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 [조말선]
이 꽃바구니는 환대라는 이름이고 저 꽃바구니는 환영이라는 이름이어서 가격이 다르다고 했다 가장 아름다운 점은 장미가 레드에 기대 수국을 곁에 두고 작약이 자주를 피해 자주달개비를 멀리 둔 것이다 환대가 바구니 모양을 감추려는 것 같다 장미와 수국 사이의 공간을 발명한 플로리스트의 손가락이 길고 희지는 않았다 꽃 한 송이를 꽂으면 허공이 꽃을 감싸려고 일어섰다 꽃 두 송이를 꽂으면 공간 한 송이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환대가 꼼짝달싹할 수 있는 공간으로 촘촘해진다 완성작은 마흔몇 송이의 꽃 송이가 마흔 몇 개의 틈 사이에 꽉 끼어 있다 장미와 수국과 작약과 자주달개비가 이루어가는 것이 한 마디로 가능해진다 아무 것도 없음으로 이루어가는 것이 환대일 수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란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바구니가 무거운 것에 더 깜짝 놀라는 손목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을 들어올린다 두 손을 내밀지 않으면 맨 먼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질질 끌고 갈 수는 없다
-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문학동네, 2022
사는 기쁨 [황동규]
1
오디오 둘러메고 한강 남북으로 이사 다니며
개나 고양이 곁에 두지 않고
칠십대 중반까지 과히 외롭지 않게 살았으니
그간 소홀했던 옛 음악이나 몰아 들으며
결리는 허리엔 파스 붙이고
수박씨처럼 붉은 외로움 속에 박혀 살자,
라고 마음먹고
남은 삶을 달랠 수 있을까?
2
사는 건물을 바꾸지 않고는 바꿀 수 없는 바램이 있다.
40년 가까이 아파트만 몇 차례 옮겨 다니며
'나의 집'으로 가는 징검다리거니 생각했다.
마지막 디딤돌에서 발을 떼면
마련한 집의 담을 헐고
마당 절반엔 꽃을 심자.
야생화 밟지 마라 표지 세워논 현충원 산책길엔 도통 없는
노루귀 돌단풍 은방울꽃
그래, 몰운대(沒雲臺)에서 눈 크게 뜨고 만난 은방울꽃
카잔차키스 묘소에 열심히 살고 있던 부겐벨리아
루비보다 더 예쁜 루비들을 키우는 노박덩굴을 심자.
겨자씨 비유의 어머니 겨자도 찾아 심자.
나머지 반은 심지 않아도 제물에 이사 와 자리 잡는 풀과
민박 왔다 눌러앉은 이름 모를 꽃들에게 내주자.
개미와 메뚜기 그리고 호기심 많은 새들이 들르고
벌레들도 섞여 살겠지.
그래, 느낌 서로 주고받을 마당이 있고
귀 힘 아주 빠지기 전 오디오 볼륨 제대로 올려줄 집이 주어진다면!
오크통에 30년, 책장 구석에 30년, 세상 잊고 산 위스키 앞세워
와인과 막걸리와 칵테일을 모아 친구들을 불러
먼저 가버린 자들도 번호 살아 있으면 문자를 보내
파티를 열자. 바램은 아직 유효하다.
3
유효할까?
파티 다음 날, 종일 속도 마하 0으로 움지이는 텅 빈 맛이
몸에 버틸 힘을 줄까?
가을 들어 처음으로 은행잎이 비행 연습을 시작하는 저녁
동향한 창밖으로
건너편 언덕 아파트의 모든 창들이 일제히 황금향으로 피어난다.
대가(代價) 없이 자신을 태우는 황금의 절창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는
한 해 가운데 이 한때가 가장 마음에 든다.
'가장'이라는 말에는 지금까지라는 뜻이 숨어 있고
다음은 텅 빔?
조금 전 건물 입구에서
시들고 있는 꽃에게 안부를 물었다.
코끝에 맴돌자마자 사라지는 향기로
꽃은 답했다. 텅 빔?
바램의 속내가 가짐인가 텅 빔인가?
햇빛 스러지며 한 자락씩 황금에서 어둠으로 바뀌는 창들이
차례로 물음을 던진다.
4
그간 군(郡)에서 주차장 집어넣고
매점과 화장실 내고 길 펴고 넓혀
오르내리는 맛을 한껏 줄인 몰운대,
발걸음 멈추게 하던 제비꽃 달개비들 사라지고
숨었다 들키던 은방울꽃 자취 감추고
미끄러워 마음 잡아주던 바윗길은 보이지 않고
올라보면, 시야 가득 차오는 비닐하우스들
뜬구름도 뜨지 않고
아 '몰운대'에서 풀려난 몰운대!
그 언저리에 집 한 칸 마련해
강원도에서 차를 몰다 덜 살고 싶을 때면 슬그머니 들러
낮에는 대에 올라 다른 아무데도 눈 주지 않고
밤에는 모깃불 피워놓고 모기 침 쿡쿡 맞으며
답답함에서 풀려나리라던 긴 긴 꿈에서
이젠 새삼 놓여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는가?
영영 놓여나지 못하게 되었는가?
5
바위틈에 발톱 박고 서 있는 나무 다섯 그루
바로 뒤에 야트막한 초막
비어 있다.
그 뒤로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말없이 넓게 펼쳐진 물
물 건너 그림자 하나 없이 커다랗고 깨끗한 산.
원나라 화가 예찬(倪瓚)의 한없이 맑고 적적한 산수는
은둔 신호만 켜지면 모든 것 놔두고 들어가
신선인 듯 가볍게 거닐고 싶었던 곳.
오늘 그의 그림 다시 들여다보니
사람들도 짐승들도 그냥 들여다보기만 했을 뿐
멧새 하나 날지 않는다.
들어오려면 그림자도 놔두고 오라?
읽던 책 그대로 두고 휴대폰은 둔 데 잊어버리고
백주(白酒) 한 병 차고 들어가
물가에 뵈지 않게 숨겨논 배를 풀어 천천히 노를 저을까?
건너편을 겨냥했으나 산이 통째로 너무 크고 맑아
무심결에 조금 더 무심해져
느낌과 꿈을 부려놓고 그냥 떠돌까?
바람이 인다. 갑자기 구름 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여기저기 물기둥들이 솟아 상체를 흔들고
얼음처럼 투명한 해가 불타며 하늘 한가운데로 굴러 나온다.
바위에 발톱 박은 나무들이 불길처럼 너울대자
부리 날카론 새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몰려든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예찬이여, 아픔과 그리움을 부려놓는 게 신선의 길이라면
그 길에 한참 못 미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간간이 들리는 곳에서 말을 더듬는다.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 사는 기쁨, 문학과지성사, 2013
풀 만들기와 풀이 되기 [정진규]
풀 만들기, 풀이라고 쓸 줄 알기 풀이라고 그릴 줄 알기, 풀이라고 쓸 때마다 다
른 풀이 되게 하기 풀이라고 그릴 때마다 다른 풀이 되게 하기, 쇠뜨기와 달개비와
쑥들이 태어나게 하기 무엇보다 내가 애기똥풀꽃이 되어 애기똥풀로 노랗게 놀라기,
방법이 하나 있지 나는 먼저 눈덩이 하나를 굴린다 되도록 크고 둥근 우주를 만든다
재현에서 멀어지기 녹을 때까지 기다리기 무엇으로 점점 향하게 하는 속도와 모습
읽기 모든 순서가 탄로난다 눈덩이여, 녹는 우주여, 녹는 순서를 녹는 우주를 베낀다
그다음 베낀 순서를 거꾸로 따라가면 된다 내가 모든 사물의 소재가 된다 모든 사
물로 나를 만든다 만들기와 되기여, 눈덩이여!
- 시안, 이천십삼년 봄호
월내역 [손택수]
달 속에서 파도가 일렁인다. 동해남부선이 가끔씩 철로보다 더 가늘고 긴 여운을 남기며 지나가는 간이역. 지상에서 발톱을 다친 물새들이 하늘을 날고 있다. 역사 가까운 초등학교 쪽에선 풍금소리가 새어나오고, 풍금소리에 맞춰 개망초 달개비 참나리 고만고만한 꽃들이 하교길에 한눈을 팔며 놀고 있다. 돌담 위에선 고양이 수염처럼 빳빳한 햇살 아래 청어가 마른다. 선로보수 작업중 잠시 머무는 동안, 잠시 머물며 줄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생두부 한 모에 잔소주를 파는 민짜집을 생각하고, 낮게 수그린 처마와 처마가 이마를 맞대고 틈틈이 손을 꺼내어 더운 음식을 주고 받는 창문들을 생각한다. 고압선이 지직지직 달 속으로 들어간다. 어부의 집에서 나온 가느다란 길 하나가 낚싯줄처럼 팽팽하게 바다를 당긴다. 바다가 먼저 신호처럼 집어등을 밝히면 응답처럼 집들도 따라 연연히 불을 켜고 둥근 불빛들이 내밀하게 속삭이며 살을 섞는 바다. 밤이면 누군가 배를 띄우리라, 지쳐가는 뭇새들이라도 쉬어가라, 수평선 위에 흐르는 불빛 하나를 내다 걸리라, 그런 믿음은 모두 저 바다 때문이다. 항아리 속에 가득 차 출렁이는 바다 때문이다. 그래,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기차도 지금은 달의 인력을 어쩌지 못하고 저렇게 푸른 바다를 막막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달 속에서 풍금소리가 잦아든다. 물새들이 느려터진 기차를 따라오다 멀어져간다, 달빛 두 줄기만 남았다.
- 호랑이 발자국, 창작과비평사, 2004
월롱역 [김성대]
오래된 창고는 비밀스럽다
창고를 에워싼 갈대들이 수런거리고
꽃들은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
눈 뜨고 자는 달개비 앞을
발꿈치 들고 지나는 달빛
먼지 쌓인 비밀이 달빛에 살짝 드러난다
이따금 기차가 지나가면서
추억을 완행 연주하고
바람은 한소절씩 베어 넘긴다
언젠가는 비밀도 곰팡이 핀다
비밀을 지키려는 생각도
다시 들추길 바라는 마음도
언젠가는 곰팡이 핀다
타다 남은 양초처럼 뭉툭해진다
달을 희롱하듯
달이 꽃을 희롱하고 꽃이
달을 희롱하듯
한 시절 놀았으면 그뿐
창고에 걸린 달빛이 촛불처럼 떨린다
잠시 푸른곰팡이에 귀기 어리는 듯하지만
저 달에 단풍 들면
곧 기차도 뭉툭해질 것이다
- 사막 식당,창비, 2013
마천루 러브체인 [고형렬]
러브체인이 흔들리고 있었죠 당신들 생각엔
내 속눈썹 가까이 그림자가 지나가던
하오, 그 하루가 돌다리 물을 건너갈 때
오색의 구름을 유리창에 비춰주었죠
꿈은 가여운 여름 끝의 엽육을 뚫은 뒤
벌레들이 구멍을 지나가게 열어두고 있었죠
향일을 위해 한줌 흙을 얻는다 해도
마천루 정상은 구름 속에 가려지고 말지요
창을 열고 소리치는 아이의 작은 얼굴
하늘에 묻히는 달처럼 아스라한 기억 속에
보세요, 이곳엔 죽고 없잖아요 물가의 잎새들
절대 열리지 않는 창가에 살면서
달개비의 알파벳을 받아쓰는 눈과 혀의
미끄러운 연어나라 풀잎 지느러미들
환한 빛이 들어와요, 눈동자만 한 손바닥들
엽맥의 목소리와 또 여름내 간지러운 글의
의미가 파랗게 도금되면서 말이에요
당신들은 알고 있었죠, 쌓이지 않는 빛들이
나의 손바닥을 뚫고 떠나가 버렸음을
내가 상공의 바람처럼 물을 보냈다는 것을
그것이 말할 수 없는 언어라는 것을
지금도 허공을 열고 닫고 기억한다고 해요
러브체인의 빛은 그때부터 아팠다고 해요
이른 삭풍에 달개비들은 사라지고
러브체인은 마천루 창가에서 태양을 향했죠
-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창작과 비평, 2010
달개비꽃 [김춘수]
울고 가는 저 기러기는
알리라.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
울지 않는 저 콩새는 알리라.
누가 보냈을까.
한밤에 숨어서 앙금앙금
눈 뜨는
- 달개비꽃, 현대문학, 2004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이준관]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돌담 아래 떨어진 풋감을 줍는다.
풋감 속에도 푸른 안개는 자욱하리라.
풋감을 줍다가,
아침 반찬에 쓸 가지를 따는 손,
자줏빛 가지꽃 같은 손을 본다.
이제 막 주둥이를 쪼아대는, 풋사랑을 알게 된 닭이
달개비꽃의 볏을 달고 온다.
그러나,
둥지를 떠나 새가 날기엔, 안개에
젖은 날개가 너무 무겁다.
새야, 조금만 기다려라. 안개가 걷히면
네 사랑의 이마는 해에 닿으리라.
- 열손가락에 달을 달고, 문학과지성사.1992
겨우 존재하는 것들 [유하]
여기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쑥국 먹고 체해 죽은 귀신 울음의 쑥국새,
농약을 이기며 물위를 걸어가는 소금쟁이,
주인을 들에 방목하고 저 홀로 늙어가는 흑염소,
사향 냄새로 들풀을 물들이며 날아오는 사향제비나비,
빈 돼지우리 옆에 피어난 달개비꽃,
삶의 얇은 물결 위에 아슬아슬 떠 있는 것들,
그들이 그렇게 겨우 존재할 때까지, 난 뭘 했을까
바람이 멎을 때 감기는 눈과 비 맞은 사철나무의 중얼거림,
수염 난 옥수수의 너털웃음을 그들은 만졌을지 모른다
겨우 존재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달개비꽃 진저리치며 달빛을 털 때 열리는 티끌
우주의 문, 그 입구는 너무 투명하여
난 겨우 바라만 볼 뿐이다
아, 겨우 존재하는 슬픔,
보이지 않는 그 목숨들의 건반을
딩동딩동 두드릴 수만 있다면!
난 그들을 경배한다
- 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 1993