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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여행12 - 천교에서 여금호 호수 화경에 도착해 당나라 시인 백거이를 만나다!
10월 22일 庐山景区(여산경구) 버스를 타고 함파정과 여산박물관에 모택동 여산시사원을
구경후 여산회의구지와 미려별서를 보고 황룡담과 오룡담 폭포를 거쳐 대천지와
용수애 를 보고 어비정(御碑亭) 과 仙人洞(선인동) 을 지나 금수곡 (锦绣谷) 을 걷습니다.
시엔런둥 (仙人洞 선인동) 에서 시작해 티엔차오 (天桥 천교) 까지 1시간을 걸어
진셔우구 (锦绣谷景区 금수곡경구) 를 빠져나와 내려가니 도로가 나오고
바로.... 루친후(如琴湖 여금호) 큰 호수가 있는 화징 (花徑 화경 꽃길) 입니다.
여기 루친후(如琴湖 (여금호) 는 호수 모양이 거문고 처럼 생겼다고 해서
여금호(如琴湖) 라고 하는데... 1,641년에 만든 인공호수 라고 하니
그저 놀랄뿐입니다만...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부니 호수의 특징인가 봅니다?
호수 옆에 화징경구 (花經景区) 화경참(花經站 화경정류장) 안내판을 보고는 화경
(花徑 꽃길) 이라고 적힌 돌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왼쪽은 호수이고
오른쪽은 공원인데 문인 묵객들이 많이 찾았으니“화개산사영류시인(花開山寺 詠留詩人)”
이라고 “대림사에 꽃이 피고 시를 읊는다" 라는 싯귀로 유명한 곳입니다.
호수 가운데 구곡교 (九曲橋) 를 건너는 섬은 호심도 (湖心島 호수섬, 공작도(孔雀島) 이고
정자는 구금정(九琴亭) 이니 - 화경정(花徑亭) - 우측길 - 초당(草堂) 에 이릅니다.
호수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화경공원(花徑公園) 으로 내려가니...
날렵하게 생긴 정자가 보이는데 바로 화경정(花徑亭) 입니다.
화경정(花徑亭) 안에 중국 당대 유명시인 백거이(白居易) 친필 "화경(花徑)"
이란 글자가 씌여있는데... 주변에 자그만 기암괴석이 볼만합니다.
큰 바위에 붉은색 초서체 글씨로 시가 새겨져 있으니 바로 시인 백거이(白居易) 가
초당을 짓고 머물려 지었다는 시 “大林寺 桃花 (대림사 도화)” 입니다!
人間四月芳菲盡 山寺桃花始盛開 ( 인간사월방비진, 산사도화시성개 )
長恨春歸無覓處 不知轉入此中來 ( 장한춘귀무멱처, 부지전입차중래)
인간세상 사월엔 꽃들 모두 졌는데
산사의 복사꽃은 이제 막 한창일세
가버린 봄 찾을 길 없어 늘 한스러웠는데
이곳으로 옮겨온 줄 모르고 있었네
백거이는 4월에 여산의 고령진 서부(牯岭鎭西部) 에 있는 화징(花徑 화경) 을 찾아
갔는데.... 산 아래에서는 이미 복숭아 꽃이 지고 난 뒤였으나 산중에
대림사(大林寺) 로 올라가니 복숭아 꽃이 피고 있었다고 해서 시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더 내려가니 작은 연못이 보이고 한켠에 초가집이 있으니 바로 백거이초당
(白居易 草堂) 인데 초가 앞에는 실물 크기로 백거이 동상 이 세워져 있습니다만
초당 내부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점거하고 있어 좀 눈에 거슬리는데 白居易 草堂
(백거이 초당) 은 강주사마로 좌천된 백거이가 이곳 호수 옆에 초가 를 짓고 머물렀습니다.
백거이(白居易) 는 당나라 중기의 시인으로 작품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평이(流麗平易) 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했다는데 장한가(長恨歌) 와 “비파행(琵琶行)” 을 남겼습니다.
정자 앞에는 모택동이 친필로 쓴 비파행(琵琶行) 이 석각(石刻) 되어 있는데
백거이는 琵琶行(비파행) 을 지으며 序文(서문) 을 썼습니다. 원화 10년에 나는
구강군 사마로 좌천되었으니 다음해 가을 손님을 배웅하러
분포강 (湓浦江) 포구에 나갔다가 배 속에서 비파 타는 소리를 들었는데
쟁쟁(錚錚) 하게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니 전에 서울(京都) 에서 듣던 소리 였다.
그 사람을 찾아보니 원래 장안에서 노래하던 여자 였는데... 일찍이 유명한
穆(목), 曹(조) 두 선생에게서 비파를 배운 비파의 고수로
나이 들어 강남으로 내려와 장사꾼에게 시집가서는 의지하게 된 것이라 한다.
끝내 술상을 차리게 하고 몇곡 청해 들었는데 연주를 끝내고 참담해 졌으니... 젊고
예뻤을 시절엔 웃고 즐기기만 하다가 이제는 시골구석으로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나(백거이) 도 이 시골로 쫓겨 온지 2년, 스스로 편안하게 마음먹으려 했지만 오늘 밤 이
여인의 말에 끝내 감격해서 비로소 멀리 귀양살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긴 長句(장구)의 노래를 지어 이 여인에게 보낸다. 모두 612 字로 “琵琶行” 이라 부른다.
潯陽江頭 夜送客(심양강두 야송객), 楓葉萩花 秋瑟瑟(풍엽적화 추슬슬)
主人下馬 客在船(주인하마 객재선), 擧酒欲飮 無管絃(거주욕음 무관현)
醉不成歡 慘將別(취불성환 참장별), 別時茫茫 江浸月(별시망망 강침월)
심양강 나루에서 밤에 손님을 보낼 때, 단풍잎과 갈대꽃에 가을바람이 쓸쓸 했도다.
주인은 말에서 내리고 손님은 배를 탔으니, 술잔을 들어 마시려 해도 관현이 없었네.
취하여도 즐거움이 없어 참담히 이별하려 하니, 이별할 때 망망히 강에 달이 젖어 있네.
홀연히 물위에 비파성을 들으니, 주인은 돌아가기를 잊고, 객은 떠나지 않네.
소리를 찾아 은근히 묻기를 타는 사람이 누군가 하니, 비파소리 그치고 말이 늦어지네.
뱃머리를 돌리고 가까이 하여 보자고 하니, 술을 따르고 등을 돌려 다시 연회를 열었도다.
여러 번 부르고 또 불러서 나오기 시작했으니, 오히려 비파를 안고 얼굴을 반쯤 가렸네.
축을 돌리고 현을 조여 두세 번 소리를 내니, 곡조를 이루기 전에 먼저 정이 흐르도다.
현마다 억누르는 정이 있고, 소리에는 사념이 있어, 평생에 뜻을 얻지 못했음을 호소하듯.
아미를 떨어뜨리고 손가는 대로 맡겨 연이어 뜯으니, 마음속의 무한한 일들을 말해주는듯.
왼손가락으로 누르고 오른손으로 뜯고 퉁기니 예상곡을 타고 뒤에는 육요를 연주했네.
큰 줄은 소나기와 같이 조조하고, 작은 줄은 사사로이 말하듯이 절절했도다. 조조와 절절은
섞이어 뜯으니, 큰 구슬 작은 구슬이 옥쟁반에 떨어지는 듯 맑고 고운 꾀꼬리 소리가
꽃 아래에서 미끄러지듯, 그윽이 흐느끼는 샘물 흐름이 얼음 밑에서 떠내려가듯.
얼어붙은 샘물이 차고 걸리어 줄이 엉키어 끊어져 막히니 소리가 잠시 멎도다.
별도로 그윽한 시름이 있어 남모르는 한이 일어나니, 소리 없음이 소리 있음보다 낫도다.
은병이 갑자기 깨어져 술이 쏟아지고, 철기가 돌진하여 칼과 창이 부디 치는 듯하네.
곡이 끝남에 줄을 빼어 가운데를 그으니, 네 줄이 한꺼번에 소리를 내여 비단을 찢는 듯.
동쪽 배 서쪽 배에 고요히 말이 없으니, 오로지 강 가운데 가을 달이 희게 비추네.
생각에 잠겨있다 채를 거두어 줄 가운데 끼고 의상을 정돈하고 용모를 단정히 하였도다.
스스로 말하기를 “본시 경성의 여자로, 집은 하마릉 아래 있었습니다.
열 셋에 잘 배워 비파 타기를 성취하여, 이름이 교방 제일부에 속해 있었고,
곡이 끝나면 명수들이 감복함을 알았고, 화장하면 언제나 추랑의 질투를 받았답니다.
오릉 소년들은 머리를 싸매고 다투었으니, 한 곡조에 붉은 비단 수 없이 받았어요.
자개 박은 은빗을 박자맞춰 치느라고 깨어졌고, 핏빛 비단 치마는 술이 엎질러 더럽혔다오.
금년에 즐기고 웃고 다시 명년도 그러하여, 가을 달과 봄바람을 등한히 보냈지요.
동생은 군대 가버리고, 아이도 죽으니, 저녁이 가고 아침이 옴에 얼굴빛 시들었습니다.
문 앞은 쓸쓸하여 안장 얹은 말이 드물어지니 늙어서 시집가 장사꾼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상인은 이익을 중히 여기고 이별은 가볍게 생각하니 부량현으로 차를 사러 갔지요.
강어귀에 갔다 왔다 빈 배를 지키니, 배를 둘러싼 밝은 달에 강물은 차지요.
밤이 깊어 홀연히 소년 시절을 꿈꾸니, 꿈속에 울어 화장한 채 눈물이 붉게 흘러 내려요.”
나는 비파소리를 듣고 이미 탄식을 했고, 또 이 말을 듣고 거듭 목이 메네.
같이 이 하늘가에 떨어진 사람이니, 서로 만남에 어찌 예부터 아는 것을 피하랴?
나는 작년에 제경을 떠나, 귀양 와서 심양성에 병들어 누었네.
심양은 땅이 벽지요 음악이 없어, 해가 다가도 약기 소리를 듣지 못하네.
사는 곳이 이 분강에 가까워 땅이 낮고 습해서, 누런 갈대와 대숲이 집을 둘러싸고 자라네.
그 간에 아침저녁으로 무엇을 들었나? 두견의 피 매친 울음과 원숭이의 슬픈 소리뿐.
어찌 산중의 노래와 마을 사람의 피리소리조차 없겠는가. 조잡하여 듣기 힘들었네.
오늘 밤 그대의 비파성을 들으니, 신선의 음악을 들은 듯 귀가 잠시 밝아지네.
다시 앉아서 한 곡 탈 것을 사양하지 마오, 내 그대를 위하여 옮겨 비파 행을 지으리니.
나의 이 말에 감동한 듯 동안 서 있더니, 다시 앉아 줄을 퉁기니 줄이 급히 돌아가네.
처랑하기 그지없어 전에 소리와 같지 않으니, 모든 사람이 듣고 모두 소리를 죽여 울었네.
그 중에 누가 눈물을 가장 많이 흘렸던가? 강주 사마의 푸른 저고리가 흠뻑 젖었다오.
백거이(白居易) 는 당나라 시인으로 낙양 출생인데 이백(李白)이 죽은지 10년, 두보
(杜甫) 가 죽은지 2년후에 태어났으며 한유(韓愈)와 더불어‘이두한백(李杜韓白)’
으로 불리는데.... 5세때 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으며 800년 진사(進士) 에
급제하였고 황제의 친시(親試) 에 합격한후 “장한가(長恨歌)” 를 지었습니다.
그가 열여섯살에 지었다는 “부득고원초송별 (賦得高原草送別)”입니다.
무성한 초원의 풀들은/ 해마다 자라고 시드는데/ 들불도 다 태우지 못하고 봄바람 불어오면
다시 자라나네/ 초원의 풀은 오래된 길을 덮고 황폐한 오래된 성과 잇대어 있는데/
오늘도 떠나는 길손이 있어우거진 풀처럼 이별의 슬픔이 가득하네.
807년 한림학사가 되었으나 어머니를 여의고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는데 814년 태자 좌찬선태부에 임용
되었으나 이듬해 사회를 비판하는 시로 인해 주장(九江) 의 사마(司馬)로 좌천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인생에 대한 회의 와 문학에 대한 반성 을 거쳐 816년“비파행(琵琶行)”
을 지었으며 장안(長安)에 돌아오자 권력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하여 822년 자진해서 항저우자사(杭州刺史) 가 되었으니.....
시작(詩作) 은 계속되었고 쑤저우자사(蘇州刺史)를 거쳐 비서감(秘書監)에 임명됩니다.
829년 58세가 되던해 뤄양에서 시와 술과 거문고 를 삼우(三友)로 삼아‘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하는 나날을 보냈으며 원진 등 옛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뤄양 교외의 룽먼(龍門) 의 여러 절을 자주 찾았고
그 곳 향산사(香山寺) 를 보수 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울어집니다.
젊은날의 낭만주의적인 경향은 지적인 빛을 띠며 이상주의로 옮겨갔고 문학의 존재의의를
주장하며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다가 자기의 내면을 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개인에 비추어 인간의 생활자세를 추구하여 인생의 지혜를 표상하는 문학을 지향했습니다.
문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생활의식이나 감정이 뒷밤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으로
제재는 경험적이고 언어는 일상성을 띠며 발상은 심리의 자연에 따르고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유려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혔다고 합니다.
생존시에 이미 그의 시는 민중속에 파고들어 소치는 아이나 말몰이꾼들의 입 에 까지
오르내리고 배나 절의 기둥이나 벽에 써붙여지기도 하였으며 외국에 까지 영향을
미쳤고 그의 시는 우리나라에도 일찍부터 전해져 널리 애송되었으니 현존하는
작품수는 3,800여수 이고 그 중에 “비파행”“장한가”등은 불멸의 걸작이라고 합니다.
漢皇重色思傾國 御宇多年求不得 楊家有女初長成 養在深閨人未識
天生麗質難自棄 一朝選在君王側 回頭一笑百媚生 六宮粉黛無顔色〈初頭〉
(한황중색사경국 어우다년구부득 양가유녀초장성 양재심규인미식
천생여질난자기 일조선재군왕측 회두일소백미생 육궁분대무안색)
한의 황제는 미모를 중히 여겨 경국지색(傾國之色) 을 구하더니, 나라 다스린지
오래도록 얻지 못했네. 양씨 집에 딸이 있어 갓 장성했으나,
깊은 규중에서 자라 아무도 알지 못하더라. 하늘이 내린
아리따운 자태는 그대로 버려지지 못해, 하루아침에 뽑혀 임금 곁에 올랐더라.
고개 한 번 돌려 웃으면 백 가지 교태 나니, 육궁의 모든 미녀들 무색해지고 말았다네
장한가(長恨歌) 는 현종(玄宗) 과 양귀비(楊貴妃) 의 비련(悲戀) 에
관한 것이며 모두 4장이니 제1장은 권력의 정상에 있는 황제와 절세가인
양귀비의 만남과 양귀비에게 쏟는 현종의지극한 애정 등을 노래하였으며.....
제2장은 안녹산(安祿山) 의 난으로 몽진하는 길에 양귀비를 죽게한
뉘우침과 외로움 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황제의 모습을
그렸으며 제3장은 환도후 양귀비의 생각만으로 지새는 황제 를 묘사합니다.
제4장에서는 도사의 환술 (幻術) 로 양귀비의 영혼을 찾아 미래에서의
사랑의 맹세를 확인하게 되었으나 천상(天上) 과 인계(人界) 의
단절 때문에 살아 있는 한 되씹어야 할 뼈저린 한탄 이 길게 여운을 끕니다.
변화무쌍한 서사(敍事) 사이로 사랑의 기쁨, 외로움과 서정(敍情) 이 섬광처럼 번쩍이며
외길 사랑으로 탄식만 해야하는 현종이 새로이 창조되어 인간으로서의 사랑의 비중을
역력히 상징하는데 노래 형식도 칠언(七言) 이라 유창하고 아름다운 가락이 감겨들며
행마다 리듬이 박동하고 각운(脚韻) 을 바꾸어 가면서 장장 120행에 걸쳐 선율이 흐릅니다.
백거이 말고도 여기 여산을 찾은 문인 묵객은 무려 천여명에 달한다는데
그 중에서도 소동파 와 이백 에 도연명 이 유명하니 그들은 이 산을
유람하며 많은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 중에 소동파의 시 한수를 보자면....
橫看成岭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 횡간성영측성봉, 원근고저각부동 ~
또 도연명 이 유연히 바라 본 남산입니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20세기에는 장개석, 송미령, 모택동, 주은래, 송경령 도 여산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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