, 터졌습니다.
- 그럴 때가 있다, 창비, 2022
역설적 유전자 [정진혁]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유전이 아닐까
나는 '희미한'이란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희미한은 내 DNA에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다
아버지는 막걸리 한 주전자를 마셔도 희미했고
빨랫줄에 널린 색 바랜 팬티처럼
모든 약속도 희미했다
11월 봉숭아 물든 손톱처럼
누가 욕을 해도 희미했고 누가 돈을 떼먹어도 희미했다
색을 잃어버린 백일홍 꽃잎처럼
아버지 때문에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희미한 아버지
희미한 유전자 덕분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나도
사람들은 저녁연기처럼 기억하지 못할까
그러나 너무나 희미해서
또렷한 아버지
- 사랑이고 아픔이고 저녁인, 파란, 2020
리트머스 [윤성택]
늦은 밤 공중전화부스에 사내가 들어 있다
꾹꾹 눌러낸 다이얼은 서른 번을 넘긴다
타국으로 젖어드는 신호음 저편
그리움이라는 색깔로 반응하는 목소리,
부스 안은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수화기는 왼쪽 어깨로 넘겨져 데워지고
불러낸 이름을 유리창에 적어본다
글씨도 뿌리를 내리는지 흘러내리는 획마다
생장점이 먼지로 뭉친다
바지에 묻은 톱밥은 발아중이고
뒷주머니에 삐죽 붉은 목장갑도 피었다
안개에 젖고 밤바람에 흔들려 후둑,
스포이드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나뭇잎
가을은 그렇게 한 가지 색으로 반응해 물들어간다
사내는 하늘을 봉숭아꽃처럼 물들이고 싶다
꽁꽁 묶어 보낸 소포를 풀 즈음이면
첫눈이 내릴 것이다
슈퍼 간판불도 꺼져버린 자정 무렵,
사내의 머리와 어깨 실루엣이
공중전화부스 불빛에 흠뻑 젖는다
아득히 먼 곳에서도 색이 뚜렷하다
- 리트머스, 문학동네, 2006
시의 맛 [김안녕]
장독대 속 묵은 김치를 죽죽 찢어 빨아 본다
여물어 터질 것 같은 여름이 섰는 포도원의 알을 깨물어 본다
봉숭아 물들인 손톱
그 안에 갇혀 있는 달 한 조각을
새벽 다섯 시 아직 깨지 않은 하늘을
야윈 그림자 비친 우물물 한 모금을
들이켜 본다
어떤 암흑 속에서도
결코 신으로부터 구원받지 않겠어,
그걸 유일한 자부심으로 삼는 시인들이
우주 밥상에 그득하다
- 사랑의 근력, 걷는사람, 2021
이십 년 [여태천]
거기, 윤곽도 색깔도 없던
거기에 내가 있었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때 당신은
촘촘히 적힌, 계절이 한참 지난 우편엽서를
다시 읽고 있었지.
하지만 눈은
눈은 내리지 않았지.
어쨌거나, 머리 위의 별은 만족스러운 듯 반짝였고
우리의 얇은 두 어깨가 으쓱하도록
봉숭아의 빛은 오래도록
선명했네.
나는 오직
해변의 빈집처럼 조용히
말할 수밖에 없었지.
감겨오는 눈을 비비며
저 어둠이 나를 완벽하게 지울 때까지는
그때까지는 점점 자랄 거라고
당신과 나란히
파도처럼 쓰러지고 싶었던
거기, 날짜변경선 위에
여전히, 거기에, 우리는
- 제26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2011
근황 2 [김지은]
비스듬히 걸린 낮달이
텅 빈 허공 한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끝을 모르고 달리는 속력은
어느덧 정월 끝자락을 닫는다
한뎃잠 자는 상현달은
갯돌이 마모되도록 슬픔을 완성한다
야윈 살점을 떼어
침몰하는 저녁을 게워내는 달
향기로운 울음을 토해낸다
오래 참았던 꽃밭이 죽음보다 감미롭다
달맞이꽃은 상처 속에서 돋아나고
캄캄한 이별 뒤에는 봉숭아꽃 얼굴 내민다
- 몽상의 저녁, 전망, 2019
가을 별자리 [육근상]
단풍나무는 벌겋게 취해 흥청거리고
손가락 닮은 이파리들이 오를 대로 올라
색(色)기 부리고 있네
살짝 일렁이는 물바람에
목젖 다 드러내며 자지러지는 딸아이
봉숭아빛 입술 뜨거워지고 종아리 굵어졌으니
품에서 내려놓아야 할 때
겨울 나려면 좀 더 비워둬야지
노을빛 눈부시게 부서지며 낡은 흙집 감싸 쥐면
뜨겁던 여름도 까맣게 익은 산초 씨로 떨어지는가
돌아가리라
삭정이 같은 노모 시래깃국 끓이고
삶이 무성했던 아버지도 허리 굽어
텃밭에 쌓인 고춧대 태우며 붉어지고 있을 것이니
돌아가 북창 열고 가을 별자리 하나 마련하여
안부 들어보리라
- 절창, 솔, 2013
여적餘滴 [이기철]
나무는 제 몸속 어디에 진홍을 숨겨두었다가
봄이면 한꺼번에 저 많은 꽃송일 터뜨리는 걸까
가난은 숭고한 것
들꽃이 백 년 동안 한 벌 옷만 입고 나오는 것
산을 사랑하는 것은
벼랑 끝 바위를 끌어안은 한 그루 소나무다
새의 지혜는 나무 위의 가장 고요한 곳에 둥지를 트는 것
도랑물이 끈을 풀어 두 마을을 하나로 묶어놓았다
그것이 천 년을 떠나지 않는 마을의 이유
봉숭아꽃에 잠든 나비, 그 백 년의 고요
음악의 출생지는 추녀 끝에 듣는 빗방울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산 이름 강 이름 지어놓고 떠난 사람들은
나는 신을 생각하며 시를 쓴 일은 한 번도 없다
다만 고뇌하며 사는 인간을 생각하며 시를 쓴다
내 꿈은 비애에게 아름다운 이름 하날 지어주는 일
익은 열매를 터뜨리면 한 해가 쏟아진다
손에 닿은 흑요석
사람에게는 출생이 있고 나무에게는 발아가 있다
꽃이 웃음소리를 낸다면 나는 꽃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이 걸어올 때 전율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노래를 만든 사람
침묵에게 색동옷을 입혀주고 싶은 사람
나뭇잎이 땅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지상에서의 영원이다
낮달은 누가 쓰고 버린 티슈조각
손때 묻은 16절지 백지 한 장
달밤에는 강물의 키가 큰다
마을이 강의 젖 빠는 소리
내 발이 도달한 곳은 유한, 내 정신이 도달한 곳은 무한
누가 제 마음을 길어 새 이름 꽃 이름을 지어놓았을까
내 시는 그 이름을 종이 위에 옮기는 일
내가 한 번 시에 쓰고 버린 말들이
언젠가는 나에게 복수하러 올 것이다
- 산산수수화화초초山山水水花花草草,서정시학, 2019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 [함동선]
또랑물에 잠긴 달이 뒤돌아볼 때마다 더 빨리 쫓아오는 것처럼
얼결에 떠난 고향이 근 삼십년이 되었습니다 잠깐 일게다 이 살림
두구 어딜 가겠니 네들이나 휑하니 다녀오너라 마구 내몰다 시피
등을 떠미시며 하시던 말씀이 노을에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창가에
초저녁 달빛으로 비칩니다 오늘도 해동갑했으니 또 하루가 가는가
언뜻언뜻 떨어뜨린 기억의 비늘들이 어릴 적 봉숭아 물이 빠져 누
렇게 바랜 손가락 사이로 그늘졌다 밝아졌다 그러는 고향 집으로
가게 합니다 신작로에는 옛날처럼 달맞이꽃이 와악 울고 싶도록 피
어 있었습니다 길 잃은 고추잠자리가 한 마리 무릎을 접고 앉았다
가 이내 별들이 묻어올 만큼 높이 치솟았습니다 그러다가 면사무소
쪽으로 기어가는 길을 따라 자동차가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고 동구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온 마을 개가 짖는 소리에 대문을 두들겼습니
다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손이 안 닿은 곳 없고 손 닿은
곳마다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습니
까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 함동선시선집, 황금알, 2010
별내 옆 갈매*로 옮겨 가기 [김은경]
볕이 좋은 날이다
이불을 빨고
공터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까무룩 잠을 자다 일어나
식은 죽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은
머지않은 미래엔 주정뱅이 사내를 피해
도박을 일삼는 남편을 피해
여자들끼리 모여 사는 집을 하나 장만해야지
배신을 모르는 안개꽃을 사야지
코코넛향 세숫비누를 사고
흰 머리는 그냥 두어도 괜찮지
부지런히 분갈이를 하고
쌀독에 쌀을 채우고
손톱으로 벌레를 짓이기는 대신 단추를 돌려
가만히 라디오를 켜야지
김광석이 오고
퀸과 이글스가 오고
어떤 새는 죽고
어떤 개로부터 새끼는 태어나고
궁금했던 사람의 목소리를 간신히 떠올리는 동안
저녁이 바투 오겠지
일몰이 올 때 봉숭아꽃 발그레한 낯빛이 좋아
모르는 데로 열차가 떠나듯 찻물 끓는 소리가 좋아
집으로 향하는 자전거 바퀴 소리가 좋아
숨소리를 죽이고 사뿐사뿐 지나가는
공룡 모양 구름도
애끓는 시간은 찻잔 바닥에 가라앉고
한 모금 두 모금
한 계절 두 계절
한 사람 두 사람
한 잎 두 잎
죽음은 그렇게
별내 옆 갈매로 옮겨 가듯,
* 별내동, 갈매동 : 남양주와 구리 경계에 이웃한 동네
-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 실천문학사, 2018
숨은 빛 - 봉숭이물 [유종인]
아내는 새로 산 샌들을 내려다보며
잠시 지하철을 잊는다
엄지발톱에 무슨 색 매니큐어를 칠할까, 고민한다
고민은
갖은 빛깔, 여러 얼굴의 마음 속으로
들락거렸다
초여름, 폐가 마당 막 자란 봉숭아들
순식간에 진분홍 꽃들을 달고 전철처럼
달려왔다
흰색 봉숭아꽃도 있어요, 아내는
희귀종 봉숭아꽃을 따 발톱에 물들일까
내 손끝을 가만히 건드렸다
툭, 터지는 생각 속에서
아내는 禪師선사처럼 뒷말을 잇는다
"흰색 봉숭아를 물들여도 손톱엔 진분홍 꽃빛이 난대요."
순간, 전철이 달려왔다 한낮의 어둠이
소리 지른다 소리의 흰빛이
순식간에 푸르게 스쳤다
더 이상 나를 물들이지 마라
나를 지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
제 빛깔부터 아예 잊어버린다
- 아껴 먹는 슬픔, 문학과지성사, 2004
술래의 노래 [손택수]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 마당 구석구석을 쑤시고 있었다
혼자라는 게 영 마땅치 않았지만
술래가 된 게 마냥 싫지만도 않아서,
평소에 거들떠도 보도 않던 장롱 속과 정지와 헛간을
찬찬히 뜯어보는 재미로 해가 지는 줄 몰랐다
마당귀에 핀 봉숭아와 꽃속에 파묻힌 개미들,
구름 속에 숨은 낮달까지 꼭꼭 숨어라
그런 어느 날 나는 보지 못할 것을 보고 말았다
병풍 뒤에 숨은 할아버지
관뚜껑 속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아마도 그 이후부터인가 보다
내 놀이는 여전히 끝이 나질 않아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사람들 머리카락
끝이라도 보일까
무심히 지나치던 풀잎도 다시 보고
마냥 심드렁해진 길섶도 두근두근
되짚어보곤 하는 것이다
- 애지, 2013년 가을호
낮잠 [하상만]
초등학교 때 낮잠을 자고 일어나
책가방을 쌌다
3층 계단을 내려와 길에 섰을 때
아이들은 놀고 있었다
누나는 킥킥거리며 어딜 가냐고 물었다
누군가 속을 한 삽 퍼간 거 같았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쓸쓸하거나 씁쓸한 그런 쪽에
가까운 구덩이가 생겼다
산길 집들은 모두 한 삽씩 퍼간
구덩이 속에 있었다
배가 고파 들른 집에는
손님이 끊긴 지 오래라고 했다
한 삽 퍼간
구덩이 속으로 술을 부었다
손톱엔 봉숭아 물 빠지고
기다리던 눈은 오지 않았다
한 삽 더 퍼간 구덩이 속에서 잠이 들었다
공부 못하고 말썽 많던 아이들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
그때처럼 누나는 킥킥거리며
어딜 가냐고 물었다
깜깜한 속에서 깨어났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이
구덩이 속에 있었다
학교에 간다고 말문을 열었지만
모두 어눌하여서
아무도 듣지 못했다
- 간장, 실천문학사, 2011
이사 [박상수]
책장 사이 말라버린 꽃잎 떨어질 때, 침대 밑 구겨진 폴라로이드 집어 들 때, 미처 떠나지 못한 것, 당신 여기 있습니까?
더운 바람이 종아리 곁을 맴돈다 겨울 카펫 들어내자 풍장을 끝내지 못한 계절의 잔해
善人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의 섭리로 다스려지는 공기, 그의 섭리로 다스려지는 내 조그만 화단에는 가볍게 흔들리는 봉숭아, 신열에 들뜬 얼굴로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돌아보면 짓이겨진 열매, 편지함 가득 들어 있고
용서를 바라며 현관에 서서, 당신 여기 있습니까? 찢어진 벽지 뒤에, 텅 빈 화분 속에, 당신 여기 있습니까? 검은 상자의 창문에
못이 박힐 때, 깨어나지 못한 벌레가 꿈꾸는 이 덧없는 잠의 깊이.
- 후르츠 캔디 버스, 천년의 시작, 2006
우리집에 왜 왔니 [이시하]
어둠을 파고 시궁쥐 눈깔 같은 봉숭아 씨앗을 심을래요 모르는 집 창문에 애절히 피어나 모르는 그들을 울게 할래요 봉숭앗빛 뺨을 가진 어린 손톱에 고운 핏물을 묻힐래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서둘러야 해요 나를 통과해 가는 그대의 눈을 볼래요 너무 오래 견딘 상처는 아물지 않아요 몹시 처량해진 나는 모르는 집 창문 밑에서 울 거예요 당신을 부르며 울 때 사람들은 어두워져요
문이 닫혀요
이렇게 부질없는 이야기는 처음 해봐요 나는 늘 술래이고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해요 가위바위보가 문제에요 나는 주먹만 쥐고 있거든요 아무도 내게 악수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요 당신도 곧잘 숨는다는 걸 알아요 이제는 내가 숨을래요 꽃 피지 않는 계절에 오래도록 갇혀있을 거예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봉숭아꽃이 만발했어요 보세요 정말 내가 모르는 집이에요 창문 밑에 피어난 저 붉은 봉숭아! 무슨 꽃은 봉숭아꽃이어야 해요 당신은 봉숭아꽃을 찾으러 온 거예요 나는, 나는 꽃 피지 않을 거예요
아무도 찾지 못해요 문은 열리지 않아요
- 나쁜 시집, 천년의시작, 2010
봉숭아와 나만의 저녁 [이기철]
손으로 햇빛을 받아놓고
손으로 모데미풀을 일으켜 세우고,
소중히 돌을 돌 곁에 앉히고,
소중히 네 이름을 책 속에 쓰고,
바람은 동풍인지 서풍인지 알지 못해 그냥 바람,
파랑치가 늘어 가는 하루를 소중히 씻어 놓고,
화분에 물을 주고,
날아간 새의 이름을 불러보고,
그때 틀림없이 새의 깃이 햇빛처럼 빛났다.
깨끗이 모종삽을 씻어 놓고,
실밥 같은 그믐달을 나무둥치에 매어 놓고,
깨어지지 않게,
고요 속에 손을 집어넣어,
침묵의 덩어리를 건져 냈다.
백지 같은 맨발을 흰 수건으로 닦는,
봉숭아와 나만의 저녁.
- 흰 꽃 만지는 시간, 민음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