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정이형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5. 23.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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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기행 정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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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0. 13:12조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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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친일파 처벌법 제정 앞장, ‘정이형’(1807~1956)
일제 때 만주에서 무장독립 투쟁을 벌이다 긴 세월 옥고(19년)을 치르고, 해방 뒤 친일파처벌법을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는 쌍공 정이형의 삶은 남편의 활동일지를 줄줄이 꿰는 강탄탄(87)씨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역사의 숨결을 얻었다. 서울 도봉구 번동에서 딸 정소강(46)씨와 사는 강씨에게는 남편 정이형과 산 30년 세월이 또렷이 간직돼 있다. 여기에 현대사연구가 이헌종(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씨, 강주환(78)·송남헌(78)씨 등 생전에 활동을 같이 했던 사람들의 기억이 정이형이란 인물을 복원해내고 있다.
정이형은 1897년 음력 9월 16일 평북 용천군 양화면 오송리에서 아버지 정표기와 어머니 수원 백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그의 반일성향은 유별났다. 한번은 누가 일본 나막신을 집으로 가져오자 도끼로 마구 패버렸다고 한다. 이런 ‘불 같은’ 성품은 1911년 계산사립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15살의 그를 항일전선으로 내몬다. 당시 독립운동단체인 서북학회 회원으로 군자금·군복 지원활동을 벌이던 형 원형의 뒤를 따라 서북학회 회원으로 가입한다.
일본 나막신 도끼로 패
23살 나던 해 정이형은 가족을 데리고 전남 장성 북하면 대지마을로 이주하게 된다. 그가 이곳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긴 것은 “일경의 감시와 추적을 피하고 또 조국의 독립을 종교적 초월의 힘을 통해 달성해볼 요량”으로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장성군 사람인 김계순 등과 만나 의기투합해서이다. 1920년 5월 그는 장성에서 임진왜란 때 항일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선비 강항선생의 16대 손인 강탄탄씨와 결혼한다. 강씨는 이때의 장성 생활을 낯선 사람들에게 식사 대접하는 일로 정신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달이면 2~3일 정도만 집에 머무는 남편이 5~10명의 사람들과 함께 집에 돌아와 밤늦도록 무엇인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저와 시어머니는 끼니가 모자라면 논에 나가 벼를 베고 나락을 찧어서 식사 대접을 한 게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강씨의 신혼생활은 불과 2년 남짓으로 끝났다. 1921년 음력 동짓달 일경에 체포돼 옥살이를 하다 이듬해 음력 3월 2일 풀려난 정이형은 장성에서 활동이 여의치 않자 그해 음력 9월 초여드레 형 원형의 장례 참석차 장성을 떠나 고향집에 갔다고 그해 11월 그 길로 만주로 떠난 것이다.
조병준·신팔균·전덕권·김평식 등 고향에서 활동을 같이했던 인연으로 이들이 소속돼 있던 민족주의계열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통일부에 들어간 그는 이후 만주항일무장투쟁사에서 빛나는 전과를 쌓는다.
1924년 제5중대장으로 전선에 나서기 시작한 정이형은 그해 3월 13일 대원 6명을 데리고 여해파출소를 습격해 일본순사 여럿을 사살하고, 25년 통의부 개편조직인 정의부의 부관 겸 제1·7중대장으로 부하 30여명과 함께 국내에 숨어들어 여산경찰관 출장소, 추목주재소, 옹암주재소 등을 습격해 일경 16명을 사살하는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조선공산주의 운동사> 김창순·김준엽 공저).
주재소 등 습격 일경 사살
1926년 5월 23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는 그의 활동내용을 짐작하게 한다. “경무당국에 도착된 정보에 의하면 평안북도 대안을 중심으로 활동중인 제1중대 제1소대장 정이형 이하 여러 부하들은 다수의 귀갑형 폭발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사월상순 이래 길림성 소동문 밖에 머물고 있으면서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 순사 홍건표 등에 대해 각각 사형선고를 한 후 불원간 폭살코저 계획중이므로 일본 경찰 관헌은 엄중 경계중이라하며...”
1926년 4월 5일 비밀결사체인 고려혁명단 결성 주도를 통해 정이형은 사상과 이론으로 무장한 전사로서 태어난다.
고려혁명당은 형평사의 이동구·송헌, 천도교 혁신파의 김봉국·현정경, 정의부의 양기택·오동진, 러시아의 한인 독립운동가 등 좌우세력이 그의 주도로 결집해 결성된 단체이다.
고려혁명당 결성 이끌어
이헌종씨는 “만주의 독립운동단체가 일제와 중국 관헌의 압력과 탄압, 그리고 내부분열과 파쟁으로 지리멸렬해가는 상황에서 단순히 민족독립이라는 목표만으로는 인민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얻기 힘들다는 것을 절감한 정이형이 인민대중의 해방과 민족의 독립을 동시에 추구하는 당을 조직함으로써 좌우 분열·대립을 지양하고 민족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평가했다.
좌우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그의 정치적 신념은 해방공간에서 김규식과 함께한 좌우합작운동에서도 일관되게 이어진다.
그러나 일제하 그의 ‘실험’은 1926~27년 조직원 대부분이 일경에 체포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는 식민지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치안유지법 위반 외에도 살인·방화죄 등이 추가된 죄목과 공판 내내 “일본놈의 재판은 인정할 수 없다”며 진술을 거부한 법정태도 결과였다.
남편의 투옥은 강탄탄씨에게도 똑같은 유형의 세월이었다. “나는 살아서 나올 가망이 없으니 개가하도록 하라”는 남편의 권유를 뿌리치고 독립운동가 가족이라면 일가 친척에게까지 ‘개처럼 취급되었던’그 시절, 삯바느질·빨래 등 허드렛일을 해가며 시댁식구는 몰론 친정식구를 봉양하면서 맏딸 문경씨를 이화여전에 보낸 강씨는 그의 그러한 꼿꼿한 삶으로 ‘참대’‘소나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이형은 해방을 대전형무소에서 맞았다. 27년 3월 11일 체포돼 정확히 18년 5개월 17일만인 45년 8월17일 출옥했기 때문이다. 해방되기 다섯달 전에는 두달밖에 살지 못한다는,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토굴속에 다섯달이나 갇히고도 그는 살아남아 해방을 맞는다.
해방되기 4~5년 전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투옥돼 정이형과 인연을 맺은 이후 쭉 활동을 같이한 강주환(78)씨는 “그는 항상 일본놈들은 절대로 망할 것이니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며 느긋하게 생활하라고 말했다”면서 “특히 그는 감옥생활을 하면서 해방이 되면 좌우가 틀림없이 싸울텐데 이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외쳤다”고 전했다.
출옥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7~8명의 강도가 정이형의 집에 침입했다가 그를 알아보고 “15번 양반이시다. 안 들어올 곳을 들어왔습니다. 정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줄행랑을 쳤다는 일화(강탄탄씨의 증언)는 그의 인품의 단면을 드러내 준다. 또한 해방되던 해 해산한 부인이, 끼니가 없을 만큼 적빈한 생활 속에서도 무수하게 널린 적산가옥을 접수해 사무실로 쓰라는 주위의 권유에 적산은 국가소유이고, 우리 민족의 것인데 왜 미군정에 허가를 받아야 하느냐고 거절했다는 강주환씨의 증언은 정이형의 강직한 성품을 집작케 한다. 감옥에서 사귄 공산주의자 김근과 함께 만든 8·15출옥혁명동지회는 해방 이후 최초의 좌우합작기구이자 그의 두 번째 정치적 실험이다.
이 단체의 기관지 <혁명> 창간호(46년 1월)에 김구·이승만·여운형·박헌영의 축사가 나란히 실렸다. 그가 이 책에 쓴 기고문 ‘민족조직화 운동에 대하여’는 이 단체의 성격과 그의 지향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좌익과 우익은 차의 양륜 같다. 정치상에 서로 감시하고 연구하여 우리 민족의 번영발전을 위하여 나간다면 그 얼마나 행복스런 일이랴...”
정이형의 좌우합작 노력은 8·15출옥혁명동지회가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좌우의 의견차이로 와해된 뒤 민족자주연맹 정치위원회 위원, 민주주의독립전선 상무위원 등 김규식의 중간파 조직을 거쳐 그를 수행해 남북협상에 참여하기까지 계속됐지만, 오늘날 정이형의 이름을 크게 남긴 것은 남조선과도입법 의원으로서의 활동내용이다.
남조선과도입법 의원은 미군정 당국에 의한 온건좌파와 온건우파 합작 추진 산물이다. “19년 동안의 투옥 경험과 만주 무장항일투쟁 경력을 통해 비교적 극우성향을 띠지 않은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의 전형”(송남헌씨 증언)이라는 점이 좌우합작위원회(위원장 김규식)의 인정을 받아 46년 관선 입법의원으로 추천받은 정이형은 그해 12월 30일 제6차 본회의원법 초안 제2회 독회과정에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간상배조사위원회’를 특별위원회의 하나로 설치할 것을 제안, 동의를 구함으로써 특별법 제정의 기틀을 마련한다.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간상배 정치조례는 특별히 중대한 문제이니만치 특별위원회를 구성, 속히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동의를 구합니다.”(남조선과도입법의원 속기록)
관선입법의원 추천받아
정이형의 동의 뒤 윤기섭·원세훈 의원의 동의를 거쳐 표결 끝에 친일파 처벌에 관한 특별위원회가 설치된다. 이어 이듬해 1월11일 정이형을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법 기초위원회가 구성됨으로써 바야흐로 민족사의 정기가 바로잡히는 듯했다.
그러나 특별법 초안이 상정되기 닷새 전 당시 경시청 제1경찰청 수사과장 이해진은 <자유신문>광고를 통해 “..평소 부랑생활하는 소위 인테리 기생충 등이...자기네가 해방을 전취한 것 같이 몰염치하게 애국자연하고 주책없이 넘나들어 친일파·민족반역자를 규정하다니...친일파·민족반역자 규정을 구실로 사리사욕 획책에 발호하는 증악한 기생충을 단호삼제하여....”라는 위협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이 사건은 조병옥 졍무부장의 사과 표명으로 일단락됐지만, 당시 일제경찰 8천명 중 5천명이 군정경찰에 배치됐다는 기록에서 나타나듯 친일경찰이 정치전면에 등장할 만큼 세력이 강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법의 통과를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군정 인준보류로 깨져
친일파 유형의 구체적 명시, 강력한 처벌 규정 등을 담은 이 초안은 상정되자마자 “조선말을 잘 모르는 학생·학부형은 왜 친일파로 규정하지 않았느냐”라는 등 보수우익 세력이 중심이 된 민선의원들의 ‘반대를 위한 질문공세’에 부닥치는가 하면 이승만이 이끄는 민족통일총본부는 임시정부 수립 뒤에 하자며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하는 등 보수우익들의 강한 반발을 산다.
결국 친일파 처벌법은 초안→수정안→재수정안→최종안을 거치는 동안 민족반역자·부역협력자에 대한 전체적 정의와 구체적 열거가 추상적 규정으로 대체되고, 처벌규정이 크게 낮춰지는 등 대폭 완화된 채 47년 7월2일 입법의원을 통과했다.
그러나 산고 끝에 태어난 이 법안은 곧 사산되는 운명을 맞는다. 일제하 반민족적 죄악을 가장 많이 저지른 집단으로 군정경찰의 중추를 이루고 있던 친일경찰들이 이들의 척결을 우선하고 있는 이 법안의 유야무야를 가장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경찰 규제조항을 수정할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종로경찰서장 김형진은 부하들을 집합시켜 놓고 이 법률을 없애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력이라도 쓸 수 있다고 위협했다. 이런 위협은 남한정부 수립 뒤 설치된 반민특위 위원에 대한 경찰습격으로 실제로 나타난다. 러치 미군정 장관은 입법의원에서 특별법 집행을 위해 ‘특별재판소 및 소송법’‘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 조사위원회법’을 상정하고 친일파 처리가 실현단계에 이르자 “친일파 문제는 조선 자신의 문제”라며 입법의원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자신의 말과는 달리 4개월 동안 인준을 해주지 않다가 1947년 11월 27일 입법의원에 인준 보류를 통지함으로써 친일파 특별법은 휴짓조각이 되고 만다.
남북협상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중간파의 정치적 입지가 사라져가던 48년 5·30 선거 때 무소속으로 마포을구에 출마해 낙선한 뒤 그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다.
정이형은 한평생을 바쳤던 좌우합작과 친일파 척결을 역사의 과제로 남긴 채 1956년 12월 15일 심장병으로 숨졌다. 죽은 뒤에야 그는 입법의원 활동 때부터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번꼴로 집을 드나들던 친일경찰의 감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출처] 정이형|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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