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구(朱九)는 금릉 교외에 자리한 백정(白丁) 마을에 사는 백정이다.
천민 중에서도 상천민인 백정 주제에 성을 지니게 된 것은 그의 출생에 얽힌 확인되지 않은 낭설 덕분이다.
주구의 어미는 백정의 딸이었다. 당연히 성같은 건 없었다.
헌데 천하디 천한 백정의 딸에게서 난 주구가 성을, 그것도 국성(國姓)인 주(朱)씨를 갖게 된 데는 원(元), 명(明) 교체기의 격변과 관계가 있다.
주원장이 아직 홍건적의 수괴에 불과했을 무렵, 당시에는 집경로(集慶路)라 불리던 금릉을 차지한 후 수하 장수들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었었다.
연회, 그것도 승전(勝戰)을 자축하는 자리에 여자가 빠질 수 없는 일이다. 금릉 근처의 반반한 여자들은 거의 전부 홍건적들의 그 연회에 불려갔다.
그때 불려간 여자들 중에 주구의 모친도 끼어있었다.
원래 백정 마을의 여자들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해서 일반인들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짐승이나 문둥병 환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게 백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통이고 또 홍건적이란 무리들이 대개는 천한 출신들이라 백정 마을의 여자들도 마다하질 않았다.
게다가 홍건적들의 연회에 불려간 주구의 모친은 운 좋게도 두목인 주원장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아직 어리고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데다가 살결이 특히 희어서 주원장의 눈에 띠었던 덕분이다.
그날 주구의 모친이 과연 주원장 한 사람의 시중만 들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연회에 불려간 여자들의 숫자가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에 여러 사내에게 희롱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거나 백정 마을로 돌아온 주구의 모친은 열달 후에 아들을 낳게 된다. 집안의 어른들은 그 아이가 같은 항렬의 형제들 중 아홉 번째로 태어났다고 해서 구(九)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헌데 아이의 어미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주원장의 씨라고 우겼고 이에 사람들은 농반 진반으로 그 아이에게 주씨 성을 붙여 주구(朱九)라 부르게 되었다.
주구의 어미는 그가 아직 어렸을 때 돌림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틈만 나면 아들에게 주원장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주입시켜주었다.
그러다 보니 주구도 자연스럽게 자신이 주원장의 아들이라고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이같은 사실을 탐탁치 않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과 근본이 다르다면서 은근히 과시하고 깔보는 놈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이런 이유로 주구는 어렸을 때부터 개밥의 도토리같은 신세였다. 따돌려지고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주구(朱九)라는 이름 대신 주구(走狗) 또는 허풍장이라는 의미의 주구(走口)라고도 불렸다.
주구에게 있어서 백정마을은 고향도 뭐도 아니었다. 현세의 지옥이고 반드시 빠져나가야만 하는 감옥이었다.
하지만 최하층의 천민인 백정에게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다. 관부의 허락없이 백정마을을 떠나면 엄벌에 처해진다. 노예나 종이 주인집에서 달아난 것과 같은 죄로 여겨져 심할 경우에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백정들이 백정 마을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오직 도살한 짐승의 고기를 배달할 때뿐이다.
주구의 단 한 가지 소원은 백정마을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황제의 아들인 자신이 천한 백정으로 일생을 보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황제의 아들로 대우받는 것까지도 바라지 않았다.
오직 백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주구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엄격한 대명률(大明律)에 의한 연좌(緣坐)의 죄를 두려워한 백정마을의 사람들이 늘 감시의 눈길을 주구에게서 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구에게는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고기 배달조차 시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연왕 주체가 조카인 건문제 주윤문에게 반기를 든 <정난의 사>가 일어났다.
세상은 크게 술렁거렸고 백정 마을에도 그 여파가 미쳤다. 아무리 백정마을이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라지만 천하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는 대혼란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주구가 백정마을을 빠져나갈 기회는 쉽사리 생기지 않았다. 전쟁은 시종 연왕 측의 고전으로 이어졌으며 그로 인해 전쟁터는 머나먼 북방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내전으로 세상이 어수선해지긴 했어도 황도가 자리한 금릉 일대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그러던 정세가 <정난의 사>가 사년째 접어들었을 때 일변했다. 연왕 측이 전격적인 기동전을 펼쳐 일거에 전선을 돌파, 금릉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금릉정권 측의 군세는 대부분 화북(華北) 지방에 배치되어 있었던 탓에 정작 금릉을 지킬 병력은 전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금릉은 허무하게 연왕 측의 군사들에게 함락당했으며 무차별적인 약탈과 파괴. 방화와 살육이 자행되었다.
자금산 아래의 장려한 황궁을 비롯하여 금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던 고관대작들의 저택이 밀어닥친 연왕 측의 군사들에게 약탈당하고 불질러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단과 보옥으로 몸을 치장하고 거들먹거리던 귀한 신분의 인간들이 숨어있던 집안에서 끌려나와 개 돼지처럼 도륙을 당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건문제의 치세에서 녹을 먹은 자와 그의 가족들은 씨몰살을 당했다.
사년여에 걸친 긴 내전이 군사들을 피에 굶주린 아귀로 만들어버린 결과였다.
그 혼란의 와중에 주구는 드디어 백정마을을 탈출할 수 있었다.
백정마을에도 언제 연왕 측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칼부림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모두들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던 터라 주구가 달아나는 것을 막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주구는 마침내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 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백정마을을 빠져나온 주구는 무작정 서쪽으로 달렸다. 낙양(洛陽)이나 장안(長安)같은 대처로 몸을 숨기면 아무도 자신이 백정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헌데 주구가 금릉을 빠져나온 후 사흘 째 되던 날이었다.
두두두!
지친 몸을 이끌고 합비(合肥)로 통하는 관도를 터덜터덜 걸어가던 주구의 뒤에서 갑자기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주구는 반사적으로 관도 옆의 풀숲으로 몸을 던졌다. 이 시기에 말을 타고 관도를 급하게 달릴 사람은 군사들 밖에 없다. 무단히 백정마을을 탈주한 주구로서는 관(官)과 관련이 있는 인간을 만나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다.
풀숲에 몸을 숨긴 주구가 겁에 질려 살펴보니 그가 걸어온 금릉 쪽에서 한 대의 마차가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두 필의 건마가 끄는 그 마차는 한눈에 보기에도 짐마차가 아니라 귀인(貴人)이 타고 다니는 마차였다.
마차의 앞뒤에는 십여기의 기마가 마차를 호위하며 달려오고 있다. 기사들은 모두 무기를 지녔으며 눈에는 핏발이 서있었다. 그들 중 일부가 부상을 당한 상태인 것으로 보아 쫓기고 있는 듯 했다.
두두두!
주구가 풀숲에 숨어 숨을 죽이고 보고 있는 사이에 마차와 십여기의 기마는 급격히 다가왔다.
헌데 바로 그때 주구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휘휙! 휙!
근처의 풀숲과 숲에서 메뚜기떼처럼 솟구치는 검은 그림자들!
관도의 좌우에서 수많은 사람 그림자들이 날아올라 마차와 기마대를 급습해갔다. 검은 옷을 입은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에서 번쩍이는 섬뜩한 백광과 핏발 선 눈들은 주구의 몸 속 피를 단번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연적(燕賊)의 개들이다!”
“비(妃)마마를 사수하라!”
차차창! 창!
마차를 호위하며 달리던 기사들의 입에서 악에 바친 외침이 터지고 그들의 무기도 하얀 섬광을 뿜어내며 칼집을 빠져나왔다.
카카캉! 카캉! 서걱! 쩍!
기사들과 검은 옷의 습격자들이 뒤엉키면서 무기가 부딪히는 금속성과 살이 베어지는 섬뜩한 소리들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크악!”
“컥!”
수십마디의 목을 쥐어짜서 토해내는 비명이 뒤를 잇는다.
후두둑! 퍼퍽!
시뻘건 피가 먹장구름이 낀 하늘을 배경으로 흩뿌려지고 잘려진 팔 다리와 갈라진 몸뚱이들이 관도와 그 주변으로 나뒹굴었다.
죽임을 당한 자들은 대부분 습격자들이었다.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하나같이 범같고 사자같아서 습격자들은 그들의 상대가 안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습격자들의 숫자가 워낙 많았던 때문에 기사들 중 몇몇도 부상을 입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낙마한 기사들 중 비명을 지르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바닥에 나뒹굴었던 그들은 벌겋게 달군 철판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튀어 일어나 다시 습격자들에게 덤벼들었다.
두두두!
그 사이에 일파(一波)의 공격에서 빠져나온 마차는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다.
마차를 모는 마부의 눈에 핏발이 서있고 그가 휘두르는 채찍에 말들은 거품을 물며 필사적으로 달려간다.
“가라 형제들!”
“뒤는 우리가 끊는다!”
“비마마! 존체보중하소서!”
낙마한 기사들이 마차를 따라붙으려는 습격자들을 공격하며 악을 쓴다.
다시 칼과 칼이 섞이고 비명과 피분수가 뒤를 잇는다.
습격자들 중 십여명이 또 거꾸러졌으나 부상을 입었던 기사들 역시 풀 베는 낫에 베어진 잡초처럼 허무하게 쓰러졌다.
“독한 놈들!”
“놓치지 마라!”
막아서던 기사들을 몰살시킨 습격자들이 동료와 기사들의 시체를 날아넘어 마차를 추격해간다.
대여섯 기로 줄어든 기마에 호위된 마차는 어느덧 수십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헌데 습격자들이 시체들을 날아넘을 때 아직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은 기사 중 한 명이 품에 품고 있던 단지에서 삐져나온 심지를 잡아 뽑았다.
펑!
순간 단지가 강력한 섬광과 함께 폭발하며 시체를 날아넘던 습격자들을 간단히 흩날려 버렸다.
“크악!”
“케엑!”
매케한 화약 냄새와 지축이 흔들리는 진동 속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난무한다.
후두둑! 퍼퍽!
으깨진 인육의 파편이 풀숲에 숨어있는 주구의 근처에까지 마구 떨어져 그의 온몸을 오그라들게 만든다.
“먼저 저승에 가서 기다려라 형제들! 우리도 곧 뒤따라가겠다!”
“형제들의 거룩한 희생은 공신부(功臣簿)에 기록되어 만세(萬歲)에 전해질 것이다!”
마차를 호위하며 달려가는 기사들은 뒤에서 벌어진 동료들의 장렬한 최후를 돌아보며 피눈물을 뿌렸다.
하지만 그 직후 기사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달려가는 그들의 앞쪽 관도 중앙에 한 명의 중이 서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나이는 오십 정도, 작달막한 체구인데다가 머리통이 유달리 커서 몸의 절반 정도가 머리로 보이는 기이한 생김새의 중이었다.
“요승(妖僧) 도연(道然)!”
“연적의 꾀주머니가 직접 나섰구나!”
“저 요물을 죽여라!”
두두두!
중년의 중을 발견한 기사들은 분격하여 악을 쓰며 돌진해갔다.
도연이란 법명을 지닌 그 대두(大頭)의 중년 승려야말로 사년여를 끌어온 <정난의 사>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소주(蘇州)의 의생(醫生) 집안 출신인 도연은 열네살 때 불문에 뜻을 두고 출가하였으나 불경 외에도 유학, 병법, 음양술을 깊이 배웠으며 시문과 서화에도 능한 걸물이었다.
도연은 처음 연왕 주체를 만났을 때 <왕(王)께 흰(白) 모자를 씌워드리겠습니다!> 라고 거침없이 장담을 하여 연왕 주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임금 왕자에 흰 백자를 얹으면 <황(皇)>이 되니 곧 연왕을 황제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도연은 권모와 술수를 다해서 제국 동북방의 모든 세력을 연왕 주체의 휘하로 끌어들였으며 마침내 <정난의 사>를 일으켜 연왕 주체에게 흰 모자를 씌워주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게 된다.
놀랍게도 바로 그 도연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 마차의 행렬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죽여라!”
“요물! 천벌을 받아라!”
두두두!
도연의 외모가 워낙 특이한 지라 한 눈에 그를 알아본 기사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도연에게 돌진해갔다.
헌데 기사들이 도연의 사오장 앞으로 육박해갔을 때였다. 관도 좌우의 풀숲에서 수십명의 궁수(弓手)들이 벌떡 일어나며 일제히 강궁의 시위를 날렸다.
쉬쉬쉭!
수십발의 강전이 기사들과 마차를 향해 날아들었다.
본래 기사들은 하나같이 절정의 무공을 지닌 고수들이라 화살 정도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연의 얘기치 못한 출현에 이성을 상실하여 매복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 바람에 좌우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막거나 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크악!”
“컥!”
히히힝! 히힝!
기사들이 토해내는 단말마의 비명과 말들의 애처로운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화살에 맞은 기사와 말들이 나뒹굴었고 마차를 끌던 마부와 두 필의 말 역시 여러 대의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가 되었다.
콰드드!
마차를 끌던 말들이 나뒹굴면서 마차가 전복하여 길가로 나뒹굴었다. 마부석에서 퉁겨져나간 마부의 몸뚱이가 헝겊 인형처럼 구겨져 관도 옆의 도랑에 쳐박혔다.
“아미타불!”
생존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도연은 불호를 외우며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합장을 하며 마차 안쪽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귀비마마! 모시러 왔습니다. 결례를 용서하소서!”
이어 도연은 옆으로 쓰러진 마차 위로 올라갔다. 지나치게 큰 머리와 왜소한 체구, 게다가 나이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차 위로 성큼 올라가는 그의 몸은 아주 가벼워 보인다. 그 가벼운 몸짓을 통해 도연이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덜컹!
마차 위로 올라간 도연은 마차의 문을 위로 들어 올려서 열었다.
하지만 그 직후 도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옆으로 쓰러진 마차의 내부는 상당히 넓고 안락하게 보인다. 그 화려한 마차 안에는 후덕한 인상을 지닌 중년여인이 쓰러져 있는데 비수로 스스로의 가슴을 찔러 자살을 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인의 풍만한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마차 안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속았도다!”
도연은 이를 부득 갈며 두 눈으로 살기를 뿜어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이 마차에는 만삭인 젊은 여자가 타고 있어야했다. 당연히 마차 안에 자살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중년여인은 도연이 노리던 목표가 아니다.
원래 건문제에게는 딸만 둘이 있을 뿐 아들은 없었다. 그러다가 후궁 중 한 명이 수태를 했는데 진맥을 해본 전의(典醫)들이 한결같이 아들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제위를 물려줄 후사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쁘고 안도한 건문제는 이(李)씨 성의 그 후궁을 단번에 내명부(內命婦)의 첫번째 품계인 귀비(貴妃)에 봉해주었다. 귀비는 황후의 바로 아래 지위이며 황제의 정실인 황후에게는 품계가 없다.
어쨌거나 연왕 측에서도 이귀비(李貴妃)가 회임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서 금릉의 황궁을 함락시켰을 때에도 이귀비의 종적을 가장 먼저 수배했었다. 설령 건문제를 죽이더라고 그의 씨가 살아있으면 끝끝내 우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귀비의 종적은 황궁 내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도연은 환관과 궁녀들을 심문해본 후에야 이귀비가 이미 며칠 전부터 황궁을 떠나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산을 기원하는 치성도 드릴 겸 숨 막히는 궁중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귀비의 요청을 건문제가 받아들여서 장강 건너의 현산(峴山)에 자리한 연화불사(蓮花佛寺)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도연은 자신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현산으로 달려갔지만 한 걸음 늦고 말았다. 금릉에 변고가 생긴 것을 안 이귀비가 수행한 위사(衛士)들과 유모를 대동하고 연화불사를 빠져나간 후였기 때문이다.
건문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이귀비에게 황궁을 경비하는 위사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 서른명을 붙여주었었다. 일당백의 능력을 지닌 그 위사들의 활약 덕분에 이귀비를 태운 마차는 겹겹이 쳐진 연왕측의 포위망을 거의 뚫을 뻔 했던 것이다.
헌데 도연이 수백명의 군사를 잃은 후에야 겨우 따라잡은 마차 안에는 이미 이귀비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스스로 심장을 찔러 자살한 마차 안의 중년여인은 이귀비의 유모였다. 그녀는 사로잡힐 경우 이귀비의 행적을 노출하게 될까 두려워 마차가 전복하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자살을 한 것이다.
“왔던 길을 되짚어 훑는다! 이 마차는 중도에 내린 이귀비를 빼돌리기 위한 미끼였다!”
휙!
도연은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수하들에게 외쳤다.
기사들이 과장되게 비마마를 외쳤던 것도 사실은 마차에 이귀비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후환을 없이 하기 위해서라도 주윤문의 핏줄은 반드시 근절해야만 한다!”
휘윅!
도연은 이를 부득 갈며 마차가 달려왔던 곳으로 몸을 날렸다. 지나치게 큰 머리를 지닌 그의 왜소한 몸이 이 순간 쏘아진 화살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존명!”
“왕사(王師)를 따르라!”
휘휙! 휙!
살아남은 군사들도 일제히 날아올라 도연의 뒤를 따라갔다.
이내 장래에는 역겨운 피비린내만 흐를 뿐 깊은 적막이 찾아왔다.
“휴우! 가... 갔구나!”
그제서야 주구는 벌벌 떨면서 숨어있던 풀숲에서 빠져나왔다. 비록 주구 자신도 수없이 많은 짐승들을 죽여온 백정이긴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니 오금이 저려온다.
“전.... 전란이 일어나면 인간의 목숨이 개 돼지만도 못해진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주구는 관도에 널브러져 있는 피아간의 시신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마차로 다가갔다. 다른 의도는 없었고 마차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서였다.
마차로 다가가 안쪽을 들여다보니 후덕한 인상을 지닌 중년여인이 가슴에 비수가 박힌 채 죽어있는 모습이 주구의 눈에 들어왔다.
“주인을 위해 한 목숨 희생했다는 건가?”
주구도 어찌 된 사정인지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중년여인은 주인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었을 것이다. 그토록 지극한 충성을 받은 주인이 누군지 모르지만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갸륵한 충신인데 묻어주고 갈 시간이 없는 게...!”
마차에서 내려오려던 주구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중년여인의 손목에 채워진 화려한 팔찌를 발견한 때문이다. 금으로 만들어진 테에 여러 가지 보석을 박아 만든 그 팔찌는 한 눈에 보기에도 귀한 물건이었다.
(저 팔찌 하나면 한 밑천 두둑히 되겠다.)
견물생심!
중년여인이 차고 있는 팔찌를 본 주구는 침을 삼키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주구는 백정 마을을 요행히 탈출하긴 했으나 먹고 살길이 막막하던 차였다. 중년여인이 차고 있는 팔찌를 팔면 그럴 듯한 가게를 하나 장만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관세음보살! 망자에게는 필요없는 재물이니 소인에게 보시하십시오.”
주구는 시체의 손목에서 팔찌를 벗겨내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시체의 느낌이 섬뜩하다. 그래도 직업이 백정이었던 탓에 주구는 거리낌 없이 시체의 팔목에서 팔찌를 벗겨낼 수 있었다.
“대신 명복을 빌어드립지요. 아무쪼록 극락왕생 하십시오!”
중년여인의 시신에서 팔찌를 챙긴 주구는 합장을 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크!)
주구는 기겁하여 마차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이 마차 근처에서 얼쩡거린 것이 발견되면 상대가 쫓기는 쪽이든 쫓는 쪽이든 경을 칠게 뻔하다.
마차에서 빠져나온 주구는 허겁지겁 관도 옆의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두두두!
그리고 주구가 몸을 숨긴 후 얼마 안되어 한 필의 말이 흙 먼지를 일으키며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 말 위에는 죽립을 깊이 눌러쓴 왜소한 체구의 인물이 타고 있었다.
“이랴!”
길가에 전도된 마차를 발견한 죽립인은 급히 고삐를 잡아채어 말이 멈추게 만들었다.
휘릭!
그리고는 한 마리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날아올라 마차 위로 내려서더니 쓰고 있던 죽립을 한손으로 쳐들며 마차 안쪽을 살폈다.
쳐들린 죽립 아래에서 드러난 것은 눈매가 아주 차가운 미녀였다.
청묘!
그녀는 바로 황궁 아래의 비밀통로에서 건문제를 시해했던 남옥의 후손 청묘였다.
“흥! 한발 늦었네! 복수의 쾌감에 너무 몰입하는 바람에 주윤문의 새끼를 밴 년을 여기서도 놓쳐버렸어!”
청묘는 이를 바득 갈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도 이 마차가 이귀비에게 피신할 시간을 주기 위한 미끼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청묘는 물론 이귀비가 현산에 자리한 연화불사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는 건문제를 죽이는 대로 현산으로 달려가 이귀비와 그녀의 뱃속에 든 주윤문의 핏줄을 함께 죽여 없앨 계획이었다.
하지만 철천지원수인 주원장의 손자 건문제에게 복수하는 쾌감에 심취하여 시간을 너무 끌고 말았다. 건문제는 청묘에게 정기를 모두 갈취당한 후 온몸의 살점이 도려내지는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다.
청묘가 원한 대로 이만번의 칼질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황제였던 그가 수백번이나 살점이 발라지는 능지처참(陵遲處斬)의 끔찍한 고문을 당한 끝에 최후를 마친 것이다.
청묘가 워낙 잔인하게 살점을 발라낸 때문에 건문제는 시신도 제대로 보전을 못했고 그로 인해 그의 죽음은 영원히 미궁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호호호! 어디로 숨든 내 복수를 피하지는 못 한다 이귀비!”
청묘는 깔깔 웃으며 다시 말의 등으로 날아올랐다.
“하늘 아래에서 주씨의 씨가 말려버려야 내 복수도 끝이 날 것이다!”
두두두!
청묘의 독기서린 교소는 다시 온 길로 달려가는 말발굽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고 즉독하고 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보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즐독하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감사!!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즐감
즐독 입니다
즐독하고 갑니다...
즐독요~~
오 시작이 방대한듯 합니다
즐독하구가요~
즐독했습니다
미궁에 빠진 건문제의 행방을 이런 식으로 처리했군요. 흥미만점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흥미 만땅의 글입니다. 빨리 책으로 봐야겄네요..
잘보았습니다
즐독하고 갑니다.
흥미진진하군요. 한번 보러가야겠습니다.
잘보고 갑니다.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ㅎㅎ 감사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감사합니다.잘보고갑니다.
감사
즐독...
재미있게 읽었네요
잘 봅니다.
그냥 봅니다.
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